|
牧會者의 길
第五章 牧會者와 食口指導
第一節 牧會者의 指導姿勢
1. 목회자가 가져야 할 지도자세
1) 목회자는 눈물이 있어야 한다
하늘은 여러분들을 기반으로 해서 환경을 다시 변혁시켜야 할 책임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공직에 있는 통일교회 교인들은 눈물과 더불어 복귀의 심정을 가지고 모든 부처에서 이런 운동을 제시하여 국가 운동으로부터 세계 운동까지 전개하지 않고는 스스로 눈물 흘린 이 세계를 하늘나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자, 이젠 여러분이 알았다구요. 통일교회 사람, 진짜 식구가 어떤 식구냐 하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요, 진짜 책임자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눈물을 흘리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물로써 타락했으니 눈물로써 복귀하는 데는 자기를 중심삼고 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삼고 인류를 위해 공적인 눈물을 많이 흘려야 돼요. 그런 눈물을 많이 흘린 사람일수록 하늘의 심정권 내에 가깝다는 것은 인과법칙에 의해서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눈물의 출발을 어디서 했느냐? 개인으로부터 했으면 개인적인 눈물을 흘리고, 그 눈물의 승리의 터전을 통해서 가정적인 눈물로 발전되고, 가정적인 승리를 기준으로 해서 종족, 민족, 국가, 세계로 발전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예」 자, 지금까지는 이걸 생각 안 했다구요. 그렇지만 이제 말씀을 듣고 보니, 사실이 그랬으니 이제부터 나는 눈물과 더불어 하늘의 심정을 따르고 인류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겠다고 하는 사람은 손들어 봐요. 내리라구요. (94-324)
교회 책임자는 눈에서 눈물이 말라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정말 불쌍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교회 책임자입니다. 언제나 슬픔을 품고 다니는 사람이 교회 책임자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고 복귀섭리의 때를 생각하면 하나님이 불쌍하다고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어떤 일을 해 가지고 복귀의 길을 가야 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할 때, 내가 이렇기 때문에 이런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기가 막히고 목이 막히고 가슴이 터지는 슬픔을 느낄 때가 많다는 거예요. 졸도할 수 있는 정도의 느낌이 올 때가 많다는 거예요. 이런 심정이 없어 가지고는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일을 할 사람이 못 되는 것입니다. 동네 어디를 가다가 나쁜 것을 보게 되면 '지금은 내가 그냥 지나가지만 다음에 와 가지고 보자. 이 내 손으로 깨끗이 치워 놓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구요. (46-298)
여러분의 눈에서 눈물이 말라서는 안 됩니다. 책임자의 눈에서 눈물이 말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선생님에 대해서 바르게 알고, 진정으로 선생님을 생각한다면 눈에 눈물이 마를 수 있겠어요? 선생님은 고생할 사람이 아닙니다. 때를 잘못 만났고 이 민족이 책임을 못 해서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33-118)
여러분들 감사의 눈물을 흘려 봤어요? 감사해서 흘리는 눈물이 빗줄기같이 꼬리를 끊지 않고 흘러내려 가지고 자기 주위를 적셔 자기가 선 자리가 비가 왔다고 느낄 수 있을 만큼 통곡을 해야 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1988. 10. 3)
여기 모인 여러분들은 지방에 나가서 책임을 지고 움직이고 있으니만큼 언제나 이런 관점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자기도 모르게 외로움이 마음에 스며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그 외로움이 자기의 외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하시는 외로움이요, 천사세계가 당하는 외로움이요, 우리의 선조들이 당하는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마다 여러분들은 그 심정 속에 들어가 같이 눈물 흘려 줄 수 있어야 됩니다. (14-9)
여러분들 중에서 남 모르는 가운데 통곡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풀 뿌리를 붙들고 '하나님이여! 내 한을 풀어 주시옵소서', 혹은 바윗 돌을 붙들고 '너만은 알 것이다. 태초에 피조세계를 지으신 하나님의 소망을 알 것이며, 아담 해와가 타락했을 때의 하나님의 서러움을 알것이며, 그들을 타락시킨 천사가 하나님 앞에 어떠한 원수라는 것도 알것이다'라고 호소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14-10)
애국자는 민족을 위한 눈물이 먼저 앞서는 것입니다. 이걸 알아야 돼요. 알겠지요? 애국자는 그 백성을 바라볼 때 눈물이 앞서는 것입니다. 효자는 부모를 생각할 때 눈물이 어리는 것입니다. 부모를 위해 물건을 살 때, 눈물이 앞서 가지고 그 물건을 고르게 되면 아무리 악한 부모라도 그 효자 앞에서는 녹아나는 것입니다. 그런 거예요. 알겠어요? 부모의 사랑은 눈물을 따라가는 거예요. 그렇지요? 형제간의 진정한 사랑도 눈물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교역자로서 눈물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식구가 찾아 오걸랑 반가워 가지고 눈물이 앞서는 사연에 사무쳐 보라구요. 그러면 그 뜰 아래 사람의 흔적이 사라지나 보세요? 안 사라진다구요.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예요. 사랑을 가진 자는 눈물이 앞서는 겁니다. (50-317)
이 나라가 살길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거예요. 삼천만 민중이 대성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는 데서 돌아서는 겁니다. 통곡하기 전에는 살 도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통곡시키겠느냐? 우리가 땀을 흘리고 싸운 과거 역사가, 그 재료가 통곡시킬 수 있는 겁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때려서 쫓고, 별의별 짓 다 하고, 시켜 먹고 종살이시켰다 이겁니다. 때가 되거들랑 그 사실로 말미암아 삼천만 민족이 이 뜻을 받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열 사람이 어느 부락에 가서 고생했으면 열 사람이 지난날의 사연을 얘기할 거예요. 다 모여 가지고 '우리는 이 부락에서 과거에 이랬습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이렇게 추방하고, 누가 이렇게 몽둥이 찜질을 했고…' 가서 사실을 보고하게 될 때 그 부락민들이 통곡함으로 말미암아 거기서부터 회생의 길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155-330)
여러분의 눈에는 눈물이 말라 있습니다. 하늘 대해, 살아 있는 아버님을 모시고, 감정을 지닌 아버님을 모시고 효자 충신의 길을 걷는다는 여러분의 눈에 눈물이 말라 있습니다. 거 안돼요. (56-34)
여러분들이 그래요? 여러분들 교회가 그래요? 냉랭하고, 찬기가 서리고, 그저 말라 붙고…. 그거 안 된다 이거예요. 그런 것은 여러분 자신이 그래서 그래요. 그러면 책임자는 그 동네를 보면서 자기 반성을 해야 돼요. '아무개 동네야! 너는 복이 많은 동네냐, 화를 받을 동네냐?' 이러면서…. 여러분 자신의 심성은 여러분 자신이 잘 안다구요. '선생님이 가르쳐 준 도리를 중심삼고, 하늘의 천리의 도리를 중심삼고 사는 게 원칙인데, 내 자신이 그렇지 못하니 나를 의지하여 하늘의 도리를 찾겠다고 하는 너희들은 불쌍한 게 아니냐. 그래도 나를 채찍질해서 나와 너와 서로 서로가 훈련해 가지고 서로 가르치고 가르침 받으면서 하늘길을 찾아가야 할 공동의 노선을 찾아봐야 될 게 아니냐' 이런 일문일답식 기도를 해보라구요. 해봤어요? 이건 사람 오게 되면, '아이구 연보할 사람, 헌금 잘 할 사람 누군가. 나에게 도움될 사람 누군가' 절대 그런 생각하지 말라 이거예요.
옛날에 내가 부산에 순회를 갔었다구요. 선생님이 온다고 하니 젊은 사람들은 전부 달려와 가지고, 키가 큰 녀석들이…. 그런데 그들 뒤에 80난 할머니가 있었다구요. 나이 80난 할머니가 따라와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아이구, 나도 젊어서 선생님을 만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한탄하는 걸 내가 봤다구요. 식구들은 그 저녁에 선생님이 이야기도 해주고 그럴 줄 알았거든요. 그렇지만 얘기를 안 해줬다구요. 그 할머니 하나를 데리고 밤을 새웠다구. 전부 다 화제가…. 그런 마음,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거예요. 여러분의 마음이 그래야 돼요. (81-327)
여러분의 눈에는 눈물이 말랐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신앙길에 들어와 가지고 눈물 콧물 입물 3합수가 되어 국수발처럼 늘어져 가지고 흑흑 할 때, 헐떡헐떡하게까지 통곡을 해봐야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예」 그렇게 울면 입술이 다 붓습니다. 입안까지 다 부을 정도로 그렇게 비통한 눈물을 흘려 봐야 됩니다. (56-36)
2) 관심이 있어야 한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 인연맺어질 수 없고, 인연맺지 않는 것이 관계를 성립시킬 수 없다. (21-86)
오늘날 사람들은 사람에 대해서 너무나 무관심합니다. 횡적 관계에 있어서 횡적인 인연을 중심삼고 서로 존중하는 일이 적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에 대해서 귀찮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귀찮아지면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복귀섭리를 해 나오시는 데에는 우리 대한민국만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 30억 인류를 전부 다 필요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나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였습니다. 우리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모인 무리라 할진대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서 관심을 가지고 대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겉으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을 갖게 될 때 최고의 인연을 결실하는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이요,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도 최고의 관계를 맺는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아서 앞으로 식구가 어떠한 어려움이 있고, 어떠한 환경에 부딪쳐 고난을 당할 때에 서로서로 자기가 당한 것과 같은 심정으로 동정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누구보다도 앞장선다 할진대는 아무리 가을이 오고, 겨울과 같은 시련의 고비가 온다 할지라도 뚫고 나갈 수 있는 생명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생명력은 봄을 향하여 힘차게 남아져 새로운 세계의, 생명의 모체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느끼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25-291)
우리가 심령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마음을 관찰할 줄 알고, 상대의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 민감해야 되는 것입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어떤 집에 가서 개가 짖어도 이 집이 이 물건을 사줄지 안 사줄지 안다구요. 많이 하다 보면 사줄 사람의 표정이 어떻다는 통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 사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사게 할 수 있는 기준, 그런 능력도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을 많이 하면, 상대를 쓱 만나 그 얼굴을 보면 벌써 걱정이 있는지 대번에 안다구요. 무얼 보면 아느냐 하면 눈을 보고 입술을 보면 안다구요. 심각해질 때는 눈이 다르고 입이 달라진다구요. 그래요, 안 그래요? 좋아하게 되면 벌써 여기, 여기가 달라진다구요. 연구해 보라구요, 그런가 안 그런가. 웃으려고 할 때는 눈하고 입하고….
왜 그러냐 하면, 얼굴에는 움직이는 것이 둘밖에 없다구요. 마음의 표정이 있으면 반드시 동작하게 돼 있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이 말을 하면 좋아하는지 나빠하는지 대번에 안다는 거예요. 무얼 보고서 아느냐? 눈하고 입을 보고서 안다구요. 그걸 측정하게 되면 이 사람이 하하하 웃을 수 있는 도수가 얼마만큼 차 있다 하는 것을 안다는 거예요. 그 측정 방법을 캐치해 가지고, 여러분이 심령을 분석해 가지고 지도해 나가야 됩니다.
그러려면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관심이 없어 가지고 그걸 캐치할 수 있어요? 선생님은 누구와도 사흘만 같이 있으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캐치할 수 있다구요. 앉는 걸 봐도 힘들여 앉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을 대번에 전부 다 분석할 수 있다구요. 지금 그것이 전부 다 화제거리라구요. 내가 자기 문제를 다루고, 자기 문제를 생각해 주고, 자기 문제를 문제삼으면 그 사람은 자연히 나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하고 관심을 안 가질 수 없다구요. 그걸 연구해야 된다구요. (69-166)
식구(피전도자)를 대할 때는 관심과 애착을 갖고 재미있게 대하라. (23-249)
완전한 주체 앞에는 반드시 상대자가 나타난다. 이것이 진리이다. 어디에서나 배워라. 그런 사람은 지나가는 거지의 발걸음, 새의 울음 소리에서도 계시를 받는다. 생각하지 않고 관심 갖지 않으면 좋은 것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생각하고 관심을 가져서 좋은 것과 관계를 맺어라. (14-96)
3) 열의가 있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열의를 가진 사람을 동경하는 것입니다. 열의를 가지고 직행하려는 사람은 그 앞길에 모험이 가중되어 오더라도 그것을 타파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의가 없는 노력은 중단되기 쉬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진을 바라는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내 자체가 어떻게 영속적으로 전진을 지속시킬 수 있는 열의를 보급받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열의가 없으면 자극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열의가 없는 자극은 필요 없는 것입니다. 강한 자극이라는 것은 강한 열의에 의해 인연되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열의에 찬 환경, 열의에 찬 개체, 열의에 찬 상대를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완성된 인격, 무한한 인격을 추구하는 우리 인간에게는 무한한 열의가 없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무한한 인격을 추구하는 우리 자체를 두고 볼 때, 언제나 영속적으로 그 열의를 추구할 수 있는 자체가 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열의를 갖고 목적을 달성시키려 하는 내 자체가 되어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두 입장 중 어느 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는 완성된 인격을 추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36-98)
하나님을 추구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을 중심삼고 볼 때에 신앙길에는 반드시 모험이 뒤따릅니다. 그것은 환경과 더불어 이것을 해결지어야 할 싸움의 노정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길을 강한 신념을 갖고 간다면 그 신념에 비례되는 만큼 소모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때에 그 소모전을 극복해 내고도 남을 수 있는 열의가 없게 될 때는 그 환경에서 전진은 커녕 도리어 후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그러한 열의를 보급시킬 수 있는 힘이 자체 내에 있든가 아니면 상대적으로 그러한 모체가 되는 하나님과 인연을 맺어 그 열의를 보급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전진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언제나 그러한 열의에 사무칠 수 있는 자리에 계시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응당 하나님은 그러한 자리에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러한 자리에 있지 못한 인간을 그 길로 몰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요, 능치 못함이 없는 주체이시기 때문에 열의에 있어서도 주체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이 열의의 주체가 되어 계시다 하더라도 나 자체가 스스로 열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36-98)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열의를 보급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순수하기에 우리 자체도 순수해야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제3의 목적을 추구하게 될 때, 그 목적은 나와 더불어 영원한 인연으로 맺어지는 것을 우리는 절감해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삼각 관계에 있지만 내 안에 있을 수 있는 것이요, 나와 더불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체 내에 있는 그 목적의식을 얼마만큼 자각할 수 있느냐 하는 그 자각의 감도가 열의로 화하여 열의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을 유도 할 수 있는 도화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 자신이 무력하여 열의의 도화선이 되는 길이 없게 될 때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일치화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동맥이 있으면 하나의 정맥이 되어야 되고, 한 곳에서 주면 한곳에서 받아야 되며. 백을 주면 백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열의를 유발시킬 수 있는 그 동기는 무엇이냐? 순수해야 합니다. 사(邪)된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백이 들어오게 되면 백으로써 순수하게 반영시킬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또 그 열의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발생하느냐? 순수한 것을 터전으로 해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 순수한 터전을 중심삼아 가지고 열의를 얼마나 추구하느냐, 얼마나 필요로 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발생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얼마나 사모하고 얼마나 흠모하여 나 자체가 그 무한한 열의의 주체 앞에 나타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리움이 앞서야 되고, 간절함이 앞서야 되는 것입니다. 간절함이 있는 그 이면에는 반드시 열의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 주체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같이 있고 싶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고, 사랑을 받으면서 그 사랑 가운데에서 살고 싶고, 그 사랑 가운데에서 끝을 맺고 싶은 흠모의 심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람의 마음이 간절한 데서부터 순수한 바탕을 중심삼아야 하나님의 그 사랑의 인연이 나와 더불어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될 때,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그리워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흠모하고 사모하였느냐? 현재의 내 입장을 전부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몽땅 바쳐드릴 수 있는 입장에 서 있느냐 하는 문제, 다시 말하면 완전한 플러스 앞에 완전한 마이너스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 완전한 마이너스로서 완전한 플러스 앞에 대할 수 있는 그런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완전한 플러스는 완전한 마이너스에 대해서 직행해 오는 것입니다. 순수한 직행의 행로를 통하여서 그 완전한 플러스는 완전한 마이너스를 향해 돌진해 온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마이너스는 새로이 후방에서 밀어주는 반대의 작용을 일으킬 것입니다. (36-99)
4) 포용성이 있어야 한다
지금 여러분들이 쭈그러지고 초라해 보이고 허술한 옷을 입고 있지만 모든 것을 갖추고 안팎으로 입체성을 갖추고 있으면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때의 미(美)라는 것은 천지 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미인 것입니다. 선생님의 눈으로 봐도 그러한데 하나님이 볼 때에는 더욱 그럴 것입니다. 이러한 자질을 갖추면 천지의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눈을 보면 그 눈에 천지의 슬픔이 들어가 있고, 손이나 발 어디를 보더라도 천지를 대표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걸작품을 만들자는 것이 선생님의 뜻입니다.
선생님이 젊었을 때는 고물상에 가서 남들이 입다 버린 싸구려 옷을 사 입고 다녔습니다. 아가씨들이 따라올 수 없게 냄새가 나는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옆에 가면 피해서 도망갈 그런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통일교회 남자라면 털털해야 합니다. 양말에 구멍이 뚫려 있어도 당당할 줄 알아야 합니다.
큰 산에 갖은 수목이 많고 오색의 새라든가 동물들이 깃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여러분에게 모든 것이 깃들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전체의 자세를 갖추어 그것이 하나의 미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옷을 잘 입었다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잘 차렸다고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천지에 화제거리가 되고 관심거리가 되어 전부 다 부러워할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14-29)
여러분이 처음에 교회에 들어올 때 기뻐하던 그 기쁨이 다 스러져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것이 정상적으로 뿌려진 하나의 씨가 되었으면 거기에서 열매를 맺어 가지고 수십 수백의 씨를 거두고, 그 씨를 다시 뿌렸으면 수십 수백의 봄날을 맞을 것이 아니냐. 적막강산 위에 한송이의 꽃이 피어나 수많은 꽃을 피워 꽃밭을 이루고 수많은 향기를 풍길 수 있는 향기의 동산을 만들어야 할 것이 아니냐. 여러분 자신들이 그러한 향기를 풍길 수 있는 결실된 동산 가운데 서 있느냐?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스스로 풍기는 향기를 좋아하는 것은 고독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향기 가운데에서 많은 향기와 더불어 내가 풍기는 향기는 고귀한 것입니다. 그것은 대중이 깃들 수 있고 만물이 화동할 수 있는 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만으로는 적적하고 외로운 것입니다. (60-26)
책임자에게는 생명의 감사와 생명의 뭐라할까, 윤택함이 언제나 샘 솟듯 흐르는 그러한 무엇이 자기 스스로에게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고통스럽지만 평화스러운 것이요, 거기에 안식할 수 있는 보금자리와 같은 생명이 깃들 수 있는 그러한 안식처가 자기 마음에 잠겨져 있어야 됩니다, 그 자세가. 그러한 자리에 서 가지고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느냐? 그러면 하나님이 같이하는 거라구요. 결국은 뭐냐 하면, 상하관계의 연결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70-148)
사랑의 리더는 융통성이 있어서 들어왔다 안 들어왔다 그런다구요. 바로 물리기만 하면 안 들어갈 수 없다 이거예요. 전부 다 들어가게 돼 있어요. 그렇다면 거 얼마나 멋져요. 그럴 수 있어야 하나님이 통하지요. (119-195)
5) 노다지를 찾아 나선 광부의 예화
옛날에 미국의 동부 사람들이 서부를 개척할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이었느냐? 그때의 정치가들의 정책적인 선전입니다. 서부에 황금산이 있다 뭐가 있다 하며 천지에 깔린 것이 전부 다 노다지이고 금덩어리인데, 그것은 먼저 가서 캐내는 사람의 것이라고 선전을 했어요. 그러니까 죽을지 살지 모르고, 인디언이고 무엇이고 생명을 내놓고 동료가 죽어 넘어지는 것을 보고도 조금 더 가보자, 또 조금 더 가보자, 해 가지고 서부를 개척한 것입니다. 그들은 소문이 사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들 죽더라도 자기가 남아지는 날에는 일확천금하여 천하 제일의 부자가 될 것이라는 소망에 불탔기 때문에 서부를 개척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광부가 광맥을 찾기 위해 나섰다가 기진맥진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러 곡괭이질 한 번만 더 하면 나자빠질 순간이라도 열 번만 더 파면 틀림없이 노다지가 나온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곡괭이질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죽을 지경이라 해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어디에 있느냐? 여러분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안다면 보따리를 싸야 됩니다. 시집을 가든가, 장가를 가든가, 이사를 가야 된다면 거기에 대한 준비를 해야 되는 것처럼 준비를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삿짐을 싸 가지고 갈 준비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순간이 을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그냥 그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망해 가는 세상의 더러운 먼지를 전부 다 털어 버리고, 침을 뱉고 '나는 가겠다' 하는 마음으로 보따리를 싸 가지고 새로운 세계로 갈 준비를 하는 생활이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말입니다.
그래, 신(神)이 여기에서 살려고 하겠습니까? 신이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이곳에서 그냥 살려고 하겠느냐 이말이예요. 그러니 보따리를 싸라는 것입니다. 세상과는 인연을 끊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따리를 싸 가지고 어디로 갈 것이냐? 그것이 막연하기 때문에 걱정이지, 그곳을 확실히 알기만 하면 죽어도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있는 정성과 생명을 다하여 이 길을 가는 것은 이 길이 틀림없는 길이기 때문이요, 이 길을 다 가고 나면 내가 닦아 놓은 수고의 터전을 그냥 그대로 인류역사에 상속해 주고 갈 수 있다는 데에는 보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33-235)
대중을 지도하는 데는 한 가지 방법만 가지고는 안 된다구요, 알겠어요? 소나무 뿌리를 캐 보라구요. 소 뿔이 아니라 소나무 뿌리예요. 소나무 뿌리에는 통뿌리가 있어요. 그거 흐지부지하면 못 뽑는 거예요. 있는 힘을 다해서 허리가 부러져라 하고 한꺼번에 뽑아 버려야 끝 뿌리가 끊어지지 않고 나오게 되어 있는 거거든요. 그 격이라 뽑을 때 한꺼번에 뽑아 버려야 됩니다, 왕창. 금만 나면 다이나마이트를 사용하지 않아도 통할 수 있다구요. (122-165)
대중 지도를 하려면, 거 뭐라고 하나? 재치, 지도할 수 있는 재치가 있어야 됩니다. 지도하는 데는 순리적으로 안 되는 거예요. 그러나 한대 때려 놓고 하게 되면 다 움직이는 거예요. 전부 때리는 게 아니라 대표적으로 내세워서 후려치는 거예요. 그렇다구요. 남들이 선생님을 욕할지 모르겠지만 욕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그러지 않고 6천명을 어떻게 짝을 만들어 주나요? 우물우물했다가는 아무것도 안 되는 거예요. 얼른 척척척척 해야 되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121-53)
2. 부모 입장의 목회자
1) 목회자는 부모의 입장이다
앞으로 여러분은 개인적인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통일교회의 지역장이나 구역장으로서의 책임보다도 개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계적 전통을 중심삼고 개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했느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책임자로서 책임을 다했느냐, 교회장이면 교회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장은 부모의 입장입니다. 부모는 자식들을 다 재워 놓기 전에는 먼저 자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프지 않은 한 그러지 못하는 거예요. 철모르는 아들딸의 내일을 염려하면서 눈물을 짓고, 생활의 어려움을 느끼게 될 때에는 가슴을 조여 가면서 그 아들딸을 위해 복을 빈 후에 잠자리에 드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책임자는 잠을 못 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벽이나 밤에 조용한 시간이 나면 자기 교회 식구들을 위해 남 모르게 눈물 흘리며 정성들여 줘야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래야 기반이 닦여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식을 키워 가지고 어떻게 해야 되느냐? 교회보다도 나라를 위해 살 수 있는 애국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본을 보여 주면서 교육을 하는 부모가 올바른 부모입니다. 사랑으로 올바른 교육을 한 후에 하라고 해야 올바른 부모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생활을 하게 되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떠날래야 떠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런 사람에게는 무엇인지 모를 강한 힘이 있어서 모든 사람의 시선을 자동적으로 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관심을 안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겨울에 화덕에 불을 피워 놓으면 찬 화덕과 더운 화덕을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알기 때문에 가지 말라고 해도 더운 화덕을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그렇게 사람이 찾아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전통적 기반을 갖추어 가지고 희생적 각오 아래 개인의 새로운 전통을 확대시켜서 가정적 기반에 연결 시키고 그것으로 종족, 민족, 국가를 형성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이 가는 길입니다. (34-31)
부모는 그 아이의 생명의 모체지요? 생명을 키워 준다구요. 생명의 모체요, 사랑의 모체요, 보호의 모체입니다. 생명을 보호해 주고, 키워 주고, 사랑해 준다는 거예요. (51-173)
2) 부모의 심정이란
여러분이 식구들을 척 대하게 된다면, 모든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권고할 때는 자기가 권고하지 말라는 겁니다. 나도 그래요, 나도. 내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나오지만, 잘못한 사람이 많이 있지만 잘못했을 때 척 보고 '백 번 용서해 주마' 하고 마음을 그렇게 먹고 대하는 거예요. 선생님은 대하는 사람들을 백 번 용서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게 아버지의 마음이다 이거예요.
예를 들어 말하면, 지금 자기의 아들이 말이지요, 살인강도 놀음을 해 가지고 사형수가 되었다 이거예요. 그래서 아들이 형장으로 끌려가는 찰나에 자기 아들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야, 너는 잘 죽는다. 자, 어서 죽어야지. 이 자식아' 그래요? 마음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심정은 천번 만번 용서할 수 있는 길이 있으면 용서해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 아량을 가지고 대하는 거예요. 천 번 용서해 주마….
그렇지만 문제가 달라진다는 거예요. 나도 그럴 수 있는 과거가 있었다, 내가 그런 입장에 섰으면 하나님은 어떻게 할 것이냐? 그거 곤란할 거 아니예요? 내가 현재 그런 실수를 범했다면 하늘은 나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 책임진 분야에서 이렇게 잘못했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지금까지 충성한 기준도 있다고 보지만, 그 기준을 볼 때 요만한 것 잘못했다고 전부 다 '이 녀석' 하고 때려부수려고 하겠느냐 이거예요. 하늘이 그런 입장에 서면 천 번 고려할 것이다 이거예요. 그래 가지고 심각한 자리에서…. 그래 가지고 권고를 받으면 매를 맞고 이래도….
지금 통일교회 나왔던 사람들 가운데 떨어져 나간 사람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을 만나 가지고 한 30분 얘기를 나눴습니다. 비밀스러운 얘기를…. 자기 자리를 잡고 안 오려고 할 때 내가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아요. 반대의 입장에서 별의별 해괴한 벌, 야, 벼락을 맞아 죽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모르니까 그랬지. 그럴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 편에서. 이렇게 시정해 주면 책임자도 그런 관점에서 나가야 됩니다. 그런 사람은 심정을 연결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 놓고 아무리 강력한 얘기를 하더라도 내가 그러한 관심을 표시했기 때문에 내 자신이 양심의 가책이 되지 않아요. 양심의 가책이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거기에는 지나치게 결단을 내렸다고 하더라도 먼저 대한 그 심정이 그 이상 큰 기준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하늘이 나에게 준 조건을 걸고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다 방법이 있는 거라구요. (157-259)
아버지의 심정을 내가 지금까지 말하고 가르쳐 왔지만 이 땅 위에 천 년만에 보낸 예수가 십자가에 죽을 때에 아버지의 심정의 깊은 골짜기를 내가…. 그걸 미처 몰랐다구요. 결국 그걸 생각할 때 하나님 앞에 있어서 내가 충성했다는 충성은 죽음 고비를 뚫고 나갈 수 있는 충성의 기준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 이하에서 왔다갔다하는 충성이었고, 그렇게 뼈가 짜릿짜릿 녹아 나는 심각한 충성이 아니었다 이거예요. 비록 내가 아버지 앞에 기도한 것이…. (158-153)
3) 부모 입장의 책임자로서 가져야 할 마음 자세
여러분은 동네에서 못사는 사람을 보게 되거나, 밥을 먹고 그 집 앞을 지나갈 때는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세가 그래야 돼요. '이 사람이 이렇게 못사는 것은 인류의 조상되는 사람이 잘못하여 타락했기 때문이다. 나는 부모의 사명을 갖고 이 동네에 왔으니 내가 이 사람을 책임져야 하는데, 내가 이 동네에 와서 일년이 지나도록 너희에게 미쳐진 것이 무엇이냐? 아무 혜택도 가해 준 것이 없구나' 하며 그 집앞을 지나갈 때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를 부르며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 그런 마음 가져 봤어요? 이것이 원리적인 거라구요.
또, 동네 아이들이 못먹고 못입는 것을 보면 가슴 아파해야 됩니다. '너희들이 이렇게 된 것은 누구 때문이냐? 나 때문에 이렇지. 이 동네가 하늘로 가기 위해서는 부모로 온 나를 중심삼고 발판을 만들지 않고는 가인의 다리를 놓을 수 없다. 이 발판을 거치지 않고는, 부모의 인연을 맺지 않고는 하늘로 갈 수 없다. 나와 그대들과 이 마을은 참인연이 있어서 만났으니 나는 죽든 살든 끝까지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겠다'고 하는 마음이 밤이나 낮이나, 자나깨나 사무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모의 입장에 있는 지방 책임자들이 가져야 할 마음 자세입니다.
숟가락을 들 때에는, 그 동네의 밥을 굶는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그들을 방문해서 밥을 다 나누어 주고 그들로부터 '제발 나를 그냥 두고 숟가락을 들어 달라'는 권고를 받기 전에는 숟가락을 들지 못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그게 부모라구요. 자식을 가진 부모가 자기 밥이 있으면 혼자 먹을 수 있어요? 부모는 '어서 먹어라, 어서 먹어라' 하면서 자식들에게 나눠 주고 먹여 줄 때에, 그중 철든 자식으로부터 '어머니 아버지, 우리는 이제 됐으니 부디 어머니 아버지 잡수십시오' 하는 말을 듣고서야 그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밥을 먹게 될 때, 그 밥은 소망과 사랑의 마음으로 먹을 수 있는 밥이 되는 것입니다. 그 밥이 슬픈 밥이 아니라 행복의 밥이요, 절망의 밥이 아니라 희망의 밥이요, 부모와 자식이 그 밥을 먹는 그 자리는 끝이 나는 자리가 아니라, 천륜의 인연이 새로이 맺어지고 하늘땅의 인연이 새로이 맺어지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밥은 복된 밥이요, 그 터전은 행복의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단계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길가에 놀고 있는 못입고 못먹고 뼈만 남아 있는 애들을 보면 자기 아이들과 같이 붙안고 품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걸 못 하게 되면 아이를 낳아 놓고 책임을 못 하는 부모와 같이, 자기 아이를 어느 유모에게 주거나, 혹은 어떤 동네에 버린 어머니가 자기 아이가 길리워지고 있는 집 앞을 지나다가 그 아이를 보게 되면, 그 아이 앞에 얼굴을 못드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그 이상의 부끄러움을 느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정의 인연입니다. 만일 자기가 낳은 아들딸이 그렇게 말라빠져 있다면 그 아이를 붙들고 뼈가 녹아 나고 살이 일그러지도록 눈물을 흘리지 않겠느냐?
복귀역사노정에 있어서, 부모가 있으되 그 부모를 알아보지 못하고 몇천 년 동안 유리고객하고, 원수에게 끌려다니면서도 망하지 않고 씨앗으로서 오늘까지 남아진 혈족의 인연이 얼마나 복되고 얼마나 귀합니까? 하나님이 우리 나라를 망하게 하지 않으시고, 후손을 남기게 하시기 위해 그 종자가 끊어지지 않을 수 있는 자리에 '나'를 세워 주신 데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 마음을 중심삼고 부모의 심정을 체득할 수 있는 자리가 벌어지게 되는 날에는 절대로 밥을 굶게 되지 않습니다. 동네가 굶기 전에는 여러분이 굶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있는데도 밥을 굶게 되면 그 동네는 전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사람을 보고도 그렇고 소를 보고도 그렇습니다. '이 놈의 소야, 네가 참부모의 채찍을 맞아 가면서 농토를 갈면 얼마나 좋겠느냐? 불쌍한 고아와 같은 신세, 종의 신세, 그 운명을 가릴 수 없는 그런 입장에 있는 네가 불쌍하구나' 하면서 소의 귀를 붙잡고 이마를 맞대고 엉엉 울 수 있는 그런 마음을 쓸 줄 알아야 됩니다.
밭을 바라보고도 그렇고, 나무를 바라보고도 그렇습니다. '너희들, 역사적 한이 있거든 오늘 나를 보고 풀어라. 소원성취의 욕망이 있거든 나에게 말하라, 내가 하늘의 뜻과 인연을 맺어 주겠다'고 해야 됩니다. 뜰을 바라보고도, 산천을 바라보고도 '내가 너를 버리겠느냐? 골짝골짝마다 내가 다 가 주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주인이 못 가본 깊은 산중에 있는 나무까지 찾아가서' 오늘 내가 너를 찾아 이 산중에 온 것은 너와 같이 산중에 있는 나무들이 외롭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를 대표적으로 찾아왔다' 하면서 동네면 동네, 군이면 군에 있는 산의 나무들을 대표한 입장에 세워 놓고 기도해 주고, 오늘의 기쁨을 길이길이 전승하고 오늘로써 모든 슬픔을 해원하여 후대에는 이런 슬픔을 갖지 말도록 기도해 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바위를 바라보면, '너는 뭇 사람들로부터 무슨 소원을 들었느냐? 많은 사람들이 너를 바라보고 원망하고, 너를 바라보고 저주하고, 너를 바라보고 별의별 생각을 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네가 나를 만나 반가워 할 수 있는 오늘을 얼마나 고대했느냐?' 하면서 바위가 슬퍼하기 전에 먼저 슬픈 표정을 짓고 눈물이 앞을 가리는 심정을 갖고 나가는 여러분이 된다면, 여러분이 가는 길은 절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괴롭게 되려 하면 여러분의 선조가 말려듭니다. 선조들은 종의 종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종인 여러분이 가면 여러분에 앞서 선조들이 수고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계가 동원해 가지고 자기들의 후손에게 협조해 주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겠어요, 안 그렇겠어요?
이것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부모의 심정으로 천사장을 사랑하고 아담을 사랑할 때, 하나님이 수난받는 일이 벌어지게 되면 영계에 속한 존재 전체가 하나님을 협조하기 위해서 동원될 것 아닙니까? 마찬가지 이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모의 심정을 가지면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모든 것이 내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맞기 전에 내가 맞고, '너희들이 고통받기 전에 내가 고통을 당하고, 너희들이 수난을 받기 전에 내가 수난을 받겠다. 이 동네를 깨끗하게 못 한 것도 내 책임이요, 이 동네 전체에 천국의 기원을 못 만든 것도 내 책임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수고하고, 밤에 돌아와서는 그들을 위해 복을 빌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일생을 걸고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을과 그 마을의 후손들을 걸고 탄식하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이런 입장에 선 사람이 그 동네가 조상으로 맞이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니겠어요? 그렇겠지요? 「예」 (46-280)
4) 부모의 심정으로 식구들을 대하라
어머니 아버지가 자식 사랑하는 걸 배워서 해주나요? 어머니가 자식 사랑하는 것을 배웠어요, 안 배웠어요? 어머니가 자식 사랑하는 것을 배웠나요, 안 배웠나요? 「안 배웠습니다」 안 배웠지요? 또, 자식이 어머니 아버지 그리워하고 어머니 아버지 따라가는 것 배웠나요, 안 배웠나요? 배우긴 뭘 배워요. 자동적으로 알게 되어 있는 거예요. 남자가 여자 사랑하고 여자가 남자 사랑하는 것 가르쳐 줬나요? 그와 마찬가지로 심정의 세계에서는 자동적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교육이라든가 권력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필요 없어요. 생각해 보라구요. 임자네들 개척시대에 15, 6세 처녀 총각들이 나가 개척을 많이 했나요, 대학생들이 나가 개척을 많이 했나요? 「15,6세 처녀 총각들이요」 그거 다 있잖아요? 심정적인 문제가…. 대학생은 자기가 실력이 있으면 자기를 믿는다는 거예요.
그런 입장에 서지 말고 여러분이 이제부터 자세를 부모의 심정으로…. 지금까지 우리의 표어가 뭐예요? 부모의 심정으로 땀은 땅을 위하여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어쩌고 한 것을 선생님이 괜히 주장한 것인가요? 선생님이 그렇게 살았다는 거예요. 그 표어대로 나가 가지고 전도해 봐요. 선생님 말이 정말인가 거짓말인가 테스트해 보라구요. 식구가 없으면 문을 열어 놓고 식구를 그리워하는 것, 그건 종이짝 한 장 차이예요. 그렇게 하게 되면 오는 소리가 다 들리는 거예요. 그렇게 그리운 거예요. 그렇게 되어 보라구요, 오나 안 오나. 반드시 길이 열리게 되어 있다구요.
여기 강현실이가 처음 범냇골에 찾아올 때도 그랬어요. 산에 올라가면 잃어버린 자식 그리워하는 마음이지요. 야, 오는 소리가 들리는데, 들리는데 제일 한복판이예요. 주위에는…. 요 담을 심정으로 터친 거예요. 타락의 심정으로 막혀진 것을 하늘의 심정으로 터친 거예요. 그러니 몰아 들어오는 거예요. 알겠어요? 지금까지 그렇게 전도 안 했기 때문에 다 건달이 되었다구요.
거기에 들어가면 먹을 것은 준비해 둔 게 쌓였다는 거예요. 식구들이 다 가지고 오게 되어 있어요. (웃음) 하나님의 아들딸은 절대 굶어 죽지 않아요. 임자네들 나가 전도할 때, 개척할 때 말이예요, 지역장들이나 전도대원들이 나와 가지고 굶는 것을 알게 되면 그걸 안 사람들은 밥을 못 먹어요. 목이 메이게 되어 있어요.
선생님은 감옥에 있을 때 난 가만히 있더라도 '몇 번에게 미싯가루 갖다 주어라' 한다고 해서 가져와요. 그래 가지고 내가 미싯가루 많이 얻어먹어 봤어요. 이 사람들 죽는 것은 싫은 모양이구만. 굶어 죽으면 어때요? 천국 가지요. 그렇게 점괘를 놓고 하는 거예요. (웃음)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하는 심정으로 해보라구요. 괜히 걱정이 앞서 가지고 그러지. (1969. 5.12)
누가 책임지느냐? 그것을 달갑게 맞고 몸부림치며 자신의 책임이라고 하며 짐을 지는 사람이 있을 때, 그로 말미암아 외적 사탄세계는 무너져 가는 것입니다. 탕감역사는 이렇게 벌어지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부모의 심정을 가져야 됩니다. 주인된 부모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종의 몸을 쓰고, 땀은 땅을 위하여,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해 뿌리자'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하는 날에는 부모의 대신자가 안 될 수 없습니다. 부모가 불평하면 자식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이고, 이거 큰일났구나' 하는 자식들은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울거든 자식들은 부모를 위해 죽으려고 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그런 표어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주체적인 사랑을 중심삼고 통일시키는 사상입니다. 주체를 중심삼은 통일사상입니다. 그러면 '통일'의 '통'은 무슨 통 자냐? 거느릴 통(統) 자입니다. 거느리는 입장은 곧 모신다는 거예요, 이끌고 간다는 거예요?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이끌고 가니 오죽이나 힘들겠어요? 다 이끌고 가서 나중에 편안한 자리에 가게 되면 그때는 그들이 모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편하고 불평할 것이 없으니까 '아, 요렇게 좋은 것이 누구 때문이냐? 선생님 때문이구나' 하면서 모시지 말래도 감사히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만민이 모실 수 있는 영광의 때까지는 언제나 그 책임을 짊어져야 하니 수난길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44-21)
3. 길잡이로서의 목회자
1) 안내자로서의 목회자
우리가 하나의 어떠한 산의 정상을 바라보고 그곳을 향해서 간다 할 때, 최고로 높은 고지점이라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올라가는 길이 사방에 있어서 그 길의 거리는 취하는 방향에 따라 다를 것이지만, 그 정상을 향해서 갈 수 있는 제일 직행길은, 바로갈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를 중심삼아 가지고 360도 방향에 있어서 여러 가지 길이 연결될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360도였지만 정상으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정상이 점점점점 가까워 올수록 이것은 반드시 만나게 됩니다. 연결되어 들어간다 이거예요. 이것이 나중에는 넷으로 나타날 것이고, 넷이 둘로 나타날 것이고, 맨 나중에 정상에 이르게 되면 하나의 기점으로 연결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정상을 점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역사는 산을 올라가는 모양과 같은 과정을 거쳐오지 않았느냐? 수많은 민족이 갈라져 가지고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직행하겠다고 했지만, 그 가운데는 반대로 올라가는 사람도 있었고, 여러 가지 모습이 있었을 거라구요. 중간에 지쳐 쉬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내려오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내려오는 데 올라가는 길보다 길이 험하기 때문에 딴 길로 가야 편하겠다고 해서 간 사람, 별의별 걸음을 했던 사람들이…. 이렇게 엉클어져 있는 것이 인류역사가 아니냐.
그러면 산 전체를 바라보게 될 때, 그 정상으로 향하는 하나의 길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언제나 그 정상을 점령하는 데 있어서의 안내자가 될 것입니다. 그 누구나 바라는 안내자가 될 것입니다. 이건 틀림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도 그렇고, 현재도 그렇고, 미래도 그럴 것입니다. 정상이 정복될 때까지 그 길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언제나 공인된 안내자입니다. 공인된 안내자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81-179)
길잡이는 왜 필요하냐? 내 자신이 정상에 빨리 가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길잡이하고 나하고 하나되는 길 외에는 없다 하는 결론입니다. 그 길잡이하고 나하고 하나돼야 됩니다. 가다가 길이 갈라지게 되면 '야, 그리 가면 되겠어? 이리 가야 할 텐데. 내가 가고 싶은 길은 이 길인데 당신이 가는 길은 틀렸어' 이래야 돼요? 절대 하나돼야 해요, 절대 하나가 돼야 됩니다. 밤이나 낮이나 하나돼야 되는 것입니다. 이의가 없어야 한다 이겁니다. 이게 절대적인 요건이예요.
'그런데 너 나이가 어리고 나는 나이가 많고, 당신은 보니까 유치원 학생 같고 국민학교 학생 같고 나는 할아버지인데, 모든 외적인 상식, 지성과 경험으로 봐도 네가 나의 모든 지도를 받아야 할 텐데, 귀에 피도 마르지 않은 네가 무슨 안내자냐' 이럴 수 없다구요. 안내자인 줄 알았을 경우에는 코가 찌그러졌든, 귀가 찌그러졌든, 애꾸눈이든 혹은 절름발이든 괜찮다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꼭 잘나야 안내자가 된다는 법은 없다 이거예요. 일국의 대표자로서 취임해 가는 그 대사가 잘난 미남자라고만 볼 수 없다 이겁니다. 여자도 대사로 가지요? 처녀가 가더라도 대사라구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임명을 받은 그 대사를 무시하고 불신임하는 것은 그 나라를 불신임하는 것이고, 그 나라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안내자는 언제나…. 어저께는 이랬다가 오늘은 저러면 안 된다구요. 밤에 가 물어 봐도 '예' '아무 산까지 올라가는데 당신이 안내할 수 있소?' 해도 '예' 그래 밤에도 자신 있소? 해도 '그렇소', 낮에 물어 봐도 '그렇소', 잘 때 가서 깨어 가지고 '당신이 안내자요?' 해도 '예, 그렇소', 어느 때든지 생각이 머무는 입장이 될 때 깨어 가지고 물어 봐도 '그렇소' 이래야 됩니다. 거기에는 이의가 없어야 한다구요. 이것은 뭘 말하느냐? 춘하추동, 사철 변치 않는다는 거예요, 가는 길이. 가는 길이 변치 않는다, 이랬다저랬다하지 않는다구요. '글쎄요' 하는 말이 필요 없다 이겁니다. (81-183)
원리의 길은 밟아가는 길이라고 했지요? 복귀의 길은 찾아가는 길인데 여러분, 찾아갈 수 있어요? 찾아갈 수 없지요? 찾아갈 수 없으니까 길잡이꾼이 필요하다구요. 삼팔선을 넘을 때, 첫번 갈 때는 삼팔선을 못 넘으니까 길잡이꾼을 따라가야 합니다. 길잡이꾼이 엎드려라 하게 되면 엎드려야 돼요. 엎드리라고 하는데 섰다가는 그냥 가는 거예요. (웃음) 엎드리라고 하면 엎드리고, 일어서라고 하면 일어서고, 기라고 하면 기고, 배밀이를 하라고 하면 배밀이를 해야지, 안 했다가는 다 망하는 겁니다. 딱 그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찾아가야 할 길을 모르니까 선생님이 앞장서 가지고 길잡이꾼을 하는 거예요. 가다가 엎드려야 된다고 신호만 하면 딱 엎드려야 되는 거라구요.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할래요, 안 할래요?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을 버리고 나서라는 것입니다. 그때, '집중사격 !' 할 때, 서로서로 내 남편 내 자식 데리고 같이 가겠다고 했다가는 전부 몰살당합니다. 그때는 분산해서 도망가야 합니다. 알겠어요? 「예」 그렇기 때문에 남편하고 모두 갈라지는 거예요. 그래야 씨알맹이라도 남아지는 거라구요. 그렇지 않아요? (58-80)
2) 소에게 꼴을 먹이는 주인의 입장
여러분 중에도 소를 키우면서 꼴을 먹여 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장마철이나 궂은 날에는 소한테 꼴을 먹이기가 참 싫습니다. 나도 옛날에 소 꼴을 먹이러 가다가 소에게 매질도 했습니다. 지금 웃는 사람들은 그런 경험이 있어서 통하는 모양이군요.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부모님이 소를 끌고 가서 꼴을 배불리 먹이고 몇 시까지 돌아 오라고 했는데 평지에는 풀이 하나도 없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럴 때는 '에라 모르겠다 뒷동산에 아버지가 제일 사랑하는 초원이 있으니 거기 가서 먹이자' 하고 그 가파른 산으로 끌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가 올라가지 않고 중간에서 얼마 되지 않는 풀을 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놈의 소야' 하며 들이치고, 몽둥이로 때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불쌍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거 느껴 봤어요? 이렇게 억지로 끌어 가지고 강을 건너고 산으로 올라가게 해서 딱 그 자리에다가 풀어 놓으면 그 소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먹지 말라고 했다고 안 먹겠습니까? 그때는 혀는 물론, 입술, 귀, 눈까지 모두 고맙다고 하면서 판을 치며 먹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그럴 수 있는 곳을 알기 때문에 지금까지 여러분을 제재하면서 나가는데, 여러분은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곳이 있다는 것도 모른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런 것을 확실히 알면 오히려 제재해 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전도하러 나가라고 하면 전부 다 꽁무니를 빼며 '아이고 남들은 피서 가는데 뭐, 전도? 망신살이 뻗쳤구만' 하고 불만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민족이 해방될 수 있고, 세계가 해방될 수 있는 길을 안 가겠다고 할 때는 알고 있는 사람이 때려몰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려모는 것이 정의입니까. 가만히 놔두는 것이 정의입니까? 어디 가냘픈 여자들, 어떤 것이 정의인지 대답해 봐요? 「때려모는 것이 정의입니다.」 (32-255)
3) 피난길에서 목격한 이야기
옛날 6·25사변이 일어났을 때 피난길에서 내가 이런 것을 많이 봤습니다. 어머니가 다섯 살짜리 자식을 업고 나섰는데, 철이 없으니까 전쟁이 나서 피난 가는 줄도 모르고 어디 간다 하니까 콧노래를 부르며 좋다고 따라 나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업고 가다 보니 엄마가 힘이 빠져서 아이를 내려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엄마 싫어, 나 업어 주지 않으면 안 가, 업어 줘, 업어 줘' (웃음)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업어 줘야 합니다. 그것이 정입니다. 그러나 업어 주면 둘 다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걸어가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안 걷겠다고 하면 위협을 하고, 뺨을 때려서라도 가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난처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부모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버리고 가겠습니까, 죽이겠습니까? 아니면 강제로라도 끌어서 데리고 가겠습니까? 어떤 방법이 제일 좋겠습니까? 버릴 겁니까? 죽일 겁니까? 그것이 다 싫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어떻게 해서든지 끌고 가야 됩니다. 귀를 잡아 째든가 코구멍을 꿰서라도 끌고 가야 됩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렇게 해서 무사히 다 데려다 놓으면 자기 친구는 다 죽었는데 나만 살았다 하며 '아이고, 우리 어머니 감사합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가 째진 것이 미인 얼굴에 흠이 되어서 시집 못간다고 불평하는 간나가 있다면 벼락을 맞아 죽어야 합니다. 그 찢어진 귀를 보면 볼수록 '우리 어머니의 사랑이 위대했구나, 부모의 사랑이 무섭구나' 하는 것을 느끼면서 천년 만년 자기 부모를 존경할 수 있는 표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이 밥만 먹고 나면 우리를 고생시키려 한다'고 하지요? 그래요. 나는 여러분들에게 정이 없습니다. 일 시킬 때는 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같이 살 때에는 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일을 시킬 때에는 무자비하게 코를 꿰어서라도 끌어내야 합니다. 힘들어서 못 가겠다고 하면 발로 차고, 몽둥이로 때려서라도 내몰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당한 방법입니다. 이 말이 이해됩니까? 저기 할아버지, 이봉운 장로 이해됩니까? 「예, 이해됩니다」 백수노인도 때려 몰아서라도 가도록 해야 됩니다. 몇십 년을 같이 살던 할머니한테 실례가 되더라도 가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권내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 어떠한 종교인도 넘지 못했던 그 기준을 넘고, 어떠한 단체도 들이지 못했던 정성을 들여서 어떠한 나라도 갖추지 못했던 그 나라의 형태를 갖춰 가지고, 하나님이 지금까지 사랑 하고 싶어도 어떠한 단체를 사랑하지 못했고, 어떠한 나라를 사랑하지 못했고, 어떤 세상을 사랑하지 못했던 그 사랑을 몽땅 독차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정당한 교육 방법이요, 정당한 작전인 것입니다. 여기에 이의 있어요? 그렇게 해 가지고 망하거든 복수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어도 망하지 않았습니다. (32-256)
4) 때려서라도 가게 해주어야 한다
여러분들은 스승을 바라볼 때 어떠한 입장에서 바라보는가? '선민이 되게 하소서' 하며 때려서라도 가게 해줄 지도자, 칼로 몰아치더라도 가게 해줄 지도자를 찾아야 한다. 만약 모세가 칼을 들어서라도 이스라엘 민족을 몰았으면 10만쯤은 죽었어도 60만이 다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념적으로 우리에게 어떠한 시련이 오더라도 문제없다. 가는 길에 지장이 되는 것은 차 버리고라도 가야 한다. 지도자가 그렇게 끌어 주기를 바라야 한다. 안 가면 망한다. 그러니 이렇게 해서라도 기필코 세계적 가나안 복귀의 사명을 해야 한다. 이 사명이 우리 통일교인의 어깨 위에 있다. 안 가면 때려서라도 가게 해주는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 가기만 하면 된다. 그래야 역사적인 승리자가 되고, 시대적인 선봉자가 되고, 미래적인 개척자가 될 수 있다. (12-60)
지도자는 부하를 더 잘 먹이고 더 잘 입혀 주고 싶어해야 하지만 만일 그가 위급할 때는 비참한 길로 몰아서라도 보내야 하는 것이다. 모세가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민족을 떠나 40일 기도를 했을 것인가 ! 모세는 그들 앞에 폭풍우가 불어 닥칠 것을 알았던 것이다.
오늘도 걸어오는 식구들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그럴수록 그들을 내몰아서라도 하루바삐 천주주의를 이루어야 한다는 절실한 마음을 느끼게 해야 한다. (13-73)
여러분들에게는 방망이를 들고 안 갈 수 없게끔 때려모는 책임자가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놀다가도 그 사람만 나타나면 무섭고 부끄러워 가지고 숨을 수 있는 그러한 책임자가 필요하다구요.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고 봐요, 안 필요하다고 봐요? 여러분 자신을 두고 생각해 보라구요. 「필요합니다」 잔소리를 해서 꼼짝 못하게 해 가지고 관리를 해야 된다구요.
여러분들을 관리하는 지도자가, 만나면 웃기나 하고 춤이나 추고 놀자고 하는 사람이 좋겠어요, 일을 하라고, '일해, 일해' 하며 다그치는 사람이 좋겠어요? (웃으심) 어떤 사람이 더 좋아요? 「다그치는 사람요」정말 그래요? 「예」 그렇다 이거예요.
이것이 통일교회의 운명이예요. 운명이라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구요.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예요. 먼저 해 놓고 변명해야 돼요. 해 놓고 말해야 돼요. 자기 전에 책임을 다 하고 먹기 전에 책임을 다 하고. 쉬기 전에 책임을 다 하라 이거예요. 그게 잘하는 지도, 관리 방법이예요, 잘못하는 지도 방법이예요? 「잘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할수없어서 해요, 기뻐서 해요, 그저 그래서 하는 거예요? 「기뻐서요」(97-19)
어떤 사람들은 통일교회는 독선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절대란 최고의 독선과 통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최고의 독선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절대로 참다운 기준에 설 수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영원성을 보존할 수 있고 참을 옹호할 수 있는 독선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독선 그 자체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21-154)
4. 본된 자로서의 목회자
1) 본을 보여 주어야 할 목회자
본 되는 생활의 기본은 무엇이냐? 하나님을 찾아가는데 필요한 사람, 우리의 역사를 밝히는 데 필요한 사람, 이 시대를 개척하는 데 필요한 사람, 미래의 터전을 닦는 데 참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현실적 기준에서 내가 짐을 지고 밀고 나가야겠습니다. 그리하여 10년 이면 10년 기간에 이룩해 놓은 그 업적이 역사시대에 있어서 자기의 소유로 남겨 놓을 수 있는 재산이 되게 하는 것도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 분들 그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21-232)
말씀을 전함과 동시에 사람을 키워야 할 책임이 있다. 사랑해야 한다. 생명체를 키워 주어야 한다.
하나님을 어떻게 올바로 가르쳐 주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제2의 창조, 즉 하나님의 아들딸을 만들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생활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그 표준이 되는 것이 부모의 심정이다.
하나님의 생활을 보여 주는 데 있어서는 구체적으로 여러분 개인이 생활적인 면에서 본이 되라. 그리고 단에 나서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공명체가 되어야 한다. (37-281)
하나님은 무엇을 중심삼고 진행하고 있느냐? 일을 중심삼고, 심정을 중심삼고 여기에 일체의 정성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어느 길을 가느냐? 그 가는 길이 있거들랑 그 길을 중심삼고, 내가 딴 길을 가더라도 부모가 가는 그 길을, 어머니 아버지가 가는 그 길을 자식으로서 염려해야 할 것이 아니냐. 자기가 다른 곳에서 살지만 하루의 생활은 그 마음과 더불어 하고, 하늘과 더불어 심정이 일치되는 자리에서 살아 나가는 것이 하늘 식구가 가야 될 본된 걸음걸이가 아니겠느냐.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오늘날 여러분들은 식구의 이름 앞에 배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이름보다도 실체적으로 배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6-26)
2) 목회자란 본을 보이고 생의 기반을 닦아 주는 자다
물질적 문제를 가지고 교회활동을 하는 것보다도 심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활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지역장이면 지역장은 사상적인 면에서 그들에게 심정적으로 본이 될 수 있고, 그들을 길러 나갈 수 있는 터전을 세우지 않고는 앞으로 발전을 도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책임자는 명령할 줄 아는 사람이 책임자가 아니고, 모범을 보이고, 그들을 위해서 기반을 닦아 주는 사람이 책임자다 하는 것을 알아야 된다구요. 즉, 아벨은 그러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 대신자가 되고, 하나님 대신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대신 줄 수 있는 자리가 아벨의 자리다 이거예요. 아벨의 자리가 받는 자리예요, 주는 자리예요? 「주는 자리입니다」 받는 자리는 뭐냐? 가인입니다, 가인. 그게 틀림없지요? 「예」 그러면 식구들한테 신세지는 책임자 앞에 그 단체나 그 모임이 발전하겠어요? 하나님이 축복하겠나요? 하나님이 같이하겠나요? 「아닙니다」 왜? 왜 그래요? 원리적이 아니기 때문이예요, 원리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므로 원리를 지키는 것이, 원리대로 영원히 가는 것이 아벨이다 이거예요. 거기에는 사탄이 참소할 수 없습니다. (76-337)
3) 하나님과 참부모를 보여 줘야 한다
우리는 공산주의가 망하는 것도 부활시켜야 되는 거예요. 부활은 뭐냐? 부모가 와서 해방해 주는 거예요. 아벨을 누가 해방하느냐? 아벨이 가인에게 맞아 죽을 자리를 누가 막아서 해방하느냐? 하나님과 부모 외에는 없다는 거예요. 그걸 알아야 돼요. 형님이 죽이려 하는데 누가? 천사하고 형님이 하나돼 죽여 버리려고 하는데 이걸 살려줄 사람은 미래의 참부모와 하나님밖에 없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리적 관점에서 틀림없는 결론인 걸 알아야 됩니다. 누가 살려준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참부모만 확실히 알면 다 해방된다 그 말이예요, 살아난다 이거예요. 그러니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참부모를 보여줘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참부모를 보여 주는 증거의 실체만 되면 다 해방이 벌어진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을 붙들면 참부모를 붙들고 그 사람을 붙들면 하나님을 붙드는 거예요. 본심을 알기 때문에 재까닥재까닥 한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이걸 확실히 알아야 돼요. (13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