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수
『채식주의자』(창비 2007)의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과 함께 화제가 되고 있는 작품이 한강의 또다른 장편 『소년이 온다』(창비 2014)이다. 10여개국에 판권이 팔려 번역 작업이 진행 중이고,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에서는 이미 번역판이 출간되었다고 한다. 올해 1월 영국에서 출판된 『소년이 온다』의 역자 역시 번역자로서 이번 상을 공동 수상한 데보라 스미스(Deborah Smith)인데, 현지 독자들의 반응이 좋은 모양이다.
두 소설 모두 넓게 보면 공히 ‘폭력’의 테마를 다루고 있고, 한강 특유의 섬세한 문체와 복합적인 시선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채식주의자』가 특정한 역사적·사회적 배경에 국한되지 않는 좀더 보편적인 이야기의 맥락을 구축하면서 폭력의 트라우마에 연루된 한 여성의 실존적인 고통을 부각한다면, 『소년이 온다』는 아직도 진행형인 ‘5월 광주’의 상처와 고통을 정면에서 다루며 분단국가 한국 민주주의의 굴곡진 역사를 생생하게 현재화한다는 점에서 두 작품 사이의 진폭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한강의 작가적 역량이 그만큼 넓게 자리하고 있다는 의미가 될 텐데, 두 작품에 주목한 데보라 스미스의 안목에 놀라게도 된다.
중요한 것은 개별 작품의 문학적 성취
흔히 한국문학의 해외 소개와 관련해서 세계문학의 무대에 수용될 수 있는 ‘한국문학의 보편성’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 논의에 암암리에 전제되어 있는 위계적 발상도 문제일 테지만, 어떤 특정한 경향이나 몇가지 특질로 환원될 수 없는 한국문학 속 개별 작품들의 고유한 문학적 성취나 새로움이야말로 최대치의 ‘보편성’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한강의 사례는 새삼 확인해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도 한강의 영예는 무엇보다 작가 개인의 영예여야 마땅하다. 작가에 따르면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는 1997년에 발표한 단편 「내 여자의 열매」로부터 자라나왔다고 한다. “한 여자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식물이 되고, 함께 살던 남자는 그녀를 화분에 심는 이야기였다. 언젠가 그 변주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 했다.”(‘작가의 말’) 이야기와 상상력의 숙성 과정을 거쳐 세편의 연작소설로 출간된 게 2007년이니 십년이 걸린 셈이다. 작품을 쓰는 동안에는 손가락 관절과 손목 통증으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릴 수 없는 상황이어서 손으로 글을 써 타이핑을 부탁하거나 볼펜을 거꾸로 잡고 자판을 눌렀다는 고백도 나온다.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에는 작가 자신이 거의 등신대(等身大)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나 1980년 1월 서울 수유리로 온 소녀는 예전 자신의 광주 한옥집으로 이사 온 중학생 소년의 죽음에 대해 듣게 되고, 생각한다. “일가친척 중 누구도 다치거나 죽거나 끌려가지 않았다. 다만 그해 가을 나는 생각했다. 차가운 장판 바닥에 배를 대고 엎드려 숙제를 하던 방, 그 부엌머리 방을 그 중학생이 쓰지 않았을까. 내가 건너온 무더운 여름을 정말 그는 건너오지 못했나.” 소녀는 이태 뒤 광주학살 사진집을 어른들 몰래 보게도 된다. 그러니 이 소설은 그 소년을 찾아가는 30여년 긴 시간의 여정이기도 한 셈이다. 관련자료를 읽다 악몽에 쫓기면서도 디지털 계기판의 연도와 날짜를 시종 80년 5월의 그 날짜로 맞추어두었다는 대목에서는 한편의 소설을 쓰는 일의 지난함, 치열성과 엄숙함을 실감하게 된다.
좋은 문학작품이 열어놓는 대화의 공간
문학상은 작품에 대한 공개적인 인정이기도 하거니와 적지 않은 경제적 보상도 따른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일종의 축제마당 같은 것으로 좋은 문학작품을 향유하는 데 대한 한 사회의 감사와 존경, 격려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일정한 문학적 수준에 대한 공감과 합의야 가능하다고 해도, 문학작품 낱낱의 우열을 매긴다는 것은 애당초 무망한 일이다. 문학상의 결정 과정이 불가피하게 경쟁의 형식을 띤다고 한들, 그 축제의 성격 안에서 이해할 일이겠다. 국제적인 문학상이라고 해서 수상자나 수상작품이 한 나라의 문학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다. 국제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문학상의 수상자로 한강과 그녀의 작품이 호명된 것이 우리에게는 두루 기쁘고 축하할 일이고 한국문학의 경사인 것도 분명하지만, 소위 ‘한류’와 같은 발상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보다는 서양문학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그것도 주로 일본이라는 경유지를 통해) 출발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 근현대문학의 짧은 역사 안에서 한국의 문학인들이 힘들게 일구어온 성취들을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그간 한국문학번역원이나 대산문화재단 같은 곳에서 한국문학의 해외 소개를 위해 노력해온 시간도 물론 만만치 않다.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연간 영문 문예지 『아젤리아(AZALEA)』는 벌써 통권 9호째다(한국 YBM의 국제교류진흥회International Communication Foundation에서 재정을 지원한다). 한강을 포함해서 한국문학에는 좋은 작가, 좋은 작품 들이 많다. 이번 수상이 한국문학에서 멀어진 독자들이 작가와 작품을 다시 찾고, 다시 읽는 계기가 되길 바랄 뿐이다.
『채식주의자』를 다시 읽으면서 전에는 잘 잡히지 않던 지점에 눈길이 갔다. 육식을 거부하고 나무가 되기를 꿈꾸다 죽음에 이르는 주인공 영혜는 정작 세편 연작소설에서 한번도 화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는 별 말도 없다. 남편, 비디오아티스트인 형부, 언니 인혜, 이 세 사람의 시선과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폭력의 악몽에 시달리는 영혜의 이야기를 보고 듣는다. 폭력에 대한 영혜의 거부와 저항은 자신의 몸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견 수동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영혜의 엉덩이에 있는 몽고반점이 형부에게 관능적 욕망을(예술적 욕망과 함께) 불러일으키듯 그녀는 결코 수동적이고 조용한 존재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세명의 화자는 영혜의 낯선 욕망 앞에서 무너지고 패퇴한다. 화자의 순서는 정교하게 구축된 이 연작소설의 서사적 구조이기도 한데, 영혜의 악몽이 세 화자를 거쳐오는 동안 그들은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튕겨져 나간다. 거식증으로 죽어가는 동생 영혜를 싣고 달려가는 구급차 안에서 인혜는 그제야 사태의 진상에 도달한 듯하다.
조용히, 그녀는 숨을 들이마신다.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221면)
이 마지막 연작의 제목은 ‘나무 불꽃’이다. 생각해보면 폭력성에 대한 질문은 이 소설에서 겹으로 접혀 있다. ‘식물성’ 혹은 ‘나무-되기’는 대안적 대답의 자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그건 너무 손쉬운 구도였을 것이다. 물론 이건 나의 어설픈 읽기일 뿐이다. 좋은 문학작품은 매번 독자에게 대화의 공간을 열어놓는다. 한국문학에 담긴 문학적 표현의 가능성들, 상상과 성찰의 깊이가 더 많은 이들에게 열리고 체험되기를 바란다. 한강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정홍수 / 문학평론가