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 순종하다_p,257
4. 완만한 성장
*꼴을 갖추는 수녀원 삶
그해 11월 어느 날, 막계리 수녀원에 시련이 닥쳤다. 과천면 산업계 직원들이 찾아와 그린벨트 지역에 닭장을 짓고 용도변경을 하여 피정 집으로 사용한다면서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선종완 신부가 기둥이 없는 집을 내부에서부터 부수면 갑자기 지붕이 내려앉아 당신들이 위험하다고 하자 그때서야 멈추었다. 그들은 다시 확인하러 오겠으니 원상 복구해 놓으라고 하고는 돌아갔다. 변갑선 신부는 그 후에 수녀들이 기지를 발휘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고 자신의 수상집 [시골신부]에 이렇게 적었다.
하루는 피정강론을 마치고 밖에서 잠시 산책을 하고 있는데, 수녀원 입구와 언덕과 닭장 앞에 매놓은 개들이 계곡이 떠나갈 듯이 큰 소리로 짖어대고 있었다. 원장 수녀는 재빨리 입구로 가서 문을 가로막고 기관원들의 침입을 정지시키고 문제의 집을 해결했느냐고 묻는 그들에게 오히려 항의를 했다.
그러는 동안 다른 수녀들은 재빨리 뒷집으로 가서 피정 방을 닭집으로 임시 환원하는 데 열중했다. 방에 있는 의자와 이불을 숨겨놓고 마른 검불과 쓰레기를 흩어놓은 다음 인근 닭장에 가서 닭들을 붙잡아다 옮겨 놓았다. 그리고 한 수녀님은 아래에서 실랑이를 하고 있는 원장 수녀님께 그만 휴전하고 손님들을 닭집으로 모셔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기 위하여 부서진 물통을 몇 번 두들겼다.
올라가서 문제의 집을 들여다보니 깨끗한 벽지는 그대로지만 바닥엔 먼지투성이에 닭들이 있음을 보고 한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 기관원들이 돌아가자 호위병과 같은 짐승들의 소리도 멈추고 산기슭은 다시 평화를 찾아 고요히 서산에 지는 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기관 철거반은 걸핏하면 찾아와 그린벨트 내 건축물 규제를 이유로 수녀원의 집이며 잇달린 건물을 부수곤 했다. 이 때문에 선종완 신부와 수녀들은 긴장과 고통 속에서 지내야 했다.
하느님께 순종하다_259
5. 용인 분원
*은인들 덕분에
수녀원 일을 모두 자신들의 일처럼 여겨준 은인들 덕분에 수녀회는 용인군 이동면 묵리에 땅 1만 평을 구입해 분원을 설립했다. 묵리는 굴암이라고도 하는데, 1846년 병오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을 이민식 원선시오 형제가 비밀리에 모시고 근처 삼덕고개를 넘어 미리내로 갔다고 한다.
굴암 못 미처 박해시대 이후 천주교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한덕골(한덕골은 김대건 신부가 일곱 살 때 솔뫼에서 이사 온 후 마카오로 유학 갈 때까지 은이공소로 미사를 다니며 청소년기를 보낸 성지다.)이 있다. 선종완 신부는 수녀원 자리를 물색하던 중 미리내를 답사했는데 그곳에는 이미 대건회가 있는 것을 알고 산 하나를 넘어 지금 묵리에 수녀원 자리를 잡았다.
선종완 신부는 수녀원 부지는 마련했지만 살 집을 지어야 했다. 다시 수녀들의 벽돌 찍는 건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신 막달레나 수녀의 회고를 통해 당시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제가 용인 수련소를 가게 된 것은 9월 8일 대착복 3일 후였습니다. 그곳에는 집을 짓느라고 한창인데 기초를 다지고 흙도 파고 모래도 치고 벽돌도 나르고 돌도 주워 오면서 두 명씩 짝을 지어 식사당번을 했습니다. 하루씩 돌아가면서 밥을 했는데 11월까지 집 짓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저는 수련자니까 그곳에 남고 다른 수녀님들은 과천으로 돌아갔습니다. 12원부터는 집 짓는 일을 멈추고 그곳에 살며 양계장은 미리 지어져서 겨울 동안 양계장메서 4명이 일하고 나머지는 나무 하면서 겨울을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