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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 요 원문보기 글쓴이: 자미원
원효는 다소 상기된 마음으로 대문을 들어선다. 요석공주가 거처하는 집을 방문하는 일은 자신에게 아무런 걸림도 줄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막상 사랑채 대문간 오른쪽에 놓여 있는 석조에 홍련이 피어 있는 것을 보면서부터는 가슴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102-7 요석궁 사랑채 대문간의 연꽃] 인도에서는 연꽃을 ‘라지브’라 하는데 이는 '신神을 낳는 어머니'라는 뜻이다. 후일 요석공주가 설총을 낳은 점을 생각하면 여기에 연꽃을 놓아둔 일은 참으로 절묘한 배치다. 연꽃은 처렴상정 (處染常淨)하다. 더러운 물에 살지만, 그 더러움을 조금도 자신의 잎이나 꽃에 묻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불자(佛子)가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아름다운 신행(信行)의 꽃을 피우는 것과 같고, 보살(菩薩)이 홀로 자신의 안락을 위하여 열반의 경지에 머물러 있지 않고 중생의 구제를 위하여 온갖 죄업과 더러움이 있는 세계로 뛰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가 하면 연꽃은 뿌리부터 줄기까지 텅 비어 있어 진공묘유(眞空妙有)를 보여준다. 원효가 요석궁 사랑채 대문의 연꽃을 지나치는 순간에 연꽃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위와 같은 진언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홍련;곰돌이님 작] 원효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경북 경산군 자인면 지역의 불지촌(佛地村)에서 태어나 10살에 머리를 깎은 이후 이제 나이 40줄에 들었으니 불법은 물론이려니와 수행에도 자유 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전주 고대산에 주석하고 있는 보덕화상(普德和尙)에게서 <열반경>, <유마경> 등을 수학하였고, 영취산 혁목암(靈鷲山 赫木庵 : 지금의 통도사 산내암자)의 낭지화상(郞智和尙)에게서도 사사했으며, 당대 최고의 신승인 혜공화상(惠空和尙)에게서도 사사를 했던 터라 자부심도 대단하였다. 뿐만 아니라 분황사에 주석하면서 태종무열왕에게 자주 진언을 하는 위치에 있었으니 이제 비록 요석공주의 거실에 든다 해도 공주와 차 한잔을 하면 족할 일이지 공주의 투정에 마음이 심란해지거나 색즉공(色卽空)이 색즉만(色卽滿)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라 하였다. 한 번은 공주가 그를 위해 승복과 모란꽃을 선물한 적도 있었으니 공주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가 하면,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공주의 남편과는 화랑의 일원으로 함께 전투에 참전 하기도 하였으니 공주를 여인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할 일이라 여기고 있었다. [홍련;곰돌이님 작] 한편, 요석공주는 그게 아니었다. 남편 거진랑이 전사한 이래 접어놓았던 여성은 원효를 생각할 때마다 홍련의 아슴푸레한 붉은 빛으로 화해 그에게로 은은하게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조숙녀로서 이런 심사를 입밖에 낼 수는 없는 일이며, 더군다나 아버지 태종무열왕의 정치적 입지에 악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스캔들을 일으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왕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왕비는 딸자식의 불행을 위로하느라 늘 마음을 써오던 터에 근자에는 요석공주가 심한 우울증에 걸려 있고 그 원인이 원효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왕에게 귀띔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왕으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잘못하면 나라의 왕사지재(王師之材)를 그르치게 할 수 있고, 공주나 자신도 세간의 입방아에 시달릴 일이기 때문이었다. 정염으로 가득 찬 여성의 집념은 때로 세상을 뒤집기도 한다. 공주의 병은 깊어만 갔다. 눈 먼 장님 처럼 원효에 이르는 길에서 허우적거리기만 하였다. 공주 자신도 그 길에서 벗어나 현실적이고 안전한 길을 찾으려 애를 써봤으나 허사였다. 이제 더 이상 방치했다간 그나마 한 치 남은 심지도 꺼지고 말 지경에 이르렀다. 왕에겐 대안이 없었다. 공주를 살리려면 원효에게 기댈 수 밖에 없었다. 원효를 불러 국사를 논하면서 넌즈시 의중을 물었으나 원효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제 공주의 육신에서 타닥타닥 힘들게 타는 불꽃이 사그러져 가는 것을 지켜보는 수 밖에 없었다. 이러다간 요석궁 현판도 내려야 할 판이다. [요석궁 현판 ★편집시 삭제] 이 때, 담 밖에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선 금강 역사의 단호한 기운이 우러나오고 있었으며 우렁차기 이를 데 없어 장안이 숨을 죽이고 들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원효였다. 誰許沒柯斧(수허몰가부)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주려나 我斫支天柱(아작지천주)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베어내리 사람들은 아무도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만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아마도 이 스님은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賢人)이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있으랴.” 태종무열왕은 정치 9단이다. 작은 나라로 삼국을 통일시킨 인물이 아닌가. 그에게 있어 '요석공주 살리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원효도 그랬다. 천지만물 간에 죽여서, 아니 죽도록 방치해서 좋을 목숨은 없는 법이다. 하물며 인간임에랴, 공주임에랴! 왕과 화상은 무언의 말을 통해 서로의 의중을 잘 헤아리고 있었다. 원효의 공력은 삼일 만에 공주의 기력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삼십여년 단련시킨 아킬레스건을 다쳤다. 요석궁에서 돌아온 원효는 환골탈태(換骨奪胎)를 해야겠다고 발원했다. 그는 처소인 분황사 무애당을 나와 소성거사라 자칭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태도를 보였다. 고려시대 문장가인 이규보 말대로 “머리 깎고 법복 입으면 원효이고, 머리 기르고 평복 차림이면 소성거사다. 이렇게 다르게 보이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법복과 평복의 두 모습이, 다만 한마당 연극일 뿐이었다.” 그리곤 문무왕 1년(661)에 후배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을 떠났다. 원효는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요석공주를 떠난 것이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 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 원효가 착잡한 마음으로 걸어 들어갔을 사랑채에 이르는 길 좌측에는 나즈막한 담장이 쳐져 있다. 담장 위에는 녹색의 두텁고 싱싱한 담쟁이덩굴의 이파리들이 햇빛을 받아 번쩍이면서 고개를 쳐들고 기세좋게 뻗어간다. [☞102-3 사랑채에 이르는 길] 덩굴 끝에 요령처럼 매달린 아주 작은 이파리들은 바람 불 때마다 벽에 부딪혀 맑은 소리를 낸다. 저 덩굴에 허리를 묶고 가만가만 저들을 따라가면 공주를 볼 수 있을까, 원효를 들을 수 있을까, 설총의 글을 쓸 수 있을까. 가다보면 담쟁이덩굴의 이파리들은 뜨거운 햇빛을 받아 이내 노랗고 붉은 단풍으로 물들 것이고 덩달아 나도 색깔이 변할 것이다. [담쟁이덩굴;명산자이님 작 ★편집시 교체] 사랑채 앞정원엔 누운 소나무들 여럿이 연못을 둘러싸고서 짙은 그림자를 물에 드리우고 있다. 연못 앞쪽에선 홑왕원추리들이 정원석을 감싸고 있고, 건너편에선 옥잠화들이 하얀 비녀를 꽂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함초롬하다. [☞102-2 사랑채 앞정원] 홑왕원추리는 의남초(宜男草;아들을 낳게 해주는 풀)라 부르기도 하고 아들을 낳고 근심을 잊어 버렸다고 해서 망우초(忘憂草)라고도 부른다. 하기사 설총을 얻은 요석공주로서는 망우초만큼 덕을 베푸는 야생화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홑왕원추리;들꽃사랑님 작 ★편집시 교체] 옥잠화는 그다지 크지도 않고 잎이 넓어 차분하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꽃대 끝에 여러 송이의 꽃이 달리는데, 아침에 피었다가 해가 지면 시든다. 그렇더라도 꽃대에서는 계속해서 꽃눈이 자라므로 초여름부터 늦여름까지 꽃을 볼 수 있다. 자라나는 꽃눈을 들여다보면 처음엔 마치 벌집의 애벌레 같이 꼬물대다가 서서히 다듬이방망이 같이 길쭉해지면서 끝이 통통해진다. 마침내 봉오리가 터지면 바람 따라 맑은 향이 후욱 퍼지고 향기 따라 나온 꽃술은 혀를 날름거린다. 원효가 이를 보았으니 망정이지 못 보았다면 요석공주의 이불은 아직도 한기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옥잠화;미류나무님 작 ★편집시 교체] 사랑채 대문 안에 들어서는데 문득 건성으로 지나친 뒷쪽의 경관이 궁금하다. 대문 기둥에 기대고 밖을 내다보니 저 앞 장독대에 장독들이 오붓하다. 장독대는 장류가 담긴 독과 항아리 등을 놓아 두는 곳으로서 용도에 따라 크기가 다르다. 가장 큰 독은 장독으로 쓰고, 중들이에는 된장·막장 등을 담아 두며 앞줄의 작은 항아리에는 고추장류·장아찌류를 담는다. [대문 밖 풍경;산그린님 작 ★편집시 삭제] 요석공주가 친히 장독대에 오를 일은 없었겠으나 굳이 사발을 들고 대문을 나가 장독대에 오른 까닭은 서기 어린 햇살을 온전히 받아 마시면서 섬섬옥수로 떠낸 간장으로 반찬을 만들어 그에게 올리는 일 만큼 이생에 태어난 보람을 느끼는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원효님이 오셨다, 그이를 위해 내 손수 정성을 들여 음식을 장만해야 한다' 장독대를 오르내리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공주의 마음은 숙성되어 갔다. [☞102-6 사랑채 앞정원의 연못 주변] 원효는 사랑채를 통과하여 안채 대문간으로 향한다. 대문간에는 공주가 영접 나와 있다. 원효는 목례를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대기는 맑고 달콤한 옥잠화향으로 가득하고 밝고 명랑한 햇살은 그 향기를 일렁이게 한다. 마당을 가로질러 기단을 올라 댓돌에 신발을 벗는다. 발을 들추고 대청에 좌정하여 사방을 둘러보니 간결하고 정결하여 맘이 흡족하다. 대청은 넓고 천장도 높아 바람이 잘 통하고 공기순환도 잘 이루어져 사람이 내뿜는 기가 승하여 뻗칠 수 있게 생겼다. 마루에는 뒤주와 귀중품을 보관하는 궤짝이 놓여 있고 그 위에는 긴 가지에 잔잔한 꽃이 꽂혀 있는 화병이 놓여 있다. 마루문 밖에는 이무기 같이 생긴 누운 소나무 하나가 대청 안을 곁눈질하며 짐짓 딴청을 부리고 있다. [☞102-1 안채 대청마루] 우리는 사랑채를 나와 작은 옆문을 통해 뒷뜰로 간다. [사랑채 옆문에서 뒤볼아 본 맷돌길;감샘님 작 ★편집시 삭제] 연못이 있고 말끔히 손질된 사랑채 앞뜰과는 달리 뒷뜰은 손질되지 않은 많은 나무들로 수선스럽다. 다만 몇 그루 누운 소나무가 위엄을 세우고 있고 배롱나무 서너 그루가 진분홍색 꽃을 피우고 있으므로써 산만함을 덜고 있다. [☞102-5 안채 뒷뜰] 배롱나무는 백일홍나무, 목백일홍 등으로도 불리는 중국 원산의 관목인데 우리나라에선 오래전 부터 집뜰, 절, 묘지 주변, 가로수 등에 관상용으로 많이 심어 왔다. 꽃봉오리가 무수히 많이 달리고 이들이 차례대로 100일 동안 계속 이어 피므로 백일홍이란 이름을 얻었다. 묘지주변에도 이렇게 오랫동안 꽃이 피는 나무를 심는 것은 조상의 유훈을 오래 기리라는 뜻이다. 요석궁의 배롱나무는 원효가 꽃피웠던 이 나라 문화를 설총이 대를 이어 크게 피어나게 했다고 이른다. [배롱나무꽃;경보님 작 ★편집시 교체] 배롱나무에 얽힌 전설에서는 한 처녀의 단심(丹心)을 기리고 있다. 옛날 어느 마을 앞바다에 머리가 셋 달린 이무기가 살았다. 이무기는 처녀를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큰 풍랑을 일으켜 고깃배들을 물속에 빠뜨렸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일 년에 한 명씩 이무기에게 처녀를 바쳐야 했다. 마을에서는 올해도 어김없이 5월 단옷날에 이무기에게 바칠 처녀를 뽑았다. 이번에 뽑힌 처녀는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오막살이집에서 살고 있는 꽃순이었다. 단옷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꽃순이는 밀린 빨랫감을 머리에 이고 냇가로 나가 아버지의 옷가지를 빨다 설움이 복받쳐 눈물을 흘렸다. 그때 숲 속에서 활을 메고 칼을 찬 늠름한 어떤 젊은이가 나와 우는 이유를 물었다. 꽃순이가 사정을 말하자 젊은이는 의연히 자기가 이무기를 처치하겠다 했다. 다음 날 밤이 되자 젊은이는 꽃순이 대신 다홍 치마와 노랑 저고리를 입고 바닷가 모래밭의 제단으로 올라갔다. 이윽고 바다에서 이무기가 나타나 젊은이에게 달려들자 젊은이는 칼을 휘둘러 이무기와 격투를 벌렸고, 결국 이무기를 죽이기는 하였으나 젊은이도 사경에 이르렀다. 마을 사람들은 젊은이를 꽃순이의 집으로 옮겼고 꽃순이는 정성을 다해 젊은이를 돌보았다. 덕분에 젊은이는 원기를 회복하였으며 나아가 두 사람은 장래를 약속하는 사이가 되었다. 얼마 후 젊은이는 백일 뒤에 돌아온다 하고는 그동안 미뤄두었던 일을 보러 떠났다. 그런데, 젊은이를 그리워하던 꽃순이는 시름시름 앓다가 백 일을 하루 앞둔 날 결국은 죽고 말았다. 다음 날 젊은이가 마을로 돌아와 꽃순이를 찾았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젊은이가 꽃순이를 바닷가 언덕에 묻어 주자 일 주일 뒤 꽃순이 무덤에서는 나무 한 그루가 자라났고 이윽고 빨간 꽃이 백 일 동안 간단 없이 피었다. 이 꽃을 보고 마을 사람들은 “꽃으로 피어났어. 그리운 님을 백일 동안 기다리던 꽃순이의 넋이..”라 하고는 나무 이름을 배롱나무라 하였다. [☞102-4 안채 뒷뜰의 배롱나무] 후일 원효가 경기도 동두천에 있는 소요산 자재암(自在庵)에서 수도하는 동안 요석공주는 어린 설총을 데리고 자재암 가까이에 거처(현재 요석궁 터로 알려진 곳)를 정하고 머무른다. 요석공주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지금의 일주문 근처로 설총을 데려와 원효가 수도하는 곳을 향해 세 번씩 절을 시키고 학업에 정진토록 하는 인고의 나날을 보낸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지금도 소요산에는 원효가 수도했다는 원효대, 원효굴, 자재암 등 원효와 관련이 있는 지명과 사찰이 남아 있다. 자재암의 전설은 원효의 인간적인 면모와 득도 과정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원효가 자재암에서 수도를 하던 어느 추운 겨울날 한 여인이 찾아와 하룻밤 묵고 갈 것을 청하자 원효는 여인을 따뜻한 방으로 들여 몸을 녹이게 한다. 잠시 후 여인이 가까이 다가오자 원효는 가까이 오지 말라 나무란다. 그때 그 여인은 "제가 스님을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님이 저를 색안(色眼)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까?"하고 반문한다. 이 말을 들은 원효는 눈이 캄캄해지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가 이윽고 정신을 차려 자신을 되돌아보니 주위 사물이 흔들림 없이 맑게 보였다. 원효는 "나는 이제 깨달았다." 하면서 여인을 바라보니 여인은 더 이상 요염한 여자가 아니라 금빛 찬란한 후광을 띈 관음보살이 되어 밖으로 사라졌다. [관음보살상도;은산님 작 ★편집시 삭제] 이후 절 이름을 자재암이라고 고쳐 불렀는데, 이는 아무 거리낌 없이 마음과 뜻을 다스릴 수 있었다는 원효의 깨달음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여기서 거리낌의 대상은 전설 상의 어느 낯선 여인(관음보살)이 아니라 요석공주였을지 모른다. 자재암의 전설은 최근 성철스님의 일화를 생각나게 한다. 성철스님은 24세에 속가의 부인이 임신한 줄도 모르고 출가했다가 경남의 관음사에 머물고 있을 때 속가의 늙은 어머니가 초등학교 3학년인 딸을 데려오는 바람에 첫 대면한다. [쇼요산 자재암;해천님 작 ★편집시 삭제] 요석궁의 야생화들은 흔하면서도 상징성이 강한 식물들로 채워져 있다. 야생화들은 사랑채 대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요석공주의 마음을 대변하거나 원효의 심사를 대신 풀어낸다. 지금은 한정식집으로 운영 중인 요석궁 안채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내내 정한의 손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첫댓글 한편의 단편소설을 읽은 느낌... 많은걸 생각하게 합니다..
저도 몇년전에 요석궁에서 저녁을 먹은적이 있거든요~그때는 예사로 보았는데???
가까이 살면서도 이런 깊은뜻을 기리기보단 단순한 볼거리와 그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만을 생각하는 곳이었는데 다음에 들를땐 좀더 상세히 살펴봐야 겠네요 좋은정보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