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병아리 한 마리가
딱,
반 되짜리 주전자 뚜껑만한 고것이
겁없이 봄강을 끌고 가네
꼬리물살이
풍경화 속 원근법 같기도 하고
후라쉬 비추고 가는 외로운 밤길 같기도 한데
고 뚜껑이 잠시 물속으로 잠수라도 해버리면
강은
덩치 큰 아이처럼 철없이 길을 쏟아버리고 마는데
반 되가
턱없이 말술이 되기도 한다는 걸,
오래된 풍경화 속 원, 근, 어디쯤에
후라쉬 불빛 가까이 들이대고 보면 거기
쭈그러진 아버지 반되짜리 주전자
꽥꽥 혼자서 울고 있다네
술 받으러 가는 아이처럼 물병아리
달그락 달그락
추억 쪽으로 너무 멀리 가지 말거라
봄은 겉 늙어버린 덩치만 큰 아이 같으니
절망에게
충견처럼
부르면 언제나 달려오는,
부르지 않아도 늘 가까이 어슬렁거리며
든든하고 윤기 흐르는 등짝을 내 앞에 들이미는,
너 없이는 잠시도 숨을 쉴 수가 없다
어쩌다 희망 쪽으로 베개를 돌린 날
그런 날는 영락없이 악몽을 꾼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선대 조상까지
그쪽은 아니라고
길을 잘못 들었다고 몸소 방향을 잡아 주신다
너의 검고 빛나는 털을 쓸어내리면 너는
뜨겁고 붉은 혀로 내 뺨에 흐르는 눈물을 핥는다
우리의 동거를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였지만
사랑은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언제나 손해다
언제부터인가 너는 점점 살이 오르고 나는 야위어간다
네가 불러주기를,
행여 버림 받을 까 네 주변을 킁킁거리며
어슬렁거리며
네게 사랑받기 위해 네 발등을 핥는다
주인 없는 개는 죽어서도 구천을 떠돈다고
절정을 복사하다
예술의 전당에서 이만원 주고
클림트의 키스 복사본을 사왔다
트윈 침대 만한 북쪽 한 벽에
햇솜 같은 할로겐 불빛을 짙게 깔고
그들을 눕혔다 이건 아니다
너무 진부했다
매양 여자가 아래로 깔리는 체위
뒤집어 여자를 위로 올렸다
마침 티브이에서 못 생긴 여자가
여성 상위에 대해 침을 튀기고 있다
못생길 수록 위로 올라가고 싶어한다
이 시간부터 그렇게들 생각한다면
고즈늑이 남자의 입술을 먹고 있는
이 여자는 너무 아름답다
다시 일으켜 세웠다
불빛이 주르르 발 아래로 흘러내린다
나는 체위에 관해서는
그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이 입맞춤이 끝나고 그들은 눕던가
헤어져 돌아가던가 할 것이다
한국 영화처럼
끝까지 다 말해 버리지 말자 하지만
이 숨막히는 정적
한순간만은 다시 복사해
내 가장 숨막히는 시간 속에
걸어두고 싶다
아픈 보라로 피다
두통을 꽃핀처럼 머리에 꽂고
308동 앞을 지나가는데
누가 곁눈으로 훔쳐보는 듯
오른쪽 뺨 언저리가 따끔거린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내가
오른쪽 뺨 언저리 너머를
곁눈으로 이미 다 훔쳤기 때문이다
내 두통과 같은 계절에 피는 자목련 한 그루
이마에 서리꽃이 박힌 청교도의 푸른 피와
청녀의 붉은 피가 만나
저렇듯 보라로 피었는지
내 살 속에서 숨죽여 우는
꽃의 울음소리를 들은 이후 나는
다만 저 꽃을 곁눈으로 훔칠 따름이다
곁눈만 주고받으며 몇 生을 함께 걸어온 듯
통증으로만 교신하는 이런,
업을 끊어내듯 저 나무의 밑동을
톱으로 잘라내는 꿈을 꾼 적도 있었지만
내 두통과 저 꽃의 발화점은
한 컬레 구두처럼 언제나 나란하다
먼 길을 열듯 단정하게 가르마를 긋고
잘 핀 두통으로 치장하고
안 보는 척 저 꽃나무를
스쳐 지나기만 하면 그만이다
올해도 봄은 무사할 것이다
붕어빵을 굽는 동네
달아오른 철판 위에서 붕어들이
몸부림칠 때쯤 귀가길의 남편들
산란의 따끈한 꿈을 한 봉투
가슴에 품어 안는다
아파트 창의 충혈된 불빛이
물풀로 일렁이고
아내들의 둥근 어항 속으로 세차게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밤의 한가운데를 직진하는 숨소리
파도소리, 비명소리, 도시는,
한여름 서해바다처럼 질척거린다
한바탕 아내들의 뜨거운 빵틀 속에서
남편들은 모두
잘 익은 붕어가 되어 또 한 번
꿈결로 숨결로 돌아눕고
붕어빵 같은 아이들의 따스한 숨소리가
높다랗게 벽지 위에 걸린다
기념사진처럼
귀여리 마을을 지나다
바닥에 한 쪽 귀를 납작 붙여야 잠드는 버릇이 있다
먼 행성 어느 잠 없는 이 내려다보면
지구의 비밀을 훔치는 호기심 많은 아이 같을까
그러나 나는 밤마다 듣는다
지구의 저편에서 이쪽을 엿듣는 또 다른 기척
잠 못 드는 어느 누구
한 쪽 귀를 납작 붙이고
풋감 속에 가부좌 튼 아기 부처처럼
내 귀와 짝을 맞추는 여린 귀
은밀한 소리는 직진하지 않아
그가 엿들은 내 어둠의 누수가
내가 들킨 눈물의 굽은 등이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내게 당도할 때쯤
나는 이미 잠이 들었고
내가 엿들은 그의 기척이 또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잠든 그에게로 달려가고
한 쪽 귀로 밤마다 지구를 몽유하던 민족들이
수천 년 전 이 마을에 살았을지 몰라
한 쪽 귀로만 잠자던 그 아이가 지금
홀린 듯 이 마을을 지나고 있는지
한 사람도 아는 이 없는,
그러나 자주자주 피가 당기듯 귀가 당기는 마을
자비출판
어떤 시인은
창작 지원금이라는 불룩한 이름으로 시집을 내고
시집을 냈다 하면 매번
기름진 상금의 과녁을 명중시키는
명사수 같은 시인도 많은데
시가 두엄두엄 쌓이면
나는 또 한 번 내 시에게 미안해진다
등록금 없이 등 떠밀어 학교 보내는
무능한 가장처럼
부실한 혼수에 얹어 시집보낸
좌불안석 딸 둔 에미처럼
짝 없이 늙어가는 저것들을 또 어찌해야 하나
세상의 자비는 늘 내게서 너무 멀리 있으니
내 피와 살을 먹여 키운
둥기둥기 어여쁜 내 새끼들 살가운 문둥이들
후한 인세라는 꽃가마로 모셔갈, 그런
대자대비 출판사는 진정 없는 것일까
두엄더미위에 노란 민들레꽃 한 송이
철없이 방긋 웃는, 지금은 다시 詩같은 봄
첫댓글 두엄더미 위에 노란 민들레꽃 한 송이 ㅡ 어느 화가의 해바라기 그림도 살아있을 때는 한 점도 팔리지 않았지요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