異端의 追憶 #127, ‘베니께’ 이바구 한토막
세월이 참 많이도 흘렀다. 돌이켜 보면 벌써 오십여년이 흘러가 버렸나... 세칭 동방교에 몸담았던 기억을 더듬어 '이단의 추억'을 기록하기 시작한지도 벌써 오륙년이 훌쩍 흘러가 버렸다. 젊으나 젊었던 그 시절, 이단 사이비의 꾀임에 빠져 해괴한 짓을 하면서도 수치를 모르던 그 시절에도 이단 사이비 종교였을 망정 의기투합(?)했던 친구들과 후배들이 있었다. 그들중에 일부는 끝내 탈출하지 못하고 버티다가 오갈데 없이 이 사회의 낙오자같은 신세가 되어, 영생불사할것만 같았던 창립교주 '이레 노광공'의 54세 요절(夭折), 그리고 63세의 단명(短命)으로 세상을 떠난 2대 교주 '아브넬 노영구'의 사후(死後), 남녀불문하고 동방교의 어줍잖은 목사(?-기독교의 목사가 아님) 행세를 하기도 하고 이단 사이비 종교조직의 수괴로 등장하여, 평생을 통하여 이단사설에 사로잡혀 천지분간이 안되는 얼마 되지않는 신도들에 의해 쑥덕쑥덕 번갈아 가면서 총회장이랍시고 선출되어 거들먹 거리기도 하고 세칭 동방교의 위장조직에 선교국장이니 무슨 국장이니 하면서 명함을 뿌리고 다니기도 하며 내가 담당했던 세칭 동방교 부산 주학교회의 학생신도는 어느새 장성하여 세칭 동방교의 불법연대라고 하는 분파된 신총회측 총회장이 되어 있기도 하고, 세칭 동방교의 위장단체인 무슨 복지재단 이사장입네 하면서 명함을 들고 다니는 친구들도 있다.
아... 어줍잖게 도취되어 소집단의 영웅심리에 함몰된 인간의 어리석음이던가...
먹고 사는 것에 목줄이 메여 오도 가도 못하는 구차한 연명의 방편이던가...
그러나 그들중의 또 다른 일부는 일찌깜치 이단의 꾀임에서 벗어나와 정상적인 인생길을 걸어가는 친구들도 여럿이 있다. 이런 친구들과 가끔씩 같이 만나 밥 한그릇을 같이 하고 차 한잔을 나누면 자연히 세칭 동방교 시절의 옛날 이바구들을 꺼내 놓고 어리석었던 그 시절의 회한을 달래곤 한다.
이날도 그런 날이었다.
“야, 자네... 초량 12교회에서 연단받던 ‘베니께’라고 알제?”
친구는 그렇게 말머리를 꺼냈다. 초량 12교회(이단의 추억 #15, ‘초량12교회, 인초가 건너는 다리’ 참조)라고 하면 내가 세칭 동방교의 본부격이라 할수 있는 서울 용산의 ‘수원정’으로 부름을 받아 올라가기 전에 동방교의 전도사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지금 부산의 초량 정발장군 맞은편 주택가에 소재하던 왜식 건물의 동방교 예배(?)장소다. ‘연단받는다’ 고 하는 표현은 행상을 해서 돈을 벌어 세칭 동방교에 헌금을 바치던 신도들의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베니께’는 동방교에서 헌금을 바치고 명명상신을 해서 받은 동방교내에서만 불리우는 이름이다. 세상에서 부르는 그의 이름, 그의 속명은 알길이 없다. ‘베니께’는 다리를 심하게 절둑거리는 절름발이 장애인이었다. 그런 그가 동방교의 전도를 받아 신도가 된 경위는 특이하다. 당시 초량 12교회에는 전화교환원이 둘 있었다. 요즘도 가끔 전화번호를 문의하기위해 114를 걸면 전화기 속에서 목소리만 카랑카랑하게 나오는 그런 전화교환원을 말하는 것이다. 한명은 명명이 기억나지 않는 김광선, 또 한명은 명명이 아론이라고 불리던 김영희라, 모두 20대 초반의 앳된 아가씨들이다. 김광선은 거제도 출신이고 김영희는 부산의 대신동에 살던 아가씨였는데 여상을 졸업한 후 바로 전화 교환원으로 취직이 되어 전화국에 근무하면서 세칭 동방교의 신도로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김영희의 부친은 당시 부산시내를 운행하던 전차를 운전하는 분이었는데 범같은 성질의 소유자였다. 딸이 동방교에 빠져 미쳐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집 바깥으로 외출을 하지 못하도록 딸의 머리를 가위로 덤성덤성 잘라 버렸는데 그것도 불사하고 집을 탈출하여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초량 12교회에 출입하며 동방교에의 충성심을 과시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서~언 하다. 지금쯤에는 그 아가씨들도 아마 70고개를 넘기고 손자 손녀를 둔 할머니들이 되어 있으리라...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심하게 절고있는 절름발이 ‘베니께’는 우연한 기회에 114 안내를 하던 김영희와 전화로 연결이 되었는데 평소 절름발이 신세인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바라 20대 청년이 되도록 이성에 접근해 본 바도 없고 이성이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지도 않던 판에 나긋나긋한 20대 초반 아가씨의 친근스런 목소리에 잔뜩 취하게 되었고 김영희는 김영희대로 동방교에 누구 한사람이라도 전도하여 자기의 전도 열매로 삼아야 겠다는 욕심으로 전화 통화상으로나마 최대한의 상냥함을 구사해 다정스럽게 대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베니께’는 수시로 114에 전화를 걸어 몇 번(김영희의 고유번호) 교환원을 찾아 잦은 전화통화를 하게 되었고 김영희의 계산된 술책에 말려들어 결국 초량 12교회를 찾게 되었고 세칭 동방교의 이단사설에 꾀임을 받아 동방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절름발이로 살아가야 하는 한탄스런 이 세상에서 ‘할아버지 (교주 이레 노광공)’만 믿으면 영원히 죽지않는 내세의 천년왕국이 보장되고 연단받아 헌금을 갖다 바치면 그 천년왕국에서 몇 개 고을을 다스릴수 있는 ‘왕의 씨’가 된다는데야 귀가 솔깃하지 않을수가 없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버림받아 살다시피 하던 자기의 신세를 일거에 만회할수 있는 획기적인 기회를 잡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초량 12교회에서 숙식을 하면서 열심히 행상을 하여 매일 저녁마다 행상으로 벌어 모은 돈을 갖다 바치는 연단선님(동방교에서 행상으로 돈을 벌어 갖다 바치는 신도)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하면서도 꿈과 희망에 부풀어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위도각도(세칭 동방교적 용어)가 ‘후삼년 반’이라 했으니 이제 곧 얼마 안있어 세상의 끝날이 오게 되면 이땅은 불바다가 되고 자기는 할아버지(교주 이레 노광공)의 능력과 은혜에 힘입어 공중으로 끌어올려 휴거하여 천년왕국에서 왕노릇 하게 되었으니 이런 꿈같은 횡재가 어디 있는가... 어떤 고난과 어려움도 이겨낼수 있는 힘을 얻었고 절룩거리는 다리의 피곤함도 잊은체 열심히 행상을 하여 돈을 갖다 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연단선님들은 일반신도들이 출입하기 전에 일찌감치 초량 12교회를 떠나 행상을 나섰다가 밤 12시 통행금지 시간이 가까워야 돌아오므로 일반신도들은 그들의 존재자체를 거의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를 어느날 김인경 입다목사(이단의 추억 #12, ‘김인경 입다목사’ 참조)가 그의 양쪽 볼따구에 불이 나도록 쉴새없이 번갈아 가면서 타작하듯 후려치고 있었다. 당시 초량 12교회를 책임맡아 관리하고 있던 김인경 입다목사는 세칭 동방교의 네사람의 부주(副柱)중 한사람으로 부산경남지방의 총책을 맡아 있기도 했다. 김인경 입다목사는 그의 특이한 버릇 하나가 있었다. 연단선님(동방교에서 행상으로 돈을 벌어 갖다 바치는 신도)이나 대기자(무단가출하여 동방교내에서 숙식하는 신도)들을 닦달할때는 꼭 손바닥에 침을 퉤 퉤 뱉어 침을 발라서 뺨따귀를 후려치곤 했는데 손바닥에 침이 발렸으니 찰싹 찰싹 뺨에 손바닥을 올려붙이는 소리가 예술의 경지였다. 당하는 사람은 죽을 지경이었겠지만.
‘이노무 새끼,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정신이 희미해 가지고... 이노무 새끼, 이노무 새끼’ 하면서 김인경 입다목사는 ‘베니께’의 뺨을 후려쳐대고 있었고 ‘베니께’는 두 손을 합장한채로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를 연발하고 있었다.
친구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열심히 행상으로 헌금을 갖다 바치던 ‘베니께’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저렇게 얻어터지고 있을까... 사연이 궁금했던 친구는 세칭 동방교 초량 12교회의 구석진 곳에 숨어 김인경 입다목사의 추궁과 ‘베니께’의 실토를 엿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녁 늦은시간에 밖에서 행상하던 연단선님들이 초량12교회로 귀대하여 행상으로 벌어들인 헌금을 보고하게 되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실적이 변변찮은 헌금을 내어놓는 ‘베니께’를 보고는 시력은 나빴으되 눈치 하나 빠르기로는 소문난 김인경 입다목사가 ‘베니께’에게 귀싸대기를 후려치면서 오늘 무슨 일이 있어서 성적이 이 모양이냐고 다그치게 되었고, ‘베니께’는 ‘베니께’대로 하늘에서 할아버지(노광공)가 다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에 거짓말하면 큰일 난다는 것에 세뇌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일어난 일을 사실 그대로 실토하지 않을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부산에는 영도다리를 건너면 바로 입구에 봉래동이라는 동네가 있었는데 뱃사람들을 상대하는 다방이며 술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군데군데 사창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런곳에 드나드는 손님들은 주로 기분파들이 많아서 불쌍한 절름발이 행상을 보면 동정심으로 물건값을 후하게 쳐 주면서 거스름을 잘 받지 않거나 오히려 몇푼을 더 보태서 주기 때문에 ‘베니께’가 행상하기에는 안성맞춤이어서 자주 찾아가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은 믿음이 희미했던지, 행상에 지쳤던지, 정신이 혼미했던지, 춘정을 이기지 못했던지... 사창가 골목의 어느 바람잡이 여인에게 이끌려 들어가 할아버지(교주 이레 노광공)에게 바칠 헌금으로 그의 욕정을 풀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째보든 곰보든 절름발이든 아무 상관없이 사창가의 여인들에게는 오직 돈이라면 가릴것이 없는 세계인 것이다. 아뿔사... 정신을 차리고 보니 헌금할 돈은 이미 없어져 버렸고 시간은 벌써 귀대할때가 가까웠고 다른데로 갈데는 없고... 터덜 터덜 초량 12교회로 들어와 김인경 입다목사의 닦달을 받고 실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야... 그래 가지고 말이야 그날 밤에 곡소리가 났다 아이가, 그로부터 수년후에 군복무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와 우연하게 범일동 조방(조선방직이 있었다고 붙여진 부산의 지명)앞을 지나다가 그 ‘베니께’를 만나게 되었는데 서로를 알아보고는 아이구 반갑다고 난리를 치면서 어느 골목으로 나를 끌고 들어갔는데 가보니 그도 이미 동방교를 떠나 있었고 언제 공부했는지 모르지만 조그마한 홀을 하나 얻어 철학관을 차려놓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사주팔자를 보아주고 점괘도 보아주고 성명풀이도 해주면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참 허무하더라이... 수십년이 흘렀으니 지금은 우째 사는지 모리겠네...” 하면서 그날의 이바구를 끝내게 되었다. 당시의 ‘베니께’는 우리보다 7~8세의 연상이었으니 아마도 지금까지 생존해 있다면 80줄의 밑자리를 깔았으리라...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생각이 돋아나고 끝이 없는 옛시절 세칭 동방교의 이바구들... 우리는 만나면 그런 이바구들을 나누면서 옛일을 더듬어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파안대소를 나누곤 한다.
하 하 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