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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5. 心 계발 이후
心 계발 이후에 대해서는 방대한 경문이 있을 것이므로 이 글에서 더 이상 논의하기는 어렵고요. 다만 몇 가지 경문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Tisso bhāvanā. Kāya-bhāvanā, citta-bhāvanā, paññā-bhāvanā.. (DN iii.219; DN 33)
세 계발이 있다. 身 계발, 心 계발, 慧 계발
Ayaṃ vuccati bhikkhave bhikkhu aññāsi dukkhindriyassa nirodhaṃ tathattāya cittaṃ upasaṃhāsi. (SN v.213; SN 48.40)
이 비구를 두고, 비구들이여, ‘苦根의 滅을 알았다’라고 하며, ‘이와 같음’(=苦根의 滅)을 위해 心을 보살폈다’라고 한다.
“Katha pana bhante saññā-vedayita-nirodha-samāpatti hotī” ti?
“Na kho gahapati saññā-vedayita nirodha samāpajjantassa bhikkhuno eva hoti: ‘Aha saññā-vedayita-nirodha samāpajjassan’ ti vā ‘Aha saññā-vedayita-nirodha samāpajjāmī’ ti vā ‘Aha saññā-vedayita-nirodha samāpanto’ ti vā ti, atha khvassa pubb’eva tathā citta bhāvita hoti yaṃ taṃ tathattāya upanetī” ti. (SN iv.294; SN 41.6)
“그러면 어떻게, 대덕이시여, 상수멸에 들어섬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장자여, 상수멸에 들어선 비구에게는, ‘나는 상수멸에 들 것이다’라는 것이나, ‘나는 상수멸에 들었다’라는 것이나, ‘나는 상수멸에 든다’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먼저 그에게서 그와 같음(=상수멸)을 위해 心을 데려갈 정도로 그것(=心)이 계발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위자님께서 얼마 전에 언급하신 경문입니다. (아위자님 번역)
Yam pi māṇava bhikkhu evaṃ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u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ñāṇa-dassanāya cittaṃ abhinīharati abhininnāmeti, so evaṃ pajānāti: “ayaṃ kāyo rūpī cātummahābhūtiko mātā-pentika-sambhavo odanakummās-ūpacayo anicc-ucchādana-parimaddana-bhedana-viddhaṃsana-dhammo, idaṃ ca pana me viññāṇaṃ ettha sitaṃ ettha paṭibaddhan ti.” Idam pi ' ssa hoti paññāya.[DN. vol.1. pp.208~209]
그와 같이 비구의 心이 三昧에 들어 청정하고 · 깨끗하고 · 흠이 없고 · 오염이 사라지고 · 부드럽고 · 활기차고 · 안정되고 · 不動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 心을 앎과 봄(ñāṇadassana)으로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알아낸다. “이 身은 色을 지니고 四大로 되었으며, 부모에게서 생겨났으며, 밥과 죽으로 집적되어 무상하고 · 파괴되며 · 분쇄되고 · 해체되고 · 분해되기 마련인데, 그런데 나의 識은 여기에 의존하고 여기에 묶여있다.” 이것 역시 그의 般若에 속한다.
이와 같이 경문만 살펴보아도, 우리가 흔히 입에 올리고 있는 “마음”이라는 술어는, “citta” 차원은커녕 “ceto” 차원도 못된다고 봅니다. 오개 위에다 생각과 감정과 논리와 기억과 상처와 욕망과 분노가 시커멓게 켜켜이 덧칠된 내면이 어찌 “心”일 수 있겠습니까?
수행을 통해 “心”을 계발하신 분들, 즉 적어도 목우자(牧牛子)들만이 알고서 운위할 수 있는 게 바로 “心”이 아닐까요? 나머지에게는 그저 들은 풍월이거나 그림의 떡에 불과한 게 바로 “心”이 아니겠습니까? 心이 그러할진대, 慧, 知見, 五取蘊, 苦, 팔정도 등등은 먼 우주 아득한 어느 별나라 얘기가 아니겠는지요.
그런데도 “心 계발”은커녕 “身 계발”조차 안된 분들을 향해 대승의 가르침을 들이대는 것은 참으로 요령부득의 일입니다. 기실 대승의 정수는 앞서 말한 “인우구망 직전의 공부인”, 즉 心이 沒하기 직전의 공부인을 집중적으로 겨냥한 것 아니겠습니까? 아직 “身 계발”, “心 계발”이 되지 않은 분들을 향해 대승의 정수를 들이댄다면, 그게 견문발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솔직하게 토로하자면, 설마하니 견문발검하는 자가 대승의 정수를 체득한 자이기나 하겠습니까?
현시대 대부분의 공부인들이 교학에 대단히 무지한 차원을 넘어서 현재 유통되는 교학 자체가 순 엉터리 중의 엉터리인지라, 사실 자신이 수행중 체득한 바가 수습차제에서 어디에 위치하는가를 확인할 길이 전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래서 경론의 언어를 전부 자신의 현 공부수준에 부합하는 언어로 곡경아세(曲經阿世)하는 경향이 심하지요. 거기에서 빚어지는 참극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그러한 니까야 내지 대승경론 용어의 전유(專有)는 정법의 몰락을 촉진시키는 훼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교학을 바로 세우기 위해 외롭게 분투하시는 아위자님의 행보가 다소 거칠기는 하지만 참으로 귀하고 고맙기만 합니다.
요컨대, 각 수행단체는 그 이상은 불가능할 정도로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심하며, 니까야를 읽으시는 분들은 (이곳에 오시는 분들은 예외이겠습니다만) 그 이상 불가능할 정도로 경의 언어를 하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心”이라는 글자 하나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6. 광명상(光明想)과 전후상(前後想)
“相”과 “心”을 언급하면서 “광명상”을 언급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네요. 사실 이 글은 “요리사 경”에서 언급하는 “相”만 다루고 마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 경문을 교차적으로 확인하다보니 고구마줄기처럼 끝없이 끝없이 연결되었고, 니까야 교학의 전체구조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마침내 “광명상”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미답의 영역을 어설프게 밟아보며 살짝 확인해본 바를 무리하게 꺼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겠습니다. 동학들께서는 이점을 유의하셔서 중간중간 비거나 결함 있는 부분을 스스로의 안목으로 채우시면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Pabhassaramidaṃ, bhikkhave, cittaṃ. tañca kho āgantukehi upakkilesehi upakkiliṭṭhaṃ. (AN i.10; AN 1.49)
이 心은, 비구들이여, 환히 빛나는 것이다. 그런데 들어온 오염(=번뇌)들에 의하여 오염되어 있다.
Katamā ca bhikkhave samādhibhāvanā bhāvitā bahulīkatā ñāṇadassanapaṭilābhāya saṃvattati? Idha bhikkhave bhikkhu ālokasaññaṃ manasikaroti divāsaññaṃ adhiṭṭhāti yathā divā tathā rattiṃ yathā rattiṃ tathā divā. Iti vivaṭena cetasā apariyonaddhena sappabhāsaṃ cittaṃ bhāveti. (AN ii.45; AN 4.41)
그리고 어떻게, 비구들이여, 삼매계발이 계발되고 무르익으면 知見(ñāṇadassana)을 얻기에 이르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가 광명상(光明想)을 意에 짓고, 주상(晝想)을 확립한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듯이 밤이 있으면 낮이 있듯이. 이렇게 걷힌, 덮이지 않은 마음(ceto)으로써 환히 빛나는 心(citta)을 계발한다.
이 경문에 따르면, “삼매계발”은 “환히 빛나는 心을 계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광명想”이라 함은, 앞으로 좀더 많은 경증을 통해 검증해 보아야겠지만, 실제로 경험해보지 못한 바 “광명”을 “意에 짓고서”(흔히 소통되는 언어로 번역하자면, “염두에 두고서”) 실제의 “광명”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예컨대,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한 서울을 가려고 “서울을 염두에 두는 것”이 곧 “서울想”인 셈입니다.
그런데 “‘광명’을 염두에 두고”(=“광명상을 意에 짓고”, “광명상을 作意하고”) “광명”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상(晝想, divāsañña)”입니다. “주상(晝想)”을 확립하지 못하면 “광명”을 염두에 두어도 “광명”(=“환히 빛나는 心”)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 경의 취지이기 때문입니다. 각묵스님께서는 “divāsañña”를 “‘낮이다’라는 인식”으로, 전재성 박사님께서는 “대낮에 대한 지각”으로 번역하셨는데, 저는 이것을 “오개에 덮여 어두운 상태”를 대비적으로 인식시키기 위한 장치로 새기고 “주상(晝想)”으로 번역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 경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No ce te evaṃ viharato tam middhaṃ pahīyetha, tato tvaṃ Moggallāna ālokasaññaṃ manasikareyyāsi {divāsaññaṃ} adhiṭṭheyyāsi; yathā divā tathā rattiṃ, yathā rattiṃ tathā divā. Iti vivaṭena cetasā apariyonaddhena sappabhāsaṃ cittaṃ bhāveyyāsi: ṭhānaṃ kho pan’ etaṃ vijjati, yan te evaṃ viharato taṃ middhaṃ pahīyetha.
No ce te evaṃ viharato taṃ middhaṃ pahīyetha, tato tvaṃ Moggallāna pacchāpuresaññī caṅkamaṃ adhiṭṭheyyāsi antogatehi indriyehi abahigatena mānasena: ṭhānaṃ kho pan’ etaṃ vijjati, yan te evaṃ viharato taṃ middhaṃ pahīyetha. (AN iv.86-87; AN 7.58)
만약 이와 같이 머물러도 그 수면이 버려지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그대는, 목갈라나여, 광명상(光明想)을 작의하고 주상(晝想)을 확립하라, 낮이 있으면 밤이 있듯이 밤이 있으면 낮이 있듯이. 이렇게 걷힌, 덮이지 않은 마음(ceto)으로써 환히 빛나는 心을 계발하라. 그러면 그 자리(ṭhāna)가 발견된다. 이와 같이 머무름으로써 그 수면이 버려질 수 있다.
만약 이와 같이 머물러도 그 수면이 버려지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그대는, 목갈라나여, 전후상(前後想)이 있는 자로서 행보(caṅkama)를 확립하라, 안으로 돌이킨 根들로부터 떠나, 밖이 없는 意(mānasa)로부터 떠나. 그러면 그 자리가 발견된다. 이와 같이 머무름으로써 그 수면이 버려질 수 있다.
보시다시피, 오개 중 하나인 “수면”을 몰아내기 위한 처방으로 “주상(晝想)”이 언급됩니다. 그리고 “주상”으로도 수면이 버려지지 않는다면, “안으로 돌이킨 根들로부터 떠나, 밖이 없는 意로부터 떠나 전후상(前後想)을 확립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안”으로 치우쳐서 수면에 빠진 것(=이를테면 “前”)일 수 있으니, 이를 잘 살펴 늘 전후(前後)를 염두에 두고 섬세하게 행보를 조율하라는 가르침으로 읽힙니다. (“경행(經行)”이라 번역하지 않고 “행보”라 번역한 것은 이것이 심적 조율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수면”도 “잠”이라기보다는 “잠”으로 통칭될 수 있는 심적 상태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라는 표현이 너무나 절묘하지 않습니까? “걷힌, 덮이지 않은 마음으로써 心을 계발”하다보면 스스로에게 확인이 되는 “자리”라는 의미이니까요.)
사신족(사여의족)과 관련한 다음의 경문을 함께 살펴보시면 “전후상”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Idha bhikkhave chandasamādhipadhānasaṅkhārasamannāgatam iddhipadam bhāveti. Iti me chando na ca atilīno bhavissati na ca atipaggahīto bhavissati na ca ajjhattaṃ saṅkhitto bhavissati na ca bahiddhā vikkhitto bhavissati. paccāpuresaññi ca viharati, yathā pure tathā pacchā yathā pacchā tathā pūre, yathā adho tathā uddhaṃ yathā uddhaṃ tathā adho, yathā divā tathā rattiṃ yathā rattiṃ tathā divā. Iti vivaṭena cetasā apariyonaddhena cetasā sappabhāsaṃ cittam bhāveti. (SN v.263; SN 51.11)
여기, 비구들이여, 欲三昧ㆍ精勤行이 구족된 神足(=欲神足)을 계발한다. ‘나의 欲은 지나치게 이완되지도(atillīna) 지나치게 다잡히지도(atipaggahīta) 않을 것이며, 안으로 모이지도(ajjhattaṃ saṅkhitta) 밖으로 흩날리지도(bahiddhā vikkhitta) 않을 것이다’라고. 그는 전후상(前後想)이 있는 자로서 머무른다, 앞이 있으면 뒤가 있듯이 뒤가 있으면 앞이 있듯이, 아래가 있으면 위가 있듯이 위가 있으면 아래가 있듯이, 낮이 있으면 밤이 있듯이 밤이 있으면 낮이 있듯이. 이렇게 걷힌, 덮이지 않은 마음(ceto)으로써 환히 빛나는 心(citta)을 계발한다.
경을 잘 살펴보면, “이완되다/다잡히다”, “안으로 모이다/밖으로 흩날리다”의 대비를 쉽게 이해시켜 주기 위한 문맥에서 “전/후”가 언급됩니다. 그리고 그와 유사한 것으로, “아래/위”, “낮/밤”이 추가로 언급됩니다. 이것은 시공간적 어휘들로서 누구나 명백히 인식하고 있는 가장 쉬운 “대비”입니다. 그리고 비구는 이 대비의 想을 염두에 두고서 “환히 빛나는 心”을 계발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환히 빛나는 心”을 계발하는 것이 그만큼 미묘하다는 얘기입니다. “안”으로 쏠려도 어긋나고 “밖”으로 쏠려도 어긋나고, “앞”으로 쏠려도 어긋나고 “뒤”로 쏠려도 어긋나는 것이 “心 계발”이라는 얘기지요.
이는 대부분의 불자님들께서 잘 알고 계신 “소나 경”의 거문고줄 비유와 같은 내용입니다.
“yadā pana te, soṇa, vīṇāya tantiyo na accāyatā honti nātisithilā same guṇe patiṭṭhitā, api nu te vīṇā tasmiṃ samaye saravatī vā hoti kammaññā vā”ti? “evaṃ, bhante”.
“evamevaṃ kho, soṇa, accāraddhavīriyaṃ uddhaccāya saṃvattati, atisithilavīriyaṃ kosajjāya saṃvattati. tasmātiha tvaṃ, soṇa, vīriyasamathaṃ adhiṭṭhahaṃ, indriyānañca samataṃ paṭivijjha, tattha ca nimittaṃ gaṇhāhī”ti. (AN iii.375; AN 6.55)
“나아가, 소나여, 거문고줄의 조임이 지나치게 팽팽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느슨하지도 않고 고르게(sama) 맞춰졌을 때, 그때 참으로 그대의 거문고는 음률이 좋거나 탄현하기에 좋은가?” —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바로 이와 같이, 소나여, 지나치게 굳은 정진은 도거(掉擧)에 이르고, 지나치게 느슨한 정진은 해이(解弛)에 이른다. 그러므로 실로 그대는, 소나여, 정진의 고르기(samata)를 확립하고 根들의 고르기를 밝히 알고서 그곳의 相을 파악하여라.”
“소나 경”은 명백히 “心 계발”과 관련한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이 경을 다른 관련 경문과 교차적으로 연결하여 읽으면, 다음과 같은 대조가 가능합니다.
A (오개) 혼침ㆍ수면
B (오개) 도거ㆍ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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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거문고줄이) 지나치게 느슨하다
B (거문고줄이) 지나치게 팽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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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정진이) 지나치게 느슨하다 → “해이”
B (정진이) 지나치게 굳다 → “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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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사신족이) 지나치게 이완되다
B (사신족이) 지나치게 다잡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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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사신족이) 안으로 모이다
B (사신족이) 밖으로 흩날리다
위와 같은 도식이 맞다면, 오개 중에서 “도거ㆍ악작”은 “팽팽함, 굳음, 지나친 다잡힘, 밖으로 흩날림”이며, “혼침ㆍ수면”은 “느슨함, 지나친 이완, 안으로 모임”입니다. 저는 “전후상(前後想)”을 바로 이와 같은 양편을 경계하라는 의미로 읽고 싶습니다. 가령 “전후상”이 없으면 마음(ceto)이 “도거ㆍ악작, 혼침ㆍ수면, 팽팽함, 느슨함” 등등(즉 “오개”)에 덮이기 십상입니다. 반면에 “전후상”이 있으면 마음(ceto)이 오개가 걷히고 오개에 의해 덮여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리고 비구는 그 “걷힌, 덮이지 않은 마음(ceto)”으로써 “환히 빛나는 心(citta)”을 계발하게 됩니다.
그러면 오개 중 “의혹”은 무엇이일까요? “전후”ㆍ“상하”ㆍ“주야”를 염두에 두고 “걷힌, 덮이지 않은 마음으로써 환히 빛나는 心이 계발 중”인데도, 그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의혹”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실제로 한 경(MN 5)에서는 ‘어떤 자는 안으로 흠이 없는데도 흠이 없음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는 경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안으로 흠이 없는 자’는 相을 작의하지 않아도 되는데 ‘자신이 안으로 흠이 없음’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면, “밝은 相(subhanimitta)을 작의함으로 인하여, 貪이 心을 함몰시키게 될 것이며, 그는 貪이 있고 瞋이 있고 痴가 있고 흠이 있고 心이 오염되어 세월을 보내게 될 것”(MN i.26)이라고 언급됩니다. “안으로 흠이 없음”이나 “빛나는 心”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를 여실하게 알지 못하면, 드러나기 시작하던 “빛나는 心”이 다시 貪에 의하여 함몰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흠(angaṇa)”은 오개의 오염과 가장 가까운 의미로 보입니다. “心이 이미 삼매에 들고(=入定하고) 청정하고 흠이 없고 오염이 사라지고 유순하고 유연하고 安立되고 不動에 이르고 漏가 없게 되었을 때”라는 경의 정형구는 心의 “入定”, “청정”, “흠 없음”, “오염의 사라짐”을 순차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이는 心의 계발 여정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미리 언급해 두자면, 心이 不動에 이르기 위해서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유순함”, “유연함”, “안립”을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心이 “낮/밤”, “아래/위”, “앞/뒤”로 편향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후상”ㆍ“상하상”ㆍ“주야상”이 없으면 필연적으로 “도거ㆍ악작, 팽팽함, 밖으로 흩날림” 쪽으로 편향되거나 “혼침ㆍ수면, 느슨함, 안으로 모임” 쪽으로 편향될 수밖에 없습니다. 뭔가를 해도 그르치고 뭔가를 안해도 그르친다는 것이지요. 결국 “전후상”ㆍ“주야상”이라 함은, “앞”을 향해도 그르치고 “뒤”를 향해도 그르치고, “낮”을 향해도 그르치고 “밤”을 향해도 그르치고, “아래”를 향해도 그르치고 “위”를 향해도 그르치므로, 이와 같은 그르침(전후, 주야, 상하)을 염두에 두고(=“想”) 이를 경계하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전후상”이 37조도품의 칠각지에서는 더욱 섬세한 차원으로 진입하여 “이완/들려짐”으로 언급된다는 점도 유의하셔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