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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교시 맹자가 말하는 항산과 항심이 보장되고 지식인이 존중 받는 공동체
intro
무사로서 기백을 가진 어떤 지식인
우리가 선비, 지식인이라고 말하는 士는 원래 무사를 의미했습니다. 글만 읽고 마음가짐, 몸가짐을 공손히 하는 선비 내지 지식인을 떠올리기 쉽지만 원래 士는 서주시대 그리고 춘추시대 활을 쓰고 수레를 몰고 전장에 나아가서 싸우며 전쟁을 하던 전사였었습니다. 하지만 춘추말엽부터 수레전에서 보병전으로 그리고 하층민들까지 모두 동원해서 싸우는 식으로 전쟁의 방식과 규모가 변하면서 士는 전사가 아닌 다른 길을 모색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의 방식만 변한 것이 아니라 각국의 제후와 대부 모두 자신들을 보좌할 신하와 관료, 참모와 꾀주머니들의 충원이 대대적으로 필요해지게 되었는데 마침 수레와 활, 칼을 놓은 무사들은 지식인으로 변신하게 되었고 조정에서 신하와 관료로 맹활약하며 새 시대의 주역이 되어갔습니다. 관료와 신하로써 군주를 보좌하면서도 군주와 함께 인민들을 다루는 지배층을 형성하며 이제 국정의 주역이 되어갔는데요. 하지만 예비 관료, 지식인이 되면서 학문에 주력하고 책을 주로 붙잡고 있게 되었지만 무사로서 강단을 버리거나 무사로서의 때를 완전히 벗어던지지는 못했습니다.
공자는 어짊은 행하는 군자는 용기가 있어야한다고 용기를 긍정했으며 3군을 거느리는 대장군의 지위와 권세를 빼앗을 수는 있어도 한 필부의 기개와 지조를 꺽을 수 없다고 말했지요. 덕과 어짊, 경청, 양보를 말한 공자에게도 무사의 자세와 각오가 여전히 보이는데 공자 이후에도 지식인의 자세엔 저런 무사의 때가 남았고 그것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최근까지도 계속 되었습니다.
지조를 목숨보다 중히 여기고 항상 군주 앞에서 목숨 걸고 자기 목소리를 낼 준비를 하고 자신이 옳다 생각하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동아시아 지식인의 자세, 그들의 그러한 자세는 과거 전사, 무사시절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자 더 이상 수레를 몰고 칼을 차지 않아도 무사 시절의 기백이 남아 있는 지식인의 모습 우리는 그 무사의 때를 벗어던지지 못한 지식인을 이번 시간에 만나보려고 합니다. 그는 대장부를 주장한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천하의 넓은 곳에 거처하며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큰 도를 행한다. 뜻을 얻었을 때는 백성과 더불어 선을 행하고 뜻을 얻지 못했을 때에는 홀로 그 도를 행하며 부귀도 그를 유혹하지 못하며 빈천도 그 지조를 꺽지 못하게 하고 위협과 무력도 그 뜻을 꺽지 못하는 사람이 대장부다”
대장부를 말하며 무사의 각오와 강단을 가졌던 지식인, 많은 동아시아 지식인들이 올곧은 자신의 신념을 견지할 수 있게 크게 영향을 준 지식인 바로 맹자입니다.
맹자가 산 시대적 배경.
맹자가 위나라 수도 대량에 들러 양혜왕에게 오디션을 받는 장면으로 맹자란 텍스트는 시작합니다. 그 양혜왕이 맹자에게 묻지요.
“노선생님께서 천리 먼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우리 나라에 와주셨으니 장차 내 나라를 이롭게 함이 있을 거 같아 기대가 큽니다.”
그러자 맹자는 정색하면서 이렇게 답을 했죠. “왕께서 어찌 하필 이로움을 말씀하시나요? 그저 인(仁)과 의(義)가 있을 뿐입니다”
오디션에서 심사를 받는 사람 같지가 않습니다. 저돌적인 자세로 답을 하며 직설적으로 인과 의가 있을 뿐이라고 답을 하는 맹자. 역시나 그 기백이 드러나는데요. 자 이렇게 맹자가 유세를 한 시점, 위나라 옆에 진나라에서는 앞서 다룬 상앙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특권층과 구 귀족층들의 기득권을 모조리 백지화 시키고 군주중심의 일원화된 국가를 만든 상앙이 진효공의 실각 이후 그에게 칼을 갈았던 귀족들의 공세를 이겨내지 못해 잔인하게 죽음을 당했는데 이렇게 상앙의 시대가 저물 무렵 맹자가 활약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면 대략 맹자가 산 시대적 배경이 보이실 겁니다.
맹자가 산 시대는 전국시대 중기. 이제 모든 나라의 군주는 과거 춘추시대 군주와 달리 나라를 촘촘히 장악한 영토국가의 군주로서 매우 높아진 힘과 위상을 자랑했고 이 군주로 대표되는 국가 권력이 굉장히 강해진 상태였습니다. 바로 전 시간 상앙을 다루었는데 상앙의 진나라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들의 군주중심으로 국가를 재편하면서 국가권력이 사람들에게 강제할 수 있는 힘 자체가 아주 커져갔습니다. 전에는 영토국가화가가 되질 않아 비읍(鄙邑)이나 야(野)라는 공간에 사는 민들이 군주에게 직접적으로 지배를 받지 않았고 대부들은 자체적으로 관리하는 토지와 토지에 민들이 있었고 가신과 군사까지 거느려 나라 안의 실력자로 활동했지만 군주중심의 국가체제로 재편되는 과정에 대부분이 몰락하게 되었죠. 그렇지 않으면 왕과 권력경쟁에서 정면대결을 벌이며 기존의 군주를 몰아내고 나라를 집어 삼키던가 그랬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이 집어 삼킨 나라에서 강력한 왕권을 휘 두루는 전국시대형 군주가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제후가 이기든 대부가 이기든 결과는 똑같았죠.
그리고 강해진 국가권력을 소유한 군주가 만들어낸 시대적 상황은 어땠을까요? 그런 시대적 상황이 맹자라는 둘러싸고 있었고 맹자를 사유하게 했을텐데요. 당시 맹자가 부대낀 시대적 배경은 그가 한 다음의 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양혜왕:. “과인이 기꺼이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고자 하오”
맹자가 대답하길 “사람을 몽둥이로 죽이는 것과 칼로 죽이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양혜왕: “차이가 없습니다”
맹자“ 갈로 죽이는 것과 정치로 죽이는 것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양혜왕: 차이가 없습니다.
맹자: 궁전의 부엌에는 기름진 고기가 있고 궁실의 마구간에는 살찐 말이 있는데 인민들은 굶주려 있고 들판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널려 있으니 이는 짐승을 몰아다가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짓입니다. 짐승들이 서로 잡아먹는 것조차 사람들은 싫어하는데 하물며 백성들의 부모가 되어 정치를 하면서 짐승들을 몰아다가 사람을 잡아 먹게 하고 있으니 대체 어디에 백성의 부모 됨이 있습니까?“
무력과 전쟁을 통한 열국들의 간의 합병경쟁은 전 중국이 통일 되어가는 과정에 있어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인민들을 엄격하게 통치하고 그걸 통해 국력을 조직화해 합병을 위한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인민들은 짐승만도 못한 처지로 전락되고 전국시대적 풍경이 이러했습니다. 그래서 앞서 말한 묵자 같은 사람이 비공과 반전을 그렇게 목놓아 부르짖었겠죠. 그런데 묵자시대보다 전쟁의 양상은 더 참혹해졌고 국력 극대화를 위한 인민들을 쥐어짜내기는 정도가 심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맹자는 왕도정치를 말했습니다. 군주는 마땅히 인민들의 부모가 된 마음가짐으로 항상 그들을 가엾게 여겨 은혜를 베푸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했지요. 다른 말로 인정(仁政)이지요. 그것이 전국시대의 참상에 대한 맹자의 대안인데요. 그런데 맹자를 고민케 한 것은 이렇게 파탄이 난 인민들의 삶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양주와 묵자, 당시 사상계를 지배했던 두 사상의 거두를 맹자는 적으로 지목했습니다. 그 둘의 사상이 당시에 대흥행을 하면서 너무도 초라해진 공자의 사상. 그것을 어떻게 지켜내고 계승해낼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맹자에게 강했습니다. 저들을 참 신랄하게 비난했는데 양주와 묵자만이 아니고 농가 허형, 법가식 노선, 송견이란 사상가도 비판하고 참 여러 사상가들의 사상을 사설(邪說)이라고까지 매도하며 공격했는데 맹자 사상은 사실 전방위적으로 벌이는 사상투쟁의 와중에 형성된 것이랄 수 있고 어쩌면 상당히 과대평가 된 사상이랄 수 있죠. 인류최초, 또 인류 최고의 키보드 워리어이자 악플러인데 성리학이 주류가 되면서 너무 우호적으로 독해가 되고 그의 사상을 재구성해준 감도 있습니다. 맹자는 모두까기 인형이었는데 그럴 만큼 공자의 학문이 현실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미미해 위기감을 가질 만했죠. 공자의 위상을 양주와 묵적, 법가 사상가들이 너무 크게 위협했던 게 사실이고요.
그리고 앞서 말씀 드린대로 너무도 강해져가는 군주와 국가의 힘. 그러한 가운데에서 어떻게 지식인으로서 자기 자존심과 자신의 영역을 지켜갈 것인가 그 문제도 맹자가 굉장히 고심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맹자와 생몰연대가 거의 포개지는 동시대인 장자도 고민한 문제인데 그래서인지 둘의 문제의식과 사상에서 비슷한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맹자는 몰락해가고 있거나 몰락의 위기를 느끼고 있는 구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사적 기질이 강했던거 같은데요 대부나 사나 모두 무인이었으니까요. 그 무인이자 귀족 세력 사이에서 나온 지식인, 그 지식인이 공자의 제자라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는 완전히 몰락한 귀족 출신이거나 평민출신 지식인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더욱 커져가는 왕권에 위기감을 느낀 사람인거 같고 그래서 공자사상을 구귀족의 기득권 수호를 위한 것으로 좀 변질시키기도 했지요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구 귀족들이 공자의 사상을 구매해 무장하기 시작한 것인데. 자 이제 맹자가 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선한 마음에 대한 자각과 어진 정치.
맹자 하면 성선설이죠. 인간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특히 측은지심. 불쌍해 보이는 동물과 딱한 처지의 사람을 보고 가여워하는 마음을 인간이 지니고 있는데 그래서 인간은 착하고 모두 요순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맹자는 말합니다. 맹자하면 알고 있는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인간의 선한 마음은 어진 정치를 펴야한다, 또는 펼 수 있다는 맹자 왕도정치의 기본적 전제입니다. 군주도 그리고 군주와 함께 국정을 이끌어가는 지식인도 모두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바탕으로 은혜를 인민들에게 베풀고 넓혀가는 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왕도정치고 어진 정치죠.
앞서 2교시 안자를 이야기할 때 언급했던 제선왕과의 일화 기억하시죠? 맹자가 제선왕에게 유세할 때 이야기입니다. 제선왕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를 보았고 그 소가 벌벌 떨며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보이자 안쓰러운 나머지 소를 살려주라고 했는데 그 이야기를 맹자가 사전에 듣고 제선왕에게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제선왕이 그런 적이 있다고 하자. 맹자는 옳거니 합니다. 왕께서 그렇게 죄도 없이 죽으러 끌려가는 소를 보고 측은하게 여기셨는데 그런 마음을 가지셨으니 왕께서 어진 정치를 펼 수 있고 훌륭히 왕 노릇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맹자는 선한 마음을 금수에게만 미치지 말고 인민들에게까지 정치의 형태로 이르게 하라고 말합니다. 맹자는 그것을 은혜를 베푸는 정치, 은혜를 베푸는 범위를 넓혀가는 정치라 말 하는데 그러한 정치의 기본은 인민들이 항산을 누리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항산이란 안정된 생업, 일정한 생업의 기반인데요. 그것을 인민들에게 보장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죠. 그 일정한 생업이 있어야 항심이라는 한결같은 마음, 착한 마음이 인민들에게 생긴다는 것입니다. 관중이 말하는 가난한 인민은 통치할 수 없다. 묵자가 겸애로서 말했던 최대 다수의 기본적 생활 보장 그런 것들에 영향을 다분히 받은 것인데 그러한 항산을 만들어주는 통치부터 시작 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왕은 착한 마음이 있기에 그러한 항산을 만들어주는 정치를 쉽게 할 수 있다고 맹자는 말했죠.
“일정한 생업(항산)이 없으면서도 한결같은 마음(항심)은 오직 선비만이 그럴 수 있습니다. 인민들은 일정한 생업이 없으면 한결 같은 마음도 없습니다. 만일 항심이 없게 되면 방탕하고, 편벽되며, 사악하고 사치한 일등 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됩니다...... 그렇기에 영명한 군주는 인민들이 먹고 살 방도를 마련해 반드시 위로는 족히 부모를 모실 수 잇게 하고 아래로는 자식을 부양할 수 있게 해야합니다. .... 그런 연후에 인민들을 착한 길로 나아가게 하니 인민들이 따르기가 쉽습니다”
자신과 같은 지식인들이야 항심을 항상 가지고 있지만 보통의 민들은 생업 기반이 안정되어야 항심을 가질 수 있답니다. 항산을 가지게 하고 그 다음에 교육을 해 착하게 만들자고 하는데 맹자는 항산을 마련해주고 나서 효제를 가르치자고 하지요. 그리고 효제를 가르치는 건 언제든 항심을 가질 수 있는 자신과 같은 지식인이 담당하는 것인데요. 그렇게 하면 가혹한 폭정에 신음하는 천하의 인민들이 그러한 어진 정치를 펴게 되는 군주의 나라로 몰려들어 천하를 통일할 길이 생긴다고 합니다.
어진정치로 천하통일을 하자고?? 네 맞습니다. 맹자가 말하는 항산과 항심의 어진 정치, 왕도정치는 비현실적이라도 천하통일을 위한 방법론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착한 정치 펴면 그것으로 천명을 받아 천하를 호령하는 군주가 될 수 있다? 너무 순진하고 낙관적인 생각이지만 맹자는 과거에 요임금이나 순임금처럼 어진 정치를 해 천명을 받았다던 전설적인 군주 이야기를 끊임없이 상기 시키며 저렇게 주장했습니다.
인간 일반은 선하다. 우선 왕이 선하시니 그 선한 마음으로 왕도 정치를 해라. 그 왕도는 우선 백성에게 일정한 생업을 보장하는 것이다. 생업이 보장되지 않으면 백성은 그 자신의 본성인 효제, 효성과 공손함을 실천할 수 없지만 생업이 보장되고 나서 가르치면 자신의 본성을 잘 발휘해 효제를 잘 실천할 것이다. 왕이 왕도 정치를 실시할 수 있고 또 그것에 감화되어 백성들이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있는 근거로서 인간의 착한 본성을 맹자는 산정했는데 자 중요한건 우선 왕이 그러한 마음을 자각해 항산을 마련해주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실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왕도정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 되어야하고 그것을 펼치는 실질적 주역이 누군지 한번 알아볼까요?
왕도 정치의 구체적 전개
맹자는 대략 여섯 가지로 왕도 정치를 위한 구체적 방법을 말했습니다.
1. 때에 맞게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자연의 리듬에 맞게 농사지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인데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대로 함부로 백성들을 동원하지 말라는 주장이고 부릴 려면 때에 맞게 부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공자는 사민이시(使民以時)라 했죠. 맹자는 그것을 이어 받은 겁니다.
2. 토지를 공평하게 나누어주고 빈부의 격차를 없애라
3. 세금을 가볍게 하라. 생산량의 9분의 1에서 10분의 1 정도를 조세로 거두어라
4. 경우에 따라 군주의 사유지, 즉 국가의 사유지를 백성들에게 열어놓아 벌채, 수렵, 어획을 허가할 것
5. 학교를 개설하여 인륜 질서를 교육 시킬 것
6. 형벌을 가혹하게 하지 말 것.
이렇게 여섯 가지로 맹자가 말하는 왕도정치는 개괄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이렇게 구성되는 왕의 왕도정치가 실행된다면 천하의 모든 이들이 군주의 백성이 되기를 원해 천하 통일로 갈 수 있다고 맹자는 계속 부르짖었는데요. 정말 저렇게 여섯 가지를 실행하면 천하통일로 갈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 전에 저 여섯 가지가 정말 실행될 수 있었고 현실의 군주에게 수용될 수 있는 정책방침이었을까요? 농사를 지을 려면 토지의 제대로 된 분배가 우선인데 그것을 위해 맹자는 정전제를 대안으로 말했고 또 가구마다 5무의 집터와 100무의 논밭을 소유하게 하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귀족들의 사적소유 토지 문제와 인민 일반에게 토지를 공정하게 분배하여 소유하게 하는 건 같이 갈 수 없는 문제인거 같은데 맹자는 항상 나라 안에서 대를 이어 벼슬을 하고 정치적 목소리를 낸 귀족들, 세족, 거실들을 존중하라고 말합니다. 구귀족들 자의식이 투영되었다. 구귀족들과 타협했다. 아니면 구귀족들이 공자의 사상을 구매해 왕 앞에서 자기 기득권을 지키려고 했다. 풍우란 선생님을 비롯해 맹자의 사상을 보고 연구자들이 지적한 말인데요. 분명 맹자는 나라 안의 기득권층들을 인정했고요. 아주 세습해서 벼슬을 하는 자에게 제사를 이유로 토지를 따로 많이 떼어주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렇게 맹자는 세습귀족들의 기득권을 인정하는데 그들의 기득권과 공정한 토지 분배, 소유가 애초에 양립할 수 있었던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지식인과 지식인을 겸할 수 있는 귀족들을 인정하는 게 맹자식의 통치사상인데 그의 통치사상이 주류가 된 지배한 동아시아는 항상 지식인과 관료를 겸하는 지주들의 사회였고 지주들은 귀족이자 지식인, 관료로 행세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지주들의 기득권이 보장되는 상황에서 백성들이 안심한 채 농업에 종사? 대토지 소유를 한 지주들이 있으면 백성들은 어떻게 토지를 소유할 것이며 토지의 소유가 힘들다면 소작을 할 수밖에 없는 데요 맹자는 건실한 자영농 육성을 말하고 있지만 맹자 텍스트에 드러난 그의 주장들을 모두 같이 꼼꼼히 살펴보면 어떤 모순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비단 농사지을 땅만 문제 되는 게 아닙니다. 통치 질서가 지주들의 기득권을 보장한다면 지주들은 중세 장원의 영주처럼 언제든 인민들을 사적으로 부역에 동원할 수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정말 항산의 보장이 저렇게 쉽게 될 수 있는 일인지? 맹자식의 유교질서가 지배한 동아시아 역사를 보면 정말 소작인들일 수밖에 없는 대다수 하층민들이 안심한 채 농사에 주력했고 소작인들에게 항산이 보장되었나요?
그리고 맹자가 말한 대로 가혹한 징세는 제한되어야함이 맞습니다. 하지만 부세와 부역은 국가구조, 사회구조 유지에 필수이기에 9분의 1조세, 10분의 1조세는 너무도 비현실적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관료와 관리들을 부리고 상비군을 유지하며 재해, 흉년 등에 국가가 대비할까요? 착취를 막는 것은 좋지만 재해와 흉년의 상황에서 백성들을 구제할 것을 축적해 놓지 못한다면 그거 자체가 재앙입니다.
맹자는 민간의 산림자원도 국가가 함부로 가져가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군주가 소유하는 땅의 산림자원도 백성이 이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산림자원으로는 구리와 철, 나무 등이 있고 이것은 국방의 필수요소인데 이것을 국가가 장악하지 못하면 나라는 무슨 수로 지킬지? 그리고 가혹한 형벌을 자제하는 것도 좋지만 그 이전에 법 앞에서 모든 인민들이 동등해지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특권층들의 전횡으로 군주의 권력이 위험 받고 국가의 공적기능이 제대로 돌아가지가 않을 텐데요. 그렇다면 타 열국들과 경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또 통일제국이 들어선다면 굉장히 넓은 영역을 관할해야 하기에 가혹한 형벌로 보여주는 시범케이스가 불가피할 수도 있는데 온정주의적 법적용이 능사일까요? 실제 맹자의 말이 비현실적이어서 그런지 중국의 역대 통일왕조들은 맹자가 말한 대로 귀족, 지식인, 관료, 지주들의 기득권을 인정해주는 유교식 통치 질서를 펼쳤지만 법가식 엄형주의를 애용하기도 했죠. 그것은 오늘날에도 지속되는 것인데 국제사회에서 인권을 이유로 아무리 손가락질해도 너무 넓은 영토를 관할해야하고 언제든 카오스적 상황이 돌발되어 튀어나올 수 있는 중국이기에 현재 공산당정부부터 중국의 역대왕조의 엄형주의는 실제 이해가 가는 일이죠. 현실에서 그 큰 대륙을 통치했어야했기에. 그래서 맹자의 온정주의적 법적용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이렇게 왕도정치의 구체적 방법들을 살펴보면 실제 비현실적인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전국시대에도 외면 받고 통일제국 진과 한에서도 외면 받다가 한의 체제가 무너지고 나서야 대안으로 검토되어 맹자가 사상이 주류로 부상했죠. 맹자 사상이 주류로 다시 부상하던 시점엔 맹자 사상이 각광 받을 수 있는 사회경제적 배경과 변화가 있었지만 그 땐 그 때고 이렇게 전국시대에는 맹자의 주장은 이상론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비현실적인 면이 유가의 매력이기도 하고 또 역으로 비현실적이기에 장기적 구상과 청사진이 될 수 있어 오랜 생명력을 유지할 수도 있었지만요.
맹자 양혜왕 상편에서 보면 코미디로 보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실제 유교 사상이 항상 주류로 행세해왔고 아직도 그 관성이 강한 우리나라라 맹자 텍스트를 우호적으로 독해를 해와서 그 장면이 코미디로 읽혀지지 않았지만 실제 웃음을 금치 못할 수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양혜왕이 옆의 진나라에게 깨지고 제나라에 패해 왕자까지 죽고 남쪽의 초나라에게도 패배했고 이렇게 전쟁에서 거듭 패배해 나라가 망신을 당하고 위태로운데 어떻게 하면 설욕이 가능할까 맹자에게 묻습니다. 부국강병의 방법을 물은 거지요 이에 맹자는 이렇게 답합니다.
“땅이 사방 백리면 가히 천하의 왕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군주께서 백성들에게 어진 정치를 베푸시면 됩니다. 형벌과 세금을 적게 거두며 밭을 깊이 갈고 풀을 잘 매도록 하게 하고 난 다음에 젊은이들이 남는 시간에 효제충신의 도리를 교육 받고 집에 들어 와서는 그 부형을 잘 섬기며 나아가서는 그 윗사람들으 잘 받들게 한다면 비록 몽둥이만 갖고서도 진나라와 초나라의 튼튼한 갑옷과 예리한 병기의 군사를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생업에 안심하며 종사하고 윤리교육을 잘 받으면 진나라와 초나라의 그 막강한 군사들을 몽둥이만 가지고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잠꼬대 같은 소리라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맹자는 인자무적이라고 하면서 인한 정치를 하면 아무도 천하에 대적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는데 군주가 인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하는 정치적 조언은 정말 헛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기에 공자와 맹자는 당시 여러 나라 어디에서든 군주에게 환영 받지 못했고 임용되지 못할 수밖에 없었죠. 다만 함부로 대하거나 죽이면 지식인들이 자신의 나라로 오지 않을까봐 예우하는 척이라도 했던 것이고요. 왕도 정치의 뜻 자체는 좋겠지만 군주가 부국강병이라는 현실적 과제에 아무런 현실성을 가질 수 없었고 군주에게 조금도 솔깃할 수 없는 통치사상과 방법이 민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장기적 국가청사진, 또 인류 보편이 추구할 이상을 담고 있기는 하더라도 당시엔 수요에 맞는 공급을 하질 못했죠.
항산과 항심이란 참 좋은 것입니다. 분명 오늘날 국가 경영과 통치에도 항상 명심해야할 바라고 생각하고요. 국가공동체에 살면서 생업기반이 보장되고 공동체 구성원에게 교육이 보장되어 일정 수준의 도덕과 윤리. 요새로 말하면 시민사회 구성원으로서 공화국의 일원으로서 가져야하는 일정정도의 의식을 갖추는 거 좋습니다만 관중과 묵자처럼 현실을 면밀히 살피고 현실의 군주에게 먹힐 수 있는 대안과 방법에 실어서 같이 갈 수 있게 했어야지 세금 줄이고 부역 적게 하고 형벌을 줄여 온정적으로 대하고 그 정도 수준의 정치적 조언으로 대체 뭘 할 수 있었을까요? 항상 백성이 제일 귀하고 백성이 나라의 근본임을 주장했다지만 비현실적인 주장과 대안이었으니 받아들여질 여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성선론과 지식인의 주인이 되는 세상
성선론하면 그저 모든 인간 일반이 착하다. 모든 인간이 성인이 될 수 있다 라는 낙관적 견해로만 받아들이시면 안 됩니다. 맹자가 그런 식으로 말한 거 같긴 하지만 분명히 선을 그어두며 말했습니다. 성선이기에 인간 안에는 도덕 감정과 이성이 있지만 현실에서 누구든 그것을 잘 키워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게 맹자의 생각입니다. 앞서 보았죠. 왕도정치를 말할 때 선비들은 즉 지식인들은 항산이 없어도 항심이 있다. 반면에 보통의 백성들은 항산이 있어야만 항심이 있다고. 이렇게 보통의 인민과 구분되는 지식인을 말했는데 인간 안에 도덕 감정과 이성이 있지만 그것을 잘 키워 확충 시키는 사람은 지식인일 뿐이고 그 지식인이 관료가 되고 군주와 백성의 스승이 되어 세상의 중심에 서야한다. 그것이 맹자의 양보할 수 없는 신념입니다. 향후 동아시아 귀족, 지주, 지식인들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신념이고요. 우리는 선하고 그 선한 마음 잘 키워가 자발적으로 잘할 수 있으니 국가권력과 군주가 건드리지 마라. 그렇게 발전되었죠.
“사람이 금수와 다른바는 거의 없는데 뭇사람들은 그것을 버리고 군자는 그것을 보존한다”
성선을 말하며 인간일반이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만 이렇게 보통의 사람과 군자, 지식인들을 분명히 나누어놓고 보고 있고요. 맹자의 인성론에 사실 상당히 차별적 요소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한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지요. 자 모두가 자신 안에 내재된 도덕 감정과 이성을 잘 키울 수 없고 그것은 지식인만이 확충해 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국정의 주체가 되어야하고 세상을 다스려야겠죠.
맹자는 자신의 진심편 첫장에서 그럽니다. 자신의 마음(心)을 다하면 자신 안에 내재한 성(性)을 만나 자각할 수 있고 또 그 성(性)을 다하면 하늘을 만날 수 있다고. 이렇게 하늘과 만나는 유가적 지식인. 스스로 천명을 자각한 진리의 담지자로서 그 자존감이 대단했는데 선각자로서 세상을 이끌고 가고 구원할 사명이 있다고 합니다. 선각자라는 단어가 맹자 텍스트에서 처음 나왔죠.
군주가 신하를 손발처럼 여기면 신하도 군주를 우습게 볼 것이며 군주가 신하를 견마처럼 여긴다면 신하는 군주를 보통 사람으로 볼 것이며 신하를 흙이나 지푸라기처럼 여긴다면 군주를 아주 원수같이 볼 것이라고 하는데 진라의 담지자인 지식인은 군주에게 극진하게 대접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맹자는 했습니다. 천명을 자각한 선각자고 진리의 담지자니까요.
“그러므로 장차 큰일을 하려는 임금은 반드시 함부로 불러서 볼 수 없는 신하가 있어, 그와 의론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임금이 찾아 갔다. 그 德을 높이고 道를 즐김이 이와 같지 아니하면 더불어 큰일을 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탕湯임금은 이윤(伊尹)에게 배운 뒤에 신하를 삼았기 때문에 힘들이지 아니하고 왕노릇을 하였다. 환공桓公은 관중에게 배운 뒤에 신하를 삼았기 때문에 힘들이지 아니하고 패왕 노릇을 하였다“.
함부로 오라 가라 할 수 없는 신하를 두어야한다. 즉 사(士), 군자(君子) 대접을 잘해라 그리고 스승으로까지 대접하라고 합니다. 맹자의 패기가 실로 대단합니다. 그렇기에 제선왕이란 군주에게 이런 말도 할 수 있었던 것이죠.
“제선왕이 말하길 “탕임금이 걸을 내쫓고 무왕이 주를 정벌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전해오는 책에 있습니다”
“신하가 그 임금을 시해해도 되는겁니까?”
인(仁)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하며, 잔적(殘賊)한 자를 그냥 한 사내(一夫)라고 합니다. 한 사내에 불과한 주(紂)를 베었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왕 앞에서도 할 말 다하는 맹자, 맹자가 명나라 때 금서로도 지정되기도 했는데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자신 안에 도덕본성을 잘 키우고 하늘이 내려준 사명을 받아 세상을 이끌어간다는 지식인이 가지는 용기와 패기가 이랬는데요. 땅을 개간하고 전쟁에 나갈 인민들, 관료로서 꾀주머니가 되어줄 지식인들 이렇게 사람 구하지 못해 야단난 춘추전국시대니 맹자가 저런 말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지 다른 시대였으면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왕 앞에서도 할 말 다하고 권력과 국가에 종속되지 않은 지식인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사상을 주장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패기와 재기발랄함, 다채로움이 살아있었던 것. 다 춘추전국시대니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춘추전국시대적 환경을 생각하더라도 실로 맹자의 패기는 대단합니다. 어찌 보면 유별난 정도지요.
성선론은 이렇게 귀결됩니다. 도덕 감정과 이성을 잘 키운 지식인, 현사(賢士)에 대한 존중 그들이 민생을 보호하고 군주가 올바르게 정치할 수 있도록 각성 시켜 나라가 반석위에 둘 것이니 국정의 주체로 인정하고 대접 잘 해줘라. 그리고 그들은 국가의 법과 제도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선한 본성 잘 키워서 스스로 일어선 사람들이니 자율성을 보장해줘라 알아서 잘할 수 있고 알아서 천하를 경륜할 현사로서 기능할 것이다. 이렇게 맹자의 사상은 가게 되는데 그러다보니 귀족, 대토지 소유 지주들에게 맹자의 사상이 너무도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춘추 전국시대나 진과 한나라때는 외면 받았지만 다시 주류적 사상으로 팔려 그 위치를 확고히 한 채 동아시아에서 군림할 수 있었고요. 그리고 그 귀족들의 발호에 백성들은 이중, 삼중으로 착취당하고 그랬지요, 국가권력이 강제하는 의무를 수행하기도 힘든데 귀족들에게도 착취당하고.
유학의 가장 큰 문제가 이렇게 군신공치 해야한다, 신하도 왕 못지않은 국정의 주체이다. 잠재적 국정의 파트너가 될 지식인을 극진히 대우해야한다. 그러다보니 지주, 지식인이 국가권력을 독과점한채 지식인 독재정치가 벌어지고 필연적으로 백성들이 이중, 삼중 착취당하기 쉬운 환경에 놓인다는 것인데 그 뒤에는 맹자가 있습니다. 안자처럼 신하와 관료는 사직이라는 국가 공적기구, 공적 시스템을 일하는 존재라고 못 박는 정도가 아니라 성선론이란 이론적 근거로 무장하고 진리의 담지자, 천이 부여한 사명을 깨닫는 선각자, 왕의 스승 이렇게까지 나아가고 그랬으니 너무 나간 셈이죠. 기득권층, 귀족들에게 구매되기 너무 좋은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공자 사상 본래의 위민, 애민 사상 역시 변질 되었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강해져가는 왕권 앞에 위기의식을 느낀 구귀족층들의 자의식을 대변하지 않았나 볼 수도 있는데 맹자는 동아시아의 지식인 독재 내지 지식인과 지주들 독과점 정치체제를 꿈꾸었고 그의 이상은 상당부분 동아시아에서 실현되었습니다.그러면서 역으로 공자 사상 특유의 장점마저도 사라졌고요. 공자는 지식인이 대접받기 전에 이러저러한 덕성을 갖추려 노력하고 애써야 한다며 의무와 책무를 주로 말했고 진실로 백성을 아껴야 한다고 말했는데 맹자식 통치사상과 질서 하엔 지식인과 관료들의 폼만 잡게 되면서 저런 것들의 희석되었죠.
모르겠습니다, 맹자는 백성들을 위해라, 그들이 나라의 근본이다, 어진 정치를 베풀라고 말하긴 했어요. 그는 항상 백성, 인민을 말했고 유교사상을 무장한 지식인과 관료들도 그 말을 역사에서 무수히 되풀이 해왔는데 맹자는 정말 왕도정치, 어진정치가 현실에서 구현되기 을 진심으로 바랬을 수도 있지만 사실 위민사상이고 민본주의고, 백성이 사직의 근본이고 그건 모두 왕권을 제한하고 제한 시키기 위한 전략적 구호 내지 프로파간다? 왕권을 제한 한 상태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귀족과 관료들의 전락적 구호내지 용어였을 뿐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임금을 허수아비 노릇하게 만들면서 지주와 지식인들의 권력을 독과점한 채 나라를 끌고 가고 그 와중에 백성들은 죽어나고 그런 맹자식 통치체제의 나쁜 점이 가장 극명한 게 드러난게 조선왕조인데요. 오백년 내내 나라를 끌고 간 조선왕조를 봐도 맹자의 성선론과 왕도정치는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 의심이 갈 수밖에 없지요. 전 맹자 텍스트를 읽을 때 맹자의 진심마저도 의심스럽기까지 합니다. 후세대들이 악용 한 게 아니라 그 자신부터가 애초에 귀족, 기득권층들을 수요자로 해서 공자를 팔아먹던가 공자사상을 변형 시킨 게 아닌가 싶어서요.
위에서 언급한 대로 논어를 읽다보면 지식인이라면 군자라면, 선비라면 이런 덕목과 자질, 마음 자세등이 있어야한다는 말이 많습니다. 남의 이야기를 경청해라, 부귀에 초연할 수 있어야한다. 예로써 자신을 단속해야한다. 벼슬자리 없음을 근심하지 말고 수양의 정도가 무르익지 않음을 반성해라,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하지 말고 즉 정치현장에 등용되지 않는다고 해도 화내지 말고 내 공부가 덜 되었나 점검해봐라 계속 강조했고요. 절대 세상 탓하고 남 탓하지 말 것이며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 정진해 갈 뿐이다라며 자신도 채찍질하고 제자들도 독려했습니다. 그런데 맹자를 읽어보면 군자라면 선비라면 지식인이라면 이러저러한 대접을 받아야한다. 이러저러한 대우를 받는 게 마땅하다는 말들이 많고 그런 측면이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공자 시대만 해도 지식인 유치 경쟁이 심하지 않았고 아직은 사(士)로 불리 우는 지식인, 예비관료들이 위상이 미미해서 였을 지 모르겠지만 공자와 대조되는 맹자의 저런 개성은 지식인과 지주, 관료를 겸하며 동아시아를 지배해온 귀족들의 역사가 예고되는 거 같아 불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도 공자의 사상을 이었기에 비록 과거 사(士)의 본래 임무였던 무인의 기질이 좀 남아 있지만 폭력과는 거리를 두면서 평화를 강조하고 설득, 온정에 의한 통치를 말했고 지배층들의 솔선수범과 민들에 대한 어버이 됨을 말했지요. 그랬기에 비록 동아시아를 지배해온 귀족과 지주들이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고 백성들을 착취해도 겉으로나마 백성들을 위하는 척이라도 하고 폭력으로 백성들을 강제하기보다는 타이르고 달래고 교화 시키려고 했던 건 사실이고 걔 중에는 양심적 지식인들이 있기도 했습니다. 정말 백성들의 어버이 노릇을 하려고 한 관리, 향촌사회에서 가부장적 노릇을 하며 지역민들을 보호하려고 한 지주들도 있고 정말 공자가 말한 군자다운 사람들도 많이 나왔지요. 또 맹자의 무사적 기질을 본받아 왕 앞에서 줏대 있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부당한 통치행위와 권력 앞에서 목숨까지 내던지며 저항한 지식인들도 많았습니다. 국가권력이 폭주하지 않게 견제세력으로 건강하게 기능한 지식인들도 적지 않았고요. 목숨 걸고 독립운동 한 일제치하 많은 독립운동가들도 자기 신념을 옳다는 확신 하에 물러서지 않는 맹자의 대장부 의식에 세례를 받은 분들입니다.
그리고 식객문화와 양사라는 문화가 있어 재화를 축적하고 돈을 모은 사람들이 거의 의무적으로 지식인을 키우고 후원하고, 영명하지만 공부할 여건이 안 되는 수재들을 육성하고, 그렇게 해야 하는 문화가 동아시아에 있었는데 그것 역시 맹자의 이상 실현으로 보이는데 그것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현재 한국적 자본주의하에선 재화와 재물은 그저 축적의 대상이기만 하고 쟁여놓아야 할 대상이지만 순환론적 세계관에 지식인 우대문화가 있던 중국과 한국에서는 재화도 역시 순환해야할 대상이고 선비, 지식인을 키우는 것으로써 그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라는 문화가 있었죠. 그 과정에서 훌륭한 지식인이 많이 양성되기도 했고요. 그 식객, 양사문화는 오늘날에 계승해야할 동아시아전통으로 생각되는데 맹자 사상에 긍정적인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을 착취하고 법 위에서 국정을 농단하고 부패와 무능, 비능률을 일삼아온 많은 관료와 귀족, 지식인들 뒤에 맹자가 있다는 생각에 맹자 사상은 항상 좀 거리를 둔 채 보았으면 합니다. 성리학이 지배해온 한국에서는 성리학에서 우상으로 숭배되는 맹자를 너무 우호적으로만 보아왔는데 이제는 좀 그 관성에서 벗어날 때도 된 거 같네요.
관존민비, 육체노동자 경시
이제 정리해볼까요? 강해지는 왕권과 국가권력 앞에 위기의식을 느낀 귀족출신 지식인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공자사상의 계승자로서 공자사상의 미미한 위상에도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전방위적인 사상투쟁을 텍스트에서 전개했다. 그는 성선을 말하면서 왕도정치를 말했고 그 왕도 정치는 다른 말로 仁政으로서 항심과 항산을 보장해주는 정치를 말하며 그 러한 정치를 펴면 해당 군주가 천하를 통일한 군주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약을 팔았다). 그리고 지식인 우대, 지식인이 주인공이 되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 지식인이 항산을 보장된는 정치를 왕과 함께 할 것이며 항심을 가지도록 백성들을 교육할 것이니 항상 존중 받아야한다. 항상 보장되어야하는 것이 세가지죠. 착한 마음과 기초적 생활, 여건 지식인 대우와 존중. 이 세가지가 항상 보장되는게 맹자가 꿈꾼 공동체입니다.
자 마지막으로 몇가지만 더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맹자 텍스트를 읽어보면 불편한 부분이 참 많은데 이왕 이야기 한 김에 더 말씀 드리자면요. 등문공 하장에 좀 기가 막힌다 싶은 부분 있습니다. 제가 팽경이 맹자에게 물었지요. 뒤에 따르는 수레가 수십 대나 되고 따르는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는데 이렇게 제후들에게 차례로 대접을 받아 가는 것이 너무도 호화스럽고 과분하지 않냐고. 그러니 맹자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가면 윗사람에게 공손하고 선왕의 도를 지키고 인의를 행하는 사람이 그 정도 대접 받는 게 뭐 그리 과분하고 사치스러운 거냐며 면박을 줍니다. 맹자의 행렬을 보면 수십대의 수레, 수백명의 일꾼으로 구성되었고 아주 호화스러웠나 본데 제자가 이건 아니지 않냐고 하니 맹자가 버럭 했습니다. 최소한 맹자가 힘든 일 직접 해보고 백성들의 고충을 알았으면 호화스러운 대접과 사치스러운 행렬이 당연한 대접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안자 같은 경우는 항상 청빈했고 백성들에게 베푸는 사람을 살았기에 그가 말한 백성을 위한 정치, 여민동락의 정치에서 진정성이 느껴지지만 맹자의 실제 삶을 보면 그가 말한 여민동락, 왕도정치에서 어떤 진정성이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저렇게 호화 생활 누리는데 필요한 재화가 어디 하늘에서 떨어졌겠어요? 다 백성들이 힘들게 일해서 만든것이지.
또 맹자는 노력자(勞力者), 노심자(勞心者) 대비시키며 마음을 쓰는 지식인과 관료가 몸을 써 일하는 노력자들에게 봉양을 받으면서 그들을 지배하는 게 당연하다며 직업의 귀천, 생산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을 내려 보는 특권의식까지 드러냈습니다. 관존민비, 육체노동에 대한 경시가 맹자에게서 아주 뚜렷이 보입니다. 관존민비, 육체 노동하는 사람을 업신여기는 문제, 명백히 있는 직업의 귀천. 아직도 우리 사회가 벗어던지지 못한 나쁜 문제들이고 우리의 삶을 각박하게 만드는 것인데 맹자 텍스트에 너무도 분명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역시나 맹자사상이 주류적 위치에서 나라를 끌고 왔으니 그런 것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텍스트에서 볼 때마다 몹시 불편합니다.
그리고 앞서 맹자를 모두 까기 인형이라고 했는데 사상의 비현실성 때문에 왕들에게 인정 받지 못하고 결국 공자처럼 쓸쓸한 말년을 맞이했는데 그러면서 등용을 아주 포기한 채 제자들과 뭘 좀 끄적이고 정리를 하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 때 맹자라는 텍스트가 만들어진 것으로 압니다. 거기에 양주와 묵적, 농가, 법가, 송견, 고자 다른 사상가들을 아주 심할 정도로 비판, 비난했는데 눈살이 찌푸려질 지경입니다. 순자도 타 사상가들을 많이 비판했지만 나름 각자의 장점을 인정하고 또 그들 사상의 핵심과 줄기를 잘 지적하면서 비판했습니다. 학자라면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런데 맹자는 인정할 건 인정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고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후에 맹자를 신으로 떠받들다시피 한 성리학의 도그마와 교조주의가 예고된 거 같더군요. 역시나 불편한데 그렇게까지 타사상가들을 전 방위적으로 비난한건 학자로서 기본적 자세도 아닐뿐더러 상당히 싸가지가 없는 사람이라 생각됩니다. 등용되지 못하고 취직에 실패하다보니 결국 게임방이나 전전하면서 악플이나 달고 키보드 워리어짓이나 한 셈인데 최초의 , 최고의 키보드 워리어 맹자, 어쩌면 유일하게 성공한 악플러가 아닐지. 주문왕에게 발탁되어 주무왕을 도와 주의 천하를 연 강태공들이 모든 낚시꾼들에게 신격화 되었다는데 맹자 역시 모든 악플러, 키보드 워리어들에게 신격화 될 날이 멀지 않은 거 같네요. 성리학자들에게 교주였는데 오늘날엔 악플러들의 교주가 되는 것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1. 양사와 식객문화를 계승해 봅시다??
2. 오늘날 한국사회 지식인들에게 무사 기질이 있는지?
3. 한국사회에 제대로 된 국가권력 견제, 감시 세력이 잇는지?
4. 우리 사회에서 항상 보장되어야할 항심, 항산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