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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08
11월9일 [연중 제31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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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1)우리 각자가 대성전입니다>
예전에 익산에서는 원불교 최고 지도자의 이취임식이 있었습니다. 타 종단들이 최고지도자의 이취임 때마다 눈꼴사나운 종권다툼으로 인해 사분오열되고 사회적 문제로까지 확산되는 것에 비해, 이분들의 이취임식은 너무나 아름다웠답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박한 삶으로 돌아간 전임자의 아름다운 퇴장에 이은 후임자의 겸손한 등장. 그 당시 새로 취임하신 원불교 최고 지도자 장응철 종법사님께서 취임 직후 신도들과 국민들을 향해 던진 법담이 제 마음에 크게 다가왔습니다.
“마음 편히 하세요. 안심하는 것이 바로 극락입니다.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생각하니 괴로운 것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에 한 가지 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교회는 방황하고 흔들리는 신자들, 세파에 지쳐 힘겨워하고 있는 신자들의 마음을 위로하는데 어느 정도 기여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신자들에게 과연 어느 정도 천국을 맛보게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의 마음에 그 누구도 주지 못할 평화,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화를 어느 정도 주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자신의 존재나 역할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교회 안에 깨어있는 분들께서 그토록 괴로워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교회가 분수에 맞지 않는 일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교회의 자신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인 영적생활, 순례성, 청빈, 형제적 친교,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 나눔과 섬김... 이런 측면들에 대한 투신은 뒷전인 채 외형적인 성장, 화려한 치장, 세속과의 지나친 결탁에 몰두하다보니 그렇게 고민하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로마 시내 4대 성전 가운데 하나인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로마 성지 순례객들이 꼭 빠지지 않고 들르게 되는 단골코스 대성당입니다. 바티칸 대성당 못지않게 볼거리도 많을 뿐 아니라 위풍당당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며 역대 많은 교황님들께서 이곳에 안치되셨습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장사꾼들과 환전상으로 오염되고 타락한 유다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복음서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진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정확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행동 역시 과격하십니다. 채찍질을 하시며 양과 소, 환전꾼들과 장사꾼들을 성전으로부터 몰아내십니다.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십니다. 탁자들을 엎어버리십니다. 그리고 아주 강하게 외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성전은 본질상 기도하는 집입니다. 따라서 신성한 곳이어야 합니다. 영적인 곳이어야 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기도의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지극히 세속적인 모습들, 세상에 닳아빠진 모습들이 지속적으로 정화될 수 있는 회개의 분위기가 꾸며져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전은 어쩌면 우리 각자입니다.
우리 각자가 교회입니다. 매일 성체성사를 통해서 다가오시는 그리스도의 몸이 머무시는 우리 각자가 대성전입니다.
오늘 하루 아를르의 성 체사리우스 주교님의 강론이 우리 영혼의 양식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가 이 대성전 봉헌 축일을 기쁨 속에 지내고 싶다면 우리의 악한 행실로 하느님의 살아있는 우리의 이 성전 (우리 각자의 영혼과 육신)을 파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전의 청결을 보존하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을 죄의 오물로 더럽히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이 성전이 광채로 빛나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면 하느님께서도 여러분 영혼에 암흑이 끼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대성전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영혼에 들어가고 싶어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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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눈에 보이는 지상 성전 건립도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성전 건립은 더욱 중요합니다!>
유다인들이 중요시 여기는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게 되었습니다. 신명기 16장에는 유다 3대 명절과 관련해 이런 권고가 적혀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모든 남자는 해마다 세 번씩, 곧 무교절과 주간절과 초막절에, 주 너희 하느님께서 선택하시는 곳에서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한다.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아가서는 안된다. 저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복에 따라, 제 능력껏 주님께 바쳐야 한다.”(신명기 16장 16~17절)
사실 이 권고는 오랫동안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멸망되었다가 다시 회복하는 과정에서, 이 계명을 상기하게 되었고, 크게 강조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파스카 축제에 이은 무교절은 범국민적 예루살렘 성지순례의 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순수하게 시작된 예루살렘 성전 복구 운동과 성지 순례 운동은,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퇴색되기 시작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재물이 문제의 발단이 되는 것 같습니다.
애써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온 백성들은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으로 성전으로 나아갔고, 주님 앞에 정성껏 예물을 봉헌했습니다. 그러나 자발적인 봉헌은 점차 의무화 되어갔습니다.
고된 여행 끝에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한 것만 해도 벅찬 일인데, 유다 지도층 인사들은, 구름처럼 몰려드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이 때다!’ 하고 성전세를 강제적으로 징수했습니다.마치도 오늘날 국립 공원 입장하는데 전혀 무관한 사찰에서 입장료를 강제 징수하듯이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에 바칠 제물을 판매하는 일 역시 독점했습니다. 제물 관련 업무들은 사제들이 관리했고, 환전 관련 업무들은 산헤드린에서 관장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하신 것입니다.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광경에 예수님께서는 큰 충격을 받으셨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셨습니다.
성전 안팎은 수많은 환전상들과 소나 양, 비둘기 파는 상인들이 즐비했고, 그들은 큰 목소리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좌판에서는 흥정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자 이쪽으로 오세요! 싸게 해드릴께요! 오늘 들어온 물건이라 싱싱합니다!”
짐승들은 울어대지, 악취는 진동하지, 경건하고 성스러워야 할 예루살렘 성전은 시장터를 방불케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성전은 순수했던 초심을 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상업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성전을 잠식해버렸습니다.
유다인들의 신앙에서 사랑은 사라지고 제사만 남았습니다. 마음, 영혼, 진심이 담긴 제물 봉헌이나 진지한 예배는 사라지고, 형식과 율법만 남았습니다.
이렇게 속화되고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보신 예수님께서 분노와 슬픔 가득한 얼굴로 성전 정화 작업을 실행하십니다. 동물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십니다.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십니다.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습니다. 다른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가장 거친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마라.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복음 2장 16절, 19절)
눈에 보이는 유형의 지상 성전의 유한성과 한계, 초라함과 불완전성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조금은 과격할 정도로 성전 정화 작업을 실시하십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언젠가 무너지고 사라져버릴 외적 성전 건립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 교회 안에도 극단적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유다인들이 그리도 중요시여겼던 예루살렘 성전! 천 년 만 년 영원할 것 같았지만, 세월 앞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수도 없이 파괴되고 방화되고, 재건되고 부서지고, 갖은 수난을 다 겪었습니다. 결국 눈에 보이는 지상 성전을 건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성전 건립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내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지상 교회 안에, 보다 견고하고 영원한 성전,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무너지지 않은 진정한 성전을 건립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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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예수님은 내리막길에서만 보인다>
옛날 어떤 곳에 성인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의 생활은 깨끗하고 덕이 되어서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사를 그에게 내려 보내 상을 주도록 하셨습니다. 천사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잘 하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그대가 기도하기만 하면 무슨 병이나 다 낫고 죽은 자라도 살릴 수 있는 권세를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자 성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병을 다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일은 하느님께서 친히 하셔야지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저는 그 은혜를 사양합니다.”
천사가 물었습니다.
“그럼 그대가 말만하면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게 하는 권세를 드리려는데 이것은 어떻습니까?”
성인은 똑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감히 그 은혜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이니 성령께서 하셔야 할 일이지 어찌 제가 그 일을 하겠습니까?”
천사는 “그렇다면 그대는 무슨 은혜를 원하시오?”라고 물었습니다.
“예, 한 가지가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어떻든지 죄를 짓지 않고 선을 행하되 그 선을 행하는 것을 제가 알지 못하고 행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천사는 그의 겸손에 감동하여 그의 그림자가 뒤로 비칠 때 그 그림자에 들어가는 모든 병자와 죄인들이 고침을 받고 새 사람이 되게 하는 은혜를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항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하면서 그것이 기도라고 착각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에서 행하던 기도가 그런 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도하는 집’이란 ‘자신이 봉헌되는 집’과 같습니다. 자신이 봉헌되어야 하느님께서 주인으로 사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기도하는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어버린 유다인들을 질책하십니다.
채찍으로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성전에서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성전은 자신이 봉헌되고 있어야 합니다. 부모님의 사진은 오래 되었어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 사진은 사실 종이 한 장에 불과하지만 부모님의 모습이 새겨져있다는 것만으로도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도 당신을 모신 성전이 된 사람을 버리실 수가 없으십니다. 그런데 장사하는 집이 되어버린 사람은 하느님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이 찍힌 사진을 가져다니는 사람과 같습니다.
오직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하느님의 얼굴이 찍힌 사진을 가져다니는 우리가 되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이미지를 지워야합니다.
성전의 제대는 자신을 봉헌함을 통해 하느님께서 내려오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 제대와 같은 곳이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영광을 받고 내가 이익을 보려는 마음을 그 제대 위에서 바치고 있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하는 내용이 모두 자기 자신의 영광과 이익을 위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채찍으로 장사꾼들을 쫓아냈던 예루살렘 성전과 다를 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은 잘 나가던 하버드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정신지체 장애우들을 돌보기 위해 작은 복지원의 원장으로 가기를 선택합니다.
그는 세계적으로 가장 명성 있는 신학자 중의 하나이며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던 학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저서 20여권은 모두 베스트셀러였습니다.
그는 명예를 보장하는 하버드 교수직을 버리고 장애아들의 용변을 치우고 목욕을 시키고 식사를 돕고 행동 교정을 하는 등의 구질구질한 일을 하는 일상을 선택하였습니다.
모두들 “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신부님은 몇 개월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예수 이름으로’라는 책을 써서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그 동안 나는 올라가는 길만을 추구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 신동이라고 추앙되고 하버드교수에까지 올라왔습니다.
나의 저서 20여권은 뭇 사람들의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정신박약아 아담 군을 만났을 때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는 내리막길을 통하여 예수님을 바로 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르막길에서는 예수가 보이지 않았지만 내리막길에서는 복음서에 나타난 진정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신앙을 통하여도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하셨습니다.
우리 성전 안에서는 무엇보다 ‘마음’이 바쳐져야합니다. 내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려는 마음만 남아야합니다.
나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추구하면 다른 모든 봉헌은 결국 나의 이익을 위해 하는 위선적인 장사가 됩니다. 나를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먼저 나의 영광을 위하는 마음이 봉헌되고 있는지 항상 살펴야겠습니다. 내리막길을 통하여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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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라떼란 대성당 봉헌 축일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 라떼라노에 세운 대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날이다. 라떼란 대성당은 로마의 주교좌 성당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사도좌 성당이라고 할 수 있다. 라떼란 성당을 들어가다 중앙 문을 보면 문 상인방에 라틴어로 “Omnium Ecclesiarum Urbis et Orbis Mater et Caput”, 즉 “로마와 전 세계의 모든 교회의 어머니이며 머리”라는 글귀가 있다.
이 성당은 성 베드로 좌의 권위를 상징할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대성당들의 모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성당의 봉헌 일을 기념하는 것은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시는 베드로 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이다.
복음: 요한 2,13-22 :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두고 성전이라 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과월절이 되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더럽히는 모든 행위를 금하시고 정화시키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성전의 본 의미는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께 참된 예배를 드리며 그분의 선물을 받는 곳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모든 것은 형식으로 변하고, 성전이 이익집단이 모여 이권전쟁을 하는 곳으로 변해버린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대로하신 것이다.
파스카 축제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성대한 축제이다. 이 축제를 지내기 위해서 온 세상에 흩어져있는 유다인들은 이때에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며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그때에 예루살렘에 모인 순례객들이 200만 명이 되었고, 제물로 바치는 양의 숫자도 30만 마리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에 성전에서 제물로 바치는 가축들을 성전에서 준비한 것만 바치게 하였고 성전세도 성전에서 만든 돈으로만 바치게 하여 이런 횡포가 있었던 것이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현존보다는 자신의 이익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그 모습을 보시고 노하셔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16절)고 꾸짖으신다.
예수님의 이 행위는 유다인들에게 반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행위였다. 그래서 그들은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8-19절). 이 말씀은 당신의 몸을 두고 성전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 가지 성전을 볼 수 있다. 하나는 46년에 걸쳐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깊은 신학적 의미가 있다. 성전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언제나 체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분이 성전이시며, 아버지와 성령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 몸은 거룩한 성전이시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 6,19) 이제 어떤 의미에서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 자녀들인 우리 자신이 성령을 모시는 궁전이다. 성령을 모시는 또 다른 성전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몸을,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맞는 성전으로 항상 가꾸고 보존하여야 할 것이다.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이 성전이 거룩한 것처럼, 그 안에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우리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장, 성전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이 성전임을 알았다면, 오늘 복음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복음일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이 성전이 거룩할 때에 우리 교회 공동체가 모두 하느님을 모시는 성전으로 변화될 것이다. 우리는 이 성전에 생명을 심을 수도 있고, 멸망을 심을 수도 있다.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이 될 수 있도록 잘 가꾸고 보존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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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부산교구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신학사무처장) 염철호 요한 신부님]
제1독서의 에제키엘은 기원전 597년 일어난 바빌론 1차 유배 때 끌려간 사제였습니다. 그런 그가 ‘새로운 성전과 그 성전에서 솟아나오는 물’이라는 환시를 봅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 동쪽에는 기혼이라는 샘이 있었습니다. 풍부한 수량을 가지고 있는 이 샘 덕분에 예루살렘은 주변의 환경이 척박한데도 중요한 군사, 정치의 중심 도시로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기혼 샘의 물은 예루살렘 성전을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데 물은 필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새로운 성전과 그 성전에서 솟아나오는 물에 관한 환시는 옛 성전이 새롭게 복구되고 정화된다는 것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복구된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강을 이루며 바다로 들어가서, 닿는 것이면 무엇이든 살려 내는, 곧 모든 생명, 온 세상을 위한 물이라는 것을 보면, 이 환시가 단순히 과거의 성전으로 되돌아갈 것임을 알려 주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오늘 복음으로 봉독한 요한 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바로 새로운 성전이심을 밝히십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 19장 34절은 예수님께서 희생 제물로 십자가 위에서 바쳐지셨을 때, 그분의 몸, 곧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전합니다. 이 피와 물이 바로 에제키엘이 예언한 새로운 성전에서 솟아나온 물로, 온 세상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해 줄 물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물을 마시고 생명을 얻게 된 이들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 나아가 우리 각자는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성전이 된 이들입니다(1코린 3,16 참조). 그렇다면 우리를 통해서도 다른 이들을 살릴 생명의 물이 흐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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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님]
<나를 필요로 하시는 주님>
어느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선 이사야는 날개달린 천사들에 둘러싸여 찬미 받으시는 주 하느님을 뵙는 영적 체험을 합니다. 바로 그 체험 현장에서 이사야는 주님으로부터 예언자로 부르심 받아 파견됩니다.(이사 6, 1-10)
한편 예언자 에제키엘은 일찍이 성전 밖으로 나오는 하느님 영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에제 10, 18-22; 11, 22-23) 그로부터 얼마 후 그는 주 하느님의 영광이 새로 지은 성전 안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43, 1-9; 44, 2)
오늘 1독서에서 에제키엘은 주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어떤 모습으로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지를 그려줍니다. 여기서 에제키엘은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사 8, 6-8)과 물이 풍부한 에덴동산의 모습(창세 2, 10-14)을 연관시킵니다. 한 마디로 모든 풍요로움과 축복은 다 주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독서의 끝 구절이 이 모든 말씀을 잘 요약해줍니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에제 47, 12)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뒤 요한은 묵시록에서 에제키엘 예언자가 그리던 구원받은 이들의 세상, 곧 하늘나라로 독자들을 초대합니다.
“목마른 사람은 오너라. 원하는 사람은 생명수를 거저 받아라.”(묵시 22, 17ㄷ) 신구약에서 물은 삶과 기쁨의 상징이며 성령을 뜻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7, 37-39ㄱ)
한편 사도 바오로는 오늘 2독서에서 ‘하느님의 성전’은 다름 아니라 ‘모든 믿는 이들’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 16)
본디 이사야는 하느님 백성에게 타락한 삶을 떠나 주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백성은 예언자의 외침에 귀 기울이지 않아 결국 바빌론으로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유배생활에 힘겨워하는 백성에게 에제키엘은 ‘주님의 입’이 되어 희망을 일깨웠습니다. 요즘처럼 살기 힘든 때일수록 주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십니다.
“내가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그만큼 그분도 나를 필요로 하십니다. God needs me as much as I need God.”( J. H. Nouwen).
열심히 살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룩하게 되어 이사야나 에제키엘처럼 주님을 체험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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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인진교 요셉 신부님]
<성전 정화 = 단순한 삶>
지난 2008년 9월 2일 진사리 성당으로 이동하는 날, 내 눈을 의심케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1톤 트럭을 가득 채우다 못해, 넘쳐 흐르려는 내 짐들이었다. ‘언제 저렇게 많아진 거지? 내가 워낙 키가 큰 까닭에 맞는 침대가 없어 침대도 가져가야 하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짐이 많다고는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너무 많네’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이동 하는 내내 ‘과연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을 따르는데 필요한가?’라는 자문을 했다. ‘그 많은 짐들이 주님이 아닌 내 편리함만을 위한 것은 아닌가?’하는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소와 양, 비둘기를 파는 상인들과 환전꾼들로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신다. 복음 말씀을 묵상하는 내게 소와 양, 비둘기를 파는 상인의 모습이 다가왔다.
소, 양, 비둘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때 봉헌하는 제물이다.
성경에서도 드러나듯이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이 키운 가축 중에서 그것도 가장 좋은 것을 골라 하느님께 제물로 바쳤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대신해서 바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정성을 다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을 방해하는 소와 양, 비둘기를 파는 상인들과 상인들 옆에서 돈을 바꿔주는 환전꾼들이 예수님 눈에 띈 것이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하느님께 참된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 방해꾼들로 보였을 것이다. 그들은 주님께 봉헌할 제물을 정성 다해 키우지 않더라도, 편리하게 돈만 가지고 오면 충분히 제사를 드릴 수 있다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께 제사만 드리면 내 의무는 다한 것이다.’라는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왜곡되고 더럽혀진 성전을 하느님을 사랑하는 열정에서 몸소 정화하신다.
이제 우리 자신을 바라보자.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느님께서 몸소 거하시는 성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을 성전답게 가꿀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하느님께 온전히 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과 맺은 관계에서 편리함만을 찾을 때가 있다. 아마도 한 번쯤은 경험했을 텐데, 우리는 기도할 때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기보다는 내 바람만을 하느님께 요청할 때가 많다. 내 바람을 하느님께 말씀드리고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 얼마나 편한 일인가?
마치 종에게 일을 시킨 주인처럼, 일이 완성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하느님께 드리는 참된 기도가 아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는 오히려 단순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듯 정성껏 키운 소와 양을 제물로 봉헌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각자의 삶 전체를 봉헌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 삶을 봉헌하고 하느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 이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참된 기도가 아닌가?
하느님 앞에서 단순한 삶을 살아가는 것, 언제나 하느님의 성전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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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윤벽 프란치스코 신부님]
신축중인 성당에서 본당 사목을 처음으로 시작하였는데,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신자 수도 작고 본당 재정도 빈약했기에 건축비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성전 지붕을 값비싼 재질인 동판으로 해야 하느냐는 문제로 몇 달을 성전 건축위원회에서 씨름을 해야 했고 성전바닥을 값싸고 튼튼한 재질을 찾느라고 한 달 이상 백화점과 호텔 건물 바닥만 보고 다녀야했습니다.
4년 간의 우여곡절 끝에 성전 공사를 마무리했고 그즈음에 주교님께서 이탈리아로 피정을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성전 공사를 막 끝내고 온지라 제 눈에는 로마에 있는 성당 건물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피렌체의 어느 성당에 갔을 때 제 눈을 의심했는데 성전 내부가 온통 금으로 장식되어 있고 성전 바닥은 마치 화가가 붓으로 그려 놓은 듯이 그 비싼 대리석으로 장식해 놓은 것이 아닙니까?
그 화려함과 웅장함에 성전 바닥에 발을 딛고 서 있기가 부담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신학자 본회퍼가 다음과 같은 심오한 말을 남겼습니다. 오로지 고통 받는 하느님만이 봉사하는 하느님만이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비참함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부족함과 욕망의 실천을 보장해 줄 만한 하느님을 만들어내려 노력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난하기에 부요한 하느님을 상상했고, 부요한 성전을 건축했었고, 인간이 빈약했기 때문에 강한 하느님을 모시려했고 웅장한 성전건축에 매달렸습니다.
인간의 변덕스럽고 의존적인 모습과 달리 하느님은 언제나 홀로 자립적이고 변하지 않는 강인한 하느님이어야 했기에 백 년, 천 년 가도 허물어지지 않는 하느님의 거처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교적 계시는 겸손하고 온화한 하느님, 가난하고 상처받은 하느님, 자비로운 하느님의 계시를 통해 우리 인간을 해방시키고 구원하려 하신 구세주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탐욕과 사심으로 가득 찬 유다인들을 채찍으로 내려치시며 유다인들이 마흔 여섯 해나 걸려 지은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을 허물라고, 인간의 왜곡된 생각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당신께서 우리의 깨끗한 손을 빌려 손수 하느님의 집을 지어 만들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오로도 에페소서에서 참된 성전에 대해서 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이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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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요한 2,13-22 (성전을 정화하시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성전은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이면서 동시에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기 위해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살아 있는 성전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하느님의 사랑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성전입니다.
온유와 겸손이 가득해
하느님을 찾는 이가
편안하게 다가와
시름을 벗고 쉴 수 있는
그루터기 같은 성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성전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편안히 머무실 수 있도록
자신의 의지와 욕심을 훌훌 털어버리고
하느님께 더 많은 자리를 내어놓아야 합니다.
외로움에 지친 이들이 편하게 쉬도록
자신을 둘러싼 단단한 벽을
미련 없이 허물어 버려야 합니다.
경쟁의 늪에서 헤매던 이들이
함께하는 즐거움을 맛보도록
넉넉한 마음의 자리를 내놓아야 합니다.
불신에 빠져 하느님을 원망하던 이들이
하느님을 만나고 느끼도록
사랑으로 따뜻하게 안아주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고
누군가 물어올 때
겸손한 마음,
환한 웃음,
따스한 손길로 다가가
바로 여기라며 자기 자신을
가리킬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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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당신을 안으며…>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이란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 안에 주인은 누구신가? 라는 묵상을 해봅니다.
“주님, 저의 이 마음이 주님의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주님께서 이곳에 오셔서 머물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 집의 모든 것을 당신의 것처럼 사용하시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고백합니다.
“주님, 당신은 손님이었고, 제가 주인이었습니다.”
이것이었습니다.
“성전을 허물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 마음 안에 주님은 손님이셨고, 제가 주인 행세를 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선택하신 이유는 과연 무슨 이유이겠습니까?
바로 예루살렘이 성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에 맞춰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두고 “이 성전을 허물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을 성전에서 몰아내고 자신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제사가 드려지던 장소, 하지만 이미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성전이 목적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하신 후 골고다로 향하셨고 그곳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그리고 내 마음 안에 주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오늘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맞이하면서, 예수님께서 채찍을 내리치신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장사꾼과 환전상을 성전에서 쫓아내시는 예수님. 이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서도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이제까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단지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만을 갖고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흘 안에 다시 성전을 세우시겠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다시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인해 바로 당신 자신이 살아있는 성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성전은 과연 어떠합니까? 우리 심중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품고,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 두레박 사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은 손님이었고, 제가 주인이었습니다.
저는 나룻배 당신은 지나가는 나그네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저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물살이 세거나 약하거나 강가 어디나 건너갑니다.”
그러므로 지금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간호하는 이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들이 예수님을 품고 어떤 난관도 건너 마침내, 그 난관을 이겨낼 수 있는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오늘 무슨 일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그리고 어디를 가든지 십자가에 못 박하신 예수님을 내 심중에 안고 내 주인이심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은총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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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10)
♧♧ 시편 59편 17절….
"그러나 저는 당신의 힘을 노래하오리다. 아침에 당신의 자애에 환호하오리다. 당신께서 저에게 성채가, 제 곤경의 날에 피시처가 되어 주셨습니다."
* 아침에 당신의 자애에 환호하오리다...
찬란한 햇살이 비쳐오는 ‘아침’은 어두움과 대조되는 것으로 위기 상황이 물러간 ‘구원의 때’를 상징합니다. 이는 직접적으로 다윗이 미칼의 도움으로 밤중에 사울의 포위망을 벗어나 구원의 아침을 맞이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사무엘 상권 19장 12절. 참조)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사울 왕이 물러나고 이제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이스라엘의 새 임금으로 기름 부음 받은 다윗 자신이 그 임금에 등극하게 되는 날에, 그 일이 오직 주님의 자애하심으로 말미암은 줄 알고 주님을 환호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 중심으로 새 임금으로서의 다윗의 신앙 자세를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 제 곤경의 날에 피신처가 되어 주셨습니다...
‘피신처(히브리어 미스가브)’는 ‘높다(히브리어 사가브)’라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로 ‘아주 높은 곳’을 의미합니다. 즉, 독수리가 절벽 높은 곳에 새끼를 두어 다른 짐승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듯이,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백성을 아주 높은 곳에 두어 곤경의 날에 어떠한 대적들로부터도 해를 입지 않도록 절대 안전하게 보호하신다는 뜻입니다.
♧♧ 시편 59편 18절….
"하느님, 당신은 저의 성채, 저의 자애로우신 하느님이시니 저의 힘이시여, 당신께 노래하오리다."
* 저의 힘이시여...
이 구절에서... 두 가지 사실을 봅니다. 하나는, 하느님은 악한 무리의 권세를 꺾으시는 강한 권능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인의 권세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헛될 뿐입니다. 또 하나는, 하느님은 당신 백성에게 힘을 주시는 힘이 근원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오로가 고백한 것처럼 '힘의 근원이신 하느님 안에서 당신께 충실한 이는 어떠한 곤경도 능히 이겨낼 수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피서 4장 13절)
* 저의 자애로우신 하느님이시니...
이는 11절의 ‘나의 자애로우신 하느님께서 나에게 마주 오시리라.’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한편, 저희를 향하신 하느님의 자애와 자비는 무궁하여 아침마다 새롭고 또 새로워진 주님의 크신 진실하심을 나타냅니다.(애가 3장 22-24절. 참조) 그러한 하느님의 자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늘 저희에게도 임하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죄로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인간에게 당신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을 내어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으며,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요한복음 3장 16절. 로마서 3장 23-26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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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고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술 한 잔을 마시던 한 형제님께서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그거 알아? 우리 동창 ***가 글쎄 위암 판정을 받았다는군. 힘내라고 전화라도 해 주자. 그리고 다들 건강 잘 챙기고.”
이 말을 들은 다른 친구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번에 같이 식사한 적이 있는데, 짜게 먹고 너무 빠르게 먹더라고. 아마 그런 잘못된 식사 습관이 위암을 가져왔을 거야.”
다들 공감을 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바로 그 순간 아픈 친구와 아주 친한 한 분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글쎄. 식사 습관이 잘못된 것은 분명하지. 그런데 이 친구가 정말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해. 밥 먹을 시간도 부족할 정도로 열심히 일해서 빠르게 식사할 수밖에 없었고, 또 짜게 먹을 수밖에 없었지. 이 사회 환경 때문인데 단순히 개인의 생활 습관만 탓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우리는 개인의 잘못이라면서 꾸짖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것도 자기 자신이 아니라 늘 상대방의 잘못을 이야기합니다. 자신은 언제나 옳고 남은 틀렸다는 관점을 가졌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예수님께서는 늘 개인의 죄에 대해서는 늘 너그러우셨습니다. 세리나 창녀 등 당시에 죄인이라고 평가받았던 사람에 대해서 단 한 번도 화를 내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집단의 잘못에 대해서는 엄격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던 주님께서 채찍을 휘두르는 폭력을 행사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성전은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으로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몇몇 장사꾼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곳이 되어있었으며, 이와 결탁한 종교지도자들 역시 많은 이익을 얻는 곳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집단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 죄를 범하게 될 때는 가만히 있지 않으십니다. 집단이 한 개인의 잘잘못을 따지는 말과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집단은 그 한 사람을 사랑으로 안아주고 보듬어 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집단의 이름으로 벌을 주고 단죄하는 역할을 해서는 안 됩니다.
또 집단은 더욱더 죄 자체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집단에 묻혀서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모습을 행할 때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내가 속해 있는 집단의 모습은 어떤 것 같습니까?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까요? 아니면 크게 혼날까요? 그리고 이 집단 안에서 나는 어떻게 살고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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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학생 때 배운 시조가 생각납니다. 길재(吉再)의 “오백 년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와 원천석((元天錫)의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 년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석양(夕陽)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계워 하노라.”입니다. 두 시조를 음미하면 인생의 무상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국가도, 궁궐도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허망하게 사라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11년 전입니다. 대한민국 국보 1호인 남대문이 화재로 전소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안타까워하였습니다. 남대문은 단순한 문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상징이었습니다. 600년 넘게 대한민국의 문으로 사랑받았습니다. 당시 화재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지금은 복원되어 옛 모습을 되찾았지만, 당시는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고려가 원나라의 침략을 받았다면,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찬란했던 역사와 문명을 자랑하던 나라가 있었습니다. 수메르, 페르시아, 바빌로니아, 앗시리아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고고학적 발굴로 알 수 있습니다.
올해 4월입니다. 성주간 월요일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상징이었던 노트르담 성당의 화재가 있었습니다. 저도 몇 번 방문했었습니다. 유럽의 자존심이 느껴지는 성당입니다. 노트르담 성당이 있는 프랑스는 ‘교회의 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프랑스의 상징이 불타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성당이 불에 타고 있는 시간에 많은 사람이 성당 주변에서 성가를 불렀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당은 화재로 사라지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파리의 시민은 안타까운 모습을 보며 눈물 흘렸지만, 식어가는 신앙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건물은 복원할 수 있지만 식어버린 신앙을 다시 찾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어머니와 같은 성당의 화재를 보면서 자신들의 식어버린 신앙을 뉘우쳤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교황님들께서 지내시던 성전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오랜 박해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알려 주는 성전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음을 알려 주는 성전입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성전은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성전은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와서 위로를 얻는 곳입니다. 성전은 생명의 빵을 나누는 성사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성전은 성전만으로 남으면 단순히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은 그곳에서 신앙생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몸이 바로 생명의 물이 흘러나오는 성전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몸에서 ‘가난, 순결, 순명’의 물이 흘러나오면 세상에는 평화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몸에서 ‘믿음, 희망, 사랑’의 물이 흘러나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도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들레헴 성당 문에 있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여러분이 관광객으로 오셨다면 순례자가 되셔서 나가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순례자로 오셨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셔서 나가면 좋겠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주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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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전 정화>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 성전 봉헌 축일로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대성전은 ‘모든 어머니요 으뜸’으로 볼리면서 현재의 베드로 성전이 세워지기까지 거의 천년 동안 역대 교황이 거주하던 교회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각 지역의 모든 교회가 로마의 모교회와 일치되어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축일입니다.
라테라노 성전이 상징하는 바 교회 일치의 중심입니다. 무엇보다 우선 적인 것이 삶의 중심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하느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라 고백합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는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라 정의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과 그리스도 예수님은 별개의 두 중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삶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삶의 중심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눈에 보이는 성전입니다. 성전이야 말로 우리 믿는 이들의 영원한 고향입니다. 참으로 마지막 궁극으로 갈 곳은 하느님의 집인 성전뿐이며 마지막 만날 궁극의 분은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하여 저는 요즘 수도원을 찾는 분들에게 우선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 가장 아름다운 날, 가장 아름다운 곳 하느님의 집 수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 주님을 만남으로 가장 아름다운 분이 되었으니 가장 행복한 분들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고스란히 가시적 성전 사랑으로 드러나는 법입니다. 하느님이 그리워 하느님이 보고 싶어 끊임없이 하느님의 집 성전을 찾아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음 시편 고백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만군의 주님이여, 계시는 곳, 그 얼마나 사랑하오신고, 그 안이 그리워, 내 영혼 애태우다 지치나이다. 이 마음 이 살이 생명이신 하느님 앞에 뛰노나이다.”
예수님의 성전정화도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거룩함의 마지막 영적 보루와도 같은, 세상을 성화시켜야 할 거룩한 성전이 타락하여 속화되는 것은 예수님께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것들을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과감히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의 불같은 아버지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어지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의미심장합니다. 바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바로 우리의 성전임을 말해 줍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요 성전입니다. 가시적 성전이 성전일 수 있음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성체성사 미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사 전례가 없는 성전이라면 건물일뿐 성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성체성사의 미사은총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인 성전이 되고 우리 각자 역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영성체후 기도가 이를 잘 요약합니다.
“하느님, 교회를 통하여 저희에게 천상 예루살렘을 미리 보여 주셨으니, 오늘 이 성사에 참여한 저희가 '은총의 성전'이 되고, 마침내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게 하소서.”
순례중인 교회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매일의 성체성사 은총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인 우리의 일치도 굳건해 지고, ‘은총의 성전’인 우리 각자 역시 정화되고 성화되어 더욱 더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괴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4,16-17)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이 거룩한 교회의 성체성사의 은총은 '거룩한 성전'인 우리를 통해 세상 곳곳에 흘러가니 바로 제1독서 에제키엘서가 이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살아난다.---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세상이 이렇게 살아 존재할 수 있음은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제공되는 영혼의 식食이자 약藥인 말씀과 성체요, 미사은총으로 정화되고 성화되어 세상에 ‘하느님의 성전’으로, ‘생명의 강’으로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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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 대성전입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웠습니다. 로마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교구장인 교황좌가 있는 대성당입니다. 대성전의 공식 이름은 “라테라노의 지극히 거룩한 구세주와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복음사가 대성전”입니다. 로마에 있는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첫째가는 지위를 가졌으며, 전 세계 모든 지역교회의 유대관계 안에서 “모든 성당의 어머니”로 불리 웁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표현대로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는 ”베드로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로써 이 날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전이라고 하면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드리기 위해서 건축한 외적인 건물을 생각하고 또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6.17) 하고 말합니다.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기도의 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곧 성전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몸은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더욱이 성체성사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의 몸은 성전이요, 움직이는 감실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2,19-21) 당신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흘 안에 세우겠다.’는 말씀은 죽음에서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그 의미를 알아들었습니다.
묵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도성을 얘기하면서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2-23) 하고 말합니다.
성전이란 특정건물만도, 내세에서 영적으로 성별된 장소만도 아닙니다.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하느님과 만나는 곳, 함께하는 곳이니 거룩한 곳입니다. 성전에서의 모든 만남이 거룩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거룩함으로 속됨을 정화해야 하고 우리의 거룩함이 세상의 속됨을 이겨가야 합니다. 그 힘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시고, 성체이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참된 성전이신 주님을 제대로 모셔야 하고 그 주님을 모신 내가 거룩함을 지녀야 하며 그러한 준비된 마음으로 기도의 집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미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마지막에 하느님의 성읍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그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노와 열정으로 정화하시는 예루살렘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궤가 모셔져 있었고, 이는 주 하느님의 현존과 그들의 선민과 구원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참된 의미는 환전상들과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파는 장사꾼들의 지나친 상혼에 가려져 있었고, 그 뒤엔 제사장들의 권력과의 결탁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의 상점은 올리브산 언덕에 있는 산헤드린의 상점과 경쟁하기 위해 대제관 가야파가 연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네 이익과 특권을 유지하고 증진시킬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돈이 되니까 장사를 하였습니다. 성전에 예물을 바치러 온 사람들을 잘 도와줘야 하는데 그들을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고 부담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정성과 거룩한 마음이 모아져야 할 성전에서 정성껏 준비한 제물은 무시되고 부정과 부패, 착취가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장사꾼들을 꾸짖으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단호하게 꾸짖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결국 심판 날에 ‘손과 발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 곳에 버려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쫓겨난 것은 그들 마음 안에 하느님은 없고, 물질과 개인적인 이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가득 차 있으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전에 하느님의 거룩한 영 대신‘돈’과 물질이 들어가서 주인행세를 하니 그 결과 46년이나 걸려서 지은 예루살렘성전도 ‘장사하는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썩으면 산천이 썩고 사람이 무너져서 종교도 무너지고 모두가 망그러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악한행실로 하느님의 살아있는 성전에 흠을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이라도 그곳에 거룩함을 지닌 백성이 없다면 이미 성전의 품위는 없습니다. 그저 잘 지어진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은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의 성전이 더 소중합니다. 어느 성당 기공식에서 하신 주교님의 말씀이 생생합니다.
“성전을 건축한다고 더 큰 성전인 마음의 성전이 무너지고 상처 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성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물질적인 이익을 계산하고 있잖습니까? 개인적인 이득을 추구하며 이웃을 돌려놓기도 하고, 마음으로 미워하며 시기 질투하고 ‘너 어디 잘되나 보자’ 하고 괘씸하게 생각도 하고….. 남의 허물에는 ‘너 정말 그럴 수 있나?’ 하면서, 자기의 허물에 대해선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하고 합리화합니다. 이런 마음이 장사꾼의 소굴이죠. 주님께서는 이런 속마음을 아시고 엎어 버리시는 겁니다. 그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성전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물을 벗어야 합니다. 이기적인 허물을 벗고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사람답게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걷어내고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입니다. 우리의 곳간은 천상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알곡으로 만들지 않는 한 곳간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따라서 알곡이 되기 위한 수고와 땀은 우리의 몫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우리의 할 일은 알곡을 만드는 일입니다. 영혼의 정화를 통해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화장을 하고 옷을 잘 입어 겉모습을 잘 꾸미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성전, 영혼의 상태를 잘 보고 가꿀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혹 마음의 성전에 흠이 간 것이 있으면 그 흠을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고치는 방법 아시죠? 예, 맞아요. 고해성사입니다. 성사를 자주 보고 새 삶을 시작하시기 바라며 보속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집에 물이 새거나 낡아서 파손 된 곳이 있다면 놀랄 만한 열성으로 빨리 복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거처하신다면 우리 마음이 그처럼 고귀한 손님께 부당한 거처가 되지 않도록 최선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신다면 청소를 하고 집안정돈 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요? 고해성사를 통한 영혼의 정화는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영혼에 존귀하신 그분을 합당하게 모실 수 있도록 더러운 곳을 깨끗이 하고 파손된 부분을 복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그 안에 거룩함을 잃지 않으려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결정 됩니다. 초라한 마구간이 빛난 것은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웅장하지도 값진 예술품 하나 없어도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그러나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건물에 갖가지 값진 예술품으로 장식을 해 놓았다 하더라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면 그 집은 그저 건물일 뿐입니다. 결코 성전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제대로 모시고 거룩함을 간직한다면 대성전이든 마당이든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다면 어디에서든 거룩함으로 빛나야겠습니다. 외적인 건물의 화려함보다도 마음의 성전을 빛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을 기도의 찬미, 말씀선포의 성전이 되게 하시고 우리 마음을 성모님의 발현장소로 강복하시길 청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증오, 탐욕으로 차 있다면, 악습에 젖어 있다면,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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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요한 2,13)
오늘 복음 대목의 첫 구절이 의미심장합니다.
"건너감"이라는 뜻의 파스카는 죽음의 천사가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민족의 집안을 거르고 지나간 것과,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마른 땅을 밟고 바다를 건넌 기적을 떠오르게 합니다.
유다인들은 율법이 정한 바대로 파스카 축제를 거행해 왔습니다. 물을 건넘으로써 노예 이스라엘은 죽고,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로 거듭났기에 민족적 정체성과 자긍심의 원천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바로 이 시기에 이르러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이번은 아니지만 훗날 다가올 파스카 때에 예수님은 피를 흘려 인류를 정화하고 구원한 어린양의 희생 제사를 바치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겁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성전에서 소동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축제 예식에 기대어 부당한 이득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분노를 터뜨리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팔아 장사하는 이들에게 외치신 "내 아버지의 집"이란 말씀에 예수님의 안타까움이 담겨 있습니다. 성전이 이윤 추구의 소란스런 각축장이 되어버린 탓입니다.
성전은 하느님 현존의 장소이고, 진심으로 하느님을 찾는 이들이면 누구나 다가와 마음을 쏟아놓고 기댈 수 있는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아버지의 집이어야 합니다. 또한 정화와 성화, 즉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본연의 정체성도 잃지 말아야 하지요.
성전의 거룩하고 진실되고 장엄하며 아름다운 모습이 예수님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분께서 곧 성전이십니다. 걸어다니는 성전, 말씀하시는 성전, 치유하고 용서하고 해방시키는 성전이십니다.
제1독서는 에제키엘 예언서의 유명한 성전 현시 대목입니다.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에제 47,9.12)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만물을 되살리고 생동하게 합니다. 이 생명의 원천은 성전입니다. 성전이신 예수님의 벌어진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요한 19, 34 참조)가 온 인류와 세상에 생명을 주리라는 예언적 환시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요한 2,19)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이 말씀으로 당신 생명의 처분권을 유다인들 손에 넘기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맞이하실 파스카를 의미합니다. 허물지 않고는 다시 세울 수 없고, 새로운 생명은 죽음을 건너야 얻으니까요. 이 의미를 유다인들은 못 알아들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요한 2,22) 깨달을 것입니다.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다시 약동하게 될 생명의 기운은 죽음을 거친 뒤에야 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 사흘만에 부활하시어 모든 이를 당신께로 모아들이시고 그들에게 진정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성전은 장소적으로 고정된 아버지의 집에서, 육화하신 예수님에게로 옮아갑니다. 예수님의 파스카를 통하여 진정한 예배는 이 산, 저 산을 찾아다니지 않는, 제도와 절차에 묶이지 않는,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진정한 제사로 건너갈 것입니다.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나는 보았네"(입당송).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성령을 받아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우리가 곧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며, 그리스도의 신부로 아름답게 치장한 새 예루살렘입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께서 이 지상 교회 안에서 무엇을 가장 안타까워하실지, 우리 공동체에서 무엇을 가장 슬퍼하실지, 내 안에서 무엇을 가장 치우고 뒤엎고 내쫓고 싶어하실지 바라봅시다. 이 손길은 가장 순결하고 진실되고 아름다운 본래 모습을 되찾아 주시려는 파스카로의 초대이기에, 그 목적은 파괴와 죽음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이 되살림에 목숨을 거셨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우리의 파스카는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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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 감사하는 삶은 은총의 삶이며 기쁨의 삶이기도 하다
‘은총의 삶’은 ‘감사하는 삶’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감사와 은총’은 동정의 양면입니다. 라틴계 언어에는 ‘감사와 은총’을 동의어인 ‘그라시아, Gratia’라고 합니다. 이태리어는 ‘감사합니다’를 ‘그라시아스, Gratias’라고 인사합니다.
‘감사와 기쁨’ 또한 동정의 양면입니다. 감사의 꽃이 피면, 기쁨의 열매를 맺습니다. 또한 ‘감사와 기쁨’은 ‘기도’로 얻어지는 수확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 5,16)라고 합니다.
저는 매일 감사하는 일을 노트에 적습니다. 감사할 줄 몰라 막연할 때 감사하는 일을 쓰기 시작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며, 감사할 일들이 무수히 많게 떠오릅니다. 이 또한 이적입니다. 감사할 일을 쓰는 것은 치유행위이기도 하며 몸에 배어 습관이 될 때 ‘은총의 삶’이고 ‘덕행의 삶’이 됩니다.(집회 51,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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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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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요한 2,14-15)
<채찍이신 성렁>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앉아서 돈을 바꾸어 주는 자들은 베풀줄은 모르고, 타지에서 성전을 찾아온 사람들을 장사와 돈벌이 기회로 여기는 자들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드릴 제물을 자신들의 이익과 탐욕을 위하여 제공합니다. …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채찍을 다른 이에게서 받으신 것이 아니라 끈으로 직접 만드셨습니다. … 채찍은 악한 자들을 날려 없애시는 성령의 힘과 활동의 상징입니다... 채찍, 끈, 아마포같은 것들은 모두 성령의 힘과 활동의 상징입니다 ... 채찍은 나뭇조각에 묶여 있었습니다. 나무는 십자가의 한 형태입니다 ... 노름꾼들과 장사치들, 그리고 모든 악한 자들은 이 나무에 못 박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리게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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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성전>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시다."
성전은 거룩한 집이요
거룩한 집에 걸맞은 것들이
아니면 과감히 쓸어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몸을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그분 마음에는 오직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
외에는 그 어느 것에도 마음 두지 않으셨습니다.
거룩한 집, 거룩한 몸, 거룩한 마음을 지니는데
방해되는 잡다한 것들을 싹 치워버립시다.
방치하면 마음이 쓰레기통으로 변합니다.
"치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것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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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 19)
하느님께로
가는 길 위에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성전이 있습니다.
이와같이
세상의 모든
성전은 하느님께서
모든 성전의 중심이시며
성전의 주인이십니다.
좌표가 되는
성전을 통하여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무너져
내리는 시간은
언제나 순식간입니다.
무너져 내려야 할
우리의 욕심과
우리의 욕망입니다.
우리 자아가
무너져 내리지
않고서는 참된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성전의 첫 마음
처음으로 돌아가는
성체와 성혈의
삶입니다.
이 시대에
희망과 기쁨을
주는 성전이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참된 기쁨과
참된 용서가
성전의 본질입니다.
가짜가 아닌
진정한 성전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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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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