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자면 길지만
김남호
파란시선 0133
2023년 10월 15일 발간
정가 12,000원
B6(128×208)
110쪽
ISBN 979-11-91897-65-4 03810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아프다는 말이 없어서 어느 하루도 아프지 않은 날이 없대요
[말하자면 길지만]은 김남호 시인의 네 번째 신작 시집으로, 「북천」, 「말하자면 길지만」, 「우아한 꼬리」 등 60편의 시가 실려 있다.
김남호 시인은 1961년 경상남도 하동에서 태어났으며, 2002년 [현대시문학]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2005년 [시작]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링 위의 돼지] [고래의 편두통] [두근거리는 북쪽] [말하자면 길지만], 디카시집 [고단한 잠], 평론집 [불통으로 소통하기] [깊고 푸른 고백]을 썼다. 현재 박경리문학관 관장을 맡고 있다.
김남호 시인이 풀어놓은 말들은 비단 자신의 과거를 되짚는 것들만은 아니다. 말을 가지고 대상을 풀어내던 그의 이번 시집은 다분히 직관적으로 채워지고 있다. 이 부분에서 아인슈타인의 언술들이 떠오른다. “언어라는 것, 글로 된 것이건 말로 된 것이건 간에 언어는 나의 사고 과정 안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고 과정에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심리적인 실체들은 일종의 증후들이거나 분명한 이미지들로서, 자발적으로 재생산되고 결합하는 것들이다. 내 경우에 그 요소들이란 시각적이고 때로는 ‘근육까지 갖춘 것’들이다.”(아인슈타인) 또한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는 공식으로 사고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같은 방식으로 김남호 시인의 이번 시집을 ‘시인은 시론으로 시를 쓰지 않는다’로 표현하면 되겠다. 그의 이번 시집이 예전의 시집들과 다른 점은 직관적 사고 과정을 거친 시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일 것이다. (이상 변종태 시인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김남호 시인이 풀어놓은 말에는 음과 향이 스며들어 있다. 삶의 끝자락으로부터 돌돌 말린 말들이 풀어질 때, “검은 입”을 가진 시인이 온다(「말하자면 길지만」). “지상에서 가장 힘겨운 모습으로/하루와 하루 사이를 문전에서/문전으로 이어” 가는 시인이 온다(「시인」). 시인은 말을 하는 사람이다. “평사리 백사장에 눈먼/낚싯대 하나 꽂아 놓고/밑 빠진 독에 물이나 부으면서/잡초나 무성하게 키우면서” 한 백 년쯤 머물고 싶은 사람이다(「작년에 부는 바람처럼」). “세상이 싫고/사람은 더 싫은데”도 불구하고(「격리」) “어디까지가 나이고//어디서부터 내가 아닌”지 궁금해하는 사람이다(「뫼비우스의 띠」). 시인은 말을 보는 사람이다. 말과 말 사이에서 점점 희미해지는 사람이다. 삶을 사람에게 되돌려주는 사람이다. 시인은 “기다란//비명을 물고//다음 비명까지” 기어이 옮겨 내는 사람이다(「뱀」). 시인은 삶에서 우러난 눈물을 사람이라는 항아리에 넣고 기다린다. 시인은 말을 번역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아프다는 말”을 “오늘따라 왜 이리 숨쉬기가 힘들지? 왜 이리 어지럽지? 왜 이리 살고 싶지가 않지?”로(「북천」), “저문다는 말”을 “막내를 부르는 엄마의 꼬리 긴 모음”으로 전도(傳導)한다(「저문다는 말」). “이번 생에는 들을 수 없는/아빠라는 말”에 “가슴이 먹먹”해지고(「딸의 문자」) “그 한마디에/밤새 그네를” 타면서(「먼 곳에 내리는 눈」) 그가 골라낸 말은 무엇일까? 시인은 음과 향이 스며 있는 말을 빚어냈다. 시인이 고안해 낸 말의 렌즈를 끼면 “세상은 커다란 사격장”이 된다(「나는 한때 태양의 후예였지」). “박살 난 그릇들을 주워 담던” “엄마의 눈빛”이 보이고(「초점」), “쳐다보는 눈빛과 굽어보는 눈빛 사이에서/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지는” 향을 마주하게 된다(「누향을 마시다」). 사람의 눅진한 말이 삶의 얼굴에 가닿을 때, “꺼져 가는 어미를 바라만” 봐야 할 때(「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저린 마음을 이 세상 어디에도 얹어 놓을 수가 없을 때, 시인은 온다. 그리하여 “말하자면 길지만” 시인은 “꺼끌꺼끌한 호박잎”으로 지은 수의를 입고(「호박잎 수의」) 우리 곁에 누워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이다.
―정우신(시인)
•― 시인의 말
오랫동안 말을 비틀기만 했다.
그래야 시가 된다고 믿었으니까.
이번에는 그 믿음을 허물고 말을 폈다.
펴놓고 보니 마른걸레처럼 볼품없다.
이것으로 무엇을 훔칠 수 있을까.
•― 저자 소개
김남호
1961년 경상남도 하동에서 태어났다.
2002년 [현대시문학]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2005년 [시작]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링 위의 돼지] [고래의 편두통] [두근거리는 북쪽] [말하자면 길지만], 디카시집 [고단한 잠], 평론집 [불통으로 소통하기] [깊고 푸른 고백]을 썼다.
현재 박경리문학관 관장을 맡고 있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뱀 – 11
북천 – 12
먼 곳에 내리는 눈 – 13
붉은 눈 – 14
말하자면 길지만 – 16
검정개와 흑구는 어떻게 다른가 – 18
칼맛 – 20
나는 한때 태양의 후예였지 – 22
나에게 숨다 – 23
오래 – 24
시인 – 26
짚신벌레 – 28
딸의 문자 – 29
격리 – 30
이미지 – 31
제2부
뫼비우스의 띠 – 35
발에게 묻다 – 36
사력(死力) – 37
추월 – 38
봄밤의 보급 투쟁 – 40
일벌 – 41
지구에 처음 온 짐승처럼 – 42
생각만 하는 사람 – 44
미식가 – 45
슬픔으로 통하는 노선 – 46
절도 – 48
마스크 – 49
팬데믹 – 50
가시나무새 – 52
우아한 꼬리 – 53
제3부
스카이댄서 – 57
신은 콧구멍이 크다 – 58
발소리 – 60
맛집 – 61
아비와 신부 – 62
부부 – 63
토탈 이클립스 – 64
필리버스터 3—골절 – 65
필리버스터 8—끝말잇기 – 66
필리버스터 11—시(詩) – 68
누향(淚香)을 마시다—선향다원에서 – 69
다다다다 그 여자—구룡포에서 – 70
정리 – 71
첫 시집 – 72
작년에 부는 바람처럼 – 74
제4부
무슨 꽃 모가지를 꺾어 왔기에 – 77
라면을 끓이며 – 78
마지막 손님 – 80
바늘구멍 사진기 – 82
저문다는 말 – 83
빈방 – 84
새벽 개미 – 85
초점 – 86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 88
섬 – 90
지레 – 91
피안의 새 – 92
뭐라고 불러야 하나 – 94
호박잎 수의 – 95
소원 – 96
해설
변종태 호박밭의 꿀벌, 그리고 궁녀 운영 – 97
•― 시집 속의 시 세 편
북천
북쪽의 어느 부족은 구사하는 낱말이 몇 개밖에 안 된대요. 아프다는 말도 그들의 사전에는 없대요.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파도 아플 수가 없대요. 낭떠러지에서 떨어져도, 사냥 나간 가족이 죽어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도 그들은 바위에 걸터앉아, 오늘따라 왜 이리 숨쉬기가 힘들지? 왜 이리 어지럽지? 왜 이리 살고 싶지가 않지? 자신의 가슴팍만 두드린대요. 피눈물이 흘러도 가슴이 미어져도 그들은 전혀 아프지가 않대요. 아무도 아프지 않아서, 누구도 아픈 적이 없어서 병원도 신(神)도 필요가 없대요. 신이 없으니 영혼을 거두어 줄 자가 없어서 죽을 수도 없대요. 죽은 적이 없으니 산 적도 없대요. 살아도 산 것 같지 않고 죽어도 죽은 것 같지 않대요. 북쪽의 어느 부족은 아프다는 말이 없어서 그들은 어느 하루도 아프지 않은 날이 없대요. 그들은 어느 하루도 북쪽 아닌 날이 없대요. ■
말하자면 길지만
한때는 검은 입으로
시를 말하던 시절이 있었네
오디 먹은 입처럼 시를 담았던 입을
숨길 수가 없었던 시절이 있었네
시를 안 쓰면 검게 마르던 시절이었네
시절은 속절없이 흘러
시를 말하던 입으로 소주를 마시고
소주를 마시던 입으로
거짓말을 하고
사내가 챙겨야 할 건
우산하고 거짓말이라고 했던 게
우리 할머니였지 아마?
거짓말은 꼭꼭 챙겼는데
우산은 아무 데나 흘리고 다녀서
후줄근하게 젖는 날이 많았네
지나가는 우산들이 죄다
잃어버린 내 우산만 같아서
아무 우산 아래나 젖은 머리를
마구 들이밀고 싶었네
한때는 검은 입으로 말해도
붉은 시가 쏟아져서
사상을 의심받던 시절이 있었네
시를 안 써도 시인 같았던 시절이었네 ■
우아한 꼬리
산책길에서
죽은 생쥐를 만났다
몸통은 이미 구더기가 끓고 있었지만
길게 드리워진 꼬리는 고요했다
더 이상 도망칠 이유가 없어진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장 평온하게 누워 있었다
삶도 죽음도
쫓아오지 않는 자의 평화!
쫓기지 않을 때
꼬리는 가장 우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