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실' 김별아 지음.
전에는 남녀차별이라든가 남녀평등에 관한 주제는 마음에 와 닿지도 않고 해서 관심이 별로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단둘이서 살다가 아내와 결혼하고 딸이 태어나서, 여자 셋 속에 남자 하나가 끼어 삼십오 년 동안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비교적 남녀평등한 직장인 중학교 교사로 근무했기에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올해 초 딸이 새로 취직을 하여 사회에 진출하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성악가는 윤심덕이고, 서양화가는 나혜석, 소설가는 김일엽인줄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탄실’을 읽으면서 여성 최초의 단편소설이, 1917년 11월에 ‘청춘’의 ‘특별대현상’에서 3등을 차지한 김명순의 ‘의심의 소녀’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당시 월간종합지 ‘청춘’에서 '의심의 소녀'를 심사한 춘원 이광수의 심사평입니다.
'이상춘 군의 '기로'에는 ....다만 방탕이라는 것을 그린 것이지 교훈하려는 냄새가 아니 납니다. 그러나 이상춘의 '가로'보다도 김명순 여사의 '의심의 소녀'는 가장 이 점에 있어서는 특출하외다. 거기는 교훈 같은 흔적은 조금도 없으면서도 그러면서도 재미있고, 또 그 재미가 결코 비열한 재미가 아니오, 고상한 재미외다.'(164쪽)
‘탄실’을 다 읽고나서 독후감을 준비하면서 춘원 이광수의 심사평에 나오는 대로 <김명순 여사>로 호칭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뛰어난 필력을 보유하고 일생동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끈질기게 노력을 경주했으나, 문단의 주류인 남성작가들의 탄압과 무시로 인해 제대로 뜻을 펴지 못한 김명순 여사의 삶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청일전쟁 후 남자들을 잃은 많은 가정들이 처한 궁핍한 생활과 김명순 여사의 어머니 산월과 이모가 기생으로 팔려가는 이야기는 몇 쪽 되지는 않으나 다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어린 자매가 너무도 불쌍하여 책을 책상 구석에 덮어놓고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며칠 후 다시 펼쳐드니 이어지는 이야기들 모두 맨 정신으로는 읽어 내려갈 수 없을 만큼 처절했습니다.
1915년 ‘매일신보’에 '동경에 유학하는 여학생의 은적'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립니다. 김명순 여사의 실명이 등장하고 아침에 학교 기숙사에서 나와 외출한 뒤 행방불명이 되어 경찰서에 신고한 사실이 기사화 된 것입니다. 세 번에 걸쳐서 연재되었는데, 마포 연대부 보병 소위 리응준(훗날 대한민국 최초의 육군참모총장과 체신부장관을 역임한다)이 김명순 여사의 부친에게 결혼승락을 요청한 일이 없었다고 결말을 맺습니다. 최초의 여기자 이각경이 1920년 ‘매일신보’에 입사를 하였으니, 이 글은 어느 남성기자가 흥미위주로 가볍게 쓴 기사임에 틀림이 없는데 안타깝게도 김명순 여사의 불행을 알리는 시초가 되었습니다.
1921년 방정환으로부터 시작되어 김기진, 김동인으로 계속 이어지는 인신공격은 어찌 그리도 무자비할 수 있는가! 작가가 자기 글을 쓰면 되지 남의 사생활을 들추고 비판하는 수준이 도를 지나쳤습니다. 자기들이 직접적인 피해를 받은 적도 없습니다. 상대라고 소문이 난 남성들이 피해자라고 밝히거나 고발한 적도 없습니다. 김명순 여사가 여러 소설에서 피해자임을 명확히 했음에도 오히려 비난을 받았던 당시의 상황이 참으로 의아하고 미개하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왜 김명순 여사를 자신들의 소설 소재로 이용을 했을까요? 첫 번째 이유로는, 그 시기에 모델소설이 유행하였다고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작가로서 창작능력의 부재를 드러낸 것이며 흥미 위주의 소설로 독자들의 시선을 끌어보려는 얄팍한 상술 때문입니다. 실제로 방정환의 '사회풍자 은파리', 김기진의 ‘김명순씨에 공개장’은 물론이고 김동인의 ‘김연실전’도 이름없는 글과 소설로 남아있습니다. 심지어는 김명순 여사가 1951년 동경의 뇌병원에서 사망한 지 4년 후, ‘창조’에서 함께 활동했던 전영택은 삐딱한 시선으로 '김탄실과 그 아들'을 발표하여 돌아가신 분의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만행을 자행했습니다.
두 번째는, 14세에 아버지가 16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집안에 뒷배를 봐줄 오빠도 없었으며, 독신주의자였으니 후원해 줄 남편도 없는 김명순 여사는, 그들에게 후환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는 좋은 먹잇감이었기 때문입니다. 나혜석에게는 오빠 나경석과 남편 김우영이 있었으며 최초의 현대무용가 최승희에게는 오빠 최승일과 남편 안막이 있었기에 충분히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김명순 여사는 내성적이고 방어형이며 사나운 호랑이처럼 싸우는 기질을 가진 평안도(평양)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공개적으로 비판을 가하면 즉시 답문을 써서 게재하기에, 쉽게 이슈화 할 수 있고 필명을 알리기도 쉬웠기 때문입니다. 나혜석과 함께 대표적 자유연애주의자이며 조실부모하고 오빠도 없었던 김원주(일엽)는, 김명순 여사와는 달리 외향적이고 공격형이어서 주류의 남성작가들을 압도하여 피해가 덜 했습니다. 게다가 결혼 한 적이 있어서 남편의 도움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결국 김명순 여사는 그들의 비난에 대해 적극 해명하느라 예민한 개인사인 첩의 자식이며 19세 때 성폭행 피해까지 고백하는 바람에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적은 인세와 원고료 수입으로 인한 생활고에도 행상을 해가며 세 번에 걸쳐 일본 유학을 감행하나 결국 학위를 받지 못하고 실패하고 맙니다. 그리고 첫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발표되고 난 후 불과 칠 년만인 1924년 잡지 ‘신여성’에 김기진이 쓴 '김명순 씨에 공개장'이 실린 후 김명순 여사의 작품활동은 침체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1925년 첫 번째 창작집 '생명의 과실' 출간하면서 쓴 머리말을 보면 얼마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창작활동을 이어왔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단편집을 오해 받아온 젊은 생명의 고통과 비탄과 저주의 여름(열매)으로 세상에 내놓습니다'(262쪽)
이후 두 번째 창작집 '애인의 선물'을 발간하였으나 문단의 평가나 언급이 전혀 없는 가운데 작가로서의 김명순 여사는 영영 잊혀지는 비운을 맞이하게 됩니다. 최근 고은 시인을 고발한 최영미 시인이 밝힌, 문단에서 가한 폭력으로 말미암아 잊혀져가는 여성작가의 2차 피해 상황이, 90년 전과 그대로 닮았습니다.
김별아 작가는 말합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일본의 식민지이지만 탄실이라는 여성은 그 식민지 남성의 또 다른 식민지였다. 그래서 그녀의 싸움은 바깥을 향할 수가 없었다. 등 뒤에서 꽂는 폭압에 맞서 내부의 적들과 쟁투해야 했다.(249쪽)
방정환, 김기진, 김동인, 전영택은 동업자 정신을 발휘하여, 김명순 여사의 필력을 칭찬해 주고 용기를 북돋아 줄 수는 없었는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친일작가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유일한 여성 저항시를 쓴 김명순 여사는 그들에 의해서 이렇게 희생되었습니다.
'싸흠' 김명순 지음
늙은 병사가 잇서서 오래 싸왔는지라 왼몸에 상처를 밧고는 싸흠이시려서 군기를 호미와 괭이로 갈앗섯다
그러나 밧고랑은 거세고 지주는 사나우니 씨를 뿌리고 김은 매여도 추수는 업섯다
이에 늙은 병사는 답답한 회포에 졸려서 날마다 날마다 낮잠을 자드니 하루는 총을 쏘는듯이 가위를 눌넛다 (중략)
아-이상해라 머리를 빗트럿다 자나깨나 싸흠이잇슬진대 사나죽으나 똑갓틀것이라고 사람마다 두팔에 힘을 내뽑앗다
1~4연은 전쟁이후 식민지인으로 절망적 피폐 상황과 한민족 몰락의 처참함을 사실적으로 고발하고, 5연에서는 이럴 바에는 민족의 이름으로 침략자 타도를 위해 궐기하자(사람마다 두 팔에 힘을 내뽑앗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만약에 김명순 여사가 전적으로 자신의 문학세계를 펼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면, 이 시대의 촉망받는 여성작가들이 순전히 창작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우리 사회는 더욱 윤기가 나고 살맛 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런 미개한 세상을 이제는 끝을 냅시다!
일하고 공부하고 사랑하면서 재미나게 살고 싶었던 순수한 여인, 김명순 여사. 뛰어난 필력을 제대로 발휘해 보지도 못하고, 남성들의 끊임없는 인신공격에 일찍 시들어버린 '최초의 여류 소설가' 김명순 여사를 추모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