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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강 배(船)와 말(馬)
제51강 배(船)와 말(馬)
1. 부산
부산이라는 도시는 정말 우리나라에서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거 같다. 부산의 특징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뭐라 할 수 있을까?
학생 1: 부산 사람들은 투박하지만, 친근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머리가 복잡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그렇게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기보다, 나한테 부산의 가장 큰 특징은 바다 같다. 여러분들은 일상적으로 봐서 느끼질 못하지만, 부산이라는 도시에는 바다가 있다. 그리고 그 바다가 여러분들한테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거 같다. 그럼 바다의 특징이 뭘까요?
학생 2: 바다의 특징은 푸르고 넓고,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저 학생이 이야기한 대로다. 바다라는 것은 인간에게 무한히 탁 트여진 공간을 준다. 탁 트여진 게 바다의 가장 큰 특징인 거 같다. 그걸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면, 오픈니스(openness)다. 우리말로 하면, 개방적이다.
하여튼 부산 사람들은 마음이 열려있다. 그러기 때문에 신바람이 많이 나는 거 같다. 그래서 나는 부산사람들의 특징을 신바람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다. 여기 부산 사람들은 우리나라 어느 곳을 가서도 못 느끼는 어떤 신바람이 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감지하시는지 모르지만, 나는 항상 올적마다 그걸 느낀다.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857 ~ ?)은 『난랑비서』에 ‘國有玄妙之道, 曰風流.’라 했다. 여기 ‘풍류’는 ‘신바람’이다. 부산의 해운대라는 명칭도 최치원의 호, 해운(海雲)에서 온 것이다.
2. 가야
오늘 부산대학에 와서 강의를 하기 때문에, 제가 논어 구절 중에서 바다랑 관계된 구절을 한 번 뽑아봤다.
공야장(公冶長)편 6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건 내가 상당히 좋아하는 유명한 장이다. 이 장을 읽고 생각하며, 부산에 사는 여러분들과 더불어 바다를 어떻게 이해할지 생각해 보겠다.
공야장 6장
子曰: “道不行, 乘桴浮于海, 從我者, 其由與?“
子路聞之喜.
子曰:“由也好勇過我, 無所取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도가 행하여지지 않고 있도다, 뗏목이나 타고 호수위에 나를 맡기고 싶도다. 나를 따라올 자는 자로 오직 너뿐이로다”
자로가 그 말을 듣고 희색이 만만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유야! 너는 용맹스러움에 있어 나를 능가하지만, 나의 마음을 너무 몰라주는구나.”
부산을 여러 번 왔는데 부산대학을 올 기회가 없었다. 이번에 처음 부산대 캠퍼스를 봤는데, 정말 아름답다. 오밀조밀하게 짜여있고, 아주 깔끔하다. 전망과 모든 조건이 학생들이 생활하고 공부하기에 우리나라 최고의 캠퍼스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건 과찬이 아니고, 어저께 제가 느낀 대로 정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제 교정을 거닐다가 학교 박물관이 있어서 들어가 봤는데, 박물관의 컬렉션이 대단히 훌륭했다. 거기서 느낀 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원래 부산이라는 데는 없었고, 역사적으로 부산포라는 작은 포구가 하나 있었다.
태조 6년(1397) 동래에 진을 설치, 병마사가 판현사(判縣事)를 겸하였다. 세종 5년(1423) 부산포를 개항, 왜관을 설치하였다.
사실 전통적으로 부산이라고 하면 동래를 말한다. 옛날에 부사가 내려오면 동래부사가 내려왔다. 부산포에는 조그만 첨사밖에 없었다. 지금의 부산이라고 하는 지역은 사실 대부분이 일제시대 때 개발된 것이다.
본정통(本町通)이라는 게 일본말로 혼마치다. 대신동도 일본 표현이다. 요새 광복동이라는 우리말로 바꾸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부산은 대개 일제시대 때 여기 지역을 메워서 새로 만든 신생도시다.
그러나 진짜 부산은 부산대학이 자리 잡고 있는 동래다. 여기가 진짜 부산이다.
그런데 동래라는 지역은 원래 신라가 아니라 가야 지역이었다. 그래서 가야 문명을 이해해야 여러분이 살고 있는 부산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긴 원래 신라가 아니라 가야 지역이었는데, 신라에게 병합을 당했다.
가야(伽倻) : 가락국(駕洛國). 낙동강 하류의 부락마을들이 부족국가를 형성하여 6가야가 되었다. 금관가야·아라가야·고령가야·대가야·성산가야·소가야. 지역적으로 변한과 일치한다.
가야 입장에서 본다면, 신라는 고구려하고 더 가깝다. 역사적으로 신라는 북방계열에 더 가깝다.
중국 북조의 나라들로부터 고구려로 해서 신라까지 이어지는 북방 문화권이 있고, 남조에서 백제와 가야를 거쳐서 일본의 왜까지 연결되는 남방문화가 있다. 그래서 가야는 남방, 신라는 북방 계열이다.
북방문화 : 북조(北朝) - 고구려 - 신라
남방문화 : 남조(南朝) - 백제 - 가야 - 왜(倭)
이것이 4~6세기 동아시아 질서였다.
그래서 부산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신라는 이질적인 문화이다. 그런데 신라가 고구려와 합작을 해서 여기를 점령한 것이다. 가야를 멸망시킨 것은 신라의 힘이 아니라, 고구려의 힘을 얻어서 가야를 먹은 거 같다. 그래서 신라는 고구려 쪽에 가깝다.
광개토대왕비를 보면, AD 400년 고구려는 신라에 자그마치 보기(步騎) 5만기를 보냈다고 한다. 당대 5만 병력이면 엄청난 것이다. 5만의 병력으로 신라를 도와서 왜를 섬멸했다. 그리고 그 힘이 가야까지 미치게 된 것이다.
十年庚子(AD 400), 敎遺步騎五萬往救新羅.
從南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枝, 倭賊退.
그러나 BC 4세기까지만 올라가도, 신라와 가야는 게임이 안 되는 나라였다. 가야가 훨씬 강대했다. 가야라는 나라는 철기 문명이 대단히 발달한 문명으로 당대에 엄청난 해상 무역국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지역은 지정학적으로 광활한 평원이 아니었다. 조그만 소국들이 분립되어 있던 형태였다.
가야라는 어떤 의식은 있었어도, 하나의 나라가 아니었고, 조그맣게 나누어져 있었다. 그래서 금관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등이 있었다. 그 중 제일 센 곳이 김해평야에 자리 잡고 있던 금관가야였다.
신라 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김유신(金庾信, 595 ~ 673) 장군도 금관가야 왕족 출신이다. 구해왕의 증손.
3. 가야의 유물, 등자
그런데 이쪽 문명에 미마나부가 있었다. 임나일본부라는 것인데, 일본 큐슈 지역에서 여기다가 식민지를 두었다고 하는데, 이게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미마나 니혼후(任那日本府) :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가야에 설치된 일본의 통치기구(4C 중엽 ~ 6C 중엽). 그 실체는 일본학계에서도 부정되고 있다. 아라가야에 파견된 일본 사신들의 집단 정도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최근에 가야의 여러 고분들이 발굴되었는데, 문화적으로 일본을 압도하고 있다.
나도 어제 여기 박물관을 가보고 알았는데, 부산대에 있는 박물관의 유물들을 잘 보면 복천동 고분군이라는 게 있다. 복천동 고분군에서 엄청난 가야유적이 나왔다.
동래구 복천동(福泉洞) 고분군 : 1980년 겨울에 발굴. 가야문화 이해에 결정적 역할을 한 유물이 다량 출토
그곳의 유물을 보면, 등자(鐙子)라는 게 나온다. 등자라는 게 뭐냐? 옛날에 말을 타는 기병하고 보병하고 싸우면, 보병은 기병한테 게임이 안 되었다. 기병은 지금 같으면, 어마어마한 원자폭탄 같은 것이다.
등자(鐙子, stirrup) : 기병전술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말안장과 관련된 장치로서 양발을 걸 수 있는 발걸이. 4세기 흉노·선비의 발명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런데 기병이 말을 탈 때, 말안장에 앉게 된다. 알렉산더 대왕 같은 사람은 두 다리가 앞으로 뻗쳐 있다. 당시에는 등자가 없었다. 등자는 말안장에 앉아 발을 거는 쇠로 만든 장치다. 등자라고 하는 것은 인류의 획기적인 발명이다.
발을 등자에 걸게 됨으로서 우뚝 서서 칼을 휘두를 수 있었다. 그게 없으면 한 손으로 반드시 고삐를 잡아야 했다. 그러면 활을 쏠 수 없었다. 등자는 인류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발명이다.
이것은 흉노족과 선비족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여겨지며, 4세기경 인류에 처음 등장을 한다. 그런데 바로 4세기 가야무덤에서 등자가 나온다.
4. 찰갑
그리고 옛날의 갑옷은 통갑옷이었다. 판갑이라고 해서 통짜배기 쇠판으로 갑옷을 만들었는데, 그게 싸움하기에 불편했다.
판갑(板甲) : 통짜배기 쇠판으로 만든 갑옷
그러다 판갑에 이어, 찰갑이라는 갑옷이 나온다. 철판을 비늘 모양으로 조그맣게 만들었다. 이렇게 철판을 조각조각으로 하면 유동성이 생긴다.
찰갑(札甲) : 비늘 모양으로 분리된 갑옷. 작은 철판을 가죽 끈으로 엮어 만듦. 전사에게 탁월한 활동성을 제공했다.
그러니깐 등자와 찰갑이 나오면서 전투양상이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갑옷이 비늘 모양이면 화살을 맞아도 미끄러지는 효과가 있다.
통갑옷을 입고 등자도 없이 싸울 때는 그냥 창을 들고 앞으로 돌진했다. 아서 왕 같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싸움에는 통갑옷이 안 뚫리니깐 좋았다. 그래서 갑옷을 두껍게 해야 했고, 그러면 무거워서 게임이 안 되었다.
칭기즈 칸이 세계를 정복할 때도 가벼운 갑옷을 가지고 세계를 정복한 것이다. 칭기즈 칸의 갑옷은 아주 간결했다. 그런데 유럽 사람들은 무지막지한 갑옷을 입었기 때문에 칭기즈 칸 부대한테 당할 수가 없었다.
4세기경 가야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은 당대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최신식의 무기들이었다. 그것들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일본에선 그런 것이 없었다.
5. 제련술
철의 제련술도 마찬가지였다. 철 제련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제련술은 고도의 열을 내야 한다. 풀무질을 할 때, 밀면 바람이 나가고 석탄 불이 올라간다. 당기면 바람이 나가지 않고, 풀무 안으로 공기가 들어온다. 그렇게 되면 열이 높게 올라갈 수 없다.
일본 출토품의 수준은 가야에 1~2세기 뒤질 뿐만 아니라, 철의 제련기술이 6세기에나 갖추어진다. 따라서 후진문명이 선진문명을 지배했다는 억설은 성립할 수 없다. 복천동 고분의 발견은 일본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간단한 피스톤 구조로 밀 때도 바람이 나오고, 당길 때도 바람이 나오게 만들었다. 바람이 계속 공급되는 간단한 판막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철 제련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天地之間, .......... 虛而不屈, 動而愈出.
[노자] 5장의 이 말은 바로 복동식 풀무를 모델로 하고 있다. 서양에는 16세기경에나 이 복동식 풀무가 도입되었다. 그전에는 모두 단동식 풀무였다.
그런 고도의 첨단 제련기술을 갖고 있던 문명이 가야였다. 가야는 당대의 해상무역국가로서 엄청나게 진보된 문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부를 제패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야는 바다를 끼고 있어서, 교역을 통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상당히 개방적이었으며, 왜인도 맘대로 와서 살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이 가야를 점령했다는 건, 당대의 문화수준을 비교해 볼 때 말이 안 된다. 그냥 일본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여기다가 미나마부를 설치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6. 말의 문화, 배의 문화
이런 고대문화로 가면 재미난 문제가 많은데, 고대 문명의 대표적 교통 수단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말(馬)이고, 또 하나는 배(船)라는 것이다. 말은 육로를, 배는 수로를 이용했다.
지금은 고속도로를 깔지만, 옛날에 강을 만나면, 그 강이 고속도로였다.
옛날에는 육로 개척이라는 게 참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강이라는 것은 터져있으니깐, 물줄기를 따라서 비약적으로 빨리 갈 수 있었다. 수로를 이용해서 방대한 수송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옛날에는 수로가 바로 고속도로였다. 지금은 수로로 다니는 게 더 어려운 거 같지만, 옛날에는 육로보다 수로개척이 훨씬 쉬웠다.
여러분들은 고대문명의 수로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부족하다. 광개토대왕이 쳐 들어올 적에도 육로뿐만 아니라, 수로를 이용해서 여기까지 왔다. 옛날에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수로의 활용이 활발했다.
고대 인류 문명의 대표적 교통수단이 말과 배였는데, 이 둘의 성격이 아주 다르다.
말이라는 것은 위에 타서 몰고 간다. 말은 생명체이다. 배는 생명체가 아니다. 배는 바람을 이용한다. 말은 여러분들이 길들여서, 여러분들이 가고 싶은 데로 몰고 갈 수 있다.
그러니깐 말은 ‘탄다’고 한다. 일본말로 ‘乗る’다.
그런데 배라고 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여러분의 생각대로 탈 수가 없다. 여러분이 아무리 위대한 항해사라고 해도, 풍랑을 만나면 자기가 가고 싶은 데로 반드시 갈 수 없다. 자기가 쉬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정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 번 바다에 뜨면 그냥 가야한다. 그래서 배는 타는 게 아니라, 사실은 배에 태워지는 것이다. 일본말로 하면 ‘乗せる’다.
말(馬) - 올라탄다(노루, 乗る)
배(船) - 태우다(노세루, 乗せる)
어떤 의미로 말을 타고 사는 사람들의 인식구조는 수직적이다. 배의 문화는 .어떻게 보면 수평적 구조가 있다.
말(馬) : 수직적 인식구조(vertical).
배(船) : 수평적 인식구조(horizontal)
그리고 말이라는 것은 항상 자기가 몰아가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뚜렷한 비전이 있다. 그러나 배라는 것은 항해하고 있는 미래에 대한 뚜렷한 비전이 막막하다. 자연이 흐르는 대로 맡겨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배의 특징을 한 마디로 말하면, 혼돈이다. 배는 혼돈의 문화다. 그리고 말이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질서의 문화다.
배(船) : 혼돈(混沌)의 문화 : 카오스(chaos)
말(馬) : 질서(秩序)의 문화 : 코스모스(cosmos)
그리고 우리가 철학적으로 한 번 생각해 보자. 내가 노자철학도 강의했고, 공자도 강의하는데, 공자는 말의 문화에 속한다. 유교는 말의 문화에 속한다. 그런데 도가는 배의 문화에 속한다. 도가철학은 어떤 의미에서 배의 문화에 속한다. 혼돈을 중시하고, 질서보다는 혼돈에 대한 중시가 있다.
유가철학 : 말의 문화 : 유위(有爲)를 존중.
도가철학 : 배의 문화 : 무위(無爲)를 존중.
우리의 감관을 가지고 다 파악할 수 없는 세계가 혼돈이고, 이 혼돈의 상징이 옛날에는 바다였다. 옛날 사람들에게 바다는 혼돈의 세계였다.
혼돈(混沌)은 『장자』「응제왕」편에 나오는 신(神)의 이름이다. 그 신은 카오스를 상징했는데 얼굴에 감각기관인 일곱 구멍이 없었다. 하루에 한 구멍씩 뚫자 7일만에 혼돈신은 사망했다.
그러기 때문에 바다로 나간다고 하는 것이 지금은 희망찬 거 같지만, 옛날 사람들에게 바다로 간다는 것은 일종의 죽음의 세계로 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 곳은 미지의 세계였다. 그렇지만 인간을 끊임없이 유혹하는 광막한 그 무엇이 있는 세계였다. 그러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바다에 대해 무한히 여러 감정을 가졌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대인들에게 바다는 현묘한 죽음의 세계인 동시에 끝없는 생명의 유혹이었다.
다시 말과 배의 이야기로 돌아가지. 일본에는 스모가 있고, 우리나라에는 씨름이 있다. 스모와 씨름은 상당히 구조가 다르다. 우리나라는 샅바를 잡고 넘어뜨리면 이긴다. 일본의 스모는 바깥으로 밀어내면 이긴다. 그리고 일본은 소금을 뿌린다. 소금의 이미지는 배에 더 가깝다. 일본의 스모는 기본적으로 배의 문화다. 조그만 배 안에서 바깥으로 밀어내면 죽는 것이다. 씨름은 넘어뜨리는 것이다. 이건 육지에서 말을 타면서 남을 거꾸러뜨리는 것이다. 이렇게 다르다.
일본의 스모오(相撲) 배의 문화
한국의 씨름(角抵) 말의 문화
그리고 일본 사람들은 에도시대까지 머리를 깎았다. 우리는 머리를 깍지 않았다. 바다에 살면 풍랑이 일어서 머리카락이 있다는 게 귀찮다. 그래서 배의 문화에서는 머리를 짧게 했다. 단발이 특징이다.
그런데 말의 문화는 머리가 길러야 투구를 쓸 수 있다. 깎은 머리에 투구를 쓰면 상처가 난다. 그러니깐 항상 머리를 길게 했다. 장발이 특징이다. 이게 나중에 귀찮으니깐 상투를 한 것이다. 우리는 머리를 깎지 않았다. 이게 말의 문화다.
越人斷髮文身.
남방의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몸에는 문신을 했다.
-장자, 소요유-
그리고 음식도 물고기를 먹는 것은 배의 문화다. 그리고 벼를 키우는 도작(稻作)이라는 것은 수작(水作)이다. 물에서 키우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쌀은 배의 문화에 속하는 것이다. 남방의 문화다.
그리고 북방민족은 쌀 대신 빵을 먹었다. 기본적으로 중국의 북방사람들은 만두를 먹는다. 원래 만두라는 것은 속에 뭐가 들어간 게 아니다. 중국 사람들에게 만두(饅頭)라는 것은 그냥 밀가루 덩어리다. 빵이다. 동양 사람들도 북방계열은 빵을 먹는다. 밀가루 문화다. 북방은 물이 적지만 밀은 재배할 수 있다.
수작(水作)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남방에서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뒤섞여있지만 빵과 고기를 많이 먹는다. 빵과 고기는 말 문화의 특징이다. 쌀과 물고기는 배 문화의 특징이다.
쌀(米)과 물고기(魚) 배의 문화
빵(麥)과 고기(肉) 말의 문화
그리고 수(數)를 볼 적에도, 노자를 보면 도생일(道生一)하고, 일생이(一生二)하고, 이생삼(二生三)하고, 삼생만물(三生萬物)이라고 했다. 삼이 만물을 낳는다고 했다.
유가 계열의 [주역]은 짝수를 중시한다.(陰陽, 四象, 八卦, 64괘) 그러나 노자는 홀수를 중시한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42장)
그러니깐 도가(道家)는 항상 1이라든가 3이라는 숫자를 중시한다. 홀수라는 건 딱딱 떨어지질 않는다. 홀수라는 건 혼돈스럽다. 도가 철학은 이 홀수에 대한 존중이 있다.
지금 컴퓨터는 전부 2진법이다.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가지고 모든 세계를 다 만들어내고 있다. 컴퓨터 문화도 사실 알고 보면, 말의 문화에서 나오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기마민족의 후예이기 때문에 컴퓨터를 잘 할 거다.
이런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 예를 들어 옷을 입어도, 내가 입은 것을 우임(右衽)이라고 한다. 겉으로 오는 게 우측으로 향한다. 여자 옷은 좌임(左袵)이라고 한다. 이 좌(左)를 숭상하는 게 배의 문화다. 그리고 우(右)를 숭상하는 게 말의 문화다.
말(馬) : 우(右)를 숭상 : 우임(右衽)
배(船) : 좌(左)를 숭상 : 좌임(左袵)
君子居則貴左. 노자 31장
정확하게 그렇게 나눌 수는 없지만 대부분이 그렇다. 이런 것도 재미난 문명론이다.
유교 - 북마(北馬) - 부계중시 - 남성적 - 현(賢) - 강(强)
도교 - 남선(南船) - 모계중시 - 여성적 - 우(愚) - 유(柔)
7. 자로의 인물됨
그럼 이제 논어의 구절을 한 번 보자. 공자는 지금 자로(子路)라는 사람하고 같이 있다.
자로(子路)라는 사람은 공자하고 둘도 없는 친구로 우직한 사람이었다. 자로는 요새말로 하면 깡패두목 같은 사람이다. 대단히 용맹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자로를 많이 사랑했다.
하지만 공자는 자로가 입만 뻥긋하면 핀잔을 주었다. ‘야, 이 자식아!’하고 공자는 만날 자로한테 야단을 쳤다. 사람은 야단을 치면 멀어지는데, 자로는 야단을 치면 칠수록 더 가까워진다. 그런 사람이다. 그런 아주 재미난 캐릭터이다.
공자는 항상 자로가 뭐라고 하면 짜증을 낸다. 그러면 자로는 짜증내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형님! 제가 해드릴 거 없습니까?’ 라는 식으로 더 좋아했다.
8. 도불행(道不行)
공자가 도불행(道不行)이라고 한다. ‘도가 행하여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子曰: “道不行,
공자는 일생을 살면서 자기 도(道)를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노력하며, 산 사람이다.
인간인 나도 KBS에 나와서 여러분과 더불어 열심히 강의를 하면서, ‘어떻게 도가 행해지지 않을까?’ 하고 항상 기대를 하고 산다.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내 강의랑 무관하게 돌아간다. 그럼 여기서 이렇게 젊은이들과 애타게 목청을 높여서 이야기를 해 본들, ‘과연 내가 저 갠지스 강의 모래 한 알만큼이나 되는 존재일까?’ 하고 절망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런 것이 도불행(道不行)이다. 공자는 ‘아! 해도 해도 도(道)는 행하여지지 않는구나!’라고 한다. 그럴 때 마음이 슬펐을 것이다. 이때 공자는 슬퍼서, ‘아! 도가 행하여지지 않는구나!’라고 말하고 있다.
9. 승부부우해(乘桴浮于海)
그러면서 승부부우해(乘桴浮于海)라고 했다. 승(乘)은 탄다는 뜻이다. 그리고 무엇을 타냐? 부(桴)를 탄다. 부라는 것은 바로 뗏목이다. 바다에 뜨는 뗏목 부(桴)자이다. 큰 뗏목을 벌(筏)이라고 하고, 작은 뗏목은 부(桴)라고 한다. 그러니깐 사실 작은 뗏목으로는 큰 바다에 갈 수 없다.
부(桴) : 작은 뗏목
벌(筏) : 큰 뗏목
-마융(馬融)의 고주-
그리고 부우해(浮于海)라고 했다. 공자는 산동성 곡부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 공자가 진짜로 산동성 곡부에서는, 노나라에서는, 도저히 해먹을 수가 없어서, ‘내 도가 행하여지지 않으니깐, 뗏목을 타고, 어디 이민이나 가야겠다.’고 말한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
그럼 실제로 공자가 어디로 가려고 했냐? 뗏목을 타고 가려고 한 곳이 조선이었다고 한다.
여러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고대 중국 사람들은 조선이라는 곳을 기자가 봉해진 나라라고 생각했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이 기자라는 사람은 중국 최고의 현인이다. 그런 기자가 와서 다스렸기 때문에 조선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아름다운 은나라의 미풍양속을 전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주공이 말한 바, 주나라의 예악도 모두 가져갔기 때문에 조선이라는 나라는 아주 질서 있고, 예의범절을 갖춘 훌륭한 나라라는 생각이 있었다.
고대 중국인들은 조선이 기자(箕子)가 분봉된 나라라고 생각했다. 기자는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紂)의 서형(庶兄)이었고 홍범주구(洪範九疇)를 설파한 위대한 현인이었다.
그래서 공자가 여기서 ‘뗏목을 타고 조선으로나 가 볼까?’ 이렇게 말했을까?
브라질이나 캐나다로 이민 가는 것처럼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렇게 해석을 하면 안 된다. 여기서 나는 그렇게 해석할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국수주의적으로 해석할 게 아니다. 공자가 우리나라 와서 뭐하겠나? 이제 와서 공자가 이 땅에 오고 싶어 했다고 하는 것이 뭐 그렇게 영광스러운가? 그런 것이 우리의 권위를 높이는 것으로 생각하는 거 자체가 유치한 발상이다.
이런 것을 국수주의적 사상가들은 항상 잘못 해석한다. 아까 말한 미마나 문제도 거꾸로 가야가 일본 지역을 다스렸다고 한다. 일본이 여기에 설치한 게 아니라, 우리가 일본을 다스렸다고 한다.
물론 그래도 되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그냥 포괄해서 서로 왔다 갔다 했는데, 이쪽의 문화수준이 높았다고 하면 된다. 어차피 결과는 뻔한 거니깐, 그렇게 점잖게 해석을 하면 좋겠다.
그러니깐 여기서 공자는 ‘도가 행하여지지 않는다. 슬프다!’ 그러면서 절망감에 ‘아! 튜브나 타고 어디 호수에 가서 둥둥 떠 있고 싶다!’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해가 가는가?
乘桴浮于海,
도(道)가 불행(不行)하니, 저 바다에 가서 뗏목이나 타고, 둥둥 떠 있고 싶다고 하는 인간의 어떤 내면적인 절망감을 표현한 것이다. 이 구절은 그 혼동의 바다에다가 자기 자신을 띄워보고 싶다는, 그런 묘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아름다운 문학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뗏목을 띄우고 바다로 간다는 것은 위험하다. 불안한 요소가 많고, 미지의 요소가 많다. 미지의 세계로 공자는 가고 싶은 것이다.
10. 從我者, 其由與
그때 하는 말이, 이럴 때 ‘나를 따라올 사람은 오직 유(由)일뿐이다.’ 라고 한다. 여기서 유(由)라는 것은 자로(子路)의 이름이다.
從我者, 其由與?“
자로 입장에서 볼 때 이게 얼마나 기뻤겠나? ‘아! 형님이 이제 나를 알아주시는구나. 내가 평생을 공자 형님만을 모시고 살았는데, 이제 형님이 나를 알아주시는구나.’ 그랬을 것이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도가 행하여지지 않을 수 있냐? 이제 바다에 나가 뗏목이나 띄우고 둥둥 떠 있고 싶다. 그때 나를 따라올 놈은 자로 너 하나일 뿐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적에 자로는 얼마나 감격했겠나?
자로는 ‘네. 제가 죽더라도, 상어에 물려죽더라도, 제가 정확하게 모시겠습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자로는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겠나?
子路聞之喜.
그런데 그렇게 자로가 기뻐 날뛰고 있을 때, 공자가 무슨 말을 했을까? 분명히 그 다음 말은 자로를 꾸짖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추정을 할 수 있다.
11. 由也好勇過我
그런데 그 다음 말의 해석이 어렵다. 그래서 이것의 해석을 놓고 역사적으로 수많은 주석가들이 그 뜻을 놓고 싸웠다.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4가지 설만 소개하겠다.
우선 앞의 것은 해석이 쉽다.
다른 사람 같으면, 뗏목을 띄워서 가겠다고 하면, 무서워서 ‘저는 빠지겠습니다.’라고 할 제자도 있을 텐데, 자로는 ‘제가 가겠습니다.’하고 나왔다.
자로는 항상 호용했다. 공자가 가장 좋아한 말이 호학(好學)이다. 호학이라는 말과 더불어서 생각할 게, 공자는 용감함을 좋아한다. 호용(好勇)했다.
子曰:“由也好勇過我,
뒤에 보면, 인자(仁者)는 필유용(必有勇)이라고 했다. 인(仁)한 사람은 반드시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옛날에 인(仁)은 유가적 덕목이었다. 이게 말(馬) 문화의 특징이다. 공자도 전사였다. 완벽한 전사였다. 전사 집단이었기 때문에 공자가 말하는 사상에는 무협적인 요소가 굉장히 많다. 그렇기 때문에 호용(好勇)은 공자 집단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덕목이다.
공자도 일생을 통해서, 용기 있는 사람이 되려고 했다.
仁者必有勇.
[헌문] 5
여기서 부산 이야기를 하면, 서울 같은 다른 지역에서는 오해를 한다. 부산은 경상도니깐 무조건 여당일 거라고 오해를 한다. 그런데 부산처럼 우리나라에서 반골 기질이 강한 도시가 없다. 반골을 했다, 안했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부산 사람들은 원칙에 맞으면 아무래도 좋고, 원칙에 안 맞으면 불같이 일어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사실 박정희 정권이 물러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부마사태였다. 사람들이 그걸 모른다. 그리고 부마사태가 시작된 곳이 바로 부산대학이다.
아무튼 부산 사람들은 신바람이 있다. 불같이 일어난다. 불같이 일어나서 무서운데도 있지만, 사람들이 아주 개방적이다. 나는 부산을 항상 그렇게 느낀다.
아무튼 여기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호용이라고 하는 측면에 있어서 자로는 항상 나를 뛰어 넘는다.’고 한다. 과아(過我)라고 했다. 자로의 호용을 인정하는 것이다.
由也好勇過我
12. 無所取材의 제1설
그리고 그 다음 말은 분명히 나쁜 말일 거 같은데, 역대 주석가들은 여러 가지 설을 내었다.
먼저 제1설인 정현의 고주를 보자.
無所取材.”
자로는 공자의 고민을 이해 못하고, 그냥 바다로 간다는 것에만 흥분되어 있어서, 공자가 처음엔 ‘네가 용맹스러운 것은 나를 뛰어 넘는다.’라고 칭찬했으나, 이어서 ‘그런데 임마! 나는 뗏목 만들 나무도 없어.’라고 했다는 것이다.
無所取材者, 言無所取桴材也. 以子路不解微言, 故戱之耳.
-제1설-
무소취재(無所取材)라는 말에서, 재(材)라는 것을 재목 재(材)자로 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뗏목을 만들 나무도 없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나는 괴로운 공상을 하고 있으니깐, 너 혼자 가라는 것이다. 이게 제1설이다.
13. 無所取材의 제2설
그 다음에 제2설은, 재(材)를 감탄사 재(哉)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면 무소취(無所取)만 남는다. ‘그래. 네의 호용은 나를 뛰어넘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래 딴 사람은 데려가지 않을 게.’라고 했다는 것이다. 무소취라는 것을 ‘다른 사람은 취할 바가 없다.’로 본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또 하나의 설이 있다.
故孔子歎其勇曰過我, 無所復取材! 言唯取於己也. 古字材哉同耳.
-제2설-
14. 無所取材의 제3설
이렇게 한문의 해석이라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그 다음에 3번째 해석은 기상천외하다.
從我者, 其由與.
由也好勇過我, 無所取材.
여기 유(由)라는 것은 자로(子路)의 이름도 되지만 ‘때문에’라는 의미도 된다. 그러니깐 ‘기유여(其由與)’라는 것은, ‘나와 더불어 뗏목을 타고 바다로 가는 이 괴로운 죽음의 길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모두 비극적인 종말을 가져 올 텐데, 그것은 나 때문에 그런 것이다.’라는 말이었다는 것이다.
凡門徒從我者道皆不行, 亦竝由我故也. 子路聞我道由, 便謂由是其名, 故便喜也.
-제3설-
그런데 자로가 옆에 있다가 ‘아! 나를 데려간다고 하시는구나.’라고 유(由)자를 오해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가 ‘임마, 내가 그렇게 말한 게 아니야!’라고 말하기가 미안하니깐, 애매하게 ‘지금 나는 뗏목 을 만들 나무도 없다.’라고 말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설들을 취하지 않고, 4번째 설을 취한다.
15. 無所取材의 제4설
여기서 무소취재(無所取材)라고 할 때, 이 재(材)라고 하는 것은 ‘재단한다, 헤아린다’라는 뜻의 재(栽)자로 볼 수가 있다. 그렇게 보면 ‘너의 호용은 나를 뛰어넘지만, 너는 사리분별을 알맞게 헤아리는 그런 면이 너무 부족하다.’라며 자로를 꾸짖는 것이 된다.
‘이 녀석이 호용한 것은 좋지만, 내 심정이 오죽했으면 뗏목을 타고 바다에 가고 싶다고 그러겠나? 지금 이러고 있는 판에, 넌 그걸 헤아리지 못하고 ‘같이 가겠습니다!’ 이러고만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놈이냐!’하고 공자께서 자로를 꾸짖는 표현이라는 것이 4번째 설이다.
나는 이 설을 취한다. 이 설은 주자 선생의 집주에 해석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이 해석을 따르고 싶다.
故夫子美其勇, 而譏其不能裁度事理以適於義也.
-제4설, 주자집주-
16. 문화의 다면성
결국 이 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는 구조적으로 어느 한 면만 갖고 있지 않다.
여기 공자의 탄식에도 있지만, 공자 자체는 말의 문화에 속한 사람이다. 북방계열이다. 그러나 배에 대한 동경이 있다. 유가철학이나 도가철학은 어느 한 면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여러분들은 똘똘해지려고 공부를 한다. 현명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대학을 다니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은 한없이 어리석은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여러분들은 청운의 뜻을 품고 산다.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 거 같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살다보면 어리석은 사람한테 걸리게 되어 있다. 나이 드신 분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끄덕 하신다. 세상은 어느 한 쪽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배와 말로 상징되는 두 문화는 인간세상에서 결코 어느 문화를 떼어낼 수가 없다. 우리 조선 문화라는 것도 대체적으로 말의 문화 쪽이 강한 문명이지만, 배의 문화가 상당히 들어와 있다.
특히 예로부터 가야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특이하다. 말의 문화와 배의 문화가 완벽하게 혼합된 문화이다. 가야에 대한 전설을 보면, 인도를 포함한 남방 계열과의 교류가 굉장히 활발하다. 그뿐만 아니라 북방이 갖고 있던 고도의 기술문화와 전투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모든 걸 개방해서 만든 문화이다.
17. 부산의 특징
내가 생각하기에 부산이라고 하는 도시의 특징은 가야와 동일하다. 이 부산 지역이야말로 앞으로 환태평양 시대가 오게 되면 중심지가 될 것이다. 앞으로 남북통일이 되어 경의선이 뚫리게 되면, 부산은 한국의 항구가 아니다. 유라시아의 가장 위대한 항구로 새롭게 등장하게 될 것이다. 이건 기정사실이다.
같은 경상도라도 부산은 아주 특이하다. 사실 안동, 경주, 대구 같은 곳을 가면 조금 답답하다. 그런데 여기는 탁 트여있다. 바다를 면한 산기슭에 있는 도시라서 한 면이 툭 터져 있다. 이걸 폐쇄시킬 수는 없다. 개방성은 부산의 운명이다.
최근에는 영화제도 성공했다고 하는데, 부산은 앞으로 국제적인 도시로 각광받을 수 있는 요소를 많이 갖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자세가 터져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엔 부산이야말로 말의 문화와 배의 문화가 가장 재미있게 믹스된 혼합 문화를 갖고 있다.
이것을 장자는 양행(兩行)이라고 했다. 양쪽을 다 같이 가야한다. 한쪽만 가지고는 안 된다.
是以聖人和之以是非, 而體乎天均, 是之謂兩行.
-장자, 재물론-
‘양행이다. 혼성이다.’ 하는 말들이 다 그런 뜻이다. 그러니깐 문명도 어떤 한 면만을 가지고 말할 수 없다.
有物混成, 先天地生.
- 노자 25장-
그런데 이렇게 개방된 문화는 아무래도 응집력이 좀 약하다. 폐쇄적인 것보다 응집력이 약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앞으로 세계의 개방시대가 오면, 아주 독특한 부산의 개방적 문화는 앞으로 크게 각광을 받을 시대가 올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18. 경상도의 특징
어제 여기 처장님들이 나한테 중국요리를 대접했다. 내가 중국요리를 잘 만든다고 했지, 잘 먹는다고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중국요리를 사주셨다. 그런데 중국요리를 잘하는 사람의 중국요리에 대한 미각이 어느 수준인지 모르시는 거 같다. 어제 부산 최고의 중국요리를 대접한다고 나를 데려갔는데, 유감스럽게도 먹기가 힘들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경상도의 특징은 음식문화가 너무 빈곤하다. 내가 보기에 전통적으로 전라도에 비교해서 빈곤하다. 이게 왜 그런지 아는가? 여기는 도학문화가 너무 강하다. 안동을 비롯해서 경상도는 유교, 도학이 강하다. 그저 근신하면서 짠 젓갈에다 물만 마신다. 도학풍이 너무 강해서 음식문화가 빈곤하다.
그리고 영남(嶺南)이라고 하는 데는 산에 갇혀 있다. 영(嶺)에 갇힌 남(南)쪽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는 토호세력들이 강하다. 따라서 외지 사람들이 와서 까불지를 못한다. 여기 사람들 눈치를 봐야 한다. 아무리 중앙에서 파견 나온 대단한 원님이라도, 여기에 오면 벌벌 기어야 한다. 온통 뻣뻣한 도학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는 남을 대접하는 문화가 별로 발달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음식이 빈곤하다. 이게 다 도학 문화의 특징이다.
우리나라의 이조를 통해서 위대한 유학자들은 모두 이쪽 지역에서 나왔다. 예를 들면 동학도 이쪽 지역에서 나왔지만, 터지긴 전라도에 가서 터졌다. 하여튼 이 지역은 문화가 다르다.
이게 세세하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지만, 입을 잘못 뻥긋하면 사방에서 야단이 나기 때문에 참는다. 이런 거시적인 문화론은 내가 함부로 말할 수가 없다. 일반론을 이야기하다 보면, 빈틈이 많다. 반론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무튼 경상도는 이런 특징이 있다.
19. 대학문화의 중요성
그런데 이쪽 경상도의 전체적 분위기에 비해, 부산은 좀 다르다. 부산의 문화는 앞으로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 굉장히 소중하다. 여긴 뭐든지 먼저 들어온다. 나쁜 것도 좋은 것도 모두 먼저 들어온다. 그리고 그것이 서로 배타 없이 공존한다. 공존을 하는 도시다.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정확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지금 지방자치 등 여러 문제가 있지만, 정말로 부산이 위대하게 되려면, 부산대학교가 위대하게 되어야 한다. 대학 문화가 살지 않으면, 지방 자치도 부산도 힘을 쓸 수가 없다. 인재들이 모두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동네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우수한 인재는 모두 자기 동네에 있는 대학을 가야 한다.
일본만 해도 동경대학보다 교토대학이 더 세다. 지금 배와 말 이론을 나에게 가르쳐 주신 후쿠나가 미쯔지(福永光司) 선생도 내가 동경대에 유학했을 때, 교토대학에서 잠시 모셔온 분이다. 일본의 경우, 지방대학이 동경대학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그게 일본이다. 그게 일본의 국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지방대학은 서울대학과 비교해 볼 때, 국가예산 등이 부족하게 지원된다. 지방대학도 비중 있게 발전시켜야만 한다. 그게 지방자치의 핵심이다. 정치적으로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의 기업구조 등 근본적인 구조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지방 발전은 어렵다.
이건 우리 국민들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전 국민이 합심해서 지방 대학을 육성해서, 위대한 대학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방대학을 발전시켜야만, 그 지방문화에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게 안 되면 지역문화라고 하는 것은 영원한 죽음이다.
여러분들은 지금 부산대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지금은 서울에 있는 대학에 비해서 지방대학이 조금도 뒤지는 게 없다. 정보가 전부 유통되어 있고, 하등의 조건에서 여러분들에게 불리한 게 없다.
단지 졸업하고 취직 걱정이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것을 걱정하지 말고, 여기 있는 동안, 정말 치열하게 공부해서 부산대학을 빛내고, 부산지역을 빛내는 사람들이 되어주기를 충심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