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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교인터넷방송ibtn.net 원문보기 글쓴이: 경인
향곡 스님-참수행의 길을 밝히는 옳곧은 선지식(BTN 인연)
향곡혜림(香谷蕙林) 선사
<다시 듣는 사자후>
"천상천하 독보하며 짝할 이 없으니"
불법(佛法)의 대의(大意)
여러분, 불법(佛法)의 대의(大意)란 무엇입니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보광삼매(普光三昧)에 드시어 실상무상(實相無相)이요, 불립문자(不立文字)요, 교외별전(敎外別傳)이요, 심심미묘(深深微妙)한 최고무상의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열반묘심(涅槃妙心)을 마하가섭에게 부촉하셨습니다. 그 뒤 거듭거듭, 고금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큰 지혜의 성인들이 이 세상에 출현하여 스스로가 원만하게 갖추고 있는 걸림없는 큰 법을 자유자재하게 쓰셨습니다.
때로는 제왕의 집에 태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고관대작의 집에 태어나기도 하며, 때로는 장자의 집안에, 때로는 부귀한 집안에, 때로는 빈천한 가정에 태어났고, 때로는 여인의 몸을 받아 태어나서, 여러 번 부처가 되기도 하고 조사가 되기도 하였으며, 보살의 몸을 나타내어 세간과 출세간에 머물렀습니다.
번뇌가 없는 큰 지혜와 원만히 통하고 원만히 밝은 황하의 모래알과 같이 많은 묘용(妙用)과 자재하고 걸림없는 백천 법문과 무량한 삼매를 본래 스스로 갖추었습니다. 본래 스스로 원명(圓明)하고 청정하고, 본래 번뇌가 없고 본래 생사가 없고 본래 미함과 깨달음이 없으며, 본래 차례가 없고 본래 계급이 없고 본래 범부와 성인이 없고 본래 닦음과 얻음도 없는 것입니다.
만법이 원만하고 만법을 갖추었고 만법이 한결같고 만법이 청정일여할 뿐만 아니라 본래 일이 없나니, 시방세계에 빛나고 인연 속에서 당당하게 머물며 삼계 속에서 안락하고 자재하며 걸림이 없기 마련입니다. 때를 만나면 병에 따라 약을 주고 바람이 불면 풀이 쓰러지고 물이 넘치면 도랑을 이루나니, 자연히 못과 쇠를 끊고 수만 자루의 칼로 벽을 세우며, 쇠를 녹여 금을 이루고 금을 녹여 쇠를 이름이 골수로 사무쳐 자재롭고 원통(圓通)합니다.
또 때로는 향상(向上)의 한마디를 나타내고 때로는 향하(向下)의 한마디를 나타내며 때로는 여래선을, 때로는 조사선을, 때로는 최초의 한마디, 때로는 최후의 한마디를 합니다. 더불어 때로는 큰 기틀과 큰 작용을 보이고 때로는 죽이고 살리고 주고 빼앗으며, 때로는 선정에서 나와 마음대로 향하고 때로는 거두고 놓음을 자유롭게 하게 됩니다.
주고 빼앗음에 짝할 이 없으며, 비춤과 씀이 동시에 이루어지며, 방편과 진실이 자재하고 순(順)과 역(逆)에 걸림이 없고 응용이 무애한 것입니다. 네거리 한복판에서 마음대로 노닐고, 티끌 세상에 묻혀 오른쪽을 마주보며 왼쪽을 바로보고 왼쪽을 마주보며 오른쪽을 보나니, 전광석화로도 통할 수 없고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티끌에도 물들지 않고 시방세계에 자취를 남김 없이 대자재 무애하며 크게 청정하고 크게 당당하고 크게 활발한 것입니다.
황하의 모래알처럼 많은 세계가 본래 대해탈의 보리세계(菩提世界)요, 백천 황하사 모래알과 같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세계가 본래 청정한 대적멸도량(大寂滅道場)입니다. 꽃과 풀들은 모두 제불께서 몸을 나타낸 것이며, 모든 사람과 물건들은 일천 성인께서 정법을 제창함이며, 모든 국토 속에서 법을 잃고 법을 파하는 것은 모두 도인께서 참된 법을 마음대로 수용하여 다함이 없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작용이 무궁하고 취함 또한 끝이 없어서, 영원토록 천하를 홀로 거닐고, 삿됨이 없음을 드러내며, 영원토록 자유자재하고 생사의 길에 빠지지 아니하며, 영원토록 고요하고 밝으며 한결같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또한 영원토록 뛰어나고 한가로우며, 영원토록 체(體)가 스스로 한결같으며, 영원토록 뚜렷이 밝고 고요히 비추며 원만히 통하고 원만히 밝으며, 영원토록 장애가 없으며 영원토록 광대하고 신령스럽게 통하며 밝게 빛납니다.
“본래 번뇌가 없고 생사가 없고
미함과 깨달음이 없으며, 범부와
성인이 없고 닦음과 얻음도 없다”
저 황하의 모래알과 같이 많은 겁 동안 높고 높으며 다함없는 겁 동안 진체(眞體)가 원만히 밝나니, 마치 손위에 올려놓은 여의주에 사물의 모든 모습이 순식간에 나타나는 것과 같으며, 밝은 거울 앞에 검은 얼굴의 오랑캐가 서면 검게 나타나고, 붉은 얼굴의 한인이 오면 붉게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고인께서는 “향상(向上)의 일로(一路)는 일천 명의 선인도 전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물며 나머지 사람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이에 이르러서는 삼세제불도 몸을 잃고 목숨을 잃으며, 역대조사도 혼이 날아가고 쓸개가 없어지며 문수와 보현보살도 숨을 죽이고 말을 못하며 천만 성인 모두가 삼천리 밖으로 물러가고 조주와 운문스님도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리기 마련입니다. 잠깐이라도 입을 열고 몸을 움직이면 몽둥이를 빗발치듯이 맞게 되니, 곧바로 도를 얻어 입 안에 가득 찰지라도 뼈가 쌓임이 저 산과 같고, ‘아이고’ 곡함을 결코 면치 못하게 됩니다.
만일 이 속에서 살아남기만 하면 능히 대장부의 일을 마치게 됩니다. 알겠습니까.
위음왕불 이전으로 한걸음 나아가니
산은 밝고 물 맑으며 해와 달은 영원하네.
천상천하 독보하며 짝할 이 없으니
천선과 인간 세상의 으뜸가는 법왕일세.
“할!” “아이고, 아이고” “허허” “훔 탁”
<향곡선사 법어>에서 발췌
정리=박인탁 기자 parkintak@ibulgyo.com
향곡 스님(1912~1978)
법호는 향곡(香谷)이며 법명은 혜림(蕙林)이다. 16세 때 둘째 형을 따라 양산 내원사에 입산해 18세 때 성월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1930년 부산 범어사에서 운봉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향곡스님은 조선시대 500년간 숭유억불정책으로 위축된 선(禪)불교 중흥의 기틀을 다진 경허스님의 법맥을 잇게 된다. 즉 경허 만공 운봉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이어 선풍을 크게 진작시킨 선지식이다. 향곡스님의 법맥은 이후 법제자인 진제스님(현재 대구 동화사 조실)을 통해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향곡스님은 선암사, 불국사, 동화사, 선학원 등 여러 선방의 조실로서 20여년간 계시며 법의 깃을 높이 세우고 종풍을 드날렸다. 특히 스님은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성철, 청담, 자운, 월산, 혜암, 법전스님 등과 함께 ‘봉암사 결사’를 하며 수행정진했다. 향곡스님은 봉암사 결사를 함께 한 성철스님과 세납이 같을 뿐만 아니라 평생을 함께 한 도반이었다. 성철스님은 1978년 향곡스님이 세수 67세, 법납 50세로 열반에 들자 ‘곡향곡형(哭兄香谷)’이란 글을 지을 만큼 막역한 사이였다
출처 : 불교신문 2139호 | 2005-06-22
향곡혜림(香谷蕙林)
향곡 혜림(1912~1978) 스님은 16세에 내원사로 출가하여, 그 곳에서 조실이신 운봉(雲峰) 선사의 법문을 접하고 도무지 그 뜻을 알 수가 없어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한시도 의심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운봉 선사를 시봉하며 3년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용맹정진하던 중에, 늦가을 어느 날 정진하다가 갑자기 산골짝 돌풍이 몰아쳐서 문짝을 때리는 소리에 홀연히 마음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때가 아직 삭발도 하지 않은 행자시절이었는데, 행자(行者)는 곧장 조실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행자의 거동이 사뭇 다르므로, 운봉 선사께서 간파(看破)하시고 대뜸 목침을 가리키시며,
"한 마디 일러라!"
하시니, 행자는 즉시 발로 목침을 차 버렸습니다.
"다시 한번 일러라."
"천마디 만마디가 모두 꿈 속에 꿈을 설(說)한 것이니, 모든 불조(佛祖)께서 나를 속이신 것입니다."
이에 운봉 선사께서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이때부터 혜림 스님은 줄곧 운봉 선사를 시봉(侍奉)하면서 탁마(琢磨)받으며 정진하셨습니다.
운봉 선사께서는 1944년, 열반에 드시기 전에 혜림 스님에게 향곡(香谷)이라는 법호와 전법게(傳法偈)를 내려서 임제정맥(臨濟正脈)을 부촉하셨습니다.
부향곡혜림장실(付香谷蕙林丈室)
서래무문인(西來無文印)
무전역무수(無傳亦無受)
약리무전수(若離無傳受)
오토부동행(烏兎不同行)
향곡 혜림 장실에 부치노라
서쪽에서 건너온 문자 없는 법인은
전할 것도 받을 것도 없는 것
만일 전하고 받음 없는 것조차 뚝 떠나면
까마귀는 날고 토끼는 달리느니라.
향곡 선사께서는 그 후 1947년에, 문경 봉암사에서 제방의 발심선객(發心禪客)들과 함께 "과거에 안 것은 다 접어두고 참으로 부처님과 조사의 경지에 이르도록 다시 분심(憤心)과 신심(信心)을 내어 멋지게 공부하여 보자."며 용맹정진에 들어가셨습니다.
하루는 도반(道伴) 스님이,
"'죽은 사람을 죽여 다하여야 산 사람을 보고, 죽은 사람을 살려 다하여야 비로소 죽은 사람을 볼 것이다.'하는 법문의 뜻이 무엇인가?"
라고 묻자, 선사께서는 여기에 막혀 몰록 화두일념삼매(話頭一念三昧)에 드셨습니다.
완전히 대사인(大死人)이 되어 삼칠일간(三七日間)을 일념삼매에 빠지셨다가, 하루는 도량을 걷는 중에 문득 자신의 양손이 흔들리는 것을 발견하고 대사각활(大死却活:크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 활연대오(豁然大悟)하셨습니다. 오도송을 읊으시기를,
홀견양수전체활(忽見兩手全體活) 홀연히 두 손 보고 전체가 드러나니
삼세불조안중화(三世佛祖眼中花) 삼세의 불조가 다 눈병에 헛꽃일세
천경만론시하물(千經萬論是何物) 천 경전과 무수 법문, 다 무슨 물건인가
종차불조총상신(從此佛祖總喪身) 이로 좇아 불조사가 다 상신실명 하였도다.
봉암일소천고희(鳳岩一笑千古喜) 봉암사에 한번 웃음 천고에 기쁨이요
희양수곡만겁한(曦陽數曲萬劫閑) 희양산 구비구비 만겁에 한가롭네.
내년갱유일륜월(來年更有一輪月) 내년에도 또 있겠지, 수레같이 둥근 달
금풍취려학려신(金風吹處鶴戾新) 금풍이 부는 곳에 학의 울음 새롭도다.
이로부터 천하 노화상(老和尙)들의 공안(公案) 법문에 속지 않고 걸림없이 임의자재(任意自在)로 대사자후(大獅子吼)를 하셨습니다.
이렇게 봉암사에서 향상(向上)의 진리를 깨치신 후 제방 선지식들을 두루 참방하여 거량(擧揚)하시니, 비로소 불조(佛祖)의 정문정안(頂門正眼)이 만천하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한국 선종사에 향상일로(向上一路)의 정안(正眼)의 장(場)이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선사께서는 제방 선원의 조실 초청을 받아 각 곳에서 납자를 지도하시고 또, 동해안 월내 묘관음사(妙觀音寺)에 선원을 개설하여 후학들을 지도하는 한편, 조계산 선암사, 경주 불국사, 팔공산 동화사의 조실 및 선학원장(禪學院長)을 역임하시면서 향상일로의 종풍(宗風)을 크게 선양하셨습니다.
그러던 중에 선사의 세수 56세이던 1967년, 하안거(夏安居) 해제 법회시에 제자 진제(眞際) 스님과 법거량이 있었습니다.
선사께서 상당(上堂)하시어 묵좌(默坐)하고 계시는데 진제 스님이 나와 여쭈었습니다.
"불조(佛祖)께서 아신 곳을 여쭙지 아니하거니와, 불조께서 아시지 못한 곳을 스님께서 일러 주십시오."
"구구는 팔십일이니라."
"그것은 불조께서 다 아신 곳입니다."
"육육은 삼십육이니라."
이에 진제 스님이 예배드리고 물러가니, 선사께서는 아무 말 없이 법상에서 내려오셨습니다.
다음날 진제 스님이 다시 여쭙기를,
"불안(佛眼)과 혜안(慧眼)은 여쭙지 아니하거니와 어떤 것이 납승(衲僧)의 안목입니까?"
하니, 향곡 선사께서 답하셨습니다.
"비구니 노릇은 원래 여자가 하는 것이니라."
그러자 진제 스님이,
"오늘에야 비로소 큰스님을 친견하였습니다."
하니, 향곡 선사께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보았느냐?"
"관(關)!"
"옳고, 옳다."
여기에서 향곡 선사께서, 전법게(傳法偈)를 내려 태고 보우 선사로부터 경허-혜월-운봉-향곡 선사로 이어져온 임제정맥(臨濟正脈)을 진제 스님에게 부촉하셨습니다.
부진제법원장실(付眞際法遠丈室)
불조대활구(佛祖大活句)
무전역무수(無傳亦無受)
금부활구시(今付活句時)
수방임자재(收放任自在)
진제 법원 장실에 부치노라
부처님과 조사의 산 진리는
전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라
지금 그대에게 활구법을 부촉하노니
거두거나 놓거나 그대 뜻에 맡기노라.
1978년 12월 15일 해운정사(海雲精舍)에서 다음과 같이 열반게(涅槃偈)를 읊으시고, 사흘 후인 1978년 12월 18일 인시(寅時)에 세수67세, 법랍 50세로 입적하셨습니다.
석인영상취옥적(石人嶺上吹玉笛) 목인은 잿마루에서 옥피리를 불고
목녀계변역작무(木女溪邊亦作舞) 석녀는 시냇가에서 춤을 추네
위음나반진일보(威音那畔進一步) 위음왕불 이전으로 한 걸음 나아가니
역겁불매상수용(歷劫不昧常受用) 역겁에 매하지 아니하고 언제나 수용하리.
향곡 선사 영전(靈前)에 제자인 진제 스님은 게송을 지어 바쳤습니다.
밝고 밝은 아침 해가 하늘에 비치는 듯
시원스런 맑은 바람 대지에 깔리는 듯
이렇게 해도 옳고 이렇게 안 해도 옳으니
초목와석은 언제나 광명을 놓고 있네.
이렇게 해도 옳지 않고 이렇게 안 해도 옳지 않으니
삼세제불이 거꾸로 삼천리나 물러감이라.
애닯다!
밝은 해는 수미산을 감돌고 있고
붉은 안개는 푸른 바다를 꿰뚫었도다.
명명고일(明明?日)은 여천(麗天)하고
삽삽청풍(颯颯淸風)은 잡지(?地)로다.
임마야시(恁?也是) 불임마야시(不恁?也是)여
초목와석(草木瓦石)이 방대광명(放大光明)이요
임마야불시(恁?也不是) 불임마야불시(不恁?也不是)여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도퇴삼천리(倒退三千里)로다.
돌(?) 백일(白日)은 요수미(繞須彌)하고
홍하(紅霞)는 천벽해(穿碧海)로다.
출처 : 해운정사
향곡선사 법어
산시산 수시수(山是山 水是水)
상당하시어 잠시 묵묵히 계시다가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이르시기를,
산승이 법상에 올라 온 까닭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를 바로 보고 바로 알면 일대사(一大事)를 다 마쳐서 아무것도 더할 것이 없느니라.
하늘은 하늘이요 땅은 땅이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니라.
天是天 地是地 山是山 水是水
여기에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뺄 것인가? 하늘은 하늘대로 항상 무심하게 법문을 설하고, 땅은 땅대로 항상 무심하게 대법륜(大法輪)을 굴린다. 하늘과 땅만이 아니라, 산도 그렇고 물도 그러한 것이다.
그러기에 고인은 말씀하셨다.
"대지에 티끌이 없어졌거늘 어떤 사람이 진리의 눈을 뜨지 못하겠느냐(大地絶塵埃 何人眼不開)?"
실로 여기에는 생사도 없고 번뇌도 없고 범부와 성인도 없나니, 삼세제불이나 역대조사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개개가 모두 원만하게 구족하고 있는 것이다.
차를 만나면 차를 마시고 밥을 만나면 밥을 먹으며
가고 싶으면 가고 앉고 싶으면 앉는도다.
도리가 이와 같거늘 삼세제불은 어찌하여 이 세상에 나왔으며, 역대조사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나온 것일까?
'부처님의 팔상성도(八相成道)는 중하근기(中下根機)를 위해서'라는 말이 있지만 이것은 맞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만이 법상 위에 앉아 계시지만, 땅에서도 수없는 부처님이 솟아오르고, 허공에서도 수없는 부처님이 내려오시고, 사방팔면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부처님이 와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앉아 계신 주위를 오른쪽으로 무수히 돌고 있었다.
어떻게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팔상성도를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불법은 깊고 깊어서 생각만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고인은 말씀하셨다.
"최초불(最初佛)인 위음왕불 이전에 분명히 알았다고 하여도 삼십 방을 맞고, 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사찰에 있는 찰간대(刹竿臺)를 보고 다 알았다고 하여도, 돌아가서는 역시 삼십방을 맞는다."
그렇다면 이 방망이를 면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이겠는가? 정안(正眼)을 갖춘 본분종사라면 바로 이때에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이 답이 나오는 것이다.
오늘 산승이 법상에 올라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고인들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피를 머금어 남에게 뿜으면 먼저 자기 입이 더러워진다."
"약은 병든 이를 낫게 하기 위해서 금병(金甁)에서 나오고, 칼은 난리를 진압하기 위해 보배갑에서 나온다."
이렇듯 산승은 하는 수 없이 법상에 올라온 것이니라.
이 법은 대신심과 대의심과 대용맹심으로 공부를 해야 성취할 수가 있다. 이 세 가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고인들은 위태로움과 득실(得失)을 돌아보지 않고, 천리 만리길을 멀다 하지 않고 선지식을 찾아가 친견을 하고 법의 문으로 들어가 일대사를 해결하였던 것이다.
과연 지금도 그렇게 공부할 근기를 가진 사람이 있는가? 공연히 선방이라고 지어서 '공부합네' 하며 모여 있어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직 대신심, 대의심, 대용맹심이 아니면 공부는 백억 만리나 멀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 향곡은 월내의 조그마한 곳에 사는 것이 가장 좋다. 누구든지 찾아오면 나의 안목대로 말해줄 것이니, 전(廛)을 펴는 것도 그 물건이 팔릴 만한 곳에 가서 펴야 하는 것이다.
예전에 풍혈(風穴) 선사는 이십 년을 법문하여 납자를 제접하였지만, 그 밑에서 도인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이 일이 결코 쉽지가 않다.
공부는 티끌처럼 아주 미세한 것이라도 마음에 걸리는 곳이 있으면 다 틀려 버린다. 그리고 '공부를 해서 해결한다.'는 그 길만을 밟아가야지 그렇지 않고는 미륵불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공부하여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옛날 장경(長慶) 스님과 보복(保福) 스님이 함께 산에 올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보복 스님이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였다.
"바로 저곳이 묘봉정(妙峯頂)이다."
장경 스님이 말하였다.
"옳기는 옳으나 애석하도다."
장경 스님은 무엇 때문에 '애석하다'고 하였는가? 이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또 고인들이 "관(關)"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중국의 취암(翠巖) 선사는 많은 대중을 거느리고 하안거 해제일에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하안거 한철 동안 여러 대중들을 위하여 가지가지 법문을 하였는데, 취암의 눈썹을 보았는가?"
대중 가운데 아무도 답하는 이가 없었다. 나중에 장경 스님이 그 말을 듣고 답하였다.
"났다.(生也)"
보복 스님이 답하였다.
"도적을 짓는 마음이 허하다.(作賊人心虛)"
그리고 운문 스님은 "관(關)."이라고 하였다.
이 관(關)은 알기가 매우 어렵다. 일본의 관산(關山) 스님은 이 '관'자를 가지고 공부를 하여 삼 년만에 해결하였기에 이름을 관산(關山)이라 하였다. 관산 스님은 열반하기 직전에 목욕재계하고 법문을 마친 다음 산문 밖으로 나와, 절 앞의 큰 계천에 놓인 돌다리 위에 서서, 한쪽 발은 땅을 짚고 한쪽 발은 든 채로 열반에 드신 분이다.
실로 이 "관"이나 "애석하다"고 한 뜻을 안다면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본래 출가한 목적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견성성불(見性成佛)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가람을 짓고 수리하는 등의 모든 불사도 견성성불을 하기 위해 공부하는 공부인을위해서 해야지, 명예나 욕심이나 다른 생각으로 하게 되면 죄만 지을 뿐이다. 오직 바르고 참된 신심과 용맹심과 의심을 가지고 정진을 해야만 성과가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못 입고 못 먹어 중이 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공부를 자꾸 늦추어 '다음생에 하겠다'는 생각을 내면 절대로 안 된다. 금생에, 이 몸뚱이 있을 때 해결할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고인은 말씀하셨다.
"한 생각 불견(佛見) 법견(法見)만 일으켜도 나귀의 태에 들고 말의 배에 들기가 화살과 같다"
그런데 무엇을 믿고 내생에 하겠다고 미룰 것인가? 공부가 그리 쉽사리 되는 줄 아는가? 꿈만 꾸어도 그 속에서 정신을 못 차리거늘, 죽을 때에 정신을 차린다고 하여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고 말이 말로 보이고 소가 소로 보일 줄 아는가? 정신이 어디 있는 줄도 모르는데 무엇을 바로 볼 것인가? 모두가 뒤바뀌어 보일 뿐이다.
선방에 들어와서 공부를 하는 이가 먹고 입는데 정신이 팔려서는 이 정법(正法)을 도저히 이루어 낼 수가 없다. 모름지기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것과 같이 공부해야 하고, 감옥에 갇혀 고초를 받는 사람이 풀려 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언제나 끊임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를 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편안함과 잘 먹는 것만 생각하면 도심(道心)은커녕 망상과 분별과 번뇌만이 일어날 뿐이다.
어떤 사람이 단식을 하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배가 부르니까 온갖 야단들을 하는구나. 명리도 여자도 재산도 다 배가 부를 때 탐이 나는 것일 뿐, 배가 고프니 아무 생각도 없더라."
이 말과 같이, 다른 것을 일체 생각하지 않고 오직 공부 하나만 하면 안 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예전 스님네는 하루 해가 지면 다리를 뻗고 울었다는데, 그렇게 애써 공부를 하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차별삼매(差別三昧)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다.
"진대지 시방세계 그대로가 대반야요 대청정세계요 대적멸세계요 대해탈세계다." 라고 하는 등은 아무것도 아니다.
가령 "애석하다(可惜許)"든지 "관(關)"이라든지 "아이고(蒼天)" 등은 모두 차별삼매에 속하는 것이며, "조주석교(趙州石橋)"라는 유명한 공안 또한 차별삼매를 나타낸 것이다.
조주 스님께 한 스님이 찾아가 말하였다.
"오래 전부터 '조주 돌다리'라고 들리더니, 와서 보니 보잘것 없는 외나무다리뿐이로구나."
이에 조주 스님이 말씀하였다.
"너는 어찌 외나무다리만 보고 돌다리는 보지 못하느냐?"
"어떤 것이 돌다리입니까?"
그 스님이 다시 묻자 조주 스님이 답하였다.
"나귀도 건너가고 말도 건너가느니라.(渡驢渡馬)"
그 후 조주 스님이 수좌와 함께 돌다리를 보고 있다가 수좌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만들었느냐?"
"이응(李膺)이라는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조주 스님이 또 물었다.
"만들 때에 어느 곳을 향하여 먼저 손을 대었는고?"
수좌는 이 질문에 꽉 막혀 답을 하지 못하였다.
우리가 공부를 하여 모든 차별삼매를 거울에 모습을 비추어 보듯이 환하게 알아서, 천하 선지식의 말씀에 대해 조그마한 의심도 없어야만 능히 일을 마친 대장부라 할 수 있느니라.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나'라는 것이 있다든지, 그 무엇이 있으면 공부는 벌써 그르쳐 버린 것이다.
용수불개전체현(龍袖拂開全體現)하고
상왕행처절호적(象王行處絶狐跡)이로다.
임금님 어의(御衣) 소맷자락을 떨치니 전체가 드러나고
코끼리 왕이 가는 곳에는 여우의 자취가 끊어짐이로다.
<병진년 동화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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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교인터넷방송ibtn.net 원문보기 글쓴이: 경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