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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무의 조선사 원문보기 글쓴이: 문 무
고려의 황도 개성과 고려의 인구
1. 오늘은 고려(高麗)의 황도(皇都)에 있었던 황성(皇城)에 대해 옛 기록을 참고로 하여 과연 고려(高麗)가 한반도 개성(開城 : 松嶽)에 도읍(都邑)한 왕조(王朝)였는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朝鮮王朝實錄 / 成宗 282卷, 24年(1493 癸丑 / 명 홍치(弘 治) 6年) 9月 30日(辛酉)
【是月改築開城府舊城,高二十四尺,周一萬五千八百二十七尺. : 이달에 개성부(開城府)의 옛 성을 개축(改築)하였다. 높이가 24척(尺), 둘레가 1만 5천 8백 27척이었다.】
척(尺)을 30.3 cm로 계산해보면
1) 높이(高)는 24척 * 0.303=7.27m.
2) 둘레(周) 15,827척 * 0.303=4,796 m
고려왕조(高麗王朝 : A. D 1392년 亡)가 망하고 난 뒤 꼭 『일백 년 만의 일이다.』개성(開城)에 있었던 전 왕조 고려(高麗)의 황성(皇城)을 대대적으로 보수했다는 설명이다. 성의 높이가 7m 가 넘고, 둘레가 5Km가량이나 되었으니 대단히 웅장한 모습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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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高麗史節要 / 현종, 기사 20년(1029), 송 천성 7년ㆍ거란 태평 9년
【命參知政事李可道,左僕射異膺甫,御史大夫皇甫兪義,尙書左丞黃周亮,徵丁夫二十三萬八千九百三十八人,工匠八千四百五十人,築開京羅城,先是,平章事姜邯贊,以京都無城郭,請築之,可道初定城基,令人持傘環立,登高而進退之,均其闊狹,周一萬六百六十步,高二十七尺,廊屋四千九百一十間. : 참지정사 이가도(李 可 道)ㆍ좌복야 이 응보(異 膺 甫)ㆍ어사대부 황보 유의(皇甫 兪 義)ㆍ상서좌승(尙書左丞) 황주량(黃 周 亮)에게 명하여 정부(丁夫) 23만 8천 9백 38명과 공장(工匠) 8천 4백 50명을 징발하여 개경(開 京)의 나성(羅城 성의 외곽 또는 외성(外 城))을 쌓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평장사 강감찬이, 서울에 성곽이 없기 때문에 성곽을 쌓도록 청하였다. 이가도가 처음에 성 터를 정해 놓고 사람을 시켜 일산을 들고 빙 둘러서게 하고는 자기가 높은 데 올라서, 둘러선 사람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기도 하고 뒤로 물러가게 하기도 하여 그 넓이를 고르게 하니 둘레가 1만 6백 60보이고 높이가 27척이며, 낭 옥(廊 屋)이 4천 9백 10칸이었다.】
1) 장정 23만 8천 9백 38명 + 기술자 8천 4백 50명 = 247,388 명이 동원되어 황도(皇都)의 나성(羅城 : 황성을 둘러싸고 있는 외성을 말함)을 축조했으며, 둘레가 10,660보(步)요, 높이가 27척이요, 낭 옥(廊 屋 : 넒은 복도 또는 행랑채)이 4,910 칸이었다.
2) 성(城)의 규모를 현대의 수치로 계산해보면 둘레가 10,660 보 * 1.0m = 10.660 Km요, 높이는 27 척 * 30.3 cm = 8.18 m 의 거대한 성(城)이었음을 알 수 있다. 둘레를 사각형으로 보면 한 변의 길이가 2.665km나 되는 엄청난 규모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높이가 8.18 m 정도면 3층 건물 높이에 해당되는 것으로 황성(皇城)과 외성(外 城)을 생각하면 웅장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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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사강목/기사년 현종 20년(송 인종 천성 7, 거란 성종 태평 9, 1029)
【경도(京都)의 나성(羅城 큰 성(城)의 외곽(外廓))이 이루어졌다. 나성의 역사는 왕의 즉위 초부터 시작하였다가 갑자기 파천(播遷)의 변이 있어서 완공하지 못하였었다. 뒤에 상서(尙書) 이가도(李 可 道)를 시켜 이를 감독하게 하여 흙을 쌓아 성을 만들었다. 가도는 사람을 시켜 우산을 들고 둘러서게 하고는 높은 데 올라가서 지휘하여 넓고 좁은 것을 균일하게 성의 기초를 정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성이 완성되니, 무릇 21년 만에 필역(畢役)한 것이다. 성의 주위가 2만 9천 7백 보, 높이가 27척, 두께가 12척, 낭 옥(廊 屋)이 4천 9백 10간 이었다.】
나성(羅城)은 황성(皇城)의 외곽성이다. 21년 만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둘레(周)가 29,700 보 * 1.0 m = 29.70km이며, (한 변의 길이 : 7.425km)
높이(高)는 27척 * 0.303m = 8.10m,
두께(厚)는 12척 * 0.303m = 3.636m이며,
낭 옥(행랑채 또는 복도)이 4,910 칸이나 되었다.
이러한 엄청난 외곽성이 있어야 한다. (척수는 시대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무시해도 괜찮을 정도의 규모이기 때문이다.)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규모를 능가하는 엄청난 규모이다. 특히 두께 3. 636m 는 성곽위에서 병사들이 말을 탄 채 순찰을 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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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엄청난 성곽(城郭)이 한반도 개경(開 京)에 있었다고 했을 때, 그 개경(開 京) 즉 고려(高麗)의 황도(皇都)는 근대조선이 개국하고 나서야 황도(皇都)로써의 기능이 폐지되었다. 결국 600년 전만 하더라도 한반도 개성(開城)에는 황성이 있었으며, 내성(內城) 및 외성(外 城)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후 병란(兵亂) 또는 내란(內亂), 망국적인 사건(왕조의 멸망)등의 있었을지라도 그 성곽(城郭)을 모조리 파해 쳐 버렸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당초의 것 보다 축소(縮小)되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으나 그 엄청난 규모(規模)의 유적(遺跡)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고려(高麗)가 망하고 난 뒤 100 년 후에도 그 내성(內城)과 황성(皇城)을 대대적으로 개축했다고 했으니 말이다.
근대조선(近代朝鮮)시대의 대규모(大規模) 전쟁(戰爭)은 호란(胡亂)과 임란(壬亂)이 있었을 뿐이다. 후금(後金)의 목적이, 왜(倭)의 목적이 朝鮮(조선)을 침략하여 옛 고려(高麗)의 내성(內城)과 황성(皇城)과 궁전(宮殿)을 파괴(破壞)하려는 것이었다면 모르겠으나 침략(侵略)한 그들의 목적(目的)이 조선(朝鮮)의 항복(降伏)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면 성곽(城郭)을 파괴하는 것은 전투(戰鬪) 와중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 또는 만들기 위한 것일 뿐이다.
전쟁(戰爭) 와중에 방화(放火), 약탈(掠奪), 살인(殺人)등은 침략행위(侵略行爲)속에 수반되는 피해(被害)이지만 성곽(城郭)을 파괴하고 그 주춧돌을 본국으로 가져갔을 리는 만무한 것이다. 설사 황궁(皇宮)은 화재(放火)로 소실(燒失)되었다고 치자. 그러나 그 엄청난 규모의 성곽(城郭) 및 유적(遺跡)은 지금 어디에서 낮잠을 자고 있어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기록에만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대륙(大陸)의 옛 왕조(王朝)의 건축물 등은 지금도 시대에 따른 그 위용을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데 반도(半島)내 왕조(王朝)들의 건축물(建築物)만이 병란(兵亂)으로, 화재(火災)로 소실되었다고 하면서 기록(記錄)만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언가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다. 병란(兵亂)으로 치면 대륙(大陸)엔 단 며칠도 조용한 날이 없을 정도로 외적(外賊)과 내부(內部)의 내란(內亂), 반란(叛亂)등이 있었다. 『자고나면 새로운 왕조가 생겨났다고 했을까. 오죽하면.........!』이런 형편임에도 대륙의 그 넓은 땅에는 옛 유적 때문에 몸서리를 치고 있다고 한다. 반도내의 유물, 유적은 어떤 이유와 명분을 내세운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이 한 것 들 뿐이다. 이러함에도 반도 내에서 수천 년 찬란한 조선의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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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高麗)왕조는 나라 안에 황도(皇都)와 3경(京 )을 두었다고 하는데,
(1) 高麗 史 2卷-世家2-定宗-947 : 【二 年 春 築 西 京 王 城 : 2 년 봄에 서경에 왕성을 쌓았다. 】
(2) 高麗 史 2卷-世家2-光宗-960 : 【改 開 京 爲 皇 都 ; 西 京 爲 西 都 : 개경(開京)을 고쳐 “황도(皇都)”라 하고, 서경(西京)을 서도(西都 : 서쪽 도읍지)라 했다.】
(3) 高麗 史 4卷-世家4-顯宗1-1011 :【築 西 京 皇 城 : 서경에 황성을 쌓았다.】
(4) 동사강목 / 정미 년 목종 10년(송 진종 경 덕 4, 거란 성종 통화 25, 1007) : 【동10월 왕이 호경(鎬京)에 행행하였다. ○ 鎬 京(호경)에 지진이 일어났다.】
(5) 高麗 史3卷-世家-穆宗 : 【癸 未 改 西 京 爲 鎬 京. 冬 十 月 幸 鎬 京 齋 祭.】
(6) 高麗 史6卷-世家-靖宗 : 【十 一 月 丙 午 朔 至 自 鎬 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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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西京)과 서도(西都) 및 호경(鎬京)
서경(西京)과 서도(西都)는 같은 뜻을 가졌다. 문제는 황도(皇都)였던 개성(開城)에서 평양(平壤)은 결코 서쪽일 수 없는 지리적 방향이다. 아무리 배운 것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해 뜨는 곳이 동쪽이요, 해가 지는 곳이 서쪽이란 것쯤은 상식으로 알고 있다. 집을 지을 때도 남향(南向)이 좋다는 것은 경험적, 상식적,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북쪽지방을 서쪽지방이라 한다.”면 이는 분명 곡절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도(半島)사학에서는 이러한 곡절을 알려 하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사회다.
호경(鎬京) : 이 호경(鎬京)에 대해서는 근대조선의 지리지인 “新增東國輿地勝覽” 에도 기록되어 있는 『平壤은 長安이며, 鎬 京이며, 柳 京이며, 樂浪이다.』의 호경(鎬京)과 같은 것이다. 수십 번도 더 설명하여 소개한 것이나 조선 역사의 설명엔 중복설명 될 수밖에 없다.
長 安(장안) : 陝 西 省 西 安이다. <漢 都 長 安>이라 했다.
鎬 京(호경) : 陝 西 省 長 安 縣 西南쪽이다. 周 武 王 (太 子 發) 所 都라 했으며,
柳 京(유경) : 陝 西 省 長 安(西 安)지역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渭 水 邊에 버드나무(柳)가 많아 붙여진 이곳의 別稱이라 했다.
※ 주(周) 호경(鎬京)의 바로 북쪽에 한(漢)의 장안(長安)이 있고, 또 바로 북쪽에 진(秦)의 함양(咸陽)이 자리 잡고 있다. 당(唐)의 장안(長安)은 한(漢) 장안의 바로 동남방향에 있다. 당(唐)대의 장안성 안에는 불교사원과 도교사원 및 조로아스터교 사원 및 경교사원 등이 있었다.
1) 한반도(韓半島) 북방의 平壤(평양)이『秦 始 皇 帝(진시황제)의 秦(진)나라를 所 滅(소멸)시키고, 漢(한)나라를 건국(建國)시킨 한고조 유방(漢 高 祖 劉 邦)이 建設(건설)한 長安(장안)이었으며,
2) 태자 발(太子 發)이란 호칭(呼稱)으로 불렀던, 周(주)를 건국(建國)시킨 周(주) 武王(무왕)의 도읍지 호경(鎬 京)이었으며,
3) 평양을 흐르는 大同江邊(대동강 변)의 양안(兩岸)에 얼마나 많은 버드나무가 늘어져 있어 국도(國都)를 柳 京(유경)이란 별칭으로도 불렀을까. 과연 이것이 진실인가?
▶ 호경(鎬京)은 대륙 중원의 중심지인 섬서 성 장안 현 서남에 있다. 은(殷)을 멸한 주 무왕 “발(發)”이 도읍한 곳이며, 서도(西都)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반도(半島)에 은(殷)나라가 오백년 가까운 세월을 지배하다가 “주 무왕 발”에게 반도(半島)의 땅을 넘겨줬다는 것인가. 주(周)는 낙양(東都)으로 천도(遷都)하기 전 수백 년을 이곳 호경(鎬京)에 도읍(都邑)하고 있었다.
주 무왕 “發(發)”이 반도(半島) 평양(平壤)있었다는 것인가. 西都(西都)가 鎬 京(호경)이라면 동도(東都) 낙양(洛陽)은 원산이나 함흥을 말하는 말인가. 반도사관이나 식민사관을 주창하는 분들은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변명조차 없다. <침묵은 금>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고려왕(高麗 王)들이 시시 때때로 오갔다면 <鎬京호경>은 결코 반도(半島)에 존재할 수 없다. 반도 고려(高麗) 개경(開京)의 황성(皇城)안에 거주하면서 대륙의 장안(長安) 서남(西南)에 있는 호경(鎬京)까지 시시때때 행차했다고 하면 고려(高麗)의 황제(皇帝)들은 축복받은 신(神)의 아들이었든가, 축지법을 12성 연성한 최 고공내공을 가진 선택받은 황제였든가 일 것이다.
그러나 고려(高麗)의 황제(皇帝)들 역시 인간(人間)이었다. 그들은 일반 백성들처럼 하루 2-3세끼를 먹어야 살 수 있고, 혼인하여 대를 잇고, 병으로 일찍 죽고, 대 센 신하들 때문에 폐위도 당하고, 혈통을 보호하고 왕족들 간의 혈맹을 강화한다는 명목하여 근친결혼(近親結婚)도 마다하지 않은 인간적인 인간(人間)이었을 뿐이다.
이들 고려(高麗) 황제(皇帝)들이 시시때때로 행차했다면 고려(高麗)는 반도에 도읍지(皇城)를 둔 왕조(王朝)가 될 수 없다. 시시때때로 행차한 이러한 “호경(鎬京)”은 장안(長安)현 서남(西南)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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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高麗 史 4卷-世家4-顯宗1-1015 :【甲 午 王 宴 群 臣 於 長 樂 宮 誅 金 訓 崔 質 等 十 九 人. : 갑오, 왕이 장락궁(長樂宮)에서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김훈. 최질 등 19인을 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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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락궁(長樂宮)』 : 섬서 성 장안(長安) 서북의 옛 성안에 있다.
〔漢書高祖紀.五年.治長樂宮.七年宮城.雍錄.未央在漢城西隅,而長樂乃其東隅也,漢都長安.兩宮初城,朝諸侯君臣及於長樂,不在未央也.自惠帝以後皆居未央宮,以長樂常奉母后.故凡語及長樂者多曰東朝. 〕
〔한서고조기. 5년에 장락궁에서 다스렸고, 7년 궁성으로 하였다. 옹 록(雍 錄)에 이르기를, 미앙궁은 한성(漢城)서쪽 모퉁이 있고, 장락궁(長樂宮)은 그 동쪽 모퉁이다. 한(漢)나라 도읍지 장안(長安)의 양 궁은 처음의 성인데, 제후 및 군신들이 장락궁에서 조회하였으며, 미앙궁은 없었다. 혜 제(惠 帝)이후는 모두 미앙궁에서 살았다. 장락궁에서 항시 모후(母后)를 받들었다. 장락궁(長樂宮)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기를 “동쪽의 조정이다.”라 하였다.〕
이러한 장락궁(長樂宮)이 반도 평양에 있었다고 했을 때 이곳이 “한성(漢城)”이 된다. 위의 글을 가만히 보면 『한성(漢城)의 서쪽 모퉁이에 미앙궁이 있다』하였으니 당초는 『한성(漢城)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城)이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게 너무도 공교롭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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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문헌통고 : 【고려왕이 촉 막 군(蜀 莫 郡) 에 거주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개성부(開城府)다. ❶ 신라를 동주(東 州) 낙 랑 부(樂 浪 府)로 만들어 동경(東京)이라 부르고,❷ 백제를 전주(全州)금마군(金 馬 郡)으로 만들어 남경(南京)이라 부르고, ❸ 평양을 진주(鎭 州)로 만들어 서경(西京)이라 불렀으니, 대범 3경(京)ㆍ4부(府)ㆍ8목(牧)ㆍ1백 18군ㆍ3백 90현ㆍ3천 7백 도(島)였다. 하였으니, 이것은 현종(顯宗) 때를 말한 것이다. 또 4도호부(都 護 府)ㆍ8목을 두었었으니, 4부ㆍ8목이란 것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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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사강목/을미년 성종 14년(송 태종 지도(至道) 원년, 거란 성종 통화 13, 995) 조를 보면;
【5월 관제(官制)를 고쳤다. 국초의 관제는 대략 당의 제도를 모방했었는데, 왕이 즉위한 뒤에 창정(創定)한 것이 많았고, 이때에 와서 크게 제도를 혁신하여 내외의 벼슬을 정하였다. 어사(御 史)를 상서성(尙書省)으로, 육관(六官)을 상서육부(尙書六部)로 고치고, 선관(選官)은 이부(吏 部)로, 민관(民官)은 호부(戶部)로, 사헌대(司 憲 臺)는 어사대(御史臺)로, 숭문관(崇文館)은 홍문관(弘文館)으로, 내서성(內 書 省)은 비서성(秘 書 省)으로, 사위시(司 衛 寺)는 위위시(衛 尉 寺)로, 예빈성(禮 賓 省)은 객성(客省)으로, 전옥서(典 獄 署)는 대리시(大 理 寺)로 고쳤으며, 문ㆍ무의 관계(官階)를 개정하였다.
문무 산계(散階 이름만 있고 직무는 없는 벼슬의 품계)를, 국초에는 대광(大 匡)ㆍ정광(正匡)ㆍ대승(大丞)ㆍ대상(大相)이라 불렀었는데, 이때에 와서 문계(文 階)는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ㆍ특진(特進)ㆍ흥록대부(興 祿 大夫)ㆍ금자흥록대부(金紫興祿大夫)ㆍ은청흥록대부(銀靑興祿大夫)로 고치고, 무계(武 階)는 29등급으로 정하였는데, 즉 표기(驃騎)ㆍ보국(輔國)ㆍ진국(鎭國)ㆍ관군(冠軍)ㆍ운 휘(雲 麾) 등의 대장군(大將軍)과 중무(中 武)ㆍ장무(將 武)ㆍ선위(宣 威)ㆍ명위(明 威)ㆍ정원(定 遠)ㆍ영원(寧遠)ㆍ유기(遊騎)ㆍ유격(遊擊)ㆍ요무(耀武) 등의 장군(將軍)과 요무(耀 武)ㆍ진위(振 威)ㆍ진무(振武)ㆍ치과(致 果)ㆍ익위(翊 尉)ㆍ익 휘(翊麾)ㆍ선절(宣 折)ㆍ어모(禦侮)ㆍ인용(仁勇)ㆍ배 융(陪 戎) 등의 교위(校尉)ㆍ부위(副尉)이다.
그래서 중앙에는 성(省)ㆍ부(部)ㆍ대(臺)ㆍ원(院)ㆍ시(寺)ㆍ사(司)ㆍ관(館)ㆍ국(局)이 있고, 지방에는 목(牧)ㆍ부(府)ㆍ주(州)ㆍ현(縣)이 있으며, 관(官)에는 상수(常 守)가 있고 위(位)에는 정원(定員)이 있게 되었으니, 일대의 관제가 비로소 크게 갖추어진 셈이다. 추9월. 국내를 10도(道)로 나누고, 목(牧)을 군(軍)으로 고치고, 12주(州)의 절도사(節 度 使)를 두었다.
1) 관내도(關 內 道) : 양주(楊 州)ㆍ광주(廣州)ㆍ황주(黃 州)ㆍ해주(海 州) 등 29주(州)ㆍ82현(縣)을 관할하고,
2) 중원도(中 原 道) : 충주(忠州)ㆍ청주(淸州) 등 13주ㆍ42현을 관할하고,
3) 하남도(河 南 道) : 공주(公州)ㆍ운주(運 州) 등 11주ㆍ34현을 관할하고,
4) 강남도(江 南 道) : 전주(全州)ㆍ영주(瀛 州)ㆍ순주(淳 州)ㆍ마주(馬 州) 등 9주 43현을 관할하고,
5) 영남도(嶺 南 道) : 상주(尙州) 등 12주ㆍ48현을 관할하고,
6) 영동도(嶺 東 道) : 경주(慶州)ㆍ김 주(金 州) 등 9주ㆍ35현을 관할하고,
7) 산남도(山 南 道) : 진주(晋 州) 등 10주ㆍ37현을 관할하고,
8) 해양도(海 陽 道) : 나주(羅州)ㆍ광주(光州)ㆍ정주(靜 州)ㆍ승주(昇 州)ㆍ패주(貝 州)ㆍ담 주(潭 州)ㆍ낭 주(郞 州) 등 14주ㆍ62현을 관할하고,
9) 삭방도(朔方道) : 춘주(春 州)ㆍ교주(交 州)ㆍ화주(和 州)ㆍ명주(溟 州)ㆍ등주(登 州) 등 7주ㆍ62현을 관할하고,
10) 패서도(浿 西 道) : 서경(西京) 등 14주ㆍ4현ㆍ7진(鎭)을 관할하였다.
또한 고려사 지리에는 【안】
(1) 양주(楊 州)를 좌 신 책 군(左 神 策 軍),
(2) 해주(海 州)를 우 신 책 군(右 神 策 軍)으로 고쳐 이보(二 輔)라 일컫고,
(3) 광주(廣州)를 봉 국 군(奉 國 軍)으로,
(4) 충주를 창화군(昌 化 軍)으로,
(5) 청주를 전 절 군(全 節 軍)으로,
(6) 공주를 안 절 군(安 節 軍)으로,
(7) 진주를 정해군(定 海 軍)으로,
(8) 상주를 귀 덕 군(歸 德 軍)으로,
(9) 전주를 순의군(順 義 軍 )으로,
(10) 나주를 진해군(鎭 海 軍)으로,
(11) 승주를 연해군(兗 海 軍)으로,
(12) 황주를 천 덕 군(天 德 軍)으로 고쳤다.
경주와 서경에는 유 수사(留 守 使)를 두고, 도단련사(都 團 鍊 使)ㆍ단련사(團 鍊 使)ㆍ자사(刺史)ㆍ관찰사(觀察使)로 주(州)ㆍ부(府)의 관직을 삼았다. 관할 주군이 도합 5백 80여나 되었으니, 동국의 지리는 이때에 와서 극도로 성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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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동사강목이나 고려사 지리지 및 문헌통고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참으로 거대한 느낌을 받는다.
구당서지리지에, <一曰關內道,二曰河南道,三曰河東道,四曰河北道,五曰山南道,六曰隴右道,七曰淮南道,八曰江南道,九曰劍南道,十曰嶺南道>를 10도라 하였다. 또한 전성기 때 <郡百九十,縣一千二百五十五,戶八百九十萬七千五百三十六,口四千六百一萬九千九百五十六>이라고 기록하여 놓았다.
<고려(高麗)는 3경(京)ㆍ4부(府)ㆍ8목(牧)ㆍ1백 18군ㆍ3백 90현ㆍ3천 7백 도(島)였다.>는 것을 감안해보면 ; 당서를 기준해보면 / 1개현 당 평균 호수 : 7,097호 . 1호당 평균수(인) : 5. 17 명이다.
▶【고려(高麗)의 390현 * 7097 호 * 5.17인 = 약 14,310,000 인. 3,700 도(島) * 평균 50호 * 5. 17 인 = 956,640 인 합계 일천오백 만 명(15,000,000 명)】
이렇게 추산해 볼 수 있다. 3경(京)ㆍ4부(府)ㆍ8목(牧)ㆍ1백 18군ㆍ3백 90현ㆍ3천 7백 도(島)에 고려 백성(百姓) <일천오백 만 명(15,000,000 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면 인간적인 인간사일 수 있다. 계산은 최소한으로 한 것이다. 3경(京). 4부(府). 8목(牧)등의 소재지 인구 역시 많을 것이다. 특히 3경의 인구는 “일백오십 만 명”이상일 것이다. 평균으로 최소한으로 합산한 것이다.
이러한 고려왕조(高麗王朝)를 뒤엎고 극적으로 쿠데타를 성공시켜 “역성혁명”으로 마무리한 “조선왕조(朝鮮王朝)” 초기의 인구가 “일이백만 명”도 안 된다는 반도사관과 식민사관의 말을 믿으라고 한다면 우리 모두는 제정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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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동사강목/갑술년 의종 8년(송 고종 소흥 24, 금주 양 정원 2, 1154) : 【춘 정월 아우 민(旼)을 평 량 후 (平 涼 侯)에 봉하였다.】
<平 凉 (평 량)>이라는 지명(地名)이 한반도 어디에 있었을까. <평 량 (平 凉)>은 대륙의 감 숙성에 있는 원주(原州)를 말한다. 즉 평 량(平 凉)은 원주(原州)라는 얘기다. 즉 감 숙성 고원 현(固 原 縣)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곳에 있던 <평 량>지방의 후(侯) 즉 제후(諸侯)를 말하는 것으로 당시 『고려(高麗) 황제(皇帝)가 아우(弟)인 ‘왕 민(王 旼’)을 “평 량 후 (平 凉 侯)로 봉하였다.』라는 내용이다.
고려(高麗) 왕조는 대륙의 제후국(諸侯國)이라서 매년 조공(朝貢)과 함께 사절단을 보낸다는 기존의 역사해설 가지곤 단 한 줄도 이해시킬 수 없는 형편이다. 제후국(諸侯國) 주제에 가당치도 않은 짓이다. 제후국(諸侯國) 입장에서 감히 상국(上國) 황제(皇帝)의 구역을 넘볼 수 있겠는가.
조선(朝鮮)역사 해설에서 하늘의 명을 받은 천(天)의 아들(子)은 바로 고려(高麗)의 황제(皇帝)이다. 평 량(平 凉)은 고려황제(高麗皇帝)의 통치 구역 안에 있는 땅이니 자신의 아들이나 아우에게 봉토를 내릴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있는 것이다. 대륙(大陸)의 땅 “적 현 신주(赤 縣 神州)”는 고려의 황도(皇都) 개경(開京)이었으며, 북적(北狄). 동이(東夷). 남만(南蠻). 서융(西戎)은 사해(四海)에서 중조(中 朝)인 고려(高麗) 황실(皇室)의 통치를 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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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高麗 史133卷-列傳46-辛 禑1-1377
【九月倭寇靈光➊長沙牟平咸( )等地. 倭又寇海平二州. 禑授崔瑩鉞使與元帥李希泌金得齊楊伯淵邊安烈禹仁烈朴壽年趙思敏康永柳濚柳實朴修敬等擊走之. 以密直副使裴彦爲和寧府尹. 姜仁裕在北元遣人來告曰:"平章文典成大 政張海馬與丞相納哈出鍊兵馬待高麗軍來欲攻定遼衛." 時我不應攻遼之請故又督之遣軍簿判書文天式告以天寒草枯不可出師. 倭寇➋岳陽縣元帥李琳 擊之獲二 .➌遣前大司成鄭夢周報聘于日本且請禁賊書曰:"竊念本國北連大元西接大明,常鍊軍官以充守禦於海寇只令沿海州郡把截防禦賊徒偵候乘*閒入侵燒毁民廬奪掠人口及覩官軍隨卽騎船逃匿爲害不小今蒙大將軍言及諄諄又於弘長老備厚意其益圖之."】
➊ <9월, 영 광. 장사(長 沙). 모 평. 함( )등의 땅을 노략질하였다.>
장사(長 沙)는 한(漢)나라 때 장사 국(長 沙 國)이 있던 곳이며, 이곳은 상주(湘 州)로도 불릴 때가 있었으며, 당나라 때는 潭 州【담 주 : (고려사 지리지) 성종 14년에 설치한 해양도(海 陽 道)에 속한 담 주((潭 州)와 같은 지명이다.】로, 후에는 장사(長 沙)라 하였으며, 이 지역의 남쪽에 “형 산(衡 山)”인 남악(南嶽)이 있으며, 이 형 산(衡 山)은 “지리산(智異山)”이라고도 칭하는데, 호남 성(湖 南 省) 장사(長 沙)를 말하는 것이다. 장사 현(長 沙 縣)의 북쪽에는 악 양(岳陽)이 있다.
➋ <악 양(岳陽)현에 왜구가 노략질하자 원수 “이 림 ( )”이 쳐 이( )를 획득하였다.>
“악 양 현 (岳陽 縣)”은 호남(湖南)성 상음 현 남 이십 리에 있다. 동정호(洞庭湖)가 있는 이곳은 “악양루(岳陽樓)”로 유명한 곳이며, 이 주위는 남조(南朝)의 왕조(王朝)들에게는 군사적인 요충지(要衝地)였다고 한다.
➌ <전 대사성 “정몽주”가 이르기를, 고려(高麗)는 “북(北)쪽으로 대원(大元)과 연이어져(連) 있고 (本 國 北 連 大 元), 서(西)쪽으로는 대명(大明)과 접(接)하고 (西 接 大 明) 있어 상시 군관(軍官)들을 훈련시켜 수비하고 방어해야 한다.”고 했다.>
고려(高麗)의 북쪽 경계(境界)는 압록강과 두만강이다.
1) 위의 기록대로 “대원(大 元)과 고려(高麗)의 땅이 서로 연이어져 있었다고 한다면 당시 원(元)은 북원(北元)으로, 이미 북쪽으로 도망을 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을 때이다. 고려(高麗)와 북쪽에서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고 하면 당시 고려(高麗)와 북원(北元)은 최소한 음산 산맥(陰山山脈)의 북쪽 외몽골 일부까지 고려(高麗)의 영토라는 얘기며,
2) “서쪽으로 대명(大明)과 접(接)하고 있었다.”면 북원과의 경계를 감안하면 고려(高麗)의 서쪽 경계는 사천 성(四 川 省) 서부지방까지다.
2010년 05월 27일 <글쓴이 : 문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