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정말 유치하지만 궁금한게 있어서 질문올립니다.
항상 좋은 글 감사히 대하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아직 초신자적인 수준을 못넘다 보니 창세기에서 정말 유치하지만 궁금한게 있어서 질문올립니다. 혹시 너무 유치하다고 생각하셔도 저에게 너무 중요한 일이니 답변 꼭 부탁드릴께요! 먼저. 창세기1장 26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서 우리란 누구를 말씀하시는건가요? 그리고 창세기 4장 14절에 가인이 말하는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라고 했는데 여기는 그사람들은 누구인가요? 그리고 사무엘상에 28장에 나오는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만나 사무엘을 불러 올렸다고 하고 15절에는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하니... 일때 정말 사무엘인가요? 아님 잘못된 영인가요? 그리고 만약 세종대왕처럼 전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요? 저희 목사님은 지옥에 갔다고 하셨는데요 베드로 전서 3장 18절부터 읽어보면 그리스도께서 영으로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고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동안 복종하지 않았던 자들이라고 하는데요..." 만약 알지못하고 죽은사람이나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들은 어떻게 되나요? 마지막으로 저희 인근교회에서는 666의 숫자가 베리칩이라고 하면서 받으면 안된다고 하고 열심히 전도하고있는데요. 666은 무엇인가요? 부끄럽고 감사합니다.
[답변]
님께서는 기쁜 마음의 전달과 함께 질문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은 하나가 아니고, 무려 다섯 가지입니다. 님은 이 질문을 참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만큼 알고자 함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이에, 저 또한 답변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진지함을 가지고 중요하게 다루며, 다음과 같이 답변을 드립니다.
그럼, 먼저 님이 질문하신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창세기1장 26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서 우리란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리고 창세기 4장 14절에 가인이 말하는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라고 했는데 여기는 그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그리고 사무엘상에 28장에 나오는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만나 사무엘을 불러 올렸다고 하고 15절에는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하니... 일때 정말 사무엘인가요? 아님 잘못된 영인가요? 그리고 만약 세종대왕처럼 전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요? 저희 목사님은 지옥에 갔다고 하셨는데요. 베드로 전서 3장 18절부터 읽어보면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고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복종하지 않았던 자들이라고 하는데요..." 만약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나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들은 어떻게 되나요? 마지막으로 저희 인근교회에서는 666의 숫자가 베리칩이라고 하면서 받으면 안 된다고 하고 열심히 전도하고 있는데요. 666은 무엇인가요?
이에 대한 답변의 글이 님의 질문이 다섯 개인 것에 따라 상당히 길므로, 님이 질문한 순서대로 다섯으로 분류하여서 답변을 드립니다. 이는 님이 질문하고 있는 다섯 가지가 서로 각각 다른 내용에 의해서 질문되고 있는데다가, 그 다섯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나로 뭉뚱거려서 답변을 드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본 답변의 글이 님에게 참으로 유익하며 도움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님의 질문에 대해 많은 시간을 들여서 진지함과 성실함으로 답변을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님이 이 답글을 가능한 한에는 빨리 보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지체되지 않게 하려고 노력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님 또한 저의 답변을 소홀히 하지 마시고, 그래서 눈흘림 정도로 대충 보지 마시고, 많은 시간을 들여서라도 진지함과 성실함으로 꼼꼼히 보아주시기를 바라는 것에서입니다. 님이 질문을 주신 것은 님이 정말 알고 싶은, 그래서 정말 알고자 하는 강한 마음의 간절함에서 하신 것이었을 것입니다. 저 또한 같은 마음의 간절함에 있습니다. 개혁주의신앙공동체를 찾아주시는 회원을 비롯한 모든 분들이, 그리고 님 또한 이곳에 올린 답변의 글을 보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는 것을 통해서 바른 신앙으로 주님의 참된 교회를 이루어 가실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저의 마음에 있습니다. 님의 간절함대로, 또한 저의 간절함대로 될 수 있기를 위해 주께 은혜를 구합니다.
이제 답변을 시작하겠습니다.
1.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 : 님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시는 것으로 여러 질문을 시작하는 첫 번째 질문을 하셨습니다.“창세기 1장 26절, 27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여기서 하나님은 그 사람의 창조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여서‘우리의 형상’,‘우리의 모양대로’라고 표현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창조에 대해 이야기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여기서‘사람’은 대한 성경적인 이해는 하나님의 형상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구절인 창세기 1장 26절, 27절 자체에서 가질 수 있습니다. (1) 먼저 하나님께서는 26절에서‘우리의 형상대로’, 곧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말씀하신 창조하신 그 사람을, (2) 27절에서는‘자기(그의) 형상대로’,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3) 그러면서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는‘남자와과 여자’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4)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남자와 여자인 사람을‘하나님의 형상대로’창조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5) 그러니 말이죠. 님이 궁금해 하는“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서‘우리’란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에 대한 답변은“‘하나님’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설명이 필요하죠.“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서‘우리’란 표현이‘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왜‘우리’란 복수형이 사용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27절에서는‘자기(그의) 형상’, 또는‘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해 주셔서‘하나님’이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 해 주시고 있으시면서 말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서‘우리’란 말은 1인칭 복수형이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1인칭 단수인‘나’, 또는 3인칭 단수인‘그’가 사용되지 않고 말이죠. 이것은 1인칭 단수인‘나’, 또는 3인칭 단수인‘그’가 사용되어서는 안되는, 그래서 1인칭 단수인‘나’, 또는 3인칭 단수인‘그’가 사용될 수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래서가 아니고,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그것은 말이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창조 사역의 중심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창조하시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창조하시되 사람 창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창조를 아무 계획 없이 하신 것이 아니라, 창세전인 영원 전에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기쁘신 뜻을 정하셔서 하셨습니다. 그에 따라 세상 창조를 어떻게 해 나가실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가지셨구요. 이렇게 (성부)하나님은 세상 창조 사역을 (성자 하나님이신)그리스도와 함께 해 나가시는 것이었으며, 여기에는 또한 성령 하나님의 참여하심도 같이 있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함께 하셨음은 창세기 1장 1-2절에서“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라고 말씀하시고 있어서‘하나님의 신’을 언급해 주시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의‘하나님의 신’은 다름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에서‘제 삼위 하나님이신 성령’, 곧‘성령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곧 삼위 하나님께서 밀접한 협약과 상호 협조에 의해서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1인칭을 사용해서든 3인칭을 사용해서든 단수형으로 사용하여도 그 표현이 충분히 되는 것입니다만, 1인칭 복수형을 사용하여 나타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 :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인,“창세기 4장 14절에 가인이 말하는‘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했는데,‘나를 만나는 자마다’에서의‘만나는 자마다’에 해당하는‘그 사람들’은 누구인가요?“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으며, 그 사람은 남자와 여자인 아담과 하와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선과 악을 아는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 먹는 죄를 범함에 있음으로 타락한 인간의 상태에 처해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으며, 다시는 이곳을 찾아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으셨습니다. 그렇게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어느 땅에 머물러 정착하였으며, 그곳에서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낳은 자손은 가인과 아벨 둘만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성경에는 이 둘만의 이름만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기술해 나가시는 것에서 이 둘만의 이름만을 다루시는 것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의 자손은 가인과 아벨 둘만이 아니라, 이 둘 외에도 더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진노하여 저주하심을 표현하시는 것에서“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 4:10-12) 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저주를 듣는 가인이 크게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청하기를“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에서나, 이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는“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창 4:13-15) 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에서 보게 되는, 가인과 아벨 외에도 더 많은 자손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가인과 아벨의 사건이 등장하게 된 때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나와 어느 땅에 정착하게 된 때로부터 상당히 많은 시간의 세월이 흘러 있었던 것이며, 그 동안에 아담의 자손들이 있게 되어 그들이 땅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아담이 죽임 당한 아벨 대신에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아들 셋을 얻은 때의 나이가 130세였던 것에 미루어 그동안에 많은 자녀들을 낳았을 것이란 짐작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창 5:3). 그 아담은 그 후로도 800년 동안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930세를 향수하고 죽었습니다(창 5:5).
해서 말입니다.“창세기 4장 14절에 가인이 말하는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라고 했는데, 가인이 만나는‘그 사람들’은 누구인가요?에 답변은 아담과 하와가 낳은 가인과 아벨 외의 또 다른 자손들을 말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이는 곧 가인과 아벨의 형제들, 그리고 그들로부터 있게 된 가족과 그 후손들인 것이죠.
3.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 : 님은 또한 세 번 째 질문을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사무엘상에 28장에 나오는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만나 사무엘을 불러 올렸다고 하고 15절에는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하니... 일때 정말 사무엘인가요? 아님 잘못된 영인가요?”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변을 드립니다.
님이 질문한 이 내용은 본 까페에서‘구약성경 방’의‘구약본문’게시판 글에 올려 있습니다. 거기에 사무엘상 28장 1-19절인‘사울왕 앞에 나타난 죽은 사무엘’이란 제목으로 제가 쓴 글이 올려져 있습니다. 하오니, 이곳에 들어가셔서 글을 보시면 되는데, 그 내용을 여기에 그대로 옮겨 답변을 대신하는 글로 삼겠습니다. 님이 질문한 내용의 답변은 자세히 알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성경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무엘상 28장 1-19절 / 1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 쳤더라 2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은 수백 명씩 수천 명씩 인솔하여 나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서 나아가더니 3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이 이르되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 하니 아기스가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에게 이르되 이는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이 아니냐 그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 4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에게 노한지라 블레셋 방백들이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을 돌려보내어 왕이 그에게 정하신 그 처소로 가게 하소서 그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가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하나이다 그가 무엇으로 그 주와 다시 화합하리이까 이 사람들의 머리로 하지 아니하겠나이까 5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6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7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13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하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하는지라 14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의 모양이 어떠하냐 하니 그가 이르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하더라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15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하니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내가 행할 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하더라 16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17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18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19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
이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이 글이 기록된 역사적 배경을 알고서여야 합니다. 블레셋 족속이 군대를 모아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때는 다윗이 사울의 박해를 피하여 자신이 거느리는 군사 600명을 거느리고 국경선을 넘어 마옥의 아들인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 망명하여 있었습니다. 아기스는 다윗과 그 일행을 환영하고 가드의 성 안에 있는 집들을 내주면서 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자신이 왕궁에서 왕과 함께 살 수가 없으므로 지방 성읍 하나를 자신에게 줄 것을 청하므로 아기스는 이를 좋게 여겨 유다의 최남단에 있는 성읍 시글락을 다윗의 소유로 내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시글락은 유다 왕실의 영지가 되었습니다. 이때는 다윗이 블레셋 족속의 땅에 거주한지 1년 4개월 정도 되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블레셋 족속의 땅에 거하고 있을 때 블레셋 족속이 군대를 모아 이스라엘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러자 가드 왕 아기스는 다윗에게 이 전쟁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다윗은 흔쾌히 그런 응하였습니다. 그러자 아기스는 다윗을 크게 신임하여 자기 곁에 두고 자신을 호위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의 상황은 사무엘이 죽어 그의 고향 라마에 장사된 지(삼상 25:1)가 꽤나 오래되었던 상황에 있었습니다. 이때의 이스라엘은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즉, 선지자가 없는 시대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선지자 사무엘이 죽은 지가 꽤 오래되자 그들의 마음속에는 선지자 사무엘을 그리워하는 그리움이 일어났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은“우리에게 이제는 선지자가 없다”라고 탄식하면서 선지자 사무엘의 죽고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슬퍼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죽고 없으므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없는 때와 맞물려서 블레셋의 침공이 있었습니다. 이는 선지자 사무엘의 죽음과 블레셋의 이스라엘 침공이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에 의해서 있게 된 것입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있을 때 사울 왕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선지자 사무엘이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선지자가 없는 시대를 맞아 하나님이 그에게서 떠나 있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행해지는 여호와의 전쟁을 기대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그러한 사울왕은 또한 한창 세력이 커지며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존경을 받는 다윗을 시기하여 박해하는 상황에서 있었으므로 블레셋의 침공에 맞서 이스라엘을 구할 용사도 없었으므로 사울왕과 그가 통치하는 이스라엘이 겪는 암담함의 어두움은 더욱 심하고 커 보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블레셋 침공에 사울이 보인 처사는 그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나아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블레셋 나라가 쳐들어온다는 전령의 보고를 받고는 그는 이 전쟁이 무엇 때문에, 그리고 무엇으로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서는 전혀 알지 못하였으며 전혀 생각하는 바도 없었습니다. 그는 블레셋의 침공이 단지 이스라엘 주변 국가가 영역 확장을 위해서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만 알 뿐이지, 사실은 이 전쟁이 하나님이 일으키신 것으로 하나님을 떠난 사울왕과 그가 다스리는 이스라엘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공격하여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란 사실에 대해서는 추호의 생각도 갖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이 죽고 없는 사울왕 때에, 그리고 사울왕의 곁에 다윗도 없는 때에 블레셋 나라를 일으켜 이스라엘을 침공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사울은 말입니다. 자신의 왕좌를 지킬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지킬 것으로 자신과 이스라엘로부터 떠나 있는 하나님을 찾아 자신도 이스라엘도 하나님에게 맡기는 것에서 여호와의 전쟁을 치러나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을 구할 방법으로 모색한 것이 자신의 손으로 없애 정리하였던 신접한 무녀를 찾아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어 자신이 어찌하면 좋을 것인지를 알고자 하는 것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찾은 것으로 여깁니다. 해서 사울왕은 엔돌 지방에서 무녀로 활동하고 있는 신접한 여인을 자신 앞으로 불러들이고, 그에게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무녀에게 불러내달라고 하는 죽은 사무엘을 보는지를 채근합니다.
사울왕이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에서 보인 처신은, 곧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게 하는 그의 행동은 그가 원하는 대로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게 하는데 엔돌의 신접한 여인인 무녀가 주술을 외우며 갖고 춤추는 온갖 행동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지키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사무엘의 영이 나타난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갖는 관심은 무녀가 사무엘의 영을 과연 불러낼 수 있는가? 라고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본문 그 어디에서도 무녀가 사무엘의 영을 불러냈다는 기사는 없습니다. 무녀는 말이죠. 단지 사울왕이 그에게 지금 보고 있는 것만을, 그래서 자신에게 보이는 것만을 말해 달라고 할 때 처음에 땅속에서 올라오는 영이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사울이 거듭 무녀에게 그가 보고 있는 것이 누구의 모습으로 보이는지를 물을 때 나이 든 남자인 노인의 모습인데 선지자의 겉옷을 입고 있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울은 그가 사무엘의 영인지를 알아차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무녀를 통하여 사무엘을 불러내고자 할 때 무녀가 사무엘의 영을 불러낼 수 있었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무녀는 죽은 자의 영을 불러내는, 결코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무녀가 죽은 사무엘의 영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의 영을 불려내서가 아니구요. 사울이 그러한 짓을 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죽은 사무엘을 그 앞에 나타나게 하는 것을 통해서 그에게 하고자 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은 사무엘을 통해서 그를 크게 꾸짖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은 사무엘을 무녀가 불러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울 앞에 사무엘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사울이 무녀를 통해서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고자 하는 일을 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런 그 앞에 죽은 사무엘을 나타나 그로 하여금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의해서 죽은 사무엘이 사울왕 앞에 마치 산 자처럼 다시 나타난 겁니다. 이런 사무엘은 나타난 이후로 언제까지 계속해서 있었던 것이 아니죠. 하나님께서 사울왕에게 전하게 하신 말씀을 전달한 후에는 그는 다시 죽은 자로 돌아가 사울왕 앞에서 사라지고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일도 하십니다. 구약에서 사렙다 과부의 죽은 아들도 그렇구요(왕상 17:17-24). 선지자 에스겔 때에는 전투에서 죽은 군대의 수많은 군사를 뼈에 살이 붙고 피가 돌며 생기가 돌게 하기도 하셨습니다(겔 37장). 신약에서 나사로를 비롯하여서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셨구요(눅 11:1-44), 예수께서 부활하실 때는 죽은 자의 무덤이 열리고 많은 사람이 무덤에서 일어나게도 하셨습니다(마 27:52). 그런가 하면 사도 바울의 강론을 듣다가 졸아 이층 난간에서 떨어져 죽은 한 청년을 살리기도 하셨습니다(행 20:7-12).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죽은 사무엘을 사울왕 앞에 나타내기도 하셨습니다. 이 경우는 죽은 사무엘을 다시 살리신 것이 아닙니다. 죽은 사무엘을 사울왕 앞에 나타내시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울왕이 듣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녀가 죽은 사무엘의 영을 불러냈는지, 죽은 사무엘의 영이 과연 사울왕 앞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인지에 대하여 설왕설래하며 그 시시비비를 논합니다. 대체적으로 (1) 죽은 자는 그의 영이 천국이나 지옥에 가 있기 때문에 그 영이 세상에 나타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으므로 무녀가 불러낸 영은 죽은 사무엘의 영이 아니라 귀신의 영이라고 봅니다. 또한 하나님은 신접한자나 악귀들을 용납하지 않으신다고 하면서 그러한 하나님이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실 리가 만무하다고 봅니다. 죽은 사무엘을 불러낸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 아니라 사단의 세계에서 신접한자를 이용하여 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죽은 사무엘을 불러낸 것은 실제 죽은 사무엘을 불러낸 것이 아니라 악한 영인 귀신을 마치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는 일을 한 것처럼 가장하여 위장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귀신의 장난이라고 봅니다. (2)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주장도 있는데 무녀가 자기가 보고 있는 선지자의 겉옷을 입고 있는 한 노인의 모습을 설명하고, 사울은 그가 죽은 사무엘임을 알아차리고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가 하는 말을 듣는 것을 통해서 무녀가 보고, 그래서 사울왕 앞에 나타난 것은 사울왕이 사무엘인 것을 알아차렸다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죽은 사무엘이라고 단정하면서 이것은 하나님이 신접한 여인인 무녀에게 죽은 사무엘의 영을 불러내도록 특별히 한번 허락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한 번 있게 하신 특별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3) 죽은 사무엘을 불러낸 것은 무녀에 의해서 있는 귀신의 장난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이번의 경우에만 특별히 허락해서 무녀를 통해서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게 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 모두 아닙니다. 죽은 사무엘을 불러낸 자는 사악한 마귀요 귀신이 아니며, 신접한 여인인 무녀도 아닙니다. 사울왕이 신접한 여인인 무녀를 통해서 불러내고자 한 죽은 사무엘을 사울 왕 앞에 나타내신 분은 사울왕이 찾아야 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말이죠. 사울왕이 무녀를 통해서 불러내고자 한, 죽은 사무엘을 무녀가 아닌 하나님이 불러내신 것은 왜인지요. 하나님이 이처럼 죽은 사무엘을 정작 죽은 사무엘을 사울왕 앞에 나타내셔서 하나님이 하신 일은 사울왕에게 죽은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서 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죽은 사무엘이 사울왕 앞에 나타나서 그가 사울왕에게 무슨 말을 하여 하나님이 전하는 말씀을 사울왕이 듣게 하였는가에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죽은 사무엘이 사울왕에게 전한 말은 무녀가 줄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무녀가 전해줄 수 있는 거짓된 예언을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참된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울왕에게서, 즉 일찍이 아말렉 족속을 진멸시켜 버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기르는 가축을 모두 죽여 없애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도 따르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제 사울을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블레셋 족속의 손에 붙일 것이니 사울이 내일이면 그의 아들들과 함께 죽어 죽은 사무엘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무녀를 통해서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 마치 그의 영험한 효력으로 자신과 이스라엘을 지킬 수 있는 듯이 생각하는 그의 어리석음을 사울에게 죽은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미 그를 떠나셨으며, 그에 대한 것으로 결코 그가 살지 못하고 죽음으로 망하게 될 것을 알게 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왕은 이스라엘에게서 무당, 무녀들을 추방함으로써 이스라엘 땅에서 이들이 발을 붙이고 활동할 수 없다는 제스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28:3). 하지만 이것은 단지 형식상일 뿐이요, 정작 국가적 위가를 맞이할 때 그가 의지하고자 한 것은 무당, 무녀요 신접한 자를 통해서 그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러한 처신이 결코 그와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무당, 무녀요 죽은 선지자를 불러내어 그로 하여금 방패막을 삼고자 하는 따위의 무속적인 미신은 결코 자신과 나라를 구원하는데 아무런 힘도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이방인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이런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그의 본성에 자리하고 있는 죄의 힘에 이끌려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그를 그의 아들들과 함께 죽게 될 것을 알려 줌으로써 이스라엘에게서 생명의 주는 무속적인 미신에게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주가 되신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님이여! 이상의 설명에서 답변이 되었습니다. 해서, 이번엔 제가 묻습니다.“사무엘상에 28장에 나오는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만나 사무엘을 불러 올렸다고 하고 15절에는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하니... 일때 (1) 정말 사무엘인가요? (2) 아님 잘못된 영인가요?”
님이 답변하실 것은 (1)인 정말 사무엘 입니다, 곧 죽은 사무엘입니다.
님은 이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처럼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셨을까요? 이는 님께서 제가 드린 설명을 잘 정리하여서 이젠 님께서 답변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즉, 님이 잘 이해하여 님이 알고 있어야 할 성경의 지식으로 소유하고 계시길 바랍니다.
4. 네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 : 님은 이어서 네 번째 질문을 해 주셨습니다.“만약 세종대왕처럼 전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요? 저희 목사님은 지옥에 갔다고 하셨는데요. 베드로 전서 3장 18절부터 읽어보면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고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복종하지 않았던 자들이라고 하는데요...만약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나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들은 어떻게 되나요?”에 대하여 답변을 드립니다.
이 답변을 드리기 전에 님의 질문에서 언급되고 있는“저희 목사님은 지옥에 갔다고 하셨는데요. 베드로 전서 3장 18절부터 읽어보면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고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복종하지 않았던 자들이라고 하는데요...”에 대해서 우선 말씀드리겠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는 사도 베드로가 당시의 교회가 처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할 것을 권면하는 중에 한 말입니다. 그는 1-6절에서 아내가 남편에 대하여 가질 자세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은 아내는 남편에게‘순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자가 근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은 외모가 아니었습니다. 여자의 존재성은 외모를 꾸미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인격에 있는 것인데, 순복하는 데서 아름다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아브라함의 아내가 남편을‘주’라고 칭하며 복종한 것을 들어서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7절에서는 남편이 아내에 대하여 가질 자세를 말하였는데, 곧 선한 양심입니다. 그는 그 권면으로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고 하였으며, 여자를 귀히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권면한 것은 인격은 일방적이 아닌, 곧 어느 한쪽에만 요구되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하듯이 남편은 아내를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요, 여자는 남자보다 더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8-15절에서는 대인 관계 면에서 형제 사랑을 권면하였는데 열심히 선을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16-22절에서는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권면하고 있는 그‘선한 양심’이 어떻게 있게 되었는가를 설명하였습니다.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서도 고난을 받을 수가 있는데 이는 의를 위하여서 받는 것으로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서 그리스도의 선함과 고난 받음을 들어 설명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인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한 선한 일을 하셨으나 그 자신은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고난이 우리의 표본으로서 우리 또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그 선한 양심에 의하여 고난도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온 이야기가 바로 19절에서의“그리스도는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셨으나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아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말한 것이 20절인“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에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방주에서 나와 물로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인데 겨우 여덟 명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4장 6절에서‘죽은 자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3장 19절에서 말하고 있는‘옥에 있는 영들’이 바로 이들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이죠. 3장 19절에서의‘옥에 있는 영들’은 4장 6절에서 설명되고 있는‘죽은 자들’이니, 과거의 구약 시대 때에 죽은 사람들이며, 또한 옛날에 죽은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심판 아래 놓여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옥에 있는 영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구원을 얻기 전까지에 놓여 있던 모든 죄의 사람, 곧 하나님께 범죄하여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는 사람들을 총칭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또한“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고 하시면서“노아의 날 방주에서 구원 얻은 여덟 명”을 든 것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던 죄인된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여 주심으로, 그래서 여덟 명인 이들만큼은 하나님께서 전하여 주시는 복음을 듣고서 그 복음에 의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소망에 의해 심판에서 건짐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는 모든 죄인된 인류에게 구원의 전파인 복음이라고 하는 것을 선언하여서 알게 해 주고 있습니다. 이 복음에 의하여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모든 죄인들이 노아의 여덟 식구처럼 물에서 건짐, 곧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3장 21절에서 하고 있는 말이“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선한 양심’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물은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모든 사람이 수장되어 멸망당하는 심판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노아의 여덟 식구에게 있어서 물은 전혀 다른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는데 물에서 보이고 있는 심판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소망을 가진 자기들에게 건짐을 준 구원의 표였습니다.
그것처럼 오늘날의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니 이것을 믿음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바라보아 소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소망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몸을 이루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소망에 의해 하나님과 연합한 자가 됨으로 구원을 받은 노아의 여덟 식구처럼 구원을 받는 것이지 달리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선한 양심이 바로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소망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선한 양심에 의하여서 우리들이 아내된 자로서 또 남편된 자로서 그리고 이웃된 자로서 선하게 살아가야 하며, 의를 위하여서 살아가야 할 것을 말하면서 그러다가 고난이 주어지면 선한 양심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가운데 기꺼이 받을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말한 의미를 이해하면, 그가“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 죽음을 당하신 예수께서 지옥에 내려가 그곳에서 계신 3일간에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듯이 또한“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4장 6절의 의미도 예수께서 지옥에 내려가 죽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이 아님도 알 수 있습니다.
하오니 말입니다. 님은 이러한 이해를 잘 하고 계셔야겠습니다. 그러한 중에서 이제 님이 질문한 것에 대해서 알아야 겠습니다. 님이 정작 궁금해 하신 것은“세종대왕처럼 전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님께서 속한 교회의 목사님은“지옥에 갔다”라고 알려주었다고 했습니다.
님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변을 드리기에 앞서 제가 먼저 님에게 질문을 하는 것으로 답변을 접근해 가겠습니다. 사람이 죄로부터 구원 얻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요? 사도 베드로가“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고 구원의 복음인 주 예수를 증거했습니다. 그는 주 예수를 믿음으로, 그를 믿는 자들과 그들의 집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실 때 주의 사자는 그의 이름을“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라고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은 구속주로서의 공생애의 사역을 하실 때“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라고 말씀하셨으며, 사도 바울은 세례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자신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고 하였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고 말하였습니다(행 19:4).
해서 말입니다. 오고 오는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자신의 죄로부터 구원을 얻고자 하면, 그래서 하나님을 주로 섬기고자 한다면, 유일한 구원의 길로 주신 그리스도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자신의 생명의 주이심을 믿는 믿음에 있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는 죄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있지 않고서는 구원을 얻는 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가령, 주 예수님 외에 다른 신(우상)의 이름을 부르며 숭배함에 있을지라도 그것으로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또는 선행을 하며 자비의 공적을 쌓을지라도 그것으로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또한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기며 훌륭한 위인으로 남을지라도 그것으로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말이죠. 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나왔지요. 세종대왕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겠는지요. 님이 언급한 것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러한 그는 주 예수님을 찾으며 구한 적이 전혀 없는데 구원을 받았겠는지요. 아닙니다. 세종대왕은 우리나라에서 국민이면 존경의 대상으로 1순위인 첫 번째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순신 장군이니, 이러 이러한 분이니 하고 존경의 대상을 이야기 하죠. 세종대왕이 이처럼 우리나라 온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을 만한 위대한 분으로 남는 분입니다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구원을 받음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혹자는, 우리나라에 하나님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기 전에 세종대왕이 살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어볼 기회도 없었고, 믿을 기회도 없었는데, 믿을 기회도 주지 않고서 그런 위대한 분을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느냐는 의문을 갖고 항변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그를 믿는 믿음에 있게 하시는 것을 통하여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은혜로 주신 길입니다. 이에 예수께서는“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 14: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예수께서 그처럼 진리를 말하는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고 따름의 믿음에 있지를 않습니다(요 8:45-46).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심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 믿음을 창조 이래로 세말까지 모든 전 시대에서 각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골고루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뜻을 정하셨고, 그 뜻을 이루실 때가 이르므로, 마침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구주이심을 드러내시며 구속주의 사역을 수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되기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듣지 못했을지라도 그들의 선행, 공적, 업적 등을 고려해서 구원해 주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셔서 그분을 직접 보여주시고 그 이름을 듣게 하여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눈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막으시고 그들의 귀가 주님이 주시는 천국 복음을 듣지 못하도록 닫으시고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깨닫지 못하도록 완악함에 두십니다. 그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함에 있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그래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단 한마디조차 말해보지 못함에 있게 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을 받는 허락이 없이 구원 얻음에 있지 못하게 막으시는 일을 하십니다. 해서 말입니다. 세상대왕이 참으로 훌륭한 두고두고 사람들의 기억에 있으며 존경을 받는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음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그에게 주어진 길을 갔습니다. 이는 말이죠. 님이 이번의 질문 끝에서 갖고 계신 궁금증인“만약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나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들은 어떻게 되나요?”에서도 동일합니다. 장성한 어른이건 간에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이건 간에 따라 구원을 하심에 고려의 대상이 되는 차이를 갖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겠는지요. 사도 바울은 그 대답을 분명하게 줍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5. 다섯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 : 마지막인 다섯 번째 질문으로, 님은“저희 인근교회에서는 666의 숫자가 베리칩이라고 하면서 받으면 안 된다고 하고 열심히 전도하고 있는데요. 666은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답변을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님이 언급한 숫자인 666은 요한계시록 13장 11-18절에서 보게 됩니다.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
사도 요한은 주께서 보게 하신 또 하나의 신비스런 환상을 보았다. 짐승 한 마리가 바다로부터 올라왔는데, 그 짐승은 7개의 머리와 10개의 뿔을 가지고 있는 형상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뿔 각각에는 관이 씌워져 있었고, 7개의 머리에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 짐승의 얼굴은 마치 표범처럼 생겼으며 발은 곰의 발을 가지고 있었고, 입은 사자처럼 생겼습니다. 용은 자기 힘과 왕위와 큰 권한을 그 짐승에게 주었습니다. 용에게서 권세를 받은 짐승이 그 권세를 휘두름에 의해 온 세상 사람들이 그 짐승을 두려워하며 따랐습니다. 그러한 그들은“이 짐승보다 위대한 자가 어디 있으며, 이 짐승을 당할 자가 누구인가?”하면서 짐승에게 권세를 준 용을 숭배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짐승이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이 짐승은 용으로부터 권세를 받아 활동하는데, 자기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와 같은 흉내를 내어 많은 사람을 미혹하는 일을 적그리스도입니다.
이 적그리스도와 함께 활동하는 또 하나의 짐승이 땅에서 올라와 등장하는데, 그 짐승은 어린양처럼 두 개의 뿔을 가지고 있으며 늙은 뱀인 용처럼 말을 합니다. 이 두 번째 짐승은 첫 번째 짐승에게서 권세를 받아 활동함으로써 온 세상 사람들에게 첫째 짐승을 숭배하게 합니다. 이러한 두 번째 짐승은 적그리스도의 영으로, 거짓 가르침을 주는 세력인 거짓 선지자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일을 이야기 해 주어 알게 하면서, 두 번째 짐승의 실체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말이죠. 두 번째 짐승을 가리키는 숫자를 사용해서 말줍니다. 두 번째 짐승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있는 이름으로서의 숫자로 666을 사용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숫자가 새겨진 낙인이 찍힌 사람, 이 사람에 새겨져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해주는 이름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곧,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사람의 이름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그 사람의 이름이 표시해 주는 숫자 666은 그가 따르며 숭배하는 짐승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짐승을 가리키는 이 숫자가 있는 사람은 두 번째 짐승의 이름을 따르며 두 번째 짐승이 의도한 대로 첫 번째 짐승의 우상을 경배함에 있습니다. 그 숫자를 세어 볼 것이 말해지고 있는데, 육백 육십 육(666)이다. 따라서 666이란 숫자는 두 번째 짐승을 따르며 첫 번째 짐승의 우상을 경배하는 자들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이 숫자 666은 어린양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을 뜻하는 이마에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으로 인 맞은 구속함을 받은 144,000이란 숫자와 상대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짐승의 이름으로 인 맞은, 그래서 짐승의 표를 지닌 숫자가 666입니다.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666을 교황, 유럽의 강국, 바코드, 그리고 지금은 베리칩 등으로 시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말함으로써 일관된 통일성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은 666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잘못 이해하고 있는 주장을 그때 그 때마다 따르는 때문입니다.
하오니, 님이 거주하고 있는 인근교회에서 666의 숫자가 베리칩이라고 하면서 이것을 받으면 안 된다고 하며 열심히 전도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습니다만, 그들의 말에 미혹당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666을 베리칩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전에 그와 유사한 주장을 해 왔던 말이 참으로 가당치 않았던 것처럼, 이 또한 참으로 얼토당토 않은 것입니다. 그들이야말로 그리스도께 올바른 믿음에 있어가려고 하여 성경의 참된 진리에 이르는 지식에 있으려는 님을 끌어내서 주께 가진 믿음에서 삐뚤어지게 하고 결국에는 그리스도로부터 떠나게 하는 사악한 666(육백 육십 육)이기 때문입니다.
님이여! 이상으로 님이 궁금해 하며 물은 모두 다섯 가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모두 마칩니다. 님의 질문이 한 가지가 아닌 모두 다섯 가지가 되다 보니까, 답변의 글 또한 매우 길어져 부득이하게 매우 긴 장문의 답변이 되었습니다. .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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