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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연구 초(朝鮮史硏究草, 저자: 신채호)
차 례
가. 고사상(古史上) 이두문 명사 해석법
나. 삼국사기(三國史記) 중 동서 양자(東西兩字)의 상환(相換) 고증(考證)
다.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라. 평양 패수고(平壤浿水考)
마. 전후 삼한고(前後 三韓考)
바.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
< 이 수정본은 인터넷에 위키문헌으로 올려진‘조선사연구초’를 알기 쉽고, 읽기 쉽게 수정한 것임.>
『이두문 해석법』을 올리면서
단재선생께서 남기신 <古史上(고사상) 이두문 명사 해석법>은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두문 해석법
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이 <이두문 해석법>은 이두문을 일상 생활에서 쓰던 시대에 살고 있었던 당사자가 설명한
이두문 해석법이며,
더구나 이두문에 해박한의 지식을 갖고 있으신 분이 남긴 이두문 해석법입니다.
즉, 이두문을 가장 잘 아는 분이 남긴 이두문 해석법이며, 따라서 가장 정확한 이두문 해석법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또한, 이두문 해석법으로 제시한 6가지 방법인 자증(自證), 방증(傍證), 소증(遡證), 연증(沿證), 호증(互證),
분증(分證)을 보면 개개의 이두문을 해석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 아닌 어디서나, 어떤 경우에나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 객관적 이두문 해석 법칙을 제시한 것으로써 과학적인 이두문 해석법입니다.
이 『古史上(고사상) 이두문 명사 해석법』은 본래 역사 연구를 위해 쓴 글이며, 명사 해석법으로 제목을
달고 있지만 사서에 나오는 이두뿐만이 아니라 어떤 다른 종류의 문헌에 나오는 이두문을 해석하는 방법에도
적용되며 명사인 이두문 뿐만 아니라 동사, 형용사, 대명사, 부사, 조사 등 모든 단어, 어구, 관용어 등
어떤 문구로 되어있는 이두문이라도 그 해석을 요하는 곳에 적용할수 있는 방법입니다.
다시말해서 이 글은 역사연구의 부산물로써 나온 이두문 해석법이지만 역사가 아닌 일반적인 이두문을 해석
하는데도 쓸수 있는 귀중한 방법이며 이두문을 해석할수 있는 일반적이며 과학적인 방법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두문 해석법』은 진정한 우리역사를 가르쳐 주신데 더하여 우리 선조들의 독특한 의사 전달도구
이며 표기법인 이두문을 해석하는 법칙을 가르쳐 주신 것으로써 단재선생께서 우리 후손에게 남겨주신
또하나의 귀중한 보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두문 해석법 (단재 신채호)
古史上(고사상) 이두문 명사 해석법 : 옛 사서상에 나오는 이두문 명사 해석법
차 례
1. 서론
2. 해석 방법
1) 본문(本文)의 자증(自證)
2) 동류(同類)의 방증(傍證)
3) 전명(前名)의 소증(遡證)
4) 후명(後名)의 연증(沿證)
5) 동명이자(同名異字)의 호증(互證)
6) 이신동명(異身同名)의 분증(分證),
3. 결론
1. 서론
혹은 이를 웃으리라, 번잡 자질구레하고 무익한 일이라고. 그러나 착오가 이에서 교정 되느니라.
그릇된 것과 틀린 것(訛誤-와오)이 이에서 바로 잡히게(歸眞-귀정) 되느니라.
각기 제 시대의 본색이 이에서 탈로 되느니라.
이미 흩어져 없어진(散失-산실) 조선 역사상의 대사건이 이에서 발견 되느니라.
그러므로 이것이 곧 땅속 고적(地中古蹟-지중고적)을 발굴함에 비길 만한 조선사 연구의 비밀 열쇠 이니라.
예로부터 알지 못하는 자(不知者-부지자)들이 이 비밀 열쇠를 망령되게 침범(妄侵-망침)하여 도리어 본래의
뜻(本義-본의)을 어수선하게(眩亂-현란) 한 일이 많다.
예를 들면, 무명씨의 동언고략(東言考略)에 「신라가 부여를 나쁘다(惡-악)하여
'부여 죽인다'는 말이 생기었다」하며,
이아정(李雅亭)이 고구려는 깨고리의 뜻(意-의)을 취함이라 하며,
정다산이 위례성은 울(圍籬:위리)의 뜻(意-의)을 취함이라 하며,
근일 일본의 어떤 학자들이 변한(弁韓)의 변(弁)은 음이 “배”라 뱀의 배니 사한(巳韓)의 뜻(意-의)이요
마한은 오한(午韓:말한)의 뜻(意-의)이니 진한 마한 변한은 다 12지(支)에서 취하여 있는 곳(소재)의 방위를
증명(證-증)함이라고 하니,
이같이 증거(左證-좌증)없이 비슷한 음을 취하여 억지 판단(武斷-무단)을 내릴진대,
구태여 부여 죽인단 말이 부여 때문에 생겼겠느냐?
비었다(空-공), 부옇다(白-백) 등의 말도 다 부여 때문에 생긴 말 일지며,
구태여 개구리만 고구려의 이름 지은 원인이 될 뿐이랴.
꾀꼬리(鶯-앵), 개꼬리(狗尾-구미), 게꼬리(蟹尾-해미) 등이 모두 고구려란 이름의 유래(所自出-소자출)가
될지며,
백제 초년에 병산(甁山), 마수(馬首), 고목(高木), 우곡(牛谷) 등 성책(城柵)이다
그 소재지의 지명(地名)을 가져 이름한 것(者-자)인데,
홀로 그 수도의 위례성을 한강의 옛 이름(漢江古名-한강고명) “아리”에서 취하지 않고
울(圍籬:위리)의 뜻으로 이름 하였다 함이 무슨 설(何說-하설)이며,
변한의 변을 뱀의 배에서 뜻을 취하였다 함은 더욱 반박할 가치가 없지만,
삼한(三韓)의 위치가 명백한 진한은 동이며 마한은 서이며, 변한은 남 이어늘
이제 마한은 오방(午方: 정 남방)이라, 변한은 사방(巳方:동남방)이라 함이 무엇에 근거(何에 據- 하에 거)
함이뇨.
무릇 옛 사서상(古史上-고사상) 이두문으로 쓴 명사의 해석에 허다한 곤란이 있으니
대개 이두문은 한자의 전체 음(全音-전음), 전체 뜻(全意-전의), 혹은 반쪽 음(半音-반음), 반쪽 뜻(半意-반의)
으로 만든 일종의 문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두문이 구역문(口譯文: 소리로 번역한 글)으로 되기 전에는
자모(字母:자음과 모음)의 발견만 않된 게 아니라 일정한 법칙도 없어서,
같은 백(白)자 이지만 무슨 까닭으로 上白是(아래 ① 참조)의 白은 그 전체 뜻(全意)을 읽어 “살”이라
하면서
白良(아래 ② 참조)의 白은 그 반음을 읽어“바”라고 하느냐 하면 그 해답이 없으니 그 곤란이 첫번째요.
한자로 지은 주, 군, 현의 이름은 경덕왕이 시작(始-시)한바, 그 변경의 때(際-제)에 밀불(推火-추화)이
밀성(密城)이 되고,
거물라(今勿奴)가 흑양(黑壤)이 된 것 같이 옛 이름(古名-고명)을 번역하여 사용(譯用-역용)한 것도 있지만,
퇴화(退火)가 의창(義倉)이 되며, 비화(比火)가 안강(安康)이 되어 아주 옛 이름(古名-고명)의 본래 뜻
(本義-본의)을 버리고 한자로 지은 지명이 더 많으며,
중국의 관명(官名)을 모방함은 궁예 왕에서 시작하여 고려 광종에서 완성이 되었으나,
이는 또 한 개도 옛 이름(古名-고명)을 번역해서 사용(譯用-역용)한 것이 없은즉,
그 이름의 뜻(名義-명의)의 원류를 찾는 동시에 매번 앞뒤 사이가 끊어진 유감
(전후 際斷의 憾 - 전후 제단의 감)이 없지 아니하니 그 곤란이 두번째요.
삼국사기나 기타 사책(史冊)에 이두문으로 쓴 당시의 본명으로 실록에 기록(記-기)치 아니하고
후에 와서(後來-후래에) 번역하여 사용(譯用-역용)한 한자의 명사를 기록(記-기)하였으니
예를 들건대 백제가 쓰던 한강의 이름인 욱리하(郁里河)가 겨우 개로왕 본기(기)에 한번 보인(一見:일견)
이래에는 오직 신라가 고친 이름인 한강이 온조 초년부터 보이었으며,
고구려가 쓰던 요동성의 이름은 오렬홀(烏列忽)이거늘, 삼국사기에 오렬홀이 겨우 지리지(地誌-지지)에 한번
보인(一見:일견) 이외에는 모두 수당(隨唐)사람이 칭호한 요동성으로 적히었을 뿐이니,
그러면 아주 참고 할수(可考-가고) 없이 된 본명도 허다할 뿐더러 어떤 것은 당시의 본명인지 후에 와서
번역한 이름(후래의 譯名-역명)인지 알 수 없이 된 것도 적지 아니하리니 그 곤란이 세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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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샹살이,‘상사리’라고 읽고 그 뜻은 웃어른께 올리는 편지의 첫머리나 끝에 사용되어 ‘살외어(사뢰어)
올립니다’이다:
조선상고문화사(외), 비봉출판사, 2008년판
②‘바라’라고 읽고 그 뜻은‘~는 바이다’: 조선상고문화사(외), 비봉출판사, 2008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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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사책(史冊)은 옛날부터(從古-종고)로 저자만 있고 독자는 없는 서적이라,
무슨 사책이든지 와자(訛字: 그릇된 글자), 오자(誤字: 틀린 글자), 첩자(疊字: 겹친 글자),
누자(漏字: 빠진 글자)가 지면(紙幅-지폭)에 충만한 중에,
더욱 옛 지명(古地名-고지명)과 옛 관명(古官名-고관명)같은 것은 오랑캐 언어(夷言-이언)로 배척하여
그 와(訛: 그릇됨), 오(誤: 틀림), 첩(疊: 겹침), 누(漏: 빠짐)를 거의 베껴쓰는 사람(謄寫者:등사자)이나
인쇄 조판하는 사람(印版者:조판자)의 자유에 방임하여 정정하는 사람(訂正者:정정자- 바르게 잡아 고치는
사람)이 없었으며,
중국 24사(史) 중 이른바 조선열전 혹 동이열전에 적힌 명사가 전해들은(傳聞-전문)대로 음역한 것도 있지만,
직접으로 당시 이두문의 본명을 그대로 가져다가 쓴 것도 적지 않으나,
수백년래로 옛 서적(고서-古書) 고증(考證)에 늙은 중국 문사(文士)들이 남의 역사에는 사정도 깜깜(격막)일
뿐더러 노력도 좀 아낀지라, 그리하여 모든 사실의 오(誤: 틀림)나 문구의 와(訛: 그릇됨)도 발견한 이가
없거든, 하물며 저들(彼等-피등)의 눈에 서투른 일반명사이랴.
그러므로 그 조선열전 등의 와(訛: 그릇됨), 오(誤: 틀림), 첩(疊: 겹침), 누(漏: 빠짐)가 또한 대단하여
신용하기 위험한 기록들이니 그 곤란이 네번째다.
언어는 사판적(死板的: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요 활판적(活板的: 변경 가능한 것)이라
시대를 따라 생성 소멸하며(생멸하며) 변화하는 고로
훈몽자회나 용비어천가나 처용가 같은 것에 의거(據-거)하면,
“코 鼻(비)”가 “고”이며,
“가랑 脚(각)”이 “가랄”이며,
“잇기 苔(태)”가 “잇”이며
“강 江”이 “가람”이며,
“바다”가 “바랄”이요,
삼국사기나 만주원류고 같은 것에 의거하면
“철 鐵”이 “물”이며,
“삼림 森林”이 “와지”이며,
“관경 管境”이 “주선”이니,
그러면 이밖에 소멸 혹 변하고 고쳐진(變改-변개된) 말이 얼마인지 모를지니 그 곤란이 다섯번째라.
그러나 조선사를 연구하지 아니하려면 모르거니와 연구하려면 여기에 힘을 쓰지 아니할 수 없는 바라.
이제 아래(左方-좌방)에 어리석은 사람도 많은 생각 가운데는 한 가지쯤 좋은 생각이 미칠 수 있음
(千慮一得-천려일득)을 진술하여 일반 독사자(讀史者:역사를 읽는 사람)의 밝게 살펴 바로잡음(斤正-근정)을
구하노라
2. 해석 방법
1) 본문의 자증(自證)이니, : 사서에 쓰인 본문을 가지고 이두문을 해석하는 방법이니
(본문 자체에서 해석방법을 얻을 수 있는 경우)
이를테면 삼국사기 직관지(職官志)에 각간(角干)을 일명 서불한(舒弗邯) 혹은 서발한(舒發翰)이라 하였으니
각(角)은 쇠뿔의 뜻이요, 서불 혹은 서발은 쇠뿔의 음이라.
무관(武官)이 쇠뿔로 만든 활을 씀으로 관명을 지음이니,
근세까지도 영남인(嶺南人)이 무관을 “쇠뿔에기”라 함이 그 유풍이요,
간(干), 한(邯), 한(翰)은 다 “한”의 음이니 ('邯-한'은 '邯鄲-한단'의'邯-한'과 동음),
그런즉 각간(角干), 서불한(舒弗邯), 서발한(舒發翰)은 다 “쇠뿔한”으로 읽을(讀-독) 것이니라.
열전(列傳)에 이사부(異斯夫) 일명 태종(苔宗)이라 하며, 거칠부(居柒夫) 일명 황종(荒宗)이라 한 바,
이사(異斯)는 苔(태: 이끼)의 뜻이니 “잇”이요
거칠(居柒)은 荒(황: 거칠다)의 뜻이니 “거칠”이요,
夫(부)는 경서언해의 士大夫(사대부)를 “사태우”로 풀이(解-해)함에 의거하여
그 옛 음(古音-고음)이 “우”임을 알지니,
宗(마루 종, 위에 사투리로 우에)의 뜻이니
이사부는 “잇우”로,
거칠부는 “거칠우”로 읽은(讀-독한) 것(者-자)이며,
본기(本紀: 신라본기)에 “소지일작비처(炤智一作毘處: 소지는 비처라고도 한다)”라 하며
“벌휘일작발휘(伐暉一作發暉: 벌휘는 발휘라고도 한다)”라 하였은즉,
소지(炤智)의 炤(소: 비추다, 밝다)에서 반의(半意: 반쪽 뜻)를 취하여 “비”로 읽고,
智(지)는 전음(全音: 전체 음)을 취하여 “치”로 읽은 것이니(자니)
“소지”와 “비처”가 동일한 “비치”이며,
이두문에 늘(매양) 弗(불), 發(발), 伐(벌)은 통하는 자(字)인즉,
伐暉(벌휘)와 發暉(발휘)가 동일한 “뿔휘”니 뿔휘는 용비어천가에 의거하여 지금의 말(今語-금언),
뿌리(根-근)이다.
지리지에 “삼척군은 본래 실직국이다(三陟郡本悉直國)”이요 “금양군은 본래 휴양군이다(金壤郡本休壤郡)”
이라 하였은즉,
“세치”의 음이 실직(悉直)이 되며 “세치”의 “세”는 뜻으로 쓰고
세치의 “치”는 음으로 써 “삼척”이 됨이요,
“쇠라”를 음으로 써 휴양(休를 중국에서는 “쉬"라고 읽는 다고 함)이 되고,
“쇠” 뜻으로 써 금양(金壤)이 됨이니라.
이 따위는 이루 셀 수 없으므로 아직 약하거니와,
이상은 곧 다른(他-타) 먼 증거(遠證-원증)를 기다릴(待-대) 것 없이 그 해석을 얻는 것(者-자)이니라.
2) 동류(同類)의 방증(傍證)이니, : (본문에서 그 해석을 얻을 수 없는 명사는 그와 같은 종류를 수집
하여 추정 판단하는 방법을 쓴다.- 이 글 올린 사람이 덧붙여 쓴 것)
(첫째, 같은 종류를 수집을 하고, 둘째 수집된 것을 근거로 추정 판단하여 이두문을 해석하는 방법-
글올린 사람이 덧붙여 쓴 것)
이를테면 옛 역사(古史-고사)를 읽다가 지명(地名)의 꼬리에 달린
忽(홀), 波衣(파의), 忽次(홀차), 彌知(미지) 같은 것들을 만난다 하자.
홀(忽)이 곧 “골”인가의 의문이 있지만 의문이 확설이 되지 못하나니 반드시 미추홀(彌鄒忽),
술이홀(述爾忽), 비렬홀(比列忽), 동비홀(冬比忽) 등 모든 홀의 같은 종류(同類-동류)를 얻어야 학설이
될지며,
파의(波衣)가 곧 바위인가의 가정이 생기지만 가정으로 단언을 내리지 못할지니 반드시 조파의(租波衣-
조바위: 추울 때 여자가 쓰는 방한 모자),
구사바위(仇斯波衣), 별사바위(別史波衣) 등 모든 파의의 같은 종류(同類-동류)를 얻어야 단안이 될지며,
갑비홀차(甲比忽次), 요은홀차(要隱忽次), 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 등 모든 홀차의 같은 종류(同類-동류)를
얻으면
홀차가 곧 “고지” 반도(半島)인 줄을 알지며,
송미지(松彌知), 고마미지(古馬彌知), 무동미지(武冬彌知) 등 모든 미지의 같은 종류(同類-동류)를 얻으면
미지가 곧 수만(水灣: 물이 뭍-땅으로 움푹 들어 온 곳)인 줄을 알지니라.
한양(漢陽)의 남산도 목멱(木覔)이요 평양의 남산도 목멱인즉,
남산과 목멱(木覔)이 서로 떨어지지 않는 관계로 인하여
목멱은“마메”곧 남산의 이두문인 줄을 알지며,
송산(松山)의 옛 이름(古號)이 부사대(扶斯達)요,
송현(松峴)의 옛 이름(고호)이 부사파의(扶斯波衣)요,
송악(松嶽)의 옛 이름(고호)가 부사갑(扶斯甲)인즉,
송(松)과 부사(扶斯)의 서로 따라다니는 원인으로 인하여
송(松)의 고어(古語)가 “부스” 곧 扶斯(부사)인 줄을 알지니라.
이상 본문에서 그 해석을 얻을 수 없는 명사는 그 같은 종류(同類-동류)를 수집하여 추정, 판단(추단-推斷)할
것(者-자)이니라
3) 전명(前名)의 소증(遡證)이니, : 옛 이름(前名-전명)을 찾아 그것을 근거로 이두문을 해석하는 방법이니,
이를테면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의 구월산(九月山)을 단군의 아사달(阿斯達)이라 하고,
해자(解字: 해석 하는 글자)가 가로되, 아사(阿斯)는 아홉이요, 달(達)은 달(月)이니 구월(九月)의 뜻이라
하나,
阿斯(아사)를 앗, 엇, 옷, 웃 혹은 아쓰, 어쓰, 오쓰, 우쓰 등으로 읽을 수 있으나 아홉으로는 읽을 수 없으며
達(달)의 음은“대”이니 “대”는 산령(山嶺: 산 고개)의 뜻이니 청주(淸州)의 상당산(上黨山)을 “것대”라
칭하는 류(종류)니,
삼국사기 지리지에 난산(蘭山)의 옛 이름(古名)이 석대(昔達)요
청산(靑山)의 옛 이름(고명)이 가지대(加支達)이요,
송산(松山)의 옛 이름(고명)이 부사대(扶斯達)이니,
阿斯達(아사달)의 達(달)도 그와 같이 음은 “대”요, 뜻은 산령(山嶺: 산 고개)이니
달(月)의 뜻으로 풀이(解-해)함이 불가하며,
구월산의 옛 이름(고명)은 궁홀(弓忽)이요,
궁홀의 별명은 검모현(劍牟縣) 혹 궁모현(窮牟縣)이니,
세가지 이름을 합하여 보면 궁홀(弓忽)은 “굼골”로 읽을지니,
고구려 말엽에 의병대장 검모잠(劍牟岑)이 의병을 일으켜 당나라와 싸우던 곳이며,
"굼골”의 명산(名山)인 고로 “굼골산”이라 함이니,
마치 금강산이 “개골”에 있는 산(山)인 고로 “개골산”이라 한 류(類: 종류)이거늘,
이제 굼골을 구월로 와전하고 구월을 아사달로 위증하여 단군의 후예가 구월산으로 도읍을 옮긴(移都-이도)
것처럼, 사실을 위조하였으나, 이는 신라 경덕왕이 북방 주와 군명을 옮기고 따라서 고적까지 옮길 때에
만든 것이요 사실(史實)이 아니니라.
북부여(北夫餘)의 옛 이름(고명)이 조리비서(助利非西)요,
합이빈(哈爾賓: 하얼빈)의 옛 이름(고명)이 비서갑(非西岬)이라.
속어에 팔월 추석을 가우절이라 하고 삼국사기에는 가배절(嘉俳節)이라 하였으니,
비(非), 배(俳) 등의 글자가 옛 음(古音)에“우”임이 명백하니
비서(非西)와 아사(阿斯)가 음이 서로 가까울(상근-相近) 뿐더러
단군 후예인 해부루는 합이빈(하얼빈)에서 동쪽으로 옮겨(동천하여) 동부여가 되며
해모수는 합이빈(하얼빈)에서 굴기(堀起: 우뚝 일어남)하여 북부여가 되었은즉,
아사달은 곧 비서갑(非西岬)이니, 지금의 합이빈(하얼빈) 완달산(完達山)이 그 옛 땅(유지-遺地)이 될지니라.
이상은 그 부(父: 아버지)나 조(祖: 할아버지)의 성씨를 얻으면 그 자손된 그 사람(기인-其人)의 성씨도
자연 알게 되듯이 본명사의 발생한 지방이 모호하거든 그 옛 이름(고명)을 찾아 진짜와 가짜(眞假-진가)를
아는 류(종류)니라.
4) 후명(後名)의 연증(沿證)이니,
:나중에 지어진 이름(後名-후명)의 원래 음과 뜻을 찾아 그것으로 이두문을 해석하는 방법이니,
이를테면, 진수(陳壽) 삼국지 삼한전(三國志 三韓傳)에
“모든 관직(諸官 - 제관)”을 다“지(智)”라 이름 하였다 하며,
그 중의 대관(大官)은 신지(臣智)라 명하였다 하고,
신지(臣智)를 혹 “신운견지(臣雲遣支)”라 칭한다 하였으니,
지(智), 신지(臣智), 신운견지(臣雲遣支) 등을 당시에 무엇으로 읽었겠느뇨.
고대에 여러 소국(諸小國- 제 소국)의 으뜸(宗主-종주)이 되는 대국을 진국(辰國)이라 하며,
모든 작은 왕(諸小王- 제 소왕)을 관할하는 대왕을 진왕(辰王)이라 하며,
모든 소도(제소도-諸蘇塗; 神壇-신단)의 으뜸(종주-宗主)되는 대소도(大蘇塗)를 신소도(臣蘇塗)라 한바,
臣(신)과 辰(진) 등을 다 “신”으로 읽을(讀-독) 지니,
신은 太(태: 가장 크다)의 뜻이며, 總(총: 모든)의 뜻이며, 上(상: 위)의 뜻이며, 제일이란 뜻이요,
智(지)의 음은 “치”니 관명의 支(지)와 智(지) 등의 글자는 모두 “치”로 읽을(讀-독) 지니
신지(臣智) 즉 신치는 집정(執政: 권력을 집행함)의 수상(首相)이요
“신운견지(臣雲遣支)”의 운(雲)은 아랫 글(下文-하문)의 거운신국(巨雲新國)의 “운”을 여기에 중첩
기재(첩재: 이중 기재)한 자니, '운' 자를 빼고 “신크치”로 읽음(讀-독)이 옳으며(可-가하며)
신견지(臣遣支)는 고구려의 태대형(太大兄)이요 신라의 상대등(上大等)이니 신크치의 음이 신견지(臣遣支)가
되며
뜻이 태대형(太大兄) 혹 상대등(上大等)이 됨이니라
(大兄一名近知: 대형은 일명‘근지’라고 한다).
무릇 태대(太大)는 모두 “신크”니,
연개금(연개소문)의 태대대로(太大對盧: 金庾信傳 - 김유신전에 보임)는 “신크마리”로 읽을(讀-독할)지며,
김유신의 태대각간(太大角干)은 신크쇠뿔한(쇠뿔한의 뜻은 이미 前述-전술)으로 읽을(讀-독할)지니라.
저자가 연전에 북경 순치문내 석등암에 우거할때에 일개의 동몽고승(東蒙古僧)을 만나 동서남북을 가리키며
몽고말로 무엇이냐 물은즉 “동은 준라, 서는 열라, 남은 우진라, 북은 회차”라 하여
그 명칭이 고구려의 순나(順那), 연나(涓那), 관나(灌那), 절나(絶那) 등, 동서남북 4부와 비슷하므로 매우
깜짝 놀랐다(驚起-경기)
이로 인하여 한자로 써 서로 문답하다가 원태조 황제의 성길사한(成吉思汗)이라 칭한 뜻을 물어본즉
성길(成吉)은 “싱크”니 몽고말로 최대의 뜻이요,
사(思)는 음이 “쓰”니 위권(威權: 위엄과 권력-권위)의 뜻이요,
한(汗)은 제왕의 뜻이니,
성길사한은 곧 무상최대의 위권(威權: 위엄과 권력-권위)을 가진 제왕이란 뜻이라 하니,
싱크는 대개 조선고어의 신크가 변화한 자니,
삼국 이두문의 학자의 붓으로 원 태조의 이름(名-명)을 쓰자면 태대사(太大思)라 할지로다.
그러면 태대(太大)의 명을 가지고 역사상에 나타난 자가 김유신, 연개소문, 성길사한(칭기스칸) 3인이니,
비록 문명과 야만(文野-문야)의 구별(別-별)과 활동 범위의 대소는 현격하게 다르나(현수-懸殊)
각기 일시 동양 정치무대상의 대괴물이니 또한 일종의 아름다운 이야기(佳話-가화)라 할지로다.
5) 동명이자(同名異字)의 호증(互證)이니,
:다른 이름으로 된 글자(異名字-이명자)에서 음과 뜻과 연혁으로써 그 같은 이름(同名-동명)됨을 발견
하여 이두문을 해석하는 방법이니,
전술한 모든 명사가 거의 동일한 명사를 서로 다른(互異-호이)한 자(字)로 쓴 것이지만,
그 가운데 가장 복잡한 자가 두 가지니,
하나는 “라”이다.
사라(沙羅)가 사량(沙良)이 되기도 하며, 가슬라(加瑟羅)가 가서량(加西良)도 되며,
평양(平壤)이 平穰(평양), 평나(平那), 백아(百牙), 낙랑(樂浪), 낙량(樂良) 등도 되며,
대량(大良)이 대야(大耶)도 되고,
가라(加羅)가 가락(駕洛), 가야(加耶), 구야(狗邪), 가량(加良) 등도 되며,
안라(安羅)가 안아(安邪)도 되며, 매라(邁羅)가 매로(邁盧)도 되며,
신라(新羅)가 사로(斯羅)도 되며,
순나 연나(順那 涓那) 등이 순노 연노(順奴涓奴) 혹 순루 연루(順婁 涓婁) 등도 되어
갈피를 잡을 수 없으나
사실(기실)은“羅(라) 良(량) 盧(로) 奴(노) 婁(루) 那(나) 牙(아) 壤(양) 耶(야) 邪(아)”등이
모두 “라”로 읽을 수 있는 것(者-자)이니
“라”는 川(천: 내, 강)의 뜻이라.
삼국사기에“故國壤一名故國川(고국양 일명 고국천)”이 양(壤) 등이“라”됨을 증명하며,
“素那一名金川(소나 일명 금천)”이 나(那) 등의 “라”됨을 증하며,
“沸流奴一名沸流川(비류노 일명 비류천)”이 노(奴) 등의 “라”됨을 증하니라.
“穰(양) 壤(양)” 등의 글자가 어찌 “라”가 되느뇨.
훈민정음에 “ㅿ如穰字初發聲(ㅿ은 穰-양 자(字)의 처음 나오는 소리와 같다)”이라하니
ㅿ은 이제 소멸된 음이나
노걸대(老乞大), 박통사 언해(朴通事諺解) 등의 책에 북경말(北京話-북경화)의 일(日: 북경화의 발음으로는 '르'임)을 ㅿ로 발음하였은즉,
ㅿ은 즉 ㄹ에 비슷한 것(者-자)이다.
穰(양) 자(字)의 전성(全聲- 전체 음)이 ‘랑’에 비슷한 “ㅿㅏㅇ”인 고로
이두문에 펴라(‘펴ㅿㅏㅇ’라 씀이 옳으나 'ㅿㅏㅇ'이 소멸된 자(字)인 고로“라”로 대신함)란
물 이름(물)을 쓸새,
음으로 써서 平壤(평양), 平穰(평양), 百牙(백아) 등이 되며,
윗 글자(上字- 상자)는 뜻으로, 아래 글자(下字- 하자)는 음으로 써서 樂浪(낙랑), 樂良(낙량) 등이 되며,
윗 글자(上字- 상자)는 음으로, 아래 글자(下字- 하자)는 뜻으로 써서 浿河(패하), 浿江(패강), 浿水(패수)
등이 됨이니,
속어에 平壤笠(평양립: 평양 삿갓)을 “펴랑이”라 함을 보아도
平壤(평양)을 이두문에 “펴라”로 읽음(讀-독)이 명백하니라.
평양(平壤)이나 패수(浿水)가 동일한 “펴라”이면
“펴라”가 어찌 물 이름(水名-수명)이 되는 동시에 또 땅 이름(地名-지명)이 되겠느뇨.
공주의 “버드새”가 물 이름(수명-水名)이지만, 그 수변(水邊- 물가)의 역명(驛名)도 “버드새”요,
청주의 “까치내”가 수명이지만 그 수변(水邊)의 촌명(村名)도 “까치내”니,
삼국지에 “고구려 사람들은 나라를 세울 때 큰 물가에 세워 살기를 좋아 한다
(句麗作國好傍大水而居)”라 한 바,
수변(水邊- 물가)에 나라를 세움(作國)은 조선인(朝鮮人) 고래(古來: 옛부터 내려오는)의 습속이다.
그러므로 羅(라), 良(량), 盧(로), 奴(노) 등 모든 “라”의 지명(地名)이 있게 된 것이며,
나라(國家)의 명칭이 나루(津渡-진도)에서 비롯됨(始- 시)이니라.
평양(平壤)과 패수(浿水)가 이와 같이 갈리지 못할 관계가 있거늘,
순암(順菴- 안정복) 선생은 패수는 대동강으로 잡고서 위만의 평양을 그 오백리 이외의
한양(서울)에 와서 구하며,
백조고길(白鳥庫吉)은 평양을 지금의 평양으로 잡고서 위만이 건넌 패수를 압록강 하반부라 하였으니,
이는 다 “펴라”란 이름이 이두문의 평양(平壤), 패수(浿水) 등 됨을 모른 까닭이라.
두번째는 “불”이니,
삼한의 비리(卑離)와 백제의 부리(夫里)와, 동부여, 북부여, 졸본부여, 사비부여(泗沘扶餘) 등의 부여(扶餘)와,
추화(推火), 음즙화(音汁火) 등의 화(火)와, 불내성(不耐城)의 불(不)과,
사벌(沙伐), 서라벌(徐羅伐) 등의 벌(伐)이 다 “불”로 읽을(讀-독할) 것(者-자)이니,
불은 평지(平地)의 뜻이요, 도회(都會)의 뜻이다.
청나라 건륭황제의 흠정만주원류고에 삼한의 비리(卑離)를 곧 청조 관명(淸朝 官名)의
패리(貝勤)와 같은 것(者-자)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이를 백제의 지리지와 대조하면
모로비리(牟盧卑離)는 모량부리(毛良夫里)요, 피비리(辟卑離)는 파부리(波夫里)요,
여래비리(如來卑離)는 이릉부리(爾陵夫里)요, 감해비리(監奚卑離)는 고막부리(古莫夫里)니,
비리(卑離)는 국명이요 관명이 아니니, 그 상세는 졸저 전후삼한고에 보이니라.
이상은 곧 복잡한 다른 이름으로 된 글자(異名字-이명자)에서 음과 뜻과 연혁으로써 그 같은 이름(同名-동명)
됨을 발견한 자니, 조선고사의 연구에 비상한 도움이 있는 것(者-자)이니라.
6) 이신동명(異身同名)의 분증(分證)이니,
: 글자의 같고 다름을 불문하고 이름이 같은 것(異身同名-이신동명)을 분석하여 이두문을 해석하는 방법
이니,
전술한 同名異字(동명이자-이름이 같으나 글자가 다른 것)는 “라”와 “불” 등 보통명사에 관하여 같은
이름(同名-동명)이 다른 글자(異字-이자)로 쓰인 것을 논술한 바이어니와,
여기에서는 고유명사 가운데 글자(字-자)의 같고 다름(同異-동이)은 불문하고 이름(名-명)이 동일한 것을
논증하려 한다.
예를 들면,
동사강목 지리고에 대동열수(大同列水), 한강열수(漢江列水)의 따짐(辨-변)이 있으며,
송화압록(松花鴨綠), 요하압록(遼河鴨綠), 지금 압록(今 鴨綠- 금 압록)의 다툼(爭-쟁)이 있으나,
사실(기실)은 맞다(是-시라) 하면 모두 맞는(皆是-개시) 것이요,
틀리다(非-비)라 하면 모두 틀린(皆非-개비)것이니,
조선 고어(古語)에 긴 것(長-장)을 “아리”라 하였으니
장백산 옛 이름(古名-고명)인 아이민상견(阿爾民商堅)의 “아이”가 이를 증명하며,
압(鴨: 오리)도“아리”라 하였으니, 압수(鴨水) 일명 아리수(阿利水)가 이를 증명하는 것(者-자)이다.
대개 옛 사람(古人-고인)이 일체의 장강(長江-긴 강)을 “아리가람”이라 칭하니라.
한자를 수입하여 이두문을 만들어 쓸 때에 “아리(오리)”의 음을 취하여
아리수(阿利水), 오열강(烏列江:오리강), 구려하(句麗河:구리하), 욱리하(郁里河: 우리하) 등으로 썼으니,
“리”의 “ㅇ+아래 아”가 “아”, “오”, “우”의 사이 소리(간음-間音)인 고로
아(阿), 오(烏), 구(句), 욱(郁) 등 각종 음을 취함(取音-취음)이 같지 않음이요,
뜻으로 써서 압자하(鴨子河) 혹은 압록강(鴨綠江)이라 함이니
압록(鴨綠)도 소지(炤智)의 이두와 같이“ㅇ+ 아래 아, 리(아리)”의 “ㅇ+ 아래 아”를“鴨(아리: 오리)”의
뜻에서 취하고,
“아리(오리)”의 “리”를 록(綠)의 음에서 취함이니,
조선족분포의 순서를 따라 리가람이 이름을 얻은 순서(先後-선후)를 추상해본다.
제1차에 완달산(完達山) 아래 하얼빈(哈爾賓)에 조선을 건설하고
송화강(松花江)을 “ㅇ+ 아래 아, 리가람”이라 하였으니
이상국집 동명왕편 주(註)에 인용(引-인)한 고기(古記)의 유화왕후가 가리킨
“웅심산 아래 압록수(熊心山下鴨綠水)”와
요사(遼史) 성종본기의“압자하의 이름을 고쳐 혼동강이라고 하였다(改鴨子河爲混同江)”가
송화(松花)의 옛 이름(古名-고명)이 “ㅇ+ 아래 아리(오리)”임을 증명하며,
제2차에 남하하여 요하(遼河)를 보고는 또한 “ㅇ+ 아래 아리가람”이라 하였으니,
삼국사기 지리지의 “요동성의 본명은 오열홀이다(遼東城本名烏列忽)”와 삼국유사의 “요하는 일명 압록
이다(遼河一名鴨綠)”이 요동하(遼東河)의 옛 이름이“ㅇ+ 아래 아리(오리)”임을 증명하고,
제3차에 동쪽으로 나아가(東進-동진) 현재 압록강을 보고 또한“ㅇ+ 아래 아리가람”이라 하였나니
지금까지 변치 않은 압록의 이름(名-명)이 그 옛 이름(古名-고명)은“리”임을 증명하며,
제4차에 서쪽으로 진출(西出-서출)하여 영평부(永平部)의 난하(灤河)를 보고 또한“아리가람”이라 하였
으니 영평부지(永平部志)의 욱렬하(郁列河: 우리하), 무열하(武列河)가
난하의 옛 이름(古名-고명)이“ㅇ+ 아래 아리(오리)”임을 증명하고,
제5차에 경기도의 한강을 보고 또한 “ㅇ+ 아래 아리가람”이라 하였으니
온조 본기의 위례성과 광개강토호태왕의 비문의“아리수를 건었다(渡阿利水)”와
개로왕 본기의 욱리하(郁里河)가 한강의 옛 이름(古名-고명)이“ㅇ+ 아래 아리”임을 증명하며
제6차에 경상도에 이르러(至-지) 낙동강을 보고 또한“ㅇ+ 아래 아리가람”이라 하였으니,
신라 지리지의 아시량(阿尸良)과 일본서기의 아례진(阿禮津)이
낙동의 옛 이름(古名-고명)이“ㅇ+ 아래 아리”임을 증명하니라.
열수(列水), 렬수(烈水) 등은 중국인이 오열수(烏列水), 욱열수(郁列水) 등을 줄여서(略-약하여) 쓴 것(者-자)
이니, 모든 열수가 곧 모든 압록강이요 모든 압록강이 곧 모든 열수니,
시대와 경우를 따라 위치를 구별함은 옳거니와(可-가하거니와),
만일 열수를 한 개를 만들며, 압록강을 한 개를 만들려 함은 어리석은 상상(癡想-치상)에 불과하니라.
산해경이 비록 후세 사람(후인)이 쓰고 백익(伯益)이 쓴 것처럼 한 서적(書-서)이나
사마천 사기에 산해경을 언급(설급)하였은즉, 중국의 진, 한(秦,漢) 이전의 서적(書-서)됨은 명백한 바,
그중의 “조선은 열양 동쪽, 바다 북쪽, 산 남쪽에 있는데, 열양은 연에 속한다
(朝鮮在列陽東海北山南列陽屬燕)”는 문장(文-문)을 가지고
선배 유학자(先儒-선유)들이 열(列)은 한수(漢水-한수: 한강)요
양(陽)은 강북(水北-수북)의 뜻이요, 조선은 지금 평양이라 하여
朝鮮在列陽(조선은 열양에 있다)을 한구(一句)로 읽었으니,
그러면 列陽屬燕(열양은 연에 속한다)을 어떻게 해석할까?
列陽(열양)의 陽(양)은 平壤(평양)의 뜻과 같이 水(물)의 뜻이요 초성을 읽어 “라”로 발음할 것(者-자)이니,
중국인이 당시 조선인이 쓰는 이두문의 오열양(烏列陽), 혹은 욱열양(郁列陽)을 줄여(略-약하여)
열양(列陽)이라 쓴 것(者-자)이다.
그러므로, 朝鮮在列陽東(조선은 열양 동쪽에 있다)가 한 구(一句)이고,
海北(바다 북쪽)이 한 구(一句)이며,
山南(산 남쪽)이 한 구(一句)이고,
列陽屬燕(열양은 연에 속한다)이 한 개의 구(句)니
위의 열양(列陽)은 곧 영평부의 난하(灤河)를 가리킨 자요,
조선은 광녕 평양(廣寧 平壤) 혹은 해성 평양(海城 平壤)을 가리킨 자요,
海北(해북)은 발해의 북을 가리킴이요,
山南(산남)은 무려(無閭: 의무려산)의 남을 가리킴이니,
이것이 대개 진개가 쳐들어 온(秦開入寇 - 진개입구) 이후의 기록이므로
列陽屬燕(열양은 연에 속한다)이라 함이니라.
관야정(關野貞:일본인)의 조선고적도설 해설 점제비(朝鮮古蹟圖說解說 黏蟬碑) 주(註)에
그 비의 발견에 의하여 역래 논쟁(歷來爭論)이 되던 열수는 대동강이 됨이 옳다(可하다) 하였으나,
이는 반드시 한서 지리지의
“列水西至黏蟬入海(열수는 서쪽으로 점선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를 근거함 일지나,
그러나 이는
(1) 열수의 다수(多數-수가 많음)됨과
(2) 한서 주(註)의 안사고(顔師古)등의 위증이 있음을 모른 말이라.
(2)에 속한 논변은 졸저 “평양 패수고”와 “전후 삼한고”에 보이니라.
나의 친구 모군(余友某君-여우모군)이 압록(鴨綠)의 鴨은 음이“압”이니 앞(前-전)의 뜻이요,
압록(鴨綠)의 옛 칭호(古號-고호)인 마자(馬訾)의 馬는 음이 “마”니
南(남: 남의 고어는 '마'이다. 그래서 남풍을 마파람이라고 함)의 뜻이요,
송화강의 옛 칭호(古號-고호)인 粟末(속말)의 粟은 음이“속”이니,
안(裡-뜻은 속, 음은 리)의 뜻이라 하였다.
압록의 “압”은 잘못 이해(오해)한 것이나 그 나머지는 거의 이치에 가깝다(近理-근리).
송화강은 만주어에“송아리”라 하니“송아리”는 “속아리"의 변화일지니,
"속아리"는 “나라 안(國裡-국리)”의 “아리”란 뜻일지며,
압록의 일명이 매하(梅河)이니 매(梅)가 마자(馬訾)의 마(馬)와 비슷하니
나라의 남쪽(國南-국남)의 장강(長江)인 고로 “마아리”라 함이며,
난하(灤河), 요하(遼河), 한수(漢水) 등의 구별한 명사는 찾을 수 없으나
모두 “아리(뜻은 오리)”로 하고 그 앞에 구별의 말이 있었을지니라.
고대에는 지명뿐 아니라 인명도 부자 조손(父子 祖孫- 아버지와 아들, 할아버지와 손자)이 같이 짓고,
세대(世代) 혹 대•소 등 글자(字-자)를 그 앞(上-상)에 씌워(冠-관하여) 구별하였다.
그런데 김부식이 신라에 두(兩-양) 유리왕(儒理王)이 있음을 의아(疑-의)하게 여겨
그 하나(其一: 기일)는 례(禮)자로 고친다(改-개)고 명확하게 말했으며
(그래서 신라에는 유리 이사금과 유례 이사금이 있음),
백제에 두(兩-양) 개루왕(蓋婁王)을 의아(疑-의)하게 생각하여 그 하나(其一: 기일)는
개로왕(蓋鹵王)으로 하였으나,
이는 다 주공(周公), 공자(孔子)의 휘법(諱法: 높은 사람의 이름 쓰기를 피하는 법)이
수입된 뒤의 안목으로 옛 역사(古史-고사)를 읽은(讀-독한) 까닭이다.
여조(麗朝: 고려조, 고려시대) 초년까지도 그 유풍이 있었으므로
안동권씨의 족보에 의거(據-의)하면 권태사(權太師: 금나라 시조)의 이름이 행(幸)이요,
그 아들의 이름이 인행(仁幸)이니라.
이 따위 관계를 모르고 옛 역사(古史-고사)를 연구하면 마침내 장님(맹인)이 밤길 가는 것 처럼 되느니라.
이상의 서술한 바는 곧 졸견으로 얻은 바 옛 역사상(古史上- 고사상)의 이두문으로 쓴 명사의 해석법이다.
이 따위 해석에서 얻는 사학적 연구상의 효과를 간략하게 펼처 보이리라(略陣-약진하리라).
1)
앞 사람(前人-전인)이 이미 증명한 것(者-자)을 더욱 확실(堅確-견확)하게 함이니 마치 함창(咸昌)이
고령가야(古寧加耶)임은 앞 사람(前人-전인)의 설(說)도 있지만,
이제 야(耶), 라(羅)가 같은 음(同音-동음)인 줄을 발견하여
고령가야를 고링가라로 읽(讀-독)는 동시에
함창(咸昌) 공갈못의 공갈이 곧 고링가라의 줄인 음(축음)임을 알지며,
따라서 고링가라의 위치가 더욱 명백할지니라.
2)
유래의 의문을 명확하게 답(明答-명답)할 수 있으니, 마치 고려사 지리지에 익산의 무강(武康)왕릉을 기준
(箕準)의 능으로 기재(載-재)하고,
“사람들은 말통대왕 능이라고 부른다(俗號末通大王陵)”이라 주(註)를 달고
“또 이르기를 백제 무왕의 아이 때 이름은 서동이다(一云百濟武王小名薯童)”이라고 두번째 주(再註)를 달아
두 설을 같이 실었으나(양설을 병존하였으나),
삼국유사에 서동이 신라 진평왕의 딸(女) 선화를 꾀어 장가들은(유취-誘娶한) 사실을 기록(記-기)하였으며,
동국 여지승람에는 무강왕이 선화부인과 미륵산성을 지을새(作-작 할새)
진평왕이 수많은 공인(百工-백공)을 보내 도왔다 하니(助-조 하였다 하니)
서(薯)의 뜻은“마”니 서동(薯童)은 곧“마동(童)”이요, 말통(末通)은 곧 '마동'의 음을 취한 것 인즉
(취음인즉),
무강왕은 곧 백제 본기의 무왕(武王)인 장(璋)이라. 장(璋)의 시호(諡-시)가 무강(武康)왕 이어늘
잔결한(殘缺: 부스러져 빠진 게 많은) 백제사에서 강(康)이 빠졌으며(궐하며: 원래는 무강왕인데 강을 빼고
무왕이라고 했다는 말),
장(璋)의 왕후가 선화요, 미륵산성은 장(璋)과 선화의 연애를 노래하던 옛 터(유지-遺址)이거늘
사가(史家)의 참고가 정밀하지 못하여(부정-不精하여) 8백세의 연령이나 차이가 있는 격세(隔世- 세월의
사이가 뜬)의 왕인 기준(箕準)의 궁인(宮人)으로 인식하여(認-인하여)
유냉재(柳冷齋)같은 박식한 학자(박학자)로도 그 익산의 회고시(懷古詩)에
“가엽구나 정신없이 배타고 떠나면서(可惜蒼黃浮海日)”, “뱃머리에 선화부인은 태웠구나(船頭猶載善花嬪)”
라고 하는 웃음거리(笑話-소화)를 남겼다.
3)
앞 사람(前人-전인)이 위증한 것(者-자)을 교정할 수 있으니, 역옹패설에 신라 진흥대왕이 벽골제(속칭
김제만경-金堤萬頃 외밤이들)를 짓고 벼(도-稻)를 파종(種-종)하므로
후세 사람(후인)이 그 은덕을 생각하여 벼(稻-도)를 나록(羅祿: 나락)이라 하다 하였으나,
나록(羅祿: 나락)의 풀이(解-해)도 고린 한문쟁이((漢文쟁이)의 해석이어니와,
완산(完山)에 그친 진흥(眞興)의 족적이 어찌 김제의 벽골제에 가서 벼(稻-도)를 파종(種-종)하리요.
백제 지리지에 의거하면 벽골(碧骨)은 곧 김제의 옛 이름(古號-고호)요 백제의 군(郡)이니,
벽골(碧骨)은 베골(稻邑-도읍)이니 백제가 이 제방(堤-제)를 쌓아 논(稻田-도전)을 만들고(作-작하고)
그 이익이 대단히 많음(多大-다대함)을 기념하여 “베골”이란 군 이름(郡名-군명)을 냄이 명백하다.
백제본기에 논(稻田-도전)을 기록(記-기)한 것(者-자)이 둘이니,
하나는 다루왕 6년의 "논을 만들기 시작하였다(始作稻田-시작 도전)"가 그것(是-시)이요
두번째는 고이왕 9년의 "남택에 논을 개간하였다(開稻田於南澤)"가 바로 그것(是-시)이니
벽골은 곧 두번째에 속한 남택의 논(稻田-도전)이 될지니라.
4)
이전 사서(前史-전사)에 두찬(杜撰: 근거나 출처가 확실하지 않은 문자를 쓰거나 오류가 많음)을 타파할
수 있으니
삼국사기에 석탈해는 금궤(金櫝-금독)에서 탈출한 고로 이름을 탈해라 하고, 까치 울음(작명-鵲鳴)의 상서
로움(瑞-서)이 있었으므로
작(鵲: 까치)자(字) 좌변의 昔(석)을 빌려(차-借하여) 성을 석씨(昔氏)라 하였다 하며,
동사회통에 고주몽은 나라안의 모든 사람(거국)이 높이 우러러 보았기 때문에(고앙-高仰한 고로) 성을 고씨
(高氏)라 하였다 하며,
문헌비고에 여수기(余守己)가 단군의 9부 군장이 되어 많은 사람(중인-衆人)이 붙으므로(부-附)
중인변(衆人邊)을 더하여(加-가하여) 서씨(徐氏)가 되었다 하여, 각종의 괴설이 분분하나,
그러나 삼국 중엽 이전에는 인명(人), 지명(地), 관명(官) 등 각종의 명사를 모두 우리말로 짓고 이두문
으로 쓴 것이니, 어디 이 같은 한자 파자(漢字 破字)의 괴벽스러운 습속(벽습-僻習)이 있었으랴.
이따위 파자(破字)가 여조(麗朝- 고려조, 고려시대) 중엽에 성행하여
황규(黃葵:노란 해바라기)가 황규(皇揆: 황제의 법, 황제의 신하)가 되고,
계명성(鷄鳴聲: 닭울음-꼬끼오)이 고귀위(高貴位: 높고 귀한 지위)가 되고,
無古之那(무고지나: 탈없이 편히 지냄)가 無古之難(무고지난:오래지속된 어려움이 없어짐)이 되고
身負三椽(신부삼연: 몸에 세개의 서까래를 지다)이 王(왕)자가 된다는 등등의 설(等說-등설)이
고려사에 보인 것(者-자)이 허다한 바,
이 시대의 이 습관을 잘 아는 문사들이 고기(古記)를 수습하다가 말로 지은 명사를 한자의 뜻으로 풀어
(解-해하여) 옛 역사(古史-고사)의 면목을 더럽히고 손상함(汚損-오손함)이 적지 아니하니라.
이두문적 명사의 해석이 이와 같이 옛 역사(古史-고사) 연구에 유익하나,
그러나 반드시 독단을 피함이 옳으니(可-가하니),
예하면 연개소문의 蘇文(소문)은 '신'으로 읽음(讀-독함)이 옳으나(가하나)
을지문덕의 文德(문덕)은 '묵'인지 '묻'인지 '무드'인지 알 수 없음은
전자(前者)는 삼국사기의 그 본주(本註)의 일명 개금(一名蓋金)이 그 해석을 전하거니와,
후자(後者)는 그 해석을 잃어버린(失-실한) 까닭이라.
고자미동(古資彌凍)의 고자(古資)는 구지(半島)로 읽음이 옳으나(讀-독함이 可-가하나),
마리미동(彌難彌凍)의 마리(彌難)는 '밀'인지 '미리'인지 '머리'인지 알 수 없음은
전자(前者- 앞에 것)는 고자군(古自郡: 田城-전성의 古號-고호: 옛 호칭)의 지형과 역사의 연혁이
그 설명을 주거니와(與-여하거니와) 후자는 그 증거가 없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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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본출처: 조선사연구초(인터넷 판 - 위키문헌)
http://ko.wikisource.org/wiki/%EC%A1%B0%EC%84%A0%EC%82%AC_%EC%97%B0%EA%B5%AC_%EC%B4%88
2) 참고문헌: 조선상고문화사(외), 비봉출판사, 2008년판
* 조선사 연구 초(朝鮮史硏究草), <저자: 신채호>
가. 고사상(古史上) 이두문 명사 해석법
나. 삼국사기(三國史記) 중 동서(東西) 양자(兩字)의 상환(相換) 고증(考證)
다.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라. 평양 패수고
마. 전후 삼한고(前後 三韓考)
바. 조선역사상 일(一)천년래 제일 대사건
(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