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경북7기 문화관광해설사 원문보기 글쓴이: 청량산맥(方有秀)
1. 영남 사족과 태백산 인물 벨트
태백산은 신령스럽고 영적 기운이 감돈다.
이 태백산의 정기(精氣)를 바로 가장 많이 받고 있는 곳이
경북 봉화군 춘양(春陽)이다. 춘양면 애당2리 석문동은 정감록에서 말하는
전국 10승지(勝地) 중의 한 곳이다. 석문동은 태백산(太白山)에 이르는
등산로가 있으며 태고(太古) 이래 내륙지방에서 태백산 천제단을 오르던 길이다.
이곳은 수목이 울창하며 경관이 아주 좋다.[봉화군지]
태백산 정기가 춘양(春陽)으로부터 발원하여 법전(法田)을 거쳐
유곡(酉谷;닭실)을 지나 해저(海底)에 이른다.
이들 지역[春陽, 法田, 酉谷, 海底]의 명칭에서 한자 씩 따서
이 지역을 “태백산 춘전유해(春田酉海) 벨트”라 일컬을만하다.
진성이씨 나은[이동표] 후손 세거지 녹동은 춘양과 법전에 걸쳐 있으며
전주이씨 추만[이영기] 후손의 세거지 풍정도 법전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창녕성씨 계서[성이성]후손 세거지 가두들은 법전과 닭실에 걸쳐 있으며
우계이씨 도촌[이수형] 후손 세거지 사제는 해저와 이웃하고 있다.
봉화 사족(士族)의 집성촌은 모두 이 “태백산 춘전유해(春田酉海) 벨트”에
포진되어 있다.
이 벨트의 기운이 남하(南下)하여 영주, 예천을 거쳐
예안의 도산에 이르고 도산에서 용솟음친 기운이 안동의 하회와 천전을 거쳐
상주 선산 성주 경주의 양동 나아가 밀양 함양 김해 등지에 이른다.
낙동강 7백리 물길을 따라 하나의 띠를 이루고 있는 이 지역을
“태백산 인물 벨트”라 이를만하다.
봉화정씨 삼봉[정도전] 가문이 태백산 인물 벨트의 발원지 봉화에서
8도 강산을 향해 기염을 토했으나 시기가 맞지 않아 이방원에 의해
좌절당하고 말았다. 그 뒤 태백산 인물 벨트의 아래 지역, 선산을 비롯한
밀양 함양 김해 등지의 선산김씨 점필재[김종직] 가문,
서흥김씨 한훤당[김굉필] 가문, 김해김씨 탁영[김일손] 가문 등의
기세(氣勢)가 치성(熾盛)했다. 이들 가문 역시 불행스럽게도 정치적으로
참혹한 화를 입고 그 기운이 저상(沮喪) 당했다.
조선조 초기 “태백산 인물 벨트”는 불운(不運)과 화란(禍亂)의 연속이었다.
조선조 중기에 접어들어 진성이씨 퇴계[이황] 가문, 의성김씨 청계[김진] 가문,
풍산류씨 겸암[류운룡] 서애[류성룡] 형제 가문,
전주류씨 기봉[류복기] 가문 등이 추로(鄒魯)의 향(鄕)이라고 일컬어지는
안동에서 영남 문벌의 황금기를 열었다. 그리고 안동 아랫녘에서
여주이씨 회재[이언적] 가문, 인동장씨 여헌[장현광]가문 등이
성대하게 일어났으며 안동 윗녘인 봉화 지역에서도 안동권씨 충재[권벌] 가문,
봉화 법전 춘양 진주강씨 가문, 해저 의성김씨 가문 등이 일어나
400-500년간 영남의 문운(文運)이 승승장구 하였으며
태백산 인물벨트의 저력이 유감없이 발휘 되었다.
2. 봉화지역 士族 개관
봉화정씨와 봉화금씨
봉화 사족은 “태백산 인물 벨트”의 최선봉에 있었다.
여말(麗末), 선초(鮮初)에 봉화정씨 삼봉[정도전] 가문이
태백산하 영남 최북단에서 처음으로 문호를 열었는데
이것을 조선조 봉화 사족의 효시(嚆矢)로 보는 것이 무난할 듯하다.
봉화 정씨 시조 호부령공[정공미]은 고려 때 직제 개편으로
봉화현의 호장(戶長)이 되었다. 4세손[정운경]에 이르러
봉화를 관향(貫鄕)으로 하고 영천에 세거(世居)하다가
차차 경기 등지로 산거하였다. 봉화사족의 횃불을 높이 든 인물이
삼봉[정도전]이다. 삼봉[정도전]은 유학의 대가로
조선을 개국 할 때 군사 , 외교, 행정, 성리학 등 여러 방면에서
조선조 건국의 로드 맵을 작성하였다. 봉화정씨에 삼봉[정도전]과 같은 인물이
배출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태백산은 금수강산의 대종(大宗)이요,
봉화는 태백산 인물 벨트의 옥천(玉泉)이기 때문이다.
옥천이란 인물밭의 샘이라는 뜻이다. 봉화의 춘양과 물야, 봉성 3면에 걸쳐 있는
문수산은 풍수지리지에 의하면 누대에 고관대작(高官大爵)을
배출한다고 했으며, 노승(老僧)성불(成佛)의 명산이라 했다.
삼봉이 태백산 봉화의 원기를 받았기 때문에 조선조 건국의 밑그림을 힘차게
그린 것이다.
봉화정씨 이후 여러 성씨들이 봉화 지역에 대소 촌락(村落)을
이루고 살기는 하였으나 집성촌을 이루어 사족(士族)으로 행세하기 시작한
성씨는 아마도 조선조 초기 봉화금씨일 것으로 사료(思料)된다.
봉화금씨는 조선조 전기에 영남에서 명성을 날렸다.
조선후기 진성이씨 퇴계[이황]가문, 의성김씨 청계[김진] 가문,
풍산류씨 겸암[류운룡] 서애[류성룔] 형제 가문들이 영남에서
성대해지기 전에 이미 봉화금씨는 명성을 날렸다. 봉화금씨 시조는 금의이다.
봉화금씨는 10세 내부영윤공[琴遇工] 대를 전후하여 봉화군 상운면 일원에
살기 시작하였다. 이곳은 “춘전유해(春田酉海) 벨트”에 걸쳐 있는 마을로
법전과 이웃하고 있으며 태백산이 뻗어 내려 온
풍악산, 옥녀봉 등의 정기를 받은 곳이다.
내부영윤공[琴遇工] 이후 후손들은 경북 예안 일대를 비롯하여
충북, 전남, 경기 지역까지 각처에 흩어졌다. 이 중에서 문곡[금휘]이
봉화군 상운면 문촌리에 터를 잡아 자손이 번창 했다. 문곡은 태학에 유학해서
문명을 날렸다. 세조 때 무과에 급제하고 병술(丙戌) 영시(英試) 문과 특선에
급제하였다. 성종 때 경산현령을 지냈고 서거정, 김종직 등과 도의로 사귀었으며
문계서원에 배향 되었다. 이 무렵을 전후한 시기가 봉화금씨 전성기라 볼 수 있다.
농수[금원정]는 문곡의 아들로 현량천에 올랐으나 기묘사화 이후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낙전당, 망선암 등을 지어 강학하며 임천에서
유유자적했다. 농수는 충재[권벌], 충암[김정] 등과 도의로 사귀었으며
문계서원에 배향 되었다. 매헌[금보]은 문곡의 종손자로 퇴계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글씨를 잘 써서 퇴계 문인 가운데 첫손가락에 꼽혔다.
농암[이현보] 상사(喪事) 때 영남 선비들이 신도비 글씨를 퇴계에게 청하니
퇴계는 사양하고 매헌으로 하여금 그것을 쓰게 하였다.
성재[금난수]는 퇴계의 문인이다. 정유재란 때 창의하니 영남의 많은 선비들이
호응해서 공을 세웠다. 성재는 봉화현감을 지냈으며 좌승지에 추증되고
동계서원에 배향 되었다. 일휴당[금응협]은 퇴계의 문인이다.
퇴계가 일휴당이라는 편호를 써주었다. 부제학 창석[이준]은
“일휴당의 일언일행이 가히 후세의 모범이 된다”고 하였다.
면진재[금응훈]는 퇴계의 문인이다. 약포[정탁]가 조정에 천거하기를
“거가(居家)에 효제(孝悌)하니 사림의 긍식(矜式)이다”하였다.
10년 동안 도산의 장석(丈席)으로 제자들을 계도하였다.
제천현감, 의흥현감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만수재[금업]는 성재 아들로 월천 조목 문하에서 수학했다.
만수재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 집의 등을 거쳐 지제교분승지를 지냈으며
덕행과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망월헌[금개]은 만수재 동생으로
월천 조목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문과에 급제하여 여주목사를 지냈으며
문장이 뛰어났다. 낙포[금성휘]는 망월헌의 아들로 목재[홍여하],
존재[이휘일], 갈암[이현일] 등과 도의로 사귀었다.
매헌[금보]은 예안에 묘소가 있지만 매헌의 손자 자선[금시양]은
봉화에 살았다. 자선은 광해군 때 향시에 선발되었으며 성리학에 잠심하였다.
자선은 매원[김광계]에게 가례에 대한 왕복 질의를 하여
가례부해 4권을 남겼으며 관찰사가 조정에 천거하여 지평의 증직과
정려가 내렸다. 자선은 구산사에 배향 되었다. 매촌[금시술]은 성재 후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을 지냈다. 반천[금상현]은 문곡의 현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 예안현감 등을 지냈다.
조선조 전기의 봉화금씨 인물들은 문장. 도학이 울연했다.
그러나 조선조 후기로 접어들면서 후손들의 활약이 선조들에 비해
약화 된 느낌이 있다. 현대 대표 인물로 상공부장관을 지낸 금진호 등이 있다.
[봉화금씨 족보 및 한국 인물대사전 영남 인물지 등]
우계이씨
봉화금씨 다음으로 봉화군에서 집성촌을 이룬 사족은 우계이씨로 짐작이 된다.
우계이씨 시조는 이양식이다. 우계이씨 이양식의 후손 평시서령 도촌[이수형]은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벼슬을 버리고 원호 조여와 함께
원주 치악산에 있는 바위 앞에서 충절(忠節)을 맹세하고 나란히 이름을
그 바위에 새긴 뒤 순흥 땅 도지리[현 봉화읍 도촌리]에 터를 잡았다.
이 도촌리는 태백산이 뻗어 내려 온 봉황산의 정기를 받은 곳이다.
도촌의 현손 취사[이여빈]가 문과에 급제하고 그 뒤를 이어 문보[이진주],
무능[이징도],.....등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초당[이여봉]은 취사에게
글을 배웠으며 경사와 예학에 두루 밝았다. 초당은 학사[김응조]와
가례(家禮)에 대하여 질의응답(質疑應答)을 하였으며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되어 종사랑을 지냈다. 무능은 이인좌 난 때 의병대장(義兵大將)에
추대되었으며 신촌[이기륭]은 경사(經史)에 통달(通達)하고 예학(禮學),
천문(天文), 역학(曆學)에 두루 통했으며 안동 지역 유림 대표로 금성단 설립을
청하는 소(疏)를 올려 윤허를 받았다. 그리고 그 유허지에 금성대군과
이보흠 등을 모셔서 단종에 대한 충절을 기렸다. 도촌이
이곳 도촌리[사제라 부르기도 함]에 입향 한 후 500년간 세거하며
글잘 하는 선비들이 많이 나왔다. [우계이씨 족보 및 향토지]
안동권씨
위에서 편의상 일컬은 “춘전유해(春田酉海) 벨트” 중에
단연 유곡[酉谷; 닭실]이 유명하다. 권행을 시조로 하고 있는
안동권씨 복야공파의 후손 충재[권벌]는 43세 되던 해에 비로소 닭실에
살 땅을 잡았다. 그 뒤 큰아들 청암[권동보]이 이곳에 정사를 짓고
석천정(石泉亭)이라 했다. 이로부터 이곳에 안동권씨 충재 가문의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충신열사(忠臣烈士), 석학대덕(碩學大德)에 제제다사(濟濟多士)가
쏟아져 나왔다. 충재가 봉화 닭실에 문호(門戶)를 연 이후 그 성대(盛大)함이
영남에서 우뚝했다. 문과 급제자 수나 벼슬에 있어서는
하회 풍산류씨 서애 류성룡 가문[약칭 하류]이나
천전[내앞] 의성김씨 청계 가문[약칭 천김]에 못 미치지만
뛰어난 인물이 많기로는 하류나 천김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닭실의 대표적 인물 충재[권벌]는 1507년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예조참판을 거쳐 1545년 우찬성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봉화 삼계서원에 배향 되었다. 시호는 충정이다.
충재 후손 중에 현달(顯達)한 이가 아주 많다. 하당[권두인]과
창설재[권두경]는 시와 문장으로, 이재[권연하]와 채산[권상규]은 경학으로,
충헌공[권정침]은 충절(忠節)로, 공조참판 정산[권재대]과
병조참판 퇴일[권영하] 양인(兩人)은 양대 참판 벼슬로,
의병대장 성대[권세연]는 독립유공으로 각각 명성(名聲)을 날렸다.
그 이외 석천[권래]은 제자백가서에 통달(通達)하고 당세 영남 북부 제일의
부귀를 누렸으며 강좌[권만]는 이인좌 난 때 의병장 류승현을
도와 공을 세웠으며 학문이 깊고 문장이 뛰어났다.
채산[권상규]은 당대 유림의 거두(巨頭)로 전국 도처에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었다. 성재[권상익]는 당대의 석학으로
문장과 학문이 뛰어나 그 명성이 매우 높았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심산[김창숙] 면우[곽종석] 등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장서를
보내 일경에 체포되었다. 풀려난 뒤 심산이 주도하는 군자금 20만원 모금운동에
군자금을 제공하다가 또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독립(獨立)유공자로 대통령 포장이 추서(追敍)되었다.
춘번[권명섭]은 성리(性理)에 깊고 경사(經史)에 정통(精通)하였으며
곽종석, 최남선, 정인보, 홍치유 같은 명사들이 줄줄이 방문하고 학문을 주고받았다.
세 사람[권상원, 권두응, 권정교]은 유곡 삼절로 칭송을 들었다.
그리고 무위재[권업], 서포[권재성], 빙고[권명하], 청하[권긍연],
소곡[권욱연], 일헌[권노섭] 등, 경서와 제자백가서에 두루 통한 이들이
무리로 나왔다.
닭실은 대과급제 16인, 생진과급제 59인이나 냈다. 유고, 유집, 문집이 있는
선비가 90-100명 정도 나왔으며 건국공로 포상자가 약16명 정도 된다.
현대 대표 인물로 농림부 차관과 국회의원을 지낸 권성기,
한국과기술대 총장과 과기처 차관을 지낸 권원기 등이 있다.
[안동권씨 족보 및 석천지, 향토지]
의성김씨
성주 사월과 상주 등지에 세거(世居)하던 의성김씨가 봉화군 해저[바래미]에
터를 잡았다. 해저의 대표적인 인물은 팔오헌[김성구]이다.
팔오헌은 166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689년 대사성에 올랐으며
1693년 강원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은퇴(隱退)하여 향리(鄕里)에
학록서당을 짓고 학문을 탐구(探究)하며 후진양성에 이바지하였다.
공사를 분명히 할 줄 아는 청렴한 관리로 추앙을 받았으며 안동의 백록사에
배향(配享)되었다. 팔오헌의 증손자[김한동]는 전라도 관찰사, 대사간을 지냈다.
임금이 영남의 인재에 대해 물었을 때 우의정 채제공이
“김한동이 제일입니다”하였다. 팔오헌의 큰집 형[성후]의 현손 갈천[희주]은
대산[이상정]의 문인(門人)으로 교리 재임 시 실록편수관을 겸하여
‘영조실록’ 편찬(編纂)에 참여했다. 그 뒤 병조참판, 한성부좌윤,
대사간, 함길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천개[김여건]는 문과에 수찬을 지냈다. 천개의 손자 일기[김택동]는
현감을 지냈으며 문집을 남겼다. 천개 손자 나계[김필동]는 음보로
참봉을 지냈고 경학이 뛰어나 관찰사의 천거를 받은 적이 있으며
서예가로 이름이 있다. 나계의 후손 일초[김창근]는 족제 심산[김창숙],
채산[권상규] 등과 교유했고 한국 유림단을 통하여 독립을 위한 군자금을
조달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건국공로 훈장이 추서되었다.
일기의 후손 하강[김호림]은 병조참판 동강[김우옹] 집으로
입양(入養)계대(繼代) 하였다. 하강의 아들 심산[김창숙]은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 성균관대 창립초대 총장 등을 지냈으며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단사[김경온]는 팔오헌의 손자이다. 단사는 출사의 뜻을 버리고
단사협이라는 곳에서 학문을 닦고 인격을 도야(陶冶)하던 중
암행어사(暗行御史)가 지나다 단사의 박학다식(博學多識)함에 놀라서
조정에 돌아가 임금에게 천거하기를
“김경온은 단사협에서 은거(隱居)하며 만권의 책을 읽었나이다.”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공부만 했다.
단사의 손자 식헌[희락]은 대산[이상정]에게 글을 배웠다.
식헌은 조부를 닮아 경학(經學)에 밝고 박학하여 생원시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춘추관(春秋館)기사관 등을 지냈으며
정조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식헌은 편수관으로
‘해동인물고’ ‘영남명신록’ ‘홍재전서’ 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도 잘 썼다. 단사의 현손(玄孫) 학포[우수]는
문과에 예조참의를 지냈다. [의성김씨 대동보 및 각종 보서(譜書), 두산백과사전]
풍산김씨
풍산 김씨 봉화 오록 학사[김응조] 가문은 경북 안동 오미동에
일찍 문호(門戶)를 연 청백리(淸白吏) 허백당[김양진]의 후손들이다.
허백당의 증손 현감공[김대현]은 아들 8형제를 두었다.
8형제가 모두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 중 5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영남은 물론 왕실(王室)까지 놀라게 했다. 인조는 그 소식을 듣고 고금(古今)에
드문 일이라 하여 그 형제들이 사는 영남의 오릉동(五陵洞)을
오미동(五美洞)으로 이름을 고치라 명하고 그 마을 어귀에 경상감사로 하여금
봉황려(鳳凰閭)라는 문을 세우게 했다.
5형제가 모두 현달(顯達)하였으며 그 중 망와[김영조]와 학사[김응조]는
문명(文名)을 떨쳤다. 영남 하도에서는 한강[정구]이, 위녘에서는
망와[김영조]와 학사[김응조] 형제가 어지러운 세상의 기강(紀綱)을
붙들어 세웠다고 세상 사람들이 칭송(稱頌)했다. 이 5형제의 후손에서
문과 급제자가 많이 나오고 글 잘하는 선비 또한 무리로 나왔다.
학사[김응조] 후손들은 봉화군 오록으로 이거하였다. 오록에 인물이 많이 났다.
노봉[김정]은 1708년 문과에 급제하여 옥천 군수로 나갔을 때
민가 600여호와 공청 수백 칸이 불탄 사건에 대해 뒷수습을 잘 하였다.
이조판서 민진원이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려 표리(表裏) 한 벌을
하사(下賜) 받았다. 그 뒤 강릉대도호부사로 나가 삼백 석을 내놓아
굶주린 백성을 돌보았다. 감사 이복명이 노봉의 치적을 조정에
알리기를 “김정의 치적이 도내에 제일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임금이 숙마(熟馬) 한 필을 하사(下賜)했다. 취헌[김종태]은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 대사헌, 동부승지를 거쳐 병조참판에 올랐다.
[풍산김씨 족보, 정신문화 연구원 한국인물대사전]
진성이씨
진성이씨 동부승지 충간공 나은[이동표] 가문은 봉화 녹동[노루골]에
문호(門戶)를 열었다. 나은[이동표]은 14,5세에 이미 경사에 통하고
위기지학에 분발했다. 1683년 문과에 급제하여 청환직을 두루 거치고
동부승지에 올랐다. 학문(學文)이 뛰어나 사람들이 ‘소퇴계’라 일컬었다.
두릉[이제겸]은 나은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율봉도 찰방을 지냈다.
이인좌 난 때 무고를 당하여 유배를 갔다가 풀려나 향리 노루골[녹동]에
은거하며 산수(山水)를 벗 삼아 시서(詩書)로 유유자적(悠悠自適)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창애 [이중광]는 나은의 손자이며 두릉[이제겸]의
장조카이다. 창애는 경술(經術)로 천거(薦擧)되어 여러 벼슬이 내렸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연구에 전심(專心)했다. 누실[이중연]은 두릉의 아들로
시문에 능하여 격조 높은 시가를 많이 남겼으며 채제공, 이상정 등과 교유했다.
녹문[이한중]은 누실의 손자로 경학(經學)과 시문(詩文)에 뛰어나
여러 번 어사(御使)의 천거를 받았으나 나가지 않고 서책과 시주(詩酒)와
거문고를 벗 삼아 물외(物外)에 초연(超然)하였다. 당대에 명성이 있는
시인으로 시문이 호건(豪健) 장쾌(壯快)하였다. 경암[이한응]은
두릉의 증손으로 학업에 30년간 정진(精進)하여 덕행(德行)과 경학(經學)으로
사우의 추앙(推仰)을 받았으며 당세의 도학군자(道學君子)로
사림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명필로도 이름이 높았다.
[진성이씨 족보, 한국인의 족보]
전주이씨
전주이씨 추만[이영기] 가문은 봉화 법전 풍정에 문호를 열었다.
추만[이영기]은 태종의 7대손으로 민절공[이정]의 현손이다.
추만은 1594년에 낙향(落鄕)했다. 이곳에 사덕정을 지어 수덕(修德)의
도장(道場)으로 삼으며 후학(後學) 양성에 힘을 쏟았다.
송월재[이시선]는 추만공의 아들로 조상이 연산군 때 화를 입게 되자
아버지가 낙향한 후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법전에 은거하며
성리학은 물론 병서(兵書) 및 지리(地理), 복서(卜筮)의 모든 책을
두루 섭렵(涉獵)했다. 당대의 유학의 대가로 명성이 높았다.
그 문하에 선비들이 많이 배출 되었다. 3인의 학자[이치형, 이치적, 이치정]는
도학 문장으로 명성이 있어 “풍정(楓井) 삼군자”라 일컬었다.
그리고 계은[이면주]은 선성김씨 야옹[김성진], 진성이씨 향산[이만도] 등
안동 인사들과 함께 항일 독립 운동에 불을 당긴
영남의 우국지사(憂國之士)이다. 계은은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좌부승지, 동부승지, 병조참의 등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했으며
1910년 한일 합방이 되자 음독자결을 했다. 건국공로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전주이씨 추만공파 족보, 두산백과사전]
창녕성씨
창녕성씨 청백리 계서[성이성] 가문은 봉화 가두들에 문호를 열었다.
부용당[성안의]은 한강 정구의 문인(門人)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망우당[곽재우]과 관찰사 백암[김륵]의 휘하(麾下)에서 활약했으며
남원부사로 치적을 올려 암행어사(暗行御史)의 포계가 있었다.
계서[성이성]는 부용당[성안의]의 아들이다. 계서는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었으며 호서, 호남 암행어사로 명성을 날렸다. 계서는
춘향전(春香傳) 이도령의 실제 인물로 거론되어 학계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진위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계서의 후손은 400년 동안
문한(文翰)으로 가문을 빛냈다. [창녕성씨 부용당 파보, 논문집]
선성김씨
선성 김씨는 영유 현령공[김소량]이 예안에서 영천[현 영주]으로 옮겨와
그 터전을 잡고 그 아랫대[김증, 김담]에 드러나기 시작하여 민절공[김륵]을
기점으로 크게 번성(繁盛)하였다, 영천 여러 곳에서 살았으나 그 중
봉화군 우금으로 일부가 옮겨 세거하였다. 봉화 우금은 구가세족의 터전으로
과환(科宦)과 문한(文翰)이 뛰어나 반촌이라 하기는 어울리지 않아
"반서울"이라는 칭을 들었다. 사마시에 합격한 선비가 이곳에만 30여 장이 되고
문과 급제자가 8명이나 되며 운학재[김한주], 치암[김석규],
가암[김호규] 같은 쟁쟁한 선비들이 많다.
우금의 운학재[김한주]는 의성 김씨 천전의 경학 삼고봉의 하나인
외숙[김방걸]에게 글을 배웠다. 안동 권씨 충재 가문의 명성 있는 학자
강좌[권만]는 당대 인물로 운학재를 첫손가락에 꼽았다. 치암[김석규]은
그 유명한 위정척사의 만인소(萬人疏)를 올릴 때 소수[이만손]에 이어
부소수로 활약했다.
[선성김씨 민절공파보, 영천지]
남양홍씨
남양홍씨[토홍]는 홍선행을 시조로 하고 있다. 13대 손 만전당[홍가신]은
행촌[민순]과 퇴계[이황]의 양문에서 수학했다. 학행으로 천거 되어
강릉참봉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제자백가서에 통달하고
시문과 글씨에 뛰어나 칭송을 받았다. 두곡[홍우정]은 만전당의 아들로
경학이 뛰어나 천거에 의해 왕자사부가 되었다. 병자호란이 끝나자
태백산하 봉화에서후진을 양성하고 학문에 전심했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개절이란 시호가 내렸다. 두곡 후손들이
봉화군 봉성면 두동에 세거했으며 400여년간 문한으로 명성을 날렸다.
문과급제자[홍첩], 학행으로 천거 된 이[홍우정 홍극, 홍준], 문집이나 유집,
유고가 있는 선비[홍우정, 홍준, 홍기, 홍종선, 홍승우, 홍철유, 홍철후,
홍전, 홍사성, 홍달, 홍시순, 홍상] 등이 있다. 그리고 소수서원장을
지낸 사람[홍목유, 홍사성, 홍위후]이 여러 명 있으며 효행이 지극하여
칭송을 받거나 천거를 받은 이[홍유성, 홍상] 등이 있다. 겸산[홍치유]은
학행과 덕망이 높았다. 오늘날 태동연구소 소장 임창순이
그 문인 중의 하나이다. 이 남양홍씨 가문의 현대 대표 인물로
5선 국회의원에 정무 제1장관을 지낸 홍사덕... 등이 있다.
[남양홍씨 족보 및 한국인의 족보 향토지]
남양홍씨[토홍]에는 양대 영의정을 낸 곳이 있다. 영의정을 지낸
묵재[홍언필] 집안이다. 묵재는 6세손 홍지서의 후손이다. 인재[홍섬]는
묵재의 아들로 영의정을 지냈다. 부자 영의정이 난 것이다. 묵재[홍언필]는
1507년 중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저작 ·지평을 지냈으며
1519년 사가독서 후 우승지, 형조참판, 대사헌, 각조의 판서를 거쳐
1535년 우찬성(右贊成)이 되었다. 1548년 좌의정 ·영의정에 재임되고
궤장을 하사받았다. 시,서,화에 모두 능하였으며 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인재[홍섬]는 조광조 문하에서 수학, 153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正言)을 지냈다. 그 후 수찬 ·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청백리에 뽑히고, 좌찬성 겸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 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선조가 즉위하자 원상으로 정무를 처결하고 우의정에 올랐다.
그 뒤 좌의정이 되어 궤장(几仗)을 하사받고 영의정을 세 번에 걸쳐 중임하였다.
남양의 안곡사(安谷祠)에 제향 되었다. 경서에 밝았으며 문장에 능했다.
손우당[홍석]은 인재[홍섬]의 증손으로 청음[김상헌]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손우당은 병자호란이 끝나자 태백산 하 봉화군 법전촌에 은거 학문을 닦았다.
김수항, 송시열의 천거로 참봉이 되고 세자익위사사어를 지냈으며 사후에
이조판서의 증직이 내렸다. 시호는 정민이다. 문과급제자[홍계상, 홍수, 홍의],
무과급제자[홍빈, 홍명기, 홍희춘, 홍희하, 홍계조, 홍찬후]를 비롯하여
문집이나 유고가 있는 선비[홍석, 홍성전, 홍가상, 홍구, 홍주], 효행이나
경술로 천거를 받은 이[홍건, 홍대보],
정문이 선 이[홍우상 배위, 홍대헌 배위] 등이 있다.
현대 대표 인물로 금성방직 사장과 전경련회장을 지낸 홍재선.... 등이 있다.
[남양홍씨 족보 및 각종 보서]
원주변씨
원주변씨 시조 변안렬의 후손 만취당[변영순]은 안동 금계[검제]로부터
현 봉화군 거촌리로 옮겨와 살면서 400년이 넘도록
이곳에서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변경회는 만취당의 아들로
눌재[이홍준]의 문하에 수학했고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공을 세웠으며
구양 숭절사에 배향 되었다. 학행으로 천거를 받은 이[변약, 변유한, 변극태],
문집이나 유고가 있는 이[변유한, 변택형, 변택구, 변세균, 변태균, 변극태,
변상수, 변진탁, 변시균, 변호원, 변종기] 등이 배출 되었다.
이 중 교수공[변유한]은 진성이씨 감사공[이명익]의 사위이며,
변상수는 눌은[이광정]의 문인이고, 변태균은 이재[권연하]와
서산[김흥락]의 문인이다. 특히 수온당[변상훈]은 거촌에 당을 짓고
그 이름을 자기 호를 따서 수온당이라 했으며 당명(堂銘)은 눌은이 짓고
당기(堂記)는 향산[이만도]이 지었다. 수온당은 이곳에서 강학을 하며
충효의 본(本)을 가르쳤다. 수온당은 당대의 영남 명사 눌은[이광정],
대졸재[권두응], 강좌[권만] 등과 교유했다. 현대 대표 인물로
공영토건 회장 변호석[작고], 사장 변강우[작고] 등이 있다.
옥전전씨
옥천전씨 야옹[전응방]은 시조 정선군[전섭]의 후손으로
봉화군 상운면 귀내[구천]에 터를 잡고 그 후손들이 500여년간 세거했다.
야옹은 서애[류성룡] 조부 류자온의 사위이다. 야옹은 벼슬할 뜻을
버리고 은거했으며 퇴계[이황]와 도학을 논하며 교유했다.
야옹 후손에 문집이나 유집, 유고가 있는 선비가 30명 가까이 나왔다.
이 중에서 격양당[전시천]은 문학으로 명성이 있었다.
토일리에 정자를 짓고 창설재[권두경], 눌은[이광정] 등과 교유했다.
귀암[전수동]은 성리학에 잠심했으며 문장과 행의로 사림에 알려졌다.
우직[전병렬]은 향리에 정자를 짓고 강학을 하며 선비들을 많이 배출하여
성취시켰다. 육유재[전종한]는 박학다식했으며 무유재[전종주]는
이휘재의 문인으로 문학과 행의로 사림의 추중을 받았다. 회산[전재수]은
용산[이만인], 전원[류도헌]의 문인으로 학행이 있었다. 현대 대표 인물로
건설부 지리원장 전 경우... 등이 있다. [전씨 대동보 및 봉화군지 영남인물지]
광산김씨
광산김씨는 신라 헌강왕의 제3자 김흥광을 시조로 하고 있다.
7세 문안공[김양감]은 고려 선종 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다.
문안공의 후손 담암[김용석]의 아들 죽헌[김균]이 안동 구담으로부터
봉화 거촌에 이거하였다. 쌍벽당[김언구]은 죽헌의 아들로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부친이 “벼슬길에 나가지 말라”고 한 유훈을 지켜
임천에서 위기지학에 분발했으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유림은 그 유덕을 기리기 위해 거촌에 쌍벽당을 건립하였다.
쌍벽당 본체는 담암이 건립한 것으로 500년이 넘은 고택이다.
현감공[김한벽]은 남악 문인으로 박학다식했으며 경학이 뛰어나
유일로 천거 되어 현감을 지냈다. 육인재[김광국]는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눌은[이광정], 강좌[권만] 등과 교유하며 임천에서 유유자적했다.
학식이 해박하고 단아한 선비의 풍이 있었다. 문집이나 유집,
유고가 있는 선비[김응규, 김태수, 김택운, 김찬경, 김용규, 김흥보,
김광국, 김철현, 김광제, 김흥망, 김영도, 김박, 김백행]가 많이 나왔다.
현대의 대표 인물로 국회의원 김천수, 기전업체 사장 김철수 등이 있다.
[광산김씨 퇴촌공파보, 영남인물지]
3. 봉화군 법전의 강씨 문중
진주강씨 봉화군 법전 문중은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 장군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고려조의 국자박사 강계용을 1세조로 하고 있다.
고려조에 문하찬성사를 지낸 공목공[恭穆公, 강시蓍)]은 6세이고
판서공[강이행]은 9세이다. 고려조 보문각 대제학을 지낸 통계공[강회중]은
7세이다. 형조정랑· 증병조참판공[안복(安福)]은 8세이다.
참판공[강안복]배위(配位)는 예조판서[이효례(李孝禮)]의 딸 인천이씨이다.
인천이씨 조부는 대제학을 지내고 좌참찬에 이른 공도공[이문화(李文和)],
백부(伯父)가 호조판서[이효인(李孝仁)]이며 숙부가 판서[이효지(李孝智)]ㆍ
또 숙부가 판서[이효신(李孝信)]이다. 그리고 외사촌은
세조비(世祖妃)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이다. 판서공[강이행]은 9세이다.
판서공 배위 인천이씨는 우의정을 지낸 충정공[허종(許琮)],
좌의정을 지낸 문정공[허침(許琛)]과 남매지간이다. 양공(兩公)은
형제 상신(相臣)에다가 형제 청백리이다.
판서공 아들 심재[강징]의 후손들이 진주강씨 봉화군 법전 문중을 이루었다.
심재는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을 지냈고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으며
정난종의 신도비 글씨를 썼다. 심재 아들 중소[강억]는 문과에 급제하여
왕자사부, 관서어사, 사옹원정 등을 지냈고, 중소의 아들 득길[강덕서]은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에 들고 응교를 지냈다. 이로써 봉화 진주강씨 문중은
삼대 문과급제를 낸 집이 되었다. 영남에서 3대 문과 급제를 낸 가문은
진성이씨 퇴계 가문의 후손 하계[이가순] 3대 한 집 뿐이다.
한양에서 문과급제로 명성이 있는 진주강씨 심재 가문의 후손들이
영남에 입성하여 퇴계 가문과 문과급제 1위를 두고
300-400년간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되었다.
병자호란에 낙남한 진주강씨 법전 문중은 법천[강윤]이
잠은공 집에서 처음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도은공 집에서 송서[강운]가
포문을 열어 퇴계 가문에 도전했다. 영남 문벌 중에서는
진성이씨 퇴계[이황] 가문이 문과 34장으로 영남에서 제1위를 차지하였으며
법전문중은 25장으로 2위를 기록하였다. 이 25장은 결코 만만한 게 아니다.
영남을 울린 문벌들, 인동장씨 우참찬 여헌[장현광] 가문,
의성김씨 천전 청계[김진] 가문,의성김씨 이조참판 동강[김우옹] 부친
칠봉[김희삼] 가문(해저포함),여주이씨 좌찬성 회재[이언적] 가문 등이
20장 내외를 낸 것에 비하면 법전 문중의 성적은 아주 좋은 편이다.
풍산류씨 서애[류성룡] 가문, 안동권씨 우찬성 충재[권벌] 가문,
풍산김씨 이조참판 망와[김영조] 형제 가문 등이 15-18장 정도를 낸 것에 비하면 월등한 것이다.
퇴계가문 34장은 약450년 동안의 기록이고
진주강씨 25장은 약250년간의 기록이기 때문에 진주강씨 문과급제 성적은
퇴계 가문에 아주 위협적인 것이라 봐야 한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진주강씨가 영남에 입성한 이후 단기간만을 따지면 영남에서
진주강씨 법전문중은 퇴계가문의 기록을 제치고 가장 많은 문과급제자를
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덧붙여 이야기 하면 광복이후 현재까지
진성이씨 퇴계 가문, 풍산류씨 하회가문, 안동권씨 닭실 가문..... 등이
판검사를 한 둘 내거나 두서너 명에 그쳤다. 법전 문중은 10명 내외의 판검사를
배출하여 지금도 주위를 놀라게 하고 있다.
법전 문중은 학행으로 천거되어 벼슬이 내린 선비가 영남에서 가장 많다.
영남에서 이 분야의 상위권에 있는 진성이씨 좌찬성 퇴계[이황] 가문,
재령이씨 이조판서 갈암[현일] 가문,의성김씨 청계[김진] 가문,
풍산유씨 영의정 서애[류성룡] 가문 등이 10명 내외인데 법전 문중은
15명을 썩 넘어섰기 때문이다.
영남은 노론이 집권한 이후 참판 벼슬 하나 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 만큼 힘든
형국인 것을 세상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종2품으로
한직이 아닌 요직에 법전문중에서 4명이 오른 것은 적은 숫자가 아니다.
영남 명문 중의 명문인 풍산류씨 서애[류성룡] 가문과
의성김씨 청계[김진] 가문이 각각 참판을 2명 배출한 것에 비하면
법전 문중 4명은 놀라운 숫자라고 할만하다.
진성이씨 퇴계[이황] 가문의 이조참판 농와[이언순]와 이조참판 쌍취[이만운]는 조손(祖孫)간이다. 풍산김씨 이조참판 망와[김영조]와 한성부우윤 학사[김응조]는 형제간이며
의성김씨 관찰사 개암[김우굉]과 이조참판 동강[김우옹] 또한 형제간이다.
조손(祖孫)간에 참판 한 집이 있고 형제간에 종이품 벼슬을 한 집이 있기는 하나 양대(兩代)가 참판한 집은 두 곳 뿐이다.
안동권씨 우찬성 충재[권벌] 가문의 공조참판 정산[권재대]과 병조참판 퇴일[권영하]이 부자(父子)참판이며
진주강씨 법전문중의 병조참판 유하[강태중]와 예조참판 춘고[강건]가
부자(父子)참판이다.
법전 문중의 대표적인 인물로 잠은공[강흡]을 손꼽는다. 잠은공은 시호가
정민이며 호를 달리 이오당(二吾堂)이라 하기도 한다. 도연명이 벼슬을 버리고 귀거래사를 읊으며 전원(田園)에서 기품(氣品)있는 생활을 한 야인(野人)의 정신을 기리는 취지로 호를 잠은이라 하였다. 글공부는 인조조 영의정 상촌[신흠]에게 하다가 사계[김장생] 문하에서 더욱 정진하였다.
잠은공은 성균관 유생으로 율곡[이이]과 우계[성혼]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 소청하였다.
1657년 세자익위사 세마,1659년 부수로 승진하였다. 약천[남구만]이
암행어사로 영남을 순시 중 이오당[강흡]의 효행을 높이 평가하여
조정에 천거,1661년 성현찰방이 되었다. 우역이 심하여 농우가 모두 죽어가자 녹봉을 털어 농우를 구입 작농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관찰사 이상진이 이오당의 선정을 조정에 보고,1664년 산음현감으로
영전하였다. 산음 고을을 떠나올 때 그곳 백성들 수천명이 길거리에 나와
부모를 여읜 듯 슬퍼했다.
정민공 형제[강흡, 강각]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어버이를 모시고 한양을
떠나 태백산하 법전[버쟁이, 버진이] 성잠촌에 터를 잡고 수의자정(守義自靖)하였다. 경북 봉화군 춘양면 학산리(慶北 奉化郡 春陽面 鶴山里) 골띠 마을에 와선정이 있다.
이 정자를 잠은[강흡], 포옹[정양],각금당[심장세],두곡[홍우정],
손우당[홍석] 등 5인의 회동(會同),교우지처(交友之處)로 삼았다.
이곳에 바위를 사덕(竢德)이라고 불렀으며 이곳에 흘러내리는 폭포를
은폭(銀瀑)이라 하고 그것을 내려다보는 대(臺)를 와선(臥仙)이라 하였다.
병자호란 뒤 모두 벼슬을 버리고 대명절의(大明節義)를 지키며 이 와선대에서 백의(白衣)를 걸치고 백발을 휘날리며 음영(吟詠)하였다. 이 5인은
향산지구로(香山之九老)와 낙중지기영(洛中之耆英)을 방불케 하는 탈속의 삶을 보였다. 모두 아름다운 절개와 두터운 명망으로 인해 당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사림의 사표가 되어 태백오현이라 칭송되었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정민이라는 시호가 내렸으며 사덕사에 배향되었다.
정민공 배위(청송심씨)의 친정은 세종의 부마 순의청성위 심안의의 형
절도사 심안인 집이다. 정민공 배위 청송심씨는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과 남매지간이다. 정민공의 처남이 영의정이고 처조카가 효종의 사위(심익현)이다.
[진주강씨 참판공파보, 정민공 시장 및 행장]
유은[강숙]은 잠은의 현손으로 미호[김원행]를 종유했으며 학행이 뛰어나 천거를 받아 벼슬이 내렸다.
도천[강로]은 미호[김원행]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별검을 지냈다. 가은[강시환]은 도천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양양부사, 장령 등을 지냈으며 순조 비 김씨의 수렴청정을 거두라고 상소하여 추자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풀려났다. 법천[강윤]은 승지. 관찰사 등을 지냈다.
백록[강시환]은 법천의 손자로 삼산재[김이안] 문하에서 수학했고 학행으로 천거 되어 부세마, 참봉 등의 벼슬이 내렸으며 문장과 덕행으로
사림의 추중을 받았다.
유하[강태중]는 백록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판을 지냈으며 경학이 깊고 문장에 능했다.
춘고[강건]는 유하의 아들로 송회[강대중]의 후로 입양계대 하였다.
춘고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을 지냈다.
기헌[강두환]은 법천의 종손자로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다.
유천[강한]은 법천의 끝에 동생으로 경학이 뛰어나 유일로 천거 되어
가의대부에 오르고 학식이 고명하여 사림의 추중을 받았다.
송간[강기환]은 유천의 손자로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을 지냈다.
도은공[강각]은 효성이 지극하고 행검이 돈독하여 사후 영남 유림에서
소를 올려 이조참의에 올랐다.
성건재[강찬]는 명재[윤증]와 포옹[정양; 송강 정철의 손자] 양문에서 수학했다.
우리나라 제현들의 문적을 분류별로 모아 편찬했으며 학덕으로 사림의 추중을 받았다. 사림에서 그 덕을 추모해서 매해 향사를 하고 있다.
유계[강명규]는 성건재 후손으로
송서[강운]와 과재[성근묵]의 양문에서 공부했다. 유계는 효성이 지극했으며 경학과 행의로 여러 차례 천거를 받았다.
석당[강기]은 유계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해은[강필효]은 경학에 정통하였으며 경서의 고증, 해명, 주석에 밝았고 음양, 복서, 의약, 지리, 병법에 두루 통했다. 정조가 주자학에 능통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영의정 이시수가 “강필효 입니다”하였다.
농려[강헌규]는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특히 양생법에 밝았다.
노와[강필로]는 문과에 대사간, 면와[강면규]는 문과에 좌승지를 지냈다.
늑암[강진규]은 춘양 충렬공 후손으로 법전으로 양자 들었다. 늑암은 문과에 예조참판을 지냈다.
소간[강면]은 늑암[강진규]의 손자요, 두암[강횡]의 아들이다. 소간은 벼슬길에 나가 통훈대부에 이르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규탄하는 상소를 했다. 을사 오적신의 매국 행위를 맹렬히 규탄하며 직간을 서슴치 않았다. 이로 인해 일삭(一朔)을 감옥에 갇혔으며 그 뒤 석방되었다. 이어 경술국치를 당하자 두문(杜門)자정(自靖)하였다. 소간의 배위 의성김씨는 귀봉[김수일]의 후손이다.
내앞 의성김씨의 대표적인 인물은 학봉[김성일]이지만 실세는 귀봉[김수일]이다. 천김에 귀봉은 대들보와 같은 중요 인물이다.
청계공[김진] 맏아들[김극일]이 시문으로 일세를 풍미했지만 무후(無後)하여 귀봉의 아들[김철]로 대를 이어 그 후손에 인물이 쏟아졌다. 귀봉[김수일]의 후손[진린]은 천거로 도사를 지냈다. 소간의 배위 의성김씨는 도사공[김진린]의 딸이다. 이 집은 후손도 많고 선비도 많으며 살림도 풍족하여 “사람 천석, 글 천석, 밥천석”이라 하여 세상 사람들이 “삼천석 댁”이라 불렀다.
입제[강재항]는 도은공의 손자로 명재 윤증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경학이 깊고 문장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 천문지리 등에까지 두루 밝았으며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어 명성이 높았다.
설죽당[강재숙]은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다. 글씨는 백하 윤순에 비견된다는 평을 들었다.
파서[강택일]는 입제의 아들로 설죽당 후로 입양계대하였다. 파서는 소곡[윤광소]의 문인으로 경학이 뛰어나 암행어사 등의 천거를 여러 차례 받았다.
요륙재[강욱]는 지기(志氣)가 청고(淸高)하고 선조를 추모하는 념(念)이 지극하여 향당의 칭송을 들었으며 선조 입재공 문집 15권을 간행했다. 현대 대표 인물로 대법관 강신욱이 있다.
[진주강씨 대동보, 각종, 행장, 보서 등]
정민공 형제[강흡, 강각]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어버이를 모시고 한양을 떠나 태백산하 법전[버쟁이, 버진이] 성잠촌에 터를 잡고 의자정(守義自靖)하였다.
경북 봉화군 춘양면 학산리(慶北 奉化郡 春陽面 鶴山里) 골띠 마을에 와선정이 있다. 이 정자를 잠은[강흡], 포옹[정양],각금당[심장세],두곡[홍우정],손우당[홍석] 등 5인의 회동(會同),교우지처(交友之處)로 삼았다.
이곳에 바위를 사덕(竢德)이라고 불렀으며 이곳에 흘러내리는 폭포를
은폭(銀瀑)이라 하고 그것을 내려다보는 대(臺)를 와선(臥仙)이라 하였다.
병자호란 뒤 모두 벼슬을 버리고 대명절의(大明節義)를 지키며 이 와선대에서 백의(白衣)를 걸치고 백발을 휘날리며 다섯 사람이 유유자적하며
음영(吟詠)하였다. 이 5인은 향산지구로(香山之九老)와 낙중지기영(洛中之耆英)을 방불케 하는 탈속의 삶을 보였다. 모두 아름다운 절개와 두터운 명망으로 인해 당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사림의 사표가 되어 태백오현이라 칭송되었다.
[진주강씨 참판공파보, 정민공 시장]
법전 문중의 대표적인 인물로 잠은공[강흡]을 손꼽는다. 잠은공은
호를 달리 이오당(二吾堂)이라 하기도 한다. 도연명이 벼슬을 버리고
귀거래사를 읊으며 전원(田園)에서 기품(氣品)있는 생활을 한 야인(野人)의
정신을 기리는 취지로 호를 잠은이라 하였다. 글공부는 인조조 영의정 상촌[신흠]에게 하다가 사계[김장생] 문하에서 더욱 정진하였다.
잠은공은 성균관 유생으로 1635년 율곡[이이]과 우계[성혼]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 소청하였다.
1657년 세자익위사 세마,1659년 부수로 승진하였다. 약천[남구만]이
암행어사로 영남을 순시 중 이오당[강흡]의 효행을 높이 평가하여
조정에 천거,1661년 성현찰방이 되었다. 우역이 심하여 농우가 모두 죽어가자 녹봉을 털어 농우를 구입 작농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관찰사 이상진이 이오당의 선정을 조정에 보고,1664년 산음현감으로
영전하였다. 산음 고을을 떠나올 때 그곳 백성들 수천명이 길거리에 나와 부모를 여읜 듯 슬퍼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정민이라는 시호가 내렸으며 사덕사에 배향되었다.
정민공 배위(청송심씨)의 친정은 세종의 부마 순의청성위 심안의의 형
절도사 심안인 집이다. 정민공 배위 청송심씨는 심안인의 후손으로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과 남매지간이다. 정민공의 처남이 영의정이고 처조카가 효종의 사위(심익현)이다. [진주강씨 참판공파보, 정민공 시장]
법전 문중 정민공의 조부[덕서],증조[억],고조[징],삼대(三代)가 연이어 문과급제를 하였다. 정민공의 고조부[강징]는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을 지냈으며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다. 정난종의 신도비 글씨를 썼다.
3대 문과 급제를 한 집은 영남에서 두 곳 뿐이다. 하나는 진성이씨 하계[이가순], 복재[이휘준], 향산[이만도] 3대이고
또 하나는 진주강씨 법전 문중이다.
병자호란에 낙남한 진주강씨 법전 문중은 법천[강윤]이 처음으로 문과에
급제한 이후 무려 25장이 나왔다. 영남 문벌 중에서는 성이씨 퇴계[이황] 가문이 문과 34장으로 1위를 차지하였으며 법전문중은 25장으로 2위를 기록하였다. 그 다음 인동장씨 우참찬 여헌[장현광] 가문,의성김씨 천전 청계[김진] 가문,의성김씨 이조참판 동강[김우옹] 부친 칠봉[김희삼] 가문(해저포함),여주이씨 좌찬성 회재[이언적] 가문 등이 20장 내외를 낸 것에 비하면 아주 좋은 성적이다. 풍산류씨 서애[류성룡] 가문, 안동권씨 우찬성 충재[권벌] 가문,풍산김씨 이조참판 망와[김영조] 형제 가문 등이 15-17장 정도를 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로만 따지면 영남에서 진주강씨 법전문중이 가장 많은 문과급제자를 냈다.
법전문중은 학행으로 천거되어 벼슬이 내린 선비가 많다.
진성이씨 좌찬성 퇴계[이황] 가문,재령이씨 이조판서 갈암[현일] 가문,
의성김씨 청계[김진] 가문,풍산유씨 영의정 서애[류성룡] 가문 등이
10명 정도인데 법전 문중은 15명을 썩 넘어섰다.
영남은 노론이 집권한 이후 참판 벼슬 하나 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 만큼 힘든 형국인 것을 세상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종2품으로 한직이 아닌 요직에 법전문중에서 4명이 오른 것은 적은 숫자가 아니다.
영남 명문 중의 명문인 풍산류씨 서애[류성룡] 가문과 의성김씨 청계[김진] 가문이 각각 참판을 2명 배출한 것에 비하면 법전 문중 4명은 놀라운 숫자라고 할만하다.
진성이씨 퇴계[이황] 가문의 이조참판 농와[이언순]와 이조참판 쌍취[이만운]는 조손(祖孫)간이다. 풍산김씨 이조참판 망와[김영조]와 한성부우윤 학사[김응조]는 형제간이며 의성김씨 관찰사 개암[김우굉]과 이조참판 동강[김우옹] 또한 형제간이다. 조손(祖孫)간에 참판 한 집이 있고 형제간에 종이품 벼슬을 한 집이 있기는 하나 양대(兩代)가 참판한 집은 두 곳 뿐이다. 안동권씨 우찬성 충재[권벌] 가문의 공조참판 정산[권재대]과
병조참판 퇴일[권영하]이 부자(父子)참판이며 진주강씨 법전문중의
병조참판 유하[강태중]와 예조참판 춘고[강건]가 부자(父子)참판이다.
법천[강윤]은 승지. 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그 동생 유천[강한]은 유일로
천거 되어 가의대부에 오르고 학식이 고명하여 사림의 추중을 받았다.
유하[강태중]는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판을 지냈으며 경학이 깊고
문장에 능했다.
가은[강시환]은 문과에 급제하여 양양부사, 장령 등을 지냈으며 순조 비 김씨의 수렴청정을 거두라고 상소하여 추자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풀려났다.
노와[강필로]는 문과에 대사간, 면와[강면규]는 좌승지 등을 지냈다.
입제[강재항]는 명재 윤증의 문인으로 경학이 깊고 문장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 천문지리 등에까지 두루 밝았으며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어 명성이 높았다.
설죽당[강재숙]은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다. 글씨는 백하 윤순에 비견된다는 평을 들었다.
해은[강필효]은 경학에 정통하였으며 경서의 고증, 해명, 주석에 밝았고 음양, 복서, 의약, 지리, 병법에 두루 통했다. 정조가 주자학에 능통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영의정 이시수가 “강필효 입니다”하였다.
농려[강헌규]는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특히 양생법에 밝았다.
유계[강명규]는 효성이 지극하고 경서를 두루 읽어 문장이 성취되었다는 평을 들었다. [진주강씨 대동보, 각종 보서]
4. 춘양, 김포, 인중, 법전 문중과 그 인물
경기 김포 문중, 경북 봉화군 춘양 문중, 법전 문중은 시조에서부터
9세조[강이행]까지 선대(先代)가 같다. 시조는 고구려 병마도원수[강이식 장군]이며 고려조에 국자박사[계용]를 1세조로 하고 있다. 고려조에 문하찬성사를 지낸 공목공[恭穆公, 강시蓍)]은 6세이다.
고려조 보문각 대제학을 지낸 통계공[강회중]은 7세이다.
형조정랑· 증병조참판공[안복(安福)]은 8세이다. 참판공[강안복]배위(配位)는 예조판서[이효례(李孝禮)]의 딸 인천이씨이다. 인천이씨 조부는
대제학을 지내고 좌참찬에 이른 공도공[이문화(李文和)], 백부(伯父)가
호조판서[이효인(李孝仁)]이며 숙부가 판서[이효지(李孝智)]ㆍ판서[이효신(李孝信)]이다. 그리고 외사촌은 세조비(世祖妃)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이다.
판서공[강이행]은 9세이다. 판서공 배위 인천이씨는 우의정을 지낸
충정공[허종(許琮)], 좌의정을 지낸 문정공[허침(許琛)]과 남매지간이다.
양공(兩公)은 형제 상신(相臣)에다가 형제 청백리이다.
판서공의 아들 삼형제[강징, 강연, 강린]에서 법전과 춘양 두 문중이 갈렸다. 법전 문중은 참판공[강징]의 후손이며 춘양 문중은 별제공[강연]의 후손이다.
김포 문중과 춘양 문중은 별제공 증손 4형제[강위빙, 강위흥, 강위재, 강위기]에서 갈렸다.
춘양 문중은 맏집 충렬공[강위빙] 집이고 김포 문중은 둘쩨 진사공[강위위흥] 집이다. 인중[경주 양동, 울산, 부산 등지] 문중은 충렬공 증손 대에 갈렸다.
별제 강연[姜淵]
자는 언정(彦靜], 생원시에 합격하고 전연사 별제를 지냈다. 언정은
판서공[강이행]의 둘째 아들이다. 언정의 아들[강시]은 자(字)가 중우[仲友]이다. 중우는 진사시에 합격했다. 중우의 아들[강응생]은
자가 시망[時望]이다. 의금부 도사를 지냈다.
충렬공 강위빙[姜渭聘]
진주강씨 봉화군 춘양 문중의 파조는 별제공이지만 별제공의 증손 충렬공 [강위빙, 13세]]이 불천위이기 때문에 영남 사람들은 진주강씨 봉화군 춘양 문중을 “충렬공 가문‘이라 일컬어 왔다.
충열공[휘, 위빙]의 자는 백상(伯尙)이다. 충렬공은 1569년에 출생하여
1603년 성균관에 입학했다가 학행으로 천거되어 희릉참봉, 종묘서 봉사 등을 거쳐 순안현령을 지냈다. 광해군(光海君)이 모후(母后)를 폐하자 삼강(三綱)이 무너졌다 탄식하며 벼슬을 버리고 서호(西湖)에 병거(屛居)하였다.
이때 최유해 형제,정홍명,박동량 등이 왕래하며 소영(嘯詠)하였다.[행장]
인조반정을 계기로 다시 벼슬길에 나가 익찬, 사어를 거쳐 청풍군수를 지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임금이 있는 남한산성으로 가는 봉림대군 휘하에 들어갔으나 강화성이 함락되자 부질(婦姪) 이돈오를 비롯하여 윤전ㆍ이시직ㆍ송시영 등과 함께 오랑캐와 싸우다 같이 죽기로 약속했다. [충렬공 시장]
송시영(宋時榮)과 이시직(李時稷)이 먼저 자결하였다. 충렬공(公)은
의대(衣帶)를 종자에게 맡기고 "나는 이제 죽음을 얻었노라. 이 글발이
나의 시체니라"하며 조복(朝服)을 입고 북향하여 통곡하면서 적병의 칼날 아래서 항복을 강요하는 오랑캐들에게 "오두(吾頭)는 가단(可斷)이나 오슬(吾膝)은 불가굴(不可屈)이라" 꾸짖었다. 이에 적장은 공의 혓바닥을 끊고
양어깨를 잘랐다. 이 무렵 윤전ㆍ이시직도 함께 죽었다. 이때 순국한
다섯 충신은 시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강화 충렬사에 배향되었으며
시호가 내리고 경상(卿相)의 예우로 부조의 특전이 내렸다. 시호는 충렬공이며 증직으로 이조판서가 내렸다.[경산 정원용의 신도비문]
강화도에서 순국한 다섯 충신을 ‘강도오충’이라 일컫고 있다.
강도오충은 명재[윤증]의 종조부인 충헌공(忠憲公, 윤전), 은진송씨
우암 송시열의 종형인 충현공(忠顯公, 송시영), 인조반정의 일등공신
묵재[이귀]의 재종질인 충목공(忠穆公, 이시직), 연봉(連峰, 이기설)의
장자(長子)인 충현공(忠顯公, 이돈오)이다.
강화도에서 다섯 충신이 순국한 이후 그에 대한 기록이 여러 곳에서 전해졌으며 칭송도 이어졌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서계(西溪, 박세당)가 찬한
충헌공(忠憲公, 윤전) 시장(諡狀)이다. 여기서 강도순절지사 오인(江都殉節之士 五人)을 함께 칭송하였다.
그리고 노서[윤선거] 상소 중에서 중부(仲父) 필선(弼善) 충헌공(忠憲公)과
아울러 다섯 충신의 순국을 찬양하였다. 명재의 충헌공 장중(狀中)에서도
다섯 충의열사의 이름이 함께 전해져 왔다. [신도비문]
소곡(素谷, 윤광소)은 어릴 때부터 강도사(江都事)를 익히 들었으며
제공지의(諸公之義)에 대하여 송모지정(誦慕之情)을 가눌 길이 없다고 하였다.
또한 강도오충의 절의를 높이 평가하며 충열공에 대해 군여지책(軍旅之責)도 없고 봉강지수(封疆之守)도 없는 일개 음관(蔭官)으로 자외입부(自外入赴)하여 결지순사(決志殉死) 하였으니 송모지정(誦慕之情)이 배가된다고 술회하였다.
형조와 예조의 판서 등을 지내고 봉조하(奉朝賀)가 된 담녕[홍의호]은
상향축문(常享祝文)에서 충열공의 탁절(卓節)이 윤상(倫常)을
붙들어 세웠다고 찬양하였다.
정조가 존주록(尊周錄)을 찬술하도록 명하였는데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ㆍ순국(殉國)한 제인(諸人)을 서술한 사적에 다섯 충신의 이름이
함께 올랐다. 또한 김포여지승람과 강화부지(江華府誌) 등에도
다섯 충신의 기록이 함께 전하여져 내려온다.
영의정 경산[정원용]은 충열공(忠烈公)의 신도비명에서 강도오충의
정충대절(情忠大節)을 칭송 하였다.
충렬공은 오창(梧窓, 박동량)과 교분이 두터웠다.
오창은 선조(宣祖) 유교칠신의 하나로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금계부원군에
봉해지고 충익(忠翼)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충렬공은 오창(梧窓)과 문우(文友)일 뿐만 아니라 그의 종손[從孫] 박세정을
사위로 삼았다. 박세정은 현석[박세채]의 재종형이다. 충렬공은
사위를 맞이하여 "막내딸을 낳아 완만(婉娩)한 것을 불쌍히 여기고
끝없이 사랑하였는데 오늘 장성하여 시집을 보내게 되니 집안의 경사로다.
그대 옥설(玉雪)같은 모습은 내 평생에 바라던 대로다."라며 흡족(洽足)해 하였다. [충렬공 유묵집]
충렬공 배위 연안이씨는 할머니[이언침]ㆍ아버지[이지남]ㆍ
어머니[동래정씨]가 정문이 섰을 뿐만 아니라 두 오라버니ㆍ
두 조카ㆍ두 질서(姪壻)등이 모두 충(忠)ㆍ효(孝)ㆍ열(烈)로 정문이 섰다.
연안이씨 가문의 자랑인 세칭 8정문의 집 딸이다. [연안이씨 족보]
충렬공 손자[강천여]는 무후(無後)하여 봉화 법전 문중 성건재[강찬]의
둘째 아들[강재보]로 입양계대 하였다.
중상[仲尙] 강위흥[姜渭興]
중상은 1572년에 출생하여 선조 임신에 성균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문행이 있어 김포 문중에 시문이 전해 내려온다. 배위는 한산이씨로
인물이 많이 나온 명문 출신이다. 좌의정 장음[이사관], 포도대장,
어영대장 등을 지내고 덕장(德將)으로 알려진 정익공[이여발], 공조판서
정희공[이기하], 예조판서 백집[이경옥], 정민공[이해우], 병자호란 때
병마절도사로 수천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출전, 격전 끝에 순국한
충장공[이의배, 진사공 배위 한산이씨와 남매간]. 이외에도 무장(武將)이
많이 배출 되었다.
완암[浣岩] 강혹
진사공[강의흥]의 아들이며 충렬공의 조카이다. 자는 군백(君白)이다.
재행으로 참봉이 되고 문과에 급제하여 박사, 예조청랑 등을 거쳐
1636년 영원군수로 명을 받고 난 후 병자 호란이 일어나 의병을 모아 싸우다
순국했다. 향년 36세이다. 증직으로 도승지가 내렸다.
송서 강운[姜橒]
송서[松西, 강운]는 충렬공의 6대손이다. 자는 경하(擎厦). 1773년에
출생하였으며 1807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박사ㆍ지평ㆍ이조정랑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 필선에 이르렀고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송서는 풍자(風姿)가
수명(秀明)하며 성품이 강열(剛烈)하고 정신이 추수(秋水)와 같고 문사(文思)가
엽엽(燁燁)하였다. 날마다 유생들을 모아놓고 대학의 명덕편 주석을 할 때
임금이 송서의 총명함을 알고 서사(書士)에게 명하여 어병(御屛)에다가
그 이름을 기록하게 하였다. [행장]
송서는 7서에 대한 훈고와 의례에 대해 정통하였으며 음양ㆍ복서ㆍ의약ㆍ
지리ㆍ병법에까지 두루 통하였다. 송서는 삼계(三溪)에서 영남 유생들을
모아놓고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을 강론하였으며 또한 봉산(鳳山)에서도
강론하여 후진들을 감탄하게 하였다. [행장]
또한 태백(太白). 신성(新城). 천천(穿川). 이화(梨花). 백천(栢川) 금강산 등을
순회하며 가음(歌吟)하기를 그치지 않아 영남 선비들의 표본이 되었으며
영남 유림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문하에는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당시 석유(碩儒)로 이름이 난 신암[이만각],정재[유치명]의 문하생으로
문명이 높았던 복재[강건] 등을 비롯하여 관계에 진출한
이조참판 긍암[이돈우]ㆍ 대사성 복재[이휘준]ㆍ송서의 손자인
동지돈녕부사 현파[강한규]ㆍ대사간 백초[강하규],예조참판 늑암[강진규]ㆍ
역서[유치유],계소[이석영]ㆍ유계[강명규]ㆍ진사[김매수]ㆍ정와[김징] 등이
배출되었다. 당시 영남의 석학인 소암[이병원]ㆍ정재[유치명]ㆍ
수정재[유정문]ㆍ하계[이가순]ㆍ녹문[이한중]ㆍ일포[박시원]ㆍ
경암[이한응] 등과 교유했다. [행장]
복재 강건[姜楗]
자는 건부(建夫). 호는 복재(復齋). 1817년에 출생하였다. 처음 종형인
송서의 문하에서 수업했으며 나중에 정재[유치명] 문하로 들어가
문명을 날렸다. 정재의 많은 제자들 중에서 뛰어난 인물로 이재[권연하]ㆍ
복재[강건]ㆍ신암[이만각] 등 3인을 이ㆍ복ㆍ신(3인의 호 약자)이라 일컬었다.
복재는 사서삼경에 정통하고 문장에 능하여 영남 유림을 대표하여 당대의
현안에 대해 상소문을 쓰기도 하고 스승[유치명]이 졸(卒)한 후 13년 만에
문인 학자들이 모여 정재 문집을 낼 때 수백명의 문인(門人) 앞자리에 앉아
스승의 언행(言行)을 서술(敍述)했다. 이조참판 긍암[이돈우]ㆍ척암[김도화]ㆍ이재[권연하]ㆍ신암[이만각]ㆍ서산[김흥락] 등과 교유했다.[행장]
현파 강한규[姜漢奎]
송서가 무후하여 또다시 법전 문중의 우와공 석의 둘째 아들 만대옹[필응]으로 입양계대 하였다. 현파공[강한규]은 만대옹[필응]의 맏아들이다. 자는 한오(漢五). 호는 현파(玄坡). 1810년에 출생하였다. 풍채가 괴위(魁偉)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효우가 극진하였다. 조부 송서에게 글을 배웠다.
1848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임금이 충현(忠賢)이 있는 자손과 학행으로
덕망이 있는 선비를 찾아 기용할 때 태릉참봉에 기용되었다.
1876년 음성현감으로 나갔다. 이 때 흉년이 드니 비축하였던 창고미를 풀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다. [행장]
1882년 도정을 거쳐 가선대부로 동지돈녕부사에 올랐다.예학에 밝았으며 영의정[서당보]ㆍ법무대신[서정순]ㆍ대신 [이순익] 등이 번갈아 찾아와 예학을 문의했으며 문의하는 것은 막히는 데가 없었다.[행장]
백초 강하규[姜夏奎]
백초공 (白樵公,강하규)의 자는 하오(夏五). 1813년에 출생하였다.
조부 송서 문하에서 수학했다.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총명이 뛰어났다.
1846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장령ㆍ집의ㆍ장악원정 등을 거쳐 1865년
병조참지에 오르고 동부승지ㆍ이조참의ㆍ대사간 등을 지냈다.
그 뒤 북청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으며 청렴하게 지냈다. 그런 까닭으로 임기를 마쳤을 때 백성들이 유임운동을 벌였다. 삼사의 청요직을 거치며 장계에 능하고 주대를 잘 하였으며 특히 홍문관과 예문관에 글 잘하는 선비로 그 중에서도 간정상명(簡精詳明)하게 글쓰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이조판서[강시영]ㆍ형조판서[장석룡] 등과 함께 구인기로계(九人耆老契)를 만들어 영남 명사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행장]
늑암 강진규[姜晉奎]
늑암[櫟庵, 문중에서는 ‘역(櫟)’자를 ‘늑’자로 읽음]의 자는 진오(晋五).
1817년에 출생하였다. 늑암은 법전 문중 생가 숙부[강필보] 후(後)로
입양계대 하였다. 늑암은 조부 송서와 과재[성근묵] 양 문하(兩門下)에서
수업하였다. 1844년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ㆍ정언ㆍ지평 등을 지냈다.
그 뒤 판관ㆍ부수찬ㆍ교리 등을 거쳐 1864년 고종이 등극하였을 때
장령으로 시사에 대하여 육조 누천언(六條 累千言)을 올렸다. 1866년
통정대부에 올라 병조참의ㆍ동부승지ㆍ우부승지를 두루 지냈다. [행장]
1873년 대사간으로 토목의 대역사(大役事)를 중지할 것을 건의하여 임금이 받아들였다. 조금 후에 예조참판에 임명되었으며 1874년 병조참판 겸
경연특진관 동지춘추관 의금부사에 전보되었다. 1881년 수신사 김홍집이
일본을 다녀올 때 중국사람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이란 책자를 고종에게
바쳤는데 그 내용 중에 일본과 조약체결을 부르짖는 대목 등에 격분하여
이만손(李晩孫) 등 수많은 영남 선비들과 함께 대궐문 앞에서 김홍집을
논죄하였고 유명한 만인소(萬人疏)를 손수 초(草)하여 임금에게 올렸다.
이일로 흥양 땅 녹도(鹿島)로 귀양 갔다가 1884년 풀려났다. 1891년 졸하였다.
경서에 밝고 문장에 능통하여 조야에 그 명성이 높았다. [행장]
자경[子敬] 강수[姜鏽)] 배위 의성김씨
의성김씨[崙壽의 女]는 자경[子敬, 강수]의 배위이다. 자경은 송서공의
증손이요, 백초공의 장남이다. 의성김씨는 학봉[김성일]의 9대손으로
성품이 곱고 외양이 아름다워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19세에 결혼하여 8년 만에 시아버지 백초가 병환으로 위독하였다. 이에 부군[강수]이
산사(山寺)로부터 경황없이 돌아와 병환 간호에 온 정성을 다 했다.
백초의 병환은 차도가 있었으나 부군[강수]이 노심초사 몸을 돌보지 않고
간병하다가 병환이 났다. 의성김씨 역시 몸을 돌보지 않고 온 정성을 다해 간병했으나 부군이 세상을 떠났다. 겨우 부군의 장례를 치렀으나 의성김씨 반생반사(半生半死)의 지경에 이르러 미음물과 녹두죽으로 겨우 생명을 부지하다가 약봉지를 들고 나가 음독(陰毒)한 후 후사를 부탁하며 부군이 운명한 지 8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의성김씨의 순열(殉烈)을 기려 유림에서 예장(禮葬)을 치렀다. 현파가 실기를 쓰고 예조판서 이돈녕이 전(傳)을 찬했다. 유림에서 통문을 돌려 순열(殉烈) 사실을 조정에 알려 정문(旌門)이 섰다.
[실기]
만산 강용[姜鎔]
만산[강용]은 백초의 셋째 아들이다. 만산은 백부 현파와 역서[유치유]
양문(兩門)에서 수학했다. 1900년 영릉참봉이 되고 천릉도감 감조관을
거쳐 통정대부에 올라 중추원의관을 지냈다. 만산은 의재와 함께 부자(父子)가 규모 있게 치산(治産)에 힘을 기울여 영남 북부 8군에 제일가는 갑부가 되었다.
만산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후 벼슬을 버리고 계성산(桂成山) 수풀이
우거진 곳 태고동(太古同)에 1910년(경술년) 작은 정자 태고정(太古亭)을 짓고 망미대(望美臺)에서 망국고신(亡國孤臣)의 한(恨)을 달래며 경사(經史)로
자오(自娛)하고 편액을 정와(靖窩)라 불렀으며 갑술년(1934) 7월 20일에
별세하였다. 향년이 89세이다. 위당[爲堂, 鄭寅普]은 정와의 망미대
시(詩)에 대해 슬프고 처량한 게 많아서 차마 끝까지 읽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행장]
석하 강육[姜錥]
석하[石下]는 백초의 제2자(子)이다. 풍자(風姿)가 준걸스럽고 위엄이 있었으며 자성(資性)이 심후(深厚)하였고 효우(孝友)가 돈독했다. 음보로 조경묘 참봉을 지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안동지역에서 창의(倡義)할 때 격문을 내걸었다. 이 격문을 보고 수천 명이 모여 들었으며 성대[권세연]가 안동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이 격문은 안동지역 유림 대표 5인의 명의로 나갔으며 이 5인 중에 일인으로 석하[강육]가 참여하였다.
[진주강씨 대동보, 경북도지]
가석 강유[姜鍮] 부자(父子)
가석은 법전 문중 생가로 양자 간 늑암[강진규]의 아들이다. 음보로 순릉 참봉을 지냈다. 가석의 아들은 석농[강해, 姜海]이다. 석농은 내부주사로 벼슬길에 나가 비서감승을 지냈다. 가석의 배위는 풍산김씨이다. 풍산김씨는 동부승지 낙애[김두흠]의 딸이다. 낙애의 5대 사손 김직현은 참봉공[강교원, 의재의 장자]의 사위이다.
소간[小澗] 강면[姜沔]
1862년에 출생하였다. 소간은 법전 문중 생가로 양자 간 늑암[강진규]의
손자요, 두암[강횡]의 아들이다. 소간은 내무부 주사로 벼슬길에 나가
통훈대부에 이르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규탄하는 상소를 했다.
을사 오적신의 매국 행위를 맹렬히 규탄하며 직간을 서슴치 않았다. 이로 인해 일삭(一朔)을 감옥에 갇혔으며 그 뒤 석방되었다. 이어 경술국치를 당하자 두문(杜門)자정(自靖)하였다.
소간의 배위 의성김씨는 구봉[김수일]의 후손이다. 내앞 의성김씨[줄여서 천김] 대표적인 인물은 학봉이지만 실세는 구봉[김수일]이다. 천김에 구봉은 대들보와 같은 중요 인물이다.
청계공[김진] 맏아들[김극일]이 시문으로 일세를 풍미했지만 무후(無後)하여 구봉의 아들[김철]로 대를 이어 그 후손에 인물이 쏟아졌다.
천김의 중요 인물은 거의 구봉[김수일]의 자손들이다. 특히 구봉[김수일]의 자손에 중량급 독립투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 대표 인물로 일송[김동삼]이 있다.
일송은 석주[이상룡]와 함께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에 가담했으며 서로군정서 참모장과 북경 국민대표대회 의장 등을 지냈고 통의부와 정의부 참모장으로 활약하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어 15년 형을 받고 복역 중 옥사했다. 건국 공로 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일송의 동생[김찬식]은 형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가 청산리 전투에서 왜군에 체포되어 죽었다. 건국공로 훈장이 수여되었다.
구봉[김수일]의 후손[진린]은 천거로 도사를 지냈다. 소간의 배위 의성김씨는 도사공[김진린]의 딸이다. 이 집은 후손도 많고 선비도 많으며 살림도 풍족하여 “사람 천석, 글 천석, 밥천석”이라 하여 세상 사람들이
“삼천석 댁”이라 불렀다.
의재 강필[姜泌]
의재(宜齋)는 만산의 아들이다. 의재는 학식과 덕망이 높았고 특히 효성이
지극했다. 을사조약이후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1925년 심산[김창숙]이 주도한 독립자금 모금 시 거금 3천원을 헌성하였는데 이 사실이 일제(日帝)에 의해 밝혀져 (군자금 각출, 당시 동아일보에 보도) 대구 경찰서에 구금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지난 1995년 광복 50주년을 기해 의재의 유공이 고증되어 정부로부터 독립유공 표창이 추서되었다.
[진주강씨 족보 및 보서]
5. 진주강씨와 교유한 가문들
(1). 진성이씨 퇴계 가문과 연혼(連婚)
진성이씨 퇴계 후손 하계[이가순]의 3대와 병조참판 초초암[이태순]
3조손은 진주강씨 봉화 춘양 송서[강운] 가문과 연이어 혼인을 하였다.
송서[강운]는 진성이씨 퇴계 후손 초초암[이태순]의 처남이며 하계[이가순]와 사돈간이다. 중시[강색]의 딸이 초초암[이태순]의 배위가 되었으며 송서의 딸이 이가순의 며느리가 된 것이다.
하계의 아들 복제[휘준]는 송서에게 글을 배웠다. 복제는 문과에 급제하여 동부승지, 대사간 , 호조참의, 이조참의, 대사성을 지냈다. 복제[이휘준]는 송서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그리고 연이어 백초[강하규]는
이휘택[이휘준의 동생]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했으며 이중묵을 사위로 삼았다.
그 이외 이조참판 농와[이언순]의 증손 이만일[황고 이휘정의 아들]은
현파의 손서(孫壻)가 되었다. 농와의 5대손 이원강은 참봉공[강교원, 만산의 손자]의 사위가 되었다.
[진성이씨 족보, 진주강씨 족보]
(2). 동래정씨(東萊鄭氏)와 세의(世誼)
동래정씨 경산[정원용]가문은 진주 강문,특히 춘양 파조 충렬공[강위빙]가문과 세의가 두터웠다. 경산이 충렬공의 시장(諡狀)을 썼다.
근대에 석학으로 꼽히는 위당[정인보]은
만산(晩山)의 아버지 백초(白樵) 묘갈명에서 “공의 집안과는 누대를 두고
정의가 좋았으며 公의 곤재지현(昆弟之賢)에 대하여 일찍이 측문(側聞)한 바 있고 선배(先輩)와 장자(長者)를 따라 다니면서 백초공이 자계에 능하고 주대(奏對)를 잘했다는 것과 문충공(文忠公) (위당 증조, 영의정 정원용)이 자주 칭찬을 했다는 사실을 아울러 들었다."고 하였다.
위당은 증조부 문충공이 춘양 충열공의 신도비명을 썼는데 정축년에
사군참봉(嗣君參奉) 필(泌)이 백초공(白樵公)을 위하여 그 묘소의 돌에
명(銘)을 새기도록 글을 청하였다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사군(嗣君)이 만산(晩山)의 행장을 들고와 "저의 대부(大父) 평생의 행의(行義)가 공의 글로 후대까지 소상하게 전해지게 되어 다행입니다. 원컨대 은혜를 베풀어 우리 아버님 명(銘)도 지어 불후(不朽)하게
해주소서" 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돌이켜 보니 양가(兩家)의 세의가 오래 이고 두터워 사양하지 못하였다고 했다. 또한 위당의 선친 소경공(少卿公,생부 정은조)이 만산을
형님으로 섬겼으니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느냐고 술회하였다. 그 행장에
이르기를 "만산은 어려서 단정하고 총명함이 뭇사람에 뛰어났으며
그의 어른 백초공은 백씨(伯氏),현파공(玄坡公)과 계씨(季氏) 늑암공과 함께 모두 수학지행(邃學至行)이 있다"고 하였다. "조상의 아름다운 절개
자손의 정성과 그 향기 집안에 가득하고 양가의 세호(世好)가 도타운 것은
인품으로 공경하는 때문"이라고 읊었다. [진주강씨 족보, 동래정씨 족보,
백초공 행장, 충렬공 신도비문]
(3). 노성 명재 문중과의 인연
만산[강용]은 영남에서 보기 드문,이색적인 혼사(婚事)를 치렀다.
다름 아니라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명재[윤 증] 종가와 혼인을 하였다.
충청도 명문 중의 명문이며 소론의 영수요,기호지방 사대부의 꽃인
명재 가문의 한말 종손[윤석우]의 무남독녀를 손부(孫婦)로 맞아들였다.
남인 세상인 영남에서 소론 문중과의 혼인도 특이하려니와
두메산골 춘양이라는 곳에서 기호지방의 위세등등한 명가(名家)의 종녀(宗女)를 데려오는 것은 한마디로 기이(奇異)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만산 집안이 영남 8군에서 제일가는 재산가여서 그 당시 형세가 아주 좋았다. 만산고택이 그것을 웅변하듯 그 위용을 오늘에도 자랑하고 있다.
당대의 갑부라고 하여 노성 윤증 종가(宗家)가 호락호락하게 혼인을 할
집안이 아니다. 만산이 영남 명문의 자랑인 춘양ㆍ법전문중의 선비
일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와 백부와 계부(季父) 모두 급제(대과ㆍ소과)를 하여 백부는 종2품 동지돈녕부사요 아버지는 대사간이며 계부는 예조참판이다.
당시 3형제가 벼슬과 학덕으로 그 명성이 영남을 울렸다. 거기에다가
만산의 웃대 삼형제를 가르친 증조부 송서공 영향이 컸다. 만산의 증조부
송서공[강운]은 법전 문중의 해은공[강필효]과 함께 당대 영남 진주강문을 대표하는 석유(碩儒)이다.
송서공은 사서삼경에 능통하여 안동의 명성이 있는 석학인 수정재[유정원]ㆍ소암[이병원] 등이 "북방의 강적(强敵)"이라 하였다.
또한 공(公)의 경학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세자를 가르치는 세자 시강원 필선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노성 명재 문성공(文成公)문중의 종녀(宗女)이자 만산의 손부인 파평윤씨는 의제공[강필]의 자부이다. 파평윤씨는 의제공의 다섯째 아들[강세원 ]의 배위이다. 부군[강세원]은 동경에 유학하여
공업대학을 나온 개화파 향사(鄕士)이다.
이 뿐만 아니라 춘양의 충렬공 가문은 파평윤씨 노성 문성공 문중과
세교(世交)의 뿌리가 매우 깊다. 법준 문중의 성건재[강찬]는 명재 윤증의 문인이며 해은공은 소곡(素谷, 윤광소)의 문인이다. 충렬공은 문성공 명재[윤증]의 종조부 충헌공과 함께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여
모두 강도오충(江都五忠)에 들었다.
도사공[강윤조]은 도은공의 아버지로서 노문(魯門)과 처음으로 혼인하여
척의(戚誼)를 갖게 되었다. 도은공의 아버지 도사공은 노성 문중 평와[윤탁]의 증손[윤필세]의 딸을 아내로 맞아 들였다. 팔송당의 5대손 소곡[素谷, 윤광소]이 충렬공 묘갈명을 썼으며 도은공(陶隱公) 성건재(省愆齋) 입재공(立齋公)의 묘갈명을 모두 썼다.
도은공의 손자 입재공(立齊公, 재항 再恒)은 백부 성건재에 이어 명재에게 질의문답하며 노문(魯門)과 세의를 더욱 다졌다. 소곡은 입재공(立齋公)을 종유(從遊)하였고 또한 소곡은 그 문하(門下)에서 해은공(海隱公)을 배출하였다. 팔송당(八松堂)ㆍ노서(魯西)ㆍ명재(明齋)로 대표되는 노문 삼세(三世)의 교학지규(敎學之規)와 잠은(潛隱) 도은(陶隱) 형제 자손 법전문중의 호학지풍(好學之風)과 충열공 후 춘양문중의 충의지기(忠義之氣)가 어우러져 400여년간 세의의 아름다운 꽃이 만개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