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도경』과 『조선상고사』의 조의선인에 대한 기록
8. 조의선인(皂衣仙人)의 후예
육예(六藝)를 연마, 문(文) 무(武)를 겸전하고 삼신일체(三神一體)의 도를 일깨웠던 국자랑들은 일체감을 위해 검은 옷(皁衣)을 입고 수련을 한 것으로 파악된다. 高句麗가 ‘조의’라는 관직명을 두었음을 볼 때 경당의 사상과 정신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단군조선의 국자랑 육영 전통은 고구려의 '조의선인'으로, 신라의 '화랑'으로 계승된 것으로 보인다.
이 제도는 몽골의 억압과 전란, 혼란 중에서도 고려가 그 제도를 유지한 체 이어져 내려 온 정황이 나타난다. 바로 행촌 이암이 135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을 지내고 이듬해 서북면병마도원수(西北面兵馬都元帥)가 되어 구국의 일념으로 전장에 참여한 사실이다. 이는 경당의 교육 이념인 문무겸전(兼全)이었고, 조의선인의 정신이었으며 행촌이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였을 것이다.
행촌이 단군세기 서문에 “일개 대신(大臣)의 능력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으나, 바로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다 스스로 나라를 구할 것을 다짐하고, 그 할 바를 찾을 때에 나라를 구하는 일에 도움이 되는 것이고, 그런 후에야 비로소 나라를 구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一大臣之能이 姑無可求之爲言이나 而乃擧國之人이 皆救國自期오 而求其所以爲有益於救國然後에 方可得以言救國也니라)”라 하여 경당의 정신을 강조했다.
신생 조선은 고조선을 단절하고자 사대에 야합하고 수구권자와 그 세력들에 의해 경당의 기본이념은 사라졌다. 이들이 조의선인을 백정으로 추락시킨 배경은 무엇이었는가?. 우선 사료의 기록으로 그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통전(通典)에 기록된 高句麗의 관직명을 보자.
“고구려는 나라의 관직을 설치함에 9등급이 있다. 첫 번째는 토졸(吐捽)로, 예전 이름은 대대로(大對盧)이며, 국사를 총괄한다. 그 다음은 태대형(太大兄)이다. 그 다음은 울절(鬱折)로, 중국말로 주부(主簿)이다. 그다음은 태대사자(太大師者)이다. 그다음은 조의두대형(皀衣頭大兄)으로, 동이(東夷)들이 서로 전하기를, “이른바 조의선인(皀衣先人)이란 것이다.”고 한다.
이상의 다섯 관등은 기밀문서를 관장하고 정사를 모의하며, 병마를 징발하고 관원을 뽑는 일을 관장한다.”하여 조의두대형(皀衣頭大兄) 즉 조의선인(皀衣先人)이라 했다. ‘선배(先輩)’는 이두자로 선인(先人), 선인(仙人)이라 쓴 것으로써 선(先)과 선(仙)은 '선배'의 '선'의 음을 취한 것으로 본다.
후한서(後漢書)에는, “그 관직 설치에 상가(相加)ㆍ대로(對盧)ㆍ패자(沛者)ㆍ고추대가(古鄒大加)ㆍ주부(主簿)ㆍ우태(優台)ㆍ사자(使者)ㆍ조의(皂衣)ㆍ선인(先人)의 9등이 있다.”하였고, 신당서(新唐書) 또한 같은 기록을 남겼다.
三. 高句麗 무사집단, ‘조의선인(皂衣仙人)’
1. 『고려도경』과 『조선상고사』의 기록
『위서(魏書)』에 ‘고구려 사람은 용력(勇力)이 있고, 궁마(弓馬)를 잘 쓴다.’고 하였고, 삼국지(三國志)에도 ‘고구려 사람은 기력(氣力)이 있고, 전투를 잘 익힌다.’고 하여 고구려인들의 높은 기상을 설명했다. 고구려인들의 용력과 기상은 바로 경당의 교육이념에서 나왔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조의선인에 대해 묘사한 대목을 보자. “高句麗의 재가화상(在家和尙)은 가사도 입지 아니하고, 불계도 가지지 아니하고, 흰모시의 좁은 옷에 조백(皂帛)으로 허리를 두르고, 여염에 거하며 처자를 두는데, 매양 공공(公共)한 일에 힘써, 도로의 소제와 도랑의 개통과 성곽 수축 같은 일에 종사한다. 그러다 전쟁이 일면 스스로 양식을 가지고 동류가 단결하여 출전한다. 다 전쟁에 용맹하여 매 전쟁 때마다 먼저 앞서나, 그 실은 형여(刑餘)의 역인(役人)이어늘 다만 삭발을 깎음이 불교도와 같은 고로 화상(和尙)이라 함이니, 이것이 高句麗 조의(皂衣)의 유풍이라.
조백(皂帛)으로 허리를 두른 고로, 조의(皂衣)라 함이요, 국가에 대한 신앙이 굳은 고로 생사를 가벼이 하며, 세속의 의무와 세정에 구애가 없는고로 몸을 공익에 잘 바치며, 평일의 노고로 신체를 잘 단련하여 체육이 건용을 주하므로 전란에 나아감이 용맹함이며, 명림답부(明臨答夫), 연개소문(淵蓋蘇文)가 무리로써 기사한 고로 지방적 혁명으로 성공을 용이히 함이라.”라 썼다. 고려의 실정을 중국에 소개한 유일한 자료로서, 조의선인 소개 등 고려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해상잡록(海上雜錄)』에는 '명림답부(明臨答夫)와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조의선인 출신이다.(明臨答夫 蓋蘇文 此皆皂衣仙人出身)라 했다. 이들이 주로 검은 옷을 입고 다녔으므로 ‘조의(皂衣)를 입은 선인(仙人)’이라는 데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광개토대왕과 을지문덕 장군 또한 고조선의 경당에서 유래한 선인(仙人)의 도(道)를 닦았음을 알 수 있다.
신채호(申采浩)선생은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 “이상의 글에 의하면 승군(僧軍)이란 불교의 중으로 편성된 군사가 아니라 곧 ‘신수두’ 단전(壇前)의 조의(皀衣) 무사요, 연개소문은 조의의 우두머리[首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수십만의 군대와 그 중심인 3만의 조의군(皀衣軍)은 연개소문의 외정(外征)을 성공시킨 첫째 근거였다.”고 했다.
▲ 조의선인이 그려진 벽화
또 『高句麗史』에는 명림답부(明臨答夫)를 연나조의(掾那皂衣)라 하였고, 『후주서(後周書)』에는 조의선인을 예속선인(翳屬先人)이라고 하였으니, 선인(先人) 또는 선인(仙人)은 다국어 ‘선인’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고, 조의(皀衣) 혹 백의(帛衣)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이른바 조백(皀帛)으로 허리를 동이므로 이름함이다. 선인(仙人)은 신라 고사(故事)의 국선(國仙)과 같은 종교적 무사단(武士團)의 단장이요, 승군(僧軍)은 국선 아래 딸린 단병(團兵)이요, 승군이 재가한 화상(和尙)이라 함은 후세 사람이 붙인 별명이다.”(중략)라 하고,
“고기(古記)에서 왕검이 국선의 개조임을 찾으매, 고구려사에서 조의(皀衣) 선인(先人) 등을 알 것이며, 국선의 하나됨을 찾으매, 이에 국선의 내려온 근원을 알 것이며, 고려사에서 이지백(李知白)이, “선랑(仙郞)을 중흥시키자.”고 한 쟁론(爭論)과 예종(睿宗)이, “사선(四仙)의 유적을 영광스럽게 하라.”고 하고, 의종(毅宗)이, “국선의 복로(伏路)를 다시 열라.”고 한 조서를 보매, 고려에까지도 오히려 국선의 유통(遺統)이 있었음을 볼지니 이것을 계통을 찾는 방법의 한 예로 든다.”고 했다.
태조왕(太祖王) 차대왕(次大王) 시대의 ‘선배’제도 에 대해서는, 高句麗의 강성은 선배 제도의 창설로 비롯된 것인데, 그 창설한 연대는 전사에 전해지지 아니하였으나, 조의(皀衣 : 다음에 자세히 설함)의 이름이 태조왕 본기에 처음으로 보였으니, 그 창설이 태조ㆍ차대 두 대왕 때가 됨이 옳다. ‘선배’는 이두자로 ‘선인(先人)’, ‘선인(仙人)’이라 쓴 것으로써, ‘선(先)’과 ‘선(仙)’은 ‘선배’의 ‘서’의 음을 취한 것이고, 인(人)은 ‘선배’의 ‘배’의 뜻을 취한 것이니, ‘선배’는 원래 ‘신수두’ 교도의 보통 명칭이었는데,
태조왕 때에 와서 해마다 3월과 10월 신수두 대제(大祭)에 모든 사람을 모아 혹은 칼로 춤을 추고, 혹은 활도 쏘며, 혹은 깨끔질도 하고, 혹은 태껸도 하며, 혹은 강의 얼음을 깨고 물 속에 들어가 물싸움도 하고, 혹은 노래하고 춤을 추어 그 잘하고 못함을 보며, 혹은 크게 사냥을 하여 그 잡은 짐승의 많고 적음도 보아서, 여러 가지 내기에 승리한 사람을 ‘선배’라 일컫고,
‘선배’가 된 이상에는 나라에서 봉급을 주어서 그 처자를 먹여 지방에 누가 없게 하고, ‘선배’가 된 사람은 각기 편대를 나누어 한 집에서 자고 먹으며, 앉으면 고사(故事)를 강론하거나 학예를 익히고, 나아가면 산수를 탐험하거나, 성곽을 쌓거나, 길을 닦거나, 군중을 위해 강습을 하거나 하여, 일신을 사회와 국가에 바쳐 모든 곤란과 괴로움을 사양치 아니한다.
그 가운데서 선행과 학문과 기술이 가장 뛰어난 자를 뽑아서 스승으로 섬긴다. 일반 선배들은 머리를 깎고 조백(皀帛)을 허리에 두르고, 그 스승은 조백으로 옷을 지어 입으며, 스승 중의 제일 우두머리는 ‘신크마리’ - ‘두대형(頭大兄)’ 혹은 ‘태대형(太大兄)’이라 일컫고, 그 다음은 ‘마리’ - ‘대형(大兄)’이라 일컫고, 맨 아래는 소형(小兄 : 본래의 말은 상고할 수 없음)이라 일컬었다.”
▲고구려조의선인들
“국선화랑(國仙花郞)은 진흥대왕이 高句麗의 ‘선배’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선배’를 이두자(吏讀字)로 선인(先人) 혹은 선인(仙人)이라 썼음은 이미 제3편에서 말하였거니와 ‘선배’를 신수두 단(壇) 앞의 경기회에서 뽑아 학문을 힘쓰고 수박(手搏)ㆍ격검(擊劍)ㆍ사예(射藝)ㆍ기마(騎馬)ㆍ태껸ㆍ깨끔질ㆍ씨름 등 여러 가지 기예를 익히고 사방의 산수를 탐험하며 시와 노래와 음악을 익히고, 공동으로 한 곳에서 자고 먹고 하며, 평시에는 환난(患難)의 구제, 성ㆍ길 등의 수축 등을 스스로 담당하고,
난시에는 전장에 나아가 죽음을 영광으로 알아서 공익을 위해 한 몸을 희생하는 것이 선배와 같으니 국선(國仙)이라 함은 고구려의 선인(仙人)과 구별하기 위해 위에 국(國)자를 더하여 지은 이름이고, 화랑이라 함은 高句麗의 ‘선배’가 조백(皀帛)을 입어 조의(皀衣)라 일컬은 것과 같이 신라의 ‘선배’는 화장을 시키므로 화랑이라 일컬은 것이니 또한 조의와 구별한 이름이다.”(중략).
앞에 말한 삼국사기의 “나라에 현묘(玄妙)한 교가 있어 풍류라고 한다.”라고 한 것과 삼국유사의 “득오(得烏)는 이름이 풍류(風流)”라 이름하였음을 가히 알 수 있고, 앞에 말한 삼국유사의 “나라를 크게 일으키려면 먼저 풍월도를 일으켜야 한다.”고 한 것과 삼국사기 검군전(劍君傳)의 “나는 풍월(風月)의 뜰에서 수행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면 국선의 도를 또한 풍월이라고 하였음을 가히 알 수 있다.
풍류는 지나 문자의 유희풍류(遊戱風流)의 뜻이 아니라 우리말의 풍류 곧 음악을 가리키는 것이고, 풍월도 지나 문자의 음풍영월(吟風咏月)의 뜻이 아니라 우리말의 풍월 곧 시가(詩歌)를 가리키는 것이니, 대개 화랑의 도가 다른 학문과 달라 기술도 힘쓰지마는 음악과 시가에 가장 전념하여 인간 세상을 교화하였으니...”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