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주의 춘천 이야기34
뭇귀신을 달래는 춘천의 거리제
<거리가 갖는 우리의 미풍양속>
한적한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아마도 일 년에 2~3할은 손님들과 밤잠을 자야 했다. 물론 집이 길목에 있는 사람들의 얘기다.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은 무슨 얘기냐고 반문할 것이다. 1960년대 70년대에 있었던 글쓴이의 이야기이다. 날이 어둑어둑할 때면 느닷없이 낯선 사람이 사립문을 열고 들어선다. 하룻밤 재워 달라는 사람이다. 장사하는 사람, 여행하는 나그네 등 참 다양했다. 그러면 집안에 부득이한 사연이 없으면 그들을 맞아들였다. 그리고 아침밥까지 챙겨주고 떠나보냈다. 물론 방값도 밥값도 받지 않았다.
박절하게 거리로 사람을 내몰지 못했던 우리의 옛 인정이다. 그 당시 거리로 내쫓는 행위는 죽음을 뜻하는 일이었다. 시골에는 여관도 주막도 없었다. 그러나 그곳을 지나야 다른 마을로 갈 수 있었다. 깜깜한 밤 어디로 갈지 모르는 사람들을 그렇게 재워주고 밥을 주어 보냈다.
거리로 내쫓겼을 때의 사정을 넉넉히 아는 시골 사람들은 누군가를 재워주는 일을 당연히 여겼다. 사랑방에서 생활했던 나는 정말 별별 사람들과 그렇게 밤을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름다운 우리의 미풍양속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어울리는 공동체의 미덕이었다.
<조화로운 세상을 위해 마을에서 뭇귀신을 제사하던 공동체 사랑>
춘천 사람들은 거리를 소중히 여겼다. 우리에게 거리는 소통의 공간이다. 거리에서는 사람과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안녕을 묻는다. 거리에서는 서로의 형편을 알 수 있었다. 자기의 형편 어려움을 남에게 알려 부담을 주지 않으려 했다. 거리로 나설 때는 옷차림을 깨끗이 했다. 그리고 어느 사람을 만나든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낮에는 거리가 소통과 만남의 공간이었지만, 밤이면 각자 거리를 떠나 집으로 가는 이별의 공간이었다. 밤거리를 쏘다니는 자체는 정처 없는 방황이었다. 안주할 수 없는 불쌍한 영혼들의 시공이 밤거리였다.
춘천 사람들은 밤거리를 방황하는 불쌍한 영혼을 달래주려고, 거리제를 지냈다. 산 사람이 대상이 아니라, 죽은 귀신들이 대상이었다. 마을 입구에는 장승과 솟대가 있어 뭇귀신들은 마을로 들어올 수 없었다. 그래서 동구밖에서 울부짖으며 밤거리를 방황한다. 이들은 산 사람에게 해코지하려고 동구밖에서 떠도는 게 아니다. 배고프고 춥고 외로워서 거리를 방황하고 있다. 《강원도지》 단사(壇祠)조에는 여단(癘壇)에 관한 사연이 나온다. 여제는 뭇 귀신을 제사하는 의례이다. 성황과 제사 받지 않는 귀신을 제사했다. 그 제사의 대상은 정말 억울한 귀신이었다. 그곳에서는 제사의 대상을 이렇게 나열했다.
“전쟁 중에 칼에 찔려 죽은 자, 물과 불과 도적을 만나 죽은 자, 남에게 재물을 빼앗기고 핍박받아 죽은 자, 남에게 처첩을 강탈당하고 죽은 자, 천재와 질병으로 죽은 자, 맹수와 독충에게 해를 입어 죽은 자,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은 자, 목을 매서 죽은 자, 죽었으나 후사가 없는 자 ….”
이들에게 그 억울함을 달래고 먹여 보내는 제사가 옛 여제이고 거리제였다. 물론 장승제나 솟대제도 거리제라 하였으나 이들 제사는 그 성격이 다르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신북읍 천전리, 북산면 부귀리, 남면 가정리, 강남동 송암동 등에서 뭇귀신을 달래는 거리제를 지냈다. 《북산면 사람들》, 《신북읍 지명유래》, 《강남동지》, 《가정리 의병마을》을 참고 바란다. 이 거리제는 보통 저녁 어둠이 몰려오면 동네 입구에 상을 펴고 제물을 차렸다. 제물은 개나 명태이다. 귀신이 먹는 명태라 간을 하지 않고 한 쾌인 20마리를 쪄서 올린다. 개는 보양식으로 최고의 대접이었다. 잘 먹여 한을 풀고 밤거리를 방황하지 말고 저승으로 가라는 의식이었다. 그 뭇귀신은 마을과 전혀 연고가 없다. 거리제를 취재하면서 글쓴이는 정말 따뜻한 마음을 가진 춘천 사람들의 공동체 의식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