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교서(敎書)
세종, 상정소에 교서를 내려 지방의 사형 해당범에 대한 국문 절차를 알리게 하다
상정소(詳定所)에 교서를 내리기를,
“형옥(刑獄)의 사건이 애매하여 밝히기 어려운 것은, 한두 사람이 판단 결정할 것이 아니다. 지방의 사형 해당범에 대하여는 차사원(差使員)을 따로 정하여 온 고을의 수령과 함께 심문하고, 감사가 직접 물어본 뒤에 형조에 공문을 보내도록 하는 것이 벌써 법으로 마련되어 있으나, 관리가 심문하는 중에 혹은 보는 점이 같지 않든가, 혹은 방법이 서툴러서 살릴 것을 죽이고, 죽일 것을 살리는 수가 간혹 있다.
지금부터는 차사원이 본고을의 수령과 같이 심문하여 감사에게 보고하고, 감사는 다른 고을에 옮기어 가두고 다시 다른 차사원 두 사람을 선정하여 심문한 뒤에, 감사가 직접 물어보고 나서 형조에 공문을 이송하도록 항식(恒式)을 삼으라.”하였다.
○下敎于詳定所曰:
刑獄之事, 暖昧難明, 非一二人所能辨析也。 外方死刑, 別定差使員, 同本官守令推劾, 監司親問, 然後移關刑曹, 已有成憲。 然官吏於推劾之際, 或所見不同, 或昧於施爲, 以生爲死, 以死爲生者, 間或有之。 自今差使員同本官守令推考, 報于監司, 監司移囚他官, 更定他差使員二人考覈, 然後監司親問, 移關刑曹, 以爲恒式。
세종, 각도에 감사를 파견할 때 교서를 주어 보내기로 하다
임금이 말하기를,
“각도에 감사를 파견할 때에, 태조께서 실시하던 좋은 법을 따라 교서(敎書)를 주어서 보내기로 하여, 벌써 초안을 만들게 하고, 미처 대신들과 상의하지 못하였노라.”
하니, 찬성 허조(許稠) 등이 모두
“좋습니다.”
하였다. 조가 또 아뢰기를,
“각도의 감사가 3품 이하면 직접 처결하고, 2품 이상은 보고하여 올리는 것으로 벌써 규례가 되어 있는데, 근자에 전라 감사 신개(申槪)가 정례(定例)를 따르지 않고 순천 부사(順天府使) 김위민(金爲民)에게 죄를 줄 것을 청해 왔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개가 이 법이 《육전(六典)》에 기록되지 않은 줄 알고 잘못 청한 것인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교서를 썼다면 《육전》에 기록되지 않았더라도 의심할 것이 없다. 감사에게 뿐 아니라, 수령에게까지라도 모두 교서(敎書)를 내리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조(稠) 등이 아뢰기를,
“수령의 수가 하도 많으니 너무 번폐스러울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 사람의 말에, ‘언제나 눈으로 보고, 언제나 마음으로 조심하여야 자기의 마음을 바로잡는 방법을 얻는다.’ 하였으니, 수령된 사람이 마음에 반성하며 법을 만드는 데는 특별히 교서를 내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또한 재래의 교서에서는 칭찬하는 말이 실정에 지나치는 일이 많은데, 이것은 매우 옳지 못하다. 내가 옛 책을 보니, 교서란 임금이 신하를 권유하는 의의를 가진 것이니, 이제 교서를 쓰는데 실정에 지나친 칭찬을 전부 버리고, 다만 백성을 다스리며 직책을 받드는 데 대한 말만을 적어서, 자기의 명분을 돌아보고 의의를 생각하여 공경히 직책을 다하게 해야 된다.”
하니, 모두
“좋습니다.”
하였다.
○上曰: "欲於差遣各道監司之時, 倣太祖之良法, 授敎書以遣, 已令立草, 時未議于大臣矣。" 贊成許稠等皆曰: "可。" 稠又啓: "各道監司三品以下直斷, 二品以上啓聞, 已行格例。 近者全羅監司申槪不遵定例, 請順天府使金爲民之罪。 臣恐槪疑此法不錄於《六典》, 而妄請之也。" 上曰: "用敎書則雖不錄《六典》, 無疑矣。 非特監司, 亦於守令, 皆授敎書何如?" 稠等啓: "守令之數猥多, 似乎煩碎。" 上曰: "古人云: ‘常接乎目, 每警乎心, 然後治心之要得矣。’ 使守令省心奉法, 無如特授敎書。 且古之敎書, 譽辭過實, 甚不可也。 予稽古典, 敎書, 人君所以勸誘人臣之義, 今製敎書, 一除過情稱譽之言, 只錄臨民奉職之語, 使其顧名思義, 敬供職事可也。" 僉曰: "可。“
세종, 교서를 내려 시산 각품의 청을 들어 공물을 바치게 한 자 등의 치죄를 밝히다
교서를 내리기를,
“옛적에 벼슬하는 사람은 채마전(菜麻田)의 채소를 뽑아 버리며, 베짜는 여자를 내보내기까지 하며 염치(廉恥)를 기른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백성에게 구차하게 받아 먹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사대부는 이미 노비[臧獲]가 있고, 또 토지를 받고 있으니, 살림이 넉넉지 못하다 할 수 없다.
비록 놀고 있다 할지라도 부모 봉양과 자녀 교육을 해 나아갈 수 있고, 더구나, 현직에 있는 사람은 녹을 받고 있는데도 오히려 부족하여, 수령에게 요청하여 공물(貢物)을 대납(代納)하고 갑절이나 되는 수량을 백성에게 받아들이니, 공인(公人)이나 장사아치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 태연스럽게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고 있으니 매우 절조가 없는 일이다.
이제부터는 수령이 시산(時散) 각품(各品)의 청을 들어주어 공물을 바치게 한 자에 대하여는 ‘교지(敎旨)를 따르지 아니한 죄’로써 논하고, 마음대로 대납(代納)한 자에 대하여는 ‘장물죄(臟物罪)’로써 처단하고 다시는 등용하지 말게 하라.”하였다.
○下敎曰:
古之當官者, 至有拔園(蔡) 、去織婦, 以養廉恥, 其不苟取民可知矣。 本國士(夫) 夫, 旣有臧獲, 又受土田家産, 不爲不周, 雖處散地, 足以仰事俯育, 況居官者旣受其祿, 猶爲未足, 請於守令, 代納貢物, 倍數取民, 無異工商, 恬不爲愧, 甚爲無節。 自今守令聽時散各品之請, 令納貢物者, 論以敎旨不從; 濫行代納者, 坐贓抵罪, 不復敍用。
세종, 윤회가 각도의 감사에게 내리는 교서를 지어 올리다
예문 제학(藝文提學) 윤회(尹淮)가 각도의 감사에게 내리는 교서(敎書)를 지어 올렸는데 이르기를,
“임금은 이르노라. 백성은 오직 나라의 근본이요, 정치는 백성을 기르는 데에 있으니, 백성의 생활을 풍족하게 하여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하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급선무다. 생각하건대, 나는 덕이 적은 사람으로서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여, 나라를 지킴에 있어서 아침 저녁으로 공경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백성을 보호할 것을 생각하여, 날마다 대신과 함께 문무(文武)의 인재를 뽑아서 군대와 백성의 책임을 맡기기 위하여, 직접 그들을 불러 보고 경계하고 타일러서, 정치와 송사(訟事)가 잘 처리되어 백성과 만물이 모두 편안하며, 군대는 용감하고 무기가 정예하여, 국경이 안정되어 우리 조종(祖宗)의 어렵고도 위대한 업(業)을 받들기를 바라왔었다.
그러나 넓은 영토의 수령과 방진(方鎭)의 많은 관원들에게 이목이 미치지 못하는 바이니, 어리석은 무리들이 요행으로 출세하여 우리 백성을 해치며 나라의 운명을 병들게 하는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마땅히 상벌(賞罰)을 밝히어 권장하고 징계를 보여야 되겠다. 누가 이 직위에 있어야 하겠는가. 경(卿)을 명하여 관찰사(觀察使)로 삼아 지방의 풍속을 살피는 책임을 맡기며, 출척(黜陟)의 권한을 전담하게 하는 바이니, 경은 앞으로 내가 백성을 보호하는 뜻을 본받아 공정한 마음으로 나쁜 것을 물리치고 좋은 것을 드러내며, 좋은 사람을 포창하고 나쁜 사람을 깎아내려, 경이 관할하는 지역으로 하여금 내가 직접 가서 보살피는 것과 같게 하라.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두루 받아들이고, 국가의 덕을 베풀며 백성의 사정에 정통하여 모르는 것이 없게 하라. 선량한 사람은 자발적으로 고무되며, 나쁜 놈들은 두려워함을 알게 하라. 모든 백성은 생활에 기쁨을 느끼며 건설에 힘쓰는 마음이 생기고, 군대는 윗 사람을 친근히 하며 어른을 섬기는 의리를 알 것이다. 그리하여 농촌에는 근심과 탄식하는 소리가 영원히 없어지고, 국가의 원동력을 배양하여 함께 좋은 정치를 이룩하게 하라.
이것이 내가 경을 임명하는 목표다. 수령이나 장수로서 만일 욕심을 부리고 백성을 해치며 법을 무시하는 자, 또는 잔약하여 역량이 없는자 및 통솔함에 있어 방법을 어긋나게 하는 자가 있거든, 2품 이상은 보고하여 처단할 것을 청하고, 3품 이하는 직접 처리[區處]할 것을 허락한다.
아아, 제도를 만들어 인정(仁政)을 베푸는 데 있어서, 나는 반드시 외로우며 곤궁한 사람[鰥寡]부터 먼저 구제하려 하노라.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고 떠나는 시간부터 경은 맑은 행정에 마음을 가질지어다. 가서 그대의 직책을 공경히 받들어 내가 명하는 것을 잊지 말지어다.”하였다. 이 글은 일반적으로 통용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藝文提學尹淮, 製賜各道監司敎書以進:
王若曰: 民惟邦本, 政在養民, 厚民生以固邦本, 爲國之先務也。 惟予寡德, 嗣守丕基, 夙夜祗懼, 思欲懷保小民, 日與大臣, 選文武之材, 授軍民之任, 親自引見, 誡諭丁寧, 庶幾政平訟理, 民物阜安, 士勇兵精, 邊境寧謐, 以克承我祖宗艱大之業。 然四境之廣、守令方鎭之衆, 耳目之所不逮, 又安知闟(葺) 之徒, 僥倖而進, 以毒吾生靈, 而病國脈哉? 宜明賞罰, 以示勸懲。 疇咨在位, 命卿爲觀察使, 委觀風之任, 專黜陟之權。 卿其體予保民之意, 宣乃至公之心, 激濁揚淸, 褒善貶惡, 使卿部內如予親至, 諏謀度詢之必於周, 宣德通情而無所蔽, 善良自奮, 姦猾知畏, 黎元懷樂生興事之心, 士卒知親上事長之義, 俾田里永絶愁歎之聲, 以培養國家之元氣, 同底于治, 是寡人命卿之志也。 守令將帥, 如有貪殘不法、罷軟無能與夫撫馭乖方者, 二品以上, 申請科斷, 三品以下, 聽從區處。 於戲! 發政施仁, 予欲必先於鰥寡; 登車攬轡, 卿其有志於澄淸。 往欽乃職, 毋廢予命。 蓋通行之文也。
세종, 장흥 부원군 마천목의 졸기
장흥 부원군(長興府院君) 마천목(馬天牧)이 졸하였다. 천목은 장흥부(長興府)의 속현(屬縣) 회령(會寧) 사람으로, 홍무(洪武) 신유년에 산원(散員)에 보직되어, 누차 승진 천전(遷轉)한 끝에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다. 기묘년에 상장군(上將軍)으로 전임되고 신사년에 익대 좌명 공신(翊戴佐命功臣)의 칭호를 내렸으며, 곧 이어 동지총제(同知摠制)로 승진, 임진년에 전라도 병마 도절제사ㆍ판나주목사(判羅州牧使)로 나갔고, 갑오년에 장흥군(長興君)에 봉해졌다. 병신년에 도총제(都摠制)가 되었다가 다시 전라도 병마 도절제사로 나갔고, 계묘년에 판우군부사(判右軍府使)로 승진되었다.
기유년에 치사(致仕)하기를 비니 특히 장흥 부원군(長興府院君)을 제수하고, 예조에 명하여 잔치를 배설해 전별하게 하고 녹봉을 전과 같이 주게 하였는데, 향년이 74세이다. 부음(訃音)을 아뢰니 조회를 3일간 정지하였으며, 내사(內史)에게 명하여 가서 조문하게 하고, 쌀ㆍ콩 아울러 30석과, 종이 1백 권을 부의(賻儀)로 내렸다. 또 예관에게 명하여 치제(致祭)를 내리니, 그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신하로서 큰 공로가 있어 이미 시종(始終) 변함이 없었으니, 나라에는 상전(常典)이 있는지라 오직 휼전(恤典)을 특히 더하노라. 생각하건대, 경은 흉금(胸襟)과 도량이 크고 깊으며, 천성이 순수하고 행검(行檢)이 독실한데다가, 외적을 막는 재능이 뛰어나고 계략(計略)의 지혜 또한 구비하였으니, 실로 군왕의 우익(羽翼)이요, 국가의 주석(柱石)이라 이를 만하도다.
우리 태종(太宗)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사졸(士卒) 속에서 경(卿)을 발탁하사 군기(軍機)를 맡기시니, 경은 과연 대의(大義)를 따르고 사(私)를 잊었으며, 충성과 노력을 다하여 위험이 절박했던 그날에 창업(創業)을 도와 이루었고, 창졸간에 일어난 변란을 다스려 나라를 바로잡았던 것이니, 경의 충성, 그 용맹은 의당 산하(山河)에 맹세하고 이정(彝鼎)에 새겨야 할 것이로다. 누차 총제(摠制) 직에 등용되고 인하여 장흥군(長興君)에 봉하니, 그 임용(任用)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고, 사랑과 대우 또한 갈수록 후하여져 부덕한 내가 즉위함에 이르러서도 간성(干城)같이 의중(倚重)해 왔도다.
드디어 치사(致仕)하고 어버이를 봉양할 것을 원하였고, 곧 질병에 걸려 직사(職事)를 사양하기에, 부원군(府院君)의 숭품(崇品)으로 승진시키고 만년의 휴양을 바랐더니, 이 무슨 갑작스런 부음(訃音)이란 말인가. 아득한 저 하늘이 이 한 원로마저 남겨 두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 마음 아프도다. 이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전(致奠)하고 영령(英靈)에 고하여 나의 심회를 펴보는 바이노라. 아아, 슬프도다. 기뻐도 슬퍼도 정의는 같은지라 어찌 경의 옛 공적을 잊으며, 유명(幽明)을 달리 했어도 이치는 일반이니 나의 지극한 이 회포를 살피리라 믿노라.”
하였다. 시호를 충정(忠靖)이라 하니, 위험한 속에서도 어려운 것을 사양치 않는 것을 충(忠)이라 이르고, 관후(寬厚) 화평하며, 착한 이름을 지니고 세상을 마친 것을 정(靖)이라 한다.
○長興府院君馬天牧卒。 天牧, 長興府屬縣會寧人。 洪武辛酉, 補散員, 累遷至大將軍。 己卯, 轉上將軍, 辛巳, 賜翊戴佐命功臣號, 尋加同知摠制。 壬辰, 出爲全羅道兵馬都節制使, 判羅州牧使, 甲午, 封長興君, 丙申, 改都摠制, 復出爲全羅道兵馬都節制使。 癸卯, 進判右軍府使, 己酉, 以老乞骸骨, 特授長興府院君, 命禮曹設宴餞之, 賜祿俸如舊, 卒年七十四。 訃聞, 輟朝三日, 命內史往弔, 賜賻米豆幷三十石、紙一百卷。 又命禮官致祭。 敎曰:
臣有膚功, 旣終始之不替; 國有常典, 惟贈恤之特加。 惟卿器宇宏深, 性行醇謹。 才捷於禦侮, 智周乎運籌。 可謂王之爪牙, 而國之楨(幹) 也。 我太宗之潛邸也, 擢卿於行伍, 授卿以軍機, 而卿果能徇義忘私, 盡忠竭力, 佐命於危迫之日, 撥亂於倉卒之間。 惟卿之忠、與卿之勇, 宜乎誓山河, 而銘彝鼎也。 累登庸於摠制, 仍賜封於長興。 任用匪輕, 眷遇彌篤。 逮至眇末, 倚爲干城。 廼乞身而養親, 俄纏疾而謝事。 陞崇秩於府院, 庶休致於桑楡。 何訃音之遽聞? 痛昊天之不憖。 遣禮官而致奠, 告英靈而敍辭。 於戲! 休戚義同, 敢忘卿之舊績? 幽明理一, 諒體予之至懷。 諡忠靖, 險不辭難忠, 寬樂令終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