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일기 > 고종 > 고종 25년 무자 > 6월 4일 > 최종정보
고종 25년 무자(1888) 6월 4일(갑신) 흐림
25-06-04[21] 문목공 정구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 청하는 경상도 유생 이명구 등의 상소
○ 경상도 유생 이명구(李命九)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 등은 선정(先正)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를 문묘에 배향하게 해 주기를 청하는 일로 정묘(正廟) 정해년부터 시작하여 지난해 계미년까지 전후로 모두 열 번이나 상소하였는데 아직까지 윤허를 받지 못했으니, 신 등이 이런 억울한 마음을 갖고 있은 지 지금까지 백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공자의 사당에 올려 배향하는 것은 바로 유현(儒賢)을 높여 보답하는 지극한 은전(恩典)이니, 그 일이 지극히 중대하고 그 예는 지극히 융성하므로 학문이 탁월하게 깊은 명유(名儒)로서 백세에 사표(師表)가 될 만한 자가 아니면 감히 가볍게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열성조 이래로 여론을 널리 물으시어 여러 번 영전(令典)을 거행하셨는데, 공자의 사당에 배향할 때에는 반드시 매우 신중히 하셨으니, 이는 그 일을 중대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도덕이 깊고 학문이 순정(純正)해서 과연 배향하는 예에 맞는 자가 있으면, 사체(事體)가 중대하다고 해서 한결같이 신중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영남(嶺南)에서는 사현(四賢)이 공자 사당에 나란히 배향되었으니,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같은 분이 바로 그분들입니다. 정구는 사현(四賢)의 뒤에 태어나서 사현의 도통을 이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정종 대왕(正宗大王)께서 일찍이 연신(筵臣)에게 말씀하시기를, ‘영남의 고사(故事)를 가지고 말하면, 집집마다 정주학(程朱學)을 하고 있고 시(詩)와 예(禮)를 배우고 있다. 현풍(玄風)에는 문경공 김굉필이 있고 함양(咸陽)에는 문헌공 정여창이 있으며, 경주(慶州)에는 문원공 이언적이 있고 예안(禮安)에는 문순공 이황이 있으며, 성주(星州)에는 문목공 정구가 있으니, 산천 천리에 이분들이 사시던 곳이 연이어져 있다.’ 하셨습니다. 뛰어나게 총명하고 슬기로우시며 학문이 고명(高明)하고 광대(廣大)하셨던 정묘(正廟)께서 이분들을 한분 한분 들어가며 똑같이 높이셨는데 정구만 배향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사문(斯文)의 흠사(欠事)이고 성세(盛世)의 궐전(闕典)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에 적절한 대우가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에 온 나라의 한결같은 의논을 가지고 전에 여러 번 호소했던 요청을 다시 진달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한번 굽어살펴 주소서.
정구는 바로 김굉필의 외손이며 이황의 문인입니다. 태어났을 때에 천자(天資)가 수려하고 지기(志氣)가 원대했습니다. 열 살도 되기 전에 선성(先聖)의 화상(畫像)을 손수 베껴서 벽에 걸어 놓고 말하기를, ‘반드시 뵙고 절한 다음 《주역(周易)》을 읽으리라.’ 하였고, 건괘(乾卦)와 곤괘(坤卦)를 읽고서는 나머지는 모두 유추해서 통달했습니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이황의 문하에 갔는데, 이황이 자주 칭찬하기를, ‘자질이 영민한 데다 학문에 뜻을 두고 선(善)을 좋아하니, 후에 반드시 큰 유학자가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왕래하면서 질문하고 서로 편지를 계속 하면서 학문을 논하고 예(禮)를 토의하였는데, 두 분의 견해가 딱 들어맞았습니다. 마침내 과거 공부는 하지 않고 오로지 성리학(性理學)에만 뜻을 두었으니, 종일 꼿꼿이 앉아서 자기를 수양하고 남을 다스리는 방도는 한결같이 《대학(大學)》을 법으로 삼고, 마음을 잡아 보존하고 지키는 공부는 반드시 ‘경에 거하는 것[居敬]’을 요점으로 삼았습니다. 보고 듣지 않을 때에도 계신 공구(戒愼恐懼)를 잘하여 이 마음을 보존하고, 널리 배우고[博學] 자세히 물으며[審問] 신중하게 생각하고[愼思] 밝게 분변하는[明辨] 즈음에 이 이치를 궁구하여 참으로 알아 실천해서 기르고 쌓은 것이 심후(深厚)하였습니다. 가까이는 일상 생활의 사물에서부터 위로는 천인(天人)과 성명(性命)까지 꿰뚫고 환히 알아서 범범하게 응해도 딱 맞지 않음이 없었는데, 평소 공부한 것 중에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습니다. 이에 송조(宋朝)의 오현(五賢)이 논변한 설을 가져다가 모아서 한 질(帙)을 만들고는 《예설분류(禮說分類)》라 이름 붙이고, 또 《가례집람(家禮集覽)》과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를 지어서 보충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근본이 되는 천서(天序), 천질(天秩)과 지엽적인 도수(度數), 의문(儀文)이 자세히 구비되지 않음이 없게 되었으니, 위로는 일왕(一王)의 명법(明法)이 될 만하고 아래로는 예가(禮家)의 준칙이 될 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이 여러 번 편지를 써서 의견을 주고받고는 예학이 고명한 것에 깊이 감탄하였습니다. 심지어 《심경발휘(心經發揮)》 한 책은 서산 진씨(西山眞氏 진덕수(眞德秀))의 것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정자와 주자의 중요한 가르침을 보충해 넣고 퇴계의 뜻을 따랐는데, 황돈(篁墩 정민정(程敏政)의 호)의 잘못된 견해를 없애어 많은 성현들이 서로 전한 심법(心法)이 거의 다 드러나 있습니다. 그리하여 숙묘조(肅廟朝)에 중국의 사신이 와서 동방의 심학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조정 사람들이 모두 한강(寒岡) 정구의 《심경발휘》가 동방의 심학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인재는 선묘조(宣廟朝)에 이르러 가장 많았으니, 도학(道學)의 경우 퇴계(退溪), 한강(寒岡), 율곡(栗谷), 우계(牛溪), 중봉(重峯)이 계셨다.’ 하였는데, 한강이 바로 정구의 호(號)입니다. 광해조(光海朝) 때에 세도(世道)가 꽉 막히게 되자 올린 두 번의 차자와 한 번의 상소는 해와 별처럼 빛나 그 말뜻은 간절하고 의리는 정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곧은 도가 비록 한때 막혔지만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가 이것을 힘입어 백세 동안 확립되었으니, 이는 또 강상과 인륜을 붙들어 세워 변치 않을 큰 절개를 우뚝 세운 것입니다. 사방의 학자들이 그의 문하에 벌 떼처럼 모여들게 되어서는 학자들의 재주와 국량에 따라 알맞게 가르쳤으니, 이들의 학문이 전후로 성취되어 대부분 한 시대의 훌륭한 덕을 가진 큰 유학자가 되었습니다. 초하루에 강회(講會)하던 법규와 향리(鄕里)에서 지켜야 할 조약(條約)에 대한 글은 지금까지 소문만 전해 듣고도 흥기하는 자가 있습니다. 사도(斯道)를 자임하여 후학에게 베푼 공은 아마도 도산(陶山) 이후로 이분처럼 성대한 자가 없었을 것이니, 이런 이유로 열성(列聖)들이 칭찬하고 찬미한 것이 지극히 융숭했던 것입니다.
인묘(仁廟)께서 반정(反正) 초기에 내린 유제문(諭祭文)에 이르기를, ‘마음은 도의 깊은 세계에 푹 빠져 다른 것에는 초연하여 사모함이 없었고, 다리는 현실을 딛고서 그 가운데에 우뚝하게 서 있었다. 세도(世道)가 비색하게 될 때나 태평하게 될 때나 한몸으로 자임하였고, 예(禮)의 자세하고 소략한 것이 다른 데 대하여 여러 설들을 모아 절충하였다.’ 하였고, 숙묘(肅廟)의 치제문(致祭文)에 이르기를, ‘한훤당(寒暄堂)이 남긴 모범이고 퇴계의 바른 계통이다.’ 하였으며, 서원(書院)에 사액(賜額)할 때에 승정원의 계사(啓辭)에 이르기를, ‘정구의 도학은 참으로 이황 이후의 일인자입니다.’ 하였고, 사제문(賜祭文)에 이르기를, ‘안은 경(敬)하고 밖은 의로웠으며, 왼쪽은 규범이 되고 오른쪽은 기준이 되니, 체용(體用)이 모두 포괄되고 지행(知行)이 나란히 나아갔다. 경례(經禮)의 뜻을 드러내 밝혀 몽매한 사람들을 계도하였다.’ 하였습니다. 정묘(正廟) 신해년(1791)에 칠도(七道) 유생들이 상소하여 정구를 공자의 사당에 배향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비답을 내리시기를, ‘선정 김인후(金麟厚)와 조헌(趙憲)을 종사(從祀)하는 일을 가지고 전에 많은 선비들이 여러 번 호소하였으나 매번 윤허해 주지 않았다. 이번에 그대들이 상소하여 요청한 것도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선정의 경술(經術)과 행의(行誼)에 대하여 내가 공경하고 숭상하는 것이 어찌 그대들보다 못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순묘(純廟) 정묘년(1807)에 또 서로 이끌고 와서 상소하였더니, 특별히 해조에 명을 내려 품처(稟處)하라고 하자, 예조가 회계(回啓)하기를, ‘정구의 도덕은 실로 사림들이 숭앙하는 바이니, 그를 높이는 예에 어찌 다른 말이 있겠습니까.’ 하였고, 대신(大臣)들이 의논한 것을 올린 것에 또한 말하기를, ‘정구의 학문과 덕행은 실로 조정에서 높이는 예를 시행해서 사림들이 종앙(宗仰)하도록 할 만하니, 오직 널리 의견을 물으시어 처리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또 철묘(哲廟) 신해년(1851)에 김시형(金是珩) 등의 상소에 답하기를, ‘선정의 학문과 연원의 올바름에 대하여 사림에서 이러한 논의를 한 지가 오래되었다. 그러나 공자의 사당에 배향하는 것은 사체가 매우 중대하다.’ 하였습니다. 열성(列聖)께서 이것을 중대하게 여기신 까닭은 어찌 정구의 도학이 공자의 사당에 배향되기에 합당하지 못한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다만 그 예를 높이고 그 일을 중대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럭저럭 지내는 사이에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 그대로 명이 내려지기만을 기다리다가 지금까지 결말을 짓지 못한 일이 돼버렸으니, 이런 까닭에 신 등의 억울한 마음이 해소되지 않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항상 학문에 종사하는 마음을 잘 미루시고 사도(斯道)의 중대함을 깊이 생각하시어, 유사(攸司)에게 명하여 선정 문목공 정구를 공자의 사당에 배향하는 은전을 속히 거행하게 하소서. 그렇게 되면 열성조가 남기신 뜻이 오늘날 이루어지게 될 것이니, 우리 전하의 선왕의 뜻을 잇는 의리가 역사에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신 등은 하늘을 바라보고 성상을 우러르며 너무나도 두렵고 간절한 마음을 금치 못하여 삼가 죽기를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문목공 정구의 학문과 연원은 늘 공경하고 숭상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번에 청한 것은 지극히 신중히 해야 할 일이라서 대번에 의논할 수가 없으니, 그대들은 잘 이해하고 물러가도록 하라.”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희자 (역) |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