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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일 마지막 시위 참석자 후기>
참석자분들이 올려주신 후기를 바탕으로 카드뉴스를 제작했습니다.
부디 이것이 또 다른 파도가 되어 더 큰 해일을 일으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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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집회 동안 어떤 중년 남성은 양손으로 빡큐를 하며 지나가기도 하고, 바로 앞 핸드폰 가게에서는 음악을 일부러 크게 키우기도 하고, 그 가게 직원 남자 무리들이 나와 집회 장소 근처에서 일부러 침을 뱉고 담배를 피우고, 일부러 오토바이가 집회 장소를 가로질러 지나는 등, 불과 2시간 동안 참 여러 일이 있었어요. 지난번 성매매 처벌법 개정연대의 행진과 창원 상남동 집회 장소에서 그 옆 벤치에 누워 자위행위 하던 남자도 생각나더군요.
집회 참가자를 향한 군중, 그중에서도 특히 남성들의 적대감은 가해자를 남성으로 지목하고 피해자가 여성임을 드러내는 목소리에 대한 분명한 반감인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들이 피해자인 여성을 같은 인간이자 동료 시민으로서 보기보다 가해자와 더 동질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오늘 집회 구호 중에 “수천 송이 꽃을 놓는다해도 네가 걸었을 앞날보다 아름다울까”라는 문구가 있었는데요, 그런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이 문제의 구조적 원인과 변화를 말하는 일조차도 쉽지가 않네요. 피해자의 자리가 이토록 좁음을 새삼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고인이 응당 누렸어야 할 일상 속의 휴일이 고인이 부재한 채로 흘러가네요. 슬픔과 애도를 표합니다. 추모집회를 욕하고 시비거는 남성들을 보면서 가해자에 빙의되어 있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낸 남성들은 잠재적 가해자인듯 합니다. 여성에게 안전한 공간은 없고..더 힘내서 여성혐오와 싸워야 되겠다고 다짐 했습니다.
2.
추모의 글 남기는 공간에서 글을 쓰는 척하며 '씹..씨발'같은 욕설을 반복하는 남성이 있었습니다. 경찰과 대동하여 마찬가지로 쫓아냈습니다.
-시위 중에 휴대폰 가게 음악소리가 구분되게 커짐.
-휴대폰 가게 폰팔이들이 보란들이 우르르 나와서 시위대 앞에서 담배을 피며 연기를 내뿜음. 경찰이 다른데 가서 피라고 했는데도 여러번 뻗대며 쉽게 이동하지 않음
-지나가던 20대 초반 남성 무리가 조롱하듯 시위대를 비웃고 지나감
-여행객 무리 중에도 캐리어를 끌고 가던 남성 한명이 되돌아 와서 피켓 내용등을 읽으며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비웃음
-시위대 중 스토킹 가해 남성이 앉아서 눈에 띠게 행동하고 소리침. 자신이 가해자임이 드러나자 죄송하다고 말하며 당당하게 사라짐
3.
같이 행진할때 소속감 들어서 힘이 됐어요. 추웠고 힘들었지만 여성분들의 목소리,그리고 우리가 믿는 신념 더 좋은 사회로 가려는 목소리를 막을수가 없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4.
해일을 구독하고 온라인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시도하며 팀의 활동을 지켜본지는 꽤 되었으나 부끄럽게도 직접 움직이고 나서는 게 두려웠습니다. 마지막 페미사이드 시위에 참가하고 나서 너무 늦게 참가했다고 후회할정도로 유익하게 느꼈고 제 안에서 뚜렷한 목적의식이 생겼습니다. 감동적인 발언들과 강한 분노가 담긴 외침을 현장에서 직접 듣고 참여하는 경험은 그 무엇보다도 값졌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위가 언론에서 크게 다뤄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제 안에선 그 무엇보다 큰 의미로 남을 것 입니다. 오늘도 저는 수많은 자매들 대신 우연히 살아남았지만 더이상은 어떤 여성도 우연히가 아닌 당연히 살아있고 권력을 쟁취할 수 있는 그날까지 노력하겠습니다. 저는 성인이 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았고, 시위 역시 이번이 두 번째 참여였습니다. 처음엔 쑥스러웠지만 그라데이션 분노라도 일으키듯이 갈수록 크게 그리고 온 힘을 담아 외쳤습니다. 많은 간식들이 전달을 위해 오갔고, 발언자가 말실수를 했을 때에도 다들 오히려 환호성을 질러줬어요. 다들 시위에 한 번쯤은 가봐야 한다고 하는 이유를 다시금 체감했습니다.
신당역 살인사건 이후 많이 우울했어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목숨을 잃을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거든요. 하지만 그럴수록 더 악착같이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마음을 오늘 다른 여성들에게도 전해줄 수 있었던 것 같아 뿌듯해요. 해일에서 직접 만든 노래인 하얀 행진과 윤미래의 꽃 등 좋은 노래도 많이 알아갈 수 있어 좋았어요.
마지막 시위였기에 아쉽지만 우리는 언제든지 다시 모일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언젠가 여자들이 모여서 들고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갈까말까 망설였어요. 그날 다른일을하면서도 가지않아도 괜찮지않을까 사실 무서운데.. 저는 남들 앞에 당당히 나서서 무언가를 주장한적이없어요. 그래서 하고싶은걸 고르는게 아니라 내가 할수있는일과 내가 할수없는일중에서 고르면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내가 여자니까 할수있는일과 할수없는 일을 가르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더는 그런 인생을 살기싫었어요 지하철로 타고 가면서도 저는 용기가없어 그곳에 참가못해도 내가 직접 그광경을 보고싶었습니다. 보신각에 도착했을때 먼저 시위 장소를 눈에 담고싶었습니다 그래서 한바퀴 그곳을돌았어요. 그리고 아직도 용기가없어서 4번출구에서 계속 망설였어요. 누군가를 기다리듯이요. 그러다가 다른분들이 출구로 나가며 여기구나 하는순간 저도 더이상 망설이지않고 시위에 참가했습니다. 날씨는 추웠고 제손은 차가웠지만 가슴만큼은 따뜻하고 벅찼습니다. 시위에 참가하신 모든분들께 감사하고 시위를주최해주신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5.
저의 첫 시위였습니다. 참여 결심 전엔 인터넷에 박제 당하지 않을까, 주변에서 알아보고 비난받지 않을까, 시위 후 폭행을당하지는 않을까. 이런 물리적 위협에 관한 걱정으로 수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지금껏 목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여성혐오 살해를 접하며 제 생존과 더 이상의 여성을 잃지 않길 원하기에 함께 목소리 내기로 결심 했습니다. 특히, 팀 해일의 마지막 시위이니 마지막이라도 실존하는 페미사이드의 존재를 함께 외치기 위해 시위에 참가했습니다.
굉장히 많은 여성들이 시위에 함께 해주셨습니다. 시위 입장 줄을 보자마자 벅차올랐습니다. 이렇게 많은 여성들이 나와, 우리와 함께하고 있었구나. 감격스럽고 이 줄 사이에서 저는 용기와 에너지를 얻었습니다. 시위 참여 전 걱정은 그 순간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여성들과 함께라는 생각에 저는 더 크게 목소리를 날 수 있었습니다.
참여자분들의 자유 발언, 대표님의 말씀들을 들으며 저는 임파워링을 얻었습니다. 난 운이 좋아 살아남았고, 이 운의 대가로 저는 더이상의 여성을 잃지 않도록 힘쓸 것입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발언이 있습니다. '공부을 열심히 합시다. 오늘 내일은 피곤해서 미루더라도 운동, 공부등을 열심히 하며 권력을 얻어 바꿉시다. ' 요즘 번아웃으로 공부를 미룬 상태인데, 이 말을 듣고 다짐했습니다. 꼭 열심히 해서 살아남을 것입니다.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6.
해일의 하얀행진을 듣고 처음엔 많이 울었습니다.
'모두가 변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내가 바뀌었고 우린 나아가리'
백래시의 시대에서 저는.여성인권이 다시 후퇴한다고만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가사를 보고 위로 받았습니다. 내가 바뀌었고, 시위에 참여한 600여명 사람들이 바뀌었습니다.
행진하면서 쩌렁쩌렁 구호를 외치며 페미사이드에 관해 그호를 외치는 것도 짜릿핬고 이전이 팀 해일의 미지막이라는 것도 믿기지 않습니다.
마지막 시위 너무 수고하섰고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뵈어요.
7.
시위가 시작할 때 까지도 망설이다가 갑자기 가야겠다는 확신이 들어 택시를 타고 부리나케 이동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여성들이 시위 현장에 모여있었습니다. 이분들도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을까에 대해서 생각하다보니 오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용기라는 사실이 새삼 더 와닿았습니다. 스탭 분들께서 나눠주신 흰 천과 타올을 몸에 두른 채 앉아 함께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를 때는 거리에서 이렇게 내가 하고싶은 말을 외칠 수 있는 건 우리가 함께이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시위를 준비해주신 스탭분들께 정말 감사드리고싶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신 수 많은 여성들과 함께 정말 너무나도 뜻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실 저는 이번이 처음으로 참여한 시위였는데 걱정했던 게 무색할 만큼 체계적인 관리 하에 안전하게 시위를 할 수 있어 안심이 되었습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모인 수 많은 광주 지역 여성들을 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후에도 든든한 마음으로 생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시위를 끝까지 잘 이끌어주신 해일 팀에게 수고하셨다고, 너무 감사하다고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인원이 참석해서 가슴이 뜨거워졌다. 여러 사람들의 발언을 들으며 더 나서서 이야기하고, 공부하고, 실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지휘에 따라 거리를 메워서 행진할 때 소름이 돋을 정도로 좋았다. 자유 발언 시간에 마이크를 잡고 준비해온 글을 읽고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리 시위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이 나라가 여성이 살기에 정말 안전한 곳인지 조금이라도 생각할 기회가 되었을 거라 생각하니 뿌듯했다.
우리는 더 크게 목소리를 냈다. 6년 전에 강남역에서 묻지마 살인사건이 일어났고, 올해 신당역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인하대 살인사건도 있었고, 부산 엘리베이터 폭행 사건도 있었다. 여성이라고 차별받고 무시받고 맞고 성폭행 당하는 사건들이 여전히 줄지 않고 있다. 오늘 자유발언 시간에 여성대상 폭행 및 살인미수 피해자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강력 범죄 피해자 비율의 85% 정도가 여성이다. 6년 전에 비해 지금 나아진 것이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오늘 해일 시위대 대표님인 김주희님이, 우리 사회에 여성혐오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내는게 제일 어려웠는데, 오늘 시위에 한 뜻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모인 것으로 비로소 증명을 성공했다고 말했다. 난 이 같은 의제에 관심을 갖고, 같은 뜻을 공유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라 확신한다. 난 저번 시위때는 라이브 영상으로 보았고, 오늘은 직접 참여함으로서 목소리를 더했다. 내가 바뀌고 내 친구가 바뀌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더 바뀌어야 한다. 여성이 움직이고 목소리를 내서 사회를 움직여야 한다.
8.
15살부터 지금, 19살까지. 5년 동안 페미니즘의 존재를 알고, 배우고, 나만의 스탠스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해도 이미 내 삶 구석구석에 스며든 그의 잔재는 쉽사리 벗어나기 힘든 것이었다. 깊은 수렁 속에서 내가 떨어지고 있는지, 걷고 있는지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건지 그 무엇도 알지 못한 채 지쳐 포기할 때쯤 팀 해일의 이번 시위를 알게 되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회피해왔던 시위. 마지막 시위. 다들 어떤 생각을 하며 시위에 참여하는지 궁금했다. 이런 용기는 어디에서 나올까.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있을까? 그 사람은 극복했을까? 어떻게? 나같이 불안정한 사람도 시위에 참여해도 될까? 시위에 참여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결과 먼저 말하자면, 달라졌다.
내가 달라졌고, 네가 달라졌다. 나는 내 주위를 가득 채운 여성들을 기억한다. 한목소리로 외치고, 함께 웃고, 슬퍼하고, 분노하던 동지들을 기억한다. 저마다의 고통과 사랑을, 이 자리에 오게 된 그 힘을 기억한다. 시위가 끝나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도 어딘가에는 존재할 당신을 기억한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한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속상해하지 말아라. 네가 바뀌었다.' 나는 이 말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었다.
9.
첫 시위였는데 가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합니다.실제 제 목소리로 여성 인권을 보장하라고 목이 터져라 외칠 기회가 언제 또 있겠어요 겨울이라 조금 춥긴 했지만 다 같이 으쌰으쌰하는 분위기와 저를 둘러싼 자매들 덕분에 가슴만은 따뜻했습니다
그리고 참가자들의 안전에 각별히 신경 쓰는 게 보여서 너무 좋았고 감사했습니다.좀 일찍 도착해서 앞쪽에 앉았다가 행진할 때 처음으로 뒤돌아봤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서 너무 감동적이었고 가슴 벅찼어요.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같은 생각을 하는 여성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연대를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음에 감사했고, 거리에 나와준 자매들을 보고 오히려 제가 큰 용기를 얻고 가는 것 같습니다.결국 세상은 우리에 의해 바뀔 것입니다.우리는 세상을 뒤엎을 해일이다!!!!!!🌊
10.
첫 시위라 많이 긴장하고 갔는데 사람들이 예상보다 많아서 되게 뭉클했습니다. 어떤 분은 강남역 때부터 시위 나오셨다고 하셨는데 비슷하지만 각기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이렇게 모였다는 게 감동적이고 슬펐습니다. 우리들이 이런 시위를 하게 된 배경인 여자들의 죽음이 더 이상 들리지 않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동안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도 주변에서 페미니스트를 본 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너무 기대돼서 1시간이나 일찍 갔더니 스태프분들의 환영과 친절함에 마음이 녹고, 나와 함께 모인 여성들이 모두 페미니스트로 다같이 한마음 한뜻이라는게 벅차오르도록 기쁘고 행복했습니다.혹시나 나의 실언으로 누를 끼칠까봐 최대한 조용히 있다 오려고했으나 주변의 방해에도 지지않고 더 크게 주장하는 여성분들의 날쎈 기운과 사자후에 조금이라도 더 힘이되고픈 마음이 간절해졌고....! 결국 자유발언과 인터뷰까지 마치고왔습니다!! (멋진여성과 함께라 너무 행복했어요) 여성이 더이상 죽지 않길, 여성혐오가 사라지길 바라는 당연한 외침이 누군가에겐 불편하게 들릴수 있다해도 저는 이 시위를 기점으로 많이 달라졌습니다. sns에 후기사진을 올리며 저의 페미니즘 지지를 지인에게 알렸고 분노로 무기력에 가라앉던 정신이 나와 함께하는 자매들이 있음에 든든하고 당당해졌습니다.(이제 누가 시비걸어도 그 스탭분들처럼 사자후로 반박가능) 앞으로도 여성시위가 있다면 최대한 전부 참여하고 여성인권을 위해 더 힘쓸 생각입니다.
11.
주변에 다들 일행과 함께 온 사람들이라 좀 외롭기도 했었는데 막상 자리에 앉으니 나처럼 혼자 온 분과 같이 하게 되었다. 그 뒤로 자유발언 때 같이 구호를 외치고 노래도 부르고 파도 타기도 하고.. 그 순간 순간이 모두 너무 짜릿하면서도 원통하고 간절했다.짐이 있어 행진은 안하려고 했는데, 행진까지 하게 되었다. 행진 중간에 적군인지 아군인지 모를 어린 학생들도 만나고 엄지를 날려주시는 중년의 여성분도 만나고, 오늘 같이 오지는 못했지만 함께 하고 싶어했던 주변의 모두를 대신해 목이 터져라 외쳤다.
구호문이 정말 외치지 않고는 못베기겠더라.그리고 피켓이 영정사진 느낌인 것을 보고 행진 때 상 치르듯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걸었으면 더 효과적이었겠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조선시대 호곡권당 느낌으로)모든게 끝나고 주변에 혼자왔던 분들과 카페를 가서 단톡방을 만들게 되었다 ㅎㅎ 진심으로 행동했더니 친구가 생겼다.
해일 시위는 끝났지만, 우리 모두가 해일이었고! 바다는! 비에! 젖지 않으니까 앞으로도 더 달려나갈 수 있는 힘을 잔뜩 얻고 일상을 살아낼 수 있을 것 같다.
12.
저의 첫 시위였습니다. 참여 결심 전엔 인터넷에 박제 당하지 않을까, 주변에서 알아보고 비난받지 않을까, 시위 후 폭행을당하지는 않을까. 이런 물리적 위협에 관한 걱정으로 수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지금껏 목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여성혐오 살해를 접하며 제 생존과 더 이상의 여성을 잃지 않길 원하기에 함께 목소리 내기로 결심 했습니다. 특히, 팀 해일의 마지막 시위이니 마지막이라도 실존하는 페미사이드의 존재를 함께 외치기 위해 시위에 참가했습니다.
굉장히 많은 여성들이 시위에 함께 해주셨습니다. 시위 입장 줄을 보자마자 벅차올랐습니다. 이렇게 많은 여성들이, 나와, 우리와 함께하고 있었구나. 감격스럽고 이 줄 사이에서 저는 용기와 에너지를 얻었습니다. 시위 참여 전 걱정은 그 순간 모두 사라지고 열정만 끓어올랐습다. 이 자리에 있는 여성들과 함께이기에 저는 더 크게 목소리를 낼 수 있었습니다.
참여자분들의 자유 발언, 대표님의 말씀들을 들으며 저는 임파워링을 얻었습니다. 난 운이 좋아 살아남았고, 이 운의 대가로 저는 더이상의 여성을 잃지 않도록 힘쓰겠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발언이 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합시다. 오늘 내일은 피곤해서 미루더라도 운동, 공부등을 열심히 하여 권력을 얻어 세상을 바꿉시다. ' 요즘 번아웃으로 공부를 미룬 상태인데, 이 발언을 듣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꼭 최선을 다해 높이 올라가 세상을 바꾸겠습니다. 제 위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위치가 되도록 최고가 되겠습니다.
13.
해일의 하얀행진을 듣고 처음엔 많이 울었습니다.
'모두가 변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내가 바뀌었고 우린 나아가리'
백래시의 시대에서 저는 여성인권이 다시 후퇴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제 주변의 많은 여성이 백래시를 받아 다시 코르셋을 조였고, 여성혐오 살해에 관해 여성혐오라고 입을 쉽게 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가사를 보고 위로 받았습니다. 내가 바뀌었고, 시위에 참여한 600여명 사람들이 바뀌었습니다. 혼자가 아닌 많은 여성이 하얀 해일을 부르며 우리는 변해 거리로 나왔고, 앞으로 나아가자고 외쳤습니다. 이에 더해, 하얀 천 해일 퍼포먼스는 극 소수라고 생각했던 우리가 이 큰 하얀 해일을 만든 것처럼 진짜 우리가 무언가 일으킬 수 있겠구나, 바꿀 수 있겠구나, 그리고 우리가 진짜 한 목표를 위해 함께 나아간다는 걸 느끼며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거대한 해일입니다.
14.
저는 행진하며 쩌렁쩌렁 페미사이드 구호를 함께 외칠 수 있다는 것에 감격했습니다. 혼자였다면 주변의 위협에 용기를 낼 수 없었겠지만, 이제는 함께이니 누구보다 크게, 목터져라 외칠 수 있었습니다. 살고싶다. 살려내자. 이 사회를 바꿔내자. 저는 있는 힘껏 소리쳤습니다.
팀 해일의 마지막 시위라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이전에 제가 용기가 있었더라면, 두려움에 떨지 않았더라면, 많은 여성과 함께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이런 후회들을 합니다. 그렇기에 팀 해일은 마지막이더라도, 여성들의 시위는 계속 될 것 입니다. 저는 더 많은 여성들과 더 이상의 여성을 잃지 않도록 더 크게 목소리를 외쳐 나아갈 것 입니다.
15.
팀 해일, 마지막 시위까지 너무 수고하섰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추운날씨, 시위를 함께 해주신 여성 분들도 고생하셨고 감사합니다. 해일과 여성분들이 없었더라면 저는 지금껏 숨죽이며 살았을 것입니다. 당신들을 만나 저는 용기를 얻었고 희망을 보았습니다. 다음에 또 뵙시다. 함께 또 목소리를 냅시다. 감사합니다.
16.
갈까말까 고민했는데 가길 잘했다
혼자하는 페미니즘은 지치기 쉬운데 같은 뜻을 가진 분들을 만나서 힘이났다 마지막이라 아쉽지만 해일이 아니더라도 각자 자리에서 신념에 따라 힘써주실 것이라 믿기에 세상이 바뀌는 날 다시 만나고싶다 마지막 해일 시위. 정말 벅찼다. 탈코르셋한 여성은 온 몸으로 저항하는 거라고, 대단한 거라고 말하는 걸 들었는데 시위에 가니까 실감 났다. 이렇게 많은 여성이 온몸으로 싸우고 있구나. 우리는 혼자가 아니구나 시위에 나가기 전후로는 생각이 많아진다. 혼자인가? 혼자가 아니구나. 다들 떠나는 건가? 아직 남아있구나. 여기서 끝인가? 누군가 이어나가겠구나. 그리고 발언하시는 분들 중 대부분이 제일 먼저 내뱉는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저는 오늘도 우연히 살아남은 여성들 중 한 명입니다.”
내가 강남역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었고, 신당역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될 수 있었고, 인하대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 시위가 좋았고 벅찼다고 했지만 그렇게 마냥 좋을까? 나는 시위 드레스코드인 흰 옷을 입은 것 때문에 시위하러 가는 게 티 나서, 누군가에게 처맞을까봐, 시위 가는 길에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고 무서워서 빠른걸음으로 그 자리를 피했다. 시위하는 내내 모자 한 번 안 벗고 스포츠 타올로 얼굴을 둘러 가리고 목이 아픈데도 마스크 아래로 얼굴이 조금이라도 보일까 물을 제대로 못 마셨다. 누군가는 어두워질 때까지 선글라스를 못 벗고, 시위 이후 갈아입을 옷을 따로 챙겨 오고, 위험한 일이 생길까 무리지어 집으로 돌아갔다. 오버하는 게 아니다. 이미 이런 시위에서 많은 여성이 스토킹이 붙고, 신상이 털렸고, 신변에 위협을 받았다. 우리는 정말 오늘도 우연히 살아남은 거다.
이번 시위는 스탭분들의 도움으로, 또 인원이 워낙 많아서 시위하는 도중에 큰 위협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어찌 되었든 나는 다음 시위에 또 나갈 것 같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라는 생각 보다는 어떻게든 죽고 싶지 않아서 나가는 거다. 그리고 한 번으로 끝낼 게 아닌 걸 아니까 더. 나는 꿋꿋하게 버틸 파도이고 우리들은 거세게 몰아칠 해일이기 때문에, 그 해일이 세상을 바꿀 것을 알기 때문에 멈출 수 없는 것이다.
17.
저는 시위 장소인 보신각에 가는 길에 성범죄 피해 장소를 지나치게 됩니다. 그곳을 지나며 다짐을 하며 시위 장소에 갔습니다. 그때처럼 혼자 끙끙 앓지 않겠다고, 나와 같은 자매가 있다면 절대 지나치지 않겠다고.다짐을 마음 속에 새기며 구호를 외치다 한 발언자분의 사연을 듣고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왜 이렇게 피해자가 많고 가해자는 뻔뻔하며, 2차 가해자들은 본인의 행동이 가해라는 사실을 모르는지...그래도 그 자매분도 저도 이 자리에 나와 모두와 연대하고 힘을 내 싸우기 위해 나왔다는 사실이 우리의 발전이라 생각했습니다.그때 저의 눈물은 여러 감정이였고 그 감정은 지금의 저에게 또다른 힘을 줍니다.살아주셔서 감사하고 우리 함께 싸우고 이겨냅시다!
18.
원래는 자격증 공부를 하려던 날이라 늦게 가려다가 마지막 시위인데 첫 시작부터 가자 마음먹고 간 날이었어요.이날 3시부터 간걸 정말 후회하지않았어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것부터 감동..안좋은 일로 모인것이지만 다같이 함께한다는것에 힘을 얻었습니다. 이게 마지막 해일의 시위라고해도 우린 다음에 꼭 다시 만날거라 믿어요!! 시위를 나가도 세상이 조용하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움직임은 계속 될거니까 조금이라도 변하고 있다고 믿어요 아무튼 사랑합니다~
19.
나는 실패하여 혼자 시위에 나갔다. 개개인을 설득하기에 실패했다기 보다는 백래시에 진 느낌을 받았다. 나는 내 또래를 설득할 만한 에너지를 잃어왔고 기다림과 포기 그 어디쯤에 와있다. 하지만 오늘 본 것은 분명 미래적인 모습이었다. 이들을 내년에 어떤 시위에서 또 마주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 미래를 그리자면 나는 단연코 이 자매들과 그리고 싶다. 이들과 오늘은 질서정연하고 또 어쩌면 조용한 시위를 했지만, 좀더 과격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물리적인 힘까지 쓰면서까지라도 시위하고 싶다. 그래서 더 많은이가 긴장하며 우릴 목도할 수 있게 하고 싶다.시위조차 여자들은 모난것이 없구나라고 느꼈던게 슬프게 다가왔다. 속은 갈갈이 찢겼는데 우린 뭔가를 때려부술수도 없다. 파괴하기 이전에 우리는 속으로 복잡한 과정을 거쳐 성공하는 삶 이룩하기라는 목표설정에 이른다. 어쩌면 이렇게 고차원적일 수 있는지.세상을 바꾼다면 그 주체는 자매들이어야하고, 세상을 가진다면 역시 자매들이 가져야할 것이다. 그럴 가치가 있는 것은 자매들 뿐이다.
20.
페미사이드 시위에 다녀왔다.처음으로 참여한 여성인권시위이다. 애초에 시위 참여가 처음이긴 하다.
예상보다 늦게 도착해서 허둥지둥 출구를 찾는데, 자꾸 눈길이 가는 사람이 있었다. 숏컷에, 하얀 양털 플리스를 입고 종각역 4번 출구를 향해 바삐 걸어가는 발걸음. 이 날 시위의 드레스코드는 ‘하얀색’이었다.
출구를 나와 어디로 가야하는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는데, 작지만 분명하게 사람들이 움직이는 방향이 보였다. 그대로 따라가 시위장 입장 줄에 섰다.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
조금씩 앞으로 가는 동안 종이피켓과 흰 천, 방석을 받았다.
현장으로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자유발언을 들었다. 내용, 목소리 크기, 얼굴 공개 여부 그런 거 다 상관 없이 정말 대단해 보였다. 다 내 또래이거나 몇 살 위아래일텐데. 다들 페미니스트가 된 지 얼마나 됐을까? 또 얼마만큼 공부했을까? 얼마나 파고들어야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동경과 반성의 연속이었다.
자유발언이 끝날 때마다 구호를 다같이 외쳤는데, 그 내용이 온통 분노와 절규 그리고 연대였다. 외치다가 목이 잠겨 잠시 멈췄다가 다시 소리 내길 반복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구호는 “죽은 여자 목소리는 안 들려서 넘어가고 죽을 여자 목소리는 무시하면 그만이냐”.
퍼포먼스 차례에 다같이 불렀던 「하얀 행진」은 오늘도 머릿속에서 계속 맴돈다. 여성인권시위에서 교과서처럼 부르는 곡이 없어 일부러 만드셨다는 곡.유명한 가수가 부른 것도, 어딘가에 실려 널리널리 퍼진 것도 아닌데 그 자리에 있던 여성들이 한 목소리로 부르는 것이 자꾸 벅차올랐다.
마지막 순서였던 행진은 사실 처음에 고민했다.
시위장을 향해 가면서도, 하면 하고 말면 말지 싶었다. 행렬을 정돈할 때 잠시 어수선했는데, 그때 정말 진지하게 잠깐 생각했다. ‘튈까,,?’ 너무 추웠다. 게다가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혼자라고 생각했었다.신호에 맞춰 횡단보도를 건너느라 어쩌다보니 참여하게 되었는데, 결론적으로 안 갔으면 후회할 뻔했다. 연대를 가장 크고 깊게 느꼈던 시간이었다.추운 겨울날 깜깜한 저녁 광화문에 울려퍼지는 여성들의 외침이라니. 그리고 그곳에 내 목소리가 함께한다니!
감기가 완전히 낫질 않아서 자꾸 목이 간질거렸는데, 트럭에서 선도하며 목이 터져라 외치던 선생님들을 보면서, 또 내 귀에 들리는 자매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더, 더 크게 내고 싶었다. 더 크게 지르고 싶었다. 우리 여기 있고 잘 살아있다고. 미처 오지 못한 자매들의 몫까지. 그리고 그들이 있는 곳까지 닿도록.
늘 그래왔듯 어른들의 걱정은 아이들의 오롯한 사상 확립을 방해한다. 나 또한 그런 걱정을 받으며 자라 그게 당연한 세상을 살아왔기에, 시작이 다소 늦었다.그러나 이번 경험으로 시작점이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어느 시기에,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되었든 우리는 한 마음 한 뜻으로 세상을 바꿔나갈 거니까.그리고 이젠 정말 더이상, 한 명도 더 잃을 수 없으니까.
이렇게나 “잘” 살아있음을 느낀 게 얼마만인지. 갈까 말까 고민되면 가라는 이야기를 듣고, 또 내 사랑하는 친구의 멀지만 커다란 응원을 안고 간 게, 참으로 다행이고 감사하다.앞으로 이런 자리가 있으면 꼭 또 가야겠다.알아야겠다, 배워야겠다. 공부해야겠다. 알려야겠다.살아야겠다, 살려야겠다. 힘을 쓰고 주고 받아야겠다. [221204] 팀 해일의 페미 사이드 규탄 시위에 참여하기까지
21.
2021년 8월, 팀 해일이 국민의힘 당사 앞에서 페미니즘 백래시 규탄 시위를 열었을 때 그 관경을 지켜보기 위해서 서울로 달려간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세상 돌아가는 꼴이 역겹다 못해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여자가 길에서 죽고, 집에서 죽고, 일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 처벌이 터무니없이 약했다. 여자가 맞을 짓을 했다느니, 범죄자의 사정이 딱하다느니 온갖 핑계를 대면서 감형하고 집행유예를 주었다. 사람이 죽었는데 기물 파손보다 더 적은 형량이 나오는 걸 지켜보면서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했다.
또 출산율에 대한 담론도 그랬다. 7,80년대에 자행된 대규모 여아 낙태로 인한 성비 불균형은 모른척하고 요즘 출산율이 낮아지는 원인이 여자들의 이기심 때문이라는 사람이 많았다. 페미니스트가 남녀 갈등을 유발해서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갈등을 일으키는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에 직면하고 해결해야 하는데 명백히 존재하는 여성차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도리어 문제 제기하는 여성들을 매도하는 분위기가 너무 이상했다. 모든 게 다 여자 탓이고 너희들은 괘심하고 맞아 죽어도 싸다는 그런 분위기가 역겨운 걸 넘어 무서웠다.
여자아이들을 태어나기도 전에 잔뜩 죽여놓고, 그런 끔찍한 역사의 과오를 반성은커녕 여전히 여자 탓하며 은폐하고 있는데 뭐 하나 제대로 해결된 게 없는 그런 현실인데 더 이상의 성차별은 없으며 여가부가 역사적 소임을 다했기 때문에 폐지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는 것을 보고 밥도 넘어가지 않았다. 선진국은 성 평등 지수가 높을수록 출산율이 올라간다는 통계가 있다. 어느 때보다도 여가부가 필요한 시점인데 여가부를 폐지하고 저출산 정책을 하겠다는 어이없는 소리를 하며 그걸 공약으로 내세우는 정치인들을 보았다. 특히 그것이 안티 페미 남성들의 환심을 사서 표팔이 하려는 하찮은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 가증스럽고 역겨웠다.
컨디션이 매우 나쁜 날이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파란색 옷을 대충 주워 입고, 무작정 서울로 달려갔다. 발언자들의 목소리, 방해자들의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흐릿하게 들려왔다. 푸른 옷을 입고 단단히 서 있는 여성들이 보였다. 힘이 되고 싶었지만 여성계 인맥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가진 거라곤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뜨거운 마음과 시끄러운 머릿속뿐이었다. 근처 카페에서 급하게 SNS 계정을 파고, 1인 피켓을 만들었다. 그리고 활동가들의 곁에 조용히 서 있었다. 팀 해일의 연대장 분들로부터 사탕을 받았다. 내 피켓에 적힌 소박한 문구를 소중히 찍어서 퍼뜨려 주신 분도 계셨다. 그때 느꼈던 강한 연대가 큰 힘이 되었다. 나는 혼자다.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을 것이다. 무섭다. 혼란스럽다. 죽을 것 같다. 그런 괴로운 소리가 잠잠해지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연대의 힘이었다.
그 이후로 적극적으로 사회참여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여가부 폐지 공약에 항의하는 사람들'의 기자회견에서 자유발언을 했다. 엄마는 내가 시위에 나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공격적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싫어하니까 부드럽게 말해야 해."
내가 집을 나서기 전에 들었던 말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목소리 크다고 여기저기서 욕을 먹었다. 주변 남자애들은 목소리가 크면 씩씩하다는 말을 들었다. 발표 시간에 초콜릿이나 사탕이 걸려 있으면 너도나도 소리를 높이며 자신을 드러냈던 것이다. 남아들이 그렇게 성장하는 동안 여아들은 "쟤 존나 나댄다."라고 욕먹지 않기 위해서 얌전히 조용히 손을 들어야 했고, 혹여나 자신의 욕구에, 혹은 존재 자체에 누군가가 불편할까 있는 듯 없는 듯 나보다는 타인의 수요를 채워주며 자랐다. 자기 개발서는 사람들 눈치 보지 말고 네가 원하는 삶을 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절대 세상은 우리가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자아를 갖고, 의견을 갖고, 꿈을 갖고, 이상을 갖고 그것을 관철하고자 노력하면 인성과 사회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 취급을 받게 되었다. 은근한 따돌림과 욕설에 시달려야 했다.
"쟤 눈치 더럽게 없어." "사회성 왜 이리 떨어져?" "존나 나댄다." "재수 없다."
꿈이 있는 여성은 눈치 없는 게 아니라 눈치 보지 않는 것인데도 쉽게 따돌림의 대상이 되었다. '눈치'란 상대가 욕구를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 주는 능력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욕구를 알아내기 위해 비언어적 표현까지 일일이 관찰하고 해석하는 것,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 자신의 욕구를 숨기는 것, 개척자가 아닌 노예의 덕목. 그것은 능력이나 개인의 특성이라기보다는 노동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우리는 그런 과중업무에 매일같이 시달려 극도로 피곤하고, 삶을 개척할 여유가 없고, 서로에게 신경질적 이었다. 우리는 진짜 문제를 의식하지도 못한 채 그런 비방과 욕설로 서로를 끌어내려 왔던 것이다. 자유민을 질투하는 노예의 모습을 하고서 물귀신처럼 끌어내려 왔던 것이다.
"여성 유권자가 명한다!"
어느 멋있는 여성의 힘 있는 목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쩌렁쩌렁 울려 퍼질 때, 그동안 입을 막고 목을 조여온 족쇄가 풀리는 듯했다. 통쾌한 순간이었다. 여성들은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동등한 국민이요 인간이다. 여성들은 헌법의 수호 아래 마땅한 참정권을 갖는 유권자이다. 비참한 여자들끼리 머리채 잡고 싸우는 모습을 비웃으며 관조하던 네놈들 앞에 당당히 요구할 것이다. 여성들의 빼앗긴 이권을 내놓아라. 생존권을 내놓아라. 이는 명령이다!
그날 나는 사방에서 교정하려 애를 쓰고, 깎아내려도 고쳐지지 않았던 그 큰 목소리로 박수를 받게 되었다. 위로가 되었다. 나를 욕하는 사람, 나를 위해주는 사람 할 것 없이 내 큰 목소리를 싫어했는데 여기서는 장점이 되는구나.
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빚을 졌다. 이들의 곁을 지켜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한동안 나의 프로필 사진을 차지한 분홍색 튤립의 꽃말은 '사랑의 시작'이다.
22.
광주에서 열린 신당역 살인사건 피해자 추모집회(220928)에서 자유발언을 신청하고 신당역 사건의 희생자와 페미 사이드 희생자들에게 추모곡을 바쳤다. 그날 김주희 님으로부터 12월에 열리는 집회에 가수로 지원하는 게 어떻냐는 제안을 받았다. 전국에서 동시에 열리는 집회인데 아직 광주 가수를 구하지 못했다고 하셨다. 김주희 님은 멀리서 봤을 때와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없는 시간 쪼개 집회 준비하고, 필요한 인력과 자원을 구하고, 테러범들의 화살받이가 되어가며 선봉에서 수고하시는 모습은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나는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거라곤 교회 찬양팀 활동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여성들에게 빚진 마음이 있어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선정된 곡은 여성인권 시위를 위해 만들어진 '하얀 행진', 여성 인권 운동가 김복동 할머니를 위한 헌정곡 '꽃', 뜨거운 연대감을 주는 대중가요 '다시 만난 세계'였다. 의미 있는 선곡이었다고 생각한다. 노래에 대해 검색해 보면서 우리가 마땅히 기억해야 하는 김복동 할머니의 삶에 대해서도 알아보게 되었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는 명곡이라 불릴 만했고, 아이돌 노래를 기피하던 내게 신선한 경험이 되기도 했다. 세 곡 모두 노래를 부르는 동안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선사했다.
광주에 왔을 때 도시 전체가 하나의 추모공간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민주화에 기여한 학생들의 노고를 기리는 문구가 어딜 가든 붙어 있었다. 노동운동가들의 목소리, 여성의 목소리, 인권과 관련된 온갖 문구들이 외지인인 나를 공기처럼 둘러쌌다. 이것으로 내가 광주에서 참여한 여성운동은 두 번째이다. 서울에서 페미니즘 운동을 할 때는 목청 높여 저급한 말을 쏟아내는 안티 페미 남성들이 정말 많이 눈에 띄었는데 이곳은 남성 연대자가 꾸준히 눈에 띄고, 도시의 숙연한 분위기 때문인지 전반적으로 고요했다.
얼어붙을듯한 추운 날씨였다. 너무 추워서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시간 될 때까지 카페에 있다가 나왔지만 스태프분들은 그런 날씨에도 몇 시간 일찍 나와서 준비하고 계셨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스태프분들은 분주한 와중에도 목 관리를 해야 한다며 카페에서 따뜻한 걸 마시고 있는 게 좋겠다고 나를 챙겨주시기도 했다. 장갑을 빌려주신 분이 계셨다. 손 난로를 나눠주시는 분도 계셨다. 그게 없었으면 정말 힘들었을거다. 분명 그냥 손 난로일 뿐인데 그걸 잡고 있으면 서로의 손을 잡고 체온을 느끼는 것 마냥 일체감이 느껴졌다. 차가운 날씨에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순간이었다.
나는 시위에서 발언할 때 오랫동안 쌓인 울분을 토해내는 편이라 목이 쉽게 나가버린다. 그날은 퍼포먼스가 있으니 자제하려 했지만 실패한 것 같다. 자유발언은 13분짜리였고, 읽다 보니 화가 나서 점점 언성이 높아졌고, 목이 갈라졌다. 안 그래도 추위 때문에 목소리가 떨리고, 숨이 짧아졌는데 말이다. ^p^ '다시 만난 세계'를 같이 부를 사람을 구한 게 참 다행이었다. '꽃'까지는 어떻게든 버텼는데 그 뒤에는... (이하 생략)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 거야!" 다 같이 부르니 정말 기분 좋은 곡이었다. 함께 있으니까 내 실수와 연약함이 감추어졌다. 우리는 각자가 서로의 힘이 되었다.
정말 많은 여성들이 용기를 내주셨다. 누구에게도 한 번도 말해 본 적 없는 아픈 기억을 즉석에서 공유해 주신 분들도 있었다.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말도 안 된다. 강간범은 구속되지 않았다. 친족 성폭력을 당해 가해자와 격리되길 원했지만 그런 최소한의 요구조차 가족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해야 했다. 그분들은 자신은 페미니즘 덕분에 스스로의 경험을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얻었다면서 더는 누구도 혼자 울지 않으면 좋겠다면서 또 다른 누군가를 구했다.
그날 여성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 흘리며 헤어졌다. 내 인생에서 가장 뜨거운 순간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나는 '진짜 선의'를 보았다. '진심'을 보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면 좋겠다는 그런 답답한 마음이 생겼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건 다른게 아니라 상대가 누구든 생명이 걸린 문제 앞에선 절대 타협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한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용서받았다 여기며 당연하다는 듯 웃는 이들과 배척 당해도 아랑곳 않고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고 목놓아 외치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강도 당한 이웃을 못 본 척 지나가는 성직자와 선한 사마리아인의 대비를 보는 듯하다. 자기 기분 나쁘다고 연대 안 하고, 자기한테 이득 안된다고 연대 안 하고, "너희들이 이렇게 이렇게 안 하면 안 구해 줄 거야."라고 말하면서 사람 살리는 일에 조건 붙이고 그런 건 분명히 옳지 않다. 사람 생명이 걸린 일에 발 벗고 나서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모두가 그렇게 변화해서 아무도 혼자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자의 죽음이 벽지처럼 여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23.
신당역 살인사건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이 괴로웠다.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고 추모공간을 다녀와서는 내 안에 분노가 가득했다. 한 생명이 죽었다.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죽어야하는가. 마음 한 켠에 돌 주머니를 얹어 놓은 기분이었다.연이은 여성들의 죽음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정말 아팠다.
나는 우연히(사실 필연임) 해일 시위 소식을 듣게 되었다. 원래 정해진 일정대로라면 참여할 수 없었겠지만 우연은 내 발걸음을 보신각 앞으로 데려갔다. 시위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광경은 상을 치르는 모습이었다. 가지런히 앉아서 흰 천을 두르고 피켓을 들고 앉아있는 자매들의 모습은 꼭 내 마음속을 형상화한 모습이었다.
꼭 그 모습이 내 마음과 같았다. 자매들이 앉아있는 모습만 봤을 뿐인데 마음이 일렁였다. 여성들의 죽음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매들의 모습은 나를 그 생각에서 깨어 나오게 했다. 우리는 함께 모였고 세상에 소리쳤고 서로를 확인했다. 조롱을 들을수록 싸늘한 눈초리를 받을수록 수군대는 소리를 들을수록 더 용기가 생겼다. 내 앞에도, 내 뒤에도, 내 옆에도 나의 사방에는 한 마음을 품은 자매들이 있었다.
행진을 하면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외침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추운 날에 왜 저 여성들은 거리로 나왔을까? 대체 뭐라고 소리 치는걸까 궁금해 하고 찾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날 오후, 분명히, 나는 그 일이 일어났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영향력이 파도처럼 스며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버스 안에서 우리를 바라보던, 길거리를 걷다가 멈춰서 우리를 구경하던, 가게 안에서 우리의 행진을 쳐다보며 속닥거리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일렁이게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함께 모였고 세상에 소리쳤고 서로를 확인했다. 그리고 세상을 일렁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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