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백제의 고도(古都) 공주 충청감영 터
<공주사대부고 정문에 재현된 충청감영 정문>
충청남도 공주시(公州)는 백제의 왕도(王都)로 출발하여
1천 5백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거쳐 온 오랜 도시이다.
고구려 장수왕이 남진하여 수도 위례성(慰禮城)을 점령하자
백제는 475년 수도를 웅진(熊津)으로 옮겼다.
곰나루(熊津), 곰내(熊川), 곰고을(熊州) 로도 불리는 이곳이
지금의 공주 지방이다.
웅진은 평지가 좁아 국력 신장에 적합하지 못하여
538년 성왕(聖王)이 인근의 사비(泗沘-지금의 부여)로 천도하니
공주는 63년간 한 나라의 수도였던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940년(고려 태조 23년)에 지명을 공주로 개칭했고,
조선 태조 때는 4목 중 하나인 공주 목사(牧使) 주재지가 됐으며
1598년 관찰사가 다스리는 충청감영이 설치되었다.
<공주시 홈페이지>
조선의 사형 판결과 집행 권한은 국왕에게 있고,
관찰사는 왕명에 따라 사형 집행을 대행할 뿐이었으나
병인박해 중반 이후로는 감사가 처형 권한을 행사했기 때문에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는 불법적인 처형이 남발되어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감영에서 순교하게 된 것이다.
<복자 이국승 바오로> <복자 김원중 스테파노>
이중 알려진 분이,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참석차 내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복된
복자 이국승 바오로(李國昇 1772~1801)와
복자 김원중 스테파노(金元重 ?~1866) 이다.
충청도 음성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충주에 살던 이 바오로 복자는
천주교를 더 자세히 알기 위해 경기도 양근으로 권일신을 찾아가
교리를 배우고, 교회의 본분을 지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1795년 을묘박해 때 체포된 이국승은 형벌을 받던 도중 석방되었다.
그는 순교하지 못한 약한 믿음을 뉘우치고 더욱 진실한 신자가 되기로 작심했다.
한양으로 이주해 훈장생활을 하며 여러 사람에게 천주교 교리를 전했으며
최창현 요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등 교회 지도자들과 교유하고
주문모 신부에게서 성사를 받기도 했다.
1801년 신유박해로 다시 체포된 이 바오로는 공주감영으로 이송되어
1801년 7월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순교 후 조카들이 시신을 수습, 공주에 안장했다고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전’에 기록돼있다.
충청도 진천의 발래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명암리)에 살던
김원중은 성품이 순량 온후하였으며,
열심과 신덕이 교우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진천 관아에서는 신자들에게
'다시는 천주교를 봉행하지 않겠다는 증거로
천주교 서적을 관아에 바치고 관장 앞에서 다짐하라.'고 명했다.
김원중을 비롯한 몇 사람은 이를 거절했다.
그들은 진천 관아에 25일간 수감되었다가
10월 말 공주로 압송당해 12월 16일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그 후 스테파노의 아우가 공주로 와서 네 명의 시신을 찾아 장사 지내 주었다.
<대전 교구, 청주교구, 복자 열전 등>
청주에 있던 충청감영은 임진왜란이 끝난 1603년(선조 36)
전략적 요충지로 재인식된 공주로 옮겨왔다.
그 위치는 어디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몇 차례 이전하다가 1707년(숙종 33년)
봉황산 기슭의 현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고등학교에 자리 잡았으나
(공주시 봉황로 75. 반죽동 322-1)
1932년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옮겨짐으로서
200여 년 간의 도청 소재지 지위를 마감했다.
<공주박물관에 복원된 선화당>
감영에는 관찰사 집무실인 선화당(宣化堂)을 비롯, 정문인 포정문(布政門) 등이 있었고,
1859년 발간된 공산지(公山誌)의 기록에는 49동 481칸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흔적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충청감영터 안내문>
선화당과 포정사문루는 1993년 국립공주박물관 경내에 복원되었다.
선화당은 조선시대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정청으로서
‘임금의 덕을 선양하고 백성을 교화하라’는 뜻의
선상덕이화하민(宣上德而化下民)에서 따 온 이름이다.
고을의 동헌(東軒)에 해당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공주박물관에 복원된 포정사 문루>
감영의 정문은 중국 명(明)의 포정사를 모방,
충청도 포정사(布政司)라고 이름 붙였다.
명나라에서는 초기에 지방 13성에 포정사(布政使)를 두어
성을 다스리게 했다.
정식명칭은 승선포정사(承宣布政使)로서
‘임금의 교화를 받들어 덕화를 편다는’승류선화(承流宣化)에서 비롯됐다.
<두산백과>
우리 선조들은 왜 이리 중국 문명을 그대로 따라해야만 했는지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공주사대부고 정문 안 쪽의 충청감영 터>
국립공주박물관에 복원된 포정사문루와는 별도로
2018년 12월에는 공주대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정문에
또 하나의 포정사 문루를 재현했다.
선화당 왼편에 금영측우기(錦營 測雨器)가 세워져 있다.
금영이란 충청도 감영의 별칭으로 금강(錦江) 가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공주박물관의 금영측우기>
빗물을 그릇에 받아 강우량을 재는 측우기는
조선 세종 23년(1441)에 만들어진 후 여러 차례 다시 만들어졌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헌종 3년(1837)에 만들어진 금영측우기가 유일하다.
보물 제561호인 이 측우기는 높이 31.5㎝, 지름 15.3㎝의 원통형으로
표면 3곳에 대나무처럼 도드라진 마디가 눈에 띤다.
동그란 통은 빗물을 받는 그릇으로 여기에 주척이라 부르는 자가 있어
측우기에 고인 빗물의 깊이를 쟀다.
공주에 있던 것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다시 반환된 문화재이다.
진품은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의 기상청에 있고
공주박물관의 측우기는 2006년 설치된 복제품이다.
<문화재청>
MBC 뉴스
김미희기자
세계 유일 조선시대 '측우기' 국보된다
입력 2019-12-30 10:51 | 수정 2019-12-30 10:54
세계 유일 조선시대 '측우기' 국보된다
국내 뿐 아니라 세계에서 유일하게 현존한다고 알려진 조선시대 측우기가
국보로 승격됩니다.
문화재청은 기상청에 있는 보물 제561호 '금영 측우기'를
'공주감영 측우기'라는 명칭으로 바꾸고 국보로 승격한다고 예고했습니다.
또 측우기를 놓는 받침인 측우대 중 기상청이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제842호 '대구 선화당 측우대'와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
보물 제844호 '창덕궁 측우대'를 국보로 승격할 예정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측우기는 세종 24년인 1442년 처음 제작됐는데,
이번에 국보가 되는 금영 측우기는 헌종 3년인 1837년 제작된 것으로
실록에 기록된 것과 같은 크기인 높이 31.9cm, 지름 14.9cm, 무게 6.2kg짜리입니다.
측우기는 조선시대 충남 지역을 관할한 공주감영, 즉 금영에 설치됐으며
1915년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가 반출했다가 1971년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