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退溪小傳」 편집자 윤상홍 글 퍼옮(예안중 15기 카톡방 금창석동기 올린글 다운받음 2020.11.20)
<28회> 退溪小傳
「巨星의 終焉」
퇴계의 한평생의 소망은 학문연구를 전념하는 데 있었던 까닭에 본의아닌 벼슬을 지내면서도 70여 차에 걸쳐 사임을 요청해 왔었다. 그러나 임금은 끝내 허락을 아니 하다가 병으로 인해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69세에 이르러서야 고향에 돌아가 요양하기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해방을 시켜 준 것이 아니라, 관직을 그대로 지닌 채 요양을 하다가 건강이 다소라도 회복하면 곧 상경하여 보필해 주기 바란다는 조건부의 허락이었다.
성품이 대쪽같이 곧은 퇴계로서는 아무 책임도 감당하지 못하면서 관직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커다란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퇴계는 자신의 앞날이 얼마 남지 아니한 것을 이미 깨닫고 70세 되는 이듬해 정
월에 임금에게 다시 글을 올려 모든 관직을 깨끗하게 사퇴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이때에도
「경의 나이 비록 70이나 다른 사람과 같지 아니 하기 때문에 감히 사면을 허락하지 않노라. 기왕에 경이 고향에 돌아가기를 허락해준 것은 다만 요양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고﹐ 관직의 사면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경은 그 점을 분명히 알아주기 바란다. 그러므로 나는 경이 하루 속히 조정으로 돌아와 주기를 날마다 손꼽아 바라고 있는 터이니 언제든지 역마를 타고 올라와 나의 바람에 보답해 주기를 바란다.」
하고 간곡한 교지를 보냈을 뿐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퇴계는 병으로 무척 피로 하였다. 그러나 그는 도산서당에서 제자들과 학문 토론하는 것을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학문 연구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5월에는 제자들과 함께 역동서원(易東書院,안동시 송천면 소재)을 방문하여 원생들에게 계몽(啓蒙)을 강론하였고﹐ 7월에는 심경(心經)을 강론하였고, 8월에는 역동서원의 낙성식에도 참석하였다.
이해 9월에 퇴계는 글을 올려 모든 관직을 사면할 것을 또 청원 했으나 이때에도 역시 허
락이 내리지 않았다.
이해 10월에는 오래전부터 학문을 토론해 오던 기명언(奇明彦)에게 편지 형식으로 새로운 학설을 써 보냈는데﹐ 그것이 바로 심성정도(心性情圖)라는 유명한 논문이었다.
그 무렵 퇴계는 자신의 생명이 앞으로 몇 달 남지 않았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
는 11월로 접어들자 도산서당에서 학문을 연구하던 많은 제자들을 집으로 돌아가라고 일
렸다.
그 무렵 그는 샘물같이 맑은 정신으로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며, 그에 대한 모든 준비를 질서정연하게 하나씩 갖추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11월 하순이 되자 퇴계는 사당(祠堂)에 나가 제향을 올리려고 하였다.
그 때에는 이미 병이 중하여 자리에 누워있던 때였으므로 제자들은 선생이 제사에 참여하
기를 만류했으나, 퇴계는
「내가 너무 늙어서 조상의 제사에 참사하기는 이번이 마지막일 터인데 어찌 이번 제사에 참
사를 아니 하겠느냐.」
하고 말하여 제사 올리는 것을 손수 맡아 보기까지 하였다. 그 한 가지 사실만 보더라도 그는 자신이 멀지 않아 죽을 것을 이미 예지(豫知)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퇴계는 그처럼 중병에 처해 있으면서도 그달 하순에는 기명언에게 다시 편지형식으로 자신
이 평소에 주장해 오던 「치지격물설(致知格物說)에 대한 그릇된 점을 시정하였다. 그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학문연구에는 추호의 게으름이 없었던 것이다.
그 당시 퇴계의 맏아들 준(寯)은 봉화현감(奉化縣監)으로 있었다. 그런데 12월로 접어들
자 퇴계는 돌연 아들에게 관직을 사면하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제자들을 병석에 불러놓고,
「내가 여러 친구들한테서 책을 빌려본 것이 많은데 이제는 모두 주인에게 돌려 보내야 하
겠으니 자네들이 목록(目錄)을 상세하게 만들어서 어김없이 주인에게 돌려 주도록 하게.」
하고 말했다.
그나 그뿐이랴. 하루는 형의 아들인 영(寗)을 병석으로 부르더니
「내가 며칠 후에는 죽게 될 것이므로 유언(遺言)을 미리 남겨 놓으려고 하니 너는 지필묵(紙筆墨)을 가지고 와서 내가 부르는 말을 하나씩 받아 쓰도록 하여라.」
하고 말했다.
이상 몇 가지 사실로 보더라도 퇴계는 자기가 죽을 날을 미리 알고 있었음이 틀림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이 며칠 앞에 닥쳐와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의 행동은 평소와 추호도 다름 없이 침착하였다. 그것은 생사관을 초월한 철인(哲人)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안 될 일이었다.
퇴계 자신이 자기 입으로 남겨놓은 「유계(遺戒)는 이러하였다.
첫째, 국장(國葬)을 사양할 것
둘째, 비석(碑石)을 세우지 말고, 단지 조그만 돌에다 전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새기고﹐ 후면에는 간략하게 향리와 조상의 내력과 지행(志行)과 출처(出處)만을 새기도록 하라.」
실로 겸허하고도 담백하기 짝이 없는 유언이었다.
퇴계는 그런 유계를 남겨 놓고도 안심치 않았든지, 조카 영에게 이번에는 말로서 이런 부탁까지 하였다.
「만약 나의 비문을 다른 사람에계 부탁해 짓는다면, 가령 기고봉(奇高峯)같은 이는 나와 교분이 두터웠던 까닭에 반드시 실상 이상으로 과장되게 쓰기 쉬울 것이다. 나는 그 폐단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명문(銘文)은 나 자신이 이미 지어 두었고﹐ 나머지 글은 이럭저럭 하다가 끝을 맺지 못했지만, 초(草) 잡은 글이 어느 문갑 속에 들어 있을테니, 그것을 찾아내어 쓰도록 하여라.」
묘비명(墓碑銘)을 남에게 부탁하면 과장되게 써 줄까 두려워, 묘비명조차 자기 자신이 미리
써 놓았다는 것은 얼마나 용의주도한 일인가.
드디어 퇴계가 세상을 떠나는 12월 8일이 왔다.
퇴계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사방에서 제자들이 몰려 왔다.
8일이 되자 퇴계는 좌우의 부축을 받으며 병석에서 일어나 앉더니,
「많은 선비들이 문병을 찾아온 모양이니 한 사람도 빼지 말고 나에게 만나게 해다오.」
하고 말했다.
위독한 환자가 일시에 많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크게 경계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서 주위
에서 애써 만류했지만, 퇴계는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나를 찾아온 사랑하는 선비들을 어찌 안 만날 수 있겠느냐. 아무 걱정 말고 어서 만나게 해다오.」
그리하여 여러 제자들과 직접 대면하여 영결 인사의 말을 나누기를,
「내 평생에 그릇된 식견을 가지고 제군과 더불어 오래도록 학문을 강론해 왔다는 것은 실로 즐겁고도 기쁜 일이었었다. 제군은 내가 죽은 뒤에도 학문 연구에 더욱 힘써 주기를 바
란다.」
그 무렵 임금은 퇴계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내의(內醫) 더러 약을 지어 가지고 역마로 달려 내려가 구원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러나 내의가 미처 도착하기도 전인 8일 아침에 퇴계는 병석에 누운 채 사람을 부르더니,
[매화분에 물을 주어라.」
하고 명하였고﹐ 이날 저녁(酉時)이 되자 자기가 누워있던 자리를 깨끗이 정돈하게 한 뒤에
[좌우에서 나를 부축하여 자리에 일어나 앉게 해다오.」
하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없이 단정히 일어나 앉아서 마치 잠들 듯이 편히 운명하였다.
우리 나라 유학계의 거성 이퇴계는 많은 저술과 많은 제자들을 길러놓고 70세를 일기로 한서암(寒棲菴)에서 영원히 잠들어 버린 것이었다.
한편, 퇴계의 부음이 조정에 알려지자 임금은 크게 슬퍼하며,
「이황이 죽다니! 우리는 이제 나라의 큰 기둥을 잃었구나!」
하고 말하며 즉시 정원(政院)에 일러 영의정(領議政)의 벼슬을 추증(追贈)하게 하고, 장사는 대신(大臣)의 예우에 의하여 거행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부승지 이제민(副承旨 李齊閔)으로 하여금 조상하게 하였는데, 추후에 그것만으로
는 부족하다싶어 우승지 유홍(右承旨 兪泓)을 다시 내려보내 제사를 직접 지내도록 일렀으니 그것은 전례가 없는 특이한 예우였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후에는 다시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교 주관관상감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라는 수 많
은 벼슬을 추증하였다.
퇴계의 행상은 돌아간지 넉 달만인 이듬 해 3월에 의정례(議政禮)에 의하여 거행했는데,
지금 안동군 도산면 건지산(搴芝山) 남쪽에 있는 퇴계의 무덤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생각하면 퇴계는 평생을 오로지 학문에 뜻을 두고 살아 왔었고 평생을 본의 아닌 벼슬
살이에 시달리면서도 학문 연구만은 잠시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심성학(心性學)에 있어서나 시문학(詩文學)에 있어서나 불멸의 명저들을 허다하게 남겼을 뿐만아니라, 도산서당을 통해 국가동량재인 제자들을 3백 30여 명이나 길러냈으니 그의 육신은 비록 70세로 종막을 고했다 하더라도 그의 정신은 날이 갈수록 빛을 발하여 돌아가신 후 4백여년이 지난 오늘에는 국제적으로도 만인의 추앙을 받고 있는 것이다.
퇴계는 실로 우리 나라가 세계만방에 자랑할 수 있는 위대한 학자인 것이다.
<28회>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