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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지금으로부터 507년 전 이곳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77번지에 있는 사적 362호인 연산군 묘. 조선왕조 10대 임금이었던 연산군(燕山君, 1476~1506)과 왕비인 거창군부인 신 씨 (1472~1537) 등이 안장된 묘역이다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연산군이 이곳에 오기까지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더듬어 보면서 야릇한 감회에 젖어본다
당시에는 묘의 주소가 양주군 해등촌이라 불렀다 (海等村: 지금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나의 사진 뒤로 보이는 보통 무덤과 다를 바 없는 연산군 지묘라는 석물 이외는 아무런 장식도 없다 묘역위에서 좌측이 연산군 묘와 부인 신 씨와 아래쪽에는 궁인 조 씨 및 사위와 딸의 무덤이 있다
조선 제 10대 임금인 연산군(燕山君) 휘는 융이다 성종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우의정 윤호(尹壕)의 딸로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성종의 장자로 태어났지만 낳아준 어머니는 폐출되어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될 때에 중종은 아직 태어나기 전이라 성종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그냥 세자로 삼았다 한다
1483년(성종 14) 연산군이 1494년 12월에 19세의 나이로 성종의 승하와 함께 왕위에 올랐는데 재위 12년 동안 너무도 무도한 짓을 많이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506년 에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군(君)으로 강봉 되었다 연산군이 강화교동 초가에 유배되어 있다가 동년 12월 31세로 학질로 별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재위기간은 11년 9개월 부인-2명 자녀-4남 4녀)
초장지의 월일은 미상이며 중종8년 (1513년 2월 20일)에 양주군 동면 원당리(현 도봉구 방학동)에 이장되어 지금에 이르며 폐왕비 신 씨 사이에는 2남 1녀를 두었다 한편 폐비 신 씨는 돈의정 신승선의 딸이며 연산 즉위 시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그 후 폐비로 별세하여 중종 32년 (1537년 ) 연산군 묘 옆에 묻혔다
삼국사기가 조선으로 이어지며 왕위를 폐위당한 왕들로는 목종 의종 충정왕 우왕 공양왕까지가 고려 때이고 단종 연산군 광해군은 조선시대다 이유가 어떻든 절대 권력 자리에서 타의에 의해 끌어내려진 임금들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프랑스 루이 16세는 국왕의 권력은 신(神)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왕권은 신이라고 신성시 했지만 퇴위당한 후 참수형으로 일생을 마감했다 대한민국의 왕 도 5년짜리다 어느 대통령은 탄핵으로 그 임기도 채우지 못할 뻔했다
15대 광해군과 함께 조선시대 두 사람의 폐주 (廢主) 가운데 한 사람이며 따라서 《선원계보 璿源系譜》에도 묘호와 능호 없이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재위기간의 실록 역시 《연산군일기》로 통칭된다
실록 첫머리에 있는 사평(史評)도 그의 일기에서는 만년에는 더욱 황음하고 패악(悖惡)한 나머지 학살을 마음대로 하고 대신들도 많이 죽여서 대간과 시종 가운데 남아난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포락 (烙: 단근질하기) 착흉(胸: 가슴 빠개기) 촌참(寸斬: 토막토막 자르기) 쇄골표풍(碎骨瓢風: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의 형벌까지 있어서 운운하는 말로 되어 있을 만큼 그는 조선조의 대표적인 폭군이었다고 기록이 돼있다
반면에 같은 폐주라 하더라도 광해군에 대해서는 사고(史庫)의 정비라든가 성지(城池) 병고(兵庫)의 수리 또는 대륙정책에 있어서의 현명하였던 외교정책 등을 들어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이 기록으로 전해진다 연산군은 이러한 긍정적 요소가 하나도 없게 표기하였다
연산군이 집권 시 왜인과 야인의 칩입과 약탈이 잦아지자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하였다든가 또는 변경지방에로의 사민(徙民)의 독려 기타 《국조보감 國朝寶鑑》 《여지승람 輿地勝覽》 등의 수정 등 치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무도하기 이를 데 없었던 폐정(弊政)때문에 당시의 치적도 가려 버린 것이다
연산군이 즉위초에는 아직 전조(前朝)의 치평 기운이 남아 있고 또 인재들이 남아있는 가운데 어느 정도의 질서는 유지되고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즉위 4년째 연산군은 자신의 친모의 죽음이 당시 병약한 성종 때 대신들의 권력 암투로 인해 희생된 것을 알게 되면서 5∼6년 동안에 두 차례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와 1504년의 갑자사화를 일으키어 관계된 수많은 대신들을 죽이게 된 것이다
이 두 사화는 당시 조정 대신들의 권력 암투로 빚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또한 연산군 개인의 성품이 많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점에도 문제는 있었다 무오사화는 《성종실록》 편찬 때 그 사초 중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견됨으로써 이에 관련되었던 사림학자들이 많이 참화를 당하였던 사건이다
그러나 이때 그렇게 많은 사 류들을 희생시키게 되었던 것은 본래 학자들을 싫어하는 연산군의 성품을 이극돈 (李克墩) 등 훈구 재상들이 교묘히 이용 그들의 정쟁에 이용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갑자사화도 결국은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 때문에 그토록 큰 옥사가 벌어졌던 것이라는 측면이 더 큰 비중을 가진다
즉 그의 방탕한 생활에서 오는 재정난을 메우기 위하여 훈구 재상들의 토지를 몰수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그들은 왕의 이러한 횡포를 억제하려 하였고 그리하여 여기에 또 한 번의 사화가 벌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갑자사화의 직접적인 구실은 물론 생모 윤 씨의 폐비사건으로 소급이 되지만 이 역시 그의 방종한 성품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도 부인할 수는 없다
어쨌든 이 두 사화의 양상은 모두가 참혹을 극했던 것으로서 김종직의 경우는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고 폐비 당시의 두 숙의(淑儀)는 타살을 하였으며 할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도 구타 치사하게 하였고 기타 윤필상 (尹弼商) 김굉필(金宏弼) 등의 사형을 필두로 한명회(韓明澮) 정여창 (鄭汝昌)도 모두 부관참시를 당하는 등 패륜과 무도함을 보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1498년 첫 번째 일으킨 무오사화
사건은 1498년 무오년,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1498년 실록청이 개설되고 이극돈이 실록 작 업의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점검 과정에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과 이극돈 자신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발견했다. '조의제문'은 진나라 항우가 초의 의제를 폐한 일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 글에서 김종직은 의제를 조의하는 제문 형식을 빌려 의제를 폐위한 항우의 처사를 비판하고 있었다.
이는 곧 세조의 단종 폐위를 빗댄 것으로 은유적으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나머지 상소문은 세조비 정희왕후 상 중에 전라감사로 있던 이극돈이 근신하지 않고 장흥의 기생과 어울렸다는 불미스러운 사실을 적은 것이었다.
당시 이 상소 사건으로 이극돈은 김종직을 원수 대하듯 했는데, 그것이 사초에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하자 그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달려간 곳이 유자광의 집이었다. 유자광 역시 함 양관청에 붙어있던 자신의 글을 불태운 일 때문에 김종직과 극한 대립을 보였던 인물이었다.
게다가 김종직은 남 이를 무고로 죽인 모리배라고 말하면서 유자광을 멸시하곤 했다. 유자광은 '조의제문'을 읽어보고는 곧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 윤필상 등의 훈신 세력과 모의한 뒤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내용은 뻔했다. '조의제문'이 세조를 비방한 글이므로 김종직은 대역 부도한 행위를 했어며 이를 사초에 실은 김일손 역시 마찬가지라는 논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연산군은 사림 세력을 싫어하던 차였다. 그래서 즉시 김일손을 문초하게 하였다. '조의제문'을 사 초에 실은 것이 김종직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의도하던 바 대로 진술을 받아내 자 연산군은 김일손을 위시한 모든 김종직 문하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미 죽은 김종직에게는 무덤을 파서 관을 꺼낸 다음 시신을 다시 한번 죽이는 부관참시형이 가해졌으며,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세조를 능멸하였다는 이유로 능지처참 등의 형벌을 내렸고, 같은 죄에 걸린 강 겸은 곤장 10 0대에 가산을 몰수하고 변경의 관노로 삼았다.
그 밖에 표연말, 홍한, 정여창,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 정승조 등은 불고지죄로 곤장 100대에 3천 리 밖으로 귀 양보 냈으며, 이종준, 최보, 이원, 이주, 김굉필, 박한주, 임희재, 강백진, 이계명, 강혼 등은 모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이루어 국정을 비방하고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목으로 곤장을 때려 귀양을 보내 관청의 봉수대를 짓게 하였다.
한편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손, 김전 등은 수사관(실록 자료인 사초를 관장하는 관리)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되었으며, 홍귀달, 조익정, 허침, 안침 등도 같은 죄로 좌천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부분의 신진 사림이 죽거나 유배당하고 이극돈까지 파면되었지만, 유자광만은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조정의 대세를 장악했다. 이에 따라 정국은 노사신 등의 훈척 계열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초가 원인이 되어 무오년에 사람들이 대대적인 화를 입은 사건이라 해서 이를 무오사화라고 하는데, 이 사건을 다른 것과 구별하여 굳이 사화(士禍)가 아닌 사화(史禍)라고 쓰는 것은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이다.
1504년 두 번째 일으킨 갑자사화
연산군이 어머니 윤 씨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아버지 성종의 후궁과 공신들을 처형한 갑자사화가 1504년 일어났다.
갑자사화는 폐비 윤 씨의 복위 문제에서 비롯됐다.
윤 씨는 질투가 심해 왕비의 지위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1479년 궁에서 쫓겨난 뒤 1480년 사약을 받고 숨졌다.
윤 씨가 쫓겨난 이유 중 하나가 할머니 인수대비와 성종의 두 후궁 정숙의, 엄숙의가 꾸민 음모였다는 것을 알게 된 연산군은 두 후궁을 귀양 보냈다가 후에 모두 죽여버렸다.
연산군은 어머니의 원한을 풀기 위해 성종의 후궁들과 왕자를 죽이고, 많은 신하들과 선비들을 쫓아내거나 사형시켰다. 이 사화로 성종 때 양성한 많은 선비가 수난을 당하여 유교적 왕도정치가 침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연산군이 왕위에서 폐출 된 이유
학자에 따라서는 그가 그토록 광포하고 난잡스러운 성품을 가지게 된 동기를 주로 생모를 잃었던 사실에서 찾으려는 경향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비교적 체통을 유지하고 있는 실록 《연산군일기》에서도 그는 원래 시기심이 많고 모진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자질이 총명하지 못한 위인이어서 문리(文理)에 어둡고 사무능력도 없던 사람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리하여 당시의 정계와 연산군과의 사이에는 부지불식간에 갈등이 일어났고 여기서 그는 문신들의 직간(直諫)을 귀찮게 여긴 끝에 경연과 사간원 홍문관 등을 없애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을 하였으며 기타 온갖 상소와 상언 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도 모두 중단시켜 버렸다
당시로서는 가장 패륜스러운 일로 생각되던 이른바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라는 단상제(短喪制)를 단행한 일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성균관 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선종(禪宗)의 본산인 흥천사(興天寺)도 마구간으로 바꾸며 민간의 국문투서 사건을 계기로 한글의 사용을 엄금한 일이 있고 기타 이러한 조치들과 관련되었던 이야기들이 무수히 많다
어쨌든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심은 소란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1506년(연산군 12) 9월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등의 주동으로 연산군 폐출운동이 일어남과 함께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晉城大君)이 옹립되니 이것이 곧 중종반정이었다
연산군이 사랑한 여인 장녹수(張綠水) (?-1506)
연산군의 총희(寵姬). 본래 제안대군(齊安大君)의 가비(家婢)로 대군(大君)의 가노(家奴)에게 출가하여 자식 하나를 두었고, 뒤에는 가무(歌舞)를 익혀 이름을 떨쳤다. 나이 30이 되었어도 용모가 뛰어나 연산군에 발탁되어 총애를 받았고, 내명부(內命婦) 종 4품 관작인 숙원(淑媛)에 피봉, 무수한 금·은·주옥·노비·전택(田宅) 등을 하사 받았다. 연산군이 비록 격노하였더라도 그녀를 보면 즉시 희색을 띨 정도였다.
왕을 어린애 다루듯 하였고 모든 상형(賞刑)이 그녀의 입에서 행하여졌다. 1503년(연산군 9) 종 3품인 숙용(淑容)에 봉하여지고 이듬해에는 그녀의 집 주변 민가를 모두 철거, 선공감(繕工監)으로 하여금 새로이 단장시켰다. 1506년 오빠 복수(福壽)와 자녀들을 모두 양인신분으로 올리고, 관선(官船)을 이용하여 평안도 미곡 7, 000석을 무역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때 참형(斬刑)에 처하여지고 적몰가산(籍沒家産)되었다
ніч яка місячна(밤의 달빛)/우크라이나 민요/Ocarina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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