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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제18회 유심작품상 시조부문 수상자 박시교론
허전한 오만, 깨끗한 절제
홍성란
청도의 두 스승
1970년 1월, 이호우와 심재완의 심사로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처음 쓴 시조 「온돌방」이 당선되었을 때. 박시교는 시상식에 참석하여 이호우 선생이 며칠 전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시조의 스승을 모시고 시조에 대해 깊이 공부하게 되었다는 꿈이 물거품이 되던 순간. 이영도는 약조했다. 오빠가 마지막으로 배출한 시인이니 특별한 관심을 가지겠다고. 그리고는 10월, 「노모상」과 「접목」을 『현대시학』 추천작으로 올려 박시교는 시인이 되었다. 그렇게 청도의 상징, 오누이 시조시인을 한꺼번에 스승으로 삼게 된 것은 남다른 행운이었다.
첫시집 『겨울강』(1980) 상재 이후, 『가슴으로 오는 새벽』(1997), 『독작(獨酌)』(2004), 『아나키스트에게』(2011), 『13월』(2016)을 펴냈으니 스스로 낸 시집은 다섯 권뿐이다. 물론 윤금초, 이우걸, 유재영과 함께 낸 합동시집 『네 사람의 얼굴』과 『낙화(落花)』,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과 같은 시선집도 있으나 그가 필요해서 만든 시집은 아니다. 그는 1991년 당시 시조계의 엘리트집단 ‘오늘의시조’ 동인회에서 시상하는 제1회 오늘의시조문학상을 받았다. 이어서 시조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중앙시조대상을 비롯하여 이호우시조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고산문학대상, 한국시조대상을 수상한 바와 같이 70년대 현대시조의 기수로서 후학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러나 이 말로는 충분치 않다. 충분치 않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찬란한 인생
한 시인의 총체적 문학과 인생을 어떻게 단정하여 말할 수 있을까. 말한다고 다 말할 수 있을까. 『유심』(2014년 8월호)에 쓴 자전적 글을 읽는다. 읽는다고 그 심중을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그가 썼다고 해서 그는 다 쓴 것일까. 나는 보이는 만큼 볼 수밖에 없고 느끼는 만큼 쓸 수밖에 없다. 이것이 찬란한 우리 인생의 오류다.
『유심』의 같은 지면에는 1977년의 흑백사진이 있다. 장년의 사진에서 ‘미소년’이란 말이 떠오른다. 이 아름다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왜 가슴 아린 걸까. 왜 눈물이 나는 걸까. 이제 그가 『유심』에 발표했던 글을 부분 첨삭하여 『13월』의 말미에 올린 자전적 술회(「문학이란 길 위에서, 쓰러지기 위해 다시 일어서다」)를 따라가기로 한다.
1945년 음력 5월 23일 경북 봉화 출생. 박시교는 해방둥이로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광복을 거친 세대다. 그는 ‘6·25동란’ 중에 어머니 등에 업혀 형과 셋이서 피난길에 올랐다. 그때 이미 아버지는 곁에 없었다. 기억에서조차도 떠나고 없는 아버지는 ‘열렬한 공산당원’이었을까. 이념을 좇아 가족을 두고 북으로의 길을 택한 것일까. 그런 내력은 집안의 금기였다. 서른여섯에 어린 자식들을 떠안고 혼자가 되신 어머니.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이신 적 없고, 목소리 높이거나 매를 든 적 없는 어머니. 어머니 자신을 다스린 매서운 채찍은 얼마나 가혹했을까.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영주에서 철암까지 영암선 열차를 타고 다니던 중학교 3학년. 늘 타고 다니던 열차에서 돌연 사고를 당했다. 그 사고로 ‘젊음’은 무려 열세 번에 걸친 수술의 고통을 감내하며 ‘다리 절단이라는 최악의 경우는 겨우 면할 수 있었’다. 그에게 청소년기의 꿈이라든가 꿈의 좌절 따위는 일종의 사치였다. 남들이 말하는 ‘환상통’이 아니라 실제로 잠 속에서 꾸는 꿈 때문에 그는 그만의 ‘유령통’을 앓아야 했다. 유령통은 꿈과 낭만을 얼마나 앗아 간 것일까.
그는 또래 가운데 늘 앞장서던 활달한 소년이었다. 활달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꿈속에서도 그대로였으니, 꿈에서 깨어났을 때 ‘현재 모습’을 보는 좌절과 참담을 누가 짐작할 수 있을까. 끝없이 몰려오던 허탈과 허망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어머니가 계신 봉화에 머물던 한때. 가난이 전부인 산촌 벽지 재건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 무렵 신춘문예 응모 준비를 했다. 서대문 로터리 서대문우체국 뒷골목 부근. 인창고교 담벽이 뵈는 마지막 2층집 삐걱거리는 나무계단 위 서너 평 좁은 방. 이 『현대시학』 아지트에서 전봉건을 대장으로 한 70년대 문청 대열에 그는 합류하게 되었다.
등단 전, ‘젊음’이 봉화에 머물던 그때. 어머니는 귀향한 아들 살기 편하라고 새로 집을 지으셨다. 그런데 1971년 겨울 등단하여 귀경하던 당시. 어머니는 봉화의 그 집과 얼마 안 되는 토지를 정리하고는 말씀하셨다. “나는 죽어서도 이곳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운 이름 하나 가슴에 묻고 산다
지워도 돋는 풀꽃 아련한 향기 같은
그 이름
눈물을 훔치면서 되뇌인다
어 머 니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어린 자식 하나 업고, 하나는 걸리고 피난 봇짐은 머리에 인 어머니. 그 험하고 배고픈 시절을 서른여섯 어머니 홀로 어찌 견디셨을까. 어머니의 긍지였을 꽃다운 아들. 그 모진 세월을 건너 아들의 불편을 덜어주고자 손수 집을 지으셔야 했던 어머니. 고통의 시간이 오래 이어지며 ‘밤이 무섭고 두려’운 아들은 ‘하룻밤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알코올에 의지’했다. 고통이 만든 ‘느리고’ ‘남루한’ ‘발걸음’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안은 어떠했을까. 나는 죽어서도 이곳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던 어머니. 숭고한 희생이나 사랑이라는 말은 말일 뿐이다. 말없이 그저 그리운 이름 하나 가슴에 묻고 산다고 했다. 언외언(言外言). 말을 버린 자리에 시가 있다. 아련한 향기처럼 행과 행 사이 어머니가 보인다. 늦은 눈물 훔치는 불효자식이 속으로 뇔 때마다 떠오르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어머니. 시인의 어머니는 보릿고개와 산업화시대를 통과한 우리 모두의 어머니다. 이 시는 대중적 공감력을 가진 국민시가 되었다.
환(幻) · 아나키스트, 그리고 절제
그는 스스로 “발걸음은 언제나 느리고 게으르다” 했다. 그러니 『아나키스트에게』를 펴내고 5년 뒤 『13월』을 내면서 “이른 감이 없지 않다”고 했다. 시인에게도 한 해에 10여 편 넘게 발표한 예가 있는데 “그것이 올바른 행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했다. 특정한 목적을 갖고서 시집을 자주 낸다거나 작품 발표를 많이 하는 것을 시인은 아주 조심스러운 일이며 삼가야 할 일이라고 보는 것 같다. 나는 이러한 시인의 자세가 시력 50년의 품격을 지켜온 ‘절제 의식’이라고 본다.
50년 시력을 지지해온 절제 의식. 그 절제와 ‘아나키스트’를 생각한다. 그는 스스로 밝힌 아나키스트다. 일체의 강제를 부정하고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삼은 시인.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아나키스트의 절제 의식은 어떤 것일까. 일체의 문단 정치에 기웃거리지 않고 예술가로서 허튼 수 부리지 않는 정직함과 단호함. 그는 수상소감에도, 시집에 붙이는 「시인의 말」에도 늘 “내 시의 삶이 조금은 남루할지라도 조금도 비루하지 않기”를 천명했다. 이는 존엄을 지켜온 절제 의식의 명령 아닐까.
일찍이 시인의 ‘젊음’이 경험했던 고통과 좌절, 허망은 어떠했으며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알게 된 이호우 별세 소식은 또 어떤 물거품으로 다가왔을까. 여기서 다산 정약용(1762∼1836)이 학승 초의선사(1786~ 1866)에게 준 글 한 대목을 빌린다. 「승려 초의 의순에게 주는 말(爲草衣僧意洵贈言)」. 다산은 고려 후기 공민왕의 스승인 천책국사(天𩑠國禪)의 어록을 인용했다.
“간혹 저잣거리를 지나다가 앉아서 장사하거나 돌아다니며 물건 파는 행상을 보게 되면, 단지 몇 푼 안 되는 돈을 가지고 시끌벅적 떠들면서 시장의 이끗을 독점하려고 다투는데, 백 마리 천 마리 모기가 항아리 속에서 어지러이 앵앵대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장거리에 나선 사람들의 아귀다툼을 항아리 속에서 앵앵대는 모기 울음에 비유한 것이다. 사사로운 이득에 너무 집착하는 추잡한 사람은 되지 말라는 얘기 아닌가. 다산은 초의를 위해 한 가지 더 천책의 말을 인용했다. 글은 읽지 않는 부잣집 아이가 경망하고 교만하게 협객들과 어울려 격구(擊毬)나 하고 화려하게 쏘다니는데 거리의 사람들이 그 모양을 늘어서서 구경하고 있으니 딱하다고 했다. 천책은 그 모양을 지켜보는 자신도 ‘모두가 덧없는 허깨비(幻)’라 했다.
“나나 저들이나 모두 허깨비 세상에서 허깨비로 살아가고 있다. 저들이 어찌 허깨비 몸으로 허깨비 말을 타고 허깨비 길을 내달리며 허깨비 기술을 잘 부려 허깨비 사람으로 하여금 허깨비 일을 구경하게 하는 것이 허깨비 위에 허깨비가 다시 허깨비를 더하게 하는 것임을 알겠는가? 이런 까닭에 밖에 나갔다가 어지러이 떠들썩한 꼴을 보면 서글픈 마음만 더할 뿐이다(吾與彼, 俱幻生於幻世。 彼焉知將幻身, 乘幻馬, 馳幻路, 工幻技, 令幻人, 觀幻事, 更於幻上幻復幻也? 由是, 出見紛譁, 增忉怛耳)”
여몽환포영.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는 금강경의 말씀이 떠오른다. 다산은 초의에게 이런 이야기를 무슨 뜻으로 전하였을까. 이 허망한 세상에서 아귀다툼하여 얻은 그 무엇을 세상 뜨는 날 가지고 갈 수 있겠느냐.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지 않느냐.
누가 또 먼 길 떠날 채비 하는가보다
들녘에 옷깃 여밀 바람솔기 풀어놓고
연습이 필요했던 삶도 모두 놓아 버리고
내 수의(壽衣)엔 기필코 주머니를 달 것이다
빈손이 허전하면 거기 깊이 찔러 넣고
조금은 거드름피우며 느릿느릿 가리라
일회용 아닌 여정이 가당키나 하든가
천지에 꽃 피고 지는 것도 순간의 탄식
내 사랑 아나키스트여 부디 홀로 가시라
-「나의 아나키스트여」
지독히 아픈 역설이다. 도대체 연습이 필요했다는 삶의 배경에는 어떤 후회가 있는 걸까. 도대체 누가 삶을 연습하고 새로 살 수 있단 말인가. 내생(來生)이라는 게 있을까. 묻지도 말자. 일회용 아닌 여정이 가당키나 한가 말이다. 누군가의 시처럼 때로 ‘잘못 살아온 죄적(罪迹)만 같다’는 우리 인생은 순간의 탄식일 뿐. 다시 돌아오지 못할 여몽환포영. 돌아보면 허전하기 그지없는 우리는 모두가 빈손. 인생의 마지막 예복에 주머니를 달고 거기 빈손을 깊이 찔러 넣고 거드름피우며 느릿느릿 가겠다는 오만. 지독히 아린 역설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겠다는 쓸쓸한 아나키스트의 빛나는 오만.
정신의 푯대, 수유리 시목(詩木)
그렇다. 시인이 천명한 바와 같이, 발걸음 남루할지라도 예술적 자취는 비루하지 않기를 바랐으니 허망한 세상 잇속 따위 다투는 일은 가까이하지 않았다. 게으른 듯 느린 이 아나키스트의 허무와 절제가 오만한 예술을 이룬 것일까.
밥이 되지 않는
돈과도 담을 쌓은
시(詩) 앞에서
나는 때로
한없이 오만해진다
세상에
부릴 허세가
이것밖에
없어서
-「가난한 오만(傲慢)」
발표 당시 시력 40년 대표 시조시인이 시를 써서 밥도 돈도 되지 않는다고 말할 때. 후배 시인들은 후련했다. 눈물로, 고혈(膏血)로 시를 써서 헐한 원고료라도 받을 수 있는 지면이 마련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명예와 품격을 지킨다고 지켜온 ‘시인’이라는 이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은 어떻게 뛰어넘을까. 원고료 없는 지면에는 작품을 보내지 않을까. 사정을 잘 아는 지면에는 도와주는 마음으로 원고료는 구독료로 대체한다며 작품을 보낼까. 뜻을 함께 할 수 없는 지면에는 작품을 들러리 세우지 않을까. 짜깁기하듯 훔치거나 남들 비슷한 시는 절대 쓰지 않을까. 세상에 오만 떨 일 없는 가난한 시인. 부릴 허세가 시밖에 없다고 말하는 시인. 이 오만이라는 이름의 자존(自尊). 오로지 시 하나를 정신의 푯대로, 예술로 삼아 가난한 허세를 부릴 수 있는 시인은 행복하다.
꽃 같은 시절이야 누구나 가진 추억
그러나 내게는 상처도 보석이다
살면서 부대끼고 베인 아픈 흉터 몇 개
밑줄 쳐 새겨둔 듯한 어제의 그 흔적들이
어쩌면 오늘을 사는 힘인지도 모른다
몇 군데 옹이를 박은 소나무의 푸름처럼.
-「힘」
소나무의 저 푸름은 옹이에서 왔는가. 상처를 견딘 옹이의 힘으로 소나무는 푸른 걸까. 상처는 인생의 보석. 흉터는 밑줄 쳐 새겨둔 교훈. 그렇다. 그렇게 살면서 부대껴온 일들이 오늘을 견디며 살아가는 힘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한 그루 늙은 나무도/고목 소리 들을라면//속은 으레껏 썩고/곧은 가지들은 다 부러져야//그 물론 굽은 등걸에/장독(杖毒)들도 남아 있어야(조오현, 「고목소리」)”한다니 그렇지 않은가.
상처의 고통과 흉터의 설움으로 밤이 무섭고 두려웠던 시인에게 ‘술을 혼자서도 자주 마시는 버릇’이 생겼으니 ‘애주(愛酒)’라는 변명을 마련했겠다. 혼자서 술 마시는 밤은 쌓여 이 아픈 노래는 나왔으리.
상처 없는 영혼이
세상 어디 있으랴
사람이
그리운 날
아, 미치게
그리운 날
네 생각
더 짙어지라고
혼자서
술 마신다
-「독작(獨酌)」
그렇지. 세상에 상처 없는 영혼은 있을 수 없지. 그러니 고통을 잊기 위해 혼자서 술 마셔본 사람은 알지. 애주가 아니어도 조금은 알 것 같아. 355ml 캔맥주 하나에 그저 발그레해서는 실없이 웃음이 나기도 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세상을 용서할 수 있게도 되는 그런 기분. 그런 기분으로 고통을 잠시 잊는다는 일. 가끔은 힘겨운 하루를 그냥 넘어가게 할 수 없을 때 알코올의 힘을 빌려 본 애송이도 알 것 같다. 그러나 안다고 알 수 있을까. 꿈 깨어 느끼는 유령통 때문에 밤이 무섭고 두려운 이가 혼자 마시는 술의 의미를 어찌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은 시인 자신 아닐까. “네 생각”은 ‘현재 모습’ 이전의 본디 자신을 생각한다는 건 아닐까. 그렇다 해도 좋고 아니라 해도 좋다. 상처 없이, 흉터 없이 무구한 그 어린 날의 내가 사무치게 그리운 건 아닐까. 누구에게나 돌이킬 수 없는 ‘그 시절’은 있다. 남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시도 인생 고해에서 상처받고 아픈 이들이 독작하는 밤낮으로 회자되며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수유리에 살면서 내 가장 즐거운 날은
밤새 비 내려서 계곡물 넘치는 때
그 소리 종일 들으며 귀를 씻는 일입니다
어떤 때는 귀 혼자서 고향 냇가 다녀도 오고
파도소리 그립다며 동해 나들이도 즐기지만
이날은 두 귀 하나 되어 꼼짝도 않습니다
수유리에 살면서 안빈(安貧)이란 옛말을
새록새록 곱씹을 때도 바로 이런 날입니다
당신도 들었으면 해요, 귀 씻는 저 물소리
-「수유리(水踰里)에 살면서」
꿜꿜 터지는 계곡물 소리 들으며 귀를 씻듯, 가장 좋은 날 가장 좋은 일은 나에게 무얼까. 두어 시간, 물길에서 바람길에서 푸나무 무심한 눈길 스치며 무작정 걷는 일. 그렇게 물소리 좋아 무작정 시인은 수유 1동에 둥지를 틀어 30여 년을 살아왔다. 살면서 첫 시집 이후 2011년에 낸 『아나키스트에게』까지 수록작 거의 다 수유리 소산이라니 수유리는 창작의 산실이다. 시인은 수유리를 “내 시의 언덕이고 정신적인 고향”이라 했다. 밤새 비 내려서 콸콸 계곡물 넘치는 날은 종일 그 소리 들으며 생각을 버리는 날이다. 물소리 들으며 앉아서 천 리 고향 냇가도 다녀오고 동해 나들이도 다녀와서는 오롯이 물소리가 되는 날. ‘나’는 없고 물소리 듣는 귀만 있다. 무심한 물소리. 이 얼마나 허전히 맑은 일인가, 선(禪)의 경지 아닌가.
어려울 때일수록 생각나는 사람 있다
①독립된 우리나라에서 정부청사 문지기를 원했던 사람 ②아들에게 나라를 위해 떳떳이 죽
으라고 권했던 사람 ③외국 출장을 마치고 남은 경비를 모두 되돌린 사람 ④평생 키워온 사업
과 전재산 모두를 사회에 환원한 사람 ⑤‘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린 사람
⑥기꺼이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바보라고 자칭하였던 사람
살 만한 세상 만들려 한 그 사람들 그립다
-「그리운 사람-1」(원번호는 필자)
허전히 맑아, 더 바랄 게 없는 이 가난한 아나키스트. 그에게 오만은 품격과 자존의 다른 이름이다. 그가 이 혼탁한 시국에서 그리워지는 이를 호명한다. 원번호 순으로 김구 선생, 안중근 의사, 국회의원 유기준 · 이재오 · 배재정 · 한정애, 기업인이자 교육자 유일한 박사, 저항시인 이육사, 김수환 추기경의 이야기다. 어려울 때일수록 생각나는 위인들. 무슨 군말이 더 필요하랴. 이 위인들이 만들려고 한 그 살만한 세상은 어느 때 올 것인가.
온종일 모은 폐지 한 리어카 이천오백 원
몇십억 아파트 깔고 사는
호사와는 견줄 수 없다지만
경건한 그 삶의 무게 결코 가볍지 않다
-「무게고(考)」
최근 발표한 제 18회 유심작품상 수상작이다. 경건한 삶의 무게. 심정적으로 육체적으로 하중을 느끼며 폐지 줍는 이의 삶의 방식과 자세에서 감지되는 이 경건한 삶의 무게는 결코, 가난한 허세가 아니다. 각자도생이라니 저마다 느끼는 삶의 무게는 저마다 다를 것이나, 이 아나키스트는 몇십억 아파트에서 호사를 누리며 사는 이들이 부러울 게 없다. 기웃거리며 허리 구부려 온종일 모은 폐지를 가득 실은 리어카. 지치게 오늘의 무게를 밀고 가는 노구(老軀)가 보인다. 그 모습에서 나도 누군가처럼 성자(聖者)를 본다. 정직한 이천오백 원을 위해 온몸으로 밀어 올린 오늘 이 하루. 누가 그 무게를 가볍다 하리. 이 아나키스트의 시선은 힘없고 외지고 험한 데 닿아있다.
동행에게 바치는 꽃
시인은 “천생 바꾸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으른 보수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내 생각은 그렇지가 않다. 쓸 때마다 형식 접근과 내용 전개에서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모색하고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고 싶은데 생각과 힘이 미처 따라주지 못하니 안타까울 뿐이”라고 했다. 이 겸허한 마음이 부르는 헌화가를 듣는다. 엄동설한. 나뭇가지와 풀잎에 내려앉은 서리를 가리키는 상고대의 빛나는 눈꽃을 리메이크한 헌화가.
단 한 번도 꽃다운 삶 살아보지 못한 넋이
남들 다 피었다 진 철 지난 엄동설한에
마침내 온 산 들녘을 피워내는 꽃이여
당신 계신 그곳에는 피었을 것 같지 않아
한두 송이 곱게 꺾어 보내드리고 싶지만
먼 길에 시들면 어쩌나 눈이 부신 눈꽃이여
-「겨울 헌화가(獻花歌)」
그때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나무란 나무는 눈꽃으로 찬란했다. 산은 내게 정상 가까운 대피소까지만 허락했으나 그 맑고 찬 산의 정령(精靈)과 눈꽃은 아직 생생하다. 그 눈꽃이어도 좋다. 애초에 없는 “당신”일지라도 누구든 그 당신이 될 수 있으니, 당신 계신 그곳에 눈꽃 한두 송이 꺾어 보내드리고 싶은 선한 마음. 누군들 꽃다운 삶 살아보고 싶지 않은 넋이 있을까. 남들 다 피었다 진 철 지난 엄동설한이면 어때. 덧없이 피었다 져야 하는 게 우리 인생이라면 단 한 번만이라도 피기만 피면 설화(雪花), 눈부신 생 아닌가. 온 산 들녘을 꽃피우는 이 늦은 만개(滿開). 이 맑고 허전한 아우라.
내 발걸음은 언제나 느리고 게으르다. 걷기가 지금보다 더 힘들기 전에 ‘단수시조집’ 한 권을 엮을 수 있다면 그때 나의 이 여행을 끝내도 좋을 것 같다.
『아나키스트에게』에 붙인 글이다. 그러니 단수시조집은 묶지 마시길 바란다. 아직 느리고 게으른 걸음 함께 걸어야 할 길이 우리 앞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기댈 언덕이
될 수 있다면
그의 상처 쓰다듬는 손길이
될 수 있다면
험난한
세상의 다리까지도
되어 줄 수가 있다면
-「동행(同行)」
가난한 아나키스트는 호사를 누리는 권력자보다 주머니도 마음도 허전한 을(乙)들의 편에 있지 않았나. 그는 살아가며 ‘항심(恒心)이 흔들릴 때마다 무산스님은 기댈 언덕’이었다고 했다. 그처럼 그도 누군가에게 기댈 언덕이 되고자 한다. 상처를 쓰다듬는 손길이 되고자 한다. 느리더라도 천천히 걸으면서 길가의 애기똥풀이나 곤줄박이 새나 그저 지나치는 사람들과도 마음 나누고 무언가 그리워하며 모두를 사랑하겠다는 시인. 험난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그 모두와 동행하고 싶다는 시인.
공감과 품격, 현대시조의 표상
나는 이 글을 시작하며 박시교 시인은 70년대 현대시조의 기수로서, 후학들에게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는 말로는 충분치 않다고 했다. 그는 예술가로서 정직함과 단호함을 보여온 드문 시인으로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정신의 오만을 푯대처럼 지녀왔다. 그 시선은 약자들 편에 있으나 남루할지라도 비루하지 않기를 바라는 절제 의식으로 품격을 지켜왔다. 그의 시는 보통사람의 이야기를 쉬운 말로 대변하여 공감력을 획득하고 있으니, 소개한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독작」 외에도 「연리지 생각,」「독법」, 「길」과 같은 작품들은 널리 회자되고 있다. 예술가로서의 품격을 지키며 대중적 인기를 누린다는 일은 시인이라면 누구나 이루고 싶은 꿈 아닐까. 그러니 박시교의 위상은 ‘현대시조의 표상(表象)’이라는 데 있다. 이제 시인은 더 천천히 걸으며 주변의 사소한 일도 살피겠다고 한다. 그의 절제는 느리고 게으른 걸음이 감당할 정도로만 마음을 내겠다고 한다. 천천히 가는 그 길에 나도 따뜻한 동행이 되고 싶다.
홍성란 srorchid@hanmail.net
시인. 1989년 중앙시조백일장(경복궁 근정전)으로 등단. 시집 《춤》《바람의 머리카락》《칭찬 인형》, 시선집 《애인 있어요》 《소풍》 시조감상 에세이 《백팔번뇌-하늘의 소리 땅의 소리》 외 다수. 유심작품상, 중앙시조대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이영도시조문학상, 조운문학상 등 수상.
현재 유심시조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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