適書生存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서울은 경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인구 30만 규모의 아담한 도시였었다. 반세기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인구만으로 따지면 지금의 서울의 30분의 1에 불과한 셈이다. 한반도 전체의 인구가 2천만을 넘지 못했었으니 사람이 자못 귀하게 여겨지던 때였다고나 할까.
그 무렵에 교통사고가 나서 한 중학생이 목숨을 잃은 일이 있었다. 모처럼의 귀중한 지면에 사고 이야기를 쓰게 되어 이 또한 사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내가 중학교 4학년 때던가 학교 부근인 돈화문앞에서 시내버스 한 대가 경사진 커브길을 돌다가 전복된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이 사고로 나의 1년 후배가 목숨을 잃었다. 사소한 교통사고조차도 드물었던 시절이라 주위에서는 다들 이 어린 학생의 참변을 애석하게 여겼고, 도하(都下)의 신문들도 전단기사(全段記事)로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 등굣길의 사고여서 학교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일이 아니어서 고별식은 적십자 병원에서 치렀다. 전에
쓴 글에서 학교장으로 치렀다는 대목은 다른 사건과 혼동한 나의 착각이었다.
국내 · 외의 구석구석에서 대형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오늘의 현실에서는 버스 한 대의 전복사고가 신문의 특필감이 되는 경우를 이해하기 어렵다.
인구가 가속적으로 불어나면서 생존경쟁이 치열해지자 상징적인 의미이기는 하지만 '약육강식(弱肉强食)'이라는 비정한 어휘가 등장했었다. 영국의 철학자 겸 사회학자인 스펜서 영감은 또 '적자생존(適者生存)'이라는 그럴듯한 말을 만들어 냈다.
가속적으로 불어나는 것이 어찌 한두 가지일까만 책도 확실히 그중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책은 매우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졌던 것 같다. 마을에서는 몇 권의 '얘기책'을 책장이 너털거릴 때까지 이집저집 돌려가며 읽는 것을 보았다.
어떤 문헌을 보면 책의 기원을 대충 4천 년으로 어림하고 있다. 그리고 "도서의 역사는 인간의 사고와 노력의 역사였으며, 목적과 환희와 부단한 희망의 역사였다"라고 부연하고 있다. 이 긴 세월 동안 문자, 자료, 인쇄의 3박자가 조화있게 발달해서 오늘에 이른 것으로 생각된다.
책은 생활의 뿌리라는 말이 있지만 인류 최고의 공동의 발명품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이 귀중한 발명품이 터무니 없이 많이 쏟아져 나와서 장마철의 홍수처럼 주체하기 어렵게 되었다.
지난날 책 한 권 만드는 데 몇 해씩이나 걸렸다는 이야기는 이제는 신화처럼 들린다. 요즘은 '도서의 범람', '출판공해' 니 하는 말까지 예사로 듣게 되었다. 실상 이 순간에도 인쇄기마다에서 쏟아져 나오는 책장들은 홍수를 방불케 하고 있을 것 같다.
미국의 원자물리학자 오펜하이머 박사는 앞으로 이 지구는 책의 무게로 찌부러 들 것 같다고 개탄했다고 한다. 저속한 도서의 범람을 경계한 말이라고 생각되는데, 책은 역시 체재(體裁)보다는 내용의 무게가 앞서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무게가 그러하듯이.
이야기가 잠시 빗나갔는데 앞에서 언급한 '적자생존'의 뜻은 "생존경쟁의 결과 외계(外界)의 환경에 가장 적합한 것만이 생존번영하는 현상'이라고 한다.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의 원리가 어찌 인간과 동물의 세계에만 통하는 것이랴. 도서의 세계, 출판의 세계에서도 함께 통하는 말일는지 모른다. '약서강식(弱書强食)', '적서생존(適書生存)이라고나 할까.
《동백문학》 이 알찬 종합문예지로 튼튼하게 성장하는 것은 즐겁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무성하게 자라는 내일의 거목(巨木)을 더욱 기대하고 싶다.
(동백문학, 1986.7.)
첫댓글 가속적으로 불어나는 것이 어찌 한두 가지일까만 책도 확실히 그중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어떤 문헌을 보면 책의 기원을 대충 4천 년으로 어림하고 있다. 그리고 "도서의 역사는 인간의 사고와 노력의 역사였으며, 목적과 환희와 부단한 희망의 역사였다"라고 부연하고 있다. 이 긴 세월 동안 문자, 자료, 인쇄의 3박자가 조화있게 발달해서 오늘에 이른 것으로 생각된다... '적자생존'의 뜻은 "생존경쟁의 결과 외계(外界)의 환경에 가장 적합한 것만이 생존번영하는 현상'이라고 한다.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의 원리가 어찌 인간과 동물의 세계에만 통하는 것이랴. 도서의 세계, 출판의 세계에서도 함께 통하는 말일는지 모른다. '약서강식(弱書强食)', '적서생존(適書生存.. 본문 부분 발췌
'목적과 환희와 부단한 희망의 역사였다'라는 말이 강렬하게 외닿습니다.
출판물의 범람시대입니다. 쏟아지는 만큼 귀하다는 생각이 사라지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좋은 책, 좋은 글이란 어떤 것일까 생각해보게 합니다. 한때 '적자생존'을 '쓰는자만이 생존할 수 있다'로 소개되기도 하였어요. ^^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조성순 선생님의 수고로움에 감사드리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