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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유학적 지식인의 사회주의 수용과 민족운동
- 1920년대 경북 남부지역 사회운동을 중심으로 -
심 상 훈*
1)
<目 次>
Ⅰ. 머리말
Ⅱ. 경북 남부지역의 전통적
학문 연원
Ⅲ. 유학적 지식인의 사회주의
수용 양상과 특징
Ⅳ. 유학적 지식인의 사회주의
운동을 통한 민족운동
Ⅴ. 경북 남부지역 사회주의
운동의 성격
Ⅵ. 맺음말
<국문초록>
이 글은 1920년대 경북 남부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지역의 사회주의
운동을 살피는 데 목적이 있다. 또한 이 지역에서 사회주의 수용과정
에서 유학적 지식인들의 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던 원인과 그들이
사회주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이해하는 데 있다.
한국에 사회주의가 수용되고, 변화해가는 과정에서 그것은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다. 경북 남부지역은 비교적 한국
사회주의 운동이 빨리 흡수된 곳이며,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즉,
한국사회주의 각 계파의 이론적인 틀을 정리하는 실험장이었던 것이
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성장한 사회주의자들을 공급받아 새로운 형태
* 한국,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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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민족운동을 추진해 나갔던 것이다. 이 지역의 사회주의운동이 중앙
의 정세 변화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북풍
회와 서울계의 영향 아래서 민족해방운동을 조용하게 실현시켜나가고
있었다. 또한 중앙에서 그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면 지역에서 그 부족
한 역량을 채워나갔고, 인적인 공급처로서 자리매김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이 지역의 사회주의운동은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야
체이카, 농민・노동・청년・형평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민족해방운동으로
이어져 나갔던 것이다.
이 지역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에는 이곳의 명문가 집안 출신들의
유학적 지식인들이 서 있었고, 그들은 지역적인 기반을 매개로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사회주의자들을 양성해 나갔다. 어쩌면 이들은 전통
과 권위가 허물어져 가는 당시의 시대적인 아픔을 유교를 대신해 사
회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으로 달래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이
상향의 실천을 사회주의의 민족해방운동으로 표출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사상적으로 유교적 전통과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빼놓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전통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인 성리학의 관념적 사유체계를 대
체할 근대적 사유체계로서 마르크스주의가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성
리학의 사변적 사유체계가 구시대의 정치사상이요 철학이었다면, 새로
운 시대에 상응하는 사변적 체계를 갖춘 이념과 철학으로 마르크스주
의 사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이 지역을 비
롯한 경북의 독립운동은 유교적 전통이 마르크스주의로 계승되는 측
면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주제어:사회주의(사회주의운동), 민족운동, 조선공산당, 사상단체,
청년운동, 노농운동, 유학적 지식인
일제강점기 유학적 지식인의 사회주의 수용과 민족운동∣심상훈 425
Ⅰ. 머리말
1919년 전국적으로 발생하였던 3・1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방식
에 대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3・1운동은 한국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전
민족적운동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1920년대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향
을 결정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3・1운동을 전후한 시기 러시아혁명
의 영향과 사회주의의 유입으로 인하여 한국독립운동에서도 사회주의
운동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사회주의운동은 1918년경부터 국외 특히
노령의 한인 교포사회에서 먼저 시작되어, 1920년대 전반 중국지역의
독립운동계와 국내 민족운동계에 전파되었다. 1920년대 전반 국내외
에 결성된 사회주의운동 단체는 한결같이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표방
하였다. 1920년대 전반 사회주의운동은 이념적 지향성을 강조함으로
써 기존의 민족주의운동과의 차별화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1925년 조선공산당(이하 조공)이 결성되면서 사회주의운동 세력은
조직적 기반을 갖게 되었고, 그에 따라 자신들의 이념과 투쟁방략에
대해 구체적 논의에 들어갔다. 이후 사회주의 이념과 운동방략이 비교
적 체계적으로 수용되면서 코민테른 반제통일전선의 전략과 전술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0년대 전반에 전개한 사상운동과 대
중운동의 성과를 바탕으로 이를 어떻게 조직화하며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한 모색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결과 사회주의운동의 국가
건설 지향과 독립운동방법론이 구체화되었다.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연구는 코민테른 자료의 이용이
가능해지면서 기존 연구 결과를 재검토하는 가운데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가 나오고 있다.1) 그에 따라 초기 연구에서 해명되지 못했던 사
1) 임경석, <고려공산당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박철하,
<1920년대 전반기 조선공산당창립과정-꼬르뷰로국내부를 중심으로>, ≪
숭실사학≫, 8, 1994.; 한국역사연구회, ≪한국근현대지역운동사-영남편
≫(서울: 여강, 1993); 한국역사연구회, ≪한국근현대청년운동사≫(서울:
풀빛, 1995); 역사학연구소 편,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연구-현황과 전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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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주의 이론의 수용과정과 그 세력의 형성과정 및 사회주의운동의 전
개과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사회주의운동 연구의
진척된 결과를 밑거름으로 하여 국내에서도 지역 차원의 운동과 전파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사회주의자들의 선행 활동
경험과 분위기가 사회주의 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이러한 사회
주의 운동이 이전의 민족운동과의 연관성을 구체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글은 1920년대 경북 남부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지역의 사회주의
운동을 살피는 데 목적이 있다. 이 지역에서 사회주의운동이 활발하였
음은 기존의 연구 결과를 통해 대체로 가늠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중
앙과의 연결고리 그리고 그 속에서 나타나는 지역적인 특수성은 파악
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중앙의 계파가 각 지역에 어떻게 이식되었고,
지역에서 그것을 어떠한 경로를 통해 받아들였는가 하는 문제 등이
아직 풀리지 않은 과제이다. 또한 지역에서 유학적 지식인2)들이 사회
울: 아세아문화사, 1997); 한국역사연구회, <특집: 공산주의 그룹과 당통일
운동(1922∼1924)>, ≪역사와현실≫ 28, 1998; 권희영, ≪한인 사회주의
운동 연구≫(서울: 국학자료원, 1999); 박철하, <1920년대 전반기 중립당
과 무산자동맹회에 관한 연구>, ≪숭실사학≫ 13, 1999; 박종린, <김윤식
사회장 찬반 논의와 사회주의세력의 재편>, ≪역사와 현실≫ 38, 2000;
김희곤, <안동유림의 좌우분화와 1920년대 민족운동>, ≪대동문화연구≫
36,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0; 김일수, <1920년대 경북지역 사
회주의운동>, ≪한국현대사와 사회주의≫, 역사비평사, 2000; 김무용, <한
국 근현대 사회주의운동, 이상과 현실의 갈등>, ≪역사문제연구≫ 7, 2001;
임경석,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서울: 역사비평사, 2003); 이현주, ≪
한국 사회주의 세력의 형성: 1919∼1923≫(서울: 일조각, 2003); 역사학
연구소편, ≪역사속의 미래 사회주의≫(서울: 현장에서 미래를, 2004); 전
상숙, ≪일제시기 한국 사회주의 지식인 연구≫(서울: 지식산업사, 2004);
심상훈, <1920년대 경북 북부지역 유학적 지식인들의 사회주의운동과 성
격>, ≪국학연구≫ 4, 2004; 김희곤,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
≫(서울: 경인문화사, 2006); 전명혁, ≪1920년대 한국사회주의 운동연구
≫(서울: 선인, 2006)
2) 「유학적 지식인」이라는 용어는 아직 학계에서 통용되는 것이 아니며, 명
확한 개념 규정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유학적 지
일제강점기 유학적 지식인의 사회주의 수용과 민족운동∣심상훈 427
주의를 어떻게 이해했으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실천가로서 나서
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도 풀어야 할 과제이다. 여기서는 사회주의운동
의 전단계인 사회주의 수용 과정을 경북 남부지역을 그 대상으로 하
여 정리하는 데 첫 번째 목적이 있다. 두 번째로는 이 지역에서 사회
주의 수용과정에서 유학적 지식인들의 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던
원인과 그들이 사회주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이해하는 데
있다. 초기의 사회주의운동은 이념적인 분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운동세력들은 지역・당파・학통적 성격에 따라
결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을 정리하는 것이 마지막 목적이
며, 특히 퇴계학통의 영향을 받고 있던 지역적 특색과 당색을 고려하
여 퇴계학통의 계승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해보고자 한다.
Ⅱ. 경북 남부지역의 전통적 학문 연원
영남지역, 좁게는 경북지역은 퇴계학의 전승이 잘 이루어지고 있던
지역이다. 퇴계학통은 그의 직전제자와 가학을 통해 학문적인 끈끈한
연을 맺고 있었다. 특히, 경북 남부지역은 旅軒 張顯光과 寒主 李震相
을 중심으로 한 학맥이 형성된 곳으로, 이들의 학문적 영향을 고스란
히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진상을 중심으로 한 한주학파는 이
지역의 새로운 학문적 경향을 만들어 나갔다. 이진상은 은 기본적으로
理의 活物說을 주장하는 퇴계학파에 속한다. 그러나 그는 류치명의 철
학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류치명은 이황의 전통을 이어 心을
‘理氣의 合’으로 보고 明德도 완전히 리는 아니라고 보는 데 반해, 이
진상은 명덕을 리라고 하면서 心卽理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여기서 그
는 정통 퇴계학파와 길을 달리하였다. 따라서 이진상은 이황의 학설
식인’을 양반가 출신의 자제로 전통적인 유가 교육을 받았거나, 유학적
소양을 갖춘 계층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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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주리적인 측면을 극단적으로 강화시키면서, 오히려 정통 퇴계학파
와 멀어졌다. 따라서 그의 심즉설은 퇴계학을 양명학 방향으로 틀어
놓은 것이라는 혐의를 받고, 도산서원의 퇴계학파로부터 공격을 받았
다. 그러나 이러한 설을 주장하는 이진상에게 수많은 문인들이 모이게
되면서 새로운 학맥이 형성되었다. 그의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郭鍾錫
이 있다. 곽종석의 제자로는 성리학자로서 서양철학을 소개한 李寅梓
가 있고, 캉유웨이[康有爲]의 孔子敎운동을 국내에서 전개했던 李炳憲
이 있다. 그의 학문관을 가장 잘 실천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으로는 그
의 아들 李承熙가 있고, 이승희의 제자로 제1・2차 유림단의거에 참여
하였던 金昌淑이 있다. 그 외에도 張錫英・許愈・金鎭祐・李斗勳 등이 그
에 속한다. 이진상은 주로 심즉리설을 자신의 학설로 강하게 주장하였
지만, 그의 제자 그룹은 이것을 계승하여 이러한 논의가 궁극적으로
퇴계학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변호하는 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3)
이진상이 살았던 당시 사회는 국내외적으로 매우 혼란한 사회였다.
내부적으로는 장기화된 노론 세도정치의 부패와 무능으로 민생은 파
탄 지경에 이르렀다. 외부적으로는 천주교가 세력 범위를 넓혀 가고,
외세의 침탈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들로 인하여 조선 사회를 이끌어
왔던 성리학적 이념은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다. 통치 이념뿐만 아니라
생활 속 깊이 박혀 있던 유교적 향촌 자치 질서도 흔들리던 시기였다.
이진상이 생활하고 활동했던 주무대는 중앙 관계에 진출하기 힘들지
만, 유교적 향촌 자치가 가장 잘 발달했던 영남지방이었다. 따라서 그
에게는 당시 노론 집권층이 지지하던 율곡・湖洛학파로 이어지는 성리
설을 비판하는 것이 하나의 과제이고, 또 하나의 과제는 公理를 공고
히 함으로써 흐트러진 향촌 자치 질서를 재조직하는 것이었다.
한주학파의 기본 성격은 바로 서양 제국의 침략이라는 새로운 사회
환경에 대하여 기존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태도에 있다.
3) 한주학파의 학통과 학문적 성격은 ≪영남학맥도≫(경북: 한국국학진흥원,
2002)와 ≪조선 유학의 학파들≫(서울: 예문서원, 1996)을 참고할 만하다.
일제강점기 유학적 지식인의 사회주의 수용과 민족운동∣심상훈 429
그들은 기존의 전통으로 대변되는 윤리 질서를 강화하기 위해서 理를
더욱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즉, 윤리 질서가 흔들리는 것은
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실제로 기존의 성리설을 더욱 강화한 심즉리설을 제창하였다.
한주학파의 논리는 주체 속에 이미 수양의 대상이나 목표가 들어
있다고 주장하는 일월론적 체계이다. 즉, 心이 誠보다 내용적으로나
가치론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수양의 이원적 성격
보다 더 주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주체를 강조하게 되면 실천의 자신
감, 당위성을 확보할 수 있지만, 현실의 객관적인 정황과 괴리가 생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주학파가 주장하는 심즉리, 심의 주재력,
敬에 대한 수양론은 당시 어떤 학파의 성리설보다 주체성을 강조하였
다. 이것은 전통적 가치에 대한 자긍심이나 도덕에 대한 경외감을 높
일 수 있다.
이에 한주학파는 시대의 흐름을 보아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향
촌 자치에 입각한 유교의 보편주의를 내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객관적
정황의 불리함을 깨달으면서도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유교를 종교화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이승희에게서
그 단면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성리학 자체의 이론보다 그것을 직접
실천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는 1908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고, 한흥동이라는 마을을 세워서 유교적 공동체를 실험하였
다. 그는 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 조직을 향약에서 찾았다.
그리고 이것이 서양의 국회 제도와 비교하여 더 우월하다는 것을 입
증하려고 하였다. 그는 이 공동체를 이념적으로 묶기 위해 유교가 종
교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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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유학적 지식인의 사회주의 수용 양상과 특징
서울에서 결성된 각 사상단체는 외연을 확대하기 위해 지역에 자신
들의 분신들을 하나 둘씩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각 지역에 결성된 사
상단체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의 연구와 선전이라는 원칙적인 성
격 외에도 중앙에서 각 사회주의 그룹이 결정한 활동방향을 현장에서
실천해 나가는 전위 기관으로서 자리 매김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 사
회주의 그룹을 지원 사격해주는 응원군으로, 나아가 지역의 대중운동
을 지도하는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경북지역에서 결성된 사
상단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토대로 정리해 보면 대략 22개 정도
이다. 그 중 경북 남부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사상단체를 정리해 보면
아래 표와 같다.
<1920년대 경북 남부지역에서 활동했던 사상단체>
연도 단 체 명 지역 계 열 주요 활동가 비 고
1924 의우단 청도 북풍회 도시춘, 강태찬
1924 금릉구락부 김천 북풍회 박광세, 주남태, 최두희
1925 독서구락부 김천 서울계 봉황태, 김성종(황태대, 용홍)보, 돌이해동, 이팔
1925 영천구락부 영천
이광백, 김은한, 김석린, 이길
수, 백기호, 김석천, 조상환, 정
시명, 김영선, 김병주, 이수자
1926 김천철육단 김천 북풍회 김김실창경식, 박장백, 문인수, 이규영,
※ 자료: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중외일
보≫, ≪왜정인물사료≫(경희대학교 소장본)
1920년대 당시 경북 남부지역에서는 비교적 대중운동이 강성을 보
였던 지역에 비교적 일찍 결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지
역에서는 1924년을 기점으로 많은 사상단체가 결성되는데, 이 시기가
바로 한국 사회주의운동사에의 황금기였기 때문이다. 1925년 조선공
일제강점기 유학적 지식인의 사회주의 수용과 민족운동∣심상훈 431
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그리고 각종 부문운동의 연합체가 결성되면서,
사회주의운동을 하나로 묶는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지역에서도 많은
사상단체가 결성된 것이다. 그러면 계파별 사상단체의 활동을 대표적
인 조직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의우단은 1924년 8월 도시춘・강태찬을 비롯한 7~8명의 발기로 청
도에서 결성되었다. 그런데 1920년대 경북에서 조직된 사상단체들은
중앙의 사상운동과 일정한 연계를 맺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청
도의 의우단은 중앙 조직과의 연계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 의우단
은 1925년 12월 23일 집행위원장 김봉의 사회아래 집행위원회를 개
최하여, 단체의 강령과 규약을 개정하고 혁신을 꾀하기 위한 임시총회
를 개최하기로 하였다.4) 그리고는 다음해 1월 1일 임시총회에서 수정
된 의우단의 강령과 규약을 통과시켰는데, 강령은 첫째 우리들은 과학
적 교양을 기할 것, 둘째 우리들은 철저한 지식과 공고한 단결로써 합
리적 신사회 건설을 기할 것, 셋째 우리들은 사상단체와 실제운동 단
체에 대하여 절대 옹호를 기할 것이라고 하였다.5)
김천을 대표하는 사상단체로 讀書俱樂部와 金泉鐵育團 등이 결성되
었다. 독서구락부는 황태성・李海同・李八奉・金鍾泰・홍보용 등이 1925
년 11월 20일에 창립한 사상단체로 보이며 그 구체적인 활동상은 알
수 없다.6) 그렇지만 창립자들이 1930년대 김천그룹을 결성하여 활동
하는 등 운동주체가 되어 다양한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김천철육
단은 1926년 1월 경 金實慶・朴長伯 등이 중심이 되어 창립되었고, 당
시 김천지역의 사상운동을 주도하던 文仁壽・李圭英・박장백・朴福德・金
昌湜 등이 참여하였다.7) 이 단체는 1927년 5월경까지 김천지역에서
사상보급에 노력하였다.8)
4) ≪동아일보≫ 1925년 12월 26일자.
5) ≪동아일보≫ 1926년 1월 4일자.
6) ≪동아일보≫ 1925년 11월 24일자.
7) ≪동아일보≫ 1926년 1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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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9월에 결성된 영천구락부는 영천면과 금호면을 중심으로 활
동하고 있던 이광백・김은한・김석린・이길수・백기호・김석천・조상환・정
시명・김영선・김병주・이수자 등이 주도하였다. 이 단체의 강령은 과학
적 교양을 기하고 상호친목을 도모한다는 내용이었다.9)
이처럼 각 지역에 계파별 사상단체가 결성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
역에 강력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던 유학적 정서 때문일 것이다. 이 지
역은 학문적으로는 퇴계학통을 계승하는 한편, 정치적으로 남인이 그
뿌리에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분화되어가는 과정에서 지역적으로 독
특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10) 그런데, 이 지역의 경우 화요회계의 사상
단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경북 북부지역의 경우
화요회계와 서울계가 사상단체를 양분하고, 활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하지만 남부지역의 경우 북풍회와 서울계를 중심으로 사상단체가 결
성되었는데, 이는 이 지역의 정치・사회・경제적인 중심지였던 대구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대구지역에는 북풍회 계열의 정오
회・아구동맹 등과 서울계의 신사상회 등의 사상단체로 나뉘어져 있었
으며, 이들의 활동은 인근 지역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11)
사상단체에서 활동하던 주요 활동가들은 동시에 직업적으로 언론활
동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언론이 바로 그들이 연구한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대중들에게 보급하고 교육하는 적절한 수단이 될 수 있었
기 때문이었다. 언론 활동에 종사한 활동가들은 郡단위 혹은 인근 군
을 묶어 하나의 기자단체를 결성하여 통합을 강화해나갔다. 또한 이들
은 대부분 책을 통하여 사회주의 이념에 공감하게 되어 사회주의를
8) ≪동아일보≫ 1927년 5월 31일자.
9) ≪동아일보≫ 1925년 12월 26일자; 조인호 외. ≪영천의 독립운동사≫(경
북: 영천항일운동선양사업회, 2013) pp.360-370 참조.
10) 조선시대 퇴계학파의 지역적 전개는 경북대 퇴계연구소에서 발간하는 ≪
퇴계학맥의 지역적 전개≫(서울: 보고사, 2004) 참조.
11) 허종, <1920년대 대구지역 사회주의 세력의 대중운동>, ≪대구사학≫, 71,
2003, pp.172-173.
일제강점기 유학적 지식인의 사회주의 수용과 민족운동∣심상훈 433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대부분 주변의 선배나 친구 등 지기
들의 권유로, 자신들이 공감하여 받아들인 사회주의 이념을 현실에 구
현하고자 구체적인 실천 활동과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하였다. 물론 이
들이 사회주의 실천운동에 참여하게 된데는 이미 부분적으로 관여하
고 있던 대중운동단체에서의 활동 경험이 크게 작용하였다. 김재봉의
경우는 스스로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신념 때문에 이를 실천하기 위
하여 공산당조직 활동에 가담하였다고 할 정도로 당시 사회주의를 깊
이 신봉하고 있었다.
이들 사상단체의 구성원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이루어져야 그들
의 성격을 명확히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 주도 세력의 성분을
확인해 본 결과 이들은 반가 출신의 유학적 지식인이 많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그 지역에서 여론을 주도할 수 있을 정도
의 명문가 집안 출신이며, 경제적으로는 그렇게 넉넉하지는 않지만 나
름대로 행세를 하던 인물들이었다. 또한 서울의 본거지와 끊임없이 연
결할 수 있는 끈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부득이한 경우에는 직접 그들
과 활동을 같이 하는 등 이론가와 활동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전통적인 유학적 학문 소양을 기반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탐독
할 수 있는 신학문을 접하는 등 한국 사회주의 지식인으로 서서히 자
리잡아 갔던 것이다.12)
12) 전상숙, ≪일제시기 한국 사회주의 지식인 연구≫(서울: 지식산업사,
2004), pp.80-100. 전상숙은 조선공산당사건에 연루된 525명의 판결문을
토대로 그들의 사회경제적인 배경(조선공산당사건 관련자들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정리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조선공산당사건 관련자들은 쁘띠부르
조아 계층이며, 대부분 보통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진 신교육 수혜자로 파
악하였다. 저자가 이러한 결론이 도출할 수 있었던 것은 판결문에 기록되어
있는 평면적인 부분만 파악했기 때문이다. 일제가 3・1운동 등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판결문에 기록한 직업과 학력을 검토했다면 좀 더 세밀하게 그들
의 출신 성분을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보통학교 이상의 다닐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적인 능력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1920년대 후반
에 비로소 보통학교 교육이 일반화되었지만, 월사금이 비싼 형편이어서 경
제적인 능력 없이는 학교를 다닐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또한 이들
434 東亞人文學 第29輯
이 지역에서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구한말과 식민지 조선
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자라면서 민족해방운동을 몸으로 실천했거
나 눈으로 직접 확인한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생활태도나 사고
방식의 밑바닥에는 성리학의 영향이 아직도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이 과거에 지녔던 민족
주의나 유교적 사고방식의 문제점을 비판했지만, 그들 자신이 과거의
사상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즉, 그들은
사상적인 면에서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고 새롭게 태어나려고 노력했
지만, 자신의 깊숙한 곳에서까지 자신과 철저하게 결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양상은 여말선초 성리학을 수용했던 신흥사대
부의 그러한 심정과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사상계를 지배해 온 유교를 망국의 주범으로
손가락질한 것은 비단 일제의 식민사학자 뿐만 아니다. 수많은 민족주
의자들도 ‘儒敎亡國論’을 내세우면서 유교를 극복의 대상으로 삼았다.
사회주의자들 역시 유교가 봉건사상이라고 침을 뱉었다. 그러나 사회
주의자들의 사고방식에 남아 있는 성리학적 세계관의 잔재는 그들의
사회주의 수용에 독특한 색깔을 부여했다. 성리학이나 사회주의나 모
두 인간의 이성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사고체계로서, 끊임없는
도덕적 수양(또는 실천적 단련)을 통해 인간이 완벽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유교가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추구한
성인군자처럼 사회주의자들은 혁명가를 그들의 이상형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혁명가들의 집단적 지혜를 바탕으로 민족해방운
의 직업이 인텔리 계층이었다면 어느 정도의 학문적 소양을 갖추었을 것이
다. 당시 보급되는 신문이나 잡지, 그리고 옥중엽서는 국학문혼용이거나 한
문으로 쓴 경우가 많았다. 이것을 탐독할 수 있을 정도였다면, 최소한 유학
적 교양을 갖춘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사회주의운동을 선도
하였던 계층은 경제적으로 몰락했거나, 아니면 경제적으로 부유한 유학적
지식인들로 봐야 할 것이다. 비교적 일반 서민보다는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경제적・사회적 여건이 이들이 사회주의자로 변신해가는 데 일조하였을 것
이다.
일제강점기 유학적 지식인의 사회주의 수용과 민족운동∣심상훈 435
동을 선도해야 하고, 그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보았을 것이다.
Ⅳ. 유학적 지식인의 사회주의운동을 통한 민족운동
1. 청년운동
3・1운동 이후에 조선에 유입된 사회주의사상은 민족운동에 많은 영
향을 끼쳤으며, 특히 청년들에게 급속도로 확산되어 청년운동은 사회
주의적 색채를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사상을 받아들인
청년들은 계급해방을 민족해방의 전제로 사고하고, 교양과 훈련을 통
해 청년대중의 계급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대중운동을 선도하고 그
선봉에 섰다. 1924년 4월에 결성된 조선청년총동맹은 사회주의청년운
동의 역량이 조직적으로 결집된 것이었다.
조선청년총동맹의 결성을 전후로 하여 전국 각지의 청년단체는 그
동안 부실했던 활동을 타개하기 위해 ‘혁신총회’를 개최했다. 기존의
청년단체는 회장을 중심으로 한 간부 위주의 운영으로 회원들의 의사
가 반영되지 않은 채 비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울러
지방 유지들이 중심이 된 장년층으로 구성되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
기 힘든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대중운동이 발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각
부문 운동간에 영역구분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청년층을 중심으로
초기 사회주의가 보급되는 과정에서 청년운동과 사상운동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점차 사회주의운동이 확산되면서 일정한 연령 이하의 청
년을 중심으로 하는 청년조직과 사상단체, 노동자와 농민단체가 분화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나타나고 있었다. 따라서 명실상부한 청년단체
로 거듭나 청년운동의 사회적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다.13)
김천의 경우, 1921년 8월 29일 高德煥・黃贊周・李正得 외 수명의 발
436 東亞人文學 第29輯
기로 금릉청년회가 조직되었다.14) 회장에는 김천의 대표적인 상공인
이자 지역의 유지인 고덕환이 선임되었다.15) 금릉청년회의 조직은 덕
육부・지육부・문예부・체육부・풍속부・산업부 등의 부서로 편성되었으며,
주도층은 지방유지와 청년 지식인 등이었다. 1922년 7월 말 김천공립
보통학교에서 열린 금릉청년회 임시총회에서 청년회의 고문으로 군
수・경찰서장 등이 언급되고 있었다. 이로 보아 초기의 성격은 관민협
조주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릉청년회는 1922
년 11월 회관을 건립하고, 1923년 1월에 교육시설로 김천유아원과 금
릉학원을 운영하였다.16) 김천을 대표하는 금릉청년회에서는 1923년
임시총회에서 ‘회장제’를 ‘위원제’로 변경하고, 서무부집행위원에 고덕
환・이정득・權尙集, 문예부집행위원에 李永局・李漢一, 교풍부집행위원
에 白鍾基・金鍾鎬, 운동부집행위원에 황찬주・韓永述, 실업부집행위원
에 石泰衡・徐正均이 선출되었다.17) 이후 금릉청년회는 1924년 3월부
터 무산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고,18) 또 노동야학・여자야학을
개설하였을 뿐 아니라 간이문고까지 설치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
다. 금릉청년회는 1924년 4월 전국적 지도기관인 조선청년동맹에 가
입하였고, 이를 계기로 금릉청년회는 혁신총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김천은 1925년 이후 사회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각 지방에서는
청년단체들이 각 府郡내 청년단체를 망라하는 府郡聯盟을 결성하여
조직적으로 통일하기 위한 새로운 운동이 추진되었다. 김천에서는
1925년 9월 20일 김천청년연맹이 금릉・개포 양 청년회의 발기로 금릉
13) 1920년대 경북지역 독립운동 양상(흐름)과 특징에 대해서는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에서 간행한 ≪경북독립운동사(Ⅴ)≫(대구: 경상북도, 2012)
참조.
14) ≪동아일보≫ 1927년 1월 1일자, 1928년 2월 10일자.
15) ≪동아일보≫ 1921년 10월 10일자.
16) ≪동아일보≫ 1923년 1월 21・29일자.
17) ≪동아일보≫ 1923년 9월 16일자.
18) ≪동아일보≫ 1927년 1월 1일자.
일제강점기 유학적 지식인의 사회주의 수용과 민족운동∣심상훈 437
청년회관에서 창립되었고,19) 1926년 8월 현재까지 금릉청년회・김천여
자청년회・아천청년회・개령청년회 등 4개 단체가 이 연맹에 참여하였
다.20) 이밖에도 1927년 6월 27일 전까지 금릉청년회 이외에 김천기독
청년회・청암불교청년회・김천여성회・증산청년회・금릉구락부・봉계청년
회・김천교풍회・지례청년회・금산청년회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영일군 가운데 현재의 포항지역에서는 3・1운동 이후 청년단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하였는데, 청하청년회가 1919년에 창립된
것 같으나 그 실체가 분명하지는 않다.21) 그후 정확한 창립일을 알
수 없지만 영일청년회가 결성되었고, 흥해청년회・해동청년회・부조청년
회・칠오청년회 등이 결성되었다.
청도에서도 1925년 11월 25일 청도청년회가 혁신을 표방하며 혁신
총회를 개최하고, 회장제를 집행위원제로 바꾸고 회원의 연령을 제한
하였다. 1926년부터 청도에서는 유천청년회와 풍각청년회・풍각기독교
청년회, 그리고 대성청년회가 새롭게 조직되었다.
1920년대 후반기 경북에서도 사회주의 사상이 널리 확산되고 청년
운동을 지도하는 새로운 단체가 결성되었다. 그래서 그동안 부진했던
활동에서 벗어나 조직을 새롭게 하기 위해 이른바 ‘혁신총회’가 개최
되었다. 1926년 11월 15일 ‘정우회선언’ 이후 김천의 금릉청년회도
1927년 4월 24일 정기총회를 열어 운동을 일층 쇄신하는 동시에 대중
적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사업의 의의를 제고하려고 ‘방향전환선언’을
통과시켰다.22) 한편 김천의 사상운동을 주도하였던 金泉鐵育團도
1927년 5월 28일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방향전환의 의의와 현하 조선
의 객관적 조건 세계정세 및 제국주의 하에서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식민지운동과 세계 무산운동에 관하여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은 후.” 만
19) ≪동아일보≫ 1925년 9월 23일자.
20) ≪동아일보≫ 1926년 9월 3일자.
21) ≪동아일보≫ 1925년 5월 29일자.
22) ≪동아일보≫ 1927년 4월 27일자.
438 東亞人文學 第29輯
장일치로 본 단을 해체하고 민족적 단일당을 결성하기로 하였다.23)
이와 같이 1927년 한 해 동안 김천의 운동은 이 ‘방향전향론’으로 인
하여 ‘1군 1청년회’라는 주지아래 ‘동맹’의 명칭으로 조직체를 일신하
게 되었다.24) 이에 따라 김천청년동맹이 1927년 6월 26일에 창립되었
고, 군에는 청년동맹을, 그리고 면에는 동맹지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청도에서도 1928년 중반에 이르러 청년단체를 통일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즉 1928년 7월 20일 청도지역 각 청년회 대표들은 동아일
보지국 사무실에서 청도청년동맹창립준비회를 개최하였다. 각 지역 청
년회를 해체하고 단일한 청도청년동맹을 결성하기 위한 준비모임이었
다. 7월 30일 청도청년동맹 창립총회를 열어 집행위원장에 김갑수, 집
행위원에 임일・김태수・정기봉・고성근・최태윤・도시춘・박무현・박만수・
김종수・오춘, 검사위원장에 박보현, 검사위원에 허준구와 예종도를 선
출하였다. 청도청년동맹은 창립총회에서 3가지 강령을 채택하였는데,
첫째는 청도청년동맹은 전조선청년대중의 정치적・경제적・민족적 권리
의 획득을 기할 것, 둘째는 본 동맹은 전조선 청년대중의 의식적 교양
및 훈련을 기할 것, 셋째는 본 동맹은 전조선 청년대중의 공고한 협력
을 기할 것 등이다.25) 청도청년동맹이 조직되자, 1928년 12월 청도청
년회는 그 조직을 해체하고 동맹을 적극 지원하였다.26)
2. 노농운동
조선노농총동맹 제8회 중앙집행위원회의 토의를 거쳐 발표된 12월
‘신정책’ 성명을 통해 현실적인 대중운동의 전개, 노동농민총동맹으로
분맹과 노농협의기관의 설치, 노농대중의 정치적 의식의 환기 등이 표
23) ≪동아일보≫ 1927년 5월 31일자.
24) ≪동아일보≫ 1927년 6월 3일자.
25) ≪중외일보≫ 1928년 8월 2일자.
26) 권대웅 외, ≪청도의 독립운동사≫(경북: 청도군, 2010), pp.277-285.
일제강점기 유학적 지식인의 사회주의 수용과 민족운동∣심상훈 439
방되었다.27) 이러한 중앙에서의 노농운동조직과 운동방침의 변화를
보일 때 이 지역에서는 어떠한 변화가 나타나는지 알아보자.
청도군에서도 1920년대 전반기에 풍각면에서 소작운동이 전개되었
다. 청도에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경북의 대지주 張吉相이 소
작인들에게 횡포를 부리자, 소작인 단체인 농사개량조합에서는 장길상
의 토지를 경작하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만일 이를 위반할 경
우에는 벌금을 내게 하고 그 면 밖으로 축출하도록 하였다고 한다.28)
김천에서는 금릉면의 林景(京)祚・白龍洙・趙寬濟 등이 1927년 4월
17일에 金陵農友同盟을 조직하였다. 위원으로는 조관제・白南國・임경
조・李長權・金伯元・白在俊・李癸云 등이 선출되었고, 이후 농우동맹은
1928년 2월 현재 회원 약 40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29) 이들은 노동야
학을 개최하여 농민의 의식계몽활동을 주로 하였다.30) 또 다른 농민
운동 조직으로는 농소면・남면의 姜甲洙・金鍾基・金判石・姜判突・金炯植
등의 발기로 1927년 4월 4일 농남농민조합을 창립하고,31) 농민계몽과
청년교양에 주력하였다.32) 그러나 1920년대 김천에서는 군단위의 농
민조합을 건설하지는 못하였다.
경북 각지에서도 ‘노우회’라는 명칭의 노동운동 단체가 결성되었는
데, 김천에서는 金泉勞友會가 조직되었다. 김천노우회의 창립일자는
정확하지 않으나, 회원으로 김천의 운동가인 黃泰成・金實慶・李鍾泰・金
重烈・洪甫容 등이 있었으나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27년을 전후하여 김천노우회도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황태성의 주
도아래 김천지역의 각 직업별 노동자를 조사하고, 회원을 모집하는 등
27)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3(서울: 청계연구소, 1986), pp.
107-108.
28) 청도군지편찬위원회, ≪청도군지≫(경북: 청도군, 1991), p.289.
29) ≪동아일보≫ 1928년 2월 11일자.
30) ≪동아일보≫ 1927년 4월 20일자.
31) ≪동아일보≫ 1927년 4월 20일자.
32) ≪동아일보≫ 1928년 2월 11일자.
440 東亞人文學 第29輯
활발히 활동하였다.33) 그후 ‘방향전환론’ 등 새로운 운동론의 수용과
제반 운동이 활성화되자, 노동운동의 통일을 목적으로 1927년 9월 10
일 제2회 정기총회에서 ‘김천노동연합회’로 변경하고, 각 부문을 세포
단체로 하여 독립단체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그 세포단체로써 농우동
맹・운수노동조합 등을 두고 있었다.34)
3. 신간회 지회 활동
신간회는 1927년 2월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창
립한 민족협동전선으로 1927년 2월부터 1931년 5월까지 전국적으로
120~150여 개의 지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회원 수만 2~4만명에 이르
는 일제하 최대 규모의 반일 사회운동 단체였다.
경북에서는 1927년 6월 신간회 김천지회가 설립되면서 전국에서 지
회설립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경북에서는 울
릉군을 제외한 총 23개 군 가운데 21개 군에서 20개 지회가 설립되
고, 1개 군에서 지회설립이 추진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무산되는 등
22개 군에서 지회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처럼 경북은 신간회운동사에
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지회운동을 대표할만한 지역이었다.35)
경북 신간회 지회의 주도층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
제1유형은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협동해 지회를 설립하고
운영한 것으로 대구・안동・김천・영주・선산・칠곡・고령・영일지회 등이
여기에 속한다. 제2유형은 사회주의자들이 지도하는 청년동맹이 중심
이 되어 지회를 설립・운영한 경우로 상주・예천・봉화・영천・영양・영덕
지회가 여기에 속한다. 제3유형은 민족부르주아지 주도의 청년단체나
33) ≪동아일보≫ 1927년 1월 19일자, 2월 17일자.
34) ≪동아일보≫ 1927년 9월 20・26일자.
35) 이윤갑, <일제하 경상북도 지역의 신간회 지회운동>, ≪동방학지≫, 123,
2004, p.260.
일제강점기 유학적 지식인의 사회주의 수용과 민족운동∣심상훈 441
지역 운동 기반이 취약한 일부 명망가들이 전국적인 혹은 인근지역에
서의 지회설립 붐에 자극을 받아 지회설립을 주도한 경우로서 문경・
경주・경산・하양・청도・군위・청송지회가 이에 속한다.
<신간회지회 설립에 참여한 경북 남부지역의 사회주의자>
지 회 구 성 원 비고
선 산 박상희
영 천 김석천, 정시명, 백기호
영 일 김화섭, 하경조, 정학선, 이상갑
김 천 심상문, 홍보용, 황태성
칠 곡 서병우, 허홍제
고 령 변희용, 유용묵, 신철휴
경 주 박석규, 이중근
※자료: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중외일보≫,
≪왜정인물사료≫(경희대학교 소장본)
경북 최초로 지회가 설치된 김천의 경우, 1927년 4월 김천의 9개
사회단체들의 연합으로 「신간회 지회설립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경
북 최초로 신간회 지회를 설립하였다.36) 이 같이 신간회지회 설립준
비가 단체 혹은 단체간의 연합으로 발기되었던 것은 김천의 청년・노
동・농민・형평운동 등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왔음을 의미한다. 김천지회
는 그해 6월 18일 총회에서 지회장에 呂煥玉, 부지회장에 沈相玟이
선출되었으며,37) 위원에는 石泰衡・黃贊周・李永局・홍보용・金壽吉・황태
성・崔相允・文洪珏・林鍾業・羅鼎雲 등이 선임되었다.38) 김천지회는 이
후 1929년 2월 16일에 개최된 제2회 정기총회에서 金章漢이 회장에,
황찬주가 부회장에 피선되었고, 朴世源 외 20인이 간사로 뽑히게 되
었다.39) 중앙 신간회에서의 집행위원제로의 변화와 함께 지회도 체제
36) ≪조선일보≫ 1927년 6월 21일자.
37) ≪동아일보≫ 1927년 6월 30일자.
38) 김천문화원, ≪金泉市誌≫(경북: 김천문화원, 1989), pp.126-127.
442 東亞人文學 第29輯
를 바꾸어 7월 30일 집행위원장에 심상민, 집행위원에 임종업 외에
11인을, 검사위원에 황찬주 외 2인이 피선되었다.40) 이렇게 조직된
김천지회는 주로 「교양문제」, 「회원・대중교양의 건」 등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1927년 말 경부터 조선공산당이 신간회 지회에서 전위적 역할
을 수행함에 따라 김천지회에서도 조선공산당원들이 지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김천지회는 황태성과 홍보용 등 사회주의 세력
이 장악하자 일제로부터 심한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되어 회무가 일시
정체되기도 하였으나, 1928년 2월 간사회를 열어 회무를 재개하였
다.41)
청도의 경우 사상단체인 의우단이 중심이 되어 1927년 4월 12일
집행위원회를 열어 신간회 참여를 결정하였고, 이를 이어 청도청년회
에서도 그해 가을 김갑수・김종환 등을 중심으로 신간회 지회 설립을
추진하였다. 1928년 5월 12일 신간회 청도지회가 성황리에 창립되었
고 8개항의 결의안을 채택하였다.42) 이후 청도지회는 청도군의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雹災救濟會를
결성하여 활동한 것이었다. 1928년 6월 중순 청도군 풍각면・각북면・
각남면・유천면에 우박으로 인해 1,800여 호의 농가가 피해를 입었다.
이에 박재구제회를 결성하여 피해 농가를 지원하는 구제활동을 전개
하였다.43) 또한 청도지회에서는 사회문제 강연회를 개최하였으나 청
도경찰서에 의해 저지를 당하기도 하였다.44)
39) ≪동아일보≫ 1929년 2월 19일자.
40) ≪동아일보≫ 1929년 8월 3일자.
41) ≪동아일보≫ 1928년 2월 7일자.
42) ≪중외일보≫ 1928년 5월 15일자. ① 언론・집회・출판 및 결사 자유권 획
득, ② 재만동포 생존권의 보장, ③ 조선 아동의 의무교육제 확립, ④ 민
족단일당 촉성운동에 대한 반동사상, ⑤ 노동농민교육의 여행勵行, ⑥ 예
산안 편성의 건, ⑦ 회원 증모의 건, ⑧ 회록 제작의 건 등이 결의안으로
채택되었다.
43) ≪동아일보≫ 1928년 6월 18일자.
44) ≪중외일보≫ 1928년 8월 18일자.
일제강점기 유학적 지식인의 사회주의 수용과 민족운동∣심상훈 443
경북 신간회지회 활동의 특징은 제1유형과 제2유형에서 활발하였
고, 1928년의 조선공산당사건으로 큰 타격을 입으나 선산・영일・상주・
영천지회를 제외한 대다수의 지회가 복대표대회 이후까지도 활동이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제3유형은 설립대회를 전후한 시기
이외에는 거의 활동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45)
4. 조선공산당 경북위원회 조직과 활동
1926년 신의주사건으로 1차 조공의 와해라는 아픔을 극복하고 탄생
한 2차 조공은 6・10만세운동으로 또 해체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
다. 6・10만세운동으로 130여 명의 사회주의자들이 검거되면서 조공의
재생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검거를 피했던 일부 사회주의
자들이 하나 둘씩 다시 모이기 시작하였고, 이윽고 3차 조공을 조직
하게 되었다. 이 때 조직된 조공을 일반적으로 ‘통일당’ 또는 ‘통일조
선공산당’ 혹은 ‘ML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조직된 조공은 1926년 12월 6일 제2차 당대회를 개최하여
사회주의 그룹의 통합 문제를 심도 깊게 논의하였다. 이 대회에서 이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적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김남수(안동)가 중
앙집행위원에, 안상길(안동)이 중앙집행위원회 후보위원으로 각각 선
출되었다. 조공 제2차대회보다 하루 앞서 12월 5일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회가 열렸는데, 이기석(영덕)이 후보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처럼 중앙에서의 조공 및 공청의 통일 및 민족주의 진영과의 연
대 등으로 집약되는 변화는 경북지역에도 영향을 미쳐 1927년 8월 조
선공산당 경북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안상길(화요회계)이 책임비서로
선출되었으며, 나머지 조직은 주로 대구지역에서 활동하던 서울계 인
물들이 장악하였다. 즉, 당시 경북도위원회는 화요회와 서울계의 연합
45) 이윤갑, <일제하 경상북도 지역의 신간회 지회운동>, ≪동방학지≫, 123,
2004, pp.289-290.
444 東亞人文學 第29輯
체였던 것이다. 조공 및 공청 경북위원회는 11월 대구 달성공원에서
안상길・강훈(상주) 등이 회합하여 경북공산당대회를 개최하였다. 여기
에서 당원 모집, 월 기부금의 징수 및 그 용도, 당원 교육 등에 관한
결정이 이루어졌고, 전국공산당대회에 참석하기 위한 대표위원을 선임
하였다. 조공 및 공청 경북위원회의 결성은 이 지역 사회주의운동의
지도기관이 성립되었음을 의미하며, 또한 지역적 차원의 운동이 조직
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근거지가 마련된 것이다. 조공 2차 당대회에
서 채택된 민족협동전선의 구축을 위해 이 지역 사회주의자들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신간회의 설립과 활동 그리고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
한 프랙션을 설치하였다.46)
와해되었던 조직을 정비하고 신간회를 통한 활동을 전개하던 조공
과 공청은 또 다시 일본의 검거 열풍에 아무런 힘을 써 보지도 못하
고 붕괴되었다. 1928년 7월부터 10월까지 조공 및 공청 회원이 일제
경찰에 대거 검거되면서 ‘제3차 조선공산당’이 와해된 것이다. 1・2차
에 비해 지역적인 기반을 충실하게 다졌지만, 중앙에서 와해되기 시작
한 조직은 지방에서도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제3차 조선공산당은 1920년대 사회주의운동을 과학적 혁명이론에
토대하여 운동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며, 특히 1927년
한 해 동안 대중단체 속에서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하여 다른 시기 여
타의 당 조직보다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이 1928년
7월부터 10월까지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에 대한 대대적인 검
거를 시작하면서 경북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46) 당시 경북 남부지역에서 결성된 야체이카 및 플랙션은 아래표와 같다.
지 역 조직 구 성 원 비고
포항 공청 야체이카 책임:정학선, 회원:이재우, 이상갑
영천 공청 야체이카 책임:김석천, 회원:정시명, 공갑룡
김천 공청 황보용, 황태성(황대용)
※자료: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중외일보≫,
≪왜정인물사료≫(경희대학교 소장본)
일제강점기 유학적 지식인의 사회주의 수용과 민족운동∣심상훈 445
예천의 한일청, 안동의 권태동, 김천의 황태성, 영천의 김석천・정시명,
대구의 조병렬・장적우, 성주의 도재기, 영일의 이재우 등이 체포되었
다. 이로 인해 경북의 공산주의운동과 대중운동은 궤멸상태에 빠졌다.
일단 일제의 경찰의 검거망을 피했던 조공 및 공청 경북위원회원들은
1930년 ‘경북공산당사건’으로 모두 체포되었다.47)
Ⅴ. 경북 남부지역 사회주의운동의 성격
유학의 본 고장인 경북지역은 양반특유의 보수적 성향에 기인하는
항일의식과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영향이 결합함으로써 다른 지역에
비해 사회주의가 유난히 일찍 유입되었으며, 대중운동이 강세를 보인
곳이다. 이 지역의 사회주의운동의 대두는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의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출발하였다. 또한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독립운동에 참여한 역사적 경험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사회주의로의
사상적 전환은 민족해방에 관한 내재적 전환과정이었다. 이 지역 사회
주의 운동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간략히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중
국・일본과 더불어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 속한 조선에서 유교적 세계
관을 가지고 있었던 유학적 지식인들이 식민지 자본주의의 형성, 근대
적 사회사상의 도입과 더불어 민족주의・무정부주의・사회주의로 분화
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특히 국내에서는 3・1운동 이후 민족주의의
이론적 무기력함을 경험하면서 민족주의자의 일부가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영향은 전통적으로 퇴계학통이라는 학문적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던 이 지역에 아무런 여과 장치 없이 그대로 흡
47) 경북의 각 지역에서 조직된 조선공산당의 구성과 활동내용에 대해서는
그것을 알려줄만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활동양상은 알 수가
없다. 다만 1930년대 적색농업조합・적색노동조합운동 등으로 일제에게
검거될 당시의 <판결문> 등에 기록된 그들의 활동양상을 중심으로 상황
을 파악할 수밖에 없다.
446 東亞人文學 第29輯
수되었던 것이다. 특히, 서울에서 활동하던 지역 출신의 인물과 연결
되면서 각 그룹의 지부적인 성격을 가진 조직체가 유학적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건설될 수 있었다.
둘째, 이 지역의 사회주의 운동은 서울계와 북풍회의 영향을 강하
게 받고 있었다. 당시 사회주의운동은 중앙에서 독자적인 계열을 형성
하고 있었으며, 그 영향은 이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특성
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오던 정치적인 성향과 학문적인 특성에 따라
지역적으로 차별성을 보이면서 자리 잡게 되었다.
셋째, 이 지역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상당수 명문집안 출신이었다.
경북은 전통적으로 토착세력이 강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즉, 임진왜
란 이후부터 급속히 생성되기 시작한 동족집단이 광범위하게 형성되
었던 것이다. 동족집단은 전면적인 생활공동체와 신분제가 형성되어
있었던 곳이다. 특히 이 지역은 양반유림의 동족집단, 즉, 班村이 유
난히 많았다. 이러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 중 그 모습을 정리
해 보면 아래의 표와 같다.
<경북 남부지역의 양반 및 유생 분포 상황>
종별
지역별
양 반 유 생
족성수 호 수 인 구 족성수 호 수 인 구
경 산 1 61 206
영 천 12 1,846 8,292 1 7 30
경 주 9 1,121 5,396 5 357 1,631
포 항 10 656 3,402 2 121 530
왜 관 11 128 5,958
김 천 12 2,013 11,569 13 191 1,020
성 주 13 1,519 6,613 2 72 200
고 령 16 1,386 6,707 3 355 1,636
청 도 11 2,081 9,759 4 208 1,202
선 산 4 205 1,054 1 8 43
합 계 99 11,016 58,956 31 1,319 6,292
※자료: 경상북도 경찰부, ≪고등경찰요사≫(경성: 조선인쇄주식회사,
1934). pp.331~332.
일제강점기 유학적 지식인의 사회주의 수용과 민족운동∣심상훈 447
양반유림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촌은 그 지역의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유리한 마을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었지
만, 이는 법률적인 문제일 뿐이었고, 전통적인 신분관계가 강하게 유
지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일제 강점기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양
반 유림세력이 강한 반촌은 평민 마을이나 농민에게 영향을 미쳤고,
이것은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마을의 집회・계・門會 등에서도 나타났다.
반촌은 옛 질서를 그대로 간직하려는 면과 새로운 사상유입을 통해
본래의 체제를 크게 바꾸지 않으면서 사회변화에 맞추어 가려는 측면
도 있었다. 사회주의세력은 이러한 반촌의 결속력, 그리고 옛 질서 속
에서 민촌에 미치는 그들의 영향력을 유리하게 이용하였다.
넷째, 이 지역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비록 명문집안 출신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그렇게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쉽게 말하는 대지주가 아
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1920년대 초반에 조직된 청년회나 농민운동
단체에 기부금을 낼 정도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부분이 중소
지주 정도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러한 경제력이 이후 소작인회
에서 전개하였던 농민운동에 앞장서는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
리고 농민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를 통해 그들의 고충을 보다듬고, 이
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섯째로, 이 지역의 사회주의운동에서 나타나는 성격은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지역의 사회주의자들은
운동의 목표를 기본적으로 계급운동, 혁명운동에 두고 있었지만, 민족
적 이익을 최우선에 두고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1930년
대 당재건운동과 혁명적 대중운동을 전개하면서, 미조직 대중을 광범
위하게 조직화시킬 수 있었다.
448 東亞人文學 第29輯
Ⅵ. 맺음말
3・1운동 이전의 독립운동 사상은 정치사상에 편중되어 있었다. 그
래서 1910년대까지 復辟主義・保皇主義・共和主義의 논의가 주류를 이
루고 있었다. 정치사상 외에 사회사상이 있었다고 한다면 의병항쟁이
쇠퇴한 뒤에 급부상한 社會進化論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므로 어떤 정
치사상이든 간에 독립운동 방략은 사회진화론에 근거한 準備論이 지
배적이었다.
그러나 3・1운동 뒤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3・1운동의 기본 이념은
정의・인도주의였다. 이것은 약한 놈도 살 권리가 있고, 약한 나라도
독립할 권리가 있다는 사상이다. 이는 제국주의 국가의 절대적인 정신
적 틀이었던 사회진화론에 전면전을 선포한 혁명적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남은 과제는 정의・인도주의를 위한 사회와 세계 개조
의 구체적인 방안을 설정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거기에서 自由主義・
社會主義・無政府主義의 구상이 대두하고 수입되었다. 여기에 이르러
유림도 여러 갈래의 생각으로 나뉘어져 갔다. 그것은 분열 현상이 아
니라 어떻게 하면 인간이 보장되고 독립을 쟁취할 것인가의 고뇌와
발전의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회주의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식민지시기에 민족해방・
계급해방, 나아가 인간해방을 약속하는 이념으로 이 땅에 모습을 드러
냈다. 사회주의가 1920년대 지식인들을 매료시킬 수 있었던 것은 무
엇보다도 민족의 독립과 해방에 대한 약속 때문이었다. 사회주의는 식
민지시기 우리의 민족해방운동에서 결코 지워버릴 수 없는 중요한 구
성부분이다. 이 땅의 사회주의자들은 처음부터 민족적 과제의 해결을
회피하려고 하지 않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헌신했다. 시작부터 한
국사회주의는 하나의 가치로서 도입된 것이 아니라, 민족해방을 위한
수단으로 도입되었던 것이다. 한국사회주의운동사에서 가장 좌경적인
시기였던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에 걸친 시기에도 사회주
일제강점기 유학적 지식인의 사회주의 수용과 민족운동∣심상훈 449
의자들이 이 과제를 방기한 것은 아니었다. 유럽과는 달리 한국에서
사회주의자들은 민족문제의 해결을 중심과제로 상정했기 때문에, 일반
적인 사회주의 이론으로 한국의 모습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점
이 바로 한국사회주의 특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국사회주의는 민족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는데, 이러한 성격은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의 표출이었던 것이다.48)
한국에 사회주의가 수용되고, 변화해가는 과정에서 그것은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다. 경북 남부지역은 비교적 한국
사회주의 운동이 빨리 흡수된 곳이며,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즉,
한국사회주의 각 계파의 이론적인 틀을 정리하는 실험장이었던 것이
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성장한 사회주의자들을 공급받아 새로운 형태
의 민족운동을 추진해 나갔던 것이다. 이 지역의 사회주의운동이 중앙
의 정세 변화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북풍
회와 서울계의 영향 아래서 민족해방운동을 조용하게 실현시켜나가고
있었다. 또한 중앙에서 그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면 지역에서 그 부족
한 역량을 채워나갔고, 인적인 공급처로서 자리매김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이 지역의 사회주의운동은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야
체이카・농민운동・노동운동・청년운동・형평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민족
해방운동으로 이어져 나갔던 것이다.
이 지역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에는 이곳의 명문가 집안 출신들의
유학적 지식인들이 서 있었고, 그들은 지역적인 기반을 매개로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사회주의자들을 양성해 나갔던 것이다. 어쩌면 이들
은 전통과 권위가 허물어져 가는 당시의 시대적인 아픔을 유교를 대
신해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으로 달래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새
로운 이상향의 실천을 사회주의의 민족해방운동으로 표출하고자 했을
48) 이종오, <분단과 통일을 다시 생각해 보며>, ≪창작과 비평≫, 21권 2호,
1993. 이종오는 이 글에서 “한반도에는 사회주의자란 없고 있어 본 적도
없다”며 한반도의 사회주의자란 “모두 민족주의자였고 또 민족주의자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였다.
450 東亞人文學 第29輯
것이다.
이들이 사회주의를 쉽게 수용할 수 있었던 동력을 몇 가지로 정리
해 볼 수 있다. 첫째. 그들의 좌파 논리는 유교 이상주의를 동경한 사
상이거나, 둘째, 유가의 가족이나 향약 등의 공동체 생활의 소산이었
을 가능성이 높다. 周나라 사회를 이상향으로 꾸민 유교 이상주의는
大同思想으로 발전되었지만, 그것은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의 이상과
도 결합될 여지가 많았다. 그에 비해 자유주의가 표방한 개인주의는
오랫동안 공동체 생활을 영위한 유림 정서에는 낯설 수 있었다. 셋째
는 공산주의의 유물론은 儒敎無神論에 접근하기가 쉬웠다. 무신론의
공통성이 유물론을 수용하기가 쉬웠다는 말이다. 넷째는 敎條的인 논
리 방식이 유교와 사회주의가 서로 접근할 수 있는 이유가 되었을 것
이다. 다섯째, 이들이 민중적 지도자였기 때문에 지도자로서 존재 가
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이것은 독립운동에 헌신한 유림이 봉건시대의
유림과는 달리, 혹은 구호나 시혜적 애민과는 달리, 민중 속에서 자신
을 희생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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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論文은 2014年 11月 15日 投稿 完了되어 2014年 12月 15日까
지 審査委員들이 審査하고, 2014年 12月 20日까지 審査委員 및 編
輯委員會議에서 揭載로 判定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유학적 지식인의 사회주의 수용과 민족운동∣심상훈 453
Confucian Intellectuals' Acceptance of Socialism and
Nationalist Movements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Period :
Focusing on the Socialist Movement in the Southern Area
of Gyeongbuk Province in the 1920s
Shim, Sang-Hun (Advanced Center for Korean Studies)
<Abstract>
This study is intended to examine the socialist movement in the
southern area of Gyeongbuk Province in the 1920s. The study also aims
to understand how Confucian intellectuals were quick to accept socialism
in this region and what they thought of the doctrine.
In the process of its being accepted in Korea, socialism spread
quickly unfiltered into various regions. The southern area of Gyeongbuk
Province welcomed the Korean socialist movement more eagerly than
other regions, playing its role in the movement. In other words, this area
was an experimental laboratory where theoretical frames of each socialist
faction were tried and established. This area promoted a new type of
nationalist movement with socialists who were reared here in this region.
Though this area was sometimes quick to respond to situational changes
in the central area of Seoul in promoting its socialist movement, mostly
it quietly pushed ahead with the nationalist liberation movement under
the influence of some socialist groups such as the Bukpunghoe and the
Seoulgye. When the central area of Seoul couldn't play its proper role,
this area offset the shortage, providing human resources for the activity
454 東亞人文學 第29輯
and taking its place firmly. Based on this active role, they led the
socialist movement to various types of nationalist liberation movements
such as the Goryeo Communist Youth Yacheica (a Russian word, ячейка
meaning a cell ), the Peasantry Movement, the Labor Movement, the
Youth Movement, and the Equality Movement.
At the center of the movement in this area stood Confucian
intellectuals from prestigious families. They fostered socialists to lead the
next generation based on their regional ground. It can be thought that
this was because they wanted to mitigate the suffering of the times,
when the tradition and authority collapsed, by replacing the Confucian
ideology with a new ideology of communism. They are thought to have
sought to create a new utopia through the socialist movement in the
form of the nationalist liberation movement.
This area was able to develop a socialist independence movement
actively owing to two kinds of ideology: the traditional Confucianism and
the contemporary Marxism. Confucian intellectuals strongly needed a
modern system of thought to take the place of the traditional dominant
ideology of Confucianism, and could easily accept Marxism. As the
philosophy of Confucianism was regarded as out-of-date, they had no
other choice but to accept Marxism as an ideology and philosophy to
meet the needs of the new age. Referring to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this area and other regions of Gyeongbuk Province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Period, the tradition of Confucianism can be said to
have paved the way for Marxism.
Key Words:Socialism (Socialist Movement), Nationalist Movement,
Joseon Communist Party, Ideology Groups, Youth
Movement, Labor Movement, Confucian Intellectua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