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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반성이론으로서의 윤리학- 루만의 도덕이론에 대하여*
장 춘 익**
[논문개요]
루만은 윤리학에게 도덕에 관한 도덕적 이론이 아니라 좋은/나쁜 혹은 선/악 구
별을 ‘하나의’ 구별로 다루는 도덕의 반성이론이 되라고 주문한다. 루만은 윤리학이
그런 반성이론이 될 때 비로소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 한편으로 도덕을 대변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사회의 요구를 도덕에게 번역해주는 일을 맡을 수 있을 것이
라고 여긴다. 루만이 보기에 윤리학의 그러한 변화는 이미 등장했어야 하는 것이
다. 하지만 근대사회로의 이행기에 윤리학이 도덕의 정초 문제로 방향을 설정함으
로써 사회구조와 의미론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는 일종의 지적 지체현상이 생겨났
다. 루만이 보기에 윤리학은 너무 오랫동안 도덕과 자신을 구분하지 못한 채 자신
의 사명을 도덕에 근거를 제공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 까닭에 윤리학은 사회구조
의 변화들에 반응하긴 하면서도 동시에 많은 반성의 가능성들을 놓쳤다. 이 과정을
재구성해서 보여줌으로써 윤리학에게 도덕의 정초이론이 아니라 반성이론이 되라고
촉구하는 것이 윤리학과 관련된 루만의 작업의 핵심이다. 본 논문은 루만의 다층적
인 논지를 정확히 살펴보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는다. 부수적으로 국내의 선행연구
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루만의 주요 논지 가운데 오해된 부분과 제대로 조
* 이 논문은 2009학년도 한림대학교 교비 학술연구비(HRF-2009-002)에 의하여
연구되었다. 2012년 8월 윤리학회에서 이 논문에 대해 논평을 해준 이철, 정원
규 교수에게, 그리고 결정적인 오류를 지적해서 수정의 기회를 준 익명의 심사자
에게 감사드린다.
** 한림대 철학과
162 사회와 철학 제24집
명되지 않은 부분을 지적할 것이다.
주제분류: 사회철학
주 제 어: 도덕이론, 도덕사회학, 윤리학, 도덕의 반성이론, 루만,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
“도덕은 감염성이 아주 강한 대상이라서 장갑을 끼고 소독이 잘 된 도구들을 가
지고 건드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덕을 다루는 자가) 스스로를 도덕으로 감염
시키고 학문적으로 시작한 것을 도덕적으로 사용되게 할 수 있다.”1)
1. 들어가는 말
루만은 윤리학에게 도덕에 관한 도덕적 이론이 아니라 좋은/나쁜 혹은
선/악 구별을 여러 구별 가운데 하나의 구별로 다루는 도덕의 반성이론이
되라고 주문한다. 도덕의 반성이론으로서의 윤리학에게도 도덕은 여전히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점에서 윤리학은 도덕을 하나의 사회적 사실
로만 다루는 도덕사회학과는 다르다. 하지만 윤리학은 도덕이 적정하게 문
1) N. Luhmann, “Ethik als Reflexionstheorie der Moral”, in: N. Luhmann,
Gesellschaftsstruktur und Semantik, 제3권, 359쪽. 도덕 문제를 다루는
루만의 주요 글로는 이 외에도 “Soziologie der Moral”(1978), Soziale
Systeme(1984), Paradigm lost: Über die ethische Reflexion der Moral
(1989),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1997), 그리고 사후에 편집된
Die Moral der Gesellschaft(2008) 등이 있다. 이 글들은 내용이 상당부분
중첩되는데, 하지만 이런저런 차이점을 보이기도 한다. 나의 판단으로는 “Ethik
als Reflexionstheorie der Moral”에서 루만의 도덕이론이 가장 발전된 형태
를 보여주며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후속논의를 유발하는 데 유리할 것이라
는 판단에, 나는 주로 이 글에 집중해서 루만의 도덕이론을 검토하고자 한다.
도덕의 반성이론으로서의 윤리학(장춘익) 163
제되는 영역에서만 우선적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을 함께 파악한다는 점에
서는 도덕 자체와도 다르다. 루만은 윤리학이 그런 반성이론이 될 때 비로
소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 한편으로 도덕을 대변하면서 다른 한편으
로 사회의 요구를 도덕에게 번역해주는 일을 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다.2) 루만이 보기에 윤리학의 그러한 변화는 이미 등장했어야 하는 것이
다. 하지만 근대사회로의 이행기에, 구유럽적 전통의 도덕적 확실성은 흔
들리고 아직 새로운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분명하게 인식될 수 없었던 시
기에, 윤리학이 도덕의 정초 문제로 방향을 설정함으로써 사회구조와 의미
론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는 일종의 지적 지체현상이 생겨났다. 루만이 보
기에 윤리학은 너무 오랫동안 도덕과 자신을 구분하지 못한 채 자신의 사
명을 도덕에 근거를 제공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 까닭에 윤리학은 사회
구조의 변화들에 반응하긴 하면서도 동시에 많은 반성의 가능성들을 놓쳤
다. 이 과정을 재구성해서 보여줌으로써 윤리학에게 도덕의 정초이론이 아
니라 반성이론이 되라고 촉구하는 것이 윤리학과 관련된 루만의 작업의 핵
심이다.
이 글은 매우 다층적인 루만의 도덕이론을 정확히 규명해서 루만의 도
덕이론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는
다. 이를 위해 나는 먼저 루만이 도덕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살피고(2절).
그 다음에는 루만이 자신의 방법론에 따라 윤리학적 의미론들을 재구성하
는 방식을 살펴볼 것이다(3절), 마지막에는 루만의 도덕이론과 관련된 국
내의 선행연구 두 편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루만의 논지들 가운데 오해
되거나 혹은 중요함에도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부분들을 지적할 것이다(4
절).
2) 같은 책, 371쪽 참고.
164 사회와 철학 제24집
2.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도덕
2.1. 존중/무시의 표현으로서의 도덕
루만은 도덕을 “인간적 존중 혹은 무시를 표현하는” “특수한 종류의 커뮤니
케이션”으로 규정한다.3) 일견 평범해 보이는 도덕에 대한 이 규정을 루만은
도덕에 감염되지 않은4) 자신의 용어들을 사용해 복잡한 형상으로 번역해낸
다. 이런 번역 작업은 거꾸로 루만의 이론적 도구들의 견실성을 테스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도덕처럼 중요한 사회적 현상을 제대로 다룰 수 없다면 사
회이론을 세우는 도구로서 적합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5)
루만은 우선 인격과 존중 개념을 철저하게 커뮤니케이션과 연관시켜서
규정한다. 루만이 말하는 인격은 커뮤니케이션 전에 이미 뚜렷한 경계와
실체적 내용을 가진 주체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기대가 향해지
고 행위가 귀속됨으로써 성립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자체로는 경계
와 내용이 다소 모호한 어떤 행태가 시작과 끝이 있고 그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으로 규정됨으로써 행위가 되고, 그 행위의 귀속지점이 인
격이 되는 것이다. 인격은 기대들이 모아진 것, “기대의 꼴라쥬”6)이다.7)
3) 같은 책, 361쪽
4) 물론 보는 이에 따라서 루만의 용어들은 다른 방식으로 감염되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하버마스는 루만의 체계이론에서 메타생물학의 모습을 본
다. J. Habermas, Der philosophische Diskurs der Moderne, 430쪽 참
고(이진우 역,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428쪽 참고. 이진우는 ‘Metabiologie’
를 ‘초생물학’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5) 실제로 자신의 도덕사회학을 처음으로 상세하게 제시하는 문헌에서 루만은 다
른 이론들의 위치를 지정하는 최상이론Supertheorie에 대한 설명으로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N. Luhmann, “Soziologie der Moral”, 9쪽 이하 참고.
6) N. Luhmann, Soziale Systeme, 178쪽. 이 책의 한글 번역본이 있으나 재
번역에 대한 기대가 팽배해 있기에 번역본 쪽수는 표기하지 않는다.
7) 이렇게 행위와 인격이 모두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귀속을 통해 성립하는 것으
도덕의 반성이론으로서의 윤리학(장춘익) 165
존중은 타아가 사회적 관계를 지속해가는 데 전제되어야 할 기대들에
부응한다고 여기는 것으로, 무시는 그 반대의 경우로 파악된다.8) 그러니
까 루만은 도덕을 커뮤니케이션의 근본 문제인 이중 우연성 - 자아나 타
아 모두 자신의 선택을 상대의 선택에 따라 선택하려는 태도 - 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해법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보통은 타아가 자아로부터 제
안된 의미를 수용한다는 것은 비개연적인 일이다.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이
‘예’와 마찬가지로 ‘아니요’의 가능성을 동등하게 열어놓는 데다가, 다른
할 일도 많을 타아를 자아와의 커뮤니케이션에 집중시키는 것 자체가 어
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은 자아와 타아를 존중/무시 표현을 통해 일
반화된 기대에 구속시킴으로써 의미제안 수용의 비개연성을 개연성으로
바꾼다.
이때 존중/무시는 인격 전체에 향해진다. 어떤 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
은 곧 그 행위가 귀속되는 인격 전체에 대한 판단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도덕적인 판단은 개별적인 공로나 특수한 능력에 향해지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후자의 비중이 커지게 되면 도덕의 중요성은 감소할 수 있다. 물
론 도덕의 중요성을 고수하려면 후자의 중요성을 도덕의 하위에 두는 전략
을 구사해야 할 것이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다른 것은 볼 것도 없
다는 식으로 말이다. 인격 전체에 대한 존중/무시라는 도덕의 이러한 특징
은 전통사회, 특히 신분사회에서의 도덕의 중요성을 파악하는 열쇠가 된
다. 개인이 특정 가계나 신분, 단체에 인격 전체로서 속하거나 혹은 그렇
지 않는 상황에서, 인격 전체에 대한 판단으로서의 도덕은 사회에 개인이
포함되는 방식을 규제하는 기능을 맡기 때문이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루만이 도덕을 존중/무시의 표현 그 자체와 동일
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존중/무시가 - 명시적으로 알려져 있든 그렇지
않든, 텍스트 형식을 갖추었든 그렇지 않든 - 다소 일반화된 조건에 결부
로 보기 때문에 루만의 사회이론에서는 행위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이 기본 개
념이다. 그래서 그는 커뮤니케이션 행위라는 애매한 개념 조합도 피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N. Luhmann, Soziale Systeme, 191쪽 이하 참고.
8) N. Luhmann, Soziale Systeme, 318쪽.
166 사회와 철학 제24집
되어 표시될 때만 루만은 도덕이라고 한다.9) 존중/무시의 표현이라는 도
덕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지만, 그런 표현의 조건들은 사회구조의 변화와
함께 달라질 수 있다. 도덕사회학은 존중/무시 표현의 조건을 하나의 변수
로 보고 이 변수가 다른 변수들, 특히 사회구조의 변화와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지를 탐색하는 것이다.
2.2. 도덕의 구조적 특징으로서의 대칭성
존중/무시 표현의 조건은 자아/타아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다른 사람
을 도덕적으로 칭찬하거나 비난하는 자는 같은 기준을 자신에게도 적용해
야 한다. 도덕적 판단에서 자기를 예외로 하는 것은 금지된다. 이 점에서
도덕은 종교와 구별된다. 좀 길지만, 도덕의 대칭성과 종교의 비대칭성을
재치있게 대비시키는 구절을 인용해둔다.
도덕은 항상 대칭화된 의미이다. 도덕은 자기예외의 금지 아래서 작동한
다. 도덕을 요구하는 자는 도덕이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도 적용되게 해
야 한다. 예외는 언제나 그렇듯이 신이다. 도덕적 명령에 대한 종교적 정초
는 도덕의 이런 구성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종교적 정초는 자기 자신도 똑
같이 도덕 아래 두지는 않음으로써 자신의 비밀을 보존한다. 종교적 정초는
비대칭성으로부터 출발한다. 간음한 자는 돌로 쳐서 처벌한다는 법칙을 수정
할 때 예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문서를 통해서, 그리고 새로운
규칙을 통해서 그렇게 한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 규칙은 세워지기는 하지만, 그러나 커뮤니케이션에서 벗어
난다. 이 규칙은 “우리 가운데 …”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했다면 예수 자
9) 그래서 루만은 도덕을 개인과 개인 간의 상호침투와 개인과 사회 간의 상호침
투가 서로를 조건으로 하는 관계로, 두 상호침투가 조정된 것으로, 관계들의
관계로 나타내기도 한다. Soziale Systeme, 318쪽 참고. 이 점을 잘 지적한
국내 문헌으로는 이철, 기능 분화 사회의 도덕 연구를 위한 윤리학과 도덕 사
회학: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학적 도덕 이론을 중심으로 , 7쪽 참고.
도덕의 반성이론으로서의 윤리학(장춘익) 167
신이 제일 먼저 돌을 던졌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10)
대칭성이라는 특징은 종교와 비교할 때만이 아니라 성취의 영역과 비교
할 때도 도덕의 두드러진 특징에 속한다. 보통 성취의 영역에서는 대칭성
이 요구되지 않는다. 해당 전문영역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가령 스포츠 선
수만큼 기량을 발휘해야 한다든가 의사만큼 질병을 치료할 수 있어야 한다
고 스스로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성취의 영역에서 비대칭성의 확대는 오히
려 종종 환영된다. 사람들은 스포츠 스타에 열광하고 최고의 의사를 찾는
다. 성취영역에서는 비대칭성이 문제되지 않기 때문에 전문화, 역량의 상
승, 영역의 분화와 독립이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다. 비대칭성
이 문제되었다면 선수/관객, 의사/환자 관계를 기초로 하는 스포츠체계나
의료체계는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칭성은 커뮤니케이션을 활성화시키는 요인이다. 그 점에서 도덕은 비
밀에 의지하고 특정한 것에 관해 커뮤니케이션을 금지하는 종교와 결정적
으로 다르다.11) 하지만 곧 살펴보게 될 것처럼 대칭성은 도덕의 여러 문
제점, 특히 분쟁적 성격의 한 원인이기도 하다.
2.3. 도덕의 분쟁적 성격
존중/무시 표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의 상대이며 그런
한에서 커뮤니케이션체계로서의 사회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뜻한다. 루만
의 표현으로 하자면 도덕은 포함/배제를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포함을 규
제한다.12) 그렇다면 무시는 커뮤니케이션을 계속할 수 없는 자와 커뮤니
케이션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음을 뜻한다. 이렇게 함께 커뮤니케이
션할 수 없는 자를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 도덕에 열성과 절박함을 부여하
10) N. Luhmann,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242쪽.
11) 앞의 책, 230쪽 이하 참고.
12) 루만에게 ‘배제’란 차별적 대우가 아니라 아예 커뮤니케이션 상대자가 되지 못
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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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데, 루만은 도덕이 배제 불가능성에 대한 보상을 경멸에서 찾는다고 한
다. 배제할 수는 없고 오로지 평가할 수 있을 따름이기에, 격렬하게 평가하
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만은 도덕이 분쟁적 성격polemogene
Natur을 갖는다고 말한다. .
도덕이 분쟁적 성격을 갖게 되는 다른 하나의 원인은 도덕의 대칭적 성
격에 있다. 타인에게 존중/무시를 표현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존중/무
시 문제가 함께 걸려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어떤 사안과 관련하여 도
덕적 입장을 표명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이는 곧 자신에 대한 무
시로 해석된다. 그래서 도덕적 이견이 생기면 사소한 사안이더라도 물러서
기 어렵다. 또 문제는 언제나 상대편에 있다고 여겨지기에, 상대편의 저항
은 더 격렬한 평가의 계기가 된다. 그래서 목동들의 사소한 싸움이 초원
전체에 불을 지르는 사건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도덕코드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 서로에게 다시 적용되는 것, 그리고
도덕코드의 상징적 일반화는 극적인 결과를 낳는다. 한편으로 도덕적 요구들
을 규율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그렇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또한 그 요구
들이 일단 정해지고 난 후 그것들이 대변될 때의 고집스러움과 철두철미함
과 관련해서 그러하며, 그 요구들 사이의 갈등의 불가피성과 관련해서 그렇
다.13)
루만은 이런 분쟁적 성격을 도덕의 아주 중요한 문제로 여긴다. 그가 보
기에 종래의 윤리학의 한계도 바로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도덕적 선을 뒷받침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던
탓에, 도덕적 선을 추구할 때 생기는 문제는 다룰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도덕의 하나의 문제, 아니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해보자. 윤리학
은 여기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전체적으로 보자면, 이 문제를 고의
13)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246쪽.
도덕의 반성이론으로서의 윤리학(장춘익) 169
적으로 무시하진 않았다 하더라도 건너뛰었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윤
리학은, 일단 외전(外傳)들을 고려하지 않기로 한다면, 적어도 지배적인 조
류에서는 도덕과 연대했다. 윤리학은 자신의 과제를 도덕을 위해, 그리고 그
와 함께 자기 자신을 위해 좋은 근거를 마련하는 것으로 보았다. 등장하는
모든 의심은 정초와 관련된 의심으로 변모되었다.14)
2.4. 도덕의 자기지시성과 역설, 그리고 맹점
루만은 ‘자기지시’란 개념을 여러 의미로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그와 관련
된 논의는 피하고 도덕과 관련된 의미만 다루기로 하자. 도덕의 자기지시성
이란 도덕적 커뮤니케이션이 다시 도덕적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말한다. 가령 선의 기준으로 어떤 것이 제시되었을 때, 다시금 그것이 선한
것인지 물을 수 있다. 더 복잡하게 만들어보면, 선한 것으로 통용되는 어떤
행동을 선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에 대해 다시금 그런 평가가 선한 것인지
물어볼 수도 있다. 도덕의 이러한 자기지시성은 도덕을 역설에 처하게 한다.
도덕적 선으로 규정된 것이 선이 아닐 수도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도덕이 역설에 처하게 되면 도덕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선을 선이라
고 믿고 악을 악이라고 믿어야 자아와 타아가 존중/무시의 표현을 통해 서
로를 구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만은 이런 역설을 완전히 제거될
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루만은 역설의 ‘전개’에서, 즉 역설
을 보이지 않게 만들거나 혹은 극복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식으로 잠정
적으로 역설을 해소하는 데에서, 도덕의 발전의 내생적 요인을 본다. 가령
도덕을 신이나 자연, 본성으로부터 온 것으로 설정하는 것은 자기지시성을
차단해서 역설을 보이지 않게 하는 전략이다. 역설을 비가시화하는 그러한
전략들이 설득력을 상실한 후, 도덕을 이성이 스스로 내리는 명령으로, 혹
은 도덕감정이나 심리학적, 인간학적 사실들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 역시 역설을 전개하는 또 다른 전략들이다. 앞으로 살펴볼 것
14) “Ethik als Reflexionstheorie der Moral”, 370-371쪽.
170 사회와 철학 제24집
처럼, 도덕과 관련된 루만의 주관심사는 도덕의 변화를 사회구조의 변화와
연관짓는 지식사회학적인 것이지만, 이렇게 도덕발전의 내생적 요인을 고
려한다는 점에서는 보통의 지식사회학과 거리를 취한다. 아니, 루만은 최
종적으로는 내생적 요인에 더 비중을 둔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외생적
요인들은 도덕으로 하여금 자기지시와 역설의 문제에 맞닥뜨리게 하고, 도
덕은 그때마다 역설의 전개를 통해 자신을 변형해나간다는 식으로 그의 도
덕사회학 논의가 전개되기 때문이다.15)
이번에는 루만이 자신의 구별이론을 어떻게 도덕에 적용하는지 짧게 살
펴보자. 루만에 따르면 관찰은 하나의 구별을 사용해서 구별의 한 쪽 면을
표시하고 다른 쪽 면은 미표시 상태로 두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표시된 것
에 대하여 미표시 상태의 것은 다른 것들 혹은 배경이 된다. 물론 미표시
상태의 것이 표시 상태로 전환될 수 있는데, 그러면 다시금 그렇게 표시된
것 외의 다른 것들이 미표시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하나의 구별을
사용하는 관찰에서 그 구별 자체는 관찰될 수 없다. 관찰에서 사용되는 구
별 자체는, 그리고 그 구별을 사용하는 관찰자는 그 관찰에서는 관찰될 수
없는 지점으로, 관찰의 맹점으로 남는다.
루만은 관찰의 맹점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스스로 맹점이 없는
것 같은 외양을 띠는 보편주의조차도 어떤 “적소(適所)”로부터 주장되는
것이고,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여러 보편주의가 성립한다. 그렇다고 맹점
이 관찰될 수 없는 것은 아닌데, 다만 다른 구별을 사용하는 다른 관찰을
통해서만, 소위 이차 관찰을 통해서만 그렇다. 일차 관찰자 자신이 이차
관찰자로 전환할 수 있긴 한데, 그런 경우를 루만은 반성Reflexion이라고
한다. 루만이 윤리학더러 도덕의 반성이론이 되라고 할 때는 바로 도덕이
사용하는 구별 자체를 관찰하라는 주문이다.
구별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관찰되면, 그 구별은 우연적이고 비교될
15) 사실 내생적 요인을 중시하는 루만의 이러한 파악은 도덕에만 한정되지 않는
다. 루만은 ‘이념들의 진화’ 전체에 대해서 같은 방식으로 접근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덕의 반성이론으로서의 윤리학(장춘익) 171
수 있는 것으로 된다. 그러면 그 구별이 적정하게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이
무엇인지, 그리고 다른 구별을 사용해 같은 기능을 충족할 수 있는지도 탐
색해볼 수 있다. 루만이 윤리학더러 선/악 구별을 하나의 구별로 관찰하라
는 것은 이러한 주문이다.
3. 도덕 의미론의 변화와 사회구조적 배경
3.1. 도덕과 사회구조
루만의 도덕사회학이 도덕은 사회를 반영한다는 식의 단순한 주장에 그
치는 것이라면 흥미로울 것이 없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루만은
도덕이 자기지시와 역설이라는 자체의 논리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통해 발전해나가는 측면을 인정한다. 다만 루만은 존중/무시 표현의 조건
이 장기적으로는 사회구조와 무관하게 갈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긴다. 사회
구조와 너무 거리가 멀 경우 존중/무시의 조건이 신빙성을 가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회구조의 변화는 도덕에 바로 반영되지는 않
더라도 어떤 혼란을 야기할 것이고, 특히 아주 근본적인 사회구조의 변화
는 결국 도덕의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도덕
에 대한 관찰에서 내생적 요인과 외생적 요인을 함께 고려하는 자신의 방
식을 루만은 ‘변수’ 개념을 통해 표현한다. 존중/무시의 조건을 하나의 변
수로 보고 그 변수를 사회구조와 연관해서 살펴본다는 것이다. 존중/무시
의 조건들이 어떻게 사회구조를 반영하고 또 사회구조의 변화와 함께 열린
반성의 기회를 윤리학이 어떻게 활용하거나 혹은 차단하는지를 살피는 것
인데, 내가 보기에는 이것이 도덕과 관련된 루만의 작업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 일면을 간략히 살펴보자.16)
16) 3절의 내용은 상당 부분 “Ethik als Reflexionstheorie der Moral”을 정리
172 사회와 철학 제24집
3.2. 구유럽의 윤리학
루만이 말하는 구유럽이란 그리스시대로부터 근대 이전까지의 유럽을
말한다. 루만은 구유럽 시기에 형성된 윤리학의 기본틀이 근대사회에 들어
와 크게 동요를 겪지만 도덕에 대한 반성이론으로까지 나가지는 못했다고
진단한다. 그 과정을 재구성해보임으로써 루만은 이미 일어났어야 하는 윤
리학의 전환을 촉구한다.
그리스에서 윤리학은 처음에 도덕의 정초로 시작되지 않았다. 아리스토
텔레스는 인간이 그저 선을 추구하고 악을 회피한다고 말한다. 에토스 개
념은 상류층이 충족시켜야 할 특별한 자질(남성성, 관철력, 용기, 관용
등)을 부각시키는 데 사용되었고, 그 점에서 사회의 분화유형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었다.17) 당시의 사회는 일차적으로 도시/농촌(혹은 폴리스/오
이코스, 중심/주변) 구별에 따라, 그리고 이차적으로 귀족/평민 구별에 따
라 분화된 사회였다. 그러니까 에토스 개념은 사회에 속하되 본래적 의미
에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비해 특정한 자질을 칭송하는 데 쓰였다.
“노예선 선원들의 에토스에 대한 얘기는 없었다.”18)
그런데 칭송은 타락의 가능성이 있을 때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제
덕과 함께 타락의 가능성도 설명할 것이 요구되는데, 루만은 이를 도덕 자
체에 대해 반성을 하게 할 수도 있었을 첫 번째 계기로 본다.
하지만 타락의 가능성은 악이 선/악 코드의 한 쪽 면이라는 반성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한 반성 대신 인간이 완전성을 향해 가는 존재라는
설명이 자리를 잡는다. 이 믿음은 우주론의 뒷받침을 받는다. 자연 자체
가, 인간을 포함한 우주 전체가 완전성을 향해가는 규범적인 존재로 파악
되고, 사회는 우주의 일부로, 인간은 사회의 일부로 역시 완전성을 향해가
는 존재라는 것이다. 전체/부분이라는 도식이 인간과 사회, 인간과 우주,
한 것이다.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일부는 인용표시를 하지 않았다.
17) “Ethik als Reflexionstheorie der Moral”, 375쪽.
18) 같은 곳.
도덕의 반성이론으로서의 윤리학(장춘익) 173
사회와 우주 사이의 관계에 적용된다. 그래서 윤리학, 경제학, 정치학이라
는 특수 개념들이 성립하였어도 도덕코드 자체에 대한 반성으론 이어지지
못했다. 개별 인간은 가계의 부분이며 가계는 다시 정치적 사회의 부분으
로 여겨지고, 그래서 세 학문의 차이가 일종의 도덕과학을 통해 결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덕은 - 그 자체는 우주의 일부인 - 사회의 일부인 인간
의 본성에 합당한 것인데, 다만 악은 인간이 완전성을 향해 가는 도정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 악은 사라질 존재로
여겨짐으로써 선/악의 구별이 존재/비존재의 구별과 합쳐지는, 도덕의 존
재론화도 진행되었다.
중세에는 이런 견해가 신학에 의해 뒷받침되는데 이를 루만은 아리스토
텔레스주의와 창조신학의 신성동맹이라고 부른다. 타락 가능성 문제는 나
중에 도덕에서 신학의 문제로 옮겨져, 전능한 신이 어떻게 악의 존재를 허
용하는가 하는 문제로 변환된다. 인간학 역시 이런 흐름에 보조를 맞춘다.
가령 도덕적 잘못은 영혼이 신체에 구속되어서, 혹은 무지와 오류 때문인
것으로 설명된다. 그러면 도덕교육은 신체의존적인 정념을 순화시키거나
무지, 오류와의 싸움이 된다.
도덕적 구별이 그 자체로 반성되지 못한다는 것은 또한 도덕적 구별을
사용하는 관찰자도 관찰의 맹점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구유
럽의 윤리학은 도덕에 대해 관찰하면서 하나의 이성, 하나의 철학을 상정
하였고, 이것은 다시금 하나의 도덕을 상정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관찰자
를 주제화할 때는 선/악을 구별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선 혹은 악의 편에
선 자로서 분리되어 주제화되었다. 루만이 보기에 하나의 이성, 하나의
철학을 상정하는 것은 도전받지 않는 중심이나 정점이 있었던 시기의 산물
이다. 하나의 이성, 하나의 철학은 스스로는 관찰하고 판단하면서 자신의
관찰과 판단은 다른 사람들의 관찰과 판단에 노출시키지 않을 수 있는 지
점에서 주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덕 자체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될 수 있었을 두 번째 문제는 역설이
다. 선의 추구가 나쁜 결과로, 악의 회피가 더 나쁜 악으로 이어지는 것은
종종 일어나는 일로서 경험적으로 부정하기 어렵다. 도덕의 이런 역설 역
174 사회와 철학 제24집
시 도덕적 구별이 하나의 구별이고 그 외에 다른 구별이 필요함을 보여주
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윤리학은 이를 중용 내지는 신중함의
문제로 회피해간다. 너무 고지식하게 선을 고집하고 악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해서 최선을 얻도록 하라는 것이다. 결
국 선/악을 조절하는 것이 선이라는 것으로, 루만은 이를 도덕코드에 다시
도덕코드를 적용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역설을 보다 진지하게 대했던 것은 수사학이다. 수사학은 사람들이 선으
로 믿고 있는 것이 그렇지 않을 가능성을, 또 악으로 여기는 것이 그 반대
일 가능성을 아주 진지하게 고려한다. 그런 점에서 수사학은 도덕과 어떤
거리두기를 시도한 셈이다. 그러나 수사학은 덕을 칭송하고 악덕을 비난한
다는 윤리학의 기본 틀을 건드리지는 않는다. 무엇이 덕이고 무엇이 악덕
인지의 물음에서 여유를 만듦으로써 수사학은 사실상 윤리학의 부담을 더
는 역할을 하였다. 수사학과 윤리학은 일종의 분업 관계에 있었으며 둘 다
우주와 사회와 개인의 근본적인 도덕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루만의
표현으로 하자면, 둘 다 중용을, 극단의 회피를 노래하였다.19)
루만은 전통적 도덕의 이런 구조가 이런저런 동요에도 불구하고 근대사
회로의 이행기까지 유지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근대사회에서 일어난 윤리
학의 변형은 새로운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전통적 윤리
학을 바탕으로 방향을 제시해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사회
의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과도기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여긴다.
3.3. 근대의 윤리학
루만은 16세기에 이르러 전통적 도덕의 확실성이 흔들리게 되었다고 한
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여러 가지 우연들, 가령 신앙분열, 종교내전, 아메
리카 발견, 세계관의 확대, 경제적, 정치적 관계의 확대, 고대 회의(懷疑)
의 재발견, 특히 인쇄 등을 원인으로 거론할 수 있을 텐데, 루만은 그런
19) 같은 책, 389쪽.
도덕의 반성이론으로서의 윤리학(장춘익) 175
모든 것들에 의해 유발된 사회의 복잡성의 증가에 주목한다. 사회의 복잡
성 증가란 커뮤니케이션의 양과 연결 가능성이 확대되는 것을 뜻한다. 이
런 여건에서는 하나의 도덕으로 의견을 공고히 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합의를 전제하기보다 이견을 가정하고, 도덕적 화합보다는 도덕적 다툼으
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현실적이게 된다. 이제 도덕을 상대화해서 관습으로
여기는 시각이 점차 두드러지고 관습들의 기술(記述), ‘도덕의 기술’이 윤
리학의 관심 대상이 된다. 또 규범적 자연이나 불변의 질서가 아니라 자기
를 주장하는 개인이 중요한 주제가 된다.20)
이런 변화는 도덕 자체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을 텐데, 루만
은 그 첫 번째 계기를 17세기에 도덕의 동기와 관련되어 제기된 논의에서
본다. 신학적 세계관도, 그리고 자연, 사회, 인간이 하나의 연속체를 이룬
다는 믿음도 무너지면서 선을 신의 마음에 들기 위하여 행한다든가 도덕이
인간의 본성에 합당한 것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게 된다. 이제 도덕과 관
련하여 목적과 동기가 구별되는데, 가령 선이 그 자체로 추구되는 것인지
아니면 명성을 얻고 비난을 피하기 위해 추구되는 것인지 묻는다. 그러나
이러한 심리학적 물음은 도덕코드의 우연성과 제한성을 살펴보는 데로 넘
어가지 못한다. 도덕이 좋은 사회를 위해 필수적이라는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고, 심리학적 물음은 신학과 우주론의 뒷받침이 사라진 여건에서 개인
의 내적 태도를 통해 도덕을 확실하게 하려는 노력으로 수렴되었다. 같은
시기에 도덕의 커뮤니케이션 측면이, 특히 대화에서 도덕 문제에 대해 유
연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중시되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도덕의 지지점을
개인에게서 찾으려는 것이었을 뿐 도덕코드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루만이 보기에 주권국가의 성립 역시 도덕코드 자체에 대해 반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종교교파들의 다툼의 결과 종교의 자유가 성립
하고 가치문제에서 자의적 선택이 가능해지는데, 국가는 이로부터 귀결되
는 사회적 문제들을 법을 통해 규제하면서 국가에만 예외적 지위를 인정하
20) 같은 책, 391쪽 참고.
176 사회와 철학 제24집
는 식으로 해법을 찾는다. 그러나 이때 사회는 여전히 도덕적 공동체로 이
해되었고 국가의 사명은 그런 사회를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사회적인 것
das Soziale과 구별될 수 있는 도덕 개념이 성립하지 않았고, 그러다 보
니 사회적인 것 모두가 도덕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게 된다.
종교, 법, 도덕의 코드가 분화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은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18세기에는 윤리학의 중요한 변화가 생겨난다. 루만은 그 변화의 계기
를 도덕의 역설과 사회적인 것의 자기지시성이 의식된 것으로 본다. 먼저
역설은 나쁜 의도가 좋은 결과로 혹은 좋은 의도가 나쁜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말한다. 맨더빌의 꿀벌우화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각각의 예를
제공한다.21)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이 역설마
저 도덕코드 자체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지지 못했는데, 가령 진정한/표면
적인 같은 구별을 덕에 적용하여 진정한 덕과 표면적인 덕을 구별하는 식
으로 역설에 대처해갔다. 많은 문헌들이 이런 식으로 도덕적 역설을 해소
하고 비가시화하려고 하였는데, 하지만 루만이 보기에 그것은 “도덕에 감
염된” 반성이었다.22)
사회적인 것의 자기지시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자아는 타아의 타아로,
타아는 자아의 타아로 여겨지면 실질적으로 자아와 타아의 구체적인 내용
은 문제되지 않는다. 자아와 타아의 관계는 두 블랙박스의 관계가 된다.
그러면 윤리적 관점은 구체적인 자아나 타아의 관점으로부터 얻을 수 없
다. 도덕은 하나의 창발적 수준을 형성하고, 도덕이란 사회적인 것의 자기
제한, 즉 사회 안에서 사회적인 것에 관해 가해지는 제한이 된다. 이제 도
덕과 관련하여 자아와 타아의 관점을 넘어서는 새로운 객관성이 필요한데,
루만은 칸트의 윤리학이나 공리주의를 그에 대해 학문적 대답을 제공하려
는 시도로 본다.23) 두 윤리학 모두, 법칙의 형식으로든 계산의 형식으로
21) 같은 책, 408-409쪽 참고.
22) 같은 책, 409쪽.
23) 같은 책, 413쪽.
도덕의 반성이론으로서의 윤리학(장춘익) 177
든, 보편적으로 실행될 수 있는 규칙을 찾으려고 한다.
그런데 루만은 두 입장의 차이보다는 공통성에 더 주목한다. 우선 두 윤
리학 모두 사회적인 것의 자기지시성에 반응하는 것이면서도 그 자기지시
성을 끊으려고 한다. 칸트에서는 선험성이, 그리고 공리주의에서는 결과가
더 이상 물음을 제기할 수 없는 도덕적 타당성의 기준이 된다. 또 두 윤리
학 모두 도덕적 역설을, 즉 선의 추구가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고 나쁜
의도가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문제를 직시하지 않는다. 칸트는 결
과를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음으로써, 반대로 공리주의는 의도를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음으로써 그렇게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두 윤리학 모두 사람들이 도덕에 의지해서 서로를 대하
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지 않는다. 두 윤리학 모두 도덕코드 전체를
반성의 대상으로 삼지 못하기 때문이다.
3.4. 도덕의 기능의 변화
계층적 분화와 중심/주변 분화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던 시기에, 개인
들은 다기능적 기본제도, 특히 가계 혹은 그것의 기능적 등가물(수도원,
대학)들을 통해 사회 안에서 확고한 자리를 가졌다. 이때 도덕은 출신과
정착된 행동의 기준에 따라 존중과 무시를 배분함으로써 포함을 규제하는
일을 하였다.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로 넘어가면서 이 조건이 상실된다.
포함은 기능체계들에 대한 자유롭고 가능한 한 평등한 접근의 문제가 된
다. 경제체계에, 법체계에, 정치체계에, 교육체계에, 그 외의 다른 기능체
계들에게 차별 없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인격 전체를
겨냥하는 도덕의 포함 기능은 공허해진다.
루만은 중세말기와 근세초기의 도덕적 갈등의 격렬함은 오히려 도덕의
포함 기능이 공허해졌다는 자신의 명제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여긴다. 사람
들은 새로운 포함 문제들(새로운 상업적 부, 하류층의 구원 문제, 제국으
로부터 독립적인 도시들과 영토국가들의 문제)을 도덕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성공할 수 없었고 그래서 도덕적 통일성이 아니라 도덕적
178 사회와 철학 제24집
으로 자극된 갈등들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루만은 이 시기 도덕의 요란한
자기주장을 도덕이 ‘공회전’하는 소리로 보는 것이다.
새로운 포함 문제들을 도덕을 통해 해결하려는 시도들의 한계는 숱한 갈
등에도 불구하고 직시되지 않는데, 루만이 보기에 이것은 도덕적 갈등의 고
유한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도덕적 갈등에서 잘못은 언제나 다른 편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도덕 자체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루만이 보기에 법체계의 독립분화는 도덕코드 자체에 대해 반성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도덕과 법의 분화가 점차 자리
잡으면서 심지어 도덕적 열망을 가진 자들 사이에도 평화가 가능해졌다.
법에 의해 도덕코드에 대한 제한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사
회구조적 안정성의 원리는 여전히 인식되지 못했다. 방향을 모르는 시기에
사람들은 도덕에 기초해서 완전성을 향해가는 인간들의 사회를 세운다는
과거의 발상을 거울로 삼았다. 18세기에 도덕이 그 어느 때 보다 칭송되
었던 것에서 루만은 윤리학의 위대함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변화를 따라잡
지 못해서 생긴 과도함을 본다.
그런데 도덕코드에 대한 반성이 왜 어려웠을까? 원칙적으로 모든 코드와
관련해서 그 코드의 두 값에 제한됨으로써 배제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물
음을 제기할 수 있다. 기능체계들의 코드들과 관련해서는 이 물음이 비교적
쉽게 제기된다. 기능체계들의 경계가 비교적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각 기능체계들의 코드들은 특정 기능체계를 긍정하고 다른 모든 코드들을 거
부Rejektion함으로써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도덕은 하나의 특정한
기능체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선/악이라는 코드가 있긴 하지만 코드값을 배
분하는 확고한 프로그램도 없고 화폐나 진리처럼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매체
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덕은 기능체계들처럼 자신의 주 구별은 받아들
이고 다른 주 구별들은 거부하는 식으로 자기주장을 하면서도 동시에 자기를
제한하는 게임에 참여하려 하지 않는다. 윤리학도 이런 도덕과 자신을 구별
하지 못한다. “윤리학은 도덕이 무조건적으로 타당하다고 속삭인다.”24)
24) 같은 책, 421쪽.
도덕의 반성이론으로서의 윤리학(장춘익) 179
루만이 보기에 근대사회에서 도덕코드의 지배적 위상이 무너졌다는 것
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이 도덕이 사이비종교처럼 되었다든가
참석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에서만 문제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또 부
도덕한 사회가 되었다는 말도 아니다. 단일 맥락을 가정하고 종교와 같은
것을 통해 그런 가정을 뒷받침할 수 없는 여건에서 과거처럼 사회의 통합
기능을 맡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도덕화는 종교 자신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사회의
통합을 이루지 못한다. 선/악의 코드가 사용되지만, 말하자면 공회전하는 셈
이다. 선이나 악의 가치를 할당할 때 따를 기준에 대한 합의가 없다 … 어떤
행동이 긍정적으로 내지 부정적으로 판정되어야 할지를 규제하는 프로그램
이 더 이상 종교를 통해서 규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을 대체할 것이 나오지
도 않았다. 도덕적 커뮤니케이션은 아직도 사회를 위해서 말한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하지만 다맥락적 세계에서 그것은 한 목소리로 일어날 수 없다.
이것이 도덕을 희생으로 하여 부도덕이 증가한다는 말은 아니다. 도덕이 고
수했던 형식들을 거부할 좋은 도덕적 근거들이 항상 다시금 있다는 말이
다.25)
그러면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 도덕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루만은 기능체계들 안에서 도덕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도덕이 더이상 사회의 메타코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기능체계들의 구조적 조건들에 따라 작용한다는 것이
다. “박테리아가 몸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듯이” 도덕도 기능체계들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한다.26)
가령 스포츠에서 승/패라는 코드는 존중/무시 또는 선/악이라는 도덕코
드 아래서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도덕코드는 스포츠의 코드 자체에 대
25)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248쪽.
26) “Ethik als Reflexionstheorie der Moral”, 431쪽.
180 사회와 철학 제24집
한 존중, 그리고 스포츠 규칙의 존중, 기타 규칙화되지 않은 행동조건들의
준수와 상관있다. 그래서 금지약물 사용처럼 스포츠 코드 자체를 건드리는
식의 위반은 격렬하게 비난받는다. 과학체계에서 데이터 조작이, 그리고
법체계에서 법관매수가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것도 같은 방식으로 설명된
다. 루만은 이를 다음과 같은 가설로 요약한다. “기능코드들이 ‘비가시적’
방식으로 위반될 수 있는 곳에서, 그래서 신뢰에 의존하는 곳에서는 어디
에서나 다시 도덕에 호소한다.”27) 하지만 루만은 곧바로 이로부터 기능체
계들 자체가 도덕에 의존해 있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오히려 반대로 도덕이라는 유동적 매체는 기능체계들이 어떤 기능을 부여
할 수 있는 곳에서만 뚜렷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3.5. 도덕에 대한 반성
앞에서 살펴본 바처럼, 루만은 윤리학에게 선의 편에 서려고만 하지 말고
도덕의 선악코드 자체에 대해 반성하라고 촉구한다. 그렇다면 도덕코드 자
체에 대한 반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인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루만이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놓고 있진 않다. 윤리학을 자신의 과제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래의 윤리학이 제대로 조명하 못한 문제
들을 지적하는 대목들에서 그의 생각의 단면을 엿볼 수 있기는 하다.
첫째, 도덕이 도덕코드에서 배제된 제3항을 어떻게 처리하였는지에 주
목한다. 배제된 제3항은 가령 도덕코드를 바탕으로 선 혹은 악 측으로 결
정할 가능성을 갖지 못한 자들이 될 것이다. 루만에 따르면 도덕은 배제된
제3항을 다시 도덕 코드로 끌어들여, 그들을 도덕무능력자로 규정하고 감
시, 낙인, 감금, 치료, 재교육 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을 무도덕 혹은 비도
덕의 영역을 인정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아니라 ‘억압’하는 식으로 해서 구
별의 맹점을 피해간 것이다. 도덕코드의 보편적 적용으로 생기는 문제는
코드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선악을 배분하는 프로그램의 문제로 여겨졌고,
27) 같은 책, 432쪽.
도덕의 반성이론으로서의 윤리학(장춘익) 181
프로그램의 개선을 통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되었다. 도덕코
드 자체에 대한 반성은 무도덕 혹은 비도덕 영역을 보다 수월하게 인정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둘째, 자유에 대한 도덕의 양가적 관계에 주목한다. 오랫동안 윤리학은
자유를 도덕적 판단의 전제로 여겼다. 자유롭게 선택한 행동만이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만은 이 견해를
수정할 것을 제안한다. 루만에 따르면 커뮤니케이션은 ‘예’와 ‘아니요’의 선
택지를 열어놓는데, 그래서 자유는 커뮤니케이션의 전제가 아니라 결과다.
도덕적 커뮤니케이션도 기본적으로 수용과 거부의 가능성을 열어놓기에,
자유는 도덕의 전제가 아니라 결과다. 다만 도덕적 커뮤니케이션은 커뮤니
케이션을 통해 열린 자유를 하나의 방향으로만 사용되도록 유도함으로써,
내지는 거부의 가능성을 최소화함으로써 다시 제한하려고 한다. 윤리학은
자유에 대한 도덕의 이런 양가적 관계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자유를 제한
하려는 시도가 기대의 자발적 수용이라는 선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억압수
단이 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기 때문이다.
셋째, 개별 인격에게 행위를 귀속시키는 도덕의 특성이 가진 이면에 주
의한다. 도덕적 책임자를 찾는 것은 문제를 단순화하고 구조를 은폐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가족과 조직에서 그렇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의심이 든다. 개별 인격에 책임을 귀속시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상황정의를 수월하게 하는데 쓰이거나, 혹은 좀 더 심하게 말
하자면, 책임을 묻는 자 자신이 관여되어 있고 이해관심을 가지고 있는 구조
들을 은폐하는 데 쓰일 수 있다.28)
루만은 이런 의심을 사회에 대한 도덕적 요구로까지 확대한다. 분명 전
통사회에서보다 근대사회에서 개인들의 가능성이 늘었는데, 하지만 실망의
정도도 커졌다. 루만은 사람들이 이 격차를 도덕 문제로 만들어, 자신이
28) 같은 책, 441쪽.
182 사회와 철학 제24집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행위자인 것처럼 사회를 비난하는 것은 문제를
잘못 파악하는 것이라고 본다. 심리적 체계들에 가령 자기실현과 같은 과
도한 부담을 지우고 그런 부담이 개인들의 실망으로 표출되는 근대사회의
구조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도덕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루만은 도덕이 사회와 인간의 관계를 파악하는 문제에서 자신의
한계를 직시해야 하며 윤리학적 반성은 도덕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
야 한다고 여긴다.
4. ‘문명화된 윤리학’으로서의 도덕의 반성이론
4.1. ‘책임윤리’ 대 ‘문명화된 윤리’
루만이 윤리학더러 도덕의 반성이론이 되라고 촉구하지만, 그러나 도덕
사회학이 되라고 촉구하는 것은 아니다. 루만이 원하는 것은 윤리학이 사
회이론의 몇 가지 중요한 통찰을 수용해서 스스로를 변모시키라는 것이다.
루만은 자신의 사회이론에 의거해서 도덕 사회학과 윤리학이 다음의 네
가지 사항에 대해 서로 양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첫째, 이차 관찰자의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도덕적 담론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관찰하는지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둘
째, 이차 관찰자는 관찰되는 관찰자가 접근할 수 없는 구별들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니까 관찰되는 것이 관찰자 자신의 도식을 구속하지 않는다. 셋
째, (악이 아니라) 도덕에 경종을 울릴 수도 있을 것이다. 넷째, 도덕의
정초가 역설로 이어진다는 것, 즉 필연성을 추구하지만 우연성의 산출로
귀결된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래서 도덕의 정초를 단념하고 도덕에 대한
관찰로 방향을 전환한다.29)
29) 같은 책, 446쪽 참고.
도덕의 반성이론으로서의 윤리학(장춘익) 183
이러한 공통의 인식이 분명 중요하지만, 그러나 이를 대하는 방식에서
도덕 사회학과 윤리학은 같지 않다고 한다. 도덕 사회학은 도덕적 커뮤니
케이션을 비교하는 것에 자신을 제한하지 않고 보다 추상적인 이론적 관
심을 추구한다. 이에 반해 윤리학은 도덕적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들에 대
해 고찰하면서 동시에 도덕에 어떤 기여를 하고자 한다. 이때 도덕에 기
여한다는 것은 전통적인 윤리학처럼 단순히 선의 편에 선다는 것이 아니
다. 도덕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도덕이 적합하게 적용
될 수 있는 영역들을 구체화함으로써 도덕이 잘 기능할 수 있게 하는 것
이다.
논의를 조금 확대해서, 루만이 일반적으로 ‘반성이론’으로 무엇을 말하는
지를 살펴보면 도덕 사회학과 도덕의 반성이론으로서의 윤리학의 차이를
보다 뚜렷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루만에게 반성이란 체계/환경 구별이
체계 안에서 체계의 구별로 등장하는 경우를 말한다. 체계/환경 구별이 지
속적으로 사용됨으로써 체계가 형성되는데, 그런 체계/환경 구별이 체계
자신의 구별로 인지되는 경우인 것이다.30) 이것을 루만은 구별이 구별된
것 속으로 ‘재진입’하는 것이라고도 표현한다. 이런 재진입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체계/환경 구별이 ‘하나의’ 구별로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구별로 된다는 것은 세계를 절개하는 다른 구별들이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
는 것을 뜻한다. 그렇지만 반성 단계에 이른 체계에게도 자신의 체계/환경
구별은 ‘자신에게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그 구별을 버린다면 더 이상 그
체계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구별들이 있고 다른 체계
들이 있음을 인지하기 때문에, 자신의 작동이 (다른 체계들을 포함한) 환
경에 일으키는 교란을 살펴가면서 자신의 작동을 수행해나간다는 것이 반
성이 가져오는 차이일 뿐이다. 그리고 반성이론이란 그러한 반성이 이론의
형태를 갖춘 것을 말한다. 경제학, 정치학, 과학이론 등은 반성이론의 사
례들이다.31) 도덕의 반성이론으로서의 윤리학은 기본적으로 기능체계들의
30) N. Luhmann, Soziale Systeme, 601-602쪽 참고.
31) 기능체계들의 반성이론에 대해서는 N. Luhmann, Die Gesellschaft der
184 사회와 철학 제24집
반성이론들과 같은 위상을 갖는다. 그러니까 자신에게는 도덕의 구별이 가
장 중요하지만, 그러나 다른 체계들과 다른 반성이론들에서는 다른 구별들
이 가장 중요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는 것이다. 사회에서 도덕을 대변하
면서 도덕에게 사회의 요구를 번역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도덕의 반성이론으로서의 윤리학은 소위 ‘책임윤리’와 같지 않다. 책임윤
리 역시 도덕(‘신념윤리’)의 분쟁적 성격과 역설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문제의 해결이라기보다는 회피라고 할 수
있다. 루만은 그런 책임윤리와 구별해서 도덕의 반성이론으로서의 윤리학
을 - 아마도 슈펭글러에서 차용한 듯한 - ‘문명화된 윤리학’이란 다소 과도
한 표현으로 칭한다.
다소 ‘비겁한’ 윤리학은 문제를 회피하면서 결정하는 사람들에게 문제를
떠넘긴다. 그렇게 하면 자기 자신은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것으로 구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명화된 윤리학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체계를 개관하면서 도덕의 유의미한 적용영역들을 구체화하고 도덕코드
와 법코드의 분화의 귀결을 포착하려고 하는 윤리학이 그것이다. 그러면 윤
리학은 도덕의 기대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위치들과 제도들에 대
해서도 배려해야 할 것이다.32)
여기까지 와서 보면, 루만이 말하는 ‘문명화된 윤리학’은 ‘포괄적 교의들
comprehensive doctrines’ 사이의 ‘중첩적 합의’를 제안하는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나 법적 토의와 도덕적 토의를 구분하는 하버마스의 ‘토의이론’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전혀 다른 접근법들로부터 일
견 유사한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지만 이 물음
을 다루는 것은 다른 기회로 미루어야겠다. 이 글은 일단 루만이 말하는
도덕의 반성이론으로서의 윤리학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밝히는 것을
Gesellschaft, 제5장, 9절(958쪽 이하)을 참고.
32) “Ethik als Reflexionstheorie der Moral", 436쪽.
도덕의 반성이론으로서의 윤리학(장춘익) 185
목표로 하고 있다. 다음에서는 나는 루만의 도덕이론을 다룬 국내 문헌 두
가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논의를 마무리하고자 한다.33)
4.2. 국내 문헌에 대한 비판적 검토
루만의 도덕이론을 본격적으로 다룬 국내 문헌으로는 서영조의 루만의
‘사회학적 도덕 이론’과 그 도덕철학적 의미 34)와 이철의 기능 분화 사회
의 도덕 연구를 위한 윤리학과 도덕 사회학: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학적 도
덕 이론을 중심으로 35)를 들 수 있다.
국내의 윤리학자들이 거의 접근할 수 없었던 루만의 도덕이론을 체계적
으로 정리하고 전달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것도 국내에 루만에 대한 선
행연구가 빈약한 여건에서 그렇게 했다는 점에서, 두 사회과학자의 공로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두 논문 모두에서 몇 가지 아쉬운 점
도 발견했다.
첫째, 도덕 사회학과 도덕의 반성이론으로서의 윤리학을 제대로 구별
하고 있지 않다. 가령 서영조는 “도덕의 성찰이론으로서의 윤리학은 인
간행위의 보편규범을 찾고자 하는 도덕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
라, 선과 악의 코드로서의 윤리학의 보편성을 회복하는 데 있다”36)고
하는데 문장의 전반부는 맞지만 후반부는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한편 이철은 “도덕의 성찰 이론은 올바르고 가치 있는 것을 논리
적으로 입증함으로써 도덕의 근거를 마련하려는 도덕의 논증 이론과 달
리, 보편적 윤리 규범에 따라 도덕을 성찰하고 건설적으로 발전시키고자
33) 유감스럽게도 루만의 도덕이론에 대한 충분히 자세하고 수준 높은 국외 문헌
들을 입수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국외 문헌들에 대한 검토는 다른 기회로 미
루기로 한다.
34) 한국사회학 제36집 5호(2002년), 1-27쪽.
35) 한국사회학 제45집 4호(2011년), 1-26쪽.
36) 서영조, 앞의 글, 5쪽.
186 사회와 철학 제24집
한다”37)고 한다. 이 문장 역시 전반부는 맞지만 후반부는 전혀 맞지 않
는다. 보편적 윤리 규범을 세우고자 하는 것은 루만에게는 도덕 내지 도
덕의 편에 선 전통적 윤리학의 모습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차 관찰
자 관점에서 보면 보편주의조차 어떤 적소에서 주장되는 것이며, 그래서
여러 보편주의가 성립한다. 도덕의 반성이론으로서의 윤리학은 도덕의 코
드를 여러 코드들 가운데 하나의 코드로 인식하고 그 코드가 적절하게 적
용될 수 있는 영역들을 적시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회에서
도덕을 대변하면서 동시에 사회의 요구를 도덕에 번역해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둘째, 두 논문 모두, 내가 보기에는 루만의 도덕이론의 가장 흥미로운 부
분에 대해 거의 언급조차 하고 있지 않다. 도덕의 자기지시성과 역설이라는
내생적 요인과 사회구조의 변동이라는 외생적 요인이 만나면서 도덕의 반성
이론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기회들이 어떻게 생성되고 또 그 기회들이 어떻게
파편적으로만 활용되는지를 살피는 부분이 그것이다. 이는 루만의 도덕이론
이 사회구조와 의미론 사이의 상관관계를 밝히려는 그의 거대한 프로젝트의
일부라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셋째,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 도덕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서영조는 루만이 “도덕은 점차 그 사회적 기
능을 상실하고 개인간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명맥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
다”38)고 진단했다고 한다. 그런데 루만 자신은 “근대사회에서 도덕코드의
… 지배적 위상은 무너졌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도덕이 … 참석자들 사
이의 상호작용에서나 겨우 등장하며 그것을 넘어서는 기대는 감히 더 이상
품어보지도 않는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런 주장은 금세 경험적으로
반박될 것이다”39)라고 말하고 있다. 이철은 루만이 도덕 기능의 축소만을
말한 것처럼 해석하는 서영조를 비판하면서 루만이 도덕을 “전체 사회에
37) 이철, 앞의 글, 9쪽.
38) 서영조, 앞의 글 25쪽.
39) “Ethik als Reflexionstheorie der Moral”, 425쪽.
도덕의 반성이론으로서의 윤리학(장춘익) 187
걸쳐 순환하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 규정했다는 점을 강조한다.40) 그러
나 루만이 그 말을 한 맥락은 도덕코드 자체에 대한 반성이 왜 제대로 이
루어지지 못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기능체계들의 경우 경계가 뚜렷
해서 자신의 코드를 하나의 코드로 관찰하기 수월했던 반면, 하나의 부분
체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순환하는 커뮤니케이션인 도덕
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41) 루만은 기능적으로 분화된 근대사회에서 도
덕이 어떤 중요성을 갖는지를 아주 분명한 가설로 요약하고 있다. 그 가설
을 다시 한 번 인용한다. “기능코드들이 ‘비가시적’ 방식으로 위반될 수 있
는 곳에서, 그래서 신뢰에 의존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다시 도덕에 호
소한다.”42)
넷째, 두 논문 모두 윤리학이 도덕의 반성이론으로 전환되었을 때 열리
는 새로운 연구관점들을 제대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가령 도덕화가 구조
를 은폐하는 효과를 낸다는 것은 나에게는 윤리학이 아프게 새겨들어야 할
내용으로 보인다.
5. 맺는 말
루만은 기능체계들 내에서 도덕이 중요성을 갖는다고 하면서도 이것이
기능체계들 자체가 도덕에 의존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도
덕이 기능체계들로부터 기능을 부여받는 것뿐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기
능체계들은 왜 도덕에 부여하는 기능을, 가령 법이 도덕의존적인 부분을
모두 법조문으로 만들거나 스포츠체계가 페어플레이에 해당하는 부분을 모
두 경기규칙으로 만드는 식으로, 체계 안으로 완전히 흡수하지 못하는 것
40) 이철, 앞의 글, 6쪽, 13쪽.
41) “Ethik als Reflexionstheorie der Moral”, 434쪽.
42) 같은 책, 432쪽.
188 사회와 철학 제24집
일까? 이 지점에서 우리는 설령 철학이 신학의 시녀라는 주장을 인정하더
라도 “시녀로서의 철학이 횃불을 들고 귀부인 앞에서 가고 있는지, 아니
면 뒤에서 귀부인의 옷자락을 들고 가고 있는지는 물어봐야 할 것”43)이
라는 칸트의 말을 새롭게 응용해볼 필요가 있다. 도덕이 미처 기능체계들
의 코드로 흡수되지 못한 잔여 기능을 수행할 따름인지, 아니면 도덕이
기능체계들의 자유로운 작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인지, 다시 말해 수동
적이고 부차적인 듯한 외양 아래 어떤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지
(혹은, 주도적 역할을 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따져봐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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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Darmstadt 1983, 제 11권.
Habermas, J., Der phiolosophische Diskurs der Moderne, Frankfurt
1985(이진우 역,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서울 1994).
Luhmann, N., “Soziologie der Moral”, in: N. Luhmann/S. H.
Pfürner 편, Theorietechnik und Moral, Frankfurt 1978.
Luhmann, N., Soziale Systeme, Frankfurt 1984.
Luhmann, N., “Ethik als Reflexionstheorie der Moral”, in: N.
Luhmann, Gesellschaftsstruktur und Semantik, 제3권,
Frankfurt 1989.
Luhmann, N., Paradigm lost: Über die ethische Reflexion der
Moral, Frankfurt 1989.
Luhmann, N.,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Frankfurt 1997.
43) I. Kant, “Der Streit der Fakultäten”, 290-291쪽.
도덕의 반성이론으로서의 윤리학(장춘익) 189
Luhmann, N., Die Moral der Gesellschaft, D. Horster 편,
Frankfurt 2008.
서영조, 루만의 ‘사회학적 도덕 이론’과 그 도덕철학적 의미 , 한국사회학
제36집 5호(2002년), 1-27쪽
이철, 기능 분화 사회의 도덕 연구를 위한 윤리학과 도덕 사회학: 니클라
스 루만의 사회학적 도덕 이론을 중심으로 한국사회학 제45집
4호(2011년), 1-26쪽.
190 사회와 철학 제24집
Ethics as a Reflective Theory of Morality
- On Luhmann's Theory of the Moral
Jang, Chun-Ik
【Abstract】
N. Luhmann requires ethics not to be a moral theory of morality but a
reflective theory of morality, which deals with the distinction between good
and bad or between good and evil as a distinction. Only as such a reflective
theory can ethics, he claims, represent morality, on the one hand, and
translate social demands into moral terms, on the other, in the functionally
differentiated society. According to him, such a transformation of ethics
should have taken place earlier on. For a long time, however, ethics has
not been able to distinguish herself from morality and has regarded her task
as giving foundational supports to the moral. Therefore, though responding
to changes of the social structure, ethics missed so much chance to reflect
on the moral. Reconstructing this process and urging ethics not to be a
justificatory theory but to be a reflective theory of morality are the crucial
point of Luhmann's arguments related to ethics. The primary aim of this
article lies in explaining his extremely multi- layered arguments. However,
by way of a critical examination of preceding researches in Korea about
his theory of morality, I will point out some hitherto misunderstood and
insufficiently illuminated parts of his main arguments.
Key words: Luhmann, Moral Theory, Sociology of Morality, Ethics,
Reflective Theory of the Moral, Functionally Differentiated
Society
논문접수일: 2012년 9월 18일 논문심사일: 2012년 10월 2일 게재확정일: 2012년 10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