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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육체는 남녀 구분의 지구유니폼>의 줄거리: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사천 년 전 아브라함도 이천 년 전 사도 베드로도 그리고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과 마지막으로 이 시대를 사는 여러분, 그 누구도 하나님에게는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공백을 가진 영원한 마음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육체는 사람인 마음이 지구에서 입는 남녀 구분의 유니폼일 뿐입니다.
육체는 남녀 구분의 지구 유니폼
(누가복음 20장 27절~40절)
33.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3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39.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40. 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육체는 남녀 구분의 지구 유니폼>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육체는 남녀 구분의 지구 유니폼’
제목은 육체는 남녀라는 구분이 있는 지구에 태어날 때 입게 되는 유니폼일 뿐이라는 의미입니다. 본문은 바리새인들과 언제나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부활에 관한 질문을 한 것으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된 내용입니다. 이들이 서로 쌍벽을 이루고 있는 부활관을 보자면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죽은 후에 부활해서 이 세상에서의 삶의 형태와 방식을 연속적으로 이어나간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삶을 이어가게 되었던 것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부활이 저세상에서도 이루어진다고 믿었고 여전히 가족들과 함께 살아갈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한편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던 현세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현세가 전부라고 생각했기에 가능한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서 잘 살아야 한다고 여겼기에 로마와도 친화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현세주의자로 내세를 믿지 않았고 천사나 사탄 같은 영적인 존재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제사장직을 독점하는 귀족층으로써 사회적 계급이 높았고 부유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영원히 끝나게 된다고 믿었기에 부활에 관한 교리의 문제로 늘 바리새인들과 다투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점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는 사두개인들은 당연히 세상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삶을 육체가 죽은 뒤에도 부활하여 영원으로 연장시키고자 했던 바리새인들 역시 세상을 사랑하였습니다. 세상 사랑의 방식이 서로 달랐을 뿐이지 이들은 지독할 정도로 세상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선택받은 선민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누구보다 세상을 사랑했다는 점이 참 모순적입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영이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세상만을 사랑하는 사두개인과,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죽은 뒤에도 부활하여 이 세상의 삶을 이어나가고자 했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차마 선민이라고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할 수 없다면 얼마든지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두개인들이 부활논쟁을 할 때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들이대던 단골 논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신명기 25장을 보면 모세가 계대결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계대결혼이란 형이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일찍 죽게 되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낳은 아들을 형의 족보에 올려 가계를 잇게 하고 두 번째 아들부터는 자신의 족보에 올릴 수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이 계대결혼 제도를 바리새인들의 부활논리를 반박하는 용도로 사용하였습니다.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한 후에도 이 세상의 삶을 이어간다고 여기고 있었기에 이것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실제로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논리 앞에서 궁색한 답변을 늘어놓을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탈무드에는 유명한 랍비들이 이러한 질문을 받았을 때 대답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통상적으로는 본래 남편이었던 첫째의 아내가 된다고 합니다만 이러한 논리대로라면 나머지 여섯 형제는 부활한 후에 아내도 없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와 달리 사두개인들은 모세가 이러한 계대결혼 제도를 율법에 기록한 것을 보면 애초에 부활이 없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해석하였습니다. 부활을 믿었다면 계대결혼 제도를 정하지도 않았으리라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도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는 전혀 다르면서도 사두개인들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대답을 해주십니다. 34~36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 저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 29절이나 마가복음 12장 24절을 보면 좀 더 노골적으로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라는 말씀이 더해져 있습니다.
평생 성경을 연구했던 이들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고 오해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다름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에서 비롯된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부활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기에 육체로는 느낄 수가 없는 분입니다. 부활은 육체와는 다른 새로운 몸을 입고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삶의 시작점입니다. 부활은 곧 하나님과의 만남이기에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전제로 합니다. 이것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면 부활의 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교리적 차원에서 부활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그러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제가 느끼는 것은 아직 교리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부활에 대한 어떤 지식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지식을 말해봐야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을 때만 모든 교리는 올바로 깨달아지고, 모든 언어로 구성되어 있는 진리의 내용 또한 깨달을 수 있습니다.
누가는 바로 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관계에 집중하여 부활에 대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7~38절을 보면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사두개인들은 사람이 죽을 때 삶은 완전히 끝난다고 여겼습니다. 누가는 이러한 사두개인들의 생각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활은 곧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죽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분명히 죽은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 이미 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되실 수 있다는 것일까요? 이는 얼핏 모순된 내용처럼 여겨집니다.
이어서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부활의 내막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육체는 분명히 죽어서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은 육체를 벗은 것뿐이지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였습니다. 즉 부활이란 육체는 죽었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말할 때 조심해야 할 것도 이와 같습니다. 부활은 죽은 자의 부활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부활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이란 몸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이 몸의 죽음 뒤에 이어지는 부활이란 전혀 다른 속성의 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몸이 죽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는 말씀의 의미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몸이 죽은 사람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기까지 죽은 것이 아닌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죽은 자들이 아닌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듯 죽지 않은 자들에게서 일어나는 부활은 육체를 대신하여 신령한 몸을 입는 부활입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이러한 부활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영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밀착하고 하나님을 갖고자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는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오직 육체로 만나는 세상의 가치들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소원과 바람과 희망이 세상을 향하고 있었기에 진짜 부활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사람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어떤 부분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사두개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이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대해서는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전부라고 여겼기에 하나님은 그저 세상에서 삶을 축복해주시는 분으로 밖에는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현세에 국한시킨 상태였기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을 가진 사두개인들 중에서 제사장들이 나왔으니 선민들 또한 이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리해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에 하나님과 관련하여 몸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고 나의 어떤 부분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만나는 부활사건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랑이 없다면 모든 교리에 대해서 무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이론으로 배우고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말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갖고 싶어 하고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사랑을 염두에 둘 때 부활은 비로소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사람이 곧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들어가실 수 있는 공백으로써의 마음이 곧 사람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지음 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우리는 이 마음의 공백을 영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영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여서 영원히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공백을 영이라고 해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마음이 바로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음은 곧 영입니다. 육체는 마음이 입는 옷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는 것은 공백을 가지고 있는 마음을 보시는 것이지 육체를 보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이 육체는 공백의 마음인 내가 지구에 태어날 때 하나님께서 입도록 허락하신 유니폼인 셈입니다. 학교에 입학하면 교복을 입습니다. 군대에 입대하면 군복을 입습니다. 은행에 가면 여직원들이 회사의 유니폼을 입고 있습니다. 병원에 가면 의사 간호사들이 하얀 가운이나 유니폼을 입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몸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입는 유니폼입니다. 이 유니폼을 입고 세상과 접촉하고 인식하며 살아갑니다.
몸이라는 유니폼을 입는 주체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몸을 입고 세상을 인식하는 혼의 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구조를 염두에 둘 때 부활은 몸이 죽는 것이고 유니폼을 벗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세상에서 살기에 알맞은 몸이라는 유니폼을 입고 있다가 때가 되면 벗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세상이 끝날 때는 지옥이나 천국이라는 영적인 세계에 맞게 유니폼을 바꿔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될 부분인 마음이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동안에 유니폼을 바꿔 입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서 부활의 자리에 이른다는 말을 합니다. 이 또한 마음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세상에 대한 관계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애초에 그 자체로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곧 세상에 대한 관계가 끝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부활에 자리에 이른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관계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둔다면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일어나게 된 부활의 사건과 육체가 죽은 다음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면서 일어나게 될 종말론적 부활의 사건도 구분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날마다 경험하게 되는 부활은 유니폼을 입고 접촉하며 인식하게 되는 이 세상에 대한 내 마음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마음이 곧 나입니다. 이 마음이 육체라는 유니폼을 입고 만나는 세상의 관계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것을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본문 34~35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천국에서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에 부활하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는 하늘의 자녀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가톨릭의 신부님이나 수녀님처럼 살라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하늘의 자녀라면 내가 관여해서 결혼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나’라는 존재는 공백의 마음입니다. 이 공백의 마음을 가진 내가 관여해서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는 것은 결혼을 통하여 마음을 채울 일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가의 기록이 참으로 특이합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에 신령한 몸을 입고 난 뒤에 일어날 일을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받아들이도록 돼있는 공백의 마음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육체에 매여 있지 않고 육체를 통해서 마음 채움을 얻으려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결혼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스스로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이라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관여하셔야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나의 마음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몸이 아닌 마음입니다. 그렇기에 몸이 죽는다고 해서 마음이 죽는 것은 아닙니다. 또 몸으로 이 세상을 살면서도 마음으로는 오직 하늘에만 참여하고 싶어 합니다. 하늘에 참여하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은 내 몸에 역사하십니다. 천국에 들어가도록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의 마음은 하늘과 관여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누가는 이러한 상태에서 스스로 결혼과 같은 문제에 관여하는 법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내 마음 자체가 죽지 않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누가는 이에 더해 이 세상에서만 가능한 결혼에 대해서 마음으로 관여하지 않게 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를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39절을 보면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만 보면 서기관 중에서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처럼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러한 의도에서 기록된 내용이 아닙니다. 제사장들이 대부분 사두개인이었다면,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즉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사두개인이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했던 논리를 깨뜨리시자 속이 시원하다고 생각했던 것뿐입니다.
누가가 극단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나’라는 존재는 몸이 아닌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늘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참여하는 것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시점은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3일 전이었습니다. 화요일에 이러한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서는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시게 됩니다. 이 세상을 떠나기 고작 사흘을 남겨두고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탈출하시는 입장에서 결혼문제를 소재로 삼아 부활의 의미를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33년을 사시다가 떠나십니다. 영으로서의 예수님께서 하나님 곁에 계시다가 신령한 몸을 벗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몸이라는 지구의 유니폼을 입으셨습니다. 하늘에서의 삶을 알고 계시던 예수님은 지구에서 삶의 목적이 세상을 탈출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마음을 세상이 아닌 하나님으로 채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남자나 여자라는 유니폼을 입고 있다고 해서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겠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쁨과 평강과 만족함이 결정되고 발생하는 장소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바로 나입니다. 그 나는 하나님 사랑을 통해서 세상 밖으로 나가 하늘로 가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탈출로를 만드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를 통해 “마음의 공백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합당히 여김을 받는 사람은 절대로 이 세상에서 결혼을 통해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음의 문제를 부활과 연관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결혼해서 자식 낳고 사는 것을 복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내세에서까지 그러한 삶을 이어가고자 하였습니다. 사두개인들도 이 땅의 삶이 제일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들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가지고 싶다는 소원을 갖지 못했습니다. 현세가 끝나면 모든 게 끝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든 잘살아보고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제사장직을 수행했습니다. 이것은 선민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공백의 마음이 바로 나입니다. 남자나 여자라는 유니폼을 입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은 마음에 둘 일이 아닙니다. 공백의 마음으로서 나의 과제는 채움인데, 결혼은 마음의 채움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음 채움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죽지 않는 공백을 가지고 있는 이 마음이 육체의 유니폼을 입고 지구에 있는 동안에 맺는 어떤 인연에 대해서도 채움을 기대하며 관여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은 세상을 떠나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탈출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시작하시기 3일 전에 이 말씀을 해주고 계십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나라가 식민지하에 있다는 사실이 대단한 문제가 아님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육체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속해있는 것이 마음의 만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 채움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가능한 일이기에 몸이라는 유니폼을 입고 만나는 세상은 마음으로 관여할 대상이 아닙니다. 몸이라는 유니폼을 입고 세상과 관여하며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과 섭리가 작용할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마음으로 관여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결혼하고 일주일이 못 돼서 후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겠다는 생각은 바보짓입니다. 사람은 결혼을 한다고 행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결혼할 수 있을 뿐입니다. 남자라는 유니폼을 입었기에 여자라는 유니폼을 입은 사람과 만나게 되었을 뿐이지, 그 사람의 마음도 내 마음도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닙니다. 내가 결혼하고자 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남자라는 유니폼을 입은 나를 여자라는 유니폼을 입은 사람과 만나게 하셔서 결혼하게 하시고 자녀도 낳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녀의 영도 내가 낳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주시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유니폼을 낳았을 뿐입니다. 결혼은 유니폼을 입은 자들끼리 만나도록 하나님의 섭리가 하시는 일입니다.
이 점을 유의하시면 결혼생활이 전혀 다르게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행복하고자 결혼을 했지만 그 결혼으로 이루어진 가정이 모든 걱정과 염려의 온상이 되는 경험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결혼생활은 스위트 홈이라는 말보다는 괴로움과 고난의 홈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나’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할 때 결혼생활의 어려움은 완전히 극복될 것입니다.
나는 마음 채움의 과제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주님을 따라 날마다 세상을 빠져나가는 것만이 유일한 생의 내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로 이제 다시는 결혼하지 않게 하시고 결혼생활을 이어가지도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공백의 마음이 유일하게 하는 일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참여하게 해주시옵소서. 지구에서의 유니폼인 남녀라는 몸을 입고 이루어지는 삶의 내용은 하나님의 뜻대로만 이루어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