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능가아발다라보경
(楞伽阿跋多羅寶經)
송(宋)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한역
최윤옥 번역
능가아발다라보경 제1권-3
1. 모든 부처님께서 마음에 대해 말씀하신 품[一切佛語心品]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모든 식(識)에는 몇 종류의 생김과 머묾과 없어짐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식에는 두 가지의 생김과 머묾과 없어짐이 있으니,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식에는 두 가지의 생김이 있으니 유주생(流注生)과 상생(相生)이고, 두 가지의 머묾이 있으니 유주주(流注住)와 상주(相住)이며, 두 가지의 없어짐이 있으니 유주멸(流注滅)과 상멸(相滅)이다.
모든 식에는 세 종류의 상(相)이 있으니, 전상(轉相)과 업상(業相)과 진상(眞相)이다.
대혜야, 간략히 말하면 세 종류의 식(識)이 있고, 자세히 말하면 여덟 가지 상(相)이 있다.
무엇이 세 종류인가? 진식(眞識)과 현식(現識) 그리고 분별사식(分別事識)이다. 이는 마치 맑은 거울이 모든 색상(色像)을 지니고 있는 것과 같으니, 현식에 색상이 나타나는 것도 이와 같다. 대혜야, 현식과 분별사식 이 두 가지는 무너지는 모습[壞相]과 무너지지 않는 모습[不壞相]이 번갈아 인(因)이 된다.
대혜야, 부사의훈(不思議薰)과 부사의변(不思議變)은 현식(現識)의 인이다.
대혜야, 갖가지 경계를 취하는 것과 끝없는 옛날부터의 망상훈(妄想薰)은 분별사식(分別事識)의 인이다. 대혜야, 만약 저 진식(眞識)을 덮고 있는 온갖 진실하지 않은 것들과 모든 허망한 것들이 없어지면 모든 근식(根識)이 없어진다. 대혜야, 이것을‘상(相)이 없어진다’고 한다.
대혜야, 상속(相續)이 없어진다는 것은 상속하는 원인[所因]이 없어지면 상속이 없어지고, 말미암는 곳[所從]이 없어지거나 반연하는 대상[所緣]이 없어지면 상속이 없어지는 것이다.
대혜야, 왜냐하면 이것이 그 의지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의지하는 것이란 끝없는 옛날부터의 망상훈(妄想薰)을 말하고, 반연하는 것이란 자기 마음과 견해 등으로 경계를 인식하는 망상을 말한다. 마치 진흙덩이와 미진(微塵)이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닌 것과 같으니, 금(金)과 장엄구(莊嚴具)도 역시 이와 같다.
대혜야, 만약 진흙덩이와 미진이 다르다면 진흙덩이는 미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미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다르지 않다. 만약 다르지 않다면 진흙덩이와 미진은 당연히 분별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대혜야, 전식(轉識)과 장식(藏識)의 진상(眞相)이 만약 다르다면, 장식은 전식의 인(因)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만약 다르지 않다면, 전식이 없어지면 장식 역시 없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체의 진상(眞相)은 실제로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대혜야, 자체 진상의 식(識)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단지 업상(業相)이 없어질 뿐이니, 만약 자체의 진상이 없어진다면 곧 장식이 없어져야 할 것이다.
대혜야, 장식이 없어진다고 하는 것은 외도들의 논의인 단견(斷見)과 다르지 않다.
대혜야, 저 모든 외도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경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없어지면 식(識)의 상속 역시 없어진다. 만약 식의 상속이 없어진다면 끊임없는 옛날부터의 상속 역시 끊어져야 한다.’
대혜야, 외도들은 ‘상속하는 식은 인(因)에서 생긴다. 안식(眼識)은 물질과 밝음이 모여서 생기는 것이 아니니, 다른 인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인(因)으로 여기는 것은 훌륭하고 묘한 것[勝妙]ㆍ사람[士夫]ㆍ자재한 것[自在]ㆍ시간[時]ㆍ미진(微塵)이다.
또, 대혜야, 일곱 가지 성자성(性自性)이 있다. 말하자면 집성자성(集性自性)ㆍ성자성(性自性)ㆍ상성자성(相性自性)ㆍ대종성자성(大種性自性)ㆍ인성자성(因性自性)ㆍ연성자성(緣性自性)ㆍ성성자성(成性自性)이다.
또, 대혜야, 일곱 가지 제일의(第一義)가 있다. 말하자면 마음의 경계ㆍ혜(慧)의 경계ㆍ지(智)의 경계ㆍ견(見)의 경계ㆍ2견(見)을 초월한 경계ㆍ불자의 지위를 초월한 경계ㆍ여래가 스스로 도달한 경계이다.
대혜야, 이것이 바로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여래(如來)ㆍ응공(應供)ㆍ등정각(等正覺)의 성자성제일의의 마음[性自性第一義心]이다.[여기에서 ‘마음≺心≻’은 범음(梵音)으로 간율대(肝栗大)이다. 간율대는 송나라 말로 마음≺心≻이라고 하는데 나무의 심지와 같다는 뜻이다. 이는 생각으로 반연하는 마음≺念慮心≻이 아니다. 생각으로 반연하는 마음은 범음으로 질다(質多)라고 한다.]
성자성제일의의 마음으로써 여래는 세간법(世間法)과 출세간법(出世間法)과 출세간상상법(出世間上上法)을 성취하고, 성스러운 혜안(慧眼)으로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에 들어가서 건립하니, 그 건립된 것은 외도가 주장하는 악한 견해와는 같은 것이 아니다.
대혜야, 무엇이 외도가 주장하는 악한 견해와 같은 것인가? 이는 자기의 경계인 망상견(妄想見)에 대해서 자기 마음이 나타낸 것인 줄 알지 못해 한계[分際]를 통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혜야, 어리석은 범부는 성품에 성자성제일의(性自性第一義)가 없어 두 극단에 치우친 견해의 논의를 짓는다.
또, 대혜야, 망상으로 인한 3유(有)의 고통이 없어짐, 무지(無知)와 애업(愛業)의 인연이 없어짐, 자기 마음에 나타난 환과 같은 경계를 견해에 따라 이제 설명하겠다. 대혜야, 만일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종자가 없이[無種] 또는 종자가 있어서[有種] 인과가 나타난다고 하고, 일[事]과 시간[時]이 머문다고 하고, 음(陰)ㆍ계(界)ㆍ입(入)의 생김을 반연해 머문다고 하며, 혹은 생기고 나서 없어진다고 말한다면, 대혜야, 그들이 말하는 상속(相續)ㆍ일[事]ㆍ생김[生]ㆍ있음[有]ㆍ열반(涅槃)ㆍ도(道)ㆍ업(業)ㆍ과(果)ㆍ진리[諦]는 모든 법을 파괴하는 단멸론(斷滅論)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현실에서 시초(始初)를 볼 수 없으니, 분(分)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혜야, 이는 마치 깨어진 병이 병으로 쓰일 수 없는 것과 같고, 또 볶은 씨앗에서 싹이 나올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아서 대혜야, 음(陰)ㆍ계(界)ㆍ입(入)의 성품은 이미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니, 자기 마음의 망상견(妄想見)이어서 인(因)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차례로 생김이 없다.
대혜야, 만약 또 종자가 없는 것, 종자가 있는 것, 식(識), 이 세 가지 연(緣)이 합해서 생긴다고 말한다면, 거북이에게 당연히 털이 나야 할 것이고 모래에서는 당연히 기름이 나와야 할 것이니, 너의 주장은 틀린 것이며 결정된 이치에 어긋난다. 종자가 있다거나 종자가 없다는 말을 하는 데에는 이러한 잘못이 있으므로 하는 일이 모두 공(空)하여 의의[義]가 없다.
대혜야, 저 모든 외도가 세 가지 연(緣)이 화합하여 생김이 있다고 하는 것은, 지어진 방편과 인과의 자상,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종자가 있는 모습과 종자가 없는 모습이 본래부터 사물을 이룬다는 각상지(覺想地)를 이어받고 굴러서는, 스스로 허물과 습기를 보고 이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혜야, 어리석은 범부는 악견(惡見)의 해(害)를 받아 마음이 비뚤어지고 정신이 헷갈려 지혜가 없으면서, 망령되게 일체지(一切智)의 말이라고 칭한다.
대혜야, 만약 또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이 자성(自性)을 떠난 것이 뜬 구름이나 불을 돌려 생기는 바퀴 모양[火輪]이나 건달바성(揵闥婆城)이나 생긴 적이 없는 환(幻)이나 아지랑이나 물에 비친 달이나 꿈과 같음을 본다면, 내외의 마음으로 나타난 망상은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이지만 자기의 마음을 벗어나지 않으므로 망상의 인연이 완전히 사라진다. 그가 망상으로 말[說]과 말의 내용[所說], 관(觀)하는 자와 관하는 대상을 모두 벗어나고, 몸의 장식(藏識)을 수용하고 건립하여 식경계(識境界)의 받아들이는 자와 받아들인 것과 서로 응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무소유(無所有) 경계에서 생김과 머묾과 없어짐을 벗어나 자심으로 따라 들어가고 분별한다면, 대혜야, 이러한 보살은 오래지 않아 생사와 열반이 평등해지고 대비교방편(大悲巧方便)과 무개발방편 (無開發方便)을 얻으리라.
대혜야, 저 모든 중생계는 모두 다 환과 같다. 그러므로 인연을 떠나려고 애쓰지 않아도, 내외의 경계를 멀리 떠나 마음 밖에 보는 것이 없으면 차례로 무상처(無相處)에 들어가리니, 차례로 따라 들어가서 한 지위로부터 다른 지위의 삼매경계(三昧境界)에 이를 것이다. 삼계가 환과 같은 줄 이해하고 분별하여 관찰하면 반드시 여환삼매(如幻三昧)를 얻게 되고, 자기 마음이 나타내는 것이어서 공한 것임을 헤아리면 반야바라밀에 머물게 되며, 저것이 일으켜 짓는 방편을 버리고 떠나면 금강유삼마제(金剛喩三摩提)를 얻는다. 그리고 여래의 몸에 따라 들어가고 여여(如如)한 변화에 들어가, 신통이 자재하며 자비스러운 방편으로 장엄을 다 갖춘다. 그리고 평등하게 모든 불국토와 외도가 들어가는 곳에 들어가며 심(心)ㆍ의(意)ㆍ의 식(意識)을 벗어나니, 이 보살은 점차 몸을 바꿔 여래의 몸을 얻을 것이다.
대혜야, 그러므로 여래에 따라 들어가는 몸을 얻으려면 반드시 음(陰)ㆍ계(界)ㆍ입(入)과 마음이 인연하여 일으키는 방편과 생기고 머물고 없어지는 거짓된 망상을 멀리 벗어나야 한다. 오직 마음만으로 곧장 나아가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되고 허물인 망상과 습기로 인하여 3유(有)가 있음을 관찰하고, 무소유의 부처님 경지는 생기는 것이 아님을 사유하면, 자각성(自覺聖)에 이르고 자기 마음이 자재한 데에 나아가며 개발(開發)이 없는 행에 이를 것이다. 마 치 여러 색이 마니(摩尼) 보배를 따르는 것과 같이, 중생의 미세한 마음에 따라 들어가 화신(化身)으로써 중생의 마음을 따라 헤아려 제도하고, 모든 지위를 차례로 연속하여 건립할 것이다. 그러므로 대혜야, 스스로 성취하는 선법(善法)을 반드시 배우고 닦아야 한다.”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말씀하신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과 다섯 가지 법의 자성의 모습은, 일체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행하신 것입니다.‘자기 마음과 자기의 견(見) 등으로 반연하는 경계와는 화합하지 않는다’하신 것은, 모든 말씀이 진실한 모습을 이룬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능가국(楞伽國) 마라야산(摩羅耶山) 바다 속 주처(住處)의 대보살들에게 마음[心]을 말씀하셨습니다.‘여래가 찬탄한, 바다의 파도 같은 장식(藏識)의 경계가 법신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세존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네 가지 인연 때문에 안식(眼識)이 움직인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자기 마음이 나타내는 것을 받아들이는 줄 깨닫지 못하는 것,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이고 허물인 물질에 습기로 계착하는 것, 식(識)의 성품이 원래 그러한 것, 갖가지 색상(色相)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대혜야, 이를 네 가지 인연이라고 하니, 물이 흐르는 곳처럼 장식이 움직여 식의 물결이 일어난다.
대혜야, 안식이 그렇듯이 모든 감관[根]들도 미진수 같은 모공(毛孔)에 이르기까지 동시에 생기니, 차례대로 경계가 생기는 것도 이와 같다. 마치 맑은 거울에 여러 색상(色像)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대혜야, 마치 큰 바다에 맹렬한 바람이 부는 것과 같으니, 바깥 경계의 바람이 마음 바다에 불어 식의 파도가 끊이지 않는다. 인(因)과 만들어진 모습[所作相]이 다르다 다르지 않다 하며, 업의 생상(生相)에 밀착하고 깊이 들어가 계착하며 물질 등의 자성을 명료하게 알지 못하므로 다섯 가지 식신(識身)이 구른다.
대혜야, 저 다섯 가지 식신은 모두 차별된 분단상(分段相)으로 인하여 알 수 있다. 명심하라, 이 의식(意識)이 인(因)이 되어 저 5식신이 구르는 것이니, 저 5식신은‘내가 서로서로 인이 되어 주어 자기 마음에 현재의 망상계착이 구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들이 각각 무너지는 모습과 함께 움직인다고 경계를 분별하고 차별을 나누는 것이다. 저들의 움직임은 수행자가 선삼매(禪三昧)에 들어갔을 때, 미세한 습기가 움직임을 깨달아 알지 못하고서‘식이 없어진 후에 삼매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실은 식이 없어져 삼매에 들어간 것이 아니니, 습기의 종자가 없어지지 않은 까닭에 없어진 것이 아니다. 경계의 움직임과 받아들임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없어졌다고 한 것이다.
대혜야, 이와 같이 미세한 장식의 구경(究竟)의 변제(邊際)는 모든 여래와 주지보살(住地菩薩)이 아닌, 모든 성문이나 연각이나 외도가 수행하여 얻는 삼매나 지혜의 힘으로는 어떤 것으로 측량하여 결단할 수 없다. 그러나 여러 지위에서 지혜와 선교방편(善巧方便)으로 확고한 말씀의 뜻을 분별하고, 가장 훌륭하고 끝없는 선근을 성숙시키며, 자기 마음에 나타난 망상의 허위를 벗어나 숲에 조용히 앉아서 상ㆍ중ㆍ하의 수행을 닦으면, 자기 마음의 망상이 상속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한량없는 국토에서 모든 부처님이 관정(灌頂)하고, 자재력과 신통과 삼매를 얻으며, 모든 선지식과 불자가 권속이 되리니, 그런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은 자기 마음에 나타난 자성의 경계이다. 그는 허망한 생각과 생사라는 유위(有爲)의 바다, 업애(業愛)와 무지(無知) 등 이와 같은 인(因)을 모두 초월하고 건넌다. 그러므로 대혜야, 모든 수행자는 가장 훌륭한 선지식을 가까이해야 한다.”
이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마치 큰 바다의 파도가
맹렬한 바람으로 일어나
거대한 파도가 바다를 두드려
끊어질 때가 없는 것처럼
장식(藏識)의 바다는 항상 머물러 있으나
경계(境界)의 바람에 흔들려
갖가지 모든 식(識)의 파도가
용솟음쳐 구르며 생긴다.
푸르고 붉은 온갖 색깔
흰 우유와 석밀(石蜜)
담백한 맛과 온갖 꽃과 과일
해와 달과 광명(光明)이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으니
바닷물이 일어나 파도가 되는 것처럼
7식(識)도 이와 같아
마음과 함께 화합하여 생긴다.
마치 바닷물이 변하여
온갖 파도가 되어 구르듯
7식도 이와 같아
마음과 함께 화합하여 생기니
저 장식에서
갖가지 모든 식이 구르는 것이고
저 의식(意識)으로
모든 상(相)의 뜻을 생각하는 것이다.
무너지지 않는 모습에는 여덟 가지가 있으나
모습이 없다는 것 또한 모습이 없으니
마치 바다와 파도가
차별이 없는 것처럼
모든 식과 마음도 이와 같아서
다르다 함도 얻을 수 없다.
마음이란 업을 채집한다고 이름하고
의(意)는 널리 채집한다고 이름하며
모든 식이 알아야 할 대상을 알아
나타내는 등의 경계를 다섯 가지로 말한다.
이때 대혜보살이 게송으로 여쭈었다.
푸르고 붉은 모든 색상(色像)은
중생이 모든 식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파도 같은 온갖 법이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이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푸르고 붉은 모든 여러 가지 색은
파도와 같아 모두 없는 것
업을 채집하는 것을 마음이라 하여
모든 범부를 깨우쳐 준 것이다.
저 업이란 모두 없는 것이니
자기 마음이 받아들이는 것을 벗어나면
받아들인 것에 받아들여진 것이 없으니
저 파도와 같다.
수용하여 건립한 몸
이것이 중생의 현식(現識)이니
그곳에 모든 업이 나타나
마치 물과 파도 같다.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게송으로 말씀드렸다.
큰 바다와 파도의 성품은
치고 솟구치는 것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장식과 업도 이와 같다면
어찌하여 알 수 없습니까?
이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범부는 지혜가 없기에
장식을 큰 바다와 같다 하고
업상(業相)을 파도와 같다 한 것이니
이 비유에 의지해 유추해서 알라.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게송으로 말씀드렸다.
해가 뜨면 광명이
낮고 높은 중생을 평등하게 비추듯
여래께서 세간을 비추시는 것도
어리석은 사람에게 진실을 말씀하기 위함입니다.
이미 모든 법을 나누셨건만
어찌 진실을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이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만약 진실을 말한다면
그의 마음에는 진실이 없으니
마치 바다의 파도나
거울에 비친 모습이 꿈과 같다.
모두가 일시에 나타나니
마음의 경계도 그러하지만
경계가 갖추어지지 않으므로
차례로 업이 전전해서 생긴다.
식이란 식으로 알 바요
의(意)란 그러리라 여기는 것이며
다섯 가지는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이나
정해진 차례가 없다.
마치 화가와
그의 제자가
헝겊에 여러 형상을 그리듯
내가 말하는 것 역시 그와 같다.
고운 빛깔은 본래 무늬가 없으며
붓도 아니고 또한 흰 천도 아니지만
중생을 기쁘게 하기 위해
비단에 수를 놓아 여러 형상을 만든다.
말이란 따로 시행하는 것이어서
진실은 그 글자[名字]를 떠났지만
분별하는 것이 당연히 최초의 업이므로
수행하는 이를 위해 진실을 보여 준다.
진실이란 스스로 깨닫는 것이며
깨달았다는 생각도 깨달아야 할 대상도 벗어난다.
이것은 불자(佛子)를 위해서 하는 말이니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자세히 분별해 주리라.
온갖 것은 모두 환(幻)과 같아
비록 나타나나 진실이 없으니
이와 같이 갖가지 말을
경우에 따라 다르게 시설한다.
말한 바에 감응(感應)이 없으면
그에게는 말하지 않은 것이 되니
저 모든 병자들을
훌륭한 의사가 병에 따라 처방하듯
여래도 중생을 위해
그 마음을 헤아려 말씀하신다.
망상으로 알 경계가 아니며
성문(聲聞) 역시 해당되지 않는다.
불쌍히 여기는 이[哀愍者]가 말하는 것은
스스로 깨달은 자가 알 경계이니라.
“또 대혜야, 만약 보살마하살이 자심(自心)의 현량(現量)과 받아들이는 자와 받아들이는 대상과 망상의 경계를 알고자 하면, 모여 쌓인 세속의 습관과 잠[睡眠]을 없애야 하며, 초저녁부터 한밤중을 지나 새벽에 이르기까지 항상 스스로 각오(覺悟)하고 방편을 써서 수행하여야 하며, 악견(惡見)의 경론(經論)과 모든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의 모습을 벗어나야 하며, 자기 마음에 나타난 망상의 모습을 막힘없이 환히 알아야 한다.
또 대혜야, 보살마하살이 지혜상(智慧相)을 건립하여 머물고 나면, 높은 성지(聖智)의 세 가지 모습을 열심히 배우고 닦아야 한다. 성지의 세 가지 모습을 열심히 배우고 닦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소유(無所有)의 모습과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스스로 원을 세우던 시절의 모습[自願處相]과 자각성지(自覺聖智)의 구경의 모습을 말한다. 수행하여 이것들을 얻고 나면, 능히 어리석은 마음과 지혜의 모습을 버리고 보살의 제8지(地)를 얻게 되니, 위에서 말한 세 가지 모습을 닦음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대혜야, 무소유의 모습이란 성문과 연각과 외도의 모습을 말하니, 저들이 닦고 익혀 생기는 것이다.
대혜야, 스스로 원을 세우던 시절의 모습[自願處相]이란, 모든 과거의 부처님께서 스스로 원한 곳에서 수행하여 생기는 것이다. 대혜야, 자각성지의 구경의 모습이란, 모든 법의 모습에 계교하여 집착하는 것이 없이 여환삼매(如幻三昧)를 얻는 것을 말하니, 모든 불지(佛地)에 나아가는 행으로 생긴다. 대혜야, 이를 성지(聖智)의 세 가지 모습이라고 한다. 만약 이 성지의 세 가지 모습을 성취한다면, 자각성지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혜야, 성지의 세 가지 모습을 열심히 닦고 배워야 한다.”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은 대보살(大菩薩)들의 무리가 마음속으로 ‘성지사로써 자성을 분별하는 경[聖智事分別自性經]’이라는 경을 생각하는 줄을 알고, 모든 부처님의 위신력을 입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108구(句)가 의지하는 ‘성지사로써 자성을 분별하는 경’을 말씀해 주십시오.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이시여, 이것을 분별해 말씀해 주시면, 보살마하살이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의 망상자성(妄想自性)에 들어갔더라도, 망상자성을 분별하여 말씀해 주셨으므로 곧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人)과 법(法)이 무아(無我)인 줄 두루 관찰하고 망상을 깨끗이 없앨 것이며, 밝게 모든 지위를 비추어 모든 성문과 연각과 모든 외도와 모든 선정(禪定)을 초월할 것이며, 여래께서 행하시는 불가사의한 경계를 관찰하여 마침내 확실히 다섯 가지 법의 자성을 버리고 벗어나서 모든 부처님 여래의 법신(法身)의 지혜로 훌륭히 스스로 장엄할 것입니다. 그리고 환(幻) 같은 경계를 초월하여 모든 불국토와 도솔천궁(兜率天宮)과 색구경천궁(色究竟天宮)에 올라가 여래의 상주법신(常住法身)을 얻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일종의 외도는 무소유에 대해 망상으로 계착하여 ‘인(因)이 없는 것’이라고 알아차리고는 ‘토끼에게 뿔이 없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낸다. 토끼에게 뿔이 없는 것과 같은 의미로 불법(佛法)에서도 이렇게 말한 것이라고 한다. 대혜야, 또 어떤 다른 외도들은 종(種)ㆍ구나(求那)ㆍ극미(極微)ㆍ다라표(陀羅驃)ㆍ형처(形處)라는 구성법[橫法]들이 각각 차별이 있다고 본다. 이렇게 보고 나서는 ‘토끼 뿔이 없음’을 구성하는 법에 계착하여 ‘소에게는 뿔 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대혜야, 저들은 두 극단에 치우친 견해에 떨어진 것이니, 심량(心量)을 알지 못하고 자심(自心) 경계의 망상을 증장시켜 자신이 망상의 한정된 분량을 수용하여 건립한 것이다. 대혜야, 모든 법성(法性)도 역시 이와 같으니 있고 없음을 벗어난다는 생각도 하지 말라. 대혜야, 만약 다시 있고 없음을 벗어나 토끼에 뿔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 이를 삿된 생각[邪想]이라고 한다. 그는 관찰하고 나서 토끼가 뿔이 없다 한 것이니, 그러한 생각을 하지 말라. 티끌만큼이라도 사물의 성품을 분별하면 모두 옳지 않다. 대혜야, 성인의 경계는 소에게 뿔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지도 벗어나는 것이다.”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망상이 없어진 사람이 망상이 생기지 않은 사실을 확인한 뒤에 비사량(比思量:比量)을 따라 관찰해서 망상이 생기지 않는다면, 망상이 ‘없다’고 말합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관찰하고서 망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망상이란 상대에 의해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니, 마치 저 뿔에 의지해서 망상이 생긴 것과 같다. 뿔에 의지해서 망상이 생겼기 때문에‘인(因)에 의지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망상과 다르다거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벗어나며, 그러므로 관찰해서 망상이 생기지 않는 것을‘뿔이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대혜야, 만약 또 망상이 뿔과 다르다면 뿔로 인해서 생기는 것이 아닐 것이요, 만약 망상과 뿔이 다르지 않다면 그것을 인(因)한 까닭에 티끌까지 분석하고 추리해 구하여도 모두 얻을 수 없으니, 뿔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저 뿔도 역시 참 성품이 아니다. 둘 다 성품이 없다면, 어떠한 법이 어떤 이유로 ‘없다’고 말하느냐? 대혜야, 만약 없기 때문에 뿔이 없다고 하는 것은 있는 것을 관찰했기 때문에 ‘토끼가 뿔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러한 생각[想]을 가지지 말라. 대혜야, 바르지 않은 인(因)으로 인해 있다거나 없다고 말한다면, 이 두 가지는 모두 성립되지 않는다.
대혜야, 또 어떤 다른 외도는 삿된 견해로 물질[色]ㆍ공(空)ㆍ일[事]ㆍ형처(形處)라는 구성법에 계착해 허공의 범위를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는 ‘물질은 허공을 벗어나 있다’고 말하여 망상으로 나누는 견해를 일으킨다. 대혜야, 허공은 곧 물질이니, 물질의 무리에 따라 들어간다.
대혜야, 물질은 곧 허공이니, 지니고 갖춰진 처소(處所)에서 세운 품성이기 때문이다. 물질과 허공을 분별하여 알아야 한다. 대혜야, 4대(大)가 생길 때 자상(自相)이 각각 다르고 또한 허공에 머무르지 않으나, 그 속에 허공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아서 대혜야, 소에 뿔이 있는 것을 보았으므로 토끼에 뿔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대혜야, 쇠뿔이 있다고 한다면 쪼개면 티끌이 되고, 또 티끌을 분별하면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으니, 소의 어느 곳을 보겠느냐? 그러므로‘없다’고 한다. 만약 그 밖의 다른 물질을‘본다’고 말한다면, 그 법도 역시 그러하다.”
이때 세존께서 대혜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토끼의 뿔이나 쇠뿔이나 허공이나 물질이 다르다는 망상의 견해를 벗어나야 한다. 너희들 모든 보살마하살은 자기 마음으로 나타나는 망상을 잘 생각하고 모든 불국토의 보살들에게 따라 들어가 자기 마음으로 나타나는 방편을 가지고 그들을 가르쳐라.”
이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물질 등, 그리고 마음이란 없으나
물질 등은 마음을 기르고
몸이 받아들여 편안히 서며
식장(識藏)이 중생을 나타낸다.
심(心)과 의(意)와 식(識)
자성(自性)과 다섯 가지 법
두 가지 무아(無我)를 깨끗이 하라고
광설자(廣說者)가 말하노라.
길고 짧고 있고 없는 것 등
전전(展轉)하여 서로 생기니
없음으로 인하여 있음이 이루어지고
있음으로 인하여 없음이 성립된다.
티끌을 분별하여
물질의 망상을 일으키지 말라.
심량(心量)이 안립(安立)하는 곳
악견(惡見)이 좋아하지 않는 곳이다.
각상(覺想)은 경계가 아니니
성문 역시 그러하며
세상을 구제하는 이가 말하는 것은
자각(自覺)의 경계이다.
[출처] 능가아발다라보경-제1권-3|작성자 byunsd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