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플레비언나비공동체 원문보기 글쓴이: 남산
◇ 나성영락교회 청년수양회 (빅베어수양관)
회사 생활은 내게 힘겨운 노동의 현장이었으나 적지 않은 추억도 남겼다.
멕시코에서 온 아주머니들은 나를 조카처럼 대해주었다.
어느 날 공장의 한 백인 직원이 나에게 와서는 자신이 갖고 있던 다트(Dodge Dart)라는 밤색의 오래된 차를 처분할 계획인데 인수할 생각이 없냐고 의사를 물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집에 차가 하나뿐이라 불편하기 짝이 없었고, 개인적으로 활동에 자유가 전혀 없었던 나는 그의 제안을 감사히 받아들였다.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그 백인은 나에게 500불만 내고 가져가라고 했고, 외형은 낡았어도 에어컨이 나오고 운행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 마치 탱크 같은 그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중고차를 집에 가져오기 몇 주 전, 미국 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운전면허가 필수라는 주위 분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필기시험도 준비했다. 그때는 한인타운의 상가들을 소개하는 전화번호부가 몇 종류 있었는데, 그 책들은 고객의 주의를 끌기 위해 운전 필기시험집을 여러 개 실어놓았다. 영어와 한국어로 준비된 면허 필기시험문제를 여러 개 풀어 보고 떨리는 마음으로 면허시험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공부하며 풀어 보았던 예상 문제 중 80퍼센트 이상이 출제되어 어렵지 않게 시험에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실제 운전시험에서 발생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집에 있던 현대 포니를 운전하며
시내를 질주했기에 운전에는 자신이 있었고 단번에 통과할 것으로 예상했다.
아버지의 말리부로 운전면허시험장에 들어선 나를 기다리고 있던 시험관은 짧은 인사를 나누자마자 옆 조수석에 앉았다. 그는 나의 능숙한 운전 솜씨를 아무 말 없이 지켜보는 것 같았다. 그러다 좌측 통행 신호를 넣어 보라, 비상 신호를 넣어 보라 등등을 주문하였다. 운행 중에 일어나는 갑작스러운 그의 요청도 내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시 시험장으로 돌아오던 바로 그때 내 차 앞에서 무단횡단하려는 사람이 보였다.
시험관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를 날카롭게 쏘아보며, “Stop the car!”라고 단호한 목소리로 정차를 명했다. 나는 너무 놀라 재빠르게 차를 세웠다. 그는 나에게 “길을 건너려는 사람이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간에 발걸음을 차도에 내디뎠을 때, 운전자는 무조건 사람을 배려해서 차를 세워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시험관은 “Fail!”이라고 불합격을 외치고는 자리를 떴다. 아뿔싸, 나는 차 위주의 한국식 운전 습관에 익숙했고, 사람 위주로 차를 운행해야 한다는 기본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미국 도로 주행에 관한 관습을 배우기 위해 운전면허 학원의 전문 강사에게 두 시간 정도를 교습받았다.
단 두 시간뿐이었지만 운전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전환시켜 준 고마운 배움이었다. 얼마 후에 다시 시도한 주행 시험에 합격하여 내 주머니에는 몇 장의 달러와 함께 면허증이 자리 잡았다. 비로소 더 이상 여권을 갖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형편이 된 것이다. 내 소유의 차가 있다는 것은 가족을 뒤로하고 개인적인 일정을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생명줄과도 같이 소중한 수단을 얻게 된 것이다.
◇ 청년회 시절 매주 모여 찬양했던 최두열, 박준호와 함께
퇴근하면 공장 앞에서 아버지를 기다려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해 잠시의 휴식을 취한 후 아버지, 나, 남동생은 다시
한 차에 올라타고 저녁마다 한인타운의 은행들을 돌아다니며 청소를 했다. 그렇게 두 가지 이상의 일을 해야 겨우 먹고살 수
있는 이민살이였다. 진공청소기와 각종 청소도구를 차에 싣고서 이 은행 저 은행을 전전하며 은행 안팎을 청소하였다.
이미 새벽부터 일어나 일한 터라 피곤이 몰려오곤 하였으나 대한민국 육군 병장 제대를 성공적으로 마친 나에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다만 50이 넘은 아버지가 늘 마음에 걸렸다. 서울에서는 중견회사의 대표로 지낸 아버지가 해보지 않던 막노동을 하신다는 게 마음을 힘들게 했다. 그러나 다른 도리가 없었다. 마치 삼총사처럼 세 남자는 얼마동안 꿋꿋하게 두 가지 일을 해냈다. 지금은 교수로 목사로 자신의 전문성을 가지고 보람있게 사는 남동생도 별 불평 없이 가족의 어려움을 도왔다.
매일 계속해서 일만 했다면 아마도 이민 생활을 오래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고단한 가운데 만났던 수요일 저녁예배와 주말에 있는 제자훈련, 그리고 주일에 드리는 예배가 나에게 살아갈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당시 나성영락교회는 피코성전으로 불렸으며 김계용 담임목사님이 활기차게 목회하던 시기였다.
유대인 회당이었던 곳을 개신교 성전으로 개조하여 사용했던 터라 교회당의 크기에 비해 주차시설은 턱없이 부족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회당에 오니 큰 주차장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급성장한 나성영락교회는 이민 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나날이 부흥하였다.
김계용 목사님은 한국의 장로회신학대과 미국의 덴버신학교를 나와 대구와 서울, 브라질에서 다양한 목회 경험을 하신 분이다. 40년 동안 북한에 두고 온 아내와 아들을 그리워하며 독신생활 하시던 모범적인 목회자였다. 무엇보다 성경 중심의 설교를 하던 넉넉한 인품과 욕심 없는 성직자였다. 1921년생이었던 목사님은 내가 미국에 이민하여 적응하던 시절에는 아직 50대 중반이었는데도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능숙한 목회자였고 어느 한 면도 모나지 않은 인격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번은 내가 나성영락교회 청년회 부회장을 맡아 빅베어수양관으로 당시 청년수양회의 강사였던 김 목사님을 모시고 가다가 세종회관이라는 식당에서 식사를 대접한 일이 있었다. 목사님께 값비싸고 맛난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던 나는 “목사님, 뭐 드시겠어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나야 그저 순대국이지 뭐”하시던 소박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수양회를 인도하던 중 친구 김경환(후일 목사/선교사)이 “목사님, 기도는 어떻게 얼마나 하세요?”라고 다소 당돌한 질문을 공개적으로 했는데, 김 목사님은 “새벽부터 말씀을 인도하며 자주 하지만, 어떤 때는 앉아서도 어떤 때는 누워서도 기도한다”고 하시며 껄껄 웃으시던 모습이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다.
아무튼 김계용 목사님으로 인해 수많은 젊은이가 목회를 동경하게 되었고 목회자의 삶이 고결하다는 걸 배울 수 있었다. 늦깎이 대학생으로 다소 나이를 먹어 미국 이민 길에 올랐던 나의 동기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들은 거의 모두 김 목사님의 간결하면서도 구수한 설교에 매료되어 자신들의 삶을 그리스도께 드릴 수 있었다.
또한 훗날 필라델피아의 빌립보교회를 담임했던 송영선 목사님이 나성영락교회의 전도사님으로 계실 때, 그분의 열정적인 대학부 사역으로 인해 나를 비롯한 청년들이 헌신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매주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오전에 청년들을 위해 성경 공부를 가르치며 제자훈련에 매진하였다. 게다가 우리들의 개인적인 습관과 삶에도 깊이 관여하곤 했는데, 심지어 큐티 노트까지 거둬서 읽어보며 사인까지 해서 돌려주는 정성을 기울였다.
당시 탈봇신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했던 그는 미국에 사는 한국 사람으로서 문화와 언어와 역사를 잘 이해하고 통섭하여야 함을 강조하며 탁월한 삶을 살아가도록 격려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되기보다는 생각과 행동, 의지가 통합되는 능력의 그리스도인이 되어 사회 속에서 건강한 지도자로 성장하길 바랐고, 특히 성경 암송과 전도에 역점을 두어 매주 젊은이들의 마음에 뜨거운 성령의 불을 질렀다.
나 또한 그렇게 불타오른 사람 중의 하나였으며 김계용 목사님의 설교와 인품에 감동한 우리는 송영선 전도사님의 구체적인 훈련으로 다져져서 목회자로, 그리고 신학자로서의 든든한 기초를 세워나갔다. 주중에는 삶의 터전에서 치열하게 살았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낙을 누리던 시절이었다. 1983년에서 1986년까지의 이 시기를 내 인생의 찬란했던 황금기로 기억한다.
김도일은 장신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로 한국기독교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다음 세대를 세우고, 가정교회마을연구소 공동소장으로 이 땅 위에 하나님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힘쓰고 있다. 이 지면을 통해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며 이끌어 오신 그분의 발자취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김도일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cnews197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