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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대구민중행동에서 발표할 내용입니다.
풍요로운 평등사회의 기초
−「고타강령초안 비판」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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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제1인터내셔널이 결성되고, 1867년 자본론 1권이 출간되던 시기를 전후해, 라살주의자들의 전독일 노동자동맹(ADAV)(1863)과 맑스의 동료 A. 베벨 및 W. 리프크네히트가 주도하는 사회민주주의 노동당(SDAP)(1869)이 결성되어 독일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도약을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했고, 1871년 프로이센 중심으로 오스트리아를 뺀 독일 통일이 이루어졌다. 독일 노동운동의 두 조직은 1875년 고타에 모여 사회주의 노동당(SAP)을 창설했다.
독일 통일을 주도한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성장을 저지하기 위해 1883년부터 의료보험 등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회유정책을 펴는 한편, 1878년에는 사회주의자 진압법을 제정했다. 사회주의자 진압법을 통해 사회민주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 단체⋅인쇄물⋅집회 등이 금지되었으며, “노동운동세력은 유일한 권한으로 제국의회, 지방 및 시 의회에 후보를 내놓을 권한만을 유지했다.” 하지만 회유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노동당은 급성장하여 1890년에는 제1당 자리를 차지했다. 이 해 사회주의자 진압법은 폐지되었고, 비스마르크도 실각했다. 1891년 사회주의 노동당은 사회민주당(SPD)으로 개명했다. 이 때 엥겔스는 그 동안 보수당 의원들이 사회주의자 동료들을 “다른 혹성에서 떨어진 이상한 존재로” 보았지만, 이제 “마음에 들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 동료들에게서 미래 권력의 대표자를 보아야 한다”고 장담한다.
그러나 맑스와 가까웠던 사회민주주의 노동당과 라살주의자들의 노동자동맹은 주요 문제들에서 근본적인 노선 차이를 안고 있었다. 라살은 프로이센에 보통선거권을 도입하겠다는 비스마르크와 타협하며, 부르주아지에 맞서 비스마르크 중심의 융커세력을 지지했다.(독일사210) 라살의 이러한 입장은 사회주의 노동당의 강령, 이른바 「고타강령 초안」에도 반영된다. 초안을 검토한 맑스는 여러 문제점을 확인하고 조목조목 가차 없이 비판한다. 사회주의 노동당 지도부는 노동운동의 통일이라는 실천적 관점에서 맑스의 「고타강령 초안 비판」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맑스 사후인 1891년 사회민주당 당대회에서 채택된 「에어푸르트강령」에서는 ‘라살주의와 속류 사회주의적 전통이 제거’되고 맑스의 입장이 대체로 관철된다.
이 「고타강령 초안 비판」에서 맑스는 라살주의의 흔적들을 예리하게 비판하는 가운데, 생산수단의 소유와 소비수단의 분배, 계급동맹, 실질적 평등, 프롤레타리아 독재,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국제주의, 국가와 자유 등등 사회주의 운동의 주요 쟁점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압축해서 정리하고 있다.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그 주요 쟁점들을 살펴봄으로써, 운동의 기본 논거를 다지는 데에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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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의 비판을 피상적으로 보면 사소한 말꼬리 잡기 같기도 하다. 까다로운 경제학 문제를 따지면서, 모처럼의 노선 차이를 접어둔 채 이룩한 대동단결 분위기를 깨는 것은 아닌지 우려할 수도 있다. 예컨대 초안의 첫째 테제는 다음과 같다. “노동은 모든 부와 모든 문화의 원천이다. 그런데 유익한 노동은 사회에서만 또 사회를 통해서만 가능하므로, 노동의 수익은 온전히, 평등한 권리에 따라 모든 사회 성원들에게 속한다.”
우선 테제의 첫 부분, “노동은 모든 부와 모든 문화의 원천이다”라는 구절을 별 생각 없이 읽으면,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구나 하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맑스는 “자연도 노동과 마찬가지 정도로 사용가치(그리고, 확실히 이것으로 물적 부는 이루어진다!)의 원천이며, 노동 자체는 하나의 자연력인 인간의 노동력의 발현일 뿐”(고타370)이라고 지적한다. 자본론 1권에서 이미 맑스는 이처럼 인간도 하나의 자연력으로 보는 관점에서 노동의 일반적 의미를 자연과 관련하여 설명한 바 있다. “노동과정은 사용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합목적적 활동이며,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에 있는 것을 사용하는 것이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의 일반적 조건이며, 인간생활의 영원한 자연적 조건이다.”(자본1,246)
뿐만 아니라 맑스는 자본론 3권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노동의 산물이 아닌 자연력, 예컨대 수력 혹은 증기력의 독점적 이용을 통한 잉여가치와 이윤의 증대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자본3,825-835) 특히 이 점을 감안할 때 맑스가 자연을 강조하는 것이 단순한 학술논쟁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즉 맑스는 노동력만 가진 사람들이 ‘대상적 노동 조건의 소유자가 된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앞의 사람은 뒤의 사람들의 허락이 있어야만 노동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런 사람들의 허락이 있어야만 생활할 수 있다.”(고타371) 노동의 절대화는 이러한 대립관계를 은폐하는 것이다.
테제 후반부, 즉 “유익한 노동은 사회에서만 또 사회를 통해서만 가능하므로, 노동의 수익은 온전히 평등한 권리에 따라 모든 사회 성원들에게 속한다”는 부분에 대한 맑스의 비판 역시 신랄하다. 우선 맑스는 “사회에서만, 무익하고 심지어 공공에 유해한 노동이 하나의 생업 부문이 될 수 있으며, 사람들은 사회에서만 무위 도식을 할 수 있다”고 꼬집는다. 또 ‘유익한’ 노동은 “목표로 했던 유익한 효과를 낳는 노동”일 뿐이며, 이는 야만인도 행한다고 지적한다. 뿐만 아니라 맑스는 유익한 노동이 사회에서만 또 사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면, 노동 수익은 사회에 속하며 개별 노동자에게는 그 가운데 노동의 조건인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하지 않는 만큼만 돌아간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주장하며, 이런 결론이 기득권 수호 논리임을 밝힌다. “우선, 정부와 그에 딸린 모든 것들의 요구가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정부가 사회 질서의 유지를 위한 사회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각종 사적 소유자들의 요구가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각종 사적 소유가 사회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등등. 보다시피, 이처럼 터무니없는 공문구는 마음대로 갖다 붙일 수 있는 것이다.”(고타372)
첫째 테제에 대한 비판을 통해 맑스는 결론적으로 부와 문화의 원천인 노동의 사회적 발전이 이루어짐에 따라, “노동자 측에서는 가난과 방임이, 노동자가 아닌 사람 측에서는 부와 문화가 발전한다”(고타372)는 ‘이제까지의 역사 전체의 법칙’을 명시할 것과 “노동자들에게 저 역사적 저주를 타파할 능력을 주고 또 타파하도록 그들을 강제하는 물질적 등등의 조건들이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마침내 창조되는지가 명백히 증명되어야 했다”(고타372)고 요구한다. 이러한 비판은 청년기의 경철초고 등에서 노년기의 자본론에 이르기까지 맑스가 이론투쟁을 벌여온 과정에서 일관되게 부각시켜온 문제들, 즉 인류의 오랜 역사적 지배관계, 자본주의에서 극단화되는 양극화 경향, 그 극복의 조건들, 인간과 자연의 관계 등등의 문제에 대한 그의 이론적 성과들을 집약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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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가 비판하는 둘째 테제, 즉 “오늘날의 사회에서 노동수단은 자본가계급의 독점이다. 이론 인해 제약되는 노동자계급의 종속이 모든 형태의 빈곤과 예속 상태의 원인”(고타373)이라는 테제 역시 무심코 읽으면 별 문제가 없다고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맑스는 이 테제에서 ‘토지 소유자의 독점’이 빠진 점을 지적하며, 이 테제의 배후에 라살이 있음을 밝힌다. 즉 라살이 “자본가계급만 공격하고 토지소유자는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고타373)이라는 것이다. 맑스는 자본론 3권에서 토지소유자, 즉 지주가 차지하는 지대가 잉여가치의 일부라는 점만 아니라 “특히 농업노동자의 임금이 정상적인 평균 이하로 인하되고 이리하여 노동자 임금의 일부가 노동자로부터 빠져나와, 차지료의 한 구성부분을 이루어 지대라는 가면을 쓰고 토지소유자에게 들어간다”(자본3,805)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지대는 토지소유가 경제적으로 실현되며 가치증식되는 형태다. 더욱이 여기에서는 근대사회의 구조를 이루는 세 계급−임금노동자⋅산업자본가⋅토지소유자−모두가 함께 그리고 서로 대립하면서 나타난다.(자본3,795) 실제로 독일에서 대토지소유자, 예컨대 비스마르크가 대표하는 프로이센의 융커들은 중요한 지배세력이었다. 강령 초안은 라살과 비스마르크의 타협을 그대로 반영해, 토지소유자를 노동수단의 독점에 대한 비판에서 면제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초안의 넷째 테제와 긴밀한 관계를 지닌다. 넷째 테제 역시 첫눈에는 자명해 보인다. “노동(Arbeit)의 해방은 노동자계급의 사업(Werk)이어야 하며, 이들에 대하여 다른 모든 계급들은 하나의 반동적 대중일 뿐이다.”(고타378) 그러나 맑스는 당장 첫 구절부터 인터내셔널 규약을 ‘개선해(verbessert)’ 놓은 것임을 명시한다. 인터내셔널 규약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노동자계급(Arbeiterklasse)의 해방은 노동자들(Arbeiter) 자신의 행위(Tat)이어야 한다.”(고타378) 노동해방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도 의미심장하게 쓰이고 있지만, 그것이 노동 일반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지, 소외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의미하는지 명확하지 않을 수 있다. 뒤의 두 의미는 유기적으로 결합될 수 있지만, 첫째 의미로 쓴다면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될 것이다. 맑스는 말 그대로 첫째 의미로 해석해 초안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해해 보라”(고타378)고 야유한다.
좀 더 심각한 문제는 테제의 후반부다. 맑스와 엥겔스가 중간층 내지 소시민계급이나 룸펜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트 이외의 모든 계급들을 반동적 대중으로 보아 배척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시민계급과 농민들이 혁명화될 수 있는 조건들을 주목했다. 뿐만 아니라 공산당선언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역할을 인정한다. 또 “공산주의자들은 어디서나, 현존의 사회 정치 상태를 반대하는 모든 혁명 운동을 지지한다”(선언433)고 명시한다. 맑스와 엥겔스는 1848년 혁명 이후 노동자들에게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과 맞서기 위해 독자적인 조직과 무장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전략 원칙을 제시한다. “혁명적 노동자 당은 자신이 전복하고자 하는 분파에 대항할 때에는 이들 민주주의 당파와 공동보조를 취한다; 이들 민주주의 당파가 자기 자신을 위하여 발걸음을 멈추고자 할 경우에는 언제나 이들 민주주의 당파에 반대한다.”(동맹118)
반면에 강령초안은 전략적 사유를 어렵게 만든다. “중간 신분들이 ‘부르주아지와 함께’, 더구나 봉건 영주들과 함께, 노동자계급에 대하여 ‘하나의 반동적 대중을 이룰 뿐’이라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다. 사람들이 최근의 선거에서 수공업자, 소기업가 등등과 농민들에게, 당신들은 부르주아와 봉건 영주들과 함께 우리에 대하여 하나의 반동적 대중을 이룰 뿐이라고 외쳤다는 것인가?”(고타379) 맑스는 강령초안의 노동자 중심주의는 라살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에 맞서 절대주의적이고 봉건적인 적들과 자신이 동맹을 맺고 있음을 얼버무리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고타379)고 비판한다.
타 계급과의 동맹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입장은 분명하다. 혁명적 노동자당은, 어느 계급이든 기존 지배관계에 맞서 혁명운동을 할 때에는 지지하되, 그러한 운동을 중단하고 혁명의 성과들을 독점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와 대립하기 시작할 때에는 이들에 반대한다. 또 이를 위해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의식⋅조직⋅투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계급동맹을 처음부터 배제해서도 안 되지만 동맹을 절대화해서 부르주아운동의 들러리가 되어서도 결코 안 된다는 이 전략원칙은 오늘의 변혁적 노동운동에서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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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테제, 즉 “노동의 해방은 노동수단의 사회 공동재산으로의 고양, 그리고 노동 수익의 공정한 분배를 수반한 총노동의 조합적 규제를 필요로 한다”(고타373)는 테제는 사회주의의 본질적 성격과 관련되지만, 역시 조목조목 비판거리가 된다. 우선 ‘공정한’ 분배라는 말을 맑스는 공허한 소리라고 본다. “부르주아들은 오늘날의 분배가 ‘공정하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그리고 사실상 그것이 오늘날의 생산 방식의 기초 위에서는 유일하게 ‘공정한’ 분배가 아닌가?”(고타374)
맑스는 ‘분배’에 강세를 두어 분배를 생산방식과 독립된 것으로 다루고, 사회주의는 주로 분배를 중심 문제로 하는 듯이 서술하는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비판한다. “소비수단의 그때그때의 분배는 생산조건 자체의 분배의 귀결일 뿐이다.”(고타378) 따라서 “물적 생산조건들이 노동자들 자신의 조합적 소유가 되면, 오늘날과는 다른 소비수단의 분배가 생겨난다.”(고타378) 이처럼 ‘오늘날과는 다른 소비수단의 분배’, 즉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소비수단 분배에 대해 맑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일 우리가 ‘노동 수익’이라는 말을 우선 노동의 생산물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조합적 노동 수익이란 사회적 총생산물이다. 거기서 이제 다음과 같은 것들이 공제되어야 한다. 첫째, 소모된 생산수단의 보충을 떠맡는 부분. 둘째, 생산의 확대를 위한 추가 부분. 셋째, 사고, 자연 재해로 인한 장애 등등에 대비한 예비 기금 혹은 보험 기금. ‘온전한 노동 수익’으로부터의 이러한 공제는 경제상의 필연이며, 그리고 그것의 크기는 수중에 있는 수단과 역량에 따라 결정되고 부분적으로는 확률 계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결코 공정성에서 나오는 방식으로 계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타374)
“총생산물의 다른 부분은 소비수단으로 사용되게 되어 있다. 그것이 개인에게 분할되기 이전에, 그것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 다시 떼 내어진다. 첫째, 생산에 직접 속하지 않는 일반 관리비용. 이 부분은 지금의 사회와 비교하면 애초부터 극히 현저하게 축소될 것이며, 새로운 사회가 발전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줄어들 것이다. 둘째, 학교나 위생설비 등등과 같은, 수요를 공동으로 만족시키게 되어 있는 것. 이 부분은 지금의 사회와 비교하면 애초부터 현저하게 증가할 것이며, 새로운 사회가 발전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늘어날 것이다. 셋째.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 등등을 위한 기금.”(고타374-375) 이렇게 공제되어야 하는 기금 가운데에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비용도 포함될 것이다. 전 세계가 동시에 공산주의로 전환되지 않고 자본권력의 필사적 반격을 예상할 수 있는 한에서 그렇다. 이 비용은 자본권력과의 관계, 국내상황만 아니라 특히 국제관계 속에서 증대할 수도 축소될 수도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불필요해질 수 있다. 이러한 공제부분을 감안하여 맑스는 ‘온전한 노동 수익’이 은연중에 ‘온전치 못한’ 것으로 전화하였다고 야유한다.(고타375)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이 상품교환이라는 우회로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총노동의 구성 부분’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노동 수익’이라는 라살의 관념도 의미 없게 된다고 본다.(고타375)
생산수단이 ‘노동자들 자신의 조합적 소유’로 된 공산주의 사회는 자본주의와 획기적으로 달라진 사회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낡은 모반(母斑)이 모든 면에서, 즉 경제적, 윤리적, 정신적으로 남아 아직도 들러붙어 있는 공산주의 사회이다”.(고타375) 이 단계에서 각 생산자는 자신이 사회에 제공하는 개인적 노동량 가운데 공제 분을 제하고 나머지를 돌려받는다. “그는 자신이(사회 기금을 위해 자신의 노동을 공제한 후에) 이러이러한 만큼의 노동을 제공하였다는 증서를 사회로부터 받고, 이 증서를 가지고 소비수단의 사회적 저장품에서 동일한 양의 노동이 비용을 들인 만큼을 빼내 간다. 그는 어떤 형태로 사회에 준 것과 동일한 양의 노동을 다른 형태로 되받는다.”(고타376)
이 경우 제공한 노동과 동일한 양의 노동을 다른 형태로 돌려받게 하고, 필요한 공제 업무를 떠맡을 사회 기구가 어떤 형태를 취할 것인지, 예컨대 국가, 당, 소비에트, 조합들의 연합 등 각 선택지들이 어떤 장점과 문제점을 가지고 있을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파리코뮌에 대한 맑스의 평가를 감안하면, 그 기구들이 어떤 방식으로 결합되어 작동하든, 그 기구들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사회의 주인으로 군림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의 종복이 사회의 주인으로 바뀌는 것을 막기 위한 모든 조치들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때 “개인적 소비수단 이외에는 어떤 것도 개별적인 소유로 넘어갈 수 없다”(고타376)는 점 역시 그러한 근본적 조치의 일환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현실사회주의체제가 얼마나 공산주의적이었고 얼마나 그렇지 못했는지를 판가름하는 척도가 될 수 있으며, 이에 비할 때 특히 오늘날 생산력의 크기 문제는 상대적으로 부차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생산력이 어떤 성격을 띠고 어느 방향으로 성장할 것인지가 좀 더 중요해지고, 이는 생산력의 내적 논리만 아니라 생산관계에 의해서도 본질적으로 규정될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력의 폭발적 증대에 수반되는 축적위기, 자본권력이 축적위기를 노동자들에게 전가할 필연성, 환경재앙 및 전쟁을 통한 범지구적 파국의 가능성 등등으로 인해, 자본권력의 독주를 사회적으로 제어하고 인류가 이미 이룩해낸 생산력과 문화유산으로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 필요성은 분명해지고 있지만, 이 필요성을 현실화하여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만드는 것은 인터내셔널 규약이 밝힌 바처럼, ‘노동자들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노동자들 자신의 행위’는 계급적 이익에 한정되는 조합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범사회적 동의를 얻어낼 수 있는 헤게모니적인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는 생산력 증대라는 척도에 비춰 자본주의와 경쟁하는 것과 다른 차원의 문제, 무엇보다 생산관계 내지 지배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문제다. 이때 공산주의 사회의 경제구조에 대한 맑스의 구상을 현대사회의 조건에 근거해 구체화하는 것도 노동자 헤게모니의 확장을 위해 불가피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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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는 자본주의의 모반이 아직 들러붙어 있는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평등의 문제는 아직 충분히 풀릴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소비수단의 분배는 여전히 상품 등가물 교환과 동일한 원리에 따라, “어떤 형태의 동일한 만큼의 노동은 다른 형태의 동일한 만큼의 노동과 교환된다.”(고타376) 따라서 여기서 “평등한 권리는 여전히−원리상−부르주아적 권리”(고타376)이다. 이 단계에는 어떤 계급 차이도 없지만, 이때의 평등에는 부르주아적 제한이 수반된다. ‘생산자의 권리는 그의 노동 제공에 비례’하는데, 이로써 사람마다 다른 소질이나 실행능력을 ‘자연적 특권으로 승인’하게 된다.(고타376-377) 또한 불평등한 개인들이 오로지 노동자로서만 간주되어 동일한 척도의 적용을 받으며, 다른 요인들은 도외시된다. “어떤 노동자는 결혼하였는데, 다른 노동자는 결혼하지 않았다, 어떤 노동자는 다른 노동자보다 자식이 많다, 등등. 그러므로 동일한 노동을 실행하고 따라서 사회적 소비 기금에 대해 동일한 몫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도 어떤 사람은 실제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받으며,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부유하게 된다, 등등. 이러한 모든 폐단을 피하기 위해서는, 권리는 평등하지 않고 오히려 불평등해야 한다.”(고타377)
‘불평등해야 한다’는 맑스의 말을 말 그대로 받아들여, 공산주의 사회에서 평등은 중요하지 않다거나 불평등이 좋은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여기서 맑스는 평등을 상품 등가물 교환의 원리에 따라 양적으로만 고려하는 부르주아적 한계를 비판하고, 실질적 평등을 위해서는 이런 원리를 넘어서야 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즉 동일한 노동을 하고도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부유하게’ 되는 것은 ‘폐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맑스는 이러한 폐단이 “오랜 산고 끝에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방금 생겨난 공산주의 사회의 첫 번째 단계에서는 불가피한 것”(고타377)이라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폐단을 극복하고 실질적 평등을 구현하려면 공산주의 사회는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맑스는 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의 본질적 특징을 원론적인 수준에서 제시한다. 그 단계는 “개인이 분업에 복종하는 예속적 상태가 사라지고 이와 함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대립도 사라진 후에, 노동이 생활을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일차적인 생활욕구로 된 후에, 개인들의 전면적 발전과 더불어 생산력도 성장하고, 조합적 부의 모든 분천이 흘러넘치고 난 후에 −그때 비로소 부르주아적 권리의 편협한 한계가 완전히 극복되고, 사회는 자신의 깃발에 다음과 같이 쓸 수 있게 된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고타377)
이러한 구상에 비춰볼 때,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분업,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 생활 수단으로서의 노동이 불가피하게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단계가 얼마나 단축될 수 있을 것인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오늘의 관점에서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의 모습에 대해 상상하기보다, 오히려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 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더 현실적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자본주의의 낡은 모반들 혹은 폐단들을 극복하고 노동이 ‘일차적인 생활욕구로’ 되기 위한 현실적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내지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고 발전시키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조건 가운데 빠져서는 안 될 것은, 생산력의 발전에 어울리는 노동일의 획기적 축소다(예컨대 4시간 노동제). 노동일의 획기적 축소는 고용불안에 대한 근본적 대응책이 될 것이며, 분업을 비롯한 비인간적 소외노동의 폐해를 최소화하고, 다양한 활동공간을 열어주는 기본조건이 될 것이다.
또 이에 어울리는 비서열적 교육체제 확립은 범사회적으로 무한경쟁과 축적과 독점과 패권주의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자본주의적 혹은 제국주의적 욕망구조를, 공존⋅공유⋅평등⋅정치참여⋅역사의식 등에 더 큰 의미를 두는 미래적 욕망구조로 재구성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강령초안은 ‘아동노동의 금지’를 명시하고 있는 반면에, 맑스는 ‘노동과 수업의 결합’이라는 대안을 제시한다. 이때 ‘연령의 한계 지정’, ‘다양한 연령층에 따른 노동 시간의 엄격한 규제’, ‘아동 보호를 위한 그 밖의 예방조처들’이 수반된다는 조건이 따른다.(고타389) 자본주의적 착취구조가 폐지된다는 전제하에서는 아동의 실업교육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업을 궁극적으로 소멸시키는 데에 적절한 방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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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력 발전에 따르는 노동시간 축소나 비서열적 교육체제의 확립을 통한 욕망구조 재구성은 자본주의체제가 불가피하게 야기하는 범지구적 재앙을 막고 풍요로운 평등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기본조건이지만, 자본권력이 이에 순순히 동의할 리는 없다. 그러한 조건을 구현하는 일은 자본권력과의 전쟁을 전제한다. 이 전쟁은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전장은 국가권력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권력과 관련해 고타강령초안은 다음 테제를 제시한다. “이러한 원칙으로부터 출발하여, 독일 노동자당은 모든 합법적 수단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자유로운 국가−및−사회주의 사회. 철의 임금법칙과 함께 임금제도− 및−모든 형태의 착취의 폐지. 모든 사회적 및 정치적 불평등의 제거.”(고타381)
우선 맑스는 ‘자유로운 국가’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는 주장을 논박한다. “국가를 ‘자유롭게’ 만드는 것은, 노복의 천박한 지혜에서 벗어난 노동자들의 목적이 결코 아니다. 독일 제국에서 ‘국가’는 러시아에서와 거의 마찬가지로 ‘자유롭다’. 자유의 요체는 국가를 사회보다 상위의 기관에서 사회보다 완전히 하위의 기관으로 전화시키는 데에 있으며, 오늘날에도 국가형태는 그것이 ‘국가의 자유’를 제한하는 정도에 따라 자유롭거나 자유롭지 못하거나 한다.”(고타384-385) 국가를 지배계급의 지배수단으로 보는 관점에서 자유로운 국가라는 목표는 ‘노복의 천박한 지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인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 맑스는 ‘국가에 의한 국민 교육’은 완전히 배척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타388) 물론 이것이 공교육을 폐지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일반 법률로 초등학교의 재원, 교원의 자격, 수업 과목 등등을 규정한다든가 또 합중국에서 하고 있듯이 국가의 감독관을 통하여 이 법률 규정의 이행을 감시하는 것은, 국가를 인민의 교육자로 임명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고타388) 즉 지배장치로서의 국가가 아니라 사회가 교육을 감당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맑스는 이때 국가기구도 “국민에 의한 아주 엄격한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타388)고 지적한다. 물론 국가가 부르주아지의 지배수단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쟁수단으로 전환된 후에는 교육에서 국가가 수행하는 역할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강령초안은 “총노동의 사회주의적 조직이 발생할 정도의 규모의” “국가 보조를 받는 생산협동조합의 설립”(고타383)을 요구하기도 한다. ‘국가 보조를 받는 생산협동조합’이 ‘총노동의 사회주의적 조직’으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어용노조를 통해 자본의 지배권을 폐지하겠다는 생각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맑스가 협동조합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지금의 생산조건의 변혁에 종사하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그렇다. 허나 그러한 조합은 “국가 보조를 받는 협동조합의 창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협동조합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정부로부터도 부르주아로부터도 비호를 받지 않는 독립적인 노동자들의 창조물인 한에서만 가치를 가진다.”(고타384)
강령초안의 ‘합법적 수단’이라는 제한 또한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정당이 표방할 만한 방법이 결코 될 수 없을 것이다. 맑스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의의를 강조함으로써, 그러한 제한을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 사이에는 전자에서 후자로의 혁명적 전환의 시기가 놓여 있다. 또한 이 시기에 상응하는 정치적 이행기가 있으니, 이때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 이외에 다른 것일 수가 없다. 그런데 이 강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와도, 공산주의 사회의 미래 국가 제도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타385-386)
이 자리에서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에 대해 상론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부르주아 국가의 관계에 대해서는 레닌의 설명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는 ‘특수한 억압권력’이다. 엥겔스는 여기에서 이 훌륭하고 지극히 심오한 정의를 아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특수한 억압권력’, 수백만 노동자에 대한 한줌밖에 안 되는 부유한 자들의 ‘특수한 억압권력’이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특수한 억압’(프롤레타리아독재)으로 교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로서의 국가의 지양’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사회의 이름으로 생산수단을 장악하는 ‘행위’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한 마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의 국가는 생산수단을 부르주아지의 사적 소유로부터 사회적 소유로 바꾸기 위한 권력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 건설은 자본권력과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필수 조건인 것이다.
그런데 맑스의 비판에 따르면 강령의 정치적 요구에는 ‘보통선거권, 직접적 입법, 민권, 인민무장’ 등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천년 왕국을 보며 또 바로 부르주아 사회의 이 마지막 국가 형태에서 계급투쟁이 결정적으로 끝장을 봐야 한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속류 민주주의조차도−이것조차도, 경찰에 의해서는 허락되고 논리적으로 허락되지 않는 한계 내부에 있는 그러한 종류의 민주주의에 비하면 산 하나보다도 더 높은 수준에 있다.”(고타386-387)
맬더스의 인구론에 근거를 두는 라살의 ‘철의 임금법칙’과 관련해서도 맑스는 “내가 임금노동을 폐지한다면, 나는 당연히 ‘철의’ 법칙이건 해면의 법칙이건 그 법칙도 폐지하게 된다”(고타381)고 비판한다. 맬더스의 인구론은 자연에 기초한 빈곤을 사회주의가 극복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 위한 근거로 쓰였는데, 라살의 ‘철의 임금법칙’은 이러한 이론에 근거를 두는 점에서 낡은 관념일 뿐이다. 맑스는 임금노동 제도가 노예제도이며, “사회적 노동 생산력이 발전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더욱더 가혹해지는 노예 제도”라는 인식이 충분히 자리 잡은 뒤에도 강령초안이 라살의 견해로 퇴보했다고 비판한다.(고타382) 또한 맑스는 마지막 문구 “모든 사회적 및 정치적 불평등의 제거” 대신 “계급 차이의 폐지와 더불어 그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사회적 및 정치적 불평등도 저절로 소멸한다는 점을 말해야 했다”(고타383)고 주장한다.
‘계급 차이의 폐지와 더불어 그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사회적 및 정치적 불평등도 저절로 소멸한다’는 맑스의 주장은 오늘날 여러 가지 논란을 초래할 수 있을 듯하다. 예컨대 페미니스트들 상당수는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긴밀한 관계를 부정할 수 없지만, 양자가 한 몸으로 묶여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계급 차이의 폐지와 함께 다른 형태의 사회적 정치적 불평등이 ‘저절로 소멸’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여타 불평등이 계급 차이와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 명확히 밝히고, 여타 불평등의 해소를 위해 계급 차이의 폐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함으로써, 다양한 분야의 해방운동을 체제변혁 운동과 유기적 관계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다양한 형태의 불평등은 자본주의 사회만 아니라, 계급 차이가 극복된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극복의 과제로 다가올 것이다. 아직 자본주의의 낡은 모반이 들러붙어 있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7
오늘날 독점자본들이 국제적으로 촘촘히 얽힐수록 그에 맞선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국제주의가 결정적으로 중요해진다. 국제주의 문제를 언급하는 강령초안의 테제는 다음과 같다.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해방을 위하여 우선 오늘날의 민족 국가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하며, 모든 문명국의 노동자들에게 공통적인 자신들의 노력의 필연적 결과가 국민들 사이의 국제적 친목이 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고타379-380) 테제와 관련해 맑스는 그 편협성과 안이성을 지적한다. 노동자 국제주의를 강조하는 맑스도 민족 국가의 의미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노동자계급이 도대체 투쟁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국에서 계급으로서 조직되어야 하며 국내가 그들의 투쟁의 직접적인 무대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그런 한에서, 그들의 계급투쟁은 내용상으로가 아니라, [공산당 선언]에 쓰여 있듯이 ‘형식상으로’ 일국적이다.”(고타380) 내용상으로는 물론 국제적이다.
그런데 맑스의 비판에 따르면, 예컨대 비스마르크가 국제정책을 통해 중요성을 띠게 된 데에 반해, 강령초안은 국제주의를 ‘국민들 사이의 국제적 친목’ 따위로 환원한다. “이는 부르주아의 평화-자유 동맹에서 빌려 쓴 문구이니, 그들은 이것이 지배계급과 그들의 정부에 맞선 공동 투쟁에서 노동자계급들의 국제적 친목에 대한 등가물로 통해야 한다고 한다. 따라서 독일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직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다!”(고타380) 맑스는 강령초안의 국제주의 수준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사실, 강령의 국제주의 신념의 표명은 자유 무역당의 그것보다 무한히 낮은 수준에 있다. 자유 무역당도, 자신들의 노력의 결과가 ‘국민들 사이의 국제적 친목’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또한 그들은 상업을 국제화하기 위하여 무언가를 행하고 있으며, 결코 다음과 같은 의식에 만족하지는 않는다−모든 국민들은 자국에서 상업에 종사한다.”(고타380)
우리가 구현하고 있는 국제주의 수준이 강령초안 수준을 얼마나 넘어섰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교통⋅통신 등 물적 조건이나 노동자들의 인적 교류는 국제주의 성장의 토양이 될 수 있을 터인데, 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오늘의 낮은 국제주의 수준은 자본권력과의 전쟁을 의식적⋅주체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고 자본 헤게모니에 동화되고 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강령초안에 대한 맑스의 비판이 15년씩이나 사회주의 노동당에서 진지하게 공론화되지 못한 채 파묻혀 있었다는 사실, 자본주의 국가의 보조를 받아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는 넌센스가 강령으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야말로 향후 사회민주당의 우경화, 사회배외주의의 승리,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의 살해 등으로 이어진 독일 사회민주당 역사의 어두운 전조인 듯하다. 이 근본경향은 당세의 확장이나 일시적 집권만으로 해소될 수 없으며, 치열한 사상투쟁⋅정치투쟁을 통해 극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의 사회주의 운동이 고타강령초안 수준에서 맴돌 이유는 없다. 풍요로운 평등사회의 기초는 강령초안의 반정립인 맑스의 비판을 발판 삼아 당면 현실문제들과 대결하는 가운데 우리 스스로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
2020. 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