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모두가 반가왔고, 좋았다. 보고 싶은 사람들 몇몇이 함께 하지 못해 아쉽긴 했지만, 어차피 세월은 흐르고,
가고 또 오는 것을 어쩌겠는가. 커다란 나무처럼 자리를 지키는 어느 수도사제의 말처럼, “물결이 흐르면 뒤이어
다른 물결이 오듯, 사람들이 떠나가면 또 다른 사람들이 와 그 자리를 채웁디다.”
부여의 궁남지, 연꽃 축제가 한창이다. 논을 일구고 연꽃을 심었단다. 진흙 속에서 고고히 피어내는 그윽한 자태의
연꽃은 아니었지만, 참 여러 종류의 연꽃을 만났다. 축제에 맞춰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이렇게 사람들에 치이다 보면
제 아무리 아름다운 곳도 그 북새통에 어김없이 아름다움을 바라 볼 수 있는 마음이 닫혀진다. 본다는 것은 눈만은
아닌가 보다. 마음이 닫치면 눈도 닫치고 마는가보다.
고창을 지나고 인공 조림을 했다는 축령산의 편백숲을 찾아 나선다. 장성 영화마을 편백숲 입구에 들어 설 무렵 빗방울이
차창을 흐르며 지나가고 있었다.
우산을 두드리며 내리는 빗줄기는 갈수록 거칠어 진다. 숲이 조성된 인공림의 숲길은 자동차가 다닐 만큼의 포장된 도로,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그 길은 삭막했겠지만 울창한 편백나무 숲 사이로 포장된 길은 빗 속을 걷기엔 안성맞춤. 나무 위로,
길 위로, 우산 위로 떨어지는 갖가지 빗소리는 어우러져 거대한 자연의 교향곡이다.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이 되기엔 너무
웅장했고,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이 되기엔 빗소리의 비중이 너무 클 것 같기도 하고. 새들은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 어디로
숨어들었나, 귀를 기울여도 새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온 몸으로 젖어드는 빗 물 속에 왜 그리도 마음은 홀가분하니 날
아 갈 것 같았을까? 후득후득 우산 위로 떨어지던 빗방울 소리에 숨 죽이며 숨어있던 '내 안의 모든 나’ 가 무엇인가 속살대
며 올라 왔었는데, 어느새 거친 비바람 속으로 모두가 날아가 버렸는가?
빗 속에 홈빡 젖은 교복을 입고, 킬킬대는 우리들을 불러 들여 따듯한
차 한 잔과 능금 한 바구니를 차려주던 자하문 밖 (지금은 부암동이라
하던가) 어느 마음씨 고운 아주머니의 모습도 이 빗방울이 데리고 온
추억의 사진 한 장.
비 속에 던져져 걷는 그 길은 걸음 걸음이 온통 그리움이고, 추억이다. 살아가며 만났던 소중한 사람들, 사진 첩 속에 곱게
곱게 접어 둔 그 사진들이 왜 이 비 속에서 그리도 다정하게, 그리움으로 다가 오고 있을까? 울긋불긋 색색으로 펼쳐진 우산
속에서 함께인듯, 혼자인듯, 걷고 있는 도반들의 뒷모습에서 때로는 외로움이, 때론 활기참이 읽혀진다.
푸른 보석처럼 빛나던 길 옆 보랏빛 도라지 꽃도, 신비스런 푸른빛 세심원의 수국과 작은 꽃밭의 붉은 접시꽃, 옹기종기
피어있는 진분홍의 채송화,그 어느 것하나 미소와 감탄 없인 만날 수 없는 이 길위에서 만나는 귀한 친구들. 홈빡 비를
맞으며 더욱 싱싱히 그 빛이 살아나는 꽃들은 ‘아니 온 듯 다녀 가소서’란 주인장의 뜻을 이 길손들에게 대신 전하고 있는
듯도 보이고. 세심원 작은 마당에서 바라 보이는 먼 산 능선이 비구름 속에서 아득하다.
<춘원 임종국 선생의 추모비>
평생 갖은 것 모두 편백나무와 삼나무를 심는데 바치고, 마지막 산 속에 움막을 짓고 살다 갔다는 춘원 임종국 선생, 1956
년부터 20여년에 걸쳐 축령산 일대 170여만 평에 279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니 계산하자면 하루에 약 400개를 쉼없이 심
었다는 얘기다. 그 양반 지금쯤 천국에서 당신이 하신 일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보시였을까, 알고나 계실까?
청량한 나무 향을 맡으며 이 푸르름에 온 몸과 마음이 청정해지고 있는 이 사람들을 본다면 어떤 마음일까. 하느님이 그려
준 ‘참 잘했어요.’ 동그라미 다섯 개를 들고, 하늘나라 어디쯤에 또 나무를 심고 계실지도 몰라. 우리는 모두 행복했었다.
버스의 의자 까지 비에 젖은 옷으로 홈빡 젖어 버리긴 했지만.
깜빡 한나절 빗속을 걷는 꿈이라도 꾸고 났던가, 논산의 명재 윤증 (조선조 숙종때의 학자-평생을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던
<청라언덕의 사진에서>
청빈한 선비) 고택을 찾았을 땐, 빗방울은 잦아 들고 있었다. 요란하지 않은 양반집 고택에서 단아함과 겸허함을 읽을 수 있
었다. 300년동안 씨간장으로 그 맛을 이어 온다는 뒷마당 수백개는 됨직한 장독대에서는 안주인의 정갈함과 노고가 묻어 난
다. 이런 저런 많은 고택들을 길 위에서 만나긴 했지만, 유난히 포근하고 아늑하다. 누 마루에서 보이는 넓은 정원엔 어디
하나 마음 가지 않은 곳이 없는 섬세함이 돋보였고, 수백년된 뒤뜰 언덕의 느티나무는 그 의젓함이 이 댁 양반을 닮았던 게다.
생이가래와 개구리밥으로 덮였던 연두빛 연못, 연못가 배롱 나무의 고고한 자태, 대청 마루의 분합문과 대청 끝의 팔각형의
기둥,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맵시자의 사진에서>
시어머니 방과 대청을 사이에 둔 새댁의 방 뒷 문 앞에는 새댁만의 작은 꽃밭이 있다. 시집살이 새댁의 마음을 달래 주고 싶은
배려 였을까. 뒤뜰 담 아래로 조롱조롱 꽃이 핀 봉숭아 꽃이, 꽃은 지고 없지만 싱싱한 잎이 무성한 목단꽃도 한켠에 심어져
있다. 무심한 눈빛으로 오고 가는 이들을 바라보던 90이 넘으셨다는 종부 어른도, 언젠가 그 먼 옛날엔 새댁이었던 시절이 있
었을 게고, 이 작은 꽃밭을 바라보며, 시집살이의 고단함을 달래곤 했겠지. 종부의 눈빛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읽는다.
돌아오는 길, 인심 좋은 웃음과 몸짓으로, 구수한 음식을 차려주는 ‘금수강산’아주머니도 만나고,
혼자선 도저히 할 수 없는, 빗속을 헤집고 다닌 특별한 여행, 온전히 나를 빗속에 던져줬던 정말 멋진 여행길이었다.
<무심재님의 사진에서>
<세심원의 수국>
첫댓글 참~한 여행을 했네... 멋진글과 빗속의 좋은 경치, 낭낭한 음악,,, 나도 여행에 함께 한 듯 행복감이 스며든다.. '함께인 듯, 혼자인 듯...' 네 맘 알 것 같애...
이러며 살고 있습니다. ㅎㅎㅎ, 제 멋에 겨운 것도 종류가 참 여럿이지요?
김미자씨에 어울리는 여행이며 고택을바라보는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의표현이 잘어울림니다
홍영균씨, 댓글을 올려주시니 이제 정말 컴 박사십니다. 하루 아침에 혜성처럼 나타나셨습니다. 감사하고, 자주 뵐께요.
연꽃 사진들이 걸작품이네요...연꽃 종류도 이렇게 다양한지 몰랐구요..
더 많아요. 누구 말대로 하늘만큼 땅만큼은 아니지만 그 날 제가 본 종류만해도 10가지가 더 되는 것 같았답니다.
비 안맞으면서 공짜 여행 잘 하고 갑니다.
비는 맞는게 더 좋은건데. 언제 또 비 내리면 우리 번개팅할까?
감미로운 음악, 가슴 적셔 주는 빗길 여행기 잘 읽었어.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고 있지. 카페에서 만나니 더욱 반갑고. 이렇게라도 자주 만나자.
좋은 사진, 아름다운 글 잘 봤습니다. "아니온듯 다녀가소서" 자연을 찾는 사람들이 꼭 지켜아할 원칙이지요.
누구라도 묵어갈 수 있는 곳이었답니다. 주인장은 한번씩 들러, 딸 독에 쌀 채워 넣고, 차잎 떨어지면 다시 차 채워 넣고, 여행을 하다보면 마음이 자유로운 사람들을 드물지 않게 만나지요.
마음이 열려있어 아름다운 자연이 그토록 정겹게 자리하는구려. 연꽃도 채송화도 이름모를 꽃들도 모처럼 즐거워 했겠구려. 감동적인 글 감사합니다.
손자의 새로운 어록은 나오지 않았나요? 기다리고 있는데. 지난번 밭에서 갖고 온 비듬나물, 된장에 맛있게 무쳐 먹었답니다. 깻잎은 기름에 볶아 먹었고. 덕분에 식탁이 며칠 풍성했습니다. 늦었지만 감사를 드립니다.
사진도 글도 잘 보았습니다. 배경음악이 넘 넘 좋습니다. 잘 보고 잘 듣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할 뿐입니다. 격려해 주고, 함께해 주는 친구들이 있어 살아 갈 힘을 얻고 있습니다.
빗줄기 속, 혼자 가는 길, 외로움은 보이지 않고 여운이 가득합니다.
오랜만에 들어오니 댓글이 있네요. 건강하시지요? niitech씨도 좋은 글 많이 올려 주세요.
예술가다운 면모가 평소에도 듬뿍 느껴지는 미자씨이지만, 이번 사진에 담으신 예술성에는 감탄,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이런 예술 작품들을 올려 주셔서 칭구들의 정서에 큰 보탬이 되시기를....
웬 과찬을! 댓글 올려 주시면 덕분에 안부를 전할 수 있어 좋거든요. 요즘도 봉사 많이 하고 계시지요? 그 면에 조언을 구하고 싶이 있는데. 한번 연락 드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