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법문은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으니, 자세히 봐야 합니다.
‘거울 속의 형상과 같다’고 했는데,
거울 속의 형상은 거울이 지은 것이 아니요,
얼굴이 지은 것도 아니요,
거울을 잡은 이가 지은 것도 아니요,
자연히 지은 것도 아니요,
인연 없이 된 것도 아니다.
어째서 거울이 지은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얼굴이 거울에 다가가기 전에는 형상이 없으니,
그러므로 거울이 지은 것이 아니다.
어째서 얼굴이 지은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거울이 없으면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거울을 잡은 이가 지은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거울도 없고 얼굴도 없으면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자연히 지은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거울이 없고 얼굴도 없으면 형상이 없다.
형상은 거울과 얼굴을 기다린 뒤에야 있게 된다.
그러므로 자연히 지은 것이 아니다.
어째서 인연 없이 이루어진 것도 아닌가?
왜냐하면 인연이 없이 이루진다면 항상 형상이 있어야 할 것이요,
항상 있다면 거울이나 얼굴을 제하고도 스스로 나와야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인연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모든 법도 그와 같아서
스스로 지은 것도 아니요,
남이 지은 것도 아니요,
함께 지은 것이 아니요,
인연이 없이 지은 것도 아니다.
어째서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원인으로부터 생긴 일체의 법은 자재(自在)가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인연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스로가 지은 것이 아니다.
나 스스로 나를 만들어 낸 게 아닙니다.
나라는 것은 오온에 의지해서 붙여진 이름일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 나라는 것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또 나라는 게 정말 있다면 자재함, 즉 자유자재로,
뜻대로 되어야 하는데 안됩니다. 무아!
내 뜻대로 안되는 건 결국 나가 아닙니다.
남들이나 사물이 내 뜻대로 안돼서 남입니다.
몸도 내 뜻대로 안되죠.
아프지 말아라, 병들지 말아라, 늙지 말아라...라고 말해도 그렇게 안됩니다.
어째서 남이 지은 것도 아닌가?
왜냐하면 스스로가 없기 때문에 남도 없다.
만일 남이 지었다면 죄와 복의 힘을 잃는다.
남이 짓는 데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착함과 착하지 못함이다
착하다면 모두에게 쾌락을 주어야 할 것이요,
착하지 못하다면 모두에게 고통을 주어야 할 것이다.
만약에 고락이 섞여 있다면,
무슨 인연으로 쾌락을 주며, 무슨 인연으로 고통을 주는가?
본질적으로 "나"는 없습니다.
본래 생겨난게 아닙니다. 불생불멸입니다.
그래서 나를 만든 창조주/조물주도 역시 없지요.
이런 이유로 불교에서는 나를 포함한,
모든 걸 창조한 조물주/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창조된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죠.
다 비어 있습니다. 허깨비만 있을 뿐...
만약 창조주/조물주가 나를 만들어냈다면,
위의 용수보살 말씀처럼 내가 지은 죄나 복이 무의미해집니다.
내가 설사 죄를 지어도 그 죄의 근본 원인은 창조주/조물주에게 있어서
내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난 결코 지옥에 가서 벌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죄를 짓도록 만든 창조주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행을 해도 그 과보로 천국에 가는 것도 역시 불가능해집니다.
내가 그 뭔짓을 해도 의미 자체가 없습니다.
이렇듯 나를 만든 창조주/조물주가 있다면, 삶의 의미 자체도 없고, 선하게 살 필요도 없게 됩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살면, 이 사회는 지옥으로 변합니다. 모든 규율이 무너지니까요.
함께 짓는다면 두 가지 허물이 있으니,
스스로가 짓는 허물과 남이 짓는 허물이다.
만일 인연이 없이 괴로움과 즐거움이 생긴다면 사람들은 항상 즐거워서
모든 괴로움을 여윌 것이다. 만일 인연이 없다면 사람들은 즐거움의 원인을 짓게 되니,
괴로움의 원인을 제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체의 법에는 반드시 인연이 있거늘 어리석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
비유하건대 사람이 나무에서 불을 구하고, 땅에서 물을 구하고,
부채에서 바람을 구하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갖가지 일은 각각 인연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이 화합한 인연은
전생의 업인(業因)과 금생의 좋은 행이나 삿된 행의 인연으로부터 생겨난다.
이로부터 괴로움과 즐거움을 얻는다.
이 괴로움과 즐거움의 갖가지 인연은 실제로 이를 구하려면 짓는 사람도 없고 받는 사람도 없으니,
공한 5중(衆)이 짓고 공한 5중이 받는 것이다.
위의 법문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나/자아/영혼/자성은 없기에.....죄나 선의 과보는 실체가 없어 공한 오온이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중생들은 나/자아/영혼/자성이 있어서 그게 죄의 과보나 선행의 과보를 받는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완전한 착각이며,
실제 죄를 짓고 선행을 하는 것도 실체가 없는 공한 오온, 즉 색수상행식이며
그 선행과 악행의 과보를 받는 것도 역시 실체가 없이 공한 오온, 즉 색수상행식입니다.
악행의 과보로 지옥에 갔다면, 악행의 과보인 고통을 겪는 것은,
첫째, 색......몸입니다. 몸이 괴로움을 겪지요. 찢기거나 잘리거나, 끓여지거나 등등
둘째, 수 ......느낌입니다. 몸이 찢길 때의 그 괴로운 느낌...
셋째, 상.......생각입니다. 온갖 두려운 생각과 좌절감.....
넷째, 행.......행함입니다. 지독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뜻대로 안되어 못벗어 날 때의 그 고통
다섯째, 식.......앎입니다. 오로지 고통에 대한 앎/인식만 있다면 그것처럼 괴로운 것은 없습니다.
업을 짓는 것도 오온이며, 그 업의 과보를 받는 것도 역시 오온입니다.
나/자아/영혼/자성이 있어서 그게 업을 짓고 받는게 아닙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즐거움을 얻으면 음심으로 애착하고,
괴로움을 만나면 성을 내며,
이 즐거움이 사라지면 다시 얻으려고 애를 쓴다.
마치 어린애가 거울 속의 형상을 보고는 즐거운 마음으로 애착하며,
애착하던 것을 잃으면 거울을 부수어 찾아 구하는 것과 같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보고 웃는다.
즐거움을 잃었다고 다시 구하는 일도 이와 같으니,
역시 도를 얻은 성인은 이 때문에 웃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거울 속의 형상과 같다’고 말한다.
또한 거울 속의 형상은
실제로는 공하여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거늘 뭇 사람들의 눈을 속일 뿐이다.
일체의 법도 그와 같아서 공하여 실답지 않으며,
생겨나거나 멸하지도 않거늘 범부들의 눈을 홀릴 뿐이다.
- 대지도론/용수보살 지음/구마라집 한역/김성구 번역/동국역경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