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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부자 천국보내기 프로젝트>의 줄거리:
낙타와 바늘귀 비유에서 바늘귀는 소위 예루살렘성의 출입문이 닫힌 시간에 임시로 열어놓는 작은 출입문 등을 가리키는 대신 문자 그대로 바늘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자는 천국을 못 들어간다는 사실에 대한 실감을 더하시기 위하여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래놓으시고는 하나님으로선 다 하실 수 있다 하십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 부자 천국 보내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너무 오랜 동안 무관심하며 지낸 것 같습니다.
부자 천국보내기 프로젝트
(마태복음 19:23~26)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부자 천국보내기 프로젝트>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부자 천국보내기 프로젝트’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바늘귀를 당시 존재했던 작은 문의 별칭이라 주장합니다. 당시에 예루살렘 성에는 여러 출입문이 있었는데 보안상의 문제로 밤이 되면 문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꼭 밤에 출입해야 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나 먼 지방에서 온 행상들을 위해 작은 문을 하나 열어두었다고 합니다. 이 작은 문은 낙타의 짐을 다 내리고 무릎을 꿇게 하고서야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 작은 문의 별명이 바늘귀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있는 그대로 비유로써 이해합니다. 실제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갈 수는 없으니 직설적으로 말해 ‘부자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라고 합니다.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듣고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자들이 부자는 아니었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약간의 소유는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깜짝 놀라는 제자들에 대해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대답해 주십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운 일인 부자를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프로젝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특별한 프로젝트는 당시의 제자들로써는 이해할 수 없었고, 2000년이 지난 현재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명을 완수하시고 승천하셨기에 이 프로젝트도 우리에게 분명히 허락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이 프로젝트가 재물이 많은 부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자가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또 다른 프로젝트가 존재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 프로젝트가 부자가 아닌 가난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굳이 부자를 콕 찍어서 말씀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좀 더 융통성 있게 생각해보자면 부자가 이 프로젝트를 받아들이기가 힘들기 때문에 굳이 지목하며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부자라서 천국에 못 들어가는 이유가 된다면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는 말을 덧붙이실 필요는 없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가난해서 집도 한 칸 없이 그날 버는 것으로 근근이 먹고 살거나 많은 빚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경우는 어떨까요?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낙타가 활짝 열린 남대문이나 파리의 개선문을 지나가듯이 쉽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놓치고 있는 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팔복을 가르치시며 첫 번째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심령은 곧 마음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는데 그 이유는 천국을 소유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마음이 부자인 사람은 복이 없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시각을 오늘 말씀에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운 이유는 단순히 재물이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마음이 가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재물이 많아도 그 사람의 마음이 가난할 수 있다면 천국에 들어가는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리해보자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힘든 이유는 단순히 재물이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재물로 인해서 마음까지도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산수훈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시각을 통해서 보면 오늘 본문의 비유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본문과 접목시켜보면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는 것이 마음을 가난하게 해준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전제를 놓고 보면 마음이 가난한 것과 마음이 부유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마음이 부자가 되면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워집니다. 본문 앞부분에서 등장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근심하게 된 것은 많은 재물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정확히는 많은 재물 때문에 마음이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워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의 마음은 가난 할까요 부자일까요? 만약 부자처럼 재물이 많은 것도 아닌데 마음이 부자가 되어있다면 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전도를 할 때에 “당신이 오늘 밤에 죽게 된다면 천국에 가실 것을 확신하십니까?”라는 말을 자주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 보자면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천국에 대한 확신의 여부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확신에 대해 착각합니다. “내가 믿습니다.”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을 확신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마음이 부자여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도 얼마든지 이렇게 주장할 수는 있습니다. 따라서 확신 이전에 마음이 가난한지 부자인지를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재물이 많은 부자 청년이 평소에 율법을 다 지켰음에도 천국에서 멀어졌던 이유는 그가 가진 재물이 그의 마음까지도 부자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마음이 부자의 상태가 되었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우리는 부자를 살림이 넉넉하고 재산이 많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마음의 부자는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예를 하나 들어 봅니다. 점심 한 끼를 위해 얼마를 써야 부자일까요? 제가 직접 들은 바로는 한 사람 당 70만 원짜리 점심식사를 하셨다는 분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 분께서 평상시에 이런 식사를 하실 수 있을 정도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특별한 일로 인해 한 차례 그런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점심 한 끼는 500원 짜리 라면 하나로도 해결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70만원을 지불함으로 인해 부자의 식사가 됩니다.
교통수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전거나 100만 원짜리 중고마티즈나 모닝을 지나서 소나타를 지나서 10억짜리 외제차나 달릴 수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억짜리를 선택하는 것이 부자의 특징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TV나 냉장고를 사면 고장 날 때까지 씁니다. 그런데 부자라면 새로운 제품이 나올 때마다 교체를 합니다. 마음 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돈과 같이 지불 수단으로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지불할 수 있는 마음이 많은 상태가 바로 마음 부자입니다.
세상에는 원화 엔화 달러화 유로화 위안화 등 많은 화폐 종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화폐의 가치는 구매력으로 결정됩니다. 구매력이 곧 돈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인플레이션이 극심한 어떤 나라는 지폐다발을 리어카로 실어가야 겨우 빵 한 조각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구매력이 떨어지자 돈의 가치를 잃게 된 것입니다.
마음의 가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구매력이 마음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먼저 마음의 구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예를 들어 지구는 우주에 비하면 티끌처럼 작지만 한 명의 인간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넓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티끌에 지나지 않는 인간의 마음으로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구매력입니다. 단지 우리가 실감을 못할 뿐이지 마음의 구매력이 가진 가치란 실로 엄청납니다.
세계적인 제일 부자 빌게이츠의 재산은 우리 돈 100조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돈으로도 서울이나 경기도를 다 사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이 지구는 물론이고 모든 삼라만상과 모든 지하자원을 지으시고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을 가질 수 있을 정도의 구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이 들어가실 수 있는 맞춤형으로 마음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구매력에 합당한 가치의 대상을 구입하고 사느냐는 것입니다.
점심 한 끼는 500원 짜리 라면으로도 해결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한 끼에 70만 원도 쓸 수 있습니다. 출퇴근은 자전거도 되고 중고 마티즈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런데 부자는 10억짜리 외제차를 탑니다. 우리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살 수도 있지만 반대로 세상 안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들에 마음을 쏟아 부을 수도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살 수 있는 구매력을 가진 마음으로 세상에 지불하며 사는 사람들이 바로 마음 부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가질 수 있는 마음의 구매력을 이 세상일에 쏟아 붓고 살아갑니다. 큰 가치를 버리고 굳이 작은 가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본문 속에 등장한 부자 청년이 어느 정도 부자였을지는 모르겠지만 빌게이츠만큼 부자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게이츠조차도 서울을 통째로 구매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서울은 물론이고 지구와 우주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부자 청년은 이 창조주 하나님을 살 수 있는 마음으로 고작 재물을 선택했습니다. 점심 한 끼에 70만원을 쓰는 부자와 같은 마음이 되어서 작은 가치를 위해 큰 대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나인 성 과부가 있습니다. 나인 성 과부도 창조주 하나님을 구매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인 성 과부는 이 모든 마음을 하나님을 구매하는데 쓰는 대신 외아들에게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다 아들을 잃게 되자 과부는 모든 것을 다 잃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예수님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십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단순히 예수님께서 과부를 불쌍하게 여기셔서 기적을 행하신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동정심으로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인 성 과부는 하나님을 살 수 있는 마음으로 아들을 샀던 마음 부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아들을 살리시는 기적을 통해 나인 성 과부에게 아들보다 더 큰 가치인 하나님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부자들은 돈이 많기에 점심에 70만 원 정도는 쓸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부자 같은 마음이 되어서 세상에서 접하는 사소한 일들에 마음을 주저 없이 사용합니다. 대체 얼마나 부자이기에 마음을 그렇게 막 사용할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입니다.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진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죽어서 천국을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천국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8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의 정신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동양란 두 촉에 빼앗김을 깨닫고 무소유의 정신을 주장하게 되었다는 일화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을 중시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다만 불교는 마음이 창조주 하나님을 살 수 있는 구매력이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법정 스님은 단순히 마음을 동양란에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마음 부자로 행동한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구매할 수 있는 마음을 고작 동양란 두 촉에 넘겨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체 얼마나 마음이 부자이기에 창조주 하나님을 가질 수 있는 마음을 아까워하는 기색도 없이 배우자에게 쏟아 붓는다는 말입니까? 엄청난 마음 부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비교한다면 승진 문제는 사소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구매할 수 있는 마음을 승진에 다 쏟아 붓습니다. 취미에 열중하는 마니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토록 마음을 열중하게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창조주 하나님을 가질 수 있는 마음을 다 쏟아 붓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을 갖는 것보다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할 목사님들조차 엄청난 마음 부자가 되어서 마음을 하나님이 아닌 목회에 다 쏟아 붓고 있습니다.
마음 부자의 문제는 사소한 가치를 위해 가장 큰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조세계에서 살아갑니다. 사물들은 물론이고 배우자나 자녀 혹은 나의 몸과 마음까지도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빌딩을 세우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재료들의 분자나 중성자 원자 양자까지도 하나님이 붙들고 계십니다. 이러한 피조세계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생애는 시작부터 마지막 날까지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으로부터 독립된 부분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이 피조세계에는 항상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이 지불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추가로 마음을 더 지불해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만물이 존재하고 유지되고 진행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이 지불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생애를 가득 채우고 계신 하나님의 생각을 시편 139편 17~18절에서는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라는 노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비유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내 생애의 모든 시간 과 모든 날들과 모든 해가 모래알처럼 많은 하나님의 생각으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상과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생각으로 충분할 뿐만 아니라 이 하나님의 생각으로 이끌려지고 주어지는 대로 받는 것이 최선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질 수 있는 마음의 구매력을 세상을 구매하는 데 헛되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돈이 너무 많아서 가치 없는 일들에까지 돈 쓰기를 주저하지 않는 부자들처럼 살아갑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최선의 일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하나님을 가지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엄청난 구매력을 가진 마음을 세상에 쏟아 부으며 그로부터 사소한 기쁨을 얻어 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부자인 상태에서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의미입니다. 재물이 많은 부자는 마음을 붙일만한 세속적 가치를 더 많이 가진 자들입니다. 사소한 가치를 위해 가장 큰 대가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헛되게 사용 될 기회가 많아진 만큼 하나님을 사기는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부자의 구원이 어렵다는 말씀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로 그런 재물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데도 마음만은 부자로 살아갑니다. 고작 몇 백 만원도 안 되는 것들을 위해 마음을 전부 다 써버리기 일쑤입니다. 예를 들어 삼성의 회장님은 삼성이라는 회사에 온 마음을 다 쏟고 있습니다. 삼성이라는 기업은 세상에서는 비교적 큰 가치를 지닌 대상입니다만 창조주 하나님과 비교한다면 여전히 티끌에 불과합니다. 회장님은 창조주 하나님을 살 수 있는 마음의 구매력을 티끌 같은 삼성에 쏟고 있으니 마음 부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마음을 쏟는 대상이 삼성이라는 기업 정도의 가치라도 지니고 있습니까? 쉽게 와 닿도록 돈으로 비교해보아도 비할 바가 없는 수준일 것입니다. 하물며 삼성도 창조주 하나님과 비교할 수가 없는데 우리는 티끌 같은 대상들에게 마음을 쏟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 부자라는 기준에서 보자면 우리가 삼성의 회장님보다도 더 부자인 셈입니다.
점심 한 끼를 만 원으로 때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백만 원으로 때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선택하는 일들은 이 점심 한 끼와 같습니다. 이 사소한 가치를 위해 창조주 하나님을 살 수 있는 구매력을 쏟아 붓고 있으니 엄청난 손해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선민은 곧 마음의 가난함을 대를 이어가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릅니다. 이 아브라함이 어떤 마음 상태를 가지고 있었는지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이 소중한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곧 치안부재의 상태에 놓이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고향에 마음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삶에 대해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마음을 쓰고 계신다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마치 세상에 대해서는 지불할 마음이 한 푼도 없는 가난뱅이처럼 행동했습니다. 대신 모든 마음의 구매력은 창조주 하나님을 향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면서 아내를 버릴 것까지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이방나라 왕들의 침실로 들어갈 때마다 하나님이 마음을 쓰셨고 그 결과 사라에게 손가락 하나도 댈 수 없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에 대해서 쓸 마음이 없는 가난뱅이였습니다. 대신 그 마음을 하나님께 다 쓰고 있었기에 아내에 대한 일들은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백 살에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잘 자라서 아름다운 청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번제로 바칠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 같으면 도저히 바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일을 해냅니다. 이삭에게조차 마음을 한 푼도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두쇠처럼 마음을 그냥 묶어둔 것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마음을 하나님께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이삭에게 쓸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이 세상을 살면서 마음 가난뱅이의 삶을 물려받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선민입니다. 선민의 삶이란 마음 구매력을 극대화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일에 대해서는 마음의 구매력이 전혀 남지 않게 됩니다. “가난의 대물림”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선민들은 마음의 가난을 대물림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직장 건강 가족 인간관계 등이 선택의 대상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에서 최우선으로 뽑는 가치가 있다면 건강일 것입니다. 그러나 선민은 건강에조차 쓸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지불할 마음이 하나도 없을 만큼 구매력을 극대화시켜서 하나님을 가졌으니 하나님이 계신 천국도 따라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는 말을 반대로 말하면 ‘심령이 부자인 자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라는 의미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대체 얼마나 마음 부자이기에 삶에서 만나는 사소한 가치들을 사기 위해 창조주 하나님을 살 수 있는 구매력을 지불하겠습니까?
부자 청년의 일화를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16절을 보면 이 청년이 주님께 나왔을 때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청년은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는다는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생각을 받아서 그대로 대답해주십니다. 계명들을 지키는 것에 더해서 21절을 보면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가진 영생에 대한 바람은 여기서 한계를 맞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부자 청년이 행위에 국한된 질문을 하였기에 마찬가지로 행위로 답을 해주셨습니다. 그가 영생보다 재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부자 청년에게 영생과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마디도 재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어느 날 제가 두 분 집사님과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집사님들이 구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다가 우스갯소리로 “당신이 나한테 베풀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야.”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있다가 “아무것도 베풀지 마세요. 집사님들 돈은 집사님들이 다 쓰시고 또 헌금조차도 조금의 거리낌이라도 있으면 내지마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분들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단 한 푼이라도 필요로 하시지 않고, 또 집사님들의 생각으로 헌금을 하고 구제를 한다고 해서 하나님은 전혀 기뻐하시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여러분이 마음을 지불하며 붙잡고 있는 세상의 가치들에 대해 내려놓으라거나 바치라거나 팔라고도 하시지 않습니다. 법적인 소유권, 사회적인 신분이나 위치 같은 것들을 이용하시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뿐입니다. 주님은 고통을 당하시면서 죽음을 당하셨지만, 우리는 주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을 지속하는 것만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프로젝트입니다.
이 프로젝트를 부자 청년에게 적용해봅니다. 청년이 정말로 영생과 하늘나라에 대해 소망했다면 주님께서는 그 재산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도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구원에 필요한 것은 헌금도 아니고 재산을 팔아 구제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앞으로 일어나게 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 말씀해주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임을 인정하는 것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배우자에게 문제가 있어도 그대로 놔두세요. 자녀에게 문제가 있어도 놔두세요. 건강이나 재산도 그대로 놔두세요. 마음에서 떼어놓아라, 팔아라, 구제하라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만을 요구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방법은 이 세상의 모든 종교가 수련을 한다든지 훈련을 한다든지 행위를 강조한다든지 하는 것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을 떼어놓는 성공적인 방식 같습니다.
이탈리아 베로나 지방에는 몬테규 가문과 캐플릿 가문이 서로를 원수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몬테규 가문의 로미오와 캐플릿 가문의 줄리엣이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양 가문에서는 이들을 떼놓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죽음조차도 이들의 사랑을 떼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위기가 사랑을 더욱 굳건히 만들었던 것입니다.
요즘 세태에 비유하자면 이와 반대입니다. 정말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완전히 떼어놓고 싶었다면 그대로 결혼시켰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우리나라에서 그러듯이 짧으면 3년이고 길어봤자 5년이면 서로에 대해 완전히 질려서 이혼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것입니다.
부자의 천국 입성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굳이 부자 청년에게서 재물을 떼어내려 하시지 않고,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음으로 보라는 제안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고백하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돈 드는 것도 아니고 땀 흘리는 것도 아닙니다. 수고하고 생각하고 계획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동안 재물에 대해 뜨거웠던 마음이 사라집니다. 재물에 대해 마음을 지불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집니다. 마음 부자에서 마음 가난뱅이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대신 그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로 향하게 됩니다. 마음이 재물대신 하늘로 지불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떼어내거나 내려놓으려고 노력해본 적이 없고, 팔아서 구제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적이 없는데 십자가를 계속 바라보면 마음이 더는 재물에 지불되지 않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비로소 마음에 소원을 주십니다.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데 아깝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유무상통이 가능했습니다. 돈을 가지고는 있으나 마음이 지불되지 않습니다. 마음은 모두 하나님께 지불되어서 세상에 대해 지불할 마음이 없는 가난뱅이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러한 모습을 바라볼 때에는 참 이상하게 보일 것입니다. 마땅히 돈을 지키기에 노력해야 하고 노후를 생각해서 재테크도 해야 할 텐데 그럴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보는 동안 이 세상 모든 일에 대해서 마음이 가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재산이든 건강이든 고민이나 걱정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내버려두세요. 재산보다 하나님을 붙잡으라고 강요할 필요가 없습니다. 창조주를 구매할 수 있는 마음을 아무것도 아닌 일들에 지불하면서 살고 있는 마음 상태를 그대로 놔둡니다. 단지 마음으로 생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인정하면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마음 부자는 세상에서 부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나인 성 과부처럼 아들 하나 밖에 없는 사람도 마음 부자였습니다. 하나님을 살 수 있는 마음을 아들에게 다 쏟아 붓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마음에서 그것들을 떼어놓으려고 강요하지 말고 그저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면 됩니다.
여담입니다만 저는 동성애 문제도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해야 된다고 봅니다. 구약에는 동성애를 율법을 통해 제도적으로 금지하였습니다. 이에 더해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4장 26절에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대상에게 마음을 쏟는 것이 죄라는 관점에서 보면 동성애가 왜 문제가 되는지도 달라집니다. 정상적인 부부관계에서도 하나님보다 배우자가 우선시되면 그것은 죄입니다. 남편과 아내에게 마음을 쏟는 것이나 동성에게 마음을 쏟는 것이나 영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내를 포기하게 하시거나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시험하신 이유도 똑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에게 십자가를 지속적으로 바라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를 보면 이성의 부부사이든 동성의 부부사이든 마음을 지불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음의 본래의 구매력을 극대화시켜서 창조주 하나님을 갖게 되면 변화는 찾아옵니다. 저는 100% 예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지불하는 동안에 그 누구도 동성애를 할 사람은 없습니다.
저 또한 제도를 고치면 재벌들의 문제가 해결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도가 아닙니다. 제도로 인해 고쳐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부적으로는 더 심한 갈등이 생기고 곪아갈 뿐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한창 뜨거울 때에 떼어내려고 해도 둘 다 죽을 뿐입니다. 어느 한 편을 위해 제도적으로 압박해도 결국은 서로 상처를 입을 뿐입니다.
그러나 대통령도 할 수 없고 정부도 할 수 없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전하고 지속적으로 바라보도록 권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에 생각을 가지고 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가질 수 있는 구매력을 가진 마음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동성애 목사가 서는 지경에까지 왔습니다. 십자가를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 물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십자가 생활화를 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재벌들이 문어발식 확장을 해나가면서도 노동자들과 근로자들에게 일자리와 수익을 나누는 일에는 인색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귀족 노조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안위를 챙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에 교회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십자가 생활화를 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속적으로 십자가를 바라봐야 함을 전하지 못한 채 성경을 배워야 하는 책으로 가르쳤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구역장 정도 되면 성경지식이 예수님 시대의 사도들을 훨씬 넘어섭니다. 지금은 인터넷이 있고 스마트폰이 있어서 어디서나 성경을 보고 QT를 한다지만, 당시에는 성경을 들고 다닐 수도 없는 시기였기에 지식적으로는 매우 취약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아진 만큼 하나님과 가까워졌는가를 생각해본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전체가 말씀하는 것이 십자가 생활화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십자가 생활화와 담을 쌓고 성경만 공부해서 신학박사가 된들 하나님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하나님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이웃을 사랑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요지인데 십자가 생활화가 없다면 신학박사 학위도 장식일 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교회의 책임입니다. 교회가 십자가 생활화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이 어려워졌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을 해내는 하나님의 프로젝트입니다. 지구에서 살아가는 75억 명의 마음 부자들을 마음 가난뱅이로 만드는 길입니다. 또 마음의 구매력을 극대화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갖게 하는 길입니다. 교회가 이 외침을 중단한 결과가 세상의 타락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변화를 바라신다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정치인이 아닙니다. 나 한 사람부터 십자가를 생활화하고 또 전해야 할 것입니다. 전해진 십자가가 금세 창고에 들어가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생활화되어야 함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마음 부자가 되었기에 생겨났습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아무리 구원을 확신해도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전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나무라지도 말고 비판하지도 맙시다. 재벌도 근로자들도 야당도 여당도 북한도 미국도 일본도 중국도 그대로 놔두고, 오롯이 십자가를 지속적으로 바라봄을 지속적으로 전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운 일을 해내는 쉽고도 유일한 방법입니다. 지속적인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마음 가난뱅이가 되고 죽어서 천국가기 전에 이 땅에서 천국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있는 구매력을 지닌 마음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 영광과 존귀와 무한 감사를 드립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다 그대로 놔두고 누구도 비판하지 말고 지적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저 십자가만을 지속적으로 바라보자는 권유를 통해서 우리 여생의 모든 인간관계가 유지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 자신이 먼저 창조주 하나님을 살 수 있는 구매력을 극대화시킴을 통해 마음을 하나님께 전념하게 하게 하시고,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천국을 가진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아멘!!! 항상 감사합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