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어른의 유택은 어디에?
정동식
장인어른께서 돌아가신 지 벌써 삼십 년이 넘었다.
지금은 햇볕이 잘 드는 고향의 학계리 언덕에 잠들어 계신다. 아내와 나는 작년부터 유해의 국립묘지 이장을 추진하고 있다. 이 일은 그러께 뇌경색과 치매가 함께 찾아온 장모님의 미래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런데 이장을 추진하려고 보니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고인의 참전유공자 등록이었다.
지난해 초 아무런 자료가 없는 상태에서 국방부, 보훈처, 병무청 등 여러 기관으로 문의를 했다. 가족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필요한 관련 서류를 갖춰 신청하였더니 드디어 경북남부보훈지청으로부터 참전유공자 결정통보를 받았다. 아카시아 꽃향기가 꿀벌을 유혹하던 작년 5월 초순이었다.
접수한 공문을 들여다보니 ‘참전유공자 확인서와 국립묘지 안장(이장) 신청 안내문’이 동봉되어 있었다.
고인의 명예를 찾아 드려 너무 좋았다. 그간 잘해 드리지 못했던 사위의 도리를 조금이라도 한 것 같아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문득 어르신과 함께한 예전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아내와 사랑을 나누던 80년대 초였다.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리고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배우같이 잘생긴 분에게 첫인사를 드렸었다. 장인어른은 결혼 후에도 맏사위인 나를 끔찍이 챙겨주셨다.
언젠가 첫 휴가를 갔을 때 시골 한약방에 들러 보약 한 재를 지어 주시지 않는가? 부모님께 받아보지 못한 보약을 아내의 친정아버지께서 손수 지어 주시다니! 감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젊은 놈이, 아프지도 않으면서 한약을 먹는다는 게 용납이 되지 않아 한사코 손사래를 쳤지만 ‘나랏일을 하려면 건강해야지.’하면서 기어코 내 손아귀에 넣어 주셨다.
그때 막내처남이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다. 자식 9남매를 키우기도 빠듯했을 텐데 엄청나게 큰 맘을 잡수셨던 모양이다. 장인어른의 이런 사랑에 비해 정작 나는 제대로 해드린 기억이 없다. 어르신이 위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던 그 당시, 나는 초임에 적응하느라 바빴고 아내는 두 아들(1세, 3세) 육아에 정신없었다. 팍팍한 서울살이에 오직 안타까운 마음밖에 없었던 그때를 생각하니 눈시울이 적셔진다.
세월이 흐른 지금, 나도 무언가 해드리고 싶었다. 선친과 어머니를 영천호국원에 모신 것처럼, 장인어른의 명예를 되찾아 처가의 부모님도 그렇게 해드리고 싶어 이 절차를 밟고 있는 것이다.
고인의 유해를 국립호국원으로 이장하기 위한 일은 가족 간 합의가 중요했다. 저마다 생각이 달랐으나 그동안 분분했던 이견이 점차 좁혀져 일단 이장신청을 해보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래서 올 2월 초순, 어느 호국원에 ‘참전유공자 국립묘지 이장신청’을 했는데 오늘 스마트폰 메시지로 답변이 왔다.
아내와 나는 연지곤지처럼 산당화가 만발한 두류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조심스레 내용을 펼쳐보았다. ‘축하합니다. 귀하께서 신청하신 이장신청이 결정되었습니다. 유족께서는 절차에 따라 진행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글귀를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답변은 아니었다.
손에 든 커피에서 아무런 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장신청에 결격사유가 확인되어 국립묘지 안장대상심의위원회에 상정 예정이며, 유공자의 사회적 공헌이나 결격사유에 대한 이유 소명 등이 있으면, 탄원형식으로 작성하여 제출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다음은 아내와 처남의 진술을 바탕으로 작성한 탄원서 초안이다.
탄 원 서
저는 참전유공자 김 OO의 안장(이장) 신청을 한 사위 정동식입니다.
귀원의 문자메시지를 잘 받았습니다. 병적서상 ‘행방불명’이라는 결격사유에 해당되어 『국립묘지 안장대상심의위원회 상정 예정』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국립묘지에는 안장될 분이 안장되어야 하는 점에 충분히 공감합니다.
하지만 가족으로서 몇 가지 사항을 탄원드리고자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2017년 6월 30일 대한민국 경찰공무원으로 정년 퇴임하였습니다.
퇴임 당시 직급은 총경이며, 2015년 녹조근정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80년대 말 초급간부로 임관함과 동시에 B.H 근무를 명 받았습니다. 발령을 받기까지 까다로운 절차를 거쳤습니다. 당시 저의 친족은 물론 처가의 가까운 친척까지 신원조회를 엄격히 하여 근무지를 배치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나중에 들은 얘기로, 처가는 처고모 댁까지 방문을 갔었고, 저의 본가에 관해서는 아버님과 어머니의 부부 사이가 어느 정도인지까지 살펴본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만큼 엄격하게 사실관계를 알아봤을 거라는 말입니다. 만일 병적 증명서에 나타난 대로 고인께서 혹여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면 저의 B.H 근무는 아마 불가능했다고 봅니다.
제 아내와 처남이 선친께 들은 바에 의하면 전쟁이 일어난 해, 가을에 입대하여 고향 인근 형산강 전투에 투입되어 격렬한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고, 그 후 북진하여 중강진까지 진격하였으나 중공군 개입으로 고전을 겪으며, 이름 모를 산속에서 적에게 포위되었다고 합니다. 점점 포위망이 좁혀오자 각자 흩어져 깊은 도랑을 찾아 낙엽 속에 은신하였는데 적들이 수색 중 아군을 찾지 못하자 화공작전을 감행하였습니다.
다행히 죽기 일보 직전, 겨울철 세찬 바람의 영향으로 불붙은 낙엽이 날아가 버리는 바람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으며, 적군이 물러난 후 정신을 차려보니 살아남은 전우가 몇 명 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전역 과정에 대하여는 구체적으로 들은 바 없지만, 옛날 장롱 서랍에 보관하던 녹슨 군번, 계급장(갈매기 3개, Sergeant=병장) 등으로 판단해 보면 정상적인 군필자로 보이고 제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본적지에서 저희 모친과 혼인하였고, 홀로 된 조모(유공자의 어머니)를 모시고 평생을 농업에 종사하신 효자였습니다.
그러다가 1991년 8월에 65세를 일기로 고향에서 세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또한 처남이 할머니께 들은 바에 의하면 전란 후, 장기면 동학산에서 이적행위자와 북에 협조한 자, 사상 의심자 등 수많은 민간인을 처형할 때도 네 아버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하셨답니다.
끝으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죽음을 넘나들며 수많은 전투를 감당해 내신 유공자께서 부대를 이탈할 아무런 이유가 없고, 살아서 고향에 돌아왔으니 실종이나 행방불명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병적증명서의 기록은 오기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중공군이 기습을 감행한 1950년 11월부터 눈물을 머금고 서울을 두 번째 적군에게 내주던 1951년 1월 4일까지 그 혹독한 겨울을 어디서 어떻게 버텼는지 저희는 감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유공자께서는 6.25 참전 기간을 제외하고, 태를 가른 학계리를 떠나 어디에도 사신 적이 없습니다.
평생을 고향에서 논밭을 일구며 9남매를 키워낸 대한민국의 위대한 호국영령이십니다.
저의 인생 경험상 죄지은 사람은 절대로 고향에 돌아와 살지 않습니다.
5년 이상 군에서 복무했고, 경찰공무원으로서 30년 이상 복무한 사람으로서 터득한 확고한 소신입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나라와 겨레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국립묘지의 존엄성은 엄격히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소명자료를 참고하여 심사위원님들께서 참전유공자 가족들의 뜻을 깊이 혜량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2023.4.06. 참전유공자의 가족 대표, 신청인 사위 정 동 식
첫댓글 저의 아버님도 참전용사로 만기전역하셨습니다. 전장 체험담을 수시로 하셨습니다. 저의 수필 "불멸의 영웅"에 조금 담았습니다. 자녀가 들은 이야기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생각됩니다. 93세 이신 아버님은 화장을 꺼려 선산에 모셔야 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