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원하는 선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타인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영화 <기생충>에서 박사장이 운전사에게 늘 예의바르게 대하면서 어느날 "김기사님은 선을 넘지 않아서 좋아요."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죠.
'청소 아줌마'들이 '청소노동자'가 되고, '회관 조리사'가 '회관 노동조합원'이 되자 태도가 달라졌다는 그. 유명인이라고 해서 혹은 대학교수라고 해서 무조건 좋게 보면 안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글입니댜.
아래 글은 나경채님이 최근에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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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난도가 화제가 될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호암교수회관 노동조합 조합원들이다. 2010년에 그를 유명하게 만든 책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출간되었을 때 나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에 의해 쫓겨난 호암교수회관 노동자들도 20대, 30대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때 아팠다. 자신의 손으로 사실상 해고한 노동자들의 절규를 보고서 그가 '그래 아플거야. 아프니까 청춘인거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김난도는 서울대 호암교수회관 관장이었다. 호암교수회관은 호텔처럼 운영되고 있었다. 주말에는 결혼식도 했다. 교수들이 참여하는 큰 세미나를 하면 먼 곳에서 온 분들이나 외국인 교수들을 모시는 곳이기도 했다. 호텔 중에서도 고급 호텔이었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서울대가 운영하는 호텔에서 일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실은 호텔업, 예식업이 불법이었던 것이다. 정당한 사업자도 아니었으며 업종에 따른 세금도 제대로 내지 않았던 것이다. 뒤늦게 법적인 형식을 제대로 갖춰야 하는 상황에서 김난도 관장은 노동자들과 기존에 맺었던 단협을 그대로 지킬 수 없다고 했고, 노동자들은 우리가 잘 못한 것은 없으니 노동조건을 후퇴시킬 수 없다고 맞섰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파업 투쟁을 선택하게 되었다. 김난도는 회관에서 청소하는 분들에게도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교수였고, 그런 그를 존경했다는 노동자들도 꽤 많았다. 그러나 '청소 아줌마'들이 '청소노동자'가 되고, '회관 조리사'가 '회관 노동조합원'이 되자 그의 태도는 달라졌다.
그는 서울대 교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이들이 '서울대를 노동운동의 천국으로 만들려 한다'는 등의 악선동을 하기도 했다. 결국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사실상 해고되거나 회관을 떠나게 되었고 보다 불리해진 노동조건을 감수한 사람들은 서울대 생협 산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오래되어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파업에 앞장 섰던 당시 노조 위원장과 부위원장은 모두 일을 그만두었던 것 같다. 그때 부위원장의 나이가 나보다 조금 많았으니 아마 지금은 50대가 되었을 것이다. 50대가 된 그때 노조의 부위원장이 영피프티가 소비의 주역이니 하는 김난도의 말을 접했다면 어떤 마음일까 생각해 본다.
김난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는 세대들의 특징과 소비 트랜드를 대중적인 언어로 말하는 것으로 인기를 끌어왔다. 그러나 그가 말할 능력이 안되는 것, 혹은 그가 애써 보지 않으려는 것이 있다. 대학교수는 일반적으로 지식인의 윤리를 적용받는다고 했을 때 그의 눈에 보이긴 하지만 그의 학문이 눈꺼풀을 내려버리는 것들은 트랜드가 아니라 변치 않는 본질에 대한 것이다. 지식인이란 누구인가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가 아픈 청년들에 대해 말했을 때, 그는 부모 잘 만나서 전혀 아프지 않은 청춘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눈을 가렸다. 조국이나 한동훈의 자녀 같은 이들, 부모 잘 만나는 것도 능력이라던 정유라같은 이들은 그렇지 않은데, 왜 우리는 청춘이라는 이유로 아파야 하고, 그 아픔이 30대가 되고 40대, 50대가 되어도 이어지며, 왜 우리들의 자녀들에게까지 대를 이어 그치지 않는 것인지, 그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아마도 이 변하지 않는 진실을 말하는 지식인이 되어 피곤하게 되는 길을 선택하는 대신, 자본주의가 의도하는 변화무쌍한 트랜드를 읽는 지식 날품팔이가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소비의 주역이 못되는 다수의 50대가 있다는 것은 그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인지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