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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부터 2년간]
| 수도 '테헤란'의 평균고도는 해발 1,600 미터로 여름엔 섭씨 50도 까지 오르내리지만 그늘에만 들어서면 더운줄을 모르며, 겨울에 눈이 내리지만 바로 녹는다. 8월 한낮 기온은 평균 40~50도지만, 멀리 보이는 '데마반드' 산봉우리에는 한 여름인 데도 덮힌 눈으로 허옇다. 평야에는 야채, 과일이 자라 가격이 싸며, 달고 과즙이 풍부해 수출 주종품이다. 20세기초 중동에서 가장 먼저 석유를 채굴해 타국의 추종을 불허 하는 부국으로 떠 오 르면서 "이란"으로 바꾸어 탈 "페르시아"를 표방했다. [황량한 주거지역] 평원은 평균 해발 790m이고, '데마반드'산은 '이란'에서 가장 높으며 중앙부는 거의 사 막지대로 북쪽의 '카스피'해 유역은 우리나라와 가후가 유사하다. [1976년 '테헤란' 국제 박람회장] '테헤란'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두통과 어지러움증의 고산병에 한동안 고생을 한다. '서울' 강남에 '테헤란로'기 있듯이 '테헤란'에도 '서울로'가 있다. '테헤란' 중심부의 자유광장은 각종 대규모행사가 열리며, 전통유물 박물관이 있다. 오래된 카펫트에서 최근에 만들어진 카펫트 까지 '페르시아' 카펫트의 진수를 보려면 반 드시 카펫트박물관을 들러야 하며, 문화재급 카펫의 해외 유출을 막는 정책으로 수공 카 펫은 공항에서 통관이 안된다. '데마반드'산에는 겨울에 내린 눈으로 7, 8월에도 허연 눈이 덥혀 있으며, 여름에 다 녹았 나 싶으면 다시 눈이 덮인다. 눈이 녹아 용수로 공급되고, 비스듬한 시내의 도로 옆 고랑으로 흘러 수목이 자라고, 쓰레 기를 고랑에 버리면 낮은 지대로 떠 내려 간다. [여름인데도 눈 덮힌 '데마반드'산] '테헤란' 북동쪽 약 70km 에 높이 약 5,800m로 주변의 봉우리들에 비해 높으며, '노아'의 방주가 정박했던 곳이라고도 전해 진다. ['테헤란' 국제 박람회장] ['메흐라바드' 공항과 '테헤란' 시내 중간의 '아자디' 타워] [생활] '테헤란'/'샤레자' 거리 부근에 한국인이 큰 주택을 임대하여 하숙을 하는데, 여러명의 한 국인 기숙인들은 휴일에 대개 화투놀이에 여념이 없다. 북부 '쟈파' 전화국 전자교환기 설치공사를 담당, 목, 금요일은 휴무로 '하패츠' 전화국에 근무하는 룸메이트 '정XX'(형)과 현지인 주택의 전기작업 주문이 있으면 같이 하고, '유스 호스텔' 의 전기시설 수리를 맡아 하는게 알려지면서 소규모 전기공사도 많이 하였다. 어느날 갑자기 '정 형'이 심한 열로 출근을 못 하게 되었다. 퇴근후 근처의 약방에 가서 어렵게 의사 소통으로 약을 구입, 여자 약사가 숙소에 까지 와 서 주사도 놓아 주었다. 며칠이 지나도 차도가 없어 병원에 입원, 'Typhoid fever'(열이 많이 나는 두통, 불면증, 식 욕부진 등이 따르며 장티푸스라고도 함)라는 진단이 나오자 동료들의 문병마져 끊기고..... 퇴근하면 병원에 들려 수발을 했었는데, 전염성이 대단한 병으로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여성 약사도 외국인 남자 숙소에 가서 주사 치료를 해 주기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완쾌하자 '정 형'은 '이란'공군으로 직장을 옮기고, 가족(부인과 딸, 아들)을 초청 해 공항근 처에 숙소를 정하면서 같이 하던 '파트타임 전기일'은 혼자 맡게 되었다. '테헤란 교민회'가 오래 되고 허술한 2층 폐교 건물을 임대하여 한국인학교(초등)를 세우는 일에 전기공사를 주말이면 자원봉사로 하였다. '알메니안' 교회를 시간차로 사용하던 '테헤란 한인교회'(서울/연동교회 파송 강동수 목사) 교우, 교민들이 청소와 페인트 칠을 마친 후 전기, 조명공사를 완성하자 마음이 뿌듯했다. '쟈파' 전화국에서 같이 근무하는 현지인 현지인 '목셴'의 친척이라며 소개 해 준 왕궁근처 '이란 다이브' 회사의 수영장 전기 조명공사가 있으면 주말에 파트타임으로 일을 했다. 수영장 조명시설 제어용 부속품을 제공 받아 퇴근 후 숙소에서 시간 나는 대로 컨트롤 박스 를 제작, 회사가 인수하여 공사현장에 설치를 하면 최종 점검은 직접 가서 했다. '테헤란' 북쪽지역은 거의가 왕족 부유층으로 주택에 수영장을 구비하고 있다. [결혼식 연회장] '목셴'의 결혼식 연회장에 이방인으로는 한국인 최초로 새로운 경험을 했다. ['바자르' 전통시장] '지붕 덮인 시장'이란 뜻의 크고 오래 된 시장으로, 상품들이 엄청나다. 섬유제품 상점들을 유치하기 위하여 만들었다는데, 여러 좁은 골목길에 4,500여 개의 상점들 이 있다. 워낙 큰 규모라서 골목을 다니다가 자칫 방향을 잃기 쉽다. 1700년 대화재로 돌과 벽돌로 재건축, 누구나 편안하게 쇼핑 할 수 있도록 입구를 넓게 확장 하여서 옛모습이 많이 변형 되었지만, 그 당시에 있었던 정문들은 그대로 있다고 한다. 중앙통로에 1천 개가 넘는 보석상점들 있다. 전 국민의 98%가 이슬람 교도로, 반 정도 여성들이 히잡으로 신체 노출을 최소화하면서도 장 신구는 애용한다. 다음으로 많이 보이는 품목은 카펫, 향신료, 수제 카펫 그리고 의류다. 하루 평균 30만 명의 관광객들과 주민들이 방문 해 시끌벅적하게 붐비는 시장인데도 수 많은 에어컨과 통풍 시스템 때문인지 공기는 쾌적한 편이다. ['바자르' 전통시장의 군중] 밀집한 보석상가들이 세계의 절반 쯤이나 되는 귀금속들을 보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현지인 '악기바르']
[사회]
'팔레비' 왕조의 몰락 후, 전통과 현대의 갈등은 엄존하고, 시내는 현대식 건물들이 즐비한 북쪽
신도시와 전통가옥, 빈민 골목들의 남쪽 구도시로 나뉜다.
'미국' 원조하에 '백색혁명'이 도로, 철도, 항공망 확장, 댐 건설, 수로사업, 질병의 근절, 산업성
장의 장려 및 지원, 토지개혁 등을 추진하였다.
시내 곳곳에는 '미국'문화가 범람하고, 건설경기와 사회 간접투자는 물론, 석유자본으로 다이어
몬드와 황금의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겨울 기온이 섭씨 5도만 되어도 여성들은 밍크코트나 가죽 의상으로 몸을 휘 감고, 부호들은 부
인을 보통 두 세명씩은 거느리고 산다.
장가 한 번 못가는 젊은이가 허다 해, '테헤란' 남쪽 지역엔 '시메츄리'라는 공창이 있어, 휴일에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골목에서 줄을 서서 기다린다고 한다.
[물 담배]
숯의 연기를 이용 해 민트향이나 다른 향을 섞어 물로 거품을 내서 중독성도 없고 유해 하지도
않은 아주 바람직 한 흡연(?)...........
야간에는 한적한 도로에서 자동차 애정행각이 일상이라는데, 확인 한 바 없다.
현지인들은 남자 끼리 같은 침대에서 자는 일이 없는 이유를 대충 짐작이 간다.
노숙자가 많은데, 기후 좋고 먹거리 싸고,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관대하게 적선한다.
대중교통은 2층 버스와 택시, 콜택시가 있는데, 승용차는 벤츠자동차로 웬만 한 가정에서 자가
용으로 보편화 되었다.
골목에 빵 굽는 집이 있어 아침이면 줄을 서서 구운 '바르바리'(넙적한 빵)과 '마스'(요구르트와
비슷)를 사다가 온 가족이 둘러 앉아 반드시 오른손으로만 먹는다.
[빵 굽는 집]
엘리베이터는 남자와 여자용이 따로 있고, 에어콘은 최신 건축물에서나 볼 수 있으며 일반적으
로 가정은 송풍기를 이용 한 수냉식이며, 겨울에는 집집 마다 석유로 난방을 해결, 가스는 취사
용으로만 사용한다.
채소와 과일의 판매 단위는 키로그람을 원칙으로, 먹거리를 속이는 일은 철저하게 금지되고, 돼
지고기는 먹지도 않는다.
현지인들은 전혀 안 먹는 소 뼈다귀를 한국인들이 사 가는 바람에 가격이 싸지는 않지만, 뼈다
귀 국물, 코카콜라, 바나나와 석류는 원 없이 먹었다.
'팔레비'는 부왕 '레자 샤 팔레비'의 황태자로 스위스에서 교육을 받은 뒤 1935년 이란으로 돌아
왔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과 소련은 이란이 독일과 연합할 것을 우려하여 1941년 9월 '팔레
비'는 부왕을 대신하여 즉위하였다.
'미국' 원조의 '백색혁명'으로 도로, 철도, 항공망의 확장, 댐 건설, 관개수로사업, 질병의 근절대
책, 산업성장의 장려 및 지원, 토지개혁 등을 추진하였다.
1970년대 후반 부터 독재정치, 정부의 부패, 석유자본의 불공정 분배 및 비밀경찰의 활동에 대
한 정치적 비판세력과 서구화가 이슬람 종교에 배치된다고 주장하는 종교적인 비판세력이 일어
나 망명하게 된다.
시내 곳곳에는 서구화의 물결로 '미국'문화가 범람하고, 건설경기와 사회 간접투자는 물론, 석유
자본으로 다이어몬드와 황금의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바자마켓"에 밀집한 보석상가는 세계의 절반쯤이나 되는 귀금속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겨울 기온이 섭씨 5도 정도만 되어도 여성들은 밍크코트나 가죽의상으로 휘감기며, 부호들은 부
인을 보통 두세명씩은 거느리고 살던 시절이었는데.....
평생 장가 한번 못가는 젊은이가 허다해, 테헤란 남쪽 지역엔 "시메츄리"라는 공창이 버젓이 존
재, 거기엘 한국인들은 관광코스로 휴일이면 구경하기도 하였다.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골목에서 줄을 서 기다린다고 하니 과연 그 상황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한적한 도로에서의 야간에 자동차 애정행각(CAR-SEX)이 공공연히 화두에 오르기도 하였다.
남자끼리 같은 침대에서 잔다는 것이 현지인들에게는 납득이 안간다.
이유를 잘 알 수 없는데, 대충 짐작으로 이해가 된다.
기후가 생활하기에 적당해 노숙자가 제법 많았다.
우리나라에 아이엠 에프 이후 같은 현상이었으나 상황은 이란 사람들이 훨씬 좋은 편이었다.
기후 좋고, 먹거리가 싸고,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적선하는 습관 등 으로.....
대중교통으로 2층버스와 택시, 콜택시가 있는데, 모두 "벤츠" 자동차로 웬만한 가정에서 자
가용으로 벤츠가 대중화가 보편화 되었다.
마을 골목마다 빵 굽는 집이 있어 매일 아침 줄을 서 아침에 구운 빵(걸레빵이라 일컬었음)과
마스(요구르트와 같은 것)를 사다가 온 가족이 둘러 앉아 반드시 오른손으로만 먹는다.
에어콘이라고는 최신건축물에서나 만날 수 있고, 거의가 송풍기를 이용해 수냉식냉방을 하며
겨울철이면 집집마다 석유난로가 난방을 해결하고, 가스는 취사용으로만 사용되었다.
채소나 과일 등의 판매단위는 키로그람을 원칙으로 먹거리를 속이는 일은 철저하게 금지되고,
돼지고기는 있지도 않고, 현지인들은 전혀 손도 안 대는 소 뼈다귀를 한국인들이 사 가는 바람
에 가격이 오름세를 탔다.
그 당시 뼈다귀 국물, 코카콜라, 바나나와 석류도 원 없이 먹었다.
무덥기 그지 없는데, 멀리 높은 산의 정상 부분에 허연 테두리를 보고 그게 눈덮인 '데마반드'산
정상이라는 걸 알게 됐다.
'데마반드산은 '테헤란'에서 북동쪽으로 약 70여km 에 있다.
해발 고도 약 5,800m로 주변의 봉우리들에 비해 2,000m 가량 솟아 눈으로 덮인 가파른 화구
는 용암류와 화산회로 이루어져 퇴적물이 쌓인 소규모 분화구가 있어, 노아의 방주가 정박했던
곳으로 도 전해내려 오며 그 밖에 몇몇 페르시아 전설에도 언급되고 있다.
여름내 녹아내려 허연부분이 없어질 때 쯤은 12월이고, 그러면 다시 눈이 내려 다시 허연 봉우
리가 된다.
녹아내린 물은 비스듬한 지형(남북 5~10도 경사)의 '테헤란' 시내 도로옆 수로를 통과해 흐르며
인근 주민들이 생활쓰레기를 물이 흐를때 도랑에 버리면 떠 내려 가는데, 청소원이 양편에 있는
수로에 짝 홀수일로 번갈아 물길을 돌려 놓는다.
북쪽은 잘사는 사람들이 살지만 남쪽으로 갈 수록 서민촌이다.
'데마반드'산과 주위의 높은 봉우리에는 겨우내 눈이 쌓이고, 녹아내려 상수도원인 물은 석회석
이 많아 반드시 끓여 '차'를 자주 마시는데, 상류층에서는 '고히"라고 하는 커피를 주로 마신다.
물을 끓이면 주전자 바닥과 옆 면에 허연 석회석이 얇게 붙는걸 직접 눈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그래서 예로 부터 중동 지역이 차 문화가 발달하게 된 것이다.
물을 마음대로 마시기 어려우니 자연적으로 음료수(주로 코카콜라)가 단연 인기 최고다.
식당이고 어디서고 시원한 콜라는 물 대신이다.
해가 진 이후에나 판매가 가능한 술(주로 보드카와 양주)은 저녁 식사 후 거리의 술집에서 돈만
있으면 넉넉하게 마실 수 있다.
주점에 친구들과 간 적이 있는데 주인 여인의 체구가 아마 200키로그램은 족히 될성 싶었다.
세상에 그렇게 뚱뚱한 여인을 내 30대 나이에 본 적이 없었으니....
[뚱뚱한 주점 여인]
'테헤란'의 낮시간 평균기온은 섭씨 50도를 상회하여 파리가 밖에서 견디지 못하고 시원한
실내로 끈질기게 들어온다.
'페르시아'지역은 커피를 가장 먼저 마신 지역 중의 하나이다.
15세기 부터 커피를 마셨다는데, '사파비' 왕조가 지배하고 있을 무렵, 주요 도시에는 일찍
부터 넓고 화려한 커피하우스가 여럿 있었다.
'페르시아'의 커피하우스에서는 '아라비아'와 달리 정치적 토론이나 이로 인한 유감스런 사
건들은 드물었다.
'페르시아'의 손님들은 보다 세속적인 쾌락을 추구했던지, 대화, 음악, 춤 그리고 '이러한 종
류에 속하는' 그러나 보다 문란한 '다른 일들'로 유명했다.
정부는 "커피하우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자주 단속했는데, 난잡한 일들은 샤(왕)의 왕비
덕분에 진정됐다.
왕비는 이슬람 교리학자('뮬라')를 커피하우스에 매일 방문하도록 해 손님들과 시, 역사, 법
에 대해 교양있는 대화를 나누게 했다.
학자는 정치적 토론에 빠지지 않도록 재치 있는 화술과 재미있는 이야기로 손님들의 대화를
유도했고, '뮬라'가 있는 커피하우스에는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이를 본 다른 커피하우스들 또한 경쟁적으로 이야기꾼을 고용했다.
이야기꾼들은 커피하우스 중앙에 마련된 높은 의자에 앉아 타고난 입담과 제스처를 동원해
손님들의 넋을 빼놓았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