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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적 상상력의 육화와 변용
-문순자론
1.
상처가 예술을 낳는다는 말이 있다. 옳은 이야기다. 가슴에 복받치는 아픔 없이 어찌 영혼을 울리는 노래가 불리어지랴. 문순자 시인, 나는 그를 안다.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몇 차례 만난 일이 있다.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 바는 없지만, 그의 진지한 눈빛에서 시조와 문학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읽었다. 그는 입이 무거운 시인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시편도 대체로 무겁다. 무거운 생의 고백록과도 같다. 그러나 일정한 리듬을 타면서 감칠맛 나게 읽힌다. 여러 번 되뇌어 읽게 하는 힘을 편 편마다 내장하고 있다. 항시 그만큼 진중한 삶을 추동하고 있다는 하나의 증좌이기도 하다.
파도가 내었을까, 제주도 해안도로
하늘길, 바닷길로
강씨, 문씨 날아와서
털머위 꽃대궁 같은 포구 하나 열었다
아버지도 4·3 땅 피를 물려 받으셨나
셋째형 그 이름을 홧술잔에 띄워놓고
당신의 콩팥으로는
걸러낼 수 없던 일엽
그래, 이 그리움을 무엇으로 거를까
신장 투석하듯
숨골 따라 거슬러 온 파도
신제주 관통한 내력 몰래물은 알고 있다
이제 가난한 몸, 집어등이 되고 싶다
볏짚에 묻힌 재로 갈피갈피 닦아내면
밤바다 허락도 없이
별자리를 놓는다
-「사수포구·1」중에서
그의 시의 이면에는 곡진한 아픔이 깔려 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숙명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전체적으로 조망해 볼 때 견고한 골격과 추동력을 가지고 있다. 앞서 말한 아픔이 그 밑바탕에 깔려 시를 견인해 나가는 원동력 역할을 한다.
「사수포구·1」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예의 ‘4·3’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의 이번 시조집에서 지금까지 파악한 바로는 ‘4·3’이 직접적으로 거론된 것이 다섯 차례다. 제주를 삶의 근거지로 살아가는 시인에게 특히 ‘4·3’은 피할 수 없는 현안 문제요, 주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시인은 결코 역사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첫 수를 보자. ‘제주도 해안도로’는 필시 파도가 낸 것이 틀림없다고 화자는 은근슬쩍 묻고 있지만, 독자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파도가 한 일을 떠올릴 수 있다. ‘강씨, 문씨 날아’온 ‘하늘길, 바닷길’ 이야기가 사뭇 설화적이고, 그들이 일군 포구 즉 삶의 터전은 또한 자못 서정적이다. 그 포구를 ‘털머위 꽃대궁 같은’으로 형용하고 있는 대목에서 특별한 정감을 느낄 수 있다.
둘째 수는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표출하고 있다. 아버지와 ‘4·3’의 소용돌이 속에 스러져간 그의 셋째 형에 대한 아픈 회상이 결곡한 어조에 실려 눈길을 끈다. 홧술잔에 띄워 놓은 그 이름 석 자는 이미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당신의 콩팥으로는/ 걸러낼 수 없던 일엽’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그리움’은 무엇으로도 거를 수 없다. ‘숨골 따라 거슬러 온 파도’를 ‘신장 투석하듯’이라고 형용하고 있는 대목에서도 그의 범상치 않는 기량을 읽는다.
넷째 수는 결미다. ‘집어등이 되고 싶’은 ‘가난한 몸’, ‘볏짚에 묻힌 재로 갈피갈피 닦아내’게 되면 별자리를 놓게 된다. ‘별자리’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뜻하고 있다. 삶의 승화된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람의 영혼이 영원히 머무는 곳임을 은연 중 상징하고 있다.
장마철엔 은연중 날 피하는 길이 있다.
한라산 동쪽능선 삼의오름 채 못 미처
한 사발 배고픈 수국
인광을 품고 있다.
그런 길, 그런 오후엔 빙초산 냄새가 난다.
갓 스물에 세상 뜬 주근깨투성이 그 애
서늘히 등짝 후린다. 속수무책 청보라로.
지금 내 나이쯤 아버지도 어쩌지 못한
그래, 사촌이랄지 아니면 남남이랄지
어쩌면 가문의 숙명, 목젖 걸린 가시 같은
도채비꽃이라 한다, 그것도 낮 도채비
오뉴월 장맛비가 널 그렇게 홀렸구나
이 땅에 종자 하나도
못 거둔 저 무성화야
-「산수국」전문
이 시편 역시 근원적인 아픔을 보여주고 있다. ‘한라산 동쪽능선 삼의오름 채 못 미’친 곳에 ‘인광을 품고 있’는 ‘한 사발 배고픈 수국’에서 우리는 깊은 생각을 하게 된다. 수국이 품고 있는 ‘인광’ 이미지의 이면에 내재되어 있는 정황과 ‘서늘히 등짝 후’리는, ‘속수무책 청보라’의 이미지는 서로 묘한 접맥을 보인다.
‘장마철’이면 ‘은연 중’ 시의 화자를 ‘피하는 길’에서 마주하게 된 수국 주변은 ‘빙초산 냄새’가 나는 곳이다. 필시 ‘갓 스물에 세상 뜬 주근깨투성이 그 애’ 때문일 것이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은 없다. 다만 셋째 수에서 어느 정도 짐작될 뿐이다.
넷째 수에서는 ‘산수국’을 두고 ‘도채비꽃, 낮도채비’라고 말한다. ‘이 땅에 종자 하나도/ 못 거둔 저 무성화’는 도채비 이미지와 묘한 접점에서 만난다. 「산수국」은 종자 하나 남기지 못하고 간 한 존재에 대한 애련의 정을 진지하고 진솔하게 담고 있다. 진혼곡은 아니지만, ‘그 애’ 에 대한 추념으로써 모자람이 없는 노래다. 그리고 ‘무성화’가 주는 느낌은 어쩌지 못할 비애 그 자체다. 삶에서 슬픔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 만큼인 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섬 끝 마을
종달리에선
바람 끝이 보인다.
문득 듣는 무적 같은
아버지 부음 같은
허기진
4·3의 세월
고봉밥 떠서 돈다.
-「장마철 수국꽃길」전문
지명인 ‘종달리’가 주는 어감이 시적이다. 무언지 모를 정취를 자아내며 진폭을 일으킨다. 종달리는 섬끝 마을이다. 화자는 그곳에서 ‘바람 끝’을 보고 있다. 구체적으로 다가오지 않지만, 능히 그럴 것만 같다. 장마철이고 수국꽃길이 있어서 더욱 그럴 듯하다. ‘아버지의 부음’과 ‘문득 듣는 무적’ 같은 ‘허기진/ 4·3의 세월’이 눈앞에 있다. 그런 까닭에 ‘4·3의 세월’이 ‘고봉밥 떠서’ 도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이제 ‘바람 끝이 보인다.’는 진술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단시조 「장마철 수국꽃길」에서도 어김없이 ‘4·3’의 아픔이 전면에 나타나고 있다. 그 이면에는 ‘아버지의 부음’이 하나의 배경으로 설정되고 있고, 수국 이미지와 향수를 자아내는 고봉밥이 교직되어 범상하지 않은 세계를 펼쳐 보인다. 이렇듯 그의 시조들은 군더더기가 없다. 흠잡을 데 없는 축조 능력의 산물이다.
누가 이곳에다 불씨 묻어 놓았을까
겨울비 트럭에 싣던 다랑쉬오름 중턱
한줄기 연기를 따라
휘적휘적 오르는 바람.
아니야, 저건 필시 산사람 행적일 거야.
한밤중 영문 모른 채 동굴로 숨어들었던
다랑쉬 4·3의 잔해, 저들의 혼백일거야.
겨울날 분화구가 돌화로로 보이는 것은
수천 평 송당 억새가 항명하듯 젖는 것은
이 땅에 고백을 못한
진눈깨비 저 하얀 죄.
-「파랑주의보·6」전문
‘파랑’은 큰 물결이다. 그러므로 ‘파랑주의보’는 언제 밀어닥칠지 모르는 큰 파도에 대해 각별히 주의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에게 주는 경고 메시지 형태의 시편이다. 삶이 간단치 않음을 상징한다. 다른 한편 느슨한 정신에 긴장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부단한 도전 정신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파랑주의보·6」에서도 ‘4·3’은 표출된다. 즉 ‘한밤중 영문 모른 채 동굴로 숨어들었던/ 다랑쉬 4·3의 잔해, 저들의 혼백’에 대한 끊임없는 추념의 정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다. ‘겨울비 트럭에 싣던 다랑쉬오름 중턱/ 한 줄기 연기를 따라/ 휘적휘적 오르는 바람’을 보면서 화자가 떠올린 것은 ‘4·3’의 희생자에 대한 말로 다 못할 애 끓임이다. 묻어 놓은 불씨가 무시로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불기운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겨울날 분화구’가 ‘돌화로’로, ‘수천 평 송당 억새’는 ‘항명하듯 젖는 것’으로 보였을 법하다. 적절한 비유가 메시지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셋째 수 결구 ‘이 땅에 고백을 못한/ 진눈깨비 저 하얀 죄’에서 ‘진눈깨비’로 상징되는 가해자의 존재가 뇌리에 선명히 각인된다. 죄를 고백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2.
시인은 피아니스트나 성악가와 같은 음악가처럼 ‘나만의 소리를 만들기 위한 처절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 이 땅에 시인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그 한 사람 한 사람은 각기 다른 빛깔과 향기, 소리와 무늬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앞선 이의 한 아류에 그칠 공산이 크다. 그래서 자신만의 색채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야를 넓혀야 한다. 이미 경험한 인생을 밑거름 삼아 자신을 계속 만들어가야 한다. 또한 쓰러졌다가도 꿋꿋이 일어나는 내적 채찍질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가락과 언어로 연주한 작품이 널리 감동을 안겨줄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부단히 고뇌하고 궁구하는 일은 온전히 그 시인의 몫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문순자 시인은 개성이 강하다. 자신만의 세계와 율격 즉 시의 보법을 가지고 있다. 다음 작품에서도 그것을 확연히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억새 저 흐느낌은 세상일만이 아니리.
낮과 밤, 이 저승 경계
다 무너진 추분 날
마지막 숟가락마저 끝내 들지 못하시던……
그땐 모슬포에도 썰물녘 아니었을까.
세 차례 뇌수술 끝
종언 같은 한 마디
내일은 바다 끝자락, 소풍을 가자셨다.
소풍을 가자셨다, 산이수동 발자국화석
팔순의 세월 한 켠, 자식 묻고 돌아서는
아버님 안경의 눈빛, 먼 섬처럼 반짝인다.
사서직 삼십여 년, 그도 한 권 장서던가.
한 생애 더듬더듬 열람하는 가을비
웅회암 조간대 건넌
괭이갈매기 족적 같은.
-「파랑주의보·13」전문
‘억새의 흐느낌’에서 세상일만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 화자의 시각을 본다. 사물이나 자연의 이면을 바라보는 일이 시인에게 주어진 한 책무이겠지만, ‘낮과 밤, 이 저승 경계/ 다 무너진 추분 날/ 마지막 숟가락마저 끝내 들지 못하시던……’, 그 날의 모습을 흐느끼는 듯한 억새로부터 다시금 떠올리는 일은 인상적이다.
둘째 수에서는 한 사람의 마지막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를 보인다. 썰물녘의 모슬포와 ‘세 차례 뇌수술 끝/ 종언 같은 한 마디’를 남기는 이의 모습이다. ‘내일은 바다 끝자락, 소풍을 가자셨’지만, 그것은 이미 이승의 말을 넘어선 것이다. ‘바다 끝자락’이라는 구절에서 느낀 그대로 그것은 곧 저승 즉 하늘나라로 이젠 떠나겠다는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일찍이 천상병 시인이「귀천」에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이라고 읊은 대목을 떠올리게 한다.
셋째 수에서는 둘째 수 종장 후구 ‘소풍을 가자셨다’를 되받아 쓰고 있다. 이것은 수와 수 사이의 유기적인 가락을 염두에 둔 배려이기도 하겠지만, 임종에 대한 화자의 곡진한 아픔을 강조하는 수사법이기도 하다. 모슬포 산이수동 바닷가에는 일만 년 전에 형성된 사람, 새, 말, 코끼리 등의 발자국과 게 화석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곳은 오래 전, 사람들이 여러 동물들과 서로 어울려 살던 곳이다. ‘팔순의 세월 한 켠, 자식 묻고 돌아서는/ 아버님 안경의 눈빛, 먼 섬처럼 반짝’이는 것을 바라보는 화자에게는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넷째 수는 가슴을 ‘쾅’ 울린다. 고인은 삼십 여년을 사서직에 몸담았던가 보다. 그리하여 화자에게는 ‘그’가 곧 한 권의 장서로 묵직하게 다가오는 존재다. 마침, 내리는 ‘가을비’가 ‘한 생애’를 ‘더듬더듬 열람하’고 있다는 대목에서 시인의 남다른 언어 운용 능력을 읽는다. 정황에 걸맞은 적절한 표현이 시적 성취를 높이고 있다. 종장인 ‘응회암 조간대 건넌/ 괭이갈매기 족적 같은’으로 맺은 결구도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역할을 한다. 셋째 수 ‘산이수동 발자국화석’과 유기적인 연결 체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랑주의보·13」은 가족사를 노래하고 있으면서도 제목에서 보듯 우리 인생살이에 대한 함의를 담고 있다. 문순자 시인의 시적 기량이 이 작품에서도 다시 한 번 도드라져 나타나고 있는 것을 눈여겨 볼 일이다.
인용하지 않았지만「두점박이가슴벌레」와 「비치미오름 피뿌리풀」은 모두 멸종 위기의 동식물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종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사람에게도 위협적인 일이다. ‘두점박이사슴벌레’는 제주도에만 서식하는 환경부 지정 멸종 위기 1급 보호곤충이라고 한다. 「두점박이가슴벌레」 둘째 수 초장에서 ‘번성하라’를 두 번 되풀이하고 있다. 하늘의 명령이라고 해도 될 이 대목에서 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하늘의 명령을 상기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하게 되새겨야 할 것은 사람 중심 사상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수에서 ‘금이 간 제기에도 길 하나 묻어’ 나는 것을 볼 수 있는 시의 화자가 넷째 수에 와서 ‘사슴벌레’와 동일시되는 정황에 이른다. 시적 자아가 사슴벌레에 이입되었기에 자신의 방사를 자각하게 된 것임에 틀림없다. ‘사슴뿔 철컥거리며 불빛 찾아 나’서는 ‘두점박이사슴벌레’에서 우리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또한 ‘철컥거리며’라는 의성어 이미지를 가진 낱말에서 존재의 애달픔을 읽는다.
「비치미오름 피뿌리풀」에서 ‘피뿌리풀’ 역시 멸종의 위기에 처해 있다. 비치미오름에서 볼 수 있는 이 풀은 이 땅에서 목숨이 사위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 까닭은 여러 가지 일 수 있겠지만, 개발 논리를 앞세워 자연의 순리를 좇지 않아 일어난 것임에 틀림없다. 시의 화자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눈여겨본 뒤 ‘조간신문 한 켠에 유물 같은 사진 한 장’을 어느 날 발견하고 네 수로 노래하고 있다.
‘꿩이 나는 형상’ 의 ‘비치미오름’은 ‘땅문서 순순히 내주고/ 돌아앉은, 그 형상’을 가지고 있고, 시의 화자는 시방 그 곳에 가서 생각에 잠겨 있는 중이다. 특히 이 시편은 멸종 위기의 피뿌리풀과 ‘흑백으로 돌아’온 ‘날개 접은 왕가’를 접맥시키고 있는 특이한 시적 장치가 눈길을 끈다. 이 대목에서 굳이 회고적이라거나 과거 지향적이라고 볼 까닭은 없을 것이다.
셋째 수에서는 화자가 공간 이동을 하여 중국에 가서 반도와 섬을 보면서 ‘눈부처로 다가서는 조선의 치맛자락’에서 ‘그분’과 ‘피뿌리풀’, ‘꿩이 나는 형상’을 동시에 떠올리고 있다. 이어서 넷째 수에 이르러 ‘멸종위기 풀꽃의 노래, 그 손자가 부르는 노래’의 절묘한 대비를 통해 ‘가난한/ 문패를 바칠/ 그런 집을 짓고 싶’은 소박한 소망을 진술한다.
탄탄한 시적 전개와 치밀한 구성이 돋보인다.
결명자빛 바람이 섬돌 밑에 쉬고 있다.
늦은 저녁 밥상 앞에 갈옷 입고 앉은 가을
쏠쏠쏠 햅쌀을 씻던 귀뚜리도 기웃댄다.
뒷마당 풀잎에 연 이슬도 별빛을 품고
또르르 주판알 굴리며 추곡수매 걱정하던
새까만 콩씨 하나가 눈을 깜빡거린다.
밤이 깊을수록 진솔한 소리만 남아
알곡은 귀뚤귀뚤 깊은 곳에 감추는 법
귀 쫑긋 세운 초승달 감잎 사이로 엿본다.
-「창틀에 든 귀뚜라미」전문
서경시의 진수를 본다. 투명한 이미지가 전편을 관주하고 있다. 해맑은 정경들이 눈에, 그리고 마음에 그대로 스미어 든다. 스미어 드는 족족 영혼의 땟국을 씻어내고 있다.
‘섬돌 밑에 쉬고 있는 바람’은 ‘결명자빛’이다. ‘가을’은 갈옷을 입고 늦은 저녁 밥상 앞에 앉아 있다. 그때 ‘쏠쏠쏠 햅쌀을 씻던 뀌뚜리’도 기웃댄다. 평화롭기 그지없다. ‘섬돌’이라는 말 자체가 주는 어감에는 향수가 깃들어 있다. 물론 ‘섬돌’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세대에게는 아주 낯선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평화의 한 상징이라고 불러도 좋을 ‘섬돌’밑에 쉬고 있는 ‘결명자빛 바람’으로 말미암아 평화로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다. 고요를 깨뜨릴 만도 한 귀뚜리 소리가 여기서는 외려 고요와 평화에 기여하고 있다.
둘째 수에서도 그런 안온한 분위기는 계속된다. ‘뒷마당 풀잎에 연 이슬도 별빛을 품고’있다. 썩 새로운 표현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이 시의 분위기를 고양시키는 데 한몫을 한다. ‘눈을 깜빡거’리는 ‘새까만 콩씨 하나’는 ‘또르르 주판알 굴리며 추곡수매 걱정’을 했던 실체다. 적절한 의인화로 콩씨의 존재가 선명하게 클로즈업 되어 눈앞에 떠오르는 것을 느끼게 된다. 단순한 서경시가 아님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셋째 수 초장 ‘밤이 깊을수록 진솔한 소리만 남아’도 울림이 적지 않다. 중장인 ‘알곡은 귀뚤귀뚤 깊은 곳에 감추는 법’이라는 구절도 삶의 의미를 심화시키기에 모자람이 없다.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귀 쫑긋 세운 초승달 감잎 사이로 엿’본다는 자연스러운 결구도 눈길을 끈다.
정경을 노래하되 景 속에 情이 있고, 정 속에 경이 떠오르고 있다. 즉 景中情의 세계가 평화롭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어, 독자의 마음을 순화시킨다. 이 작품이 단순히 이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데 또 다른 미덕이 있다. 즉 둘째 수 중·종장, 셋째 수 중장에서 보듯 삶의 의미를 심화·확대시키고 있는 점이다. 창틀에 든 한 마리의 귀뚜라미가 이렇듯 많은 사연들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며 시인의 예지를 생각한다.
세심한 관찰과 애정 없이 이런 품격 높은 세계가 결코 창출될 수는 없을 것이다.
차라리 체불인생이라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바다 곁에 문을 연 24시 해장국집
설에도 고향에 못간 어선 몇 척 떠돈다.
그런 풍경이듯 또 그렇게 섞여 살면
돈 걱정 여자걱정 펄펄 끓는 뚝배기
욱하면 뱃사람 근성 가시처럼 뱉어낸다.
뭍에 당도하면 오히려 멀미난다.
겨울에도 낙엽 한 장 떨궈내지 못하는
세상은 무슨 연유로 바다처럼 취하는가.
때로는 전봇대가 십자가로 보인다.
외길을 지고 가던 산 하나 가뭇 저물면
저보다 먼저 온 눈발, 빨간 열매 건넨다.
-「호랑가시나무·겨울」전문
「호랑가시나무·겨울」에는 삶의 현장이 진솔하게 드러난다. ‘바다 곁에 문을 연 24시 해장국집’이나 ‘설에도 고향에 못간 어선 몇 척’이 떠도는 것은 어떤 연유로든지 체불인생과 관련이 있다. ‘체불인생’이라는 말에서 쉽사리 풀지 못할 비애를 느낀다. 제때 지불하지 못한다는 것은 간난의 삶이 이어지고 있다는 증좌다. 또한 화자는 ‘그런 풍경이듯 또 그렇게 섞여’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하면서 간단치 않은 사람살이의 단면을 둘째 수에서 그리고 있다. 셋째 수에서는 역설적으로 ‘오히려 멀미’나는 ‘뭍’에서의 삶을 상기시킨다. ‘바다처럼 취하는’ 세상에서 올곧게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느끼게 한다.
‘전봇대’가 ‘십자가’로 보이는 날 ‘외길을 지고 가던 산 하나 가뭇 저물’ 무렵 ‘먼저 온 눈발’이 ‘빨간 열매 건’네고 있다. 고통스러운 삶을 상징하는 한 기표로서 ‘호랑가시나무·겨울’은 존재하지만, 종장 결구에서 보듯 결코 쉬이 허물어질 수 없는 존엄성의 한 상징인 듯한 ‘빨간 열매’에서 희망을 읽는다.
신제주로 이사한 후 습관 하나 늘었다.
집들이 선물로 온 전자동 압력밥솥
내가 친 내 덫에 걸려 새벽마다 놀라다니!
일방적인 약속도 약속은 약속이라고
자정 지나 간신히 그리움도 잠이 들면
깊은 잠, 허를 찔린 듯 자지러지는 방울소리.
단추 하나로 걸리는 오래된 주문처럼
이 겨울 다 가도록 시 한 편 못 썼는데
동안거 깨달음인가, 치카치카 치이익카.
-「압력밭솥 설법」전문
‘압력밥솥’이 ‘설법’을 하고 있다. 재미있는 발상이다. ‘내가 친 내 덫에 걸려 새벽마다 놀라’는 일은 신제주로 이사한 이후 전자동 압력밥솥 덕택에 새로 생긴 습관이다. ‘자정 지나 간신히 그리움도 잠’이 드는 그 시간, 삶에 자극을 가하는 ‘허를 찔린 듯 자지러지는 방울소리’는 단잠을 일거에 깨워 버린다. 스스로 설정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맞닥뜨리게 된 일이다. 겨울이 다 가도록 시 한 편 못쓴 화자에게 깨달음을 던지는 ‘치카치카 치이익카’라는 소리는 어쩌면 득도의 음으로 들릴 만도 하다.
이것은 물론 자연의 소리는 아니다. 기계문명의 산물이다. 예지로 빛나는 시인은 특히 자연의 메시지,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압력밭솥 설법」은 인공적인 것에서도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떠올려 주고 있다.
이렇듯 시인은 자신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향해 부단히 감각의 촉수를 뻗어 의미를 포착한다. 그리고 창조적 형상화에 힘을 기울인다. 이를 두고‘향토적 상상력의 육화와 변용’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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