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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抒情詩에 있어서 時間의 問題
신동욱
1.
서정시는 흔히 詩의 素材로 다루어지는 정서들이 詩人의 주관적인 개입에 의하여 作品化된다고 한다. 이러한 작품들 이 독자들에게 공감되고 읽히기까지에는 여러 수속에 동시적으로 의존되고 있다. 가령 詩의 形式과 現慣를 좇아서 만든다든지, 그것을 만들어 낸 시대의 들이 사용하던 말을 사용해야 한다든지, 또는 내용이 독자들에게 공감을 줄 만큼 잘 짜여져 있어야 한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글에서 주로 時代 또는 時間이 詩에 어떻게 관여하고 있는가를 문제삼기 위하여 몇 편의 작품을 통하여 평범한 하나의 시도를 시험하려고 한다.
2.
1920년대에는 주요한 詩人들이 많이 활동했는데, 그 중에서 金素月과 韓龍雲 두 시인의 작품을 예로 하여, 그리고 1910년대의 柳치環의 작품을 통하여 논제를 풀어볼 생각이다.
김소월의 <비단안개>를 보면 우선 제목부터가 서정시인의 섬세한 감각을 쉽사리 느낄 수 있을 듯하다. 이 작품은 이른봄 눈 녹을 무렵의 계절을 작품의 한 背景的 要素로 삼고 있다.
눈들이 비단안개에 둘리울 제,
그때는 종달새 솟을 때러라.
들에랴 바다에랴 하늘에서랴,
아지 못할 무엇에 醉할 때러라.
引用된 제3聯에서 볼 수 있듯이 계절의 아름다움에 「취한」 듯한 詩人의 耽약的인 感覺이 나타나 있다. 특별히 즐거운 다른 이유는 없어도 계절의 변화 자체가 주는 기쁨을 단순히 감각하는 상태를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제2聯에서는 이러한 봄의 興趣와는 다른 人間事를 개입시켜서 그러한 순수한 봄의 흥취와 對照되게 하고 있다.
눈들이 비단 안개에 둘리울 제,
그때는 홀목숨은 못살 때러라.
눈 풀리는 가지에 당치마귀로
젊은 계집 목매고 달릴 때러라.
이 詩句들은 제3聯에서 보인 봄의 아름다움에 거의 조금 도 될 수 없는 죽음을 對比 또는 나란히 놓아서 두 가지의 이질적인 의미가 상충하도록 하고 있다. 生命이 바야흐로 약동하려는 그런 「때」에 「영이별永離別」도 있었다는 마지막에서 金素月은 現實(즉 만물이 생동하려는 시간)과는 합치되지 못한 사람의 사정을 詩에 설정된 話者를 통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와 현실이 통합될 수 없는 反語的 事態나 수離상을 노래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의미의 짜임새들을 이 詩人에게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과 「나」가 통합될 수 없는 개인적인 사정이 놀라움이나 괴로움으로 인식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남에게도 말할 가치가 있는가가 문제다.
이러한 괴로움이나 놀라움은 좀더 격렬한 語調로 다스려진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하여 남에게 말할 타당성 여부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어!
虛空中에 헤어진 이름이어!
불러도 主人 없는 이름이어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많이 읽혀지는 <招魂>의 첫 聯이다. 너무 직접적으로 강렬하게 이 작품의 話者는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얼마나 중요하고 긴급한 일이기에 이처럼 다급하 게 외치는 것인지 읽는 사람으로서 다소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抒情詩란 말하려고 하는 바를 주관적으로 처리한다고 하더라도 그 語調가 다소 지나친 감이 있다.
話者가 그렇게도 「죽을」 때까지 불러야 될 「이름」이란 어떤 것인가. 詩人이 詩 속의 화자를 시켜 우리에게 외칠 「이름」은 과연 일반독자인 우리에게도 詩人이 생각하듯이 소중한 것인 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 작품의 세째 聯에서는
붉은 해는 西山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山 우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와 같이 화자가 말하는 「그대」를 상실한 슬픔이 「사슴의 무리」에까지 번져가고 있다. 여기에서 이 슬픔은 첫 聯부터 심리적 거리를 둘 수 없었던 이유를 알아차리게 한다. 즉 화자 개인만의 슬픔이 아니라 산천초목까지(사슴을 미루어 볼 때)도 슬프게 되는 「이름」 또는 「사랑하던 그 사람」의 喪실이라는 사실이다. 詩의 첫 行부터 끝 行까지에 이르는 高調된 외침은 그러한 슬픔의 성질 때문이었다. 이제 화자의 이야기는 그것을 말하는 화자 자신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독자인 우리들은 물론 심지어 「사슴의 무리까지 슬퍼해야 될 社會전體.民族全體의 喪失의 詩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는데, 金素月이 노래한 對象으로서의 「그대」, 「님」, 「당신」은 거개가 金素月의 詩에 나오는 話자에 의하면 추억 속에 살아 있거나 또는 이미 지나가버린 것으로 認識되어 있다. 이러한 사정은 金素月 자신의 詩的創意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인다. 상실을 다시 회복하거나 되찾는 意志는 보이지 않으며 상실을 죽는 날까지 슬퍼하는 태도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나의 집> 같은 작품에서는 「기다리는」 심정이 나타나 있으나, 「지나가는 길손을 눈여겨 보며/그대인가고, 그대인가고」와 같이 매우 소극적인 반응만 보인다. 여기에서 「님」은 완전히 行方不明이 된 대상으로 이해되어 어디로 가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 아무런 信念이나 豫見도 가질 수 없는 對象으로 시인은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독자는 짐작할 수 있다. 「님」이 회복이나 재생의 대상이 못되거나 아니라는 점이 이 시인의 詩人의식으로 보인다.
우리는 <님에게〉라는 作品에서 그러한 확증을 찾을 수 있다.
한때는 많은 날을 당신 생각에
밤까지 새운 일도 없지 않지만
아직도 때마다는 당신 생각에
추거운 벼갯가의 꿈은 있지만
낯모를 딴세상의 네길거리에
애달피 날저무는 갓스물이요
캄캄한 어두운 밤들에 헤매도
당신은 잊어버린 설움이외다
당신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비오는 모래밭에 오는 눈물의
추거운 벼갯가의 꿈은 있지만
당신은 잊어버린 설움이외다
「한때」는 「당신」을 밤 새우며 생각했으나, 이제는 「당신」이 떠났으므로 世上은 온통 「낯모를 딴세상」으로 되었고 「캄캄한 어두운 밤」으로 변했다는, 무섭게 변모된 現實의 의미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렇게 認識된 현실은 「설움」으로밖에 표현되지 않는다. <招魂>에서 「죽음」까지를 각오하고 平生을 부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唯一한 「님」에의 절규도 결국은 「설움」으로밖에는 나타나지 못하고 있고, 과거지사로 돌리고 있다. 여기에 金素月의 時代觀의 限界性이 있고 동시에 詩人意식의 한 특징이 있다고 보겠다.
3
韓龍雲의 詩는 近年에 좋은 理解者들을 만나 잘 解설되고 있다. 그러나 머리말에서 話題를 밝혔듯이 時代나 시간의 측면에서 素月과 비교하려고 한다.
그의 작품 <님의 沈默>에는 「님은 갔읍니다」라는 엄연한 사실을 시인하고 있다. 그러나 金素月과 같이 상실의 슬픔으로는 표현하지 않고 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읍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 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 없는 눈물의 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읍니다.
슬픔을 바꾸어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옮겨 붓는 意志를 보여주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님」은 떠나버렸지만 話자인「나」는 님을 보내지 않고 있다. 이것은 떠나버린 事實에 대한 詩人의 逆說이면서도 回復에의 意志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韓龍雲의 詩人意識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상실에 대한 소극적인 반응으로서의 슬픔을 노래하고, 그 놀라움이나 괴로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히려 상실을 회복하려는 데서 노래가 생겨나고 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 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읍니다.
이 詩旬에서 흔히 일컫는 逆說을 발견하지만 韓龍雲은 역설이 아니고는 노래를 지을 수 없었고, 역설이 아니면 노래가 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여기에 韓龍雲의 詩人의식이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난다. 「님」의 상실은 주체인 「나」의 의지에 의하여 회복이라는 힘든 反轉을 꾀하고 있으므로 역설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만약 金素月에 있어서처럼 상실을 따라 順行反應을 한다면 슬픔의 美學밖에는 나올 것이 없으나, 韓龍雲은 상실에 대한 順行反應이 아니라 반역적인 反轉을 시도하므로 逆說과 反語가 필연적으로 詩의 중심적인 미학으로 나타나게 된다.
<알 수 없어요>의
지리한 장마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 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골입니까.
에서 보이듯이, 감추어진 對象, 즉 이 詩人이 不斷히 찾고 回復하려고 하는 「님」의 얼굴을 실제로 보는 것이다. 「무서운 검은 구름을 苦海나 煩惱로 解說하는 見解가 있음을 필자는 알고 있고, 또 그렇게 佛敎의 知識을 통해서 詩를 이해할 수 있음을 시인하지만, 그러나 그보다는 이 詩人이 시인으로서나 한 市民으로서나 그가 살고 있는 時代에 소속된 사람 이라는 立場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韓龍雲은 時代의 요청을 깨닫고 沈默하는 「님」을 現在的인 대상으로 깨닫고, 줄기찬 노력을 기울여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존재임을 發見한다. 「떠난 님」을 떠나지 않은 현재적인 대상으로 인식하고 노래함으로써 逆說과 反어의 필연성이 시인되고, 그것이 아니면 韓龍雲에게 있어서 노래는 없게 된다.
「나」와 현실의 分離된 상태, 「님」이 그 모습을 감춘 시대이므로 韓國이 처한 시대의 노래이고 民族의 노래로서 뜻이 있다.
가령 佛敎 교理와 위배되는 現實을 苦海나 煩惱로 이해 하는 것도 主體와 現實의 괴리나 「님」의 상실로 풀이할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이 作品의 불교적 해석보다는 時代的 價値를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할 듯하다. 苦海와 煩惱를 解소하는 길은 永遠한 涅槃에 이르는 것이지만, 「님」의 現在化나 喪失을 回復하려는 것은 民族의 主權을 회복하는 길이다. 불교의 끝은 열반이지만 시대의 요망은 나라의 再生이다.
4
金素月 過去의 時間 속에서 喪失을 슬퍼했고, 韓龍雲 現在의 時間 속에서 상실을 回復하려고 했다. 이제 無時間性 의 노래를 예들어 보겠다.
내 죽으면 한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愛憐에 물들지 않고
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 비정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生命도 忘却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이 작품도 잘 알려진 柳치環의 <바위>의 全文이다. 흔히 意志의 詩人으로, 그 意志를 잘 表現한 작품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作品에 채용된 표면상의 시간은 話者인 「내」가 앞으로 죽어서 「함묵」하고 「忘却」하는 「바위」가 되겠다는 未來時間이다. 그러나 작품의 내용, 즉 詩想은 인간의 실제적인 생활을 질서화하는 時間의 否定을 주제화하고 있다. 시간의 否定은 그만큼 엄청나고 놀랄 만한 사정에 연유된다고 생각된다. 「님」의 喪失도 回復도 나아가서는 宇宙의 이해까지도 시간이 아니라면 이해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絶對命題와 같은 시간을 부정하는 이 詩는 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자는 것일까.
「억年 非情의 緘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드디어 生命도 忘却하고」에서 외部의 세계인 현실과는 교섭할 수도 말할 수도 없으므로 詩人 스스로의 「안」으로만 다스려들 가 외部에로 발전되어야 할 행동이 思索으로 응축되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상태로 되어 모든 가치의 근본적 근거가 되는 「생명」까지를 「忘각」한다는 것이다. 보이는 바와 같이 이 詩는 단숨으로 짜여져 있어 반점(反點,休止)조차도 허용 되지 않는 매우 숨이 찬 짜임새를 보이고 있다. 그만큼 절박한 사태를 이 시인은 의식하고 있다.
柳致環 作品 活動을 하는 시기에 이르러서는 현실과의 괴리가 「님」의 상실에서 오는 反逆이 아니라 완전히 절망에 빠져 「나」와 「현실」을 잊으려는 극한에 도달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詩人意識은 현실과 나의 관계조차도 의식할 수 없거나 포기하는 상태의, 참으로 심각한 깨달음이다.
이러한 抒情詩들을 통하여 필자는 우리 民族이 역사를 누비고 걸어온 바 살아가는 정신적인 발자취를 확연히 보는 것 같다.
日帝의 고압적인 파시즘에 대처하는 이들 詩篇들 속에서 한국 말의 아름다움이 어떻게 시간과 관여되었는가를 간략히 생각해 보았다.
抒情詩는 지극히 개인적인 수준에서 출발하여 時代를 증언하고 民族을 대변하고 있다는 공동의식을 독자들에게 일깨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