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동(2023.12.24/ 대림절 제4주일)
주님, 어서 오세요
누가복음 1:26-38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대림절 넷째 주일이다. 내일은 성탄일이다. 오늘 밤 8시에 가족촛불기도회로 모인다. 그 주제는 변함없이 ‘고요한 밤’이다.
‘고요한 밤’ 기도회는 말 그대로 성탄의 의미를 묵상하는 시간이다. 누가복음 성탄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천사의 메시지도 듣는다. 올해 우리 가운데 등장하는 천사가 누구인지 궁금하면, 꼭 저녁에 나오길 바란다.
대림절은 기다림의 절기이다. 가장 큰 기다림은 나 자신의 몫이다.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어서 오세요. 주님, 내게도 오세요.”
어제 저녁 오산 성탄장터를 살펴보고, 귀가하는데 문고리에 선물봉투가 걸려 있었다. 성탄절답게 남녀 양말상자 2개였다.
“기쁜 성탄입니다. 가족과 함께 사랑 나누시는 성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누굴까? ‘302호’ 아하! 우리 옆집에 천사가 살았구나. 오고 가는 인정과 친절이 반갑다.
성탄에는 기대감과 설레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아픔, 두려움, 외로움이 있다. 내 마음의 빈 자리를 예비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 간절한 소망 위에 주님 오세요. 우리와 함께 하세요. 그런 성탄이 되길 바란다.
1)
대림절 넷째 주일에 켜는 마지막 초는 천사들의 초이다. 누가복음 성탄 이야기에는 네 차례 천사가 등장한다. 그 주역은 가브리엘로,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위대하시다’이다.
먼저 가브리엘은 역사의 갈림길에서 시대의 징조로서 부름 받은 세례 요한의 출생을 예고한다. 아버지 사가랴의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6개월 후, 천사 가브리엘은 갈릴리 나사렛 동네의 처녀 마리아를 찾아간다.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26).
많은 화가들은 메시지를 전하는 천사 가브리엘과 몹시 놀라고, 이어서 겸손히 귀 기울여 듣는 마리아를 한 장면에 담았다.
유명한 이 장면은 ‘수태고지’라고 부른다. 시모네 마르티니(1333)의 시에나 대성당 제단화를 비롯하여 15세기 프라 안젤리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보티첼리, 17세기 초 엘 그레코, 카라바조, 18세기 외젠 들라크루아, 19세기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등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화가가 그렸다.
오랜 기다림을 반영한다. 그 여운이 얼마나 긴지, 뜨겁다.
대가들의 작품은 하나님의 방문을 경험한 이들이 겪는 공통된 반응인 놀라움과 두려움, 경이로움을 담고 있다. 마리아는 갑자기 임한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두려웠다.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유명한 작가 오 헨리의 단편 ‘대주교’는 이를 풍자한다. 대주교는 날마다 성전에서 기도했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그날 아침도 변함없이, 습관처럼, 일용할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뜻밖에도 하나님이 대주교에게 대답을 하셨다. 그 순간 대주교는 그만 너무 놀라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내용이다. 습관적인 기다림을 풍자한 이야기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와 문안하였다. 마리아를 방문한 천사는 엄청난 인사를 전한다.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28).
마리아가 놀란 것은 천사의 등장이지만, 정작 그가 놀란 것은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는 인사 때문이다. 이것은 흔한 인사가 아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랍고, 두려웠을까? 늘 그렇게 고백하지만, 정말 함께 하신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유명한 이 인사는 3중 축복을 담고 있다. 라틴어 성경은 이렇게 옮겼다. “아베 마리아, 그라티아 플레나, 도미누스 테쿰.” 유명한 아베 마리아 송가는 이 구절에서 온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를 간구한다. 성경의 주제는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이다. 임마누엘, 예수님의 이름이다. 사람들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고백한다.
그런데 정작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는 인사를 들을 때에 얼마나 놀라울까? 일상의 평온을 깨고 하나님이 내 삶에 개입하신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두려울 것이다. 마리아는 궁금했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우리도 입으로는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한다. 그러나 정말 함께 하심을 믿는가? 내 삶 속에서 고백하고, 그렇게 동행하심으로 사는가? 얼마나 당당할까?
2)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일러준 메시지는 바로 아기를 잉태한다는 소식이었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30-31).
듣다 듣다 이런 날벼락이 어디 있는가? 당시 마리아는 요셉과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다. 그런데 천사는 놀라는 마리아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한다. 그는 네 아들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다. 그는 네 몸을 통해서 나오지만, 다윗의 후손으로 불릴 것이다.
정작 마리아가 놀란 것은 그런 영광 때문이 아니다. 자기 처지가 지금 아기를 낳을 입장이 아니다. 약혼은 약속했으나 아직 결혼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마리아는 천사에게 사정한다. 얼마나 다급했을까?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34).
역시 천사도 구구절절 사정을 말한다. 네 잘못이 아니다, 네 문제가 아니다, 네 계획이 아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일이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다, 하나님이 너를 통해 하시는 일이다. 그러니 받아들여라.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35).
풀무원을 세운 원경선이란 분이 있다. 그가 성경을 이런 말로 요약하였다.
“성경은 아기를 낳는 말씀인데 구약은 할머니가 낳았다는 말씀이요, 신약은 처녀가 아기 낳았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불가능 가운데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분이시다.
복음서는 아기 예수 잉태 사건을 두 약혼자의 행동으로 보여준다. 누가복음은 여성 마리아의 시선에서, 마태복음은 남성 요셉의 시선으로 중계한다.
마태복음을 보면 마리아의 임신 소문을 약혼자 요셉이 들었다. 그는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 결국 요셉은 ‘율법을 어길 결심’을 한다.
율법 규정에 따르면 마리아는 중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를 보호하려고 몰래 약혼만 파기하고 관계를 정리하려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성경은 율법을 어기려는 요셉을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마 1:19).
복음서는 율법을 어기려는 요셉에게 책망과 비난은 커녕, 오히려 의로운 사람이라고 추켜세운다. 이것이 복음의 의미이다.
나이든 여성들이 모여서 성경 공부를 하였다. 어떤 여성이 말하길 “난 다른 것은 몰라도 마리아가 임신한 이야기는 솔직히 믿기 어렵다”고 했다. 그랬더니 옆에서 한 친구가 하는 말이, “얘, 남편인 요셉도 가만히 있는데 네가 왜 야단이니?” 했단다.
마리아의 성령 잉태는 누구도 믿기 어려운 일이다.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밖의 방법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리아는 세상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길이 되었다.
마침내 마리아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38).
이렇듯 마리아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 되었다.
3)
마리아는 수태고지 후 목숨을 걸었다. 마리아가 책임있게 응답한 결과였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누가복음은 마리아를 최초의 모범적인 제자로 묘사하고 있다. 온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제자의 모습이다.
마리아는 처녀로서 아기 출생이란 고통을 감수하였다. 처녀 마리아뿐 아니라 어머니 마리아는 지혜로웠고, 강인하였다. 늙은 어머니는 아들을 먼저 십자가에 앞서 보낸 아픔을 겪었다.
마리아는 모든 어려움과 아픔과 슬픔을 감내하며 하나님의 길을 예비한 모든 이들의 어머니였다. 그래서 아픔과 슬픔, 두려움을 지닌 모든 이들이 어머니를 대하듯, 그를 의지한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위대한 순종 때문이었다. 마리아는 자신뿐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해 구속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바로 자신의 위기 앞에서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한 순종, 순복, 순명 때문이다.
우리 역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 내게 가장 큰 복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임을 믿는다. 그런데, 정말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목격할 때에 얼마나 놀라울까?
내가 훌륭해서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 내 의지 때문에 스스로 믿음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이끌어 주셔서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는 뜻이 바로 그 의미이다.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다. 내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일깨워 주신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는가?
부르심을 받는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 속뜻은 그동안 밥만 먹고 살던 사람이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서,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실천적으로 새로운 삶의 차원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일어난 일에 대해 소화가 되지 않을 경우, 밤을 새워가며 곱씹는다. 이제 대림절 넷째 주일을 맞아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응답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주여, 어서 오세요. 주님, 내게로 오세요.”
그리하여 은총의 삶을 기대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여러분이 되길 소망한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으로 내 삶의 위기를 복으로 바꾸고, 믿음으로 자신의 삶을 뒤집는 그런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