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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비가 또 내리는 날인데요. 어제 예보를 보니까 강원도에 눈이 내릴 수 있다는 예보가 있던데 정말 눈이 왔나요? 오늘 오늘 예보는 제가 못 봤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5월달에 이런 폭우가 내리는 거는 지금 우리 기상 역사에 거의 드문 일이라고 하더라고요. 5월달에 원래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는 계절이 아닌데 우리 5월달에 참 행사들이 많이 있었잖아요.
근데 올해는 특히 어린이날 때도 그랬지만 오늘 또 석가탄신일이어가지고 휴일을 갖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참 오늘 날씨 때문에 많이 어려웠을 텐데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어려움은 어쩌면 정말 너무나도 가벼운 어려움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뉴스만 조금 더 살펴보시면요. 요즘 기상 이변으로 인해서 정말로 많은 이들이 생업 터전을 잃어버리고 또 죽어나가는 그런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네 방송이 하나도 안 들려요. 그럴리가 네 왜 그럴까 잠시만 제가 한번 여기 마이크 이런 한번 가서 들어보세요. 서두에 말씀을 나눴으니까요.
그런데 진짜 지금 우리나라는 그래도 어느 정도 이렇게 잘 갖춰져 있는 시설들이 있어서 지금 이렇게 비가 많이 와도 조금 농사를 좀 망치고 이 정도 수준으로 넘어간다면 세계적인 상황에서는 굉장히 어려움들이 많더라고요.
네 소리가 나옵니다. 오늘 말씀으로 이제 들어갈게요.
오늘 로마서 말씀 내용 속에서 우리 한번 따라해볼까요?
제가 아직 덜 죽어서요.
네 여러분 이런 말들을 좀 이렇게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뭔가 연약한 우리의 모습이 드러날 때 또는 상대방이 좀 여전히 믿는다고 하는데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이런 말들을 흔히 하기도 합니다. 특히 성경 공부를 많이 하고 교회를 오래 다닌 분들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습관적으로 하는 분들이 간혹 계세요. 제가 아직 제가 죽어야 하는데 제가 아직 덜 죽어서 이래요. 이것저것 내 안에 육적인 것들이 더 죽어야 하는데 내가 여전히 죽지 않아서 이렇게 불쑥불쑥 연약함이 드러난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근데 여러분 이 이야기의 배후에는 약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성숙의 개념에서의 약간 오해가 담겨져 있는 것을 이 시간 잠깐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우리가 예수님이 이루신 우리의 믿음 안에서의 근거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 있어서 일반적인 개념에 근거해서 우리의 삶의 성숙도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먼저 일반적인 사람들이 삶의 성숙이라고 하는 개념을 어떻게 가지고 있는지 아주 짧게 점검해 보면요. 사상가인 존 루크라고 하는 사람은 우리 사람은 하얀 돌판과 같은 존재다. 그래서 무언가를 그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달라진다고 이야기를 했대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굉장히 교육에 대해서 중요하게 여겼던 사람이고요.
또 장자쿠루스라고 하는 사람은 우리는 원래 본성이 훌륭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것이 잘 발현될 수 있도록 도와주면 된다. 사회적으로 사회화가 잘 이루어지면 우리 사람들은 훌륭하게 된다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은 교육을 잘해야 되고 또 사회생활을 잘하면 우리 인간은 점점점점 성숙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말을 했어요. 물론 이들의 말처럼 교육이 점점점점 높아지는데 세상은 더 밝아지지 않습니다. 사회화는 고도되고 있지만 사회는 더 악해지고 있는 모습도 발견할 수 있고요. 또 이 사람들이 말한 것과 반대로 우리 인간이 가진 욕망 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집착 이런 것들을 내려놓으면 집착하는 것들을 죽이면 그러면 우리는 성숙할 수 있다. 성장할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들이 대부분 종교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망 우리 안에 있는 그런 집착을 죽이고 억누르고 그것들을 이겨내가기 시작하면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한다고 말을 한 대요. 인간이 가진 욕망이 너무나도 강하기 때문에 그 욕망대로 살아가면 우리는 미성숙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뭔가 내 안에 있는 악한 것 그 악한 생각 잘못된 생각들을 억누르고 무언가를 해야 그래야 성장하고 성숙한다고 하는 그래서 이 최고의 깨달음 이 과정이 깨달음이라고 말하는 게 불교예요.
우리가 뭐 불교를 잘 알진 못하지만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교리의 내용이 아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흡사한 내용이 참 많더라고요. 불교에서 강조하고 있는 진리가 네 가지의 진리가 있는데요. 고제 집재 멸제도제라고 하는 4가지를 강조합니다. 고제는 한마디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8가지의 큰 고통이 있다. 생로 병사 그리고 그 외에 우리가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 속에서 여러 가지 우리의 삶에 고통이 있다고 말을 해요.
근데 우리 기독교적인 정신에 있어서도 우리의 삶은 깨어졌다. 죄로 말미암아 깨졌다. 우리가 그래서 이 땅에서 우리가 고통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똑같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두 번째 집제라고 하는 데서 말하는 건 뭐냐면 인간의 욕망이 이런 고통을 더 심화시킨다. 그래서 멸제에서는 우리가 더 성숙하고 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이것들을 소멸해야 한다. 이것들을 없애야 한다. 욕망을 집착하는 것들을 없애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을 가기 위해서 도저히 올바르게 생각하고 올바르게 말하고 올바르게 판단하고 올바르게 생활하고 또 올바르게 삶을 살아가는 집중하는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면 결국에 깨닫게 되고 경지에 오른다.마지막에 깨닫게 되고 경지에 오른다만 빼면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일반적인 신앙관하고도 좀 연결고리가 있죠.
불교에서 지금 말하는 사상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이 불교의 이런 교리들을 이야기를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네. 우리가 우리 욕심으로 말미암아 죄가 이게 되었고 고통이 있고 그 고통들을 우리가 잘 우리의 욕심들을 제어하고 나아가는 과정 속에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한 사람,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리고 지금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생각해온 그런 사상들처럼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을 제어하면 내가 바르게 살아가면 내가 뭔가를 행하면 내가 성장하고 성숙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좀 잘못된 가치관이 끼어져 있다는 겁니다.
내가 더 열심히 기도하고 내가 더 열심히 성경 읽고 내가 더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고 그런 행동들을 하고 내가 내 안에 있는 죄의 욕망들, 내 안의 욕심들을 제어하면 내가 성장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삶이 안 따라질 때 하는 말이 이거예요.
내가 아직 덜 죽어서요.
이런 말의 배후에는 불교적인 사상처럼 내가 뭔가를 수양해서 내가 뭔가를 해서 그것들을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이 들어 있다는 겁니다.
물론 완전히 틀린 기독교적인 이 개념과의 완전히 틀리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 보고 예배 열심히 하고 또 우리가 열심히 뭔가 봉사하면 자동적으로 성숙이 따라오나요?
그렇지 않은 경우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그 믿음을 향해서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성숙을 온전히 발견하게 될 수 있는 거예요.
성경이 뭘 말하는지를 한번 찾아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 3절에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성경은 우리가 주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 그리스도와 연합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우리가 공개적으로 고백할 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하나 된다고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굉장히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알고 있는 말씀이지만 우리의 기독교적인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오늘 본문 2절 3절의 내용들을 이렇게 연속해서 한번 보십시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인정한 사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인정한 사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대가를 지불하셨다.
이건 다 우리가 믿고 인정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죄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용서받은 자로서 우리는 살아간다. 이걸 우리가 믿고 우리가 인정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를 좀 더 기억해야 될 게 있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우리도 같이 죽은 사람이다. 함께 죽었다는 말이 여기에 있다는 거예요.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라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우리도 죽었다고 말을 하고 있어요.
여러분 이 말씀에서는 우리가 원래 죄의 노예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노예 노예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 노예입니다. 죄의 노예라는 말은 한마디로 죄에 붙들려서 죄가 시키는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우리였다는 것이죠. 그래서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어도 거스를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노예니까요. 죄의 노예였으니까요.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세상이 좌지우지하는 대로 우리는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옛 사람이 어떻게 됐다고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저 우리의 옛 사람이 죽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옛사람 죄의 노예로서의 옛사람은 죽었고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한번 옛날 노예를 부리고 있는 주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노예가 내 마음대로 막 일을 부리는데 노예가 갑자기 죽어버렸어요. 근데 그 죽은 시신을 가지고 계속 내 노예라고 내가 마음대로 뭔가를 시킬 수 있겠습니까? 죽는 순간 종과 이 주인과의 관계는 끝나는 거예요. 노예를 더 이상 부를 수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죄의 종이었지만 죄의 노예였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말은 이제 죄의 종노릇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거예요. 그의 지배를 벗어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노예가 노예 상태로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죽는 거예요.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많은 종교들은요. 계속 자기를 죽이는 것이 신앙의 행전이에요. 그러니까 불교에서도 그렇게 수천 배를 하고 뭔가 공약을 드리고 그런 어떤 노력을 통해서 또 다른 종교에서도 어떤 뭔가를 통해서 수행을 하고 뭔가를 기도하려고 하는 그런 과정들이 자기를 죽이는 거라고 말을 하거든요.
근데 성경은 뭐라고 말한다고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과 8절에 보면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과 연합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부활할 때 그와 연합한 상태로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너무나도 영적 실체적이어서 우리의 신분이 완전히 변화되었고 부활의 능력이 이미 우리에게 단도되었다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요. 이미 완성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예수님의 사역은 완성되셨어요.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훗날 그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 완전히 부활하실 것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우리가 곰곰이 묵상하면 이게 무슨 의미인지를 조금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죄의 종 됐던 내가 죽었다. 우리는 로마서 6장 11절에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11절 말씀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아멘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또 그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믿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믿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기서 여긴다고 하는 말 이 말은요. 간주하다 생각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서 결론을 짓는다는 그런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그냥 덮어놓고 아멘 믿는 것이 아니라요. 정말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하신 일들을 하나하나 발견해 가면서 하나님이 이런 일들을 이루셨군요. 하나님 나를 위하여 이 일을 이루셨군요. 제가 그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입니다. 제가 이 사실을 믿습니다. 그렇게 고백하고 여기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다른 종교들과 차이점이 확연합니다.
우리는 이미 변화된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해야 될 게 뭐냐면 이걸 먼저 인정하고 우리가 그렇게 여기는 겁니다. 아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내가 10년 20년 내가 무슨 직분이 있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내가 뭔가를 헌신하고 뭔가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나를 벌써 자녀삼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왜 이 부분에서 좀 쉽지 않을까요?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 나름대로 신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려고 애쓰는 나의 모습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 20년 30년 살아가면서 우리의 모습 가운데 나도 모르게 배어 있는 그런 모습들이 있기 때문에 내가 나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감히 말하지 못하는 그러한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 그런 실패하고 연약한 모습을 보면서
너는 하나님의 자녀야. 니가 지금 과연 하나님의 자녀야? 넌 아직도 죄에 굴복할 수밖에 없어. 너는 세상에 유혹이 오면 꼼짝없이 넘어지는 존재잖아.
근데 여러분 이런 순간에도 우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고 여기는 그런 우리가 되기를 간절하게 소망합니다.
이게 바로 믿음의 첫걸음이라는 거예요. 동화나 영화 같은 데 자주 등장하는 주제 가운데 원래는 왕족으로 태어났는데 어찌어찌 해가지고 거지같이 생활하다가 이렇게 여러 가지 에피소드 가운데 당신이 왕자입니다. 당신이 공주입니다라고 하는 사실을 듣게 되었을 때 그 주인공들이 처음에는 당황스러워하고 놀라고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데요라고 부정하다가 결국에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에 걸맞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들을 우리가 보게 되죠.
어쩌면 꿈과 같은 이야기들이고 동화 같은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그냥 우리는 그냥 동화 이야기로만 생각합니다. 근데 여러분 동화 같은 이야기가 이미 우리에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원래 우리는 자격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히 변화된 자로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삼아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성숙한 삶이라는 것이죠.
여러분. 근데 이것들을 우리가 계속 우리의 것으로 여기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은 그냥 마음으로 다짐하는 것이 아니라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계속 발견해 가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이런 일도 이루어지고 우리를 위해 러브레토로 기록해 놓으신 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이렇게 역사하시구나 하나님 이런 식으로도 나에게 지금도 역사하시는 분이 오늘 아침에 우리 새벽 말씀에 엘리아와 또 사라바 과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하나님은 이렇게 온갖 땅에 가뭄이 내렸을 때도 정말 세밀한 방법으로 챙기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했잖아요.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 하나님인 줄 믿습니다. 예 그렇게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내가 믿는 하나님,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계속 발견하고 그 하나님이 나의 삶 가운데 완성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발견하면서 그 묵상하는 건 데 그것을 나의 삶에 적응하는 가운데 점점 내면화되고 점점 나의 삶이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겁니다.
거지같이 살았던 왕자가 바로 왕자 자리에 앉아 논다고 그 사람이 바로 왕자처럼 행동할 수 있겠어요. 예전에 거지같이 행동했던 거지같이 살았던 때에 행동들이 편해서 그 행동들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남에 따라서 자기가 왕자라는 것이 확실해졌잖아요. 그러면 왕자로서의 삶을 하나하나 배워가고 하나하나 행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왕자 아니 그 왕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내가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그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분명히 기억할 것은 우리가 뭔가를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뭔가를 드리려고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하나님께 기쁨 되려고 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선택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죄 내막힌 삶, 죄의 종이었습니다. 근데 불행한 사실은 여전히 우리의 가치관 속에 불교적인 또 타 종교적인 그런 사상들이 우리 안에 내면적으로 들어와 있어서요. 여전히 내가 안 죽어서요. 내가 뭔가를 하지 않아서요라고 핑계하면서 내 연약함 우리 이런 말 잘 쓰잖아요. 마음은 원이어도 육신이 약하도다. 내가 아직 연약해요. 내가 아직 그래요. 성경에서 인용하니까 틀린 말은 아닌데 중요한 건 그 말 가운데 담겨져 있는 의미가 뭔지를 우리가 되새겨보자는 거예요.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식들을 알아가면서 이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거구나라고 발견하면서 그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변화시키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자답게 살아가기를 결단하고 하나하나 배워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이미 변화된 존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우리는 구원받은 자답게 살아가기를 힘쓰고 애쓰는 겁니다.
또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배우는 거예요. 나는 구원받은 자로서 이렇게 살아가는 정도가 나인 줄 알았더니 우리 옆에 권사님을 보니 우리 옆에 장로님을 보니 저렇게도 구원받은 자로서 살아가는구나 배우고 또 그렇게 따라가보는 거죠. 그게 우리 공동체의 영향력이 되는 겁니다. 제가 아직 덜 죽어서요.
여러분 우리는 이미 죽었습니다. 이미 우리의 죄에 종된 우리는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를 기대하고 소망하고 더욱더 알아가는 과정이 우리에게 더욱더 기대와 소망으로 일어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