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주 대첩
1. 개요
제3차 여요전쟁의 마지막 날인 1019년 2월 1일, 강감찬 장군과 강민첨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이, 귀주성(龜州城) 앞 평원에서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을 크게 물리친 전투. 약 25년에 걸쳐 이어진 여요전쟁의 대단원의 막을 내린 전투다.
2. 배경
전쟁의 배경
1011년, 제2차 여요전쟁 당시 고려 현종은 몽진의 시간을 벌고자 요 성종에게 거란까지 찾아가 친조하겠다고 약속했다.
1012년, 고려 현종이 친조의 약속을 지키지 않자, 요 성종은 강동 6주를 대신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1013~1017년, 거란이 7차례나 국지전을 벌이고, 동여진 해적들이 노략질해 고려의 피해가 수만명에 달했다.
거란군의 남하(직도)
1018년 12월 초, 거란이 소배압(蕭排押)을 도통으로 10만의 대군으로 본격적인 침공을 시작했다.
1018년 12월 10일, 대장군 강민첨이 12,000명의 기병으로 삼교천(三橋川, 흥화진 앞)에서 거란군을 크게 패배시켰다. (삼교천 전투)
1018년 12월 중, 대장군 강민첨이 자주(慈州, 순천시)의 내구산(來口山)에서 거란군을 크게 패배시켰다.
1018년 12월 중, 시랑 조원이 마탄(馬灘, 승호군)에서 거란군 1만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개경을 지킨 현종
1018년 12월 26일, 고려 현종이 개경에 계엄령을 내리고, 주변 일대에 청야 전술을 폈다.
1019년 1월 2일, 서북면 강감찬 본대에선 김종현이 정예기병 1만을 이끌고, 동북면에선 병사 3300이 개경으로 남하를 시작했다.
1019년 1월 3일, 거란군이 신은현(新恩縣, 신계군) 평야에 이르러 진을 폈다.
1019년 1월 4일, 거란군이 야율호덕(耶律好德)을 보내 거짓으로 철군하겠다고 알리며 300기의 군사를 금교역(金郊驛, 금천군)의 협곡에 숨겨, 개경의 경계가 완화될 경우 성에 잠입하고자 했다.
하지만 고려 현종은 이에 속지 않고 야간에 이들을 역으로 기습하여 전멸시켰다.
이에 소배압은 신속히 철수를 결정한다.
거란군의 북상(퇴각)
1019년 1월 23일, 해안길 방면을 영주성의 고려군이 틀어막았기에 소배압은 내륙길을 택했고, 거란군이 청천강을 건널때 남쪽의 연주(漣州, 개천군), 북쪽의 위주(渭州, 영변군)에서 원수 강민첨 대장군(大將軍) 기병대에 유격당하여 500여급이 죽었다.
1019년 2월 1일, 고려군이 내륙길의 마지막 관문인 귀주성(龜州城) 앞 평원에서 거란군을 막아섰다.
3. 전개
3.1. 양 군 모두 배수진을 친 대회전
(남쪽 정주시 방향에서 온)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 본대가 귀주성의 남쪽 하천 건너편에 도달했다.
(동쪽 태천군 방향에서 온)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 본대도 귀주성의 동쪽 하천 건너편에 도달했다.
고려군이 먼저 하천을 하나 건너 평지로 내려오기 시작하자, 거란군도 퇴각이 아닌 전투를 결정했다.
다수의 거란 장수들은 고려군이 두 하천을 건너 오게끔 유도하자고 주장했다. 도감 야율팔가 혼자서 이를 반대하며 거란군도 하천을 하나 건너 싸울 것을 제안했고, 소배압이 이 의견을 따랐다.
양측 모두 하천을 하나씩 건너, 귀주성 앞 동남쪽 평원에서 둘 다 배수진을 치고, 대회전(會戰)을 하게 되었다.
(거란) 군사들이 다하(茶河), 타하(陀河) 두 강을 건널 즈음에 추격하는 고려의 군사들이 쫓아왔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고려의 군사들로 하여금 두 강물을 건너게 한 다음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야율팔가 혼자서만 안 된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적들이 만약 두 강물을 건너게 되면 반드시 결사적으로 싸울 것인 바, 이는 위태로운 방법입니다. 그러니 두 강물 사이에서 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소배압이 그 의견에 따라 두 강물 사이에서 싸웠다.
《요사》, 권 80
3.2. 기병대와 남풍의 등장
양측은 승패가 나지 않으며 전투가 장시간 이어졌다.
1월 2일 남하했던 김종현의 기병대가 돌아왔다.
기병대가 나타난 순간 바람도 북풍에서 남풍으로 바뀌며, 소나기가 찾아왔다.
고려군이 기세를 타고 분발하여 몰아붙이자, 거란군은 하천 쪽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거란(契丹)의 병사들이 구주(龜州)를 지나가자 강감찬(姜邯贊) 등이 동쪽 교외에서 마주하여 싸웠으나 양쪽 진영이 서로 대치하며 승패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김종현(金宗鉉)이 병사들을 이끌고 도달하였는데, 홀연히 비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와 깃발들이 북쪽을 향해 휘날렸다.
아군(고려군)이 그 기세를 타고 분발하여 공격하니, 용맹한 기운이 배가 되었다.
《고려사절요》 권3
3.3. 고려군의 포위 및 추격 섬멸
원수 강민첨 대장군이 북을 치며 힘써 돌격을 명했다.
석천(石川, 황화천(皇華川)) 전투 -
거란군이 석천을 건널 때 고려군은 활을 쏘았다.
거란 황제 직속 최정예인 천운군, 우피실군 중 빠져 죽은 자가 많았다.
거란 지휘부 중에선 아과달, 작고, 고청명, 소해리 등이 죽었다.
반령(盤嶺, 팔영령(八營嶺)) 전투 -
거란군이 반령 벌판에서 석천에서보다 더욱 큰 피해를 입었다.
소배압은 거란군에게 갑옷과 병장기도 버리고 도주를 명했으나, 살아 돌아간 이는 수천에 불과했다.
전투가 끝나자 시체가 들을 채우고, 갑옷, 투구, 병장기, 말 등 노획물은 길거리를 가득 메웠다.
고려군은 붙잡은 거란군 1만 이상을 포로로 삼거나 참수했다.
이 달에 소배압(蕭排押) 등이 다하(茶河)와 타하(陀河)에서 고려와 전투했는데, 요의 군대가 불리했다.
천운군(天雲軍)과 우피실군(右皮室軍)에서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많았으며, 요련장상온(遙輦帳詳穩) 아과달(阿果達), 객성사(客省使) 작고(酌古), 발해상온(渤海詳穩) 고청명(高淸明), 천운군상온(天雲軍詳穩) 해리(海里) 등이 모두 죽었다.
《요사》 권 115 <열전>45
다하와 타하를 건널 적에 적(고려군)이 협공해서 활을 쏘자, 소배압이 갑옷과 병장을 버리고 달려왔던 바 이로 인하여 파면되었다.
《요사》 권 88 <열전>18 <소배압고>
소배압 등이 고려와 다하(茶河)ㆍ타하(陀河)에서 전투했으나 크게 패배했다.
《송사》 <요열전>
거란군이 북쪽으로 달아나자 아군이 그 뒤를 쫓아가서 공격하였는데,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기까지 쓰러진 시체가 들을 가득 채우고, 노획한 포로·말·낙타·갑옷·투구·병장기는 이루 다 셀 수가 없었으며, 살아서 돌아간 적군은 겨우 수천 인에 불과하였다. 거란의 병사들이 패배한 것이 이때처럼 심한 적이 없었다.
《고려사절요》 권3 #
강민첨(姜民瞻)이 원수(元帥)가 되어 북을 치며 힘써 돌격하여 반령(盤嶺)의 들판에서 크게 패배시켰으니, 거란군이 퇴각하면서 창과 갑옷을 내버려 길거리를 가득 메웠다. 강민첨은 이에 10,000명을 포로로 잡거나 참수하였다.
《고려사절요》 권4 #
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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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의 전후 처리
고려 현종은 기뻐서 임시 누각을 짓고 승전군을 맞이하며, 강감찬의 손을 잡고 황금꽃을 주고, 9000여명을 포상했다.
요 성종은 분노하여 소배압의 얼굴 가죽을 뜯어내고 죽이겠다고 했으나 파직에 그쳤고, 공이 있는 장수들을 포상했다.
양국의 관계 복구
고려 현종이 요 성종에게 예전처럼 '번국(藩國)'을 칭하고 공물을 바치게 해줄 것을 요청하며, 억류했던 야율행평을 돌려보냈다.
즉, 조공-책봉관계의 복구를 '요청'하였다.
고려의 요청을 받은 요 성종은 이를 '허락'했다.
이는 양국이 대등한 관계로 변하거나 혹은 입장이 뒤바뀌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한편으로는 전쟁의 원인으로 삼던 '고려 왕의 친조', '강동 6주 반환' 같은 무리한 요구들을 다시 강요하지도 않았다.
주변국들의 고려와의 교류 증가
동여진, 서여진, 불내국, 흑수말갈, 철리말갈, 송나라 등이 사신단과 토산물을 보내왔다.
고려가 동해상의 동여진족 해적들도 소탕하거나 외교적으로 처리하자, 우산국, 탐라국, 일본(헤이안 시대) 주민들이 평안하게 되어, 고려와 교류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