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지갑에서 동전 한 닢 손댄 적 없던 내가 이종사촌 오빠의 책장에 손을 댄 적이 있었다. 중학생일 무렵 여름방학 때 원주에 사는 이모네 집에 놀러 갔다가 맘껏 책을 읽을 수 있는 오빠가 부러웠다. 소아마비를 앓고 있어 책 읽는 일로 소일하던 오빠였다.
아마도 내가 앙큼한 책 도둑인 걸 알았을 것이다. 돌려줘야지 생각은 했지만. 물놀이 사고를 당해 이모의 가슴에 묻히는 바람에 책은 본의 아니게 유품이 되었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를 볼 적마다 술에 취한 채 강가를 걷다가 물에 빠져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한스와 겨우 스무 살이었던 오빠가 겹쳐 보였다.
해거름 전에 둑방 길을 걷던 오빠의 그림자가 그렇게 심하게 절룩거리는 줄도 모르고 나는 그림자를 흉내 내며 걸었다. 책에 파묻혀 행복하게 죽을 줄 알았던 그에게도 청춘의 고뇌가 있었음을 수많은 밑줄과 적바림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본격 수필을 하기 전 일이다. 표지가 딱딱하고 두꺼운 책은 소품 같았는지, 병뚜껑을 따지 않은 양주처럼 장식장 안에 고이고이 모셔두었다. 견고하고 고급스러워 보인다는 장점은 있지만, 두께 때문에 손을 안 타는 단점이 있다. 소중히 여겨 간직한다고 모두 애장서((愛藏書)는 아닐 텐데 전시용 진열 목적이 컸던 모양이다. 등단하기 전에는 요리, 과학, 문학전집을 주로 샀다. 하나같이 갈피끈이 달린 고급 양장본이었다. 끝까지 읽진 않았지만, 내게는 허영과 사치였던 벽돌 책도 여러 권 있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표현이 'Don't judge a book by its cover '인 걸 보면 책 표지는 사람의 얼굴과 같은 의미인가 보다. 욕심내어 사둔 책들이 실속 없이 외향에 치중되다 보니 읽은 책보다 안 읽은 책들이 많았다.
나의 서재를 보여주는 일만큼 부끄러운 것도 없다. 책장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시나 수필 중심으로 채우기 시작한 건 2020년 등단 후였다. 책의 겉치레보다는 내용이 중요하기에 함부로 다루어선 안 될 몇몇 책은 따로 모아 두었다. 버리는 책은 분리 배출장으로 보내기 전에 아파트 출입문 앞에 하루 정도 두었다. '필요하신 분 가져가세요'란 문구를 적어놓고 주민의 양해를 구했다. 나 역시 중고 서점이나 아파트 벼룩시장이나 재활용장에서 의외의 책을 득뎀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