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세계는 모든 예술의 시발점인 동시에 그 종착역이며, 시를 모르고 인생을 산다는 것은 그만큼
생활의 가난함을 뜻한다고 한 말을 어디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나는 학창시절부터 시를 좋아했다. 많은 시 중에서도 김소월의 ‘산유화’, 박목월의 ‘나그네’와
‘윤사월’, 조지훈의 ‘승무’, 한용운의 ‘님의 침묵’,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
이육사의 ‘광야‘, 윤동주의 ’별헤는 밤‘ 등은 수시로 들여다 보며 깊는 명상에 잠기기도 한다.
궁궐클럽의 이현경 운영위원의 시도 가끔 꺼내어 본다. ’잠그지 못한 그리움‘, ’그대에게 나는‘이란
시 등을 그가 펴낸 두 권의 시집에서 읽는다.
그리고 당시에 속하는 여류 시인 설도의 춘망사를 보며 이루지 못한 사랑을 아파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춘망사의 4련 중 3련은 김억이 번역하고 김성태가 작곡한 ’동심초‘라는 노래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동심초라는 시를 알게 되면서 노래를 부르니 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
원래 시란 가장 극단적인 주관의 산물이어서 시를 보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위의 시를 가끔 읽고 낭송하며 인생을 돌이켜 보게
된다. 그 시들을 읽을 때 마다 감흥이 일어나며 열락을 느낀다.
꽤 오래전부터 짧은 시를 접하며, 그것이 주는 감흥이 긴 시 못지 않게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00년 여름 쯤이었다고 생각되는데, 내가 근무하던 회사의 사보에서 정지용의 ’호수‘란 시를 보게
되었다.
호수/정지용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이 시를 읽으며 짧은 시도 이렇게 큰 감동을 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보고픈 마음
호수만 하니...‘라고 했다. 얼굴은 손바닥이 둘이니 둘을 펼치면 안 보이게 다 가릴 수 있지만, 보고픈 마음은 손바닥 둘로 가릴 수 없다. 호수만큼 크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감탄한 것은 그리움을 호수로 비유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움이 더욱 크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 후 10여 년 후 고은의 ‘그 꽃’이란 시를 읽으며 또 다시 짧은 시가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 그 꽃/고은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단 두 줄에 불과하지만, 이 시는 인생을 관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너무나 바쁘게 살아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올라갈 때는 빠르게 올라갈 생각에 주위를 살펴볼 여유를 갖지 못한다.
빨리 정상을 봐야 하니까. 내려갈 때에야 비로소 찾던 것이 보이는 까닭은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
아닐까? 고희에 이른 내 나이에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다니.....
다시 몇 년 전 우연히 고은의 ‘저녁 무렵’을 읽게 되었다.
저녁 무렵/고은
“절하고 싶다/ 저녁 연기/ 자욱한 먼 마을”
나는 이 시를 카톡에 저장해 두고 가끔 꺼내서 읽는다. 그러면서 절하고 싶은 대상들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본다. 한 줄에 불과한 시가 이렇게 감동을 줄 수 있을까? 나는 이 시를 읽으며 내 고향 앞에 있는 내성천의 저녁 무렵을 생각해 본다. 여름 해거름 무렵 물고기가 여기저기서 뛰어오르고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는 광경을 떠올린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가슴 뭉클한 감동이 솟아 오른다. 그 모습에 그냥 절하고 싶은 마음이다.
얼마 전 우연히 고은의 '비로소'란 짧은 시를 접했다.
비로소/고은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들여다보았다.
노를 젓는 일을 일상으로 보면, 수없이 노를 저어야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듯 모를 젓는 일은 인생일 것이다. 순탄치만은 않은 세상살이에 노를 놓쳐 보고서야 넓은 물, 애가 겪은 것 보다 드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는 자기 성찰적 시로 생각된다.
얼마 전 박유미 시인의 거울이란 시를 접하게 되었다. 지극히 짧은 시지만 말이 필요 없이 그냥 마음에 닿았다.
거울 /박유미
여자는 절망하고 남자는 만족한다
또 길거리에서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를 보며 한낱 버려지는 연탄재를 보며 어떻게
이렇게 뜨거운 의미를 새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읽었다..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 1’이란 시도 거리 곳곳에 걸려 있다. 짧지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 시라는
생각이 든다. 아주 오래 봐야만 알 수 있는 너의 매력이 아닌가.
풀꽃 1/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짧은 시가 대세는 아니겠지만, 짧은 시가 주는 감동은 긴 시에 못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첫댓글 함축~
짧으면서 독자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시가 정말 좋은 시입니다ㆍ
시인들이 어려워하는 부분이지요ㆍ
회장님,
올려주신 글~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ㆍ
현경씨도 짧은 시를 가끔 쓰시죠? 혹 지금까지 짧은 시 쓰신 것이
있으면 올리시죠.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다더니 시인 앞에서 아마추어가 시에 대해 얘기했네요.
양해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