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최주식<2023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감상 홍정식)
부산데파트 앞 버스정류소는 7번 국도의 시작 또는 종점 우리집은 종점이었어 산7번지 처음 보는 마이크로버스가 똑같이 생긴 집에서 똑같이 생긴 아이들을 실어 날랐어 똑같은 책가방을 메고 똑같은 학교에서 똑같이 생기지 않은 한 여자아이를 좋아하던 어느 날 내가 전학 온 것처럼 그 아이도 전학을 가버리고 나는 인생이 무언가 오면 가는 것이라고 비정한 것이라고 잡을 수 없는 것이라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하루는 종점에서 시작되었어 아침이면 늘 신발이 젖었어 밤새 파도가 다녀간 거야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온다고 그래서 종점에 내려 처음에 이상했던 일이 계속 일어나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아 아무도 도망치지 못한 하루가 말라비틀어진 화분 사이로 걸어가면 아저씨 제발 화분에 물 좀 주세요 글쎄 파도가 화분만 적시지 않는구나 공허한 대답처럼 버스가 다시 오면 젖었다 마른 행주처럼 종점에서 시작되는 아침 젖은 신발을 신고 다니면 세상이 질척거려 자꾸 달아나고만 싶어 7번 국도를 달리면 바다를 볼 수 있을거야 파도를 만나면 내 젖은 신발을 두고 올거야 다시는 젖은 신발을 신지 않을 것이라고 똑같이 생기지 않은 여자아이를 닮은 다 큰 여자가 국수를 마는 집을 나선 날 종점에 버스는 한 대도 없었어
부산데파트 앞 버스정류소는 7번 국도의 시작 또는 종점 우리집은 종점이었어 산7번지 처음 보는 마이크로버스가 똑같이 생긴 집에서 똑같이 생긴 아이들을 실어 날랐어
디파트먼트 스토어(department store)가 백화점입니다. 데파트는 일본식 표기입니다. 이런 것이 시의 묘미죠. 시작이나 종점이나 같은 말이군요. 어디나 종점은 끝이죠. 시작이기도 하지만 종점(終點)은 끝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이해하는 게 보편적이 아닐까요? 시인의 집은 종점에 있으니 아마 부산의 어느 가장 후미진 곳이라 여겨집니다. 거긴 큰 버스도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군요. 작은 마을버스가 다니는 곳입니다. 똑같이 생긴 집이라고 하니 70년대 말 새마을 운동으로 생긴 새 동네군요. 그런 동네도 지금은 허물어져가는 작은 집일뿐이죠. 빈곤하다는 표현이 길어졌습니다.
똑같은 책가방을 메고 똑같은 학교에서 똑같이 생기지 않은 한 여자아이를 좋아하던 어느 날 내가 전학 온 것처럼 그 아이도 전학을 가버리고 나는 인생이 무언가 오면 가는 것이라고 비정한 것이라고 잡을 수 없는 것이라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하루는 종점에서 시작되었어
첫사랑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군요.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시인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좋은 것들은 다 떠나는군요. 비정하게 말이죠. 그런 모든 일들이 종점에서 시작되었다고 자책합니다. 종점이 아니었다면 달라졌을 텐데 말이죠.
아침이면 늘 신발이 젖었어 밤새 파도가 다녀간 거야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온다고 그래서 종점에 내려 처음에 이상했던 일이 계속 일어나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아
힘든 생활입니다. 안 좋은 일들만 계속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타납니다.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오는군요. 처음엔 희망이 있었지만 가난이 지속되다 보면 그냥 안주하게 됩니다. 연이어 나쁜 일이 일어나도 당연하게 여기고 의심도 하지 않죠.
아무도 도망치지 못한 하루가 말라비틀어진 화분 사이로 걸어가면 아저씨 제발 화분에 물 좀 주세요 글쎄 파도가 화분만 적시지 않는구나 공허한 대답처럼 버스가 다시 오면 젖었다 마른 행주처럼 종점에서 시작되는 아침 젖은 신발을 신고 다니면 세상이 질척거려 자꾸 달아나고만 싶어 7번 국도를 달리면 바다를 볼 수 있을거야
종점에 사는 사람들은 그 생활을 벗어나고 싶지만 아무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말라 비틀어진 화분이란 힘든 생활을 이야기하는 것이겠죠. 화분에 물을 주라고 하지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버스가 7번 국도에 오면 다시 파도에 젖고 바짝 마른 행주처럼, 지독한 가난이 다시 시작되고, 파도에 젖은 신발은 질척거립니다. 그렇죠, 종점의 끝에는 바다가 있습니다. 바다는 희망일까요? 절망일까요?
파도를 만나면 내 젖은 신발을 두고 올거야 다시는 젖은 신발을 신지 않을 것이라고 똑같이 생기지 않은 여자아이를 닮은 다 큰 여자가 국수를 마는 집을 나선 날 종점에 버스는 한 대도 없었어
가난에서 벗어나리라 마음을 먹습니다. 이제 더는 젖은 신발을 신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똑같이 생기지 않은 여자아이를 닮은 다 큰 여자'는 어머니를 가리키는 것이겠죠. 드디어 가출을 감행하는군요. 가난을 탈출하기 위해 마음을 먹었습니다. '종점에 버스는 한 대도 없었어'라는 말은 우리에게 큰 여운을 가져다줍니다. 과연 버스가 없었을까요? 버스가 없었다면 걸어서라도, 아니 지나가는 차를 세워서라도 종점을 떠났을까요?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을까요?
가난한 동네에 태어난 한 소년이 보입니다. 첫사랑을 떠나보내고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청춘도 보입니다. 과연 파도는 소년과 청년을 놓아주었을까요? 서사적이기도 하고 서정적이기도 한 시입니다. 시인의 연륜과 경험이 몸서리치게 느껴지는 시입니다. 일요일 저녁입니다. 내일부터 또 치열한 생활과 마주해야 합니다. 조금 마음이 무겁기도 합니다만 이런 시가 희망을 준다면 좋겠습니다.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