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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산소
8장은 욥의 친구 가운데 수아 사람 빌닷이 욥을 책망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2절에 빌닷은 욥의 말이 ‘거센 바람’ 같다고 합니다. 사나운 바람 같다, 너무 거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욥이 하는 말을 반박합니다. 그의 논리는 13절에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는 희망이 없고 20절에 순전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고 형통하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를 가지고 모든 사건을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욥에 대해서도 이런 보상 논리는 가지고 대합니다.
빌닷의 논리
빌닷은 먼저 3절에 하나님은 정의롭고 공의로우신 분이심을 말합니다. 3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이 말은 하나님은 정의롭고 공의로우신데 욥은 지금 그 하나님의 공의를 헐뜯고 있다, 이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정의롭고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틀림이 없다고 합니다. 즉 욥이 당하고 있는 이 고통은 하나님께서 정의를 드러내고 공의를 드러낸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신 사건이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의롭고 공의롭다, 이 얘기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적용이 문제가 있습니다.
빌닷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구체적으로 욥의 자녀들에게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4절을 봅시다.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욥의 자녀들이 죽은 것은 하나님의 정의로운 판결이 나타난 것이다, 즉 욥의 자녀들은 그들이 범죄 한 것 때문에 죽었다는 뜻입니다. 보상의 논리입니다. 욥의 자녀들이 한 날에 그렇게 죽은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죽을만한 죄가 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자식이 하나도 아니고 열 명 모두 한꺼번에 죽었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원인 - 결과의 법칙”의 논리로 욥의 자녀들에게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빌닷은 욥에게 해결책까지 제시를 합니다. 5절에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라”고 합니다. 7장 21에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기를 기다리는 듯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빌닷은 욥에게 하나님을 찾으라고 합니다. 6절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온전하고 정직하다(1장 8절. 2장 3절)고 하셨는데 이것과는 반대되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얘기를 하고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얘기를 합니다. 7절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 얘기를 사업에 이용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문맥을 무시한 적용입니다. 빌닷의 논리대로 “원인 - 결과”의 논리로 해결하려고 한다면 이 말은 맞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지금 큰 죄로 인하여 고난이 왔으니까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한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심히 창대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미약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심판으로 자녀들을 죽이신 것을 의미합니다. 창대는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해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자신의 상황에 맞는 얘기입니까? 빌닷은 욥에 대하여 잘못 생각을 하고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이 지금 고난을 받는 상황은 어떤 숨겨진 큰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받는 고난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지 아니함으로 주어진 고난입니다.
물론 “원인 - 결과”의 법칙이 있습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이 적용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갈라디아서 6장 7-8절에 이 원리는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뿌리가 육체이면,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살면 육체의 일을 맺고(5장 19절), 뿌리가 성령님이시면, 그리하여 성령님을 따라서 살면 성령님의 열매를 맺습니다.(5장 22절) 이것은 옳은 말씀입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이 적용이 됩니다.
그러나 항상 이 법칙으로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역사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의 구원이 그렇지 않습니까? 구원은 “원인 - 결과”의 법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보상 논리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을 보면 보상의 논리로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보상의 법칙이 아니고 은혜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만한 어떤 자격이 있어서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대로라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법칙으로 우리에게 구원이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매일매일 자신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꼭 원인과 결과의 법칙, 보상의 논리로 삶이 이루어집니까? 우리가 매일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는 대로 행하십니까? 만일에 우리가 행한 대로 우리를 징계하신다면 우리가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행한 대로 하나님께서 매일매일 갚아주신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얼마나 숨 쉬고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에베소서 3장 20절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해주신다는 뜻인데, 이것도 보상 논리가 적용될 수 없습니다. 빌닷에게는 이런 더 넓은 관점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은 자신이 가진 보상 논리로 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욥에 대하여 바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잣대로 욥을 재단했기 때문입니다.
빌닷은 일반적인 자연 법칙을 가지고 욥이 고난당할 만한 어떤 큰 죄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11절을 봅시다.
“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왕골이나 갈대 모두 물이 없으면 시들어 말라 죽어버립니다. 12절에 이런 것이 물이 없으면 다른 풀보다 일찍 마른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사람은 그렇게 된다는 뜻입니다. 13절에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는 다 이와 같다고 합니다. 욥이 황폐해진 것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물이 없이 갈대가 자라납니까? 물이 있으니까 자라지. 이 얘기를 우리 속담으로 말하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는가.”와 같은 말입니다. 불을 지폈으니까 연기가 나지 괜히 나는가? 어떤 면에서 보면 이 말은 옳은 말이지만 항상 이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삶의 법칙에서는 아니 땐 굴뚝에서도 연기가 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다윗과 사울의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시편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사울에게 가서 다윗이 사울을 죽이려고 한다고 모함하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다윗은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두 번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습니다.(한 번은 굴에서, 한 번은 잠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죽일 기회를 주었다, 하고 죽일 수 있었지만 자신이 손을 대지 않습니다. 이 일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는 경우이지요.
지금 빌닷은 욥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만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이었기 때문에 이런 연기가 난 것이지 괜히 고난이 온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욥기 전체적인 내용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욥이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았기 때문에 이런 고난이 왔다고 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이 세상 사람들이 용납할 수 없는 삶을 살기 때문에 고난이 임한다고 하십니다. 디모데후서 1장 11-12절에 “이 복음을 위하여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받는 고난이 있다고 하십니다. 빌닷의 논리로는 이런 고난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지혜라는 것은 우리의 관점을 넓게 가지는 것입니다. 넓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의 관점을 가지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바를 따라서 생각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 안에 모든 것을 맞추려는 좁다란 생각은 참된 지혜라고 볼 수 없습니다.
빌닷의 논리의 문제
빌닷의 가지고 있는 신앙 논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8절을 봅시다.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옛 사람이 터득한 지식을 배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경험하여 형성된 선임자의 지식을 통하여 배우라고 합니다. 9절에 사람의 생명을 정해져 있고 짧기 때문에 혼자 생각하지 말고 과거 선임자들이 터득한 생각을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10절에 그 선임자들이 가르쳐줄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욥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욥은 선임자들이 터득한 지식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그것을 배우지 않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욥은 둔한 학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닷의 주장은 엘리바스의 주장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옛 사람, 선임자의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물론 지나간 사람들의 경험은 그 뒤 세대 사람들에게 많은 교훈을 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생의 경험은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경험이 우수해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위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경험은 성경 진리의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경험보다 더 권위가 있는 것이지 경험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누가 경험했습니까? 경험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창조는 경험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빌닷의 경험에는 죄가 있어야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경건하게 살기 때문에 받는 고난이 있다고 합니다. 무엇이 더 넓고 권위가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은 경험과 전통, 계승 받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앞선 경험과 전통으로 주님을 판단했습니다. 안식일을 범한다고 뭐라고 하고, 예수님께서 금식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고 뭐라고 하고. 누가 옳습니까? 바리새인들의 경험과 전통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경험과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넓게 보는 것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요합니다.
빌닷이 든 예
빌닷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을 가지고 욥에게 교훈을 합니다. 이미 왕골과 갈대를 가지고 얘기를 했는데, 또 다른 예를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13절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악한 길을 갔을 때 오는 결과를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14절에 “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다”고 합니다. 거미줄 같다는 것은 약해서 의지해야 의미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거미줄은 기댈 수 있을 만큼 안전하지 못함을 표현해주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끊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15절에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붙잡아 주어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욥은 굳게 서지 못하는 집을 의지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욥의 자녀들이 죽은 것이나 모든 소유물을 잃은 것인 거미줄 같은 것을 붙잡았다가 떨어진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욥은 잘못된 것을 의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 16-19절에는 욥은 뿌리가 뽑힌 나무와 같다고 합니다. “그는 햇빛을 받고 물이 올라 그 가지고 동산에 뻗으며 그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갔을지라도 그곳에서 뽑히면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 하리니 그 길의 기쁨은 이와 같고 그 후에 다른 것이 흙에서 나리라.”고 합니다. 번영을 누리고 형통을 누리던 것도 금방 끝날 수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경건하지 못한 사람의 뿌리는 깊이 내렸다고 해도 뿌리가 뽑혀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무가 뿌리가 뽑히면 그 나무는 잊히고 만다는 것이지요.
20-22절에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은 버리지 아니하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않는다, 악인의 장막은 없어질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회개하고 돌아오라, 악함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욥은 지금 악하기 때문에 입에서 웃음도 잃고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빌닷의 논리가 일리는 있습니다. 거미줄에 의지하면 안 됩니다. 뿌리가 뽑힌 나무와 같이 되어도 안 됩니다. 문제는 정말 욥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삶을 살았는가? 욥은 거미줄을 의지하고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미 우리가 살핀 대로 욥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경건하게 섬기면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빌닷은 욥을 바르게 진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버리기를 힘쓰는 사람이었음을 빌닷은 인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적합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빌닷은 지금 자신이 마치 하나님을 다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판단하여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대변하는 재판관이나 되는 것처럼 욥을 “악한 자”라고 결론을 내리고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행동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위치,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알아야 합니다. 빌닷은 자신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생각하면서 욥을 판단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바르게 생각하지 않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그의 큰 잘못 가운데 하나입니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생각을 물어야지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함부로 판단하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50장 19절에 요셉이 형들에게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고 한 말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물으면서 말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판에 빠지기 쉽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http://cafe.daum.net/mokeumchurch...이남수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