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芝峯先生集卷之二十三 / 雜著 / 工曹判書尹公墓誌銘
萬曆紀元之三十九年八月六日。工曹判書尹公考終于漢城之私第。朝之大夫士曁閭巷小民。皆曰賢宰相亡矣。相與歎惜涕洟。有若骨肉之戚。非公德之服人心深。何以致此。今距公卒歷十年所矣。公之子參判義立氏。以家狀索誌于睟光而謀所以不朽者。噫。公之所立自不朽。如睟光者安得以不朽公哉。然睟光自爲郞屬。上下朝著間。望公風猷擧止。雖不能窺其大者遠者。知其爲偉然盛德君子。而心竊慕嚮者雅矣。旣屢辭不獲。則略敍世系踐歷而足以銘。謹按尹氏出坡平。始祖諱莘達。佐麗祖有功。至侍中文肅公諱瓘。勳名益著。具載國乘。可略也。高祖諱岑。刑曹參判贈兵曺判書。曾祖諱之崇。敦寧府正贈左承旨。祖諱廷霖。利城縣監贈吏曹參判。考諱希廉。以學行名。初明廟屬意於宣祖大王。選爲王孫師傅。卒官慶山縣令。宣祖特命贈左承旨。後以公貴加贈吏曹判書。妣贈貞夫人韓山李氏。齊陵參奉曄之女。以嘉靖癸卯六月某子生公。諱國馨。字粹夫。古諱先覺。因避忌改從小字。蓋方娠時。有夢葵之異。故命之。卽今諱也。公生未月。母夫人見背。外王母柳氏取養之。不煩敎督。而自力於學。九歲能屬詞。幼受業於兪敎官任。後遊學於李靜存湛。藝業夙成。辛酉中生進兩選。隆慶戊辰。登別試文科。由承文院副正字遷至博士。壬申。陞禮曹佐郞。歷監察,正言,刑,兵佐郞。出全羅都事。萬曆甲戌。遭判書公喪。廬墓三年。日上冢哀省。雨雪不廢。丙子服闋。復禮曹陞正郞。自此至己卯。屢歷持平,正言,獻納。入玉堂爲副修撰,修撰。先是有柳淵者以弑兄游。服刑死。公於榻前白其冤。果獲游伸枉於十七年之後。人咸快之。庚辰。以副校理再授兵曹正郞。屬公修擧兵籍。命勿遷者屢。辛巳。差御史巡撫關西。由校理拜吏曹正郞。歷掌令,司藝,校理。甲申。除淸州牧使。未幾罷。復敍掌樂正。乙酉以副校理陞副應敎。特命玉堂官竝陞一座一階。於是進通訓應敎。嘗啓以王子第宅僭侈及義安宮外廊踰制事。辭甚鯁直。命撤其宮廊。轉檢詳,舍人,司諫,典翰。丁亥以直提學差咸鏡巡撫。前後出入邊上。揣摩條請。多中肯綮。尋擢同副承旨陞至右。移副提學。屬邊帥陛辭。命公偕入籌畫。公惶懼請免。答曰。君臣之間。情如父子。雖一日十見何妨。遂進啓宋言愼之論黃廷彧。非固排擊意。上喜曰。得長者長玉堂。予無憂矣。賜酒醉甚。上曰。卿毋讓。不思予曩日語耶。前公爲應敎時入夜對。奉觴不能飮。上曰。禮。尊者賜。少者賤者不敢辭。況君賜乎。雖醉何害。蓋指此事也。時謂異數。戊子。以大司成還副提學。時本朝宗系辨誣會典頒降。大臣諸宰。伏閤請上號未允。公因進講啓曰。群臣請號而殿下固讓不許。其盛美反有光於受號。且放勳重華。史臣之所追述。非尊號也。而今群臣啓辭欲比而同之。牽合甚矣。退與館僚上箚。請益崇謙德。以示不居之美。又言宜早建儲貳。以定宗社大計。未幾遷右承旨陞左。己丑。進啓曰。王子年幼。敎養當及時。而外間皆言王子奪占山澤之利。且關節頗行云。尤宜禁戒。已又上箚請建儲。援引古今得失。以及敎導王子之事。反復數千言。傳者竦然縮頸。柳西厓成龍以書賀曰。吾輩媿死矣。居數日。特除尙州牧使。於是三司爭之。首相柳公㙉抗章乞留。皆不報。出都之日。道路有流涕者。繼妣李夫人在義城。迎養甚至。嘗感祝曰聖恩如天。不知所報。推以及民。盡誠爲治。弊祛而政擧。方伯以最聞。賜表裏奬之。辛卯瓜滿。遞拜忠淸觀察使。及辭。上面諭曰。卿無恙否。仍問本州士可用者。公謝不敢。以鄭國成,尹瑱孝行對。卽命除職。壬辰倭寇至。進嘉善兼巡察使。俄聞大駕西狩。人心崩潰。方收集敗亡。爲捍禦之計。而賊勢充斥。不克以時月進勦。言者用此咎公。竟削官。甲午。始敍僉知判決事。乙未。拜兵曹參判。自以父子俱通顯。深懼盛滿乃辭。遞授同樞。嘗引對啓曰。殿下遭此無前之變。亟去尊號。布告中外。則當初謙挹之心。在今貶損之道。可以兩盡。上曰。予嘗有此意而不果。卿言之。眞忠臣也。卽命擧行。時甚韙之。而大臣啓寢其事。未幾拜大司憲。還中樞。公素與柳西厓道誼相厚。至是西厓居首揆。公在備局。協心謨議。忌克者側目。將有不靖之端。遂力求外。丙申。除驪州牧使。丁酉病罷。旋敍以護軍。儐接蕭按察,梁布政于西路。戊戌。歷右尹,刑曹參判陞嘉義。其冬時議攻西厓甚峻。幷及公罷不敍。自是棲遲海曲者數歲。乃構小屋於西湖上。扁其齋曰恩省。次金慕齋恩逸三絶句以寓其意。乙巳。錄宣武從勳。復護軍判決事。戊申。以左尹轉戶刑參判,大司成,大司憲。特陞資憲工曹判書。又歷大司憲,知中樞。庚戌。復拜工曹。丁繼妣憂。執喪遵制。饋奠必躬。不以衰病或替。辛亥又哭長子喪。沈痛積谻。遇風疾遽卒。享年六十九。訃聞。輟二日朝。賜弔祭賵賻加禮。卜十月六日。葬于廣州南漢西麓。公天資粹美。風度宏厚。以忠信立心。以淸謹持身。言行相顧。絶無表襮。而儀容秀偉。神識凝重。識者咸服其德量。初爲擧才業。不專意於科式。而於文字上知有用力之方。以徇名喪實爲可恥。畢竟操守之確。論議之正。蓋有所本矣。事親則愉色婉容。發乎深愛。以不識慈顏爲終身痛。遇人呼孃。輒嗚咽不自勝。奉繼妣極其誠孝。年垂七秩。執子役愈恭。凡可以養志悅心者靡不至。立朝則終始守正。權勢之途。務自斂退。唯以直道事君爲心。事有當言。不避忌諱。前後犯顏進諫。無非讜論谹議。足以維持國脈。裨益君德。蓋公初釋褐。先判書公勉之曰。許身於國。貴在盡忠。一意恬靜。毋求躁進。由是佩服先訓。不敢失墜。非性於忠愛者。不能也。接物則一以誠信。和氣盎然。見人小善。力爲稱道。如其過惡則不欲掛口。及至莅官處事。剖析是非。有毅然不可奪者。居家則沈嘿寡言。喜怒不形。雖當禍患之際。亦不少動。性淡泊无所嗜。聲色戲玩。未嘗近前。唯日披閱書史。論說古今爲樂。敎子孫則諄諄誘以義方。有過不遽呵責。徐加警飭。使知悔而已。嘗語諸子曰。吾位宰列。汝曹亦升顯班。非薄德所堪。常體吾意。懍懍以淵氷爲戒則可矣。收恤宗族。出於至誠。遇有貧病喪難。儘力扶救。尤留意於譜牒。常曰。爲人而不知所自出。豈盡人之道乎。悉取內外先派。撰成一書。手自繕寫讎校。雖窮鄕疏屬。苟以戚分來。待之無間。故莫不感戴。以爲依歸焉。立朝餘四十年。淸修一節。老而彌厲。口不道營產事。人有問者。輒曰。奉公無暇。不遑念及。逮罷官無所歸。笑曰。乃翁求田問舍。可謂晩矣。公自少負經濟望。世皆仰其風裁。崔守愚簡亢士也。平生少許可。一見公嘖嘖曰。近世士友中尠有其比。異時當大任者必此人也。其見重於人如此。不幸連蹇。擯斥田野間。能處之怡然。殊不以爲意。而一時談者視公如張九齡,司馬君實。冀其復用。旣陞八座。年亦衰矣。朝野猶想望大拜。庶幾有爲。而天又不假之年。命耶。人乎有遺憾矣。配曰。貞夫人趙氏。平壤大姓。領議政文忠公浚之六世。儀賓府經歷琇之女也。生有淑愼之德。事君子無違行。承順致敬五十年如一日。窘乏之色。請謁之私。未嘗毫髮聞於公。事舅姑以孝。奉祭祀以誠。凡遇諱日及時事。宿齋潔。躬執饌具。不爲疾病懈。性且通朋。有所言議。必斷以義理。自戊午廢母之變。每曰。吾心痛割。若遭親喪。後當壽宴。戒勿設樂。兒孫有約婚於宰臣家。其宰卽惹禍宮闈者也。嚴辭斥絶。使不許婚。其高見達識。有士君子所不及者。年旣耄耋。氣力漸憊。而精神不爽。思慮聰明。無異於少時。每早起梳盥。端坐竟夕。手不釋女紅。所性然也。及公歿。哀毀過甚。制除猶素服終身。方疾革。改製素衾。以擬靈寢之用。蓋亦持服不變之意云。天啓辛酉八月十二日。在參判君長湍任所卒。得壽八十二。用十一月七日祔公墓右。至癸亥閏十月甲辰。遷厝公及夫人揚州長興里丁坐之原。凡擧五男一女。男長敬立。忠淸道觀察使。次義立。卽參判君也。次貞立。前豐德郡守。次禮立次德立。皆蚤夭。女適吉川君權盼。觀察娶僉正李好約女。生男二女三。曰仁啓司憲監察。曰世徵繼禮立後。女適判書金藎國,郡守任孝達,參奉李志一。參判娶正朴文榮女。生男一女四。男曰仁迪。夭。女適正郞黃瀡,縣監安鋌,侍直朴以章,監役李孝一。後娶牧使鄭爚女。生男三女二。男世獻。餘幼。貞立娶學生金大復女。生男一曰世耇。進士。吉川生男女各二。男曰儆。承文副正字。曰倜。禮曹佐郞。女適翊衛李如圭,進士睦樂善。內外曾玄孫男女竝七十餘人。亦盛矣哉。銘曰。
自麗而鮮。源遠流長。簪組綿聯。奕世彌昌。逮公益振。爰發其祥。帝賚我良。爲國珪璋。秉德惟剛。忠信直方。騫于邇列。志切扶匡。血誠無隱。腹披膽張。惟弗自惜。屢遭斥傷。進退一節。身厄名彰。如彼精金。旣鍊愈光。宜大厥施。慰我民望。不年與公。天奪何忙。音徽未沫。簡牘風霜。歿且有聞。誰謂公亡。鬱鬱高岡。衣冠所藏。銘以詔後。尙永不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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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봉집 제23권 / 잡저(雜著) / 공조 판서 윤공 묘지명〔工曹判書尹公墓誌銘〕
만력(萬曆) 39년(1611, 광해군3) 8월 6일에 공조 판서 윤공이 한성(漢城)의 사저(私邸)에서 별세하니, 조정의 사대부들과 민간의 백성들이 모두가 “어진 재상이 돌아가셨다.”라고 하면서 마치 골육의 상(喪)을 당한 것처럼 함께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공의 덕이 인심을 감복시킨 것이 깊지 않았다면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이제 공이 졸한 지 10년 정도 지났는데, 공의 아들 참판 의립씨(義立氏)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수광에게 묘지를 부탁하여 불후(不朽)하게 할 것을 도모하였다. 아, 공이 수립한 것은 절로 불후할 터이니 수광 같은 자가 어찌 공을 불후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수광이 낭속(郞屬)이 된 이후로 조정에 오르내리면서 공의 기풍과 행동거지를 바라보았으니, 비록 그 원대한 것은 엿볼 수 없었지만 걸출하게 성대한 덕을 지닌 군자라는 것을 알고 평소 내심 향모하고 있었다. 누차 사양해도 가능치 않기에 세계(世系)와 이력을 대략 서술하고 명(銘)을 붙인다.
삼가 살펴보건대 윤씨는 본관이 파평(坡平)이니, 시조 휘 신달(莘達)은 고려 태조(太祖)를 도와 공을 세웠고, 시중(侍中) 문숙공(文肅公) 휘 관(瓘)에 이르러서는 공훈과 명성이 더욱 두드러져 사서(史書)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생략해도 될 것이다. 고조 휘 잠(岑)은 형조 참판을 지내고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증조 휘 지숭(之崇)은 돈녕부 정(敦寧府正)을 지내고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 정림(廷霖)은 이성 현감(利城縣監)을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희렴(希廉)은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이 났으니, 애초에 명묘(明廟)께서 선조대왕(宣祖大王)을 염두에 두고 이 분을 왕손사부(王孫師傅)로 선발하였다. 졸할 때의 관직은 경산 현령(慶山縣令)이었는데 선조가 특명으로 좌승지에 추증하였고, 뒤에 공이 귀해졌기 때문에 이조 판서를 더 추증하였다.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모친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제릉 참봉(齊陵參奉) 엽(曄)의 따님이니, 가정(嘉靖) 계묘년(1543, 중종38) 6월 모일(某日)에 공을 낳았다.
공은 휘는 국형(國馨)이고, 자는 수부(粹夫)이다. 원래 휘는 선각(先覺)인데 기휘(忌諱)를 피하여 어렸을 때의 자로 바꿔 쓰게 되었으니, 공을 임신했을 당시 꿈에 규화(葵花)가 보인 신이함이 있었기에 그렇게 명명한 것인데, 바로 지금의 휘이다.
공이 태어난 지 한 달이 안 되어 모친을 여의었기에 외조모 유씨(柳氏)가 데려다 키웠는데, 가르치고 독려하지 않아도 스스로 학문에 힘써 9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다. 어려서 교관(敎官) 유임(兪任)에게 수업하였고, 뒤에 이정존 담(李靜存湛)에게 유학(遊學)하여 문예와 학업이 일찍 성취되었다.
신유년(1561, 명종16)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선발되었다.
융경(隆慶) 무진년(1568, 선조1)에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를 거쳐 박사로 승진하였다.
임신년(1572)에 예조 좌랑으로 승진하였고, 감찰(監察)ㆍ정언(正言)ㆍ형조와 병조의 좌랑을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 나가 전라 도사(全羅都事)를 지냈다.
만력(萬曆) 갑술년(1574)에 판서공의 상을 당해 여묘살이 하는 3년 동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날마다 거르지 않고 무덤에 올라가 슬퍼하며 보살폈다.
병자년(1576)에 상기를 마치고 예조에 복귀하여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이로부터 기묘년(1579)에 이르기까지 누차 지평ㆍ정언ㆍ헌납을 역임하였고, 옥당(玉堂)에 들어가 부수찬과 수찬이 되었다. 이에 앞서 유연(柳淵)이란 자가 형 유유(柳游)를 시해하여 사형을 당하자 공이 탑전(榻前)에서 그의 억울함을 아뢰었는데, 결국 유유를 찾아내 17년 뒤에 유연의 억울함을 풀어주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통쾌해하였다.
경진년(1580)에 부교리에서 재차 병조 정랑에 제수되었는데, 마침 공이 병적(兵籍)을 정리하고 있었기에 누차에 걸쳐 옮기지 말도록 명하였다.
신사년(1581)에 어사로 차출되어 관서(關西) 지방을 순무(巡撫)하였다. 교리를 거쳐 이조 정랑에 제수되고, 장령ㆍ사예ㆍ교리를 역임하였다.
갑신년(1584)에 청주 목사(淸州牧使)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파직되고, 다시 장악원 정에 서용되었다.
을유년(1585)에 부교리에서 부응교로 승진하였는데, 옥당의 관원에게 모두 직위와 품계를 하나씩 올려주라는 특명이 내려 이에 통훈대부(通訓大夫)가 되고 응교로 승진하였다. 한번은 왕자의 저택이 지나치게 사치스럽다는 것과 의안군(義安君)이 사는 궁(宮)의 외랑(外廊)이 법제보다 호화로운 일에 대해 아뢰었는데 말이 매우 강직하니, 그 궁의 외랑을 철거하도록 명하였다. 검상(檢詳)ㆍ사인(舍人)ㆍ사간(司諫)ㆍ전한(典翰)으로 전직(轉職)되었다.
정해년(1587)에 직제학으로 있다가 함경도 순무사(咸鏡道巡撫使)에 차출되었다. 전후로 변경을 출입하며 상황을 헤아려 조목조목 청한 것이 대부분 핵심적인 요체에 부합하였다. 얼마 뒤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가 우승지로 승진하였고 부제학으로 옮겼는데, 마침 변방 장수가 하직 인사를 하러 오자 공에게 계책을 수립하는 데 함께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공이 황공해하며 면해 줄 것을 청하자, 답하기를 “군신간은 정이 부자간이나 마찬가지이니 하루에 열 번을 본들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나아가 송언신(宋言愼)이 황정욱(黃廷彧)을 논핵(論劾)한 것이 고의로 배격하는 뜻은 아니라고 아뢰니, 상이 기뻐하며 “장자(長子)를 얻어 옥당에 장(長)이 되도록 하였으니, 나는 걱정이 없다.”라고 하며 술을 하사해 거나하게 취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사양하지 말라. 내가 지난번에 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가?” 하였다. 전에 공이 응교를 맡고 있을 당시 야대(夜對)에 들어가 술잔을 받들고 마시지 못하고 있자, 상이 이르기를 “‘예(禮)에 어른이 내려 주는 것을 젊은이와 미천한 사람은 감히 사양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하물며 임금이 하사하는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취한다 해도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하였으니, 대개 이 일을 가리킨 것으로 당시 사람들이 특별한 은수(恩數)라고 하였다.
무자년(1588)에 대사성으로 있다가 다시 부제학을 맡았다. 이때 본조의 종계변무(宗系辨誣)가 반영된 《대명회전(大明會典)》을 반포해 내리자, 대신(大臣)과 재신(宰臣)들이 합문(閤門)에 엎드려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청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공이 진강(進講)하는 기회에 아뢰기를 “신하들이 존호를 올릴 것을 청하였건만 전하께서 굳게 사양하고 허락지 않으시니, 그 성대한 아름다움은 존호를 받는 것보다 도리어 더 빛이 납니다. 게다가 ‘방훈(放勳)’과 ‘중화(重華)’는 사신(史臣)이 나중에 기술한 것이지 존호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신하들의 계사(啓辭)에서 이것을 비견해서 같은 것으로 치부하고자 하니, 견강부회가 심합니다.” 하고는, 물러나와 홍문관의 관료들과 차자를 올려 겸손한 덕을 더욱 고양시켜 자부하지 않는 미덕을 드러낼 것을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의당 일찌감치 세자를 책립하여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안정시켜야 합니다.” 하였다. 얼마 후에 우승지로 옮겼다가 좌승지로 승진하였다.
기축년(1589)에 나아가 아뢰기를 “왕자의 나이가 어리니 마땅히 제때에 교양(敎養)해야 하는데, 외간에서는 모두들 왕자가 산택(山澤)의 이권을 빼앗아 점유하고 있고 또 뇌물이 자못 횡행하고 있다고 하니, 더욱 금지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하였다. 이윽고 또 차자를 올려 세자를 책립할 것을 청하면서 세자 책봉을 하지 않아서 생긴 고금의 사례를 인용하고 왕자를 교도(敎導)하는 일에 대해서까지 반복하여 수천 마디를 간곡히 아뢰니, 이를 전해들은 자들이 모골이 송연해하였다. 유서애 성룡(柳西厓成龍)이 편지를 보내 하례하면서 “우리가 부끄러워 죽을 지경입니다.” 하였다. 며칠이 지나 특명으로 상주 목사(尙州牧使)에 제수되니, 이에 삼사(三司)에서 쟁집(爭執)하고 수상(首相) 유공 전(柳公㙉)이 간언하는 소장을 올려 그대로 두기를 요청하였으나, 모두 윤허 받지 못하였다. 도성을 나가는 날에는 도로에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의성(義城)에 있던 계비(繼妣) 이 부인(李夫人)을 맞이해 매우 지극히 봉양하였다. 일찍이 감축(感祝)하기를 “하늘과 같은 성상의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고는, 이 마음을 백성에게 미루어 성심을 다해 다스리니 폐단이 제거되고 정사가 잘 시행되었다. 방백이 고과(考課)에서 ‘최(最)’라고 보고하자, 표리(表裏 옷감)를 내려 장려하였다.
신묘년(1591)에 임기가 만료되자 체직되어 충청 관찰사(忠淸觀察使)에 제수되었다. 하직 인사를 올릴 적에 성상이 면대하여 유시하기를 “경은 별 탈 없었는가?” 하고, 이어 상주의 쓸 만한 인사에 대해 하문하자, 공은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사양하고는 정국성(鄭國成)과 윤진(尹瑱)의 효행(孝行)에 대해 아뢰니, 즉시 그들에게 직임을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임진년(1592)에 왜구(倭寇)가 쳐들어오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자급을 올려주고 순찰사를 겸하도록 하였다. 이윽고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몽진하여 인심이 와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야흐로 패하여 도망친 이들을 수습하여 방어할 계책을 세웠는데, 왜적의 기세가 대단해서 단시일에 진격하여 섬멸하지 못하자, 논하는 자들이 이 일을 공의 책임으로 돌려 마침내 관직이 삭탈되었다.
갑오년(1594)에 비로소 첨지판결사(僉知判決事)에 서용되었다.
을미년(1595)에 병조 참판에 제수되었는데, 스스로 부자(父子)가 모두 통현(通顯)한 지위에 있다는 이유로 분에 넘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여 마침내 사직하자, 체차되어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한번은 인대(引對)하였을 적에 아뢰기를 “전하께서 이런 전에 없는 변고를 만났으니, 속히 존호(尊號)를 버리고 중외(中外)에 포고(布告)하신다면 당초의 겸허한 마음과 오늘날 자신을 폄하하여 낮추는 도리가 둘 다 극진하게 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이런 마음이 있었지만 실행하지 못했는데 경이 이를 언급하니 참으로 충신이로다.” 하고 즉시 거행하도록 명을 내리니, 당시에 이를 매우 옳게 여겼는데 대신이 아뢰어 그 일이 중지되었다. 얼마 뒤에 대사헌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공은 평소 유서애(柳西厓)와 도의(道誼)가 두터웠는데, 이때에 이르러 서애가 영상이 되고 공은 비국(備局)에 있어 합심하여 도모하니, 질시하는 자들이 흘깃거리며 소요를 일으킬 조짐이 있자, 마침내 외직으로 나기기를 힘써 구하였다.
병신년(1596)에 여주 목사(驪州牧使)에 제수되었다.
정유년(1597)에 병으로 그만두었다가 곧바로 호군(護軍)으로 서용되어 서로(西路)에서 소 안찰(蕭按察)과 양 포정(梁布政)을 빈접(儐接)하였다.
무술년(1598)에 우윤과 형조 참판을 역임하고 가의대부(嘉義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이 해 겨울에 시론(時論)이 서애를 매우 심하게 공격하였는데, 그 여파가 공에게까지 미쳐 파직되고 서용되지 않았다. 이후로 바닷가에서 몇 해를 은둔하다가 마침내 서호(西湖) 가에 작은 집을 짓고는 ‘은성(恩省)’이란 편액을 걸었으니, 김모재(金慕齋)의 절구(絶句) ‘은일(恩逸)’ 시 세 수에 차운하고서 그 의미를 담은 것이다.
을사년(1605)에 선무(宣武)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되고 다시 호군과 판결사(判決事)에 보임되었다.
무신년(1608)에 좌윤으로서 호조와 형조의 참판, 대사성, 대사헌을 전전하고,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공조 판서로 승진하였다. 또 대사헌과 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경술년(1610, 광해군2)에 다시 공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계비(繼妣)의 상을 당하여 예제(禮制) 대로 집상(執喪)하였으며, 궤전(饋奠)을 반드시 몸소 올리고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혹시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신해년(1611)에 또 장자(長子)의 상을 당하여 슬픔이 깊고 피로가 쌓여 풍질(風疾)을 만나 급작스럽게 졸하니, 향년 69세이다. 부고를 아뢰자 이틀 동안 조회(朝會)를 정지하고, 치조(致弔)와 치제(致祭)와 부의(賻儀)를 예제 이상으로 하사하였다. 10월 6일로 날을 잡아 광주(廣州) 남한산(南漢山) 서쪽 기슭에 안장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풍모와 도량이 크고 두터웠다. 충(忠)과 신(信)으로 마음을 세우고, 청렴과 삼감으로 자신을 견지하였다. 말과 행실이 부합하였고 겉치레라곤 전혀 없었으며 용모가 수려하고 사려가 신중하니, 식자들이 모두 그 덕과 도량에 감복하였다. 처음에 과거 공부를 하였지만 과시(科試)의 형식에 골몰하지 않고 문자에도 힘쓸 방도가 있음을 알아 실상을 잃어버린 채 명목만 따르는 것을 수치로 여겼으니, 종국에 확고한 지조와 올바른 논의를 지닌 것이 대개 뿌리가 있었던 것이다.
어버이를 섬길 때는 기쁜 낯빛과 온화한 모습이 깊은 애정에서 나왔으며, 모친의 얼굴을 모르는 것을 종신토록 가슴 아파하여 남들이 어머니라고 부를 때마다 오열을 주체하지 못하였다. 계비(繼妣)를 받들 때에 성심과 효성을 극진히 하여 나이 칠십이 다 되도록 자식의 직분을 더욱 공손히 시행하여, 무릇 뜻을 봉양하고 마음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을 지극히 하지 않음이 없었다.
조정의 관원이 되어서는 시종일관 정도(正道)를 고수하여 권세의 길에서 되도록 물러나려 애썼고, 오직 곧은 도리로 임금을 섬기려는 마음을 지녀 말해야 할 사안이 있으면 기휘(忌諱)를 피하지 않았다. 전후로 성상을 대면하여 직간을 올린 것이 모두가 국맥(國脈)을 유지하고 군덕(君德)을 보익할 만한 곧고 심원한 논의였다. 공이 처음 벼슬길에 들어설 때 선친인 판서공께서 면려하기를 “나라에 몸을 바친 상황에서는 충성을 다 바치는 것이 귀한 법이니, 한결같이 차분하고 고요한 마음을 지니고 조급하게 나아가기를 구하지 말도록 하거라.” 하였다. 이로부터 선친의 훈계를 명심하여 감히 실추시키지 않았으니, 충애(忠愛)의 성품을 타고난 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할 것이다.
사람들을 대할 때면 한결같이 정성과 신의로 대하여 화기가 가득하였다. 남의 작은 선을 보면 힘써 칭찬하였고 과오나 나쁜 점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려고 하지 않았다. 관원이 되어 일을 처리하게 되어서는 시비를 명확히 구분하여 범할 수 없는 의연함이 있었다.
집안에서 지낼 때면 침묵하여 말수가 적었고 희비(喜悲)를 드러내지 않았으니, 화환(禍患)을 당했을 때조차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성품이 담박하여 좋아하는 것이 없어 성색(聲色)이나 오락거리들을 가까이 한 적이 없었다. 오직 날마다 경서나 역사서를 펼쳐보며 고금에 대해 논설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자손들을 가르칠 때는 차근차근 의로운 방향으로 유도하였고, 과실이 있으면 바로 꾸짖지 않고 천천히 경계하고 신칙하여 허물을 알게 할 따름이었다. 일찍이 자식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재신의 반열에 있고 너희들도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박덕한 몸으로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항상 내 뜻을 유념하여 조심조심 깊은 못에 임한 듯 엷은 얼음을 밟은 듯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지성껏 일가친척들을 거두고 돌보았으며, 가난이나 질병이라든지 상사(喪事)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있는 힘껏 부조하고 구제하였다. 특히나 보첩(譜牒)에 뜻을 기울여 늘 “사람으로서 근본을 모른다면 어찌 사람의 도리를 다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내외(內外) 선조의 계파(系派)를 다 모아서 한 권의 책을 편찬하고서 손수 베껴 쓰고 교정하였고, 궁박한 시골의 먼 일가붙이라도 척속(戚屬)의 교분으로 찾아오면 차별 없이 대우하였기에 모두가 감동하고 추대하며 귀의처로 삼았다. 입조(立朝)한 이래 근 40년을 고수해온 청수(淸修)함이라는 한 가지 절조를 연로해서도 더욱 다잡아 입으로 가산(家産)을 경영하는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누가 묻기라도 하면 곧 말하기를 “공무를 받들기에도 여유가 없어 생각이 미칠 겨를이 없다.” 하였다. 관직에서 파면되어 돌아갈 곳이 없자 웃으며 말하기를 “너희 아비의 가산에 대한 대책이 늦었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공은 젊어서부터 경세제민(經世濟民)에 대한 기대를 받았으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공의 기품을 앙모하였다. 최수우(崔守愚)는 청고(淸高)한 선비로 평생 인정하는 이가 드물었는데, 공을 한번 보고는 감탄하면서 “근세의 사우(士友) 가운데 짝할 만한 이가 드무니, 훗날 대임(大任)을 맡을 이는 필시 이 사람일 것이다.” 하였으니, 남들에게 추중된 것이 이러하였다. 불행히도 곤경에 빠져 전야(田野)에 내쫓겨서도 태연하게 처신하며 그다지 개의치 않았는데, 당대의 담론하는 이들이 공을 장구령(張九齡)이나 사마군실(司馬君實)처럼 간주하며 다시 기용되기를 바랐다. 팔좌(八座)에 올라서는 노쇠했는데도 조야에서 여전히 정승에 제수되어 장차 큰 업적을 이루기를 바랐는데, 하늘이 또 수명을 더 허여하지 않았으니 명운(命運)인가? 사람 탓인가? 여한이 남는다.
부인 정부인(貞夫人) 조씨(趙氏)는 평양(平壤)의 대성(大姓)으로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준(浚)의 6세손이며, 의빈부 경력(儀賓府經歷) 수(琇)의 따님이다. 나면서부터 정숙하고 조신한 덕을 지녀 군자를 섬김에 있어 어기는 행실이 없었으니, 50년을 하루같이 받들고 따르며 공경하였고, 궁핍한 기색이나 사사로운 청탁을 추호라도 공이 눈치채게 한 적이 없었다. 효성으로 시부모님을 섬기고 정성으로 제사를 받들었으니, 무릇 기일(忌日)이나 시사(時事)를 만날 때면 미리 재계(齋戒)하고 몸소 제수를 마련하였고, 질병을 이유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천성이 사리를 훤히 알고 명민하여 논의하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의리에 따라 판단하였다. 무오년(1618, 광해군10)에 폐모(廢母)의 변고가 있은 뒤로 늘 “내 마음이 마치 친상(親喪)을 당한 것처럼 찢어질 듯 아프구나.” 하였고, 뒤에 수연(壽宴)을 열게 되었을 때도 풍악을 울리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손자가 재신(宰臣)의 집안과 약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재신이 바로 모후(母后)에게 화를 불러들인 자였기에 준엄한 말로 물리치며 허혼(許婚)을 못하게 하였으니, 그 고매하고 통달한 식견은 사군자(士君子)도 따라가지 못할 점이 있었다. 고령(高齡)이 되어 기력이 점차 쇠하였지만 정신이 또렷하고 사려가 총명한 것이 젊을 때와 다름없었다. 날마다 일찍 일어나 머리 빗고 세수하고는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손에서 길쌈이나 바느질을 놓지 않았으니, 타고난 성품이 그러하였다. 공이 별세하자 예제(禮制)보다 지나치게 애훼(哀毁)하였으며, 거상을 마친 뒤에도 종신토록 소복(素服)을 하였다. 바야흐로 병이 위중하자 영침(靈寢)에 쓰게끔 흰 이불을 지었으니, 이 또한 변치 않고 소복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천계(天啓) 신유년(1621, 광해군13) 8월 12일에 참판군의 장단(長湍) 임소(任所)에서 졸하니, 향년 82세이다. 11월 7일에 공의 묘소 오른편에 부장(祔葬)했다가, 계해년(1623) 윤10월 갑진에 양주(楊州) 장흥리(長興里) 정좌(丁坐) 언덕에 공과 부인을 이장하였다.
모두 5남 1녀를 양육하였다. 장남 경립(敬立)은 충청도 관찰사이고, 다음인 의립(義立)이 바로 참판군이며, 다음인 정립(貞立)은 전 풍덕 군수(豐德郡守)이고, 다음인 예립(禮立)과 다음인 덕립(德立)은 모두 요절하였고, 딸은 길천군(吉川君) 권반(權盼)에게 출가하였다.
관찰사는 첨정(僉正) 이호약(李好約)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낳았으니, 사헌부 감찰인 인계(仁啓)와 예립의 후사로 간 세징(世徵)이며, 딸은 판서 김신국(金藎國)과 군수 임효달(任孝達)과 참봉 이지일(李志一)에게 출가하였다. 참판은 정(正) 박문영(朴文榮)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4녀를 낳았으니, 아들 인적(仁迪)은 요절하였고, 딸은 정랑 황수(黃瀡)와 현감 안정(安鋌)과 시직(侍直) 박이장(朴以章)과 감역(監役) 이효일(李孝一)에게 출가하였다. 뒤에 목사 정약(鄭爚)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세헌(世獻)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정립은 학생 김대복(金大復)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으니 진사인 세구(世耇)이다. 길천군은 남녀를 각각 둘씩 낳으니, 아들 경(儆)은 승문원 부정자이고, 척(倜)은 예조 좌랑이며, 딸은 익위(翊衛) 이여규(李如圭)와 진사 목낙선(睦樂善)에게 출가하였다. 내외 증손과 현손이 남녀 도합 70여 명이니, 성대하도다.
명은 다음과 같다.
고려로부터 조선에 이르니 / 自麗而鮮
근원이 깊고 흐름이 유장하구나 / 源遠流長
고관대작이 면면이 이어져 / 簪組綿聯
대대로 더욱 창성해졌다오 / 奕世彌昌
공에 이르러 더욱 드날려 / 逮公益振
이에 길상이 발현되었으니 / 爰發其祥
상제가 우리에게 양신을 내려줌에 / 帝賚我良
나라의 규와 장이 되었네 / 爲國珪璋
굳건하게 덕을 견지하여 / 秉德惟剛
충직하고 미덥고 방정하며 / 忠信直方
근신의 반열에 올라서는 / 騫于邇列
부지하고 바로잡는 뜻 절절했지 / 志切扶匡
숨김없이 혈성을 다 바쳐 / 血誠無隱
진심을 펼쳐 보이고 / 腹披膽張
자신을 아끼지 않았건만 / 惟弗自惜
누차 내침을 당했다오 / 屢遭斥傷
진퇴에 한결같은 절조 지켜 / 進退一節
몸은 궁해도 명성은 드러났으니 / 身厄名彰
마치 저 정련된 금과 같이 / 如彼精金
단련될수록 더욱 빛이 났네 / 旣鍊愈光
의당 재덕을 크게 베풀어 / 宜大厥施
백성의 바람에 부응해야 하는데 / 慰我民望
공에게 시간을 허여하지 않으니 / 不年與公
하늘이여 어찌 바삐 데려가시는가 / 天奪何忙
덕음은 사라지지 않는 법 / 音徽未沫
간독에 서릿발같이 남아 / 簡牘風霜
별세해서도 명망이 있으니 / 歿且有聞
누가 공이 작고했다 하겠는가 / 誰謂公亡
우거진 저 높은 언덕이 / 鬱鬱高岡
의관이 갈무리된 곳이로다 / 衣冠所藏
명을 지어 후세에 알리니 / 銘以詔後
부디 길이 잊지 말지어다 / 尙永不忘
[주-D001] 원래 …… 피하여 : ‘선각(先覺)’은 일반적으로 성현에게 쓰는 표현이기에 혐의스러워 피한 듯하다.[주-D002] 어렸을 …… 휘이다 : ‘규화(葵花)’는 해바라기인데 해바라기는 항상 해를 향해 피므로, 해로 상징되는 임금에게 충성을 바치고자 하는 정성을 뜻하는 의미로 쓰인다. 《삼국지(三國志)》 권19 〈위지(魏志) 진사왕식전(陳思王植傳)〉에 “해바라기가 꽃잎을 해를 향하여 기울이는 것과 같으니, 태양이 비록 해바라기를 위하여 빛을 돌리지는 않으나, 해바라기가 해를 향하는 것은 정성인 것입니다.[若葵藿之傾葉, 太陽雖不爲之回光, 然向之者誠也.]” 하였다. 곧 태몽인 해바라기 꿈을 충성스런 신하가 될 조짐으로 보고 어릴 적에 자(字)를 ‘국형(國馨)’으로 지었는데, 이것이 현재의 휘가 되었다는 말이다.[주-D003]
유임(兪任) : 1496~1586.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임지(任之)이다. 1522년(중종17)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윤국형이 찬한 〈문소만록(聞韶漫錄)〉에 따르면,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서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이 천여 명에 달했다 한다.[주-D004]
이정존 담(李靜存湛) : 이담(李湛, 1510~1574)으로,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중구(仲久), 호는 정존재(靜存齋)이다. 1538년(중종33)에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 정언, 부교리 등을 지냈다. 1544년에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1545년에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1547년(명종2)에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양산(梁山)에 유배되었고, 명종이 승하하자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수에 참여하였다. 1572년(선조5)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이후 우승지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陶谷集 卷13 弘文館副提學靜存齋李公墓碣銘》
[주-D005] 이에 …… 풀어주었으니 : 1564년(명종19)에 유연(柳淵)이 그의 형 유유(柳游)를 죽였다 하여 사형을 받았는데, 윤국형은 이전에 순안(順安)에서 알게 된 천유(天裕)란 거지의 본명이 유유이고, 그가 살해되었다고 알려진 이후에도 천유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서 1579년에 탑전에서 이 일을 아뢰었다. 그 결과 1580년(선조13)에 결국 유유를 찾아내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유연의 누명이 벗겨지게 되었다. 《국역 명종실록 19년 3월 20일》 《국역 선조실록 13년 윤4월 10일》 《국역 대동야승 문소만록》[주-D006] 의안군(義安君) : 이성(李珹, ?~1588)으로, 선조(宣祖)와 인빈(仁嬪) 김씨(金氏) 사이의 소생이다. 복성군(福城君)의 후사가 되었으나 일찍 죽었다. 시호는 의회(懿懷)이다.[주-D007] 마침 …… 오자 : 신립(申砬)이 남도 병사(南道兵史)가 되어 조정에 하직하러 온 것이다. 《국역 대동야승 문소만록》 《국역 선조실록 20년 12월 9일》[주-D008] 송언신(宋言愼)이 …… 아뢰니 : 자세한 내용은 상고할 수 없다.[주-D009] 예(禮)에 …… 않는다 :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장자를 모시고 술을 마실 적에 술이 나오면 일어나서 술동이 있는 곳에서 절을 하고 술을 받되, 장자가 그러지 말라고 하면 젊은이는 자리로 돌아와서 마시고, 장자가 잔을 들어 다 마시지 않았거든 젊은이는 감히 마시지 않는다. 장자가 주거든 젊은이와 미천한 이는 감히 사양하지 않는다.[侍飮於長者, 酒進則起, 拜受於尊所, 長者辭, 少者反席而飮, 長者擧未釂, 少者不敢飮. 長者賜, 少者賤者不敢飮.]” 하였다.[주-D010] 이때 …… 내리자 : 조선 건국 초기부터 《대명회전(大明會典)》에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아들이라고 잘못 기재된 것을 시정해줄 것을 요구하는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관한 주청사(奏請使)를 계속 보냈는데, 1584년(선조17) 황정욱(黃廷彧)이 주청사로 갔을 때 이 요청이 받아들여져, 1587년에 유홍(俞泓)이 개정된 《대명회전》을 가지고 돌아왔고, 또 1588년에 성절사(聖節使) 윤근수(尹根壽)가 개정된 《대명회전》 전질(全帙)과 칙서를 받아가지고 돌아왔다.[주-D011] 방훈(放勳)과 …… 아닙니다 : ‘방훈’은 《서경》 〈요전(堯典)〉에서 요 임금을 찬미하여 “공이 크다”고 한 것인데 뒤에 요 임금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 것이고, ‘중화(重華)’는 〈순전(舜典)〉에서 “거듭 광휘를 발하는 것이 요 임금에게 부합하였다.[重華協于帝.]”라고 하여 순 임금을 찬미한 말로, 마찬가지로 뒤에 순 임금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 것이다.[주-D012] 유서애 성룡(柳西厓成龍) : 유성룡(柳成龍, 1542~1607)으로,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ㆍ운암(雲巖), 시호는 문충(文忠), 봉호는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66년(명종21)에 문과에 급제하여, 1569년(선조2)에 성절사(聖節使) 이후백(李後白)의 서장관으로 연경에 다녀왔다. 이후 도승지ㆍ대사헌ㆍ양관 대제학과 병조ㆍ예조ㆍ이조의 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1590년(선조23) 종계(宗系)를 개정한 공으로 수충익모 광국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영의정에 보임되었으며, 1604년 호성 공신(扈聖功臣)에 책록되었다. 병산서원(屛山書院)ㆍ도남서원(道南書院) 등에 위판이 봉안되었으며, 저서에 《서애집》ㆍ《징비록(懲毖錄)》 등이 있다.[주-D013] 유공 전(柳公㙉) : 유전(柳㙉, 1531~1589)으로,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극후(克厚)이다. 1552년(명종7)에 진사가 되고, 1553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556년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한림(翰林)과 호당(湖堂)에 뽑혔다. 예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역임하고 1585년(선조18)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1590년에 평난공신(平難功臣)에 추록(追錄)되어 시령부원군(始寧府院君)에 봉해졌다. 《국역 연려실기술 제18권 선조조의 상신(相臣)》[주-D014] 이어 …… 사양하고는 : 〈문소만록〉에 따르면, 선조(宣祖)가 윤국형에게 “옛사람이 ‘네가 인물을 얻었느냐?’라고 하였는데, 한번 말해 보거라.[古人云‘汝得人焉爾乎’, 其言之.]”라고 하문하였다. 따라서 윤국형이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사양한 이유는, 이 말이 《논어》 〈옹야(雍也)〉에서 공자가 무성(武城)의 읍재(邑宰)가 된 자유(子游)에게 질문했던 것이었으므로, 자유에게 자신을 비기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한 것인 듯하다.[주-D015] 부자(夫子)가 …… 이유로 : 이 당시 윤국형의 장자 윤경립(尹敬立)은 부수찬ㆍ이조 좌랑ㆍ성균관 직강 등을, 차자 윤의립(尹義立)은 기사관(記事官)ㆍ홍문관 정자 등의 직임에 있었다.[주-D016] 한번은 …… 중지되었다 : 이 당시 존호와 관련된 내용은 《국역 선조실록》 28년 7월 14~18일의 기사에 실려 있다.[주-D017] 소 안찰(蕭按察) : 소응궁(蕭應宮)으로, 호는 관복(觀復)이다. 직례(直隷) 소주부(蘇州府) 상숙현(常熟縣) 사람으로, 1574년에 진사가 되었다. 1597년 7월에 흠차정칙요양등처해방병비(欽差整勑遼陽等處海防兵備) 산동 안찰사(山東按察使)로 나와 조선에서 왜적을 정벌하는 데 대한 군무를 감독하였다. 《조선정왜기략(朝鮮征倭紀略)》을 지었다. 《국역 상촌집 제57권 진 어사의 표하관》 《국역 해동역사 제45권 예문지(藝文志)4 중국서목(中國書目)2》[주-D018] 양 포정(梁布政) : 양조령(梁祖齡)으로, 호는 경천(景泉)이다. 사천(泗川) 성도부(成都府) 온강현(溫江縣) 사람이며, 1586년에 진사가 되었다. 1598년에 흠차정칙요양관전등처해방병비 겸 이조선동중이로군무(欽差整勑遼陽寬奠等處海防兵備兼理朝鮮東中二路軍務) 산동포정사사우참의 겸 안찰사첨사(山東布政使司右參議兼按察使僉事)로 나와 영남을 왕래하였는데, 부하 군사들을 잘 단속하였으므로 그가 지나는 곳마다 편하게 여겼다 한다. 《국역 상촌집 제57권 왕 참정의 표하관》[주-D019] 김모재(金慕齋)의 …… 것이다 : ‘김모재’는 중종조(中宗朝)의 명신(名臣) 김안국(金安國, 1478~1543)으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국경(國卿), 시호는 문경(文敬)이고, 호가 모재이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1503년(연산군9) 문과에 합격하여 좌찬성(左贊成)ㆍ문형(文衡) 등을 역임하였으며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이천(利川)으로 물러나 살면서 조그마한 서재를 지어 놓고는 ‘은일(恩逸)’이라는 편액을 내건 다음, 그곳에서 날마다 여러 학도들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였다. ‘은일’ 시는 김안국이 아우인 김정국(金正國, 1485~1541)에게 보낸 시로, 시의 원제(原題)는 〈우리 집안 형제가 모두 보잘것없는 몸으로 과도한 은총을 입고도 마음을 다 바쳐 은덕을 갚지 못했으니, 나라를 저버리고 성상을 기망한 죄가 죽음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은혜로운 성상께서 너그럽게 용서하시어 편의대로 지내도록 허락해주셨기에 마침내 전원에서 한가롭게 지내며 여생을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감격하며 떠받드는 마음 그지없다. 거처하는 곳에 작은 집을 짓고 ‘은일’이라 명명하고 아우도 ‘은휴’라고 집을 이름 지었으니, 모두 신하로서 자나 깨나 은혜에 감동하여 잊지 못하는 뜻을 담은 것이다. 이에 절구를 지어 아우에게 부친다[吾家兄弟俱以無狀, 濫叨恩寵, 不能盡心報效, 負國罔上, 罪不容誅. 而聖恩寬貸, 許以自便, 遂得優游田園, 以娛餘生, 感戴衷抱, 不能自已. 於所居, 構小亭, 名以恩逸, 弟亦以恩休名亭, 皆寓臣子惓惓感恩不忘之義. 乃作小絶寄弟]〉이다. 전부 세 수로 된 이 시는 《모재집》 권4에 실려 있다.[주-D020] 최수우(崔守愚) : 최영경(崔永慶, 1529~1590)으로,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효원(孝元), 호는 수우당(守愚堂)이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제자이며, 김우옹(金宇顒)ㆍ정구(鄭逑)ㆍ조종도(趙宗道) 등과 교유하였다. 학행(學行)으로 여러 차례 제수되었으나 1575년(선조8)에 잠시 사축(司畜)을 지냈을 뿐이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갈암집(葛庵集)》 권28에 행장이 실려 있고, 《내암집(來庵集)》에는 권12에 행장이, 권13에 묘갈명이 실려 있다.[주-D021] 당대의 …… 바랐다 : ‘장구령(張九齡)’은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명재상으로 개원지치(開元之治)를 주도한 인물이고, ‘사마군실(司馬君實)’은 사마광(司馬光)으로 송나라 원우(元祐) 연간의 어진 재상이다. 곧 당시 사람들이 윤국형을 훌륭한 재상감으로 보아 다시 관직에 기용되기를 바랐다는 말이다.[주-D022] 팔좌(八座) : 좌우 참찬(參贊)과 육판서(六判書)를 가리킨다.[주-D023] 나라의 …… 되었네 : 나라의 보배로운 인물이 되었다는 말이다. ‘규(珪)’와 ‘장(璋)’은 고대 조빙(朝聘)에 사용하는 몹시 귀중한 예기(禮器)로, 매우 고아한 인품이나 걸출한 인재에 비유된다. 《예기》 〈빙의(聘義)〉에 ‘규장특달(珪璋特達)’이라 하여, 규장을 가진 이는 다른 폐백(幣帛)이 없어도 곧바로 천자를 뵐 수 있다고 하였다.
ⓒ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 강여진 (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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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야승(大東野乘) 聞韶漫錄 尹判書國馨著
余自九歲。受業於兪敎官 任。六七年間。始自開蒙。終至應擧。皆是敎養提撕之恩也。其後或學於黃判決 博。李監司 湛。皆不如兪門之專且久也。兪先生享年九十一而終。聰明不減。訓進不倦。治喪之時。門弟之號哭執事者。上自六卿。下至總丱。無慮數百。是丙戌冬也。送終之事。莫不盡誠。鄭西川 崑壽 權判書 徵 尹判書卓然曁余。極意管辦。立祠堂於本宅。奠享諸具。亦皆備焉。兪先生年過七十。氣甚康寧。諸門生春秋會宴上壽。墨寺洞成政丞舊第。翼廊敞豁。每於是處設會。先生居明禮洞。晩移墨寺洞。宴必歡極。諸弟多顯。金玉交輝。臺閣之士。聯翩左右。而章甫丱角。亦皆參會。宴罷則先生按轡。諸弟皆步隨。燈燭煒煌。絲竹轟天。塡咽里巷。觀者如堵墻。先生就第。然後乃散。晩年先生以爲。設宴成第。則諸公步隨。心極不安。命於本宅行之。自己巳至丙戌。十八年間。除國恤外。歲以爲常。墨洞多先進達官。莫不欽嘆曰。兪敎官享福。非吾儕所及云。門下之士。通前後幾至千餘。一時童蒙敎官。所敎門徒。未有如此之盛。先生丙辰生壬午生員賢而尙古無書不讀處己簡潔一毫不妄取家極淸貧不以爲介無子有女數人享年九十一丙戌十月二十日卒葬廣州
나는 아홉 살 때부터 교관(敎官) 유임(兪任)에게 6~7년 동안 글을 배워서 비로소 개몽(開蒙)하여 마침내 과거를 보았으니, 이는 모두 가르쳐 인도해 준 은혜이다. 그 뒤에는 혹 판사 황박(黃博)과 감사 이담(李湛)에게 배우기도 했으나 모두 유선생 문하에서와 같이 전념하고 오래 배우지는 못했다. 유선생은 91세에 돌아가셨는데, 그때까지도 총명이 여전하여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초상을 치를 때에는 울면서 일을 하는 제자들이 위로는 육경(六卿)으로부터 아래로는 어린 아이에 이르기까지 무려 수백 명이나 되었으니, 이때는 병술년(1586, 선조 19) 겨울이었다. 초상을 치르는 일에는 정성을 다하였고, 서천군(西川君) 정곤수(鄭崑壽), 판서 권징(權徵), 판서 윤탁연(尹卓然)과 내가 성심껏 염출하여 본가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내는 모든 기구도 갖추었다.
유선생은 나이 70세가 넘어서도 기운이 매우 강녕하였다. 여러 제자들이 봄ㆍ가을로 잔치를 벌여 헌수(獻壽)했다. 묵사동(墨寺洞) 성 정승(成政丞)의 옛 집의 행랑이 넓으므로 언제나 여기에서 연회를 열었다. 선생은 명례동(明禮洞)에 살다가 만년에 묵사동으로 옮기셨는데, 잔치 때에는 언제나 매우 즐겁게 노셨다. 높은 벼슬에 있는 제자들이 많아 금관자나 옥관자가 번쩍번쩍했고, 대각(臺閣)으로 있는 벼슬아치들이 좌우에 늘어 앉았으며 유생(儒生)과 아이들까지도 모두 참여했다. 잔치가 파하면 선생은 말을 타고 가고 여러 제자들은 모두 걸어서 뒤를 따르는데, 등불이 휘황하고 음악 소리는 하늘을 울리며 거리를 메우고 지나가니 구경꾼이 담처럼 둘러 있었다. 그리하여 선생이 집에 돌아가신 뒤에라야 비로소 흩어졌다.
말년에 선생은, ‘성 정승의 집에서 잔치를 열면 여러 사람이 걸어서 따라오는 것이 몹시 불안하다.’ 하여, 본댁에서 잔치를 열도록 했다. 기사년(1569, 선조 2)으로부터 병술년에 이르기까지 18년 동안 국상(國喪)이 있는 해를 제외하고는 해마다 이것을 상례로 삼았다. 묵사동에는 선배와 높은 벼슬아치들이 많았는데, 모두 흠모하여 감탄하기를,
“유 교관(兪敎官)의 복은 우리들의 미칠 바가 아니다.”
했다.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이 전후에 통틀어 거의 천여 명에 달했으니, 당시 동몽 교관(童蒙敎官)으로서 제자를 가르친 것이 이처럼 많은 이는 없었다. 선생은 병진년(1556, 명종 11)에 태어나서 임오년(1582, 선조 15)에 생원이 되었다. 어질고 옛 사람을 존경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몸가짐이 간결하여 터럭만큼도 망령된 일을 하지 않았으며, 집이 몹시 청빈(淸貧)했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딸 몇 명만 있고 아들은 없었다. 나이 91세로 병술년(인조 19, 1646) 10월 20일에 세상을 떠나니 광주(廣州)에 장사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