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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389. [역경의 열매] 박조준 <1-19> “내 삶의 8할은 교회, 그리고 함께한 목회자들”
교회와 나라의 영적 위기 가슴 아파… 역경 닥쳐도 하나님 소망 잃어선 안돼
박조준 목사는 영적인 위기의 시대 속에서 소망을 잃지 말 것을 당부했다. 지난 5월 국민일보목회자포럼에서 발언하는 박 목사.국민일보DB교회와 사회 모두 심각한 영적 위기에 처했음을 무섭도록 느낀다.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한국 교회와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목회자들의 이런 저런 비위 소식도 모자라 한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최순실·최태민 사건 속에서도 ‘그가 목사가 맞다 아니다’하는 이야기가 오르내린다.
더구나 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대통령이 ‘주술적 예언가’에 빠져 있다는 의혹이 일고 있는 것만으로도 목사로서, 한 국민으로서 수치스럽기 그지없다.
‘교회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이 말을 나는 확신한다. 교회가 바로 서려면 목회자들이 바로 서야 함은 물론이다. 한평생 목회자로 살아온 나에게 ‘역경의 열매’ 집필 의뢰가 들어왔을 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하며 기도했다. 되돌아보니 내 삶의 8할은 그 터전이 교회였고, 함께 한 이들은 목회자들이었다. 그래서 그 이야기들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교회와 목회자를 많이 사랑한다. 앞으로도 그 사랑을 더 키워갈 것이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히 6:19)
누구나 역경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버려선 안 된다. 성경 말씀처럼 ‘소망은 영혼의 닻’임을 믿는 이들은 어려움을 넉넉히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도, 교회도, 이 나라도 마찬가지다.
나는 평안남도 강동군(현 평양시 강동구) 대동강변에서 태어난 촌놈이다. 1년에 한번 추석 때가 되면 평양에서 성묘하러 택시를 타고 귀성객들이 동네에 들어오는데, 그때가 자동차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집 주변으로 둘러싸인 과수원과 채소밭, 집 뒤로 흐르는 대동강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무엇보다 마을 한복판에 서 있는 교회당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건 복 중의 복이다. 들은 얘기로는 양조장을 하며 돈을 많이 벌었던 증조부가 기독교가 들어올 때 예수를 영접했다고 한다. 이후 한국교회의 전통대로 금주·금연을 실천하면서 양조장을 접고, 멀리서도 잘 보이는 곳에 교회를 세워 기증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이리라. 하나님께 헌신한 증조부가 여유롭게 사는 걸 본 동네사람들은 “저 집은 예수를 잘 믿어서 복을 받는다”고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아, 아버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나에겐 없다. 평양 숭인상고를 다니셨던 아버지는 열여덟 살에 결혼을 해서 스물한 살, 스물세 살에 각각 나와 여동생을 보셨다. 그런 아버지가 여동생이 태어난 해, 그 젊고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셨다. 당시 세살배기였던 내가 어떻게 아버지를 기억하겠는가. 한 장 남은 아버지의 사진을 본 것이 고작이다. 그것마저 6·25전쟁이 터지고 1·4후퇴 때 부랴부랴 피난 가느라 챙겨 나오지 못했다. 그 미련과 아쉬움 같은 게 여든이 넘은 지금까지도 가슴 한 편에 덩그러니 남아 있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 [역경의 열매] 박조준 <1> "내 삶의 8할은 교회, 그리고 함께한 목회자들"
* [역경의 열매] 박조준 <2> 삼촌 열병으로 세상 뜨자 "저 집은 예수 믿다가 망했다"
* [역경의 열매] 박조준 <3> 인민군과 전투 중 "살려주시면 하나님께 헌신"
* [역경의 열매] 박조준 <4> "대학시절 틈틈이 읽은 성경이 설교의 자양분"
* [역경의 열매] 박조준 <5> "영은교회서 첫 담임 목회 감격 지금도 선명"
* [역경의 열매] 박조준 <6> 목사-성도 마음이 맞으니 영은교회 날로 부흥
* [역경의 열매] 박조준 <7> '눈물바다' 영은교회 성도들 떠나 영락교회로
* [역경의 열매] 박조준 <8> 세속화된 청년모임 해산… 말씀 중심으로 재조직
* [역경의 열매] 박조준 <9> 한경직 목사 "영락교회 맡아달라" 뜻밖의 요청
* [역경의 열매] 박조준 <10> 전도요원 양성 매진… 새 신자 발길 넘쳐나
* [역경의 열매] 박조준 <11> 교회 옛모습 유지하면서 예배당 2배로 증개축
* [역경의 열매] 박조준 <12> "주한미군 철수 반대" 목사 1000여명과 시위
* [역경의 열매] 박조준 <13> '美장로교회 한국 보고서' 중립적으로 수정 요청
* [역경의 열매] 박조준 <14> '오갈 곳 없던 차지철' 영락교회 묘지에 안장
* [역경의 열매] 박조준 <15> '신군부'의 온갖 요청 거절하자 "두고 봅시다"
* [역경의 열매] 박조준 <16> 영락교회 끝내 사임… 독립교회로 새 출발
* [역경의 열매] 박조준 <17> 분당에 예배당 신축… 자원봉사자 운영 새 모델로
* [역경의 열매] 박조준 <18> 후임에 부담주지 않으려 이임식 이튿날 미국으로
* [역경의 열매] 박조준 <19·끝> "목사는 시대의 파수꾼… 현 시국에도 영적 책임"
◇약력=△1934년 평안남도 강동 출생 △서울대 문리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졸업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원 졸업 △아주사퍼시픽대학교 박사 △서울 영은교회(1960∼1966) 담임 △서울 영락교회(1972∼1985) 담임 △서울 갈보리교회(1985∼2003) 담임 △(현)세계지도력개발원 원장
***[역경의 열매] 박조준 <2> 삼촌 열병으로 세상 뜨자 “저 집은 예수 믿다가 망했다”
동네에 소문 돌자 할머니 교회 못나가… “남은 건 하나님 뿐 … 목사 되자” 다짐
지난 9월 경기도 분당에 있는 세계지도력개발원 강의실에서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는 박 목사. 목회에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회고했다.삼촌이 한명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평양 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함경남도 북청에서 교사로 일하셨다. 그런데 당시 만주 지역을 휩쓸던 열병에 걸려 2명의 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 삼촌의 나이 스물 여섯이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할머니가 뜰에서 일을 하고 계셨는데, 우체부가 전해 준 전보를 받아 보시더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시면서 아무 말씀도 못하신 채 땅에 뒹구시는 게 아닌가. 꽃다운 나이의 아들을 둘이나 잃으셨으니 비극 중의 비극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저 집은 예수 믿다가 망했다”고. 할머니는 사람들이 부끄러워 한 달 이상 교회를 나가시지 못했다. 거의 매일 목사님이 심방을 오셨는데 나중에 할머니 말씀이 “목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데 귀가 멍해서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고 토로하셨다. 얼마나 힘드셨으면 그랬을까.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아, 우리 집안은 이렇게 망하는구나. 그러면 나는 앞으로 뭘 하지? 내게 남은 건 하나님뿐이다. 목사가 되자.’ 어려서부터 목회자가 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래서 초등학생 시절부터 목사님 설교를 받아 적느라 애쓴 기억이 새롭다. 그런데 그 설교노트마저 1·4후퇴 피난 때 두고 나왔다.
독립운동에 참여하셨다가 여러 해 옥고를 치르신 할아버지는 병을 얻어 말년에 고생이 많으셨다. 할아버지는 한가한 시간이면 집 뒤 뜰 살구나무 밑 정자에서 퉁소를 부시곤 했다. 찬송가 ‘천부여 의지 없어서’와 같은 곡조였다. 나는 그 노래가 당시 일본식 졸업가인 줄 알고 따라 부르곤 했지만 할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런데 1945년 8월 15일 일제 압제에서 벗어난 날, 할아버지는 학교 운동장에 모인 동네 사람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셨다. 그런데 그 애국가 곡조가 바로 할아버지가 퉁소로 부시던 곡조와 같은 게 아닌가. 나는 깜짝 놀랐다. ‘그 노래가 우리나라 애국가였구나.’
일제 때 일본인들은 삭발을 강요했지만 할아버지는 따르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하면 일본 정부 시책에 대한 무언의 항거가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나는 할아버지의 항거가 존경스럽고 자랑스럽다. 그 항거의 정신을 닮고 싶었고 그렇게 살고 싶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2∼5)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향해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에 대해 말한 내용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나아가 목회자의 삶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그 길에서 돌아서고 악에 대해 항거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 삶 속에서도 할아버지가 지닌 항거의 정신, 그 피가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것 같다. 불의한 것을 보면 그대로 넘어가기 힘들다. 그래서 나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불의한 일을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잘못된 일임을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일처럼 지나치면 사사건건 부딪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게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미움도 받고 손해도 종종 본다. 그러나 내 마음은 편안하다. 담대하다. 부끄럽지 않다. 할 일을 마땅히 한 것 같아 후회하지 않는다.
***[역경의 열매] 박조준 <3> 인민군과 전투 중 “살려주시면 하나님께 헌신”
120명 중 100명이 죽은 전투서 생존… 인천-부산 등서 피난 생활 갖은 고생
6·25전쟁 당시 월남한 피난민들이 거주하던 부산 영도의 한 판자촌 풍경. 부산 용두산 자락 판자촌에서 살던 박 목사는 궁핍했던 당시 경험을 축복으로 여겼다. 사진은 작가 정인성의 ‘영도, 1952’.정 작가 가족 제공식구 아홉에 남자는 할아버지와 나 둘뿐이었다. 나머지는 증조모와 할머니, 어머니, 삼촌어머니(작은 어머니의 북한식 표현), 내 여동생, 사촌 누이 동생들이었다. 모두 여자였다.
할아버지가 와병 중이라 농사를 지으려면 일손을 빌려야 할 형편이었다. 간신히 식구들이 먹고 살 정도의 생활이었다. 이래저래 여유가 없었다. 집이 훼손되어도 수리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 부엌 지붕 한 모퉁이가 내려앉았는데 형편이 여의치 못해 고치지 못하고 비만 새지 않도록 짚으로 막아놓은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때쯤 어린 내 마음 속에서는 ‘우리 집안을 내가 세워야지’ 하는 생각이 다짐으로 바뀌었다. 집안을 일으키려면 우선 공부를 열심히 해서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 않아야겠다는 각오로 공부에 매진했다. 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머리가 특별히 좋은 것 같진 않다. 하지만 남보다 갑절로 노력하니까 뒤지지 않았다. 학창 시절, 밤새워 공부한 적은 없지만 자투리 시간을 버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왕복 2시간 걸리는 등·하교 길은 외국어 단어 외우는 시간으로 사용했고, 학교 쉬는 시간에도 책을 폈다. 그 무렵 한 가지 일에 집중하면 놀라운 결과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등학생 때 남한으로 피난을 오게 됐다. 피난 도중에는 먹을 것이 없어 당시 서해안에서 모집하는 을지병단에 입대했다. 서해안의 용매도 볼음도 백령도 연평도를 두루 지키는 것이 부대의 임무였다. 환경이 워낙 열악해 죽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내 평생 그때만큼 고생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을지병단이 유격대였는데 정식 보급이 없으니까 거의 자급자족을 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용매도에 있을 때는 쌀을 구하려고 황해도 연백 지역에 상륙했다가 인민군과 마주쳐 120명 중 100명이 전사했다. 생존자는 20명. 그 중에 내가 포함됐다. 그때 나는 하나님께 약속했다.
“하나님, 저를 살려 주시면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살려주셨고 나는 ‘목사’라는 외길 인생을 살고 있다. 인천과 부산을 거쳐 피난민 생활을 하면서 남들이 하는 고생은 다 해 봤다.
집을 마련할 돈이 없어 부산에서는 북한 피난민의 밀집지역인 용두산 자락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전기는커녕 수도도 없이 구공탄 불로 밥을 지어 먹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 할 수 없이 열악한 삶이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다 같은 처지였기에 ‘사는 게 이렇지’라고 생각하며 불평하거나 불행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고단한 피난민 생활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 하나하나의 경험이 나에게는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는 중에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시간을 빼고 국제시장에서 멸치 장사를 했다. 날이 어두워지면 광복동 거리에서 자판을 벌려 카바이트 등 밑에서 땅콩도 팔았다. 그렇게 공부해서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상경해서는 입주 가정교사를 하면서 대학에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대학시절 나는 공부 밖에 몰랐다. 극장 앞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 사람들은 할 일이 저렇게 없을까’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역경의 열매] 박조준 <4> “대학시절 틈틈이 읽은 성경이 설교의 자양분”
신학교 진학으로 목사의 꿈에 다가가… 삼일·충신교회 전도사 거치며 준비
1950년대 말 서울 동자동 비누공장 2층 공간에서 예배드리던 충신교회 초창기 시절, 박조준 전도사(맨 오른쪽)와 성도들. 충신교회 제공서울 수복 후 용산구 청파동 삼일교회 공터에 천막을 치고 지낸 적이 있다. 낮에는 학교를 가고, 저녁에는 그룹과외를 해서 생활비와 학비를 충당했다.
당시 잊을 수 없는 기억 하나는 방 두 칸짜리 연립주택으로 이사한 일이다. 부산 판자촌에서 지낼 때나 서울로 올라와 천막에서 생활할 때는 땅바닥에 두꺼운 걸 깔고 지냈다. 그 생활을 청산하고 온돌방에서 지내게 되니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청파동에서 서울대 문리대까지는 약 4㎞거리다. 당시 교통수단이라고는 전차(지금은 없어짐)와 버스뿐이었다. 하지만 콩나물시루처럼 복잡했고, 집에서 학교까지 꼬박 1시간이 걸렸다. 요즘처럼 거리가 복잡했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그때만 해도 비교적 사람끼리 부딪치지 않고 손바닥만한 성경을 읽을 수가 있었다. 대학 시절 틈틈이 읽은 성경은 목사가 되고, 설교를 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20대 초반 때 삼일교회의 총각집사로 임명됐다. 교회학교 부감과 어린이 찬양대 지휘를 맡으며 400명 넘는 유·초등부 학생들에게 설교한 경험은 훗날 목회 활동에 매우 유익한 거름이 됐다. 수십여 명의 교회학교 교사를 지휘했던 경험 역시 교회 제직회를 운영하는 데 유용했다.
목사가 되겠다는 어릴 적 꿈은 장로회신학대에 입학하면서 한걸음 더 가까워졌다. 입학하고 나니 이런 우스개 소리가 나돌았다. “신학교 1학년 때는 불이 붙는데, 2학년이 되면 연기만 나고, 3학년 졸업반이 되면 재만 남는다.” 좀 실망스러운 말로 들렸다.
‘내가 그래선 안 되지’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분명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 부르심에 응답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신학생이 되면서 교역자 신분으로 교회를 섬겨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삼일교회가 분열 위기에 놓인 것이 아닌가. 나는 어느 편에도 가담하기 싫어 다른 교회를 찾던 중 후암동에서 새 간판을 달고 시작하는 교회를 발견했다.
마침 20여명의 성도가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교회 관계자가 다가와 나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신학생이라고 소개하니 교회학교 학생부 설교를 부탁했다. 나중에는 수요기도회 설교까지 부탁받았다. 자연스럽게 그 교회에 출석하게 됐는데, 그 교회가 지금 한강변에 있는 충신교회다.
개척을 시작한 목사님은 대구에서 고아원을 운영하시던 분이었다. 토요일마다 상경하셔서 주일 예배를 인도하시고 이어 한주 동안 교우 심방을 하셨다. 그리고 다시 주일 예배를 인도하신 후 대구로 내려가셨다 상경하기를 반복하셨다. 그러다보니 목사님이 대구로 내려가 계신 한 주 동안에 새벽기도 인도자가 없었다. 마침 교회에 여전도회가 조직되면서 나를 전도사로 청빙했고 흔쾌히 응했다. 그때가 1957년 8월이었다.
당시 전도사인 나의 월 사례비는 500원. 턱없이 적은 액수였지만 사례비와 상관없이 교회를 섬겼다. 부족한 생활비는 매일 저녁 통신사 아르바이트로 보탰다. 그때 당시 나의 일정은 빈틈이 없었다. 매일 새벽 기도회를 인도하고, 신학교 수업을 마치는 대로 걸어서 교우 심방을 다녔다. 밤에는 또 아르바이트를 나갔다. 주일이면 교회학교 유·초·중·고등부를 책임졌고, 삼일기도회를 인도하고 가끔씩 주일 설교도 맡았다. 쉴 틈 없이 꽉 찬 전도사 생활이었다.
***[역경의 열매] 박조준 <5> “영은교회서 첫 담임 목회 감격 지금도 선명”
“어디로 부르시든지 순종” 기도… 5일 만에 이름도 없던 교회 청빙돼
쉴 틈 없이 빡빡한 일정 속에 사역을 감내했던 충신교회 전도사 시절의 필자(왼쪽 다섯 번째)와 교역자들. 충신교회 제공쉴 사이 없는 전도사 생활은 훌륭한 목회 트레이닝 기간이었다. 평생 목회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모른다. 큰 교회와 달리 작은 교회에서는 예배와 교육·지도, 교인 심방 등 교역자라면 알아야 할 모든 분야를 섭렵할 수 있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스물 일곱 살이었던 1960년 3월말, 가정을 이뤘다. 그리고 그 해 10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 안수를 받던 날,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어디로 부르시든지 저는 묻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인 줄 믿고 가겠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은 지 닷새 째 되는 날 오후였다. “여기가 박 목사님 댁입니까?” 한 중년 신사가 찾아왔다. “그렇습니다만” “제가 목사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깜짝 놀랐다. ‘기도한지 닷새 만에 응답이 왔구나.’ 아내와 나는 곧장 짐을 꾸렸다. 그리고 그날 저녁, 우리를 데리러 오신 분과 함께 택시를 탔다. 한강 다리를 건널 때쯤 넌지시 행선지를 물어봤다. “영등포로 간다”는 답이 돌아왔다.
택시에서 내린 곳은 영등포 어느 들판에 지어진 소위 ‘무허가 주택’이었다. 집은 집인데, 도무지 집 같지 않은 집이랄까. 전기가 없어 촛불을 켜니 바람이 불어 꺼졌다. 이튿날 연탄난로를 설치하자 방 공기가 따뜻해졌다. 추운 겨울, 얼음장 같은 물을 받아 밥을 짓던 아내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내는 스물 한 살 어린 나이에 대학 입학까지 포기한 채 전도사와 결혼해서 ‘사모’로 한 평생 함께 하고 있다.
주일이 되어 교회에 나가보니 예배당이 따로 없었다. 당시 서울 동신교회 이봉수 장로님이 운영하시던 동아염직 회사 식당에서 30여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예배 후 성도들에게 교회 이름을 물어봤다. 그랬더니 “목사님을 모신 후에 지으려고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기도 후에 영등포 지명과 영생의 의미를 함께 담은 ‘영(永)’과 은혜의 ‘은(恩)’을 넣어 영은교회라 이름 지었다.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60여년의 세월이 흘러 영등포에서 큰 교회로 성장했다.
영은교회에서 경험한 첫 담임 목회는 감격스러웠다. 지금은 지역이 많이 발전해서 도시가 되었지만 그때는 서울 변두리여서 포장도로가 거의 없었다. ‘아내 없이는 살 수 있어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고 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는 재미있었다. 헌신적인 성도들의 섬김과 사랑이 큰 힘이었다. 주일마다 새로 등록하는 성도들 가정을 심방했고, 새벽마다 교적부를 펴놓고 성도 가정 식구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기도했다. 눈만 감으면 그들의 이름과 얼굴이 떠올랐는데, 5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 분들의 이름이 선명하게 떠오르곤 한다.
잊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당시 20대 새파란 목사가 교회를 책임지다보니 장로님들의 기도 또한 특별했다. 기도하실 때마다 “젊은 종 박 목사님”이란 말이 꼭 들어가곤 했다.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젊은 종’이란 말이 왠지 모르게 지도력이 약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저런 궁리 끝에 나이가 좀 들어 보일까 해서 한복을 입은 때도 있었다. 영은 교회에서 시무한 기간은 6년. 하나님이 부어주신 축복 속에 당시 1500명의 성도들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박조준 <6> 목사-성도 마음이 맞으니 영은교회 날로 부흥
계속 성도 늘어나 새 성전도 비좁아… 영락교회 두 번째 청빙 요청에 고민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첫 담임 목회지로 부임한 영은교회에서 성전 봉헌식과 함께 목사 위임식을 가진 필자(가운데)와 당회원 및 교역자들.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곳이다.
영은교회는 소위 세상에서 유력한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는 아니었다. 성도들은 주중에 일터에서 성실하게 일하다가 기다리던 주일이 되면 정성껏 준비해 예배드리러 나왔다. 말씀을 그대로 받아드리며 “아멘”하고 화답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성도들 사이 뿐 아니라 담임 목사를 향한 교인들의 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지극 정성이었다.
교인들 중에 안양천 둑에 움막을 짓고 지내는 분들이 있었다. 심방을 가면 목사를 정성껏 대접한다고 밀가루 반죽을 해서 수제비를 만들어 주셨다. 맛있다고 하니 더 주셨다. 그 정성을 생각해서 먹기는 했지만 내 위의 소화 능력이 감당할 수 없어 화장실에서 모두 토해낸 적도 있었다.
나는 중학생 시절, 찬밥 먹은 것이 잘못되어 위궤양을 앓으면서 오랜 세월 고생을 했다. 175㎝ 키에 몸무게가 55㎏밖에 나가지 않았다. “바람에 날아갈 것 같다”는 말을 곧잘 들을 정도였다. 식사를 하고 나면 소화시키는 것이 크나 큰 부담이었다. 밥을 먹은 후 고통 없이 지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교인들 사이에 “우리 목사님은 수제비를 좋아하신대”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심방 갈 때마다 수제비를 대접받은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교회는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교회 부지를 구입하고 3년이 되던 해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 1층 공사가 끝나고 2층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어느 날, 영락교회에서 연락이 왔다. 부목사로 와 달라는 초빙 요청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당회와 제직, 성도들은 난리가 났다. “이렇게 은혜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왜 우리 목사를 데려 가려 하느냐” “영락 교회면 다냐”….
성도들의 반발이 너무 심했다. 나는 사실 그 때까지 한경직 목사님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었다. 그저 멀리서 존경하고 그 분의 방송설교를 통해 은혜 받으며, 참으로 훌륭한 설교자라고 생각하던 때였다. 그냥 잠자코 있자니 교회 입장이 어려울 것 같았다. 만일 내가 떠나면 교회에 큰 상처를 남길 것 같아서 한 목사님을 찾아갔다.
“부족한 저를 불러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목회자의 양심상 영은교회를 떠날 수 없습니다. 목사님 요청에 응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한 목사님께서는 퍽 아쉬워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이면 다음에 기회가 또 있겠지요.”
목사가 마음을 정하자 교회는 안정을 되찾았다. 교회는 계속 성장했다. 예배당 건축을 완공하고도 교회가 비좁아 영등포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2부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당회가 열리면 당회원들은 한결같이 목사의 계획에 찬성표를 던져주셨다. 그때마다 나는 막중한 책임감이 더해졌다. 그래서 무슨 사업을 시작할 때마다 더 많이 기도하고 연구하고 계획해서 당회에 올렸다. 모두가 목사인 내 책임이기 때문이다.
영은교회는 많은 교회와 교역자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동안 예배당을 신축해 완공하고 위임식까지 모두 마쳤는데, 영락교회에서 또 다시 청빙 요청이 왔다. ‘남아있을 것인가, 새로운 곳에서 좀 더 배울 것인가.’ 고민이 시작됐다.
***[역경의 열매] 박조준 <7> ‘눈물바다’ 영은교회 성도들 떠나 영락교회로
경기노회, 사표처리 문제로 투표까지… 청·장년부 지도 맡고나자 영적 위기
1967년 7월 영락교회 협동 선교사로 섬겼던 헤롤드 뵐켈(한국명 옥호열) 선교사(앞줄 오른쪽 다섯 번째) 부부 환송식에 참석한 한경직 담임 목사(앞줄 오른쪽 세 번째)와 필자(원안).영락교회가 또 다시 청빙을 요청할 당시 내 나이는 33세였다. 지난 6년간 영은교회를 섬길 수 있었던 것은 성도들이 부목사 경험도 없는 목회 초보생을 오로지 사랑으로 감싸준 덕분이다. 하지만 나 스스로 생각하면 너무나 많은 실수가 있었다.
영락교회 요청에 대해 고민하며 기도하던 중에 한경직 목사님이 꿈에 나타나셨다. 한 목사님이 강단에 서 있다가 쓰러지시는데 내가 옆에서 부축해드렸다. 나는 이 꿈이 한 목사님을 도와드리라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내가 소속된 경기노회에 사표를 제출했다.
임시노회에서 사표수리 문제를 논의하는데, 의견이 좀처럼 모이지 않았다. “젊은 목사에게 기회를 줘서 좀 더 배울 수 있도록 해주자” “교회가 그렇게 붙잡는데 목사가 뿌리치고 다른 교회로 옮겨야 하느냐” 찬반 의견이 오갔다. 노회가 열리는 장소로 달려온 영은교회 장로와 권사, 집사들은 “우리 목사님을 보내면 절대 안 됩니다”라고 외치며 시위를 했다.
노회장은 사표를 제출한 당사자의 말을 들어보자고 했다. “할 말이 없습니다.” 노회원들 앞에 나섰지만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참 울다가 자리에 앉았다.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결국 가부(可否)를 투표로 결정했는데, ‘보내도록 하자’는 표가 몇 표 더 많아 간신히 사표가 수리됐다.
교회를 떠나는 마지막 주일, 온 교회가 눈물바다가 됐다. 감사함과 미안함이 뒤범벅되는 당시의 광경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예배당 건물 벽돌 하나하나에, 교회 정원에 심은 나무와 꽃들까지도 나의 정성과 사랑이 배어 있었다.
나는 영은교회를 떠난 후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 떠난 목사가 예전 시무교회에 드나드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다. 몇 해 전 교회창립 50주년 기념 성회를 인도해달라는 부탁이 있어서 44년 만에 들러서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다.
영락교회 부목사로 부임한 뒤 평신도부에서 청·장년 교육부서 지도를 맡았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영적인 위기에 봉착했다. 나로서는 역경의 시기였다.
당시 한국교회는 많은 젊은이들이 자유주의 신학과 세속화 신학에 크게 영향을 받던 시기였다. 그 당시 장년부 성경공부는 대개 여러 신학교의 교수님들이 강사를 맡아서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강사들의 강의는 담임 목사님의 목회철학이나 노선과는 상관없는, 세속적으로 관심을 끄는 내용이 많았다. 이 때문에 교인들이 영적으로 혼선을 빚고 있는 현상을 발견했다.
설상가상으로 젊은 청년들은 그들 기호에 맞는 활동까지 하다보니 교회 활동인지 일반 사교 클럽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평신도 교육을 책임진 나로서는 상상 밖의 일이었다. 영락교회가 한국교회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은데 난감했다. 고민 끝에 담임인 한경직 목사님께 내가 본 교회의 평신도 교육에 대해 분석하고 진단한 것을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한 목사님의 한 마디에 나는 큰 힘을 얻었다. “나는 박 목사에게 맡겼으니까 소신껏 하세요.”
평신도 교육 구조를 바꾸기로 했다. 성경공부반 강사를 외부강사에서 교회 내 부교역자들로 교체했다. 곧바로 반발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담임 목사님의 목회 방향에 어긋나는 교육은 차라리 안하는 것보다 낫겠다는 판단에는 변함이 없었다.
***[역경의 열매] 박조준 <8> 세속화된 청년모임 해산… 말씀 중심으로 재조직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서 공부 기회… 유학 시절 배운 복음송 번역·출판
1967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로 유학을 떠날 당시 배웅을 나온 이들과 함께 한 필자. 오른쪽부터 아내 최영자 사모와 자녀들. 왼쪽은 한경직 목사 부인 김찬빈 사모.‘교회 청·장년 교육 구조를 반드시 바꿔야 한다.’ 나는 정면돌파를 하겠다는 각오가 단단히 서 있었다. 이는 담임 목사님의 전적인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당시 청년부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청년부 임원들 중에는 교회노선에 반대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주일에 그룹 모임으로 예배를 대신하기도 했다. 주말 활동 시간에는 찬송 대신에 ‘노란 셔츠의 사나이’ 같은 대중가요를 부르는가 하면 성경공부 대신 포크댄스를 추기도 했다.
나는 기도 끝에 과감하게 실행에 옮겼다. 기존 청년 모임을 해산했다. 이어 기도와 말씀, 봉사 중심의 교회 방침을 따르는 청년들이 주축이 된 모임을 새롭게 구성했다. 그리고 나서야 청년들의 신앙생활이 차츰 달라졌고, 제대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내가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유학할 때 대학생 모임에서 부르며 은혜를 받았던 복음송을 번역·출판해 청년 모임에서 함께 부르기 시작했다. ‘만남의 송가’란 복음송가집인데, 아마 한국교회에서 복음송을 처음 부르기 시작한 계기가 아니었나 싶다. 이 과정도 결코 쉽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다고 나는 믿는다.
목회자는 성도들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그들의 영혼이 잘되게 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야 마땅하다.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9∼10) 사도 바울의 말씀은 평생 목회하는 데 나침반이 되었다.
한경직 목사님의 추천으로 교회 후원을 받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된 것 역시 목회에 큰 자산이 되었다. 한 목사님과 영락교회에 진 사랑의 빚은 평생 갚아도 갚을 길이 없을 것이다. 바울의 말처럼 ‘전제와 같이 다 부어질 때까지’ 하나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성도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사명을 다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리라.
한 목사님의 은퇴 시기가 다가올수록 교계와 사회의 관심이 영락교회로 모아지고 있었다. 목회자들 가운데서도 그의 후임으로 오려는 이들이 정치적으로 활동하는 게 눈에 띄었다. 교회 안에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목사를 밀어주고자 하는 낌새도 엿보였다.
이상한 것은, 내 마음 속에서는 영락교회를 맡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 까닭은 나 스스로 생각할 때 훌륭하신 한경직 목사님의 대를 잇는다는 것이 자신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그분이 담임목사로 계실 때까지 성실히 도와드리는 것만이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몇 해 동안 영락교회에 몸담고 있어보니 ‘이 교회는 나와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곳이구나’하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마음속 한편에서는 ‘목사 안수를 받은 뒤에 나를 영등포로 인도해주신 하나님이 또 내게 적합한 교회로 인도해주실 것이다’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향해 “너는 내가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처럼 나를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덕분에 나는 앞으로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해 걱정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역경의 열매] 박조준 <9> 한경직 목사 “영락교회 맡아달라” 뜻밖의 요청
힘겨운 결정 심적 부담에 잠도 못자…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 말씀 순종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유학 시절, 외부 교회 지원 활동을 하면서 머물던 민박집 앞뜰에서 집주인 가족과 함께 한 필자(왼쪽).한경직 목사님이 나를 부르셨다.
“나는 얼마 후에 은퇴를 합니다. 영락교회를 박 목사께서 맡아주세요.” 청천벽력 같은 말씀에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나는 극구 사양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한 목사님께 말씀을 드렸다.
“저는 한 목사님의 사랑을 넘치게 받았고 목사님으로부터 너무나 많은 걸 배웠습니다. 저에게 그런 기대를 가져주시니 감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송구합니다. 이것만은 제가 받아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저를 오라고 하는 교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 앞길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인도해주실 겁니다. 저는 한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동안 온 힘을 다해 목사님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때 한 목사님이 건넨 한마디에 나는 와르르 무너졌다.
“그래요.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 교회를 맡아주세요.” 아, 어쩌란 말인가. 한 목사님의 그 부탁마저 거절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아버지 같은 어르신의 간절한 말씀을 거절할 용기가 솟아나지 않았다.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 뜻밖의 요청인데다 힘겨운 결정이라 심적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밥을 먹어도 밥맛이 없었고,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질 않았다.
바로 그때 즈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 1장의 말씀을 들려주셨다. 환상까지 보여주셨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영도자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에 대한 메시지였다. 모세가 세상을 떠난 뒤 젊은 종 여호수아에겐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가야 하는 절체절명의 사명이 맡겨졌다. 여호수아가 감당해야 했던 그 부담감이 고스란히 나에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여호수아 1장 중)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강하고 담대하라’. 나는 이 말씀에 대한 굳은 확신을 품고서 영락교회 담임 목회자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의 후계자는 누가 될 것인가.’ 한국 교계와 사회가 주목하던 때였다. 그런데 서른 일곱의 시골뜨기 젊은 목사가 한경직 목사님의 후계자가 되다보니 염려하는 여론이 만연했다. “영락교회 시대는 끝났다” “영락교회는 곧 갈라질 것이다”…. 이런 부정적인 여건 속에서 교회를 책임져야 했던 나로서는 크나큰 부담이었다.
어떤 선배목사가 해준 말이 문득 떠올랐다.
“목회를 잘하지 못한 선임 목사의 뒤를 이어서 목회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다. 그러나 목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선임자의 후임으로 일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왜냐하면 웬만큼 해서는 잘했다는 표시가 나지 않으니까.” 맞는 말 같았다.
내 경우는 후자였다. 만일 내가 교회를 책임지고 난 뒤에 정말 교회가 갈라지거나 하면 어떻게 되나. 나 자신의 명예보다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되겠는가를 생각하니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 그래선 안된다. 새 목회자가 부임하고 나서 교회가 더 새로워지고 더 성장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겠는가.
***[역경의 열매] 박조준 <10> 전도요원 양성 매진… 새 신자 발길 넘쳐나
시간 흐르면서 나만의 설교 스타일, 교회 부흥하자 이런저런 ‘잡음’ 싹
1980년 주일 예배를 마친 뒤 예배당 앞에서 한경직 원로목사(왼쪽) 등과 함께 포즈를 취한 필자(오른쪽).담임목사를 맡은 뒤 심혈을 기울인 것은 말씀 선포였다.
담임목사 신분으로 강단 설교를 시작했더니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다. 하나는 “박 목사 설교를 듣다보면 (한경직) 원로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것 같다. 분간하기 힘들 정도다”는 평이었다. 평소에 한경직 목사님의 방송 설교를 들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닮게 된 것을 인정한다. 또 다른 반응은 “새로운 목회자가 섰으면 원로목사님과는 다른 스타일의 설교를 해야 하는 게 맞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평가 사이에서 고민하며 기도했다.
30년 가까이 들어오던 원로목사님의 설교가 익숙한 성도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 갑자기 다른 스타일의 설교를 하면 이질감을 느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너무 똑같은 스타일의 설교를 계속하면 분명 식상해할 텐데….
나는 5년을 목표로 변화를 차근차근 시도했다. 교인들이 받아들이기에 변한 것 같기도 하고 그대로인 것 같기도 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만의 설교 스타일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원로목사님의 설교 스타일과 똑같다는 평이 사라졌다.
말씀 선포에 주력하는 다른 한편으로는 교인들을 전도요원으로 훈련시키는 일에 힘을 쏟았다. 전 교인을 전도요원으로 양성하는 일이었다. 교재를 준비해서 한번에 120명씩 교육시키며 구원의 확신을 강의했다. 확신이 있어야 전도의 열정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어 전도 방법과 요령을 가르쳤다.
교육을 거듭하는 동안 교인들의 참여 의식이 날로 높아져서 교인들 중에는 전도 훈련생 모집을 기다리는 이들이 나올 정도였다. 말하자면 교회에 전도의 붐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매 주일 새 식구가 늘어나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한 교인들은 전도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교회 리더가 바뀌면 이런저런 말이 나오기 마련이다.
교인들이 전임자와 후임자의 목회 방식을 비교하기 때문이다. 영락교회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전도요원 훈련에 매진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교회에 오면 매 주일 새신자로 등록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아지고, 예배에 늦지 않으려고 뛰어오는 이들도 인상적이었다. 예배당에 들어오면 앉을 자리가 없어서 부속 건물로 들어가 TV화면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환경이 되자 교회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교회가 부흥하면 잡음은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교회가 부흥하자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 매 주일 늘어나는 새 식구를 어떻게 수용할지가 문제였다. 세 차례 드리던 주일아침 예배를 4, 5회로 늘려도 자리가 부족했다. 당회는 예배당 규모를 2배로 늘려 개축키로 했다. 개축을 결정하기까지 교회는 또 다른 진통을 겪었다.
한쪽은 “북한에서 내려와 피와 눈물, 땀과 정성으로 지은 예배당에 어떻게 손을 대느냐”라며 반대했다. 더구나 이 예배당은 원로목사님이 심혈을 기울여 지으신 것인데 원로목사님이 계신 상황에서 손을 대면 목사님이 섭섭해 하시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있었다. 실제 피난민 출신의 성도들 중에는 영락교회 예배당 건물만 봐도 은혜가 되고 마음의 평화를 느끼며 사랑스러워하셨던 할머니들이 계셨다. 그런 정서를 잘 아는 나 역시 교회에 손대길 원치 않았다. 그래서 한경직 원로목사님을 찾아갔다.
***[역경의 열매] 박조준 <11> 교회 옛모습 유지하면서 예배당 2배로 증개축
공간 넓혔지만 신자들로 또 넘쳐… 수요 성경 강해엔 1만명 이상 몰려
1977년 6월 증개축된 영락교회 전경. 십자형으로 증축된 약 3200㎡(970평) 규모의 본당에는 예배실과 시무장로실, 기도실, 방송·녹음실 등이 들어섰다. 영락교회 제공“목사님, 지금 있는 교회시설로는 교인 전부를 수용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교회건물은 그 역사를 기려서 기념예배당으로 남겨두고 방배동에 땅을 사서 1만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을 새로 지으면 어떨지요.”
예배당 신축 문제로 한경직 원로목사님을 찾아가 이렇게 여쭸다. 원로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박 목사, 옛날에도 초가집 헐고 기와집 지을 때도 말이 많았어요. 증개축을 하지 않으면 다른 길이 없을 텐데, 이런 저런 말 들을 것 없이 교회가 정한 대로 시행하세요.” 이렇게 말씀해주신 원로목사님은 친히 제직회에 들르셔서 간곡한 어조로 제직회원들에게 설득까지 하셨다.
증개축하는 예배당은 앞부분과 종탑은 손대지 않아 옛날 예배당 모습을 그대로 살렸다. 외형도 기존 건물과 같은 석조로, 창문도 당시 형태 그대로 유지했다. 다만 아쉬운 부분 중 하나는 본당 내부 구조에 있어서 좌석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외형을 그대로 남겨둔 채 날개를 달아 좌석을 두 배로 늘리려 하다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교회가 전적으로 이해하고 협조해 준 덕분에 증개축 공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더 넓어진 예배당에서 주일 예배를 다섯 번 드렸는데도 신자들이 또 차고 넘쳤다. ‘아니, 이 많은 식구들이 예배당 공사 기간에는 어디서 예배를 드렸을까’ 갸우뚱할 정도로 놀랐다.
예배당을 증개축하는 과정에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분이 있다. 건축위원장을 맡으셨던 김치복 장로님이다. 김 장로님은 월남하실 때 한경직 목사님을 모시고 내려오셨다. 한 목사님을 아버지처럼 섬기는 분이셨다. 나이로 따지자면 나는 그 분의 아들 뻘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장로님은 원로목사님이 나를 세웠다고 하시면서 물심양면 도와주셨는데 송구할 정도였다.
교회 증개축 당시 큰 회사 대표인데다 직장암으로 투병하시던 김 장로님은 공사가 끝날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직접 감독하셨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수고하는 일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그저 묵묵히 봉사하신 그 분을 생각하면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교회 일을 하다보면 수고는 수고대로 하고 말은 말대로 듣게 되는 일이 많다. 일하는 사람은 말없이 일만 하고 말하는 사람은 일은 안하고 말만 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김 장로님은 진정한 섬김이 무엇인지 몸소 실천해주신 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요기도회 때 성경 강해를 했다. 매번 1만명 이상의 회중이 모여들었다. 참석자들의 열의는 대단했다. 기도회 시간에 맞춰 오려고 저녁을 건너뛴 채 발걸음을 재촉하는 젊은이들과 신학생들도 많았다. 심지어 명동성당에서 시무하는 수녀들도 10여 명씩 참석했다. 군사독재 정권으로 암울했던 1970년대 당시 답답하고 울분에 차 있던 많은 젊은이들이 성경말씀을 통해 위로를 얻고 해답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군사 정권에서 언론을 통제하니 바른 말 바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 교회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소위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간판을 내걸고 정권이 독재 정치를 합리화하면서 많은 이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 누구에게도 속 시원하게 속마음을 꺼내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그때 성직자 이전에 대한민국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좌시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역경의 열매] 박조준 <12> “주한미군 철수 반대” 목사 1000여명과 시위
카터 대통령 특사 한국에 와 면담 제의, 한국 정부도 “미국 가면 말 잘해달라”
1977년 초 서울 충무로교회 성도 등 기독교인들이 ‘주한미군 철수 반대’ 등이 쓰인 팻말을 들고 시가행진을 벌이고 있다. 경향신문·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1977년 초였다.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이 돌연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선언한 것 아닌가. 공산주의를 피해 목숨 걸고 월남한 우리 같은 이들에겐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었다. 교파를 초월해 서울에 있는 목사님들을 1000명 가까이 소집했다. 이어 ‘주한미군 철수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교인들을 모아 미국대사관저 앞에서 성명서를 낭독하고 시위에 나섰다. 국내에서 근무하는 외신기자단 앞에서도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나로서는 평생 ‘데모’라는 걸 그때 처음 경험했다.
당시 집회·시위는 일절 허락되지 않던 때였는데, 경찰은 시위대를 그저 저지하는 시늉만 했다. 이튿날 미국에서 카터 대통령 특사로 파견된 필립 하비브 미국 국무부 차관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미 대사관저에서 단독 면담을 갖게 됐다.
“박 목사는 조용히 목회만 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번에 맨 앞에 서서 국민들을 선동하십니까.” 그동안 나에 대한 조사를 다했던 모양이다. 내가 대답했다.
“저는 공산주의가 싫어서 월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미군이 철수하면 우리 남한의 안보는 당장 북한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카터 정부의 도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하비브 특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박 목사님, 지금 한국군의 군사력은 북한 인민군보다 월등하게 강합니다. 그리고 미군 철수는 점차적으로 진행될 계획입니다.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하비브씨, 나는 정치도 외교도 모르는 성직자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죠. 당신은 나보다 체구도 크고 힘도 세게 보입니다. 그런데 내가 당신을 이렇게 먼저 한대 치면 당신이 처음에는 맞겠지만 나중에는 당신이 이길 것 아닙니까. 우리가 북한보다 강하다고 하지만 지금은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니 선수를 치지 못할 뿐입니다. 만일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하고, 이어 북한이 기회가 왔다고 오판해 다시 남침을 감행하면 그 피해를 상상이나 해보셨습니까. 미안하지만 당신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 나는 카터 대통령을 만나서 얘기해야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을 정도로 대화 아닌 대화를 한 것 같고, 무식하고 경우에 없는 일을 했다. 그러나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이 ‘도덕 정치’ ‘피로 맺은 동맹국’이라고 외치면서 미군 철수를 반대하는 우리 국민의 절규를 외면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걸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물론 우리 정부에선 당시 미국 정부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힘없는 교회의 외침에 실낱같은 기대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에서는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선포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급기야 교단을 대표하는 방미단을 꾸렸다. 전 총회장님들과 신학대학장, 서울여대 학장, 그리고 나까지 포함해 미국연합장로교회(PCUSA) 총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미국 정부를 방문해 국무부 관계자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 정부에서도 다급한 형편이었는지 미국을 방문하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나를 찾아왔다. 정부 입장을 설명하면서 교회를 대표해 미국 정부에 말을 잘해달라는 부탁을 받을 정도였다. PCUSA 총회 본부를 방문했더니 현지 한국인 직원이 마침 교단의 입장문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내용인가.
***[역경의 열매] 박조준 <13> ‘美장로교회 한국 보고서’ 중립적으로 수정 요청
방미단, 밤 늦도록 한국 상황 설명 ‘주한미군 철수 재고해야’로 제출
영락교회 담임 시절, 서울 강북구 수유리 북한산 자락에 있는 영락기도원에서 청년회원들과 함께 묘목을 심고 있는 필자.미국연합장로교회(PCUSA)는 ‘주한미군의 철수는 타당하다’는 내용으로 입장을 정리하려던 참이었다. 예컨대 ‘민족적 민주주의는 독재정권의 슬로건’이라고 해석하면서 ‘한국에서 비민주주의적 행위가 자행되고 있기에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는 것은 옳은 결정’이라는 논리였다. 우리 방미 대표단 입장과 동떨어진 내용이었다.
상황이 긴박해진 우리는 PCUSA 총회 산하 ‘교회와 사회분과위원회’를 통해 한국과 한국교회의 입장을 밤늦게까지 설명했다. 그 당시 PCUSA 측은 ‘한국의 군사독재 정부가 교회를 핍박해 젊은이들이 교회에 모이지 못한다. 그래서 아무런 활동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알고 있었다.
나는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실정을 예를 들어 설명했다. “한국이 군사정권 하에서 여러 문제를 안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한국 속담에 ‘독안에 든 쥐 잡으려다 장독 깨뜨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군사정권을 정신 차리게 만든답시고 ‘주한미군 철수’로 북한이 오판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고 종교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 활동에 박해를 받고 있다는 정보는 사실과 다릅니다. 내가 그 증인입니다.”
이 같은 설명에 PCUSA 측은 수긍하고 입장문 문장을 바꿨다. 주한미군철수는 정당한 시책이라 옹호했던 문장에서 ‘주한 미군을 철수하겠다는 정부의 시책은 재고해야 한다’로 고쳐져 미국 행정부에 제출됐다.
꼭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미국 행정부는 국방이나 외교안보 등 중대한 정책 결정에서 PCUSA의 의견을 많이 참고하는 편이었다. 결국 카터 대통령은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생각을 바꾸게 됐다.
박정희 정권이 나라 기강을 세우고 경제 발전에 기여한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유신정권만 꿈꾸지 않았어도 비극은 없었을텐데, 두고두고 아쉬울 따름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욕심이 있다. 특히 권력욕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 수 있는 무서운 요소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누구나 범할 수 있는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의 정권들을 되돌아보면 제각각 모양은 다르지만 권력의 유혹이 강하게 역사한 것을 볼 수 있다. 교회가 직접 정치 활동을 해야 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선지자적 입장에서 국가의 지도자가 나아갈 방향을 주시하고 바른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교회가 정권에 아부하는 것은 사명을 망각하는 일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들 가운데 차지철 경호실장이 있었다. 그가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있으면서 “월요일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경호실 참모들에게 30분 정도 좋은 말씀을 전해 달라”는 부탁을 해서 설교한 적이 있다. 그런데 내가 보고 느낀 바로는 박정희 대통령이 차 실장을 너무 신임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경호 업무 영역을 넘어 청와대 안팎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대한 부작용이 컸던 것 같다. 당시 청와대에선 차 실장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얘기까지 흘러 나왔다.
대통령 직속인 중앙정보부장(현 국가정보원장)이라도 차 실장을 거쳐야 했다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시국 상황과 오버랩 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이런 저런 연유에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과 경호실장을 살해하는 일이 빚어진 게 아닌가 싶다.
***[역경의 열매] 박조준 <14> ‘오갈 곳 없던 차지철’ 영락교회 묘지에 안장
차 실장 적을 둔 교회서 장례식 거부, 내가 장례 집전… 권력 무상 깨달아
1979년 11월 3일 옛 광화문 터의 중앙청 광장에서 진행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결식 장면. 필자로서는 권력의 무상함을 깊이 되새기는 사건이었다.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쯤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도 저격당해 사망했다. 역사의 비극을 접하는 순간이었다.
한경직 원로목사님과 함께 청와대에 조문을 다녀왔더니 박 대통령 장례는 국장(國葬)으로 치를 것이란 소식이 들렸다. 차 실장은 기독교 예배 형식으로 치르려 하는데 교회 성가대 100명만 보내줄 수 있느냐는 요청이 청와대로부터 왔다. 그리고 나서 30분 후에 연락이 재차 오기를 당초 인원의 절반인 50명만 보내 달라고 해서 알겠다고 했다.
그런데 30분 후에 또 다시 연락이 와 20명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다. 한참 후에 다시 연락이 왔다. “차 실장의 장례는 청와대에서 관여하지 않게 됐으니 교회에서 알아서 하시오.”
사실 차 실장은 우리 교회와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적을 둔 교회에서는 장례식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 교회에서 긴급 당회를 소집했다. 논의 끝에 모실 곳이 없게 된 그분을 영락교회 묘지에 안장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그때 절실하게 느낀 바가 있다. 권력의 무상함을!
교회 허락 하에 우리 교회에서 차 실장의 장례 예배를 드렸다. 내가 집례를 맡았는데,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를 사기도 했다. 변명할 마음은 없지만 나는 오늘날까지 정부 편이 되어본 적이 없다. 그저 ‘하나님의 종’ 입장에 서서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한 것 뿐이다.
박정희 정권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을 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국가가 안정되고나서 군에 복귀하겠다던 분이 유신정권을 계획하고 추진한다는 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얼마 지나서였을까. 당시 공화당 사무총장이던 분이 어느 날 내게 귀띔을 해주셨다.
당 간부회의 때 어떤 인사가 “영락교회 젊은 목사가 반정부적인 발언을 아주 강하게 하는데 한번 손볼까요”라고 말했단다. 그때 그 얘기를 듣고 있던 박 대통령은 “그런 사람도 있어야 돼”라며 말렸다고 전해 들었다. 아마 나더러 조심하라는 경고였다고 생각한다.
목회자는 여당도 야당도 누구편이 돼선 안된다. 오직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백성을 깨우치는 시대의 파수꾼으로 외쳐야 한다. 외치지 않아 잘못되면 그 책임은 목회자에게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한 뒤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일선을 지키던 현직의 육군 소장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게 됐다. 나는 이 사실을 당시 합참의장으로 계시던 분의 초청으로 그의 공관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던 중 들었다. 합참의장이 우리 교회 집사님이셨는데 군부의 정권 장악을 이렇게 미화하는 게 아닌가.
“목사님, 우리나라는 기도하는 성도님들이 많아서 하나님이 지켜주셨습니다. 북한 김일성의 눈을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해주셨으니 망정이지, 만일 김일성이 이 사실을 알았으면 우리 서울은 두 시간 안에 완전히 점령당할 뻔 했습니다.”
내 마음이 좁아서 그런지 몰라도 그분 얘기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동의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착잡했다.
***[역경의 열매] 박조준 <15> ‘신군부’의 온갖 요청 거절하자 “두고 봅시다”
“설교 영감 안 떠오른다” 핑계 사양, 결국 거액 반출 시도 혐의로 ‘굴레’
1980년대 초, 예배를 준비하고 있는 필자(오른쪽). 왼쪽은 당시 같은 교단(예장통합) 소속 노량진교회 담임이었던 림인식 목사.신군부 시절은 목회자로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힘든 때였다. 아마 나도 부지불식중에 신군부가 하는 일들이 옳지 않다고 지적하는 일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교회에서 설교를 하면 설교·강해집을 출간하곤 했다. 그런데 발행을 맡은 출판사 사장이 “설교 내용 그대로는 도저히 출판허가를 받기 어렵다”면서 검열에 걸릴 만한 부분은 빼고 인쇄해야겠다고 요청하곤 했다. 그래서 알아서 하라고 전한 뒤 나중에 출판된 설교·강해집을 읽어보니 도무지 나 자신도 무슨 내용인지 모를 정도로 말이 통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불쾌하고 씁쓸했다.
신군부는 나에게 여러 요청을 해왔다. 그러나 나는 그때마다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어떤 분들은 위대한 지도자를 하나님이 보내주셔서 감사하다고 치켜세우기도 했지만, 내가 옹졸해서인지 그럴 수 없었다. 목회자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이었다.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전두환 대통령이 미국 순방을 한다며 “각하께서 목사님을 꼭 모시고 가셨으면 하는 부탁”이라며 동행을 요청해왔다. 정중히 사양하자 ‘어디 두고 봅시다’하는 반응이었다. 또 한 번은 대통령이 참석하는 국가조찬기도회 설교 청탁이 왔다. 그 요청 역시 사양하자 불쾌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대한민국 목사로 국가조찬기도회 설교를 맡게 되면 최고의 영광인데 왜 못 하겠다고 하시는 겁니까. 정 그러시면 조만간 신라호텔에서 기도회 관련 인사들이 모이니 거기 와서 말씀해 주십시오.”
모임 당일, 약속된 장소로 찾아갔다. 나는 앉지도 않고 일어선 채 여러 인사들 앞에서 양해의 말씀을 드렸다. “부족한 사람이 귀한 자리에서 말씀을 전할 특권을 주신 데 대해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랬더니 “도대체 못하시겠다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지는 것이었다.
나는 도저히 응할 수가 없었기에 이렇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설교는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영감이 떠올라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영감이 제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그때도 “어디 두고 봅시다”하는 반응이었다.
정권과 등을 지는 일 때문이었는지 예상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다.
1984년 6월 중순쯤이었다. 위 수술을 다시 받아야 할 상황이었다. 미국에서 수술을 받기로 해서 출국하는데 휠체어를 탈 만큼 몸이 좋지 않았다. 모든 수속을 마치고 기내에 앉아있는데 밖으로 불려 나왔다. 공항의 한 장소에 가니 수십 명의 기자들이 나와 있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내가 거액을 외국으로 빼돌리려 했다니. 나는 그만한 돈이 필요할 리 없었다. 만져볼 수도 없는 액수의 돈이다. 수술비는 교회에서 지급해줬기 때문에 결코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
훗날 여러 정황을 살펴봤을 때 사건 배후는 정보당국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신군부가 보기에는 대통령이 참석하는 해외순방과 국가조찬기도회까지 거부한 내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그로 인해 원치 않는 곳에서 ‘좋은’ 경험을 하고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나를 유익한 방향으로 인도해 주셨음을 깨달았다.
***[역경의 열매] 박조준 <16> 영락교회 끝내 사임… 독립교회로 새 출발
“하나님 마음에 드는 교회” 기도… 어렵게 대출받아 갈보리교회 열어
신군부 시절이었던 1980년대 초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진행된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설교 중인 필자.‘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창 50:20)
요셉이 자신을 해치려 하던 형들을 보복하지 않고 모든 것을 선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장면이다. 얼마나 멋이 있는 승자의 개가인가.
돌이켜보면 나는 목사로서 누구나 할 수 없는 경험을 했다.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 ‘인생 대학원’을 다녀왔다. 당시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억울한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모두가 감사한 것뿐이요 감격스러움 그 자체였다.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요 13:6) 예수님의 이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아멘, 아멘”을 되뇌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묘하며, 말씀대로 이뤄진다는 것을 시간이 흐를수록 또렷하게 경험하고 있다.
귀신의 힘으로 점을 쳐서 번 돈을 주인에게 상납하는 여자가 성경에 등장한다. 바울과 실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귀신을 내쫓았다. 그랬더니 그 주인은 수입이 끊어졌다고 고발해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고 수감됐다. 캄캄한 밤, 그들은 원망하고 불평하는 대신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나는 내 삶 속에서도 날마다 일마다 크고 작은 기적을 체험하고 있다. 신군부와 악연이 없었더라면 아마 내가 꼭 해보고 싶었던 목회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생각하지도 못한 시기에 새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나를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1984년 영락교회를 사임했다. 사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20년 전에 떠난 영은교회 장로님들이 찾아오셨다. “목사님, 전에는 젊으셨던 목사님이 목회를 더 배우고 싶다 하셔서 우리가 할 수 없이 보내드렸지만 이제는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로 다시 모시고자 이렇게 왔습니다.”
20년 전에 떠난 목사를 다시 부르겠다니….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감격스러워 눈물을 흘리곤 한다. 그러나 나는 뜻한 바가 있기에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정중히 사양했다. 그러면서 내가 계획 중인 바를 말씀드렸다. 섭섭한 마음으로 돌아가시던 장로님들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기로 했다. 하지만 어려움이 너무도 많았다. 교인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 강당을 빌리려 했는데 “박 목사님 때문에 어렵다”며 난색을 표했다. 앞이 캄캄했다. “박 목사에게 강당을 예배 처소로 빌려주면 학교운영에 어려움이 있다”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려 했더니 내게는 대출해 줄 수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제2금융에서 대출을 받아 서울 삼성동에 있는 빌딩 한 층 전체를 빌렸다.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예배당을 준비할 때 느낀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갈보리 교회의 시작이었다.
갈보리교회는 독립교회로 시작했다. 한국교회로서는 낯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앙노선은 장로교 노선을 택했고 조직은 회중교회 형식을 따랐다.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하는 교회로 출발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마음에 드는 교회를 만들 수 있을까.’ 이것이 오직 하나의 소원이었고 기도 제목이었다.
***[역경의 열매] 박조준 <17> 분당에 예배당 신축… 자원봉사자 운영 새 모델로
교회 착공 직전 IMF 외환위기 닥쳐… 규모 줄이고 성도 헌신으로 극복
경기도 성남 분당에 있는 갈보리교회 전경. 새 예배당을 유지·관리하는 데 성도들의 헌신적인 자원봉사가 큰 힘이 됐다.교회는 빠르게 성장했다. 삼성동 임대 빌딩은 2000명 정도밖에 수용할 수 없어서 30분 간격으로 주일 예배를 5차례 나눠 드렸다. 예배를 마칠 때마다 나가고 들어오는 성도들로 교회가 북새통을 이루니 혼잡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빌려 쓰던 빌딩을 3년 만에 구입한 데 이어 4층 건물을 예배실로 꾸미고 TV중계로 예배를 드렸다. 그런 가운데 교인들 사이에서 교회를 새로 지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 귀에까지 들어오게 됐다. 나는 예배당을 짓는 데 별로 관심이 없었다. 혼잡함은 견딜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한 교회의 담임 목사이기에 교인들에게 불편을 드려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심 끝에 교인들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교인 중에 재정적으로 형편이 넉넉한 분은 거의 없었다. 그 와중에 ‘갈보리교회에 나가면 세무사찰을 한다’는 소문에 사업하시는 성도 가정 일부는 교회를 옮기는 일도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예배당 건축헌금 문제로 교인들이 시험에 들어서는 절대 안 되겠기에 이렇게 광고했다. “여러분의 간절한 바람으로 예배당을 신축키로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배당 건축보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는 데 더 관심이 큽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조금도 부담스럽게 여기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저 성령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즐거운 마음으로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예배당은 건축되리라 믿습니다.”
‘성도들에게 부담 주는 일은 하지 말자.’ 나의 목회철학 중 하나였다. 예배당 잘 짓는 일이 목회의 성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배당은 성도들이 예배드리기 위해 모일 수 있는 장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즐겁게 자원하여 헌금했다. 감사하게도 건축을 진행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예배당 부지를 구입해야 하는데 여간 녹록지 않았다. 계약자와 “내일 계약하자”고 약속한 뒤에 이튿날 약속한 장소에 갔더니 땅주인이 나타나지 않아 계약이 불발된 일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만일 그때 일이 성사됐다면 더 큰 어려움이 닥쳤을지 모른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희가 지금은 모르나 나중에는 알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인다.
신축 교회는 교통이 편한 경기도 성남 분당에 들어서게 됐다. 설계를 끝내고 공사를 시작하려는데 IMF 금융위기가 닥쳤다. 경제 사정을 감안해 교회 규모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다시 설계해 예배당을 완공했다. 공사를 마치고 나니 10억원 가량 남았다.
새 예배당을 어떻게 유지·관리할까. 예배당을 짓는 내내 머리에 맴돌던 생각이었다. 예전에 미국 시카고 교외에서 크게 부흥하는 윌로우크릭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자원봉사자들이 그렇게 큰 예배당에 나와 봉사하면서 자비로 식사를 해결하는 게 퍽 인상적이었다. 봉사생활을 통해 그들의 신앙이 성장하고 있었다.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성도들에게 월로우크릭교회의 자원봉사 활동을 소개하면서 교회 봉사자를 모집했다. 500여명의 신청자들을 대상으로 자원봉사 교육을 실시한 뒤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5개 팀으로 나눠 활동하게 했다. 예배실부터 교육실 사무실 화장실 계단 정원 부속실 안내에 이르기까지 봉사자가 넘쳐났다.
***[역경의 열매] 박조준 <18> 후임에 부담주지 않으려 이임식 이튿날 미국으로
10년 동안 남미 등서 교역자 세미나… 3년전 귀국해 목회자 교육 이어가
2015년 10월 경기도 분당 꿈과사랑의교회에서 국제독립교회연합회(WAIC) 소속 목사 안수식에 참여하고 있는 필자(오른쪽). 왼쪽은 WAIC 사무총장 임우성 목사.‘갈보리교회’란 이름을 지을 때 여러 생각을 했다. 갈보리는 십자가를 의미한다. 희생과 사랑, 생명을 뜻하는 십자가는 기독교의 핵심이다. 이 정신으로 모인 갈보리교회 공동체는 나의 자랑이요 기쁨이다. 내 생명을 쏟아 목회한 이 교회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앞서 영락교회 목회 시절, 한경직 원로목사님과 나 사이는 부자지간 같았다. 하지만 교인들 중에는 자신의 생각이 원로목사님 말씀이라고 전하면서 후임 목회자를 힘들게 만드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은퇴 연령이 가까워오면서 나는 결심했다. ‘은퇴를 하면 아예 멀리 떠나자.’ 이런 생각을 굳힌 뒤 아내 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은퇴 준비를 했다.
은퇴 3개월 전, 후임 목회자를 정했다. 이·취임식을 마치자마자 이튿날 미국으로 떠났다. 일사천리로 진행됐기에 많은 성도들이 놀랐을 것이다. 자녀는 모두 한국에 있는데 노 목사 부부가 미국으로 거주하기 위해 떠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에 대해 교회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게 우선이었다. 2003년 은퇴한 뒤 10년 동안 미국 내 한인교회와 남미 현지인 교회를 두루 다니며 교역자 세미나를 인도했다. 일종의 목회자 재교육이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교포 목회자들 중에는 성공한 이들도 있지만 위축된 이들도 많다. 이들을 교회 지도자로 건강하게 설 수 있도록 돕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남미의 경우, 근래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런데 현지인 교역자가 너무 부족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교회에서 열심히 찬송하고 기도하는 사람을 불러 “당신이 우리교회 목사님이 되어주세요”라고 하면 목사로 임명되는 경우까지 있다고 한다. 신학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목회할 경우 곁길로 빠질 위험성이 크다. 남미 현지인교회의 현실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세계지도력개발원은 남미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200여 차례 ‘목회자의 자세와 신학’을 주제로 강의했다. 지금 생각하면 가장 보람된 일이다. 3년 전 귀국해서도 목회자 교육을 이어오고 있다. 경기도 성남 분당구 세계지도력개발원 세미나실에서는 ‘목회와 말씀선포’를 주제로 매월 둘째·넷째 목요일 오전마다 모여 목회 경험을 나누고 있다. 이런 석상에서 교계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부끄럽다. 한국교회가 심각한 영적 위기에 직면하면서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목사의 책임을 절감한다.
목사들이 교회를 기업체로 생각하는 건 아닌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기업의 오너 노릇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마음 아플 때가 많다. 교회마다 갈등과 분쟁이 넘쳐나고 사회법 소송으로까지 번지는 현실 또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매번 ‘목회 경험’ 모임에 참여하는 젊은 교역자들의 호응을 보면서 ‘한국교회는 희망이 있다’고 확신한다. 칼뱅의 어록 가운데 ‘교회는 목사 이상으로 성장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목사의 책임성과 더불어 목회자의 영적 성숙을 강조한 얘기다. 목회자가 영적으로 성숙하면 교회도 함께 성숙해진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목회의 길을 걷는 자는 날마다 성숙해져야 한다.
***[역경의 열매] 박조준 <19·끝> “목사는 시대의 파수꾼… 현 시국에도 영적 책임”
‘무속인 지배’ 난국서 역할 찾아야… ‘하나님 대사’로서의 사명 인식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스무 살에 필자(오른쪽)와 결혼한 최영자(76) 사모. 충신교회 전도사 시절 만난 아내는 56년째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 인생의 제1 동반자다.‘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대한민국이 크나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선 안 될 일이 벌어졌다. 국민들은 얼굴을 들고 다니기조차 부끄러워졌다. ‘무속인의 지배를 받는 대한민국’이란 낙인이 찍히게 됐으니 말이다.
나는 정치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 작금의 현실은 우리 목사들에게도 큰 책임이 있음을 통감한다.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이 권력과 손잡고 다닐 때, 그를 에워싸고 다니던 목사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권력 앞에서 아부하는 목사들은 또 얼마나 차고 넘쳤던가. “간신배의 말을 들은 왕은 망했다”는 말 그대로 목사가 간신배의 역할을 한 적은 없었던가.
하나님은 목사를 시대의 파수꾼으로 세우셨다. 그러므로 영혼의 파수꾼이 해야 할 역할은 ‘하나님 말씀을 분명히 듣고 하나님을 대신해 이 백성을 깨우는 것’이다. 그런데 목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권력자의 말을 듣고 따르다보니 하나님을 대신한 대사(Ambassador)로서의 사명을 망각하게 된 것이다.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소경이요 짖지 못하는 개’로 전락해 버린 꼴이다. 이단·사이비 집단이 판을 치고, 목회자의 각종 비리에 낯을 붉혀야 하는 작금의 현실이 그 결과일 것이다. 평화의 상징이 돼야 할 교회는 불화와 갈등, 분쟁의 단체로 전락했다. 사회가 오히려 교회를 걱정하는 처지에 이르렀고, 교회는 맛 잃은 소금이 돼 길가에 짓밟히는 존재처럼 취급받고 있는 것이다.
아합 왕과 왕후 이세벨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바알 신을 따를 때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희생을 당했나. 반면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숨어버렸는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은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베푸신 축복 속에서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깊이 되돌아봐야 한다.
교회가 커지고 재정이 넉넉해지고 자본주의의 물결이 거세게 몰아치면서 교회라는 방주에 세속화 물결이 넘쳐 들어오고 있다. 배 안에 들어오는 물을 계속 퍼내야 살 수 있건만 배가 가라앉는 걸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물을 퍼내야 하는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역할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알렉산드리아호 배를 타고 가다가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났다. 배를 탄 이들 모두 낙심했을 때 죄수 바울이 일어나 외쳤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라…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 22∼25) 죄수의 신분이면서도 하나님의 대사답게 외친 바울 같은 목회자가 그립다. 지금은 ‘하나님의 종’으로 ‘시대의 파수꾼’으로 부여받은 목회자의 정체성을 되찾을 기회다.
지난 목회 일생을 통해 한국교회와 성도님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사랑은 남은 일생 동안 다 갚는다 해도 갚을 길이 없다. 지난 4주 동안 지면을 통해 감사한 마음을 전했지만 부족할 뿐이다. 더불어 한평생 나의 동반자로 인생 여정을 동행하고 있는 아내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내 남은 생은 여전히 아내와 목회자들과 함께 할 것이다. 그동안 지면을 허락해준 국민일보에 깊은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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